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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극장/1권/4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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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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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떴다 낮추 떴다 하면서 갈매기가 난다.

영민의 무릎 위에서 두 사람의 손과 손이 힘있게 쥐어진다.

조그만 고기잡이 배가 두 사람의 발 밑을 한가스레 저어간다.

「이런 데서 일생을 살아 봤음!」

「등대지기와 결혼을 하면 되지요.」

「후훗」

그 말에 유경은 소리없이 웃는다.

바위 위에 놀러나온 꿈 많은 인어(人魚)인 양 하늘과 땅이 입 맞추는 머나먼 수평선을 하염없이 유경은 바라보며

「영민씨가 등대지기가 되구……」

「유경씨가 그 등대지기의 아내가 되구……」

「월계수(月桂樹)를 찍어다가……」

「초가 三[삼]간 지어 놓구……」

「천 년 만 년 살아 봤음!」

신화(神話)를 그리워 하고 영원(永遠)을 생각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사랑하는 순간에 있어서 주의를 생각하고 현실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순수성을 모독하는 것이라 아니 할 수가 없다.

그것이 사랑의 특징인 동시에 사랑의 생리(生理)이다.

「영민씨.」

「네?」

「나 요지음 자꾸만 어린애들 처럼 하늘의 별이 세구 싶구……」

「어린애들 처럼 월계수로 집을 짓고 싶구……」

「네, 자꾸만 그래 져요. 시간을 생각함 무한(無限)을 그리워 하고 인간을 생각함 순간(瞬間)을 슬퍼해요.」

「유경씨.」

「네?」

「그런 때는 이렇게 생각하세요. 개체(個體)로서의 인간을 생각하지 말고 인류(人類)의 영원성(永遠性)을 생각하세요. 시간의 영원성만 생각하지 말고 초(秒)와 분(分)의 순시성(瞬時性)을 생각하면 되지 않아요?」

「아이, 이야기가 또 딱딱해지네! 인제 그런 이야기 그만 두기로 해요」

「아 참, 오늘의 헌법(憲法)을 위반했군요. 그럼 말랑말랑한 이야기를 합시다.」

「네. 하세요.」

「아까 유경씨가 천 년 만 년 살아 보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유경씨를 꼭 품에 껴안고 저 푸른 물결속에 뛰어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받았답니다.」

「………?」

유경은 눈이 둥그레지면서 영민의 얼굴을 덤덤히 바라보았다.

「왜 무서워요?」

유경은 머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아아뇨.」

「유경씨!」

「네?」

「나는 어쩐지 사람들이 그처럼 흔히 쓰는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담기가 싫어요. 그런 경박한 의미에서가 아니고 좀더 진실하고 좀더 아름답고 ── 그런 어휘(語彙)는 없는가요? 십배, 몇 백배의 깊은 의미가 있는 그런 말이 있으면 나는 한 번 유경씨에게 그런 말을 쓰고 싶어요.」

그러면서 영민은 흰 조개 껍질을 한 조각 주어 가지고 등뒤에 병풍처럼 서 있는 바위에다 다음과 같이 섰다.

Love(사랑)×100= ?

「자아, 여기다 답을 써 주세요.」

유경은 한참 동안 영민의 얼굴을 뚫어질듯이 정면으로 빤히 바라보다가,

「그런 어휘가 있죠.」

「그래요? 그럼 여기다 답을 쓰세요.」

유경은 방그레 웃으면서 영민의 손에서 조개껍질을 받아쥐고 다음과 같이 써 넣었다.

Love(사랑)×100= Marriage(결혼)

그날 밤이다.

유경이 보다 먼저 저녁 탕에서 올라 온 영민은 방에 불을 켤 생각도 없이 二[이]층 「베란다」에 걸터앉아서 창백한 달빛 아래서 어지럽게 부딪치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밤 바람이 몹시 분다. 낮에는 그처럼 잔잔하던 해변으로부터

「옭 ── 옭 ──」

하는, 해조음(海潮音)이 요란스럽게 들려오는 밤이었다.

부부암 바위 위에 씌어진 유경의 해답을 영민은 생각하는 것이다.

그때 발가스레 상기된 유경의 윤택있는 얼굴이 층층대를 기웃거리며 올라왔다. 세로 분홍줄이 난 파자마를 입은 유경이가 생쥐를 잡으려는 고양이 모양으로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방싯 문을 열고 사뿐 방안으로 들어 선다.

비누와 손수건을 가만히 방바닥 위에 내어놓은 유경은 우두머니 앉아서 유리창 밖으로 멀리 해면을 바라보고 있는 영민의 뒤로 걸어가서 갑자기 두 손으로 그의 눈을 가리웠다.

「………」

그순간 영민의 표정이 후닥닥 놀란다. 그러나 영민도 유경이처럼 말이 없다.

「………」

「………」

유경의 얼굴이 우스워 죽을 지경이다. 그러나 목소리를 내지 않고 웃는 것에 유경은 더 한층 자지러질것 같은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

영민도 말이 없다. 말이없는 채 두 손으로 가기의 눈을 가린 유경의 조갑지 같은 손을 덮었다. 욕탕에서 갓 나온 지극히 보드라운 조그만 손이었다.

「………」

「………」

유경의 숨 소리가 어린애처럼 쌔액쌔액 머리 위에서 들린다. 유경의 탄력성을 가진 젖가슴이 바로 자기 머리 뒤에서 몽글몽글 하였다.

그것은 실로 행복스러운 판토마임의 한 장면이었다.

유경의 손은 좀처럼 영민의 눈을 놓아 주지 않았고 영민의 손은 좀처럼 유경의 손을 놓아 주지 않는다.

「나 누군지 알아 맞치세요.」

행복스런 재롱을 유경은 부려본다.」

「거 누군지 모르겠는걸요.」

영민도 어린애가 되고 싶다.

「내가 누구 ─ 게?」

「글쎄 거 누굴까?……탄실이?」

「아아냐.」

「오몽네?」

「아아냐.」

「깜돌네?」

「나는 그런 시골뜨기가 아아냐.」

「정자?」

「아아냐.」

「금자?」

「그런 일본식 이름도 아아냐.」

「나나?」

「아아냐.」

「마리야?」

「그런 서양식 이름두 아닌데.」

풍풍풍풍……

풍풍풍풍……

먼 해변에서 발동선 소리가 들려오는 조용한 방안이다.

「암만해두 누군지 모르겠는데요.」

「알아 맞칠 때까지 이 눈 놓아주지 않을테야요.」

「백 년 걸려두 모를것 같은데요.」

「그럼 하는 수 없죠. 백 년이라도 이러고 있는 수밖에 ──」

……풍풍풍풍 ── …… 풍 풍 풍 풍 ── 고요한 풍경이다.

그러나 두 젊은이의 영혼은 포옹전야(抱雄前夜)의 작열된 희열 속에서 자즈러질 것 같은 몸부림을 쳤다.

캄캄한 방안이다.

달빛은 창 밖에 있으되 좀처럼 방안으로 기어들지를 않고 들창 가에서만 아물거린다.

대자연의 축복 받은 두 젊은이의 향그럽고도 아름다운 속삭임의 비밀을 전우주(全宇宙)로부터 고이고이 보존하려는 사랑의 수호신(守護神)과도 같은 그대 창백한 달빛이여!

영민의 눈을 감긴 유경의 부드러운 손이 그 손을 덮은 영민의 손아귀 속에서 가느다랗게 경련을 했다. 그 경련을 하는 유경의 손을 영민은 부서지도록 힘있게 쥐어본다.

손 가락에 느끼는 상쾌한 아픔이 피의 순환과 함께 유경의 전신을 화려하게 감도는 것이다.

영민은 유경의 몽글거리는 탄력있는 젖 가슴을 머리 뒤에 황홀하게 감각하면서

「이 어이한 연유인고?」

하였다.

「인생은 지상명령(至上命令)인 학문도 교양도 이 순간에 있어서는 도금(鍍金)과도 같이 무가치한 것이 아니냐! 대성철(大聖哲)의 위대한 교훈도 위대한 철학도 이 순간에 있어서는 한낱 티끌과도 같은 허무한 것이 아니냐! 아아, 이 어이한 연유인고?……」

그렇다 다만 있는 것은 . 하나의 위대한 존재 오유경이라는 여인일 따름이 아닌가! 다만 하나의 위대한 존재 백 영민이라는 남성일 따름이 아닌가!

그 위대하고 엄숙한 정열 앞에 또 무엇이 있다는 말이냐?

「성현(聖賞)의 숭고함이 어디 있으며 대철(大哲)의 위대함이 어디 있다는 말이냐?」

그렇다. 인공적(人工的)인 모든 위대함이 운무(雲霧)인 양 사라지는 순간이다.

「다만 있는 것은 자연의 위대함 뿐이 아닌가! 다만 어둠과 빛과 그리고 우주의 존재를 감촉할 뿐이다!」

그때 이마의 눈을 가리웠던 유경의 손이 어둠 속에서 말없이 영민의 얼굴을 더듬기 시작하였다.

욕탕에서 옅은 화장을 하고 나온 유경의 향기로운 손이 영민의 이마를, 귀를, 볼을, 그리고 코와 입을 하나 하나씩 더듬다가 돌연 영민의 몸둥이를 격정에 휩쓸리어 뒤에서 꼭 껴안아 버리고 말았다.

「………」

「………」

말없는 순간의 계속이 어둠 속에서 고요히 흘렀다.

그러다가 영민의 상반신이 휙 돌아앉는 순간, 유경의 암사슴처럼 탄력있는 몸둥이가 휘척하고 반원(半圓)을 그리면서 영민의 힘찬 포옹 속으로 안겨 들어갔다.

영민의 폭 있는 품 안에서 유경은 죽은듯이 눈을 감고 영민이가 더듬는 대로 자기의 입술을 가만히 제공하였다.

두 사람은 말이 없다. 아니 말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다만 거기에는 방안의 어둠과 창밖의 달빛과 무한의 우주와 그리고 작열된 육체의 속삭임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