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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극장/1권/5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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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광상곡

[편집]

뒷 뜰에서 화초를 가꾸던 오 창윤이가 가위를 든 채 싱글벙글 하면서 들어 온다.

「오오, 너 왔느냐?」

「아이 참 아버지두! 뭐야요? 사람을 그처럼 벼락같이 불러 놓고 한가스레 화초만 가꾸구 계세요?」

다짜고짜로 유경이의 나무람이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아따, 넌 오자마자 아버지에게 무슨 투정이 그리 심하냐?」

대얏 물에 손을 씻으면서 하는 대답이다.

그래 투정이 요것 「 밖에 없을것 같으세요? 오램 그저 오래지, 사람이 죽는다 산다…… 아이 참, 부모는 딸에게 대해서 그처럼 몰인정해두 괜찮다는 말씀이세요?」

「허, 허, 허…… 유경이가 언제부터 그처럼 말 재주가 늘었는고?…… 허허허…… 잘못 했다. 너두 이담 무남독녀 외딸을 하나 낳아서 산 설구 물 설은 먼 이국 땅에 내보내 보면 알꺼야.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이란 금을 주구도 못 사는 법이다.」

그 말에 부인이 냉큼 나서며

「아이구, 말씀 맙슈. 유경이 생각을 몇 푼어치나 해 봤수? 눈 코 뜰 새 없이 밤낮 돌아만 댕기는 위인이 어느 틈에 딸 생각을 하시우?」

오 창윤은 부인의 말을 당황히 막으며

「아, 아, 아, 여보! 잠깐만 글쎄 잠자코 있으래두 그래?」

유경이의 일신상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아버지가 소실을 두었다는 말을 당분간 하지 않기로 약속이 된 오 창윤 내외였다.

유경이의 모난 성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의 그 상스럽지 못한 행동이 딸에게 알려지면, 아니 조만간 알려지기는 하겠지만 하여튼 집안이 한번 뒤집힐 것만 같아서 오 창윤은 오 창윤대로 면목이 없는 노릇이고 부인은 부인대로 또 남이 부끄러워서 창피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이제부터 유경이의 결혼문제에 있어서 한바탕 설교를 하려는 오 창윤은 아버지로서의 위신이 서지 않기 때문에 며칠 동안 좀 잠자코 있어 달라는 부탁을 마누라에게 한 오 창윤이었다.

그래서 오 창윤은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피곤할텐데 어서 목욕이나 하구 나오렴.」

동경서 서울까지 「임신과 섭생」을 두 번이나 되풀이 해 읽으며 영민의 생각만을 하면서 돌아온 유경으로서는 그 이상 더 나무랄 자격이 없어서

「목욕하는 동안에 맛 나는 반찬 많이 해 놔요, 어머니, 뭣 보다도 제일 먹구 싶은건 김치 고추장, 그리고 닭 찜두……알았죠?」

「오냐, 오냐.」

하다가, 어머니는

「볶음 고추장은 저번에 한 단지 보냈는데 그걸 벌써 다 먹었느냐?」

「그럼요. 다 먹구 말구요.」

「아유머니나! 넌 고추장만 먹구 살았구나?」

「후후훗……」

하다 유경은 웃었다 , . 기실 한 단지의 절반은 영민이가 먹을 것이다.

「아, 그리구 나 마늘 장아치 놔 줘요, 어머니. 마늘 장아치가 어떻게 먹구 싶은지 정말 죽을 뻔했다우.」

「아이 맙소사! 마늘 냄새가 나구 시큼시큼해서 영 먹지 않는다던 사람은 누구게?」

「글쎄 그 시큼시큼한 것이 무척……」

그러다가 유경은 후딱 입을 다물며 경계하는 눈치로 힐끔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입덧이 거의 멎어 버린 유경이긴 했으나 동경서는 구할 수 없는 마늘 장아치였다.

유경은 어머니의 눈이 무서워서 얼른 손수건과 비누를 들고 방을 나섰다.

「방에서 옷을 벗구 들어가지 않구?」

무심중 한 어머니의 말이었으나 유경은 또 한번 가슴이 덜컥하였다.

「아이, 어머니두, 누굴 정말 어린앤 줄 아시나봐?」

그러면서 유경은 바로 부엌 옆에 달린 욕탕으로 재빨리 몸을 감추었다.

아담한 대리석 욕탕이었다.

탈의장에서 유경은 옷을 훨훨 벗고 화장대 앞에서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확실히 보통 몸은 아니었다.

옷을 입었을 때는 몰랐으나 이처럼 옷을 벗고 거울에 비치어 보는 자기 밑 배가 약간 부풀어 오른 것이 판연하다.

유경은 새삼스럽게 놀라며

「글쎄, 스커어트의 허리가 약간 팽팽 하더니…」

혼잣말로 유경은 중얼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어머니가 벌써 눈치를 채지나 안았을까?」

유경은 죄인처럼 가슴을 설레는 것이다. 양복을 입고 있다가는 아무래도 탄로가 날것 같아 유리 문을 방싯하니 열고

「어머니, 나 치마하구 저고리하구 갖다 줘요.」

하고, 고함을 쳤다.

「재촉 안 한들 갈아 입을 옷 으례 갖다 안 줄라구?」

「아이 죤 어머니야. 세상에 둘도 없는 죤 어머니야.」

「어머니가 둘이 되면 큰 일 나게?」

안방에서 옷장을 뒤지면서 하는 어머니의 대답이다.

거 누구 알우 아버지 「 ? 바람 피심 둘두 되구 셋두 될는지 누가 알아요?」

「얘야, 쓸데없는 말 작작하구 어서 하구 나오너라.」

그것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니고 아버지의 목소리다.

「하하하…… 아이 우숴. 아버지, 듣고 계셨네!」

유경은 유리 문을 탁 하고 닫으면서 욕탕으로 뛰어 들어 갔다.

물을 끼어 얹고 탕 안에 들어 앉으며 유경은 물속에서 네 활개를 쭉 폈다.

미와 건강을 아울러 지닌 균형이 잡힌 육체다. 자기 육체의 아름다움을 인식하지 못하는 하나의 순진한 인어(人魚)인 양 유경은 좁다란 탕 안을 철 모르는 소녀처럼 헤매이는 것이다.

따사로운 봄 날, 고요한 바닷가에 놀러나온 사념(邪念)없는 「님프」(精女 [정녀])와도 같은 유경이었다. 그 유경이가 힘껏 물장구를 치며 한참 신이 나서 욕탕 안을 해매일 무렵에 어머니가 갈아 입을 옷을 갖고 들어 왔다.

「아이머니나!」

어머니는 입을 쩍 벌리며

「저게…… 저게 원 아직 어린애지…… 저런 걸 다 부모들은 공연히 걱정을 하지. 글쎄 저게 무슨 짓인고?」

「하하하하……아이 재밌어!」

「야아, 너 올에 몇 살이냐?」

「스물 하나!」

「열 한 살이라면 꼭 알맞겠다.」

「왜 나이 먹음 헤엄도 못 쳐요?」

「남 부끄럽지두 않나 봐 잰.」

「어디 남이 있수? 있는 건 어머니와 나와 하늘과 땅과……」

「하늘이 부끄럽지 않으냐?」

「노오, 노오!」

유경은 머리를 흔들며

「어머니, 노오, 노오 ── 란 말, 아시죠?」

「야, 노노(논어 ── 論語[논어])인지 맹자(孟子)인지 내가 어떻게 안다는 말이냐? 내가 너처럼 동경 유학을 갔었다던?」

「노오, 노오 ── 난, 그렇지 않다는 말이야요.」

「뭣이 그렇지 않다는 말이냐?」

「스물 한 살 먹은 여자가 목욕탕에서 헤엄치는 것이 하늘에 부끄럽담 하늘은 애당초부터 헤엄치는 기능을 사람에게 갖게하지 않아야 되지 않아요?」

야아 난 무슨 말인지 「 , 하나도 모르겠다. 어서 빨랑빨랑 하구 나와서 저녁이나 먹어라. ── 내 때밀어 주련?」

「때?」

유경은 후닥딱 놀랐다.

옷을 입고도 눈치를 챌까 무서운데 쪽 발가 벗고 어머니 앞에 나서? ──

「아이 어머니두! 누가 정말 어린앤 줄 아시나봐? 어머니 없어서 때를 못 밀면 동경선 마귀가 됐게요?」

「야아, 난 모르겠다. 네 맘대루 해라.」

어머니는 총총히 욕탕에서 사라졌다.

유경은 욕탕에서 가만히 생각한다.

「넉 달 전 겨울 방학에 나왔을 때는 이러한 비밀이 나에게 없었건만……」

그리고 유경은 「아다미」 온천탕에서 오늘처럼 홀로 목욕을 하던 기억을 새롭혀 본다. 남자탕에서 영민이가 혼자서 쪼르락쪼르락 물 끼어얹는 소리가 어제 같건만, 그것이 벌써 넉 달전 일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비밀을 갖지 않은 자기의 몸뚱이가 아니었던가. 어머니가 때를 밀어 주신다면 좋아라 하고 몸뚱이를 송두리채 내맡기던 자기가 아니었던가. 단지 넉달 동안에 인간의 변화가 이처럼 클줄은 정말 몰랐다.

유경은 자기 배를 가만히 쓸어 보며 먼 하늘 아래서 자기가 돌아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리고 이세상에 단 한 사람 뿐인 백 영민을 곰곰히 생각하며 욕탕에서 나왔다.

치마 저고리로 갈아 입으니 몸의 비밀이 감추어 지는것 같아서 유경은 한결 마음이 편안하다.

욕탕에서 나오는 길로 유경은 二[이]층 자기 서재로 올라 가 보았다.

여학교 시대에 쓰던 자기의 잔자부러한 도구와 서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리스트」와 「쇼팡」의 초상화가 피아노 위에 여전히 걸려 있다.

여학교 시절에는 문학 보다도 음악에 좀 더 매력을 느끼던 유경이었다. 그러나 매력만으로써, 취미만으로써 이 거창하고 거치러운 인생을 걸어 갈수 없는 유경이기 때문에 그는 문과를 스스로 선택했었던 것이다.

같은 예술 부문 가운데서도 문학은 음악 보다도 좀더 유기적(有機的)인 관계를 인생과 맺고 있는것 같았다. 일면 경박하게 보이는 유경이의 진실성은 참으로 거기 있었다.

유경의 손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독일제 八十八[팔십팔]건의 뚜껑을 열고 그 앞에 걸터 앉았다.

유경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건반을 눌렀다.

「콰아아앙…… 우르러어엉……」

피아노의 음향이 처녀 때에 듣던 그것과는 좀 다른것 같았다. 처녀 천(處女泉)의 샘물처럼 맑던 음향이건만 유경의 귀에는 어쩐지 탁하다.

「어째 그럴까? 듣는 마음이 탁해진 탓일까?」

이윽고 유경의 백어(白魚)같은 열 손가락이 흰건반 위를 달리기 시작하였다. 「멘델스죤」의 「스프링ㆍ쏘나타」다 한가스런 봄 바다. 비단결인 양 흐느적거리는 찬물결을 심볼하는 아름다운 선률(旋律)이여! 희망의 봄! 만상(萬象)의 발아(發芽)를 축복하는 희망의 봄 노래여! 유경은 이 곡조를 무척 좋아 하였다. 피아노 앞에 앉기만 하면 유경의 손가락 사이로 언제든지 흘러 나오는 곡조였건만 어찌 된 셈인지 오늘의 유경으로서는 그것으로서 만족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좀더, 좀더, 정열적인 것을 유경은 갈망하는 것이다. 작렬(灼熱)된 여름의 태양이 만물을 녹여버리는 것과 같은 정열적인 것을 갈망하게 된 유경의 변모(變貌)가 거기 있었다.

「그렇다. 봄 노래는 지나 갔다! 여름의 노래를! 여름의 노래를!」

유경은 손을 뻗쳐 「싸이드ㆍ테이블」 위에서 악보를 집어 펼쳤다.

「그렇다 이것이다!」

오선지(五線紙) 위에 약동하는 정렬의 노래 ── 「리스트」의 「헝가리안ㆍ랍쏘디 ─ 」가 바로 그것이었다.

「콰아아앙……」

유경의 손이 미친듯이 건반 위를 달리기 시작하였을 때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래층에서 들려 왔다.

「얘, 유경아, 닭 찜이 다 식기 전에 어서 내려 오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