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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극장/2권/2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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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창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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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콜」, 「가 ─ 제」, 탈지면, 「리조 ─ 루」, 「올리브」 기름 등등 ── 부장과 숙자는 순산용 약품을 약장에서 하나씩 하나씩 끄내 놓았다.

五[오]분 쯤 지나니 진통은 또 약간 멎었다. 유경은 운옥의 손을 다정스레 만지작거리며

「미안합니다.」

울먹울먹하는 목소리다.

「무얼 그런 걸 다 생각하시나요? ── 미안하기야 제가 정말……」

그러다가 운옥은 문득 입을 다물고 의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유경은 생각한다. 남들처럼 떳떳하게 어머니 옆에서 해산을 못하는 자기의 신세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떳떳한 해산이라면 어머니 아버지가 오즉이나 기뻐하실 것인가. 지금 쯤 아현동 자기 집은 떠나갈 듯이 야단법석이 되었을 것을 생각하니 유경은 어린애처럼 서러워지는 것이다.

「그렇다. 모두가 그 나쁜 사나이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유경은 뱃속에 든 어린애를 저주한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자기의 몸뚱이를 돌팔매 . 하듯이 기둥이나 벽 같은데 부딪쳐 버리고 싶은 격렬한 충동도 여러 번 느꼈다.

지나간 날 영민이와 최후의 작별을 하고 「아다미」 부부암에서 「악마암」이라는 글자를 쓰면서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먼 수평선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하마트면 자기의 몸을 출렁거리는 푸른 바닷물에 던져넣을번 했던 유경이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유경은 늙은 오오다니 의사의 말을 생각하곤 하였다.

「당신에게는 임신할 권리가 있는 대신에 해산할 의무가 있는 것이요.」

그 한 마디를 아니, 그 한 마디만을 골돌히 생각하면서 「아다미」를 떠나 다시금 「노보리」 열차에 몸을 싣고 동경으로 돌아온 유경은 그 길로 「우에노」 역에서 동북선(東北線)을 타고 일광산(日光山)으로 갔다. 대정(大正) 초엽에 젊은 철학자가 투신자살을 하였다는 「게곤」의 폭포수가 무척 그리워진 때문이다.

하늘처럼 믿었던 사나이에서 무참히도 배반 당한 유경으로서는 죽는다는 것이 조금도 무섭지가 않았다. 그러나 거기서도 유경은 오오다니 의사의

「해산의 의무」를 다시금 느끼면서 여름 한철을 보냈다.

맨 처음 어린애의 태동을 뱃속에 느끼는 순간, 유경은 대자연의 위대한 신비로움 속에서 자기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을 하늘에 감사하였다.

해산 달이 가까워 짐을 따라 유경은 점점 서울이 그리워 졌다. 아니, 서울이 그리워 졌다는것 보다도 어머니가 그리워진 것이다. 그래서 불야불야 조선으로 돌아온 것이 八[팔]월 하순이었다.

그러나 유경으로서는 참아 부모 앞에 들고 들어갈 얼굴이 없었다. 그래서 성북동에 조그만 방 한 간을 얻어 가지고 자취생활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래 또다시 유경은 진통을 느꼈다. 이번에는 무척 격렬한 진통이다.

「아이구, 엄마!」

유경은 마침내 어머니를 부르며 운옥의 상반신을 바드득 껴안았다.

「아이구, 언니 ──」

「오, 오, 착하시요! 용하시요!」

운옥은 어린애를 달래듯이 그렇게 말하며 홈빡 땀에 젖은 유경의 등을 자꾸만 쓸어 준다.

자기를 사지에서 건져 준 이 나어린 산부가 부모친척 하나 없이 이 무서운 고통을 겪는구나 하고 생각할 때 운옥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포옥 쏟아진다.

하나의 새로운 생명의 싹이 이 사바에 움터 나오는 그 순간처럼 엄숙하고 신비롭고 영광됨이 또 어디 있으랴. 전 우주(全宇宙)의 신경(神經)은 이 광영에 찬 사실에 집중되고 전 지구상(全地球上)에 불결(不潔)이 쟁화(淨化) 되는 거룩한 순간이다.

이 거대한 지구 위에서 구데기처럼 득실거리는 二十[이십]억의 인류(人類)의 그 하나 하나가 혹독한 운명의 짐을 걸머진 뭇 모성(母性)의 그 가냘픈 몸뚱이를 이처럼도 짓궂이게, 이처럼도 가혹하게 학대를 함으로써 움터 나왔다는 사실을 오오, 인류여, 그대들은 과연 얼마 만큼의 감사의 념을 가지고 돌이켜 보았느뇨? ── 한 민족, 한 나라에 비록 전승기념탑(戰勝記念塔)이나 개선문(凱旋門)은 섰을 망정 이 악착한 운명을 당신 혼자서 걸머지신 이 성스럽고도 위대한 모성의 혹사(酷使)를 감사하는 조그만 기념탑 하나를 인류는 어이하여 아직도 못 세웠느뇨? 인류여, 그대 항변이 있거든 입을 열어 말을 하라!

성탄제나 건국제(建國祭)나 전승제나 사육제(謝肉祭)에 가지는 감사의 몇 분의 一[일]을 나누어 어찌하여 인류는 아직도 사모제(謝母祭) 하나를 갖지 못하고 있는고?

「아이구…… 아이구 엄마아! 사람………사람 살려요!」

인류여, 그대 귀가 있거든 이 신성한 산실에서 흘러나오는 무서운 신음 소리를 들으라!

이를 바드득 악물은 얼굴에는 구슬땀이 비 오듯이 흐르고 손톱은 벗어져 선혈의 꽃이 피고 사지는 빈사(瀕死)의 금수(禽獸)처럼 와들와들 떨고 ── 인류여, 그대 눈이 있거든 눈으로 보라! 그대에게 어떠한 엄숙한 사명이 있기로, 그대에게 어떠한 위대한 권리가 있기로 이처럼도 어머니의 연약한 몸을 무섭게 학대함으로써 생명의 보존을 꾀하려 하느뇨?

「언니!…… 언니!…… 아이구, 엄마아! 아이구 언니!」

운옥의 손을, 팔을, 허리를 독수리처럼 아드득 빠드득 긁어 댕기며 오 유경은 지금 생명의 창조를 필사적으로 영위(營爲)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만 참아요! 조금만…… 그렇지! 조금만 더……」

어깨를 매만지고 등을 힘껏 쓸어주면서 타이르는 운옥의 목소리에는 절반 울음이 섞여 있었다. 산부보다 못지않게 운옥의 얼굴은 땀에 젖었고 산부보다 못지않게 운옥의 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자기의 아내가 이와 같은 무자비한 고통 속에서 헤메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어린애 아버지되는 사람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하였다.

남편도 부모도 친척도 친지도 ── 누구 한 사람 얼신도 하지 않는 이 외로운 산실에서 오로지 혼자만이 이 무서운 고통을 받고 있는 어린 산부의 신세가 한없이 측은하였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를…… 어머니를 좀 불러 주세요!」

유경은 마침내 어머니를 찾고야 말았다.

「오, 오, 용하시오! 혜경씨, 용해요! 조금만 더……조금만 참으시요!」

「아이구, 아이구 언니! 언니! 그이를……그이를 좀 불러, 불러 주세요!」

유경은 마침내 남편을 찾고야 말았다.

「글쎄 후에 다 불러 드려요! 그러니까 잠깐만…」

그러는데

「앗, 엄마아아앗!」

하는, 숨 넘어 가는것 같은 날카로운 부르짖음과 함께 산부의 몸에서 기운이 탁 풀리는 순간이었다.

산부의 목소리를 압도(壓倒)할 것 같은 좀더 날카롭고 좀더 폭이 좁은 또 하나의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산실의 천정을 뚫을것 처럼 울렸다.

「으아아악 ──」

새로운 생명의 창조가 끝났다는 성스럽고도 신비로운 고고(呱呱)의 소리이다.

유경은 전신의 기력이 일시에 쭈욱 빠져 나가는 순간을 꿈결처럼 느끼며 운옥의 손목을 꼭 잡은채 죽은 듯이 눈을 감았다.

그 혹심한 육체적 허탈(虛脫) 속에서 유경은 그 지긋이 감은 캄캄한 장막 위에 후딱 예고없이 나타난 한 사람의 사나이의 모습을 보았다.

「아아, 그리운 내 사람!」

아무런 「포 ─ 즈」도, 허세도, 비판도 없이 이 순간에 있어서의 유경의 마음은 대담하게, 솔직하게 그 그리운 영민의 모습을 동경하였다.

「아아, 사내야요, 사내야요!」

하고, 외치는 숙자의 극히 명랑한 목소리가 그때 유경의 고막을 두드렸다.

그 순간, 유경은 저도 모르게 오싹하고 달려드는 일종의 헤아릴 수 없는 전률을 전신에 깨달았다. 그것은 확실히 기쁨의 전률이었다. 유경의 머리는 아직도 그 기쁨의 전률을 시인(是認)하지 못하고 망설거리고 있었으나 유경의 육체는 벌써 하나의 떳떳한 모성으로서의 기쁨을 탁 터놓고 기뻐하는 것이다.

「혜경씨, 수고하셨수!」

운옥의 따뜻한 목소리가 유경의 귀 밑에서 동정과 희열과 념을 가지고 조용히 들려 왔을 때, 유경은 대답 대신 운옥의 손을 한번 꼭 쥐어 줌으로써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였다.

이윽고 후산도 순순히 되었을 때 의사는

「아주 순산을 하셔서 다행입니다.」

하는, 말을 남겨 놓고 산실을 나가버렸다.

부장은 산모의 뒤치닥거리를 하고 숙자는 어린애에게 목욕을 시키면서

「아주 멋 들어지게 생겼어요. 크면 꼭 미남지가 될꺼야요.」

하며, 캬들캬들 웃는다.

「산모두 예쁘지만 아버지가 잘 생기셨나 부죠.」

운옥은 그러면서 하얀 융으로 싼 어린애를 숙자의 손에서 받아 들고 유심히 들여다 보며

「아이 참, 어쩜 눈 코가 번뜻번뜻 잘두 생겼어요. 그런데 입 모습은 꼭 어머닌데요, 뭐.」

운옥은 어린애를 유경이의 눈 앞으로 바싹 갖다대며

「자아, 엄마한테 선을 뵈야지 않어? 자아, 내 얼굴 좀 봐 주세요, 그래 봐.」

유경은 부끄러워서 눈을 뜨지 못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자기가 영위(營爲)한 생명의 창조가 하두 신기로워서 가만히 눈을 뜨고 어린애의 새빨간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

잠자코 유경은 들여다 보다가 그만 눈물이 핑 돌아 휙 얼굴을 돌려 저편을 향하였다.

유경이의 차거운 지성으로서도 도저히 참아 낼 수 없는 아아, 이 너무나 혹독한 외로움이여, 고달픔이여, 서글픔이여!

「아비 없는 자식을 나는 낳았다!」

앞을 가리운 눈물 속에서 이 어린 것의 불우한 운명을 十[십]년, 二十[이십]년의 먼 장래 위에 그림 그리며 유경은 혼자 속으로 서글피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