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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극장/2권/3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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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정차장

[편집]

떠나기 전에 신 성호를 한번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몹시 일어났으나 춘심이를 만나는 것이 마음에 걸려 그만 단념하고 말았다.

그날밤 영민은 경성역 二[이]등 대합실에서 오 창윤씨를 기다리면서 다음과 같은 서신을 탑골동 아버지에게 썼다.

아버님 전 상서 삼가 살피지 못하온 이즈음 기체후 일향만강 하옵시고 댁네 제절이 무고하옵시며 허약하신 어머님께서 길이길이 수복을 누리시와 아버님 공경 지극 하소서. 바다 같이, 태산같이 베풀어 주신 혜덕으로 소자는 무양 연학(硏學)하오니 방심하옵시기 바라오며 어서 어서 귀국하여 나라에 충성 다하라고, 학도병 지원을 성화같이 재촉하신 아버님의 간절하신 혜서는 반가이 배견하였사오며 귀국하는 여비로 하송하신 귀한 금자도 확실히 배수하였사오니 하찰 하시옵소서. 그러하오나 아버님, 소자는 아버님의 그 지극하시고 간절하신 기원을 또다시 배반하고 학병 지원을 거부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사오니 이 커다란 죄 또한 무엇에다 비하리오.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이 글월을 읽으시고 분노의 정을 이기지 못 하실 즈음에는 이미 소자는 국경을 넘어 만주의 황야를 달리고 있을 몸이오니 아버님, 어머님, 이 불효, 불충의 자식을 힘껏 꾸짖어 주시옵기 바라오며 소자는 붓을 놓사오니 아버님, 어머님, 길이 길이 천수(天壽)를 누리시와 다시 슬하의 뵈일 날을 하늘에 비옵나이다.

불초 돈수주백 ─ 창졸지간에 지물묵을 손에 넣지 못하와 양필(洋筆)과 양지(洋紙)로 적었삼을 너그러이 하찰하시옵소서.

영민은 편지를 봉함에 넣고 공손한 마음으로 표서를 썼다.

그것은 실로 교묘한 편지었다 . 모든 책임을 자기 혼자만이 뒤집어 쓰고 아버지의 곤경을 조금이라도 구하려는 공교로운 내용의 편지었다.

오 창윤씨가 조그만 여행용 가방을 하나 들고 대합실 문으로 유유히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선생님, 피곤하실텐데 황송합니다.」

「괜찮소. 아직 시간은 넉넉하지요?」

「네, 충분합니다.」

밤 열 한시 반, 신경행 급행이다.

「난 잠깐 볼 일이 있어서 홈에는 못 들어 가겠소.」

「홈에는 들어 가셔서 무엇 하십니까? 제가 뭐 어린앤가요.」

「암만 생각해 봐두 압록강 인도교를 건느는 건 좀 위험한것 같아서……」

그러면서 오 창윤은 신경행 一[일] 등차표를 한장 내주면서

「오늘 사람을 시켜서 손에 넣은건데 신의주서 내리지 말고 곧장 그대로 기차로 건너 가시요.」

「이동경찰(移動警察)의 눈을 어떻게 피합니까?」

「아, 거기 대한 대책을 강구해 보았소. 자아, 이것은 군의 신분증명선데 내가 경영하는 대륙 광산 개발 회사 사장 오 창윤의 비서 『야나기 · 게이 가꾸』, 유 경학(柳景學)으로 되어 있으니까 명심하시요. 그리고 이건 또 그 유 경학의 명함이요.」

「어쩌면 선생님두, 이처럼 제 일을 골돌히……」

너무도 그맙소 황송하여 영민의 혓끝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한다.

「왜 골돌히 생각하지를 않겠소? 군으로 말하면 내 사위요, 아들이요. ─ 그런데 만일 명함과 신분증명서를 가지고도 통과가 안되면 그때는 하는 수 없이 이 편지를 내 보이시요.」

그러면서 「비」(秘) 자의 도장이 찍힌 봉투를 한장 내 주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관동군 육군 소좌 「네무로 · 츠요시」(根室.[근실강])전 이라고 씨어 있었다.

「이 네무로 · 소좌로 말하면 나하고는 상당한 친분이 있는 사이로서 전부터 나와 함께 만주의 광산 개발을 계획하여 온 사람이요. 그리고 이 편지에는 거기 대한 이야기가 씌어 있는데 이번 군의 여행의 목적은 군이 나의 신임하는 비서로서 이 편지를 네무로 소좌에게 친히 전하러 가는데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되오. 그리고 군이 이 편지를 내 보이고 무사히 통과하더라도 후환을 염려하여 편지 만은 꼭 전하시요.」

「잘 알아 모셨읍니다. 감사 합니다!」

정말 눈시울이 뜨겁도록 고마운 오 창윤씨였다.

무척 설핀 성품으로만 알아 왔었는데 이처럼 치밀한 계획성이 있는 줄은 정말 의외였다.

그러나 이것은 영민이가 친일파 오 창윤의 표면만을 보았을 뿐, 실업가로서의 오 창윤의 이면을 아직 보지 못한데서 생긴 피상적 관찰이었다.

「모르긴 모르지만 무사히 통과가 될 것 같소. 그리고 오 창윤의 비서가 맨손으로 여행을 해서야 되겠소? 이 가방을 들고 가시요. 이 속에는 광산개발에 대한 그리 중요치 않은 서류라든가 청사진 같은 것이 그럴 법 하니 들어 있으니 그리 알고 통과 후에는 찢어 버리시요.」

「분부하시는 대로 하겠읍니다.」

영민은 가방을 받아 들었다.

「학병 권유 같은 건 좀 고역(苦役)이지만 이런 때는 친일파의 간판이 아주 편리하거든! 핫, 핫, 핫……」

하고 오 창윤은 호탕하게 웃어 댔다.

「그럼 몸조심 잘하여 잘 내빼 보시요. 난 시간이 좀 바빠서 들어가 보겠소.」

「아, 선생님, 이건 집의 아버님께 부치는 편집니다. 전번에 말씀 드렸지만 一[일]년 만에 처음주신 편지의 회답인데 이것을 사흘 쯤 후에 좀 부쳐 주십시요. 제가 건너 간 후에 받도록 말씀입니다.」

「알겠소. 그럼 어서 들어가 타시요.」

「선생님, 안녕히 계십시요.」

이리하여 영민은 홈으로 들어가고 오 창윤은 대합실을 나섰다. 무슨 큰일 하나를 해 치운것 같아서 오 창윤은 어깨가 무척 가벼워 졌다.

오 창윤은 힘껏 한번 심호흡을 하면서 저편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동차를 향하여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을 때였다.

남대문 쪽에서 쏜살같이 달려 오고 있던 한 대의 택시 ─ 가 역전 광장을 휘익하고 커다란 원을 그리면서 돌아 오다가 객렬한 「헷드 · 라이트」속에다 오 창윤을 잡아 넣은채 욹하고 멎었다.

오 창윤은 눈이 시려 손으로 광선을 막으면서 지나 가려는데

「아, 오 선생이 아십니까!」

하고 부르는 낯익은 목소리가 자동차에서 내렸다.

「응?……」

하고 오 창윤은 광선을 피하며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을 때

「접니다. 최 달근입니다.」

하고 반가이 외치며 어둠속을 뛰어 온 것은 국민복을 입은 최 달근입에 틀림 없었다.

「아, 난 누구라구?」

「동경서 언제 돌아 오셨읍니까?」

「아, 아침 차로 왔네.」

「어떻게 이 밤중에 나오셨읍니까?」

「아, 잠깐 저 누구 좀 배웅을 나왔다가……그래 최군은 또 어떻게?……」

「한주일 동안 휴가를 맡아 가지고 오래간만에 금수강산 평양으로 놀러 가드랬읍니다.」

「허어, 거 참 잘 되었군.」

그러는데 최 달근의 뒤로 주첨주첨 걸어 오고 있던 사나이 하나가 겁신 인사를 하며

「선생님, 오래간만입니다.」

하였다.

「건 또 누군고?……아, 박군이 아닌가!」

「네, ─」

하고 준길은 또한번 꺼불하고 허리를 굽히고 나서

「선생님, 도무지 뵈일 낯이 없었읍니다. 글세 고 빌어 먹을 년이……집의 아버지가 여간 미안해서 그러시질 않는답니다.」

「지나간 이야기는 할것 없구……그래 박군두 평양인가?」

「네, 저 실은……」

준길은 손을 부비면서

「저 다른 것이 아니오라 제가 이번에……」

그리는데 옆에 섰던 최 달근이가 준길이의 어깨를 탁 치면서

「무얼 그처럼 우물주물 하는 거야? 장가 들러 갑니다, 하고 시언시언히 좀 대답을 못해? ──」

「옳지, 옳지! 언젠가 그런 말을 춘심이에게서 들은 기억이 있네. 아, 그래?」

「네, 헤헤헤 ─」

「녀석이 아주 좋아서 싱글벙글이지요. 그래 절더러 자꾸만 둘러리를 서 달라는 거야요.」

「옳지, 옳지. 그래서 동행이구먼.」

그때 최 달근은 손목시계를 후딱 들여다 보며

「아, 발차 시간이 임박해서 그럼 오늘은 이만 실례 하겠읍니다.」

「그럼 선생님, 안녕히 계십시요.」

하면서 뛰어 가려는 준길을

「잠깐 ─」

하고 오 창윤은 불러 가지고

「지금 가진 것이 별루 없어서 약소하나마나 보태 쓰게.」

돈 천 원을 오 창윤은 집어 주었다.

「원 선생님두 이렇게 많은 돈을……춘심이 년두 그 지경이 되구…… 면목 없는 돈을 받습니다. 헤헤헤……」

「후일 다시 면목을 세우면 되지 않나? 허, 허, 헛……그건 농담이구 자아, 어서 빨리 들어가 보게.」

「네, 그럼 안녕히……」

준길은 희열이 만연하여 트렁크를 들고 최 달근의 뒤를 헐레벌떡 따라 갔다.

오 창윤은 다시금 천천히 주차장으로 걸어 가면서 지나간 날, 춘심이를 독차지 하던 때의 육체적 행복을 환상에 그림 그리며 쓸쓸히 웃어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즐거운 회상을 산산히 추방해 버리는 하나의 커다란 불안이 돌연 오 창윤의 전신을 폭풍처럼 휩쓸기 시작한 것은 그가 자동차를 타고 막 떠나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백군과 그들은 같은 북향이 아닌가! 같은 차에서 우연히 얼굴을 마주치는 날에는……」

그렇다. 그것은 오 창윤의 모든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동시에 영민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한 위기(危機)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 최 달근과 박 준길은 영민을 서슴치 않고 붙들어 버릴 것이 아닌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차를 멈추쇼!」

하고 벽력 같은 호령과 함께 오 창윤의 운전수의 어깨를 무섭게 흔들어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