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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극장/2권/41장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무욕 무사의 순간

[편집]

「그 전보문을 읽어 보았소?」

「읽어 보지, 않았읍니다.」

「차표 조사는 언제 합니까?」

「이제 곧 시작하겠읍니다.」

「그러면 먼저 一[일]등 차부터 조사해 주시요. 우리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인제 그 야나기가 어디서 차를 탔으며 어디까지 가는지, 알아다 주시요.」

「잘 알았읍니다. 잠깐만 기다리시요.」

四十[사십]이 거의 가까운 차장은 가위를 들고 창황한 걸음으로 一[일]등 차로 들어갔다.

준길은 차장이 앉았던 걸상에 털썩 주저앉았고 최 달근은 테이블 귀에다 엉덩이를 올려놓으며 천천이 담배를 붙여 문다.

「오장, 이만 하면 오늘밤 심심풀이는 쾌히 됨즉하죠?」

그러나 최 달근은 된다는 말도, 안 된다는 말도 없이 담배만 퍽퍽 피우다가

「자식이 신수가 불길 하군! 왜 하필 一[일]등 차야? 三[삼]등 차만 탔어두 되는 왜 하, 하, 하, 하……」

하고 의미있는 웃음을 지었다. 비웃는 말인지, 동정의 말인지, 듣는 사람에게 달려서는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한 마디었다.

「흥흥, 운수가 그리 좋지는 못한 편입죠.」

「박군!」

「네?」

「한번만 눈 감아 줄까? ─」

「뭐요?……뭐라구요?……」

그 순간 준길이의 애꾸눈이가 경련을 하듯이 후둘둘 떨리며 무섭게 빛났다.

「아, 하하핫……」

하고 다음 순간, 최 달근은 준길이의 놀램을 덮어 누르듯이 호탕하게 웃어대며 다음과 같은 한 마디를 토했다.

「박군은 아직 사냥이 서툰걸! 껑충껑충 쫓겨가는 노루 새끼의 목덜미에다 총부리를 겨누고, 자아 방아쇠만 댕기면 쓰러진다, 쓰러진다 하면서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눈감아 주며 따라가는 맛을 자네는 아직 몰라 보거든! 사냥꾼으로선 아직 자네는 초대야!」

그러는데 차표 조사를 나갔던 차장이 一[일]등실 만을 우선 끝마치고 돌아섰다.

「기다리시었읍니다.」

「그래 어딜 갑디까?」

「경성발 신경행 입니다.」

「아, 역시……고맙소. 수고했읍니다.」

준길은 최 달근의 팔목을 끌고 차장실을 나와 一[일]등 실로 들어갔다.

그 때 영민은 변소엘 가고 자리는 비어 있었다.

「야로오, 벌써 샜는가? ─」

그러나 모자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은 안심하여 맞은편 자리에 털썩 걸터앉았다. 걸터앉아 두 사람은 제각기 신문을 한장씩 펴 들고 얼굴을 가리었다.

그러고 앉아 있는데 영민이가 자리로 뚜벅뚜벅 돌아왔다.

박 준길은 신문지의 뚫어진 조그만 구멍으로 영민의 일거일동을 유심히 내다보았다.

조금 전까지도 비어 있던 앞자리에 난데없이 나타난 두 사나이 ─ 그것도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운 두 사나이를 적지않게 의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 창윤씨의 전보를 받은 직후라, 마음이 약간 설레이기도 하였다.

그때 신문을 후딱 내리운 최 달근이가 영민을 힐끗 바라보자

「아, 이거 백군이 아닌가!」

하고 외치면서 이 뜻밖의 행후(邂逅)를 멋지게 한번 놀리 보였다.

「아, 자넨……자넨 최, 최군?……」

영민의 얼굴빛이 해말쑥 해졌을 때 준길이가 천천해 신문을 걷어 치우며

「아, 난 또 누구라구?……백 초시 댁 도령이 아니시우?」

하고, 아직껏 한번도 입에 담아 본 적이 없는 경어를 썼다.

「아, ─」

영민은 눈앞이 아찔해 졌다. 오 선생의 전보는 바로 이것이었구나! 전보문의 내용이 번개같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음 순간, 영민은 모든 것을 단념하였다. 최 달근 혼자 만이라면 또 어떻게 될것 같았던 영민의 한줄기 희망이 준길이의 희번득거리는 애꾸눈을 눈앞에 바라보았을 찰나 자기의 탈출행위가 완전히 수포에 돌아가고 만 것을 명확히 인식하였다.

이리하여 영민은 다시금 침착한 영민으로 돌아왔다.

「무얼 그리도 당황해 하는 거야?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악수나 한번 해 볼까?」

최 달근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음, 오래간만인걸! 그 동안 별 하나 쯤 더 얻어 붙였나?」

악수를 하면서 영민은 마침내 뱃장을 세워버리고말았다. 뱃장을 세워버리고 나니 도리어 마음이 편하다.

「음, 지난 겨울, 천일관에서 깜정 수염을 붙인 토끼 새끼만 놓쳐버리지 않았다면 별 한개 쯤은 염려 없었는데……」

「그러나 벌써 一[일]년이 지났는데 아직두 별 하나 쯤 못 얻어 붙인걸 보니, 성적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로군 그래. 그래서야 어디 출세를 하겠나?」

「글쎄, 그래서 오늘밤 출세를 좀 해 볼 셈으로 자네를 찾아 본 걸세!」

「음 ─ 그만 했으면 알 법두 하네!」

영민은 신음하듯이 중얼거렸다.

그것이 만일 찻간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면 그리도 쉽사리 단념해 버릴 영민은 아니었다 그러나 .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꼼짝달싹 할 여지가 없지 않는가.

「이것이 바루 운이라는 것이로구나!」

하였다. 오늘 아침 오 선생의 말대로 곧장 북향을 했었던들 영민의 인생은 좀 더 딴 발로 접어 들었을지 몰랐다. 유경이가 편지를 내지 않았던들 영민은 서울에 내리지는 않었을 것이다.

「흥, 一[일]등 차만 타구 댕기는 훌륭한 신사가 되었는걸!」

「부러운가?」

「음, 대단히 부러우이. ─ 그런데 야나기상, 언제부터 창씨를 했었나?」

「음, 그만 했으면 자네도 상당하이!」

「별 하나 더 붙을것 같은가?」

「하나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렇게 되면 반개 쯤은 더 붙게 되는가?」

「어디가! 잉어를 잡아야지, 송사리떼 같은 걸루야 어림두 없지.」

「잉어나 잡구, 송사리떼 같은 건 눈 감아 보지?……」

영민은 슬쩍 청을 넣어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준길이의 눈알이 힐끗 최 달근의 표정을 쳐다보았다. 눈감아 준다는 말이 아까 농담일 망정 최 달근의 입에서도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진합태산이라구 했어. 송사리떼두 많이만 모이면 잉어 한마리 쯤은 당해 내거든.」

그때 박 준길이가 머리를 약간 숙이며

「오메데도오 · 고자이마쓰!(경사 스럽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였다.

「응?」

무슨 뜻인지를 몰라 영민은 머리를 돌려 준길이를 바라보았다.

「우리 탑골동에서두 영예스러운 학도병이 나왔으니까요. 붓을 던지고 칼 든 손으로 대동아 공영권 형성에 많은 힘을 써 주셔야겠읍니다.」

어디까지나 준길은 경어를 버리지 않을 모양이다. 영민은 기가 막혔다. 기가 막혀서 덤덤히 준길을 쳐다보고 있으려니까

「입영(入營)이 이 달 二十[이십]일이요! 마침 잘 됐군요. 오장께서도 나와 같이 탑골동엘 가던 길인데, 우리 한번 굉장한 장행회를 열기도 하겠읍니다.」

「탑골동엘?……」

영민은 최 달근을 쳐다보았다.

「아, 이번 박군이 장가를 든다구, 날더러 자꾸만 들러리를 서라는 거야.」

「음 ─」

빠져 나갈 길은 이젠 정말로 두절된 셈이 아닌가! 이 두놈의 감시원을 앞세우고 탑골동까지 영민은 어쩔 수없이 가야만 했다.

「박군이 이처럼 성대한 장행회를 열어 주겠다니까, 암만 생각해두 신경 여행은 단념해야만 될걸! 하하하핫……」

「최군!」

하고, 그때 영민은 힘차게 불렀다.

「응?……」

「내 일생에 단 한번인 청이다! 눈을 감아 줄 수 없겠나?……」

「……」

최 달근은 대답이 없다.

최 달근의 의식 속에서는 그 순간, 타오르는 복수의 일념과 함께 허 운옥이가 말한 「스노오 · 볼」(눈공)의 이야기가 주마등처럼 핑글핑글 돌아가고 있었다.

「박군!」

하고, 이번에는 준길을 불렀다.

「나를 기어코 붙들어 내가야만 하겠나?……」

「아니, 무, 무슨 말입니까? 황송하게도 대군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하신 분을 나 같은 미천한 사람이 붙들구 말구나 있겠읍니까? 원, 별……별 말씀을 다 하시는군요!」

판국은 글렀다.

영민은 그때 옆에 놓인 가방을 가리키며 최후의 수단을 강구해 보았다.

「박군, 이 가방 속에는 二[이]만원의 돈이 있네! 이 가방을 나는 군의 자유에 맡길테니까 ─」

그 순간, 준길이의 눈이 반작하고 빛나는 것을 영민은 확실히 보았다. 영민은 희망을 가졌다.

「박군, 한번만……한번만 눈을 감아 줄 수 없겠나?……」

그때 준길은 후딱 얼굴을 돌려 최 달근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최 달근은 팔장을 끼고 눈을 지긋이 감고 있었기에 때문에 상관의 표정을 살필 도리가 없었다.

무 무슨 「 , 말씀을……하늘이 무섭고 땅이 무섭지요! 헤헤헤헤……」

조금 전에 반짝 빛났던 준길이의 외알 눈이 다시금 흐려졌다. 그 흐려진 눈동자 속에서 二[이]만 원에 대한 욕망을 애써 억제하려고 노력하는 준길이의 발버둥질을 보고 영민은 최후의 희망을 인제는 완전히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영민은 다시 조용해졌다. 영민은 다시 침착해졌다.

눈을 감고 있는 최 달근의 모양을 본받아 영민도 눈을 지긋히 감고 팔짱을 꼈다.

무의, 무욕, 무사(無爲, 無欲, 無思)의 일순간이 영민에게 흘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뵙지 못하고 떠날 줄로만 알았던 늙으신 부모님, 오랫동안 모시지 못했던 그 지극하신 부모님의 슬하에서 단 며칠 동안이라도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예를 차릴 수 있는 자기 자신을 행복하다 생각함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