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2권/4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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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사랑 사랑[편집]

1[편집]

젊은 의사는 열이 펄펄 끓는 유경이의 가슴에다 한침 동안이나 청진기를 대고 있었다.

운옥은 어린애를 업고 머릿맡에 앉아서 의사의 얼굴 표정만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유경은 열에 떠서 벌개진 눈으로 네모 난 천정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의사는 청진기를 뗐다.

「폐렴입니다.」

「폐렴이라고요?」

운옥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러나 유경은 별반 놀라지도 않는다. 죽는다는 것이 유경이에게는 조금도 무섭지가 않다.

의사는 주사기를 꺼내면서

「「토리아논」이 지금 귀해서요.」

하고 그 귀한 「토리아논」을 놓아 준다는 뜻을 암암리에 표시하였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운옥은 진심으로 이 젊은 의사를 존경하였다. 그리고 만일의 경우에 그 귀한 「토이아논」을 구할 수 없다면 운옥은 그처럼 피해 오던 김 준혁을 찾아 갔을런지도 몰랐다.

「복용약을 드리겠읍니다. 누구 병원까지 오셨으면 좋겠읍니다.」

「네, 제가 가겠읍니다.」

운옥은 의사를 따라 일어섰다.

유경은 잠자코 자리 밑에서 조그만 돈 지갑을 내어 주며

「언니, 약 값이 너무 비싸거든 복용 약 그만 두세요.」

「글쎄 병인은 그런 걱정 안 하는 거래두 그르셔? 내가 다 적당히 할테니 아무 걱정 마세요.」

「애기 내려 놓구 가세요.」

「글쎄 가만 누워 있어요.」

운옥은 자기 목도리로 어린 아이를 폭 씌워 가지고 의사를 따라 나섰다.

어린 것이 자꾸 보채서 어머니가 잠시도 편히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이번 병만 해도 그랬다. 해산후 닷새 만에 유경은 산후 발증을 일으켰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죽을번 하고 살아는 났으나 산모의 몸이 무척 허약해 졌다. 그러던 것이 며칠 전부터 아이 단련을 하면서 밤잠을 못 자다가 몸에 또 열이 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노라고 피아노를 팔았던 돈은 다 없어지고 옆에서 친 언니처럼 시중을 해 주는 운옥이만 없었어도 유경은 다시 집으로 돌아 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살을 했을런지도 몰랐다.

「선생님, 괜찮을까요?」

운옥은 따라가면서 물었다.

「잘 주의하야 겠읍니다. 바람 쐬지 말구……될 수 있으면 입원을 시켰으면 좋겠읍니다만…… 폐염은 한 시간 한 시간이 다르니까요.」

그러나 단간방 살림에 입원할 처지가 못 됨을 의사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상 더 강권하지는 않았다.

「꼭 입원 해야만 될까요?」

운옥은 가슴이 아팠다.

「아니요. 입원하면 병세를 자세히 진단할 수가 있으니까요. 하여튼 오늘 하룻밤 두고 봅시다. 좀 차도가 있겠지요.」

의사는 어물어물 넘겨 버렸다.

「언니 되시는가오?」

「……네에.」

「바깥 어른은 무얼 하시나요?」

지나가는 말처럼 의사는 묻는 것이나 이 바깥 어른의 직업에 따라 의사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저……저……」

바깥 어른의 직업을 운옥도 모른다.

성북동 개천을 끼고 걸어 나오느라면 삼선교 다리 근방에 병원은 있었다.

「── 간호원 모집 ──」

삼선교 다릿목에 광고판이 하나 커다랗게 서 있는 것이 운옥의 눈에 띄어 들었다. 마음이 끌리기는 했으나 의사의 뒤를 따라 가느라고 운옥은 자세한 내용은 보지 못한채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얼마후, 운옥은 해열제와 기침 멎는 약을 지어 들고 병원에서 나왔다.

추운 날씨다. 오정이 가까운 무렵이었다. 삼선교 전차 정류장에 길다란 행렬이 뻗쳐 있었다. 운옥은 아까 그 「간호원 모집」 광고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읽어 볼 셈으로 행렬 옆을 창황한 걸음걸이로 지나가고 있으랴니까

「아, 운옥이 아니야?……」

하고 반가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

운옥은 발걸음을 멈추고 후딱 뒤를 돌아다 보았다.

「아아, 이게 얼마 만이야!」

행렬 가운데서 낯 익은 얼굴이 하나 쑥 빠져 나오면서 달려왔다.

「아이, 윤 선생님이 아니세요?」

그렇다. 그것은 닷새 전 탑골동에서 준길이와 결혼식을 지낸 윤 영실(尹英實)이였으며 운옥이의 야학원 선생인 윤 선생이였다.

「아이유, 운옥일 여기서 볼 줄이야!」

윤 영실은 운옥의 손목을 반가이 잡아쥐며

「아이유, 애기를 낳구만!」

하였다.

2[편집]

윤 영실은 등에 업힌 어린애의 조그만 얼굴을 들여다 보면서 운옥의 재취를 결정적으로 확인해 버린다.

「아냐요. 동무의 아이예요.」

운옥은 약간 얼굴을 붉히면서 부인을 하였으나 영실은 곧이 들리지가 않은 모양이다.

「아이구, 속이믄 누가 모를라구?」

「정말이야요, 선생님.」

「그래 그동안 서울에 쭉 있었수?」

「네…아뇨…여기 저기……」

운옥은 그저 탑골동 사람이 무섭다. 자기의 과거를 아는 사람이 자꾸만 무서운 것이다.

「그런데 선생님, 언제 서울에 오셨나요?」

「한 사날 되지요.」

「사날? 그럼 그동안 쭉 고향에 계셨나요?」

그 순간, 운옥의 온 신경이 호닥닥 놀래며 탑골동으로 쏠리어 갔다. 탑골동 댁에선 어떻게나 지날꼬?……고마우시던 시아버지, 상냥하시던 시어머니 그리고, 그리고 그렇다! 그이는, 그이는 어떻게 되었을꼬?……남과 같이 학도병으로 끌리어 나가는가?……내일이 바로 전조선 학도병이 입영하는 一[일] 월 二十[이십]일이 아닌가!

운옥은 어떻게서든지 영민의 소식을 알려고 평양으로 내려가서 살그머니 탐지해 볼 생각을 골돌히 하면서도 행동이 극히 자유롭지 못한 몸이라 운옥은 그저 꾹 유경이의 곁에 숨어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이처럼 우연히 윤 선생을 만난 것이 무섭기도 하면서 한편 무척 반갑기도 한 운옥이었다.

「그럼, 쭉 탑골에 있었지.」

「그러시담 저어 어머니랑 아버지랑은 다 어떻게 지내시나요?」

「다 편히 계시지. 그렇지만 운옥이 소식이 궁금해서……」

그러다가 영실은 생각이 난 듯이

「아, 참 영민씬 닷새 전에 서울 부대로 입영해 온 줄 모르지?

「엣, 뭐라구요? 서울 부대라구요?……」

운옥은 하마트면 들었던 약병을 손에서 떨어뜨릴번 하였다.

「아, 그럼 아무 연락도 없었구만요?」

도리어 그것을 영실이 편에서 의외로 여기는 모양이다.

「네……아, 아모런……」

가슴속이 기관차처럼 덜컹거리고 눈앞이 아찔아찔했다.

「서울 부대라면 저…저 용산…용산에 있는 그 부대 말씀이시죠?」

「아, 참 용산 부대라구 그러드구만! 오늘 아침 신문에두 왜 나지 않았어요? 내일 용산 부대에 입영한 학생들은 현지(現地)로 떠난다구……」

그렇다. 운옥이도 분명히 그 신문 기사를 유경이와 함께 보았던 것이다.

운옥의 추측으로는, 만일 영민이가 학병을 지원했다면 반드시 평양 부대로 입영할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운옥은 평양으로 내려가 볼 생각을 골돌히 하고 있지 않았던가.

「선생님, 저 집에 급한 환자가 있어서 빨리 가 봐야겠어요.」

운옥은 어서어서 혼잣몸이 되어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를 절실히 느꼈다.

「왜, 바깥 어른이 병중이시나?」

「아뇨. 제 친한 동무가……」

그리면서 운옥은 영실의 손목을 살뜰히 잡으며

「선생님, 저 선생님께 한가지 꼭 부탁이 있어요.」

「부탁?……뭔데……」

「저와 만났다는 이야기를 누구 보고도 하지 말아주세요! 더구나 저…저…

그 박, 박 준길……일생에 단 한번 밖에 없는 청이야요! 선생님, 저를… 저를 동정하셔서……저는, 저는 멀지 않아 법정에 설 몸이지만…… 그러나 법정에 설 때까지는 제발 선생님, 저를…저를 동정하셔서……」

운옥은 영실의 손을 꽉 부여잡고

「선생님, 저를 조금만 더 살려 주세요! 저를 선생님 가엾이 여기시고 ……」

운옥은 울었다. 길 거리에서 운옥은 영실의 손을 꽉 부여잡고 울면서 애원을 하였다.

「운옥이!」

그때 윤 영실은 힘있게 불렀다.

「네?……」

좌악좌악 눈물을 흘리면서 운옥은 얼굴을 들었다.

「운옥은 나를 그런 사람으로 알아주는 것이 슬퍼요! 운옥이 신세를 알아 주는데 나 만한 이도 없을 것 같아요. 운옥이, 걱정 말아요! 나는 박 준이와 엊그제 결혼한 사람이지만, 현실이란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야요.」

「엣?……그이와 결혼을 하셨다고요?」

정녕 그것은 하늘이 무너질 것같은 한 마디었다.

「운옥이를 동정하는 내가 운옥이를 원수로 알고 있는 박 준길이와 결혼을 했답니다. 운옥이! 현실은 무섭고 이상은 약합니다! 윤 영실이도 그 약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 순간, 운옥은 후딱 윤 선생의 늙은 어머니와 네 사람의 더벅머리 어린 동생을 머리에 그렸다.

「사흘 전 시골서 신랑 잔치랍시고 간단히 해 버렸어요. 그리고 내일 여기서 소위 신부 잔치를 하게됐답니다. 그래서 돈암동 사는 서 목사님을 청해서 주례를 서 달라고, 그래서 지금 서 목사님을 찾아갔던 길이예요.」

「그럼 서 목사님도 서울 와 계시나요?」

「三[삼]년 전에 서울로 왔어요.」

뒷탑골 야학원 원장이던 서 목사 ── 운옥이가 애국가를 부르던 밤, 강단 뒤 준비실에서 운옥의 슬픔을 위로해 주시던 그분 서 목사!

3[편집]

윤 영실과 헤어져 운옥이가 삼선교 다리까지 다달았을 때, 운옥은 커다란 광고판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아까 지나갈 때 얼핏 본 간호원 모집의 광고판이다.

「비상시 국가에 처하는 젊은 여성들의 봉사의 길은 열렸다! 나가라, 제일선으로! 국가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백의용사를 위하여 그대들은 용감히 나서라!」

이것이 「간호원 모집」이라고 커다랗게 씌인 다섯글자 양 옆에, 조그맣게 씌어진 선전 문구였다. 그리고 그 밑에 가로 「경성 적십자 병원」(京城赤十字病院)이라고 큼직하게 씌어 있었다.

운옥은 그 선전 문구를 쭉 읽어 보고 난 그 즉시로 소위 야전 병원(野戰病院)의 간호부로 채용되기를 간절히 갈망하였다.

「남양(南洋)이 아니면 북지(北支)다!」

그 둘 중에 하나 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리고 그이가 어디로 떠나는지, 그것은 내일 보면 알 일이다. 그이가 남양으로 출정을 하면 자기도 남양을 지원할 것이고 그이가 북지로 출정을 하면 자기도 북지를 희망할 것이다.

운옥은 약병을 꽉 부여잡고 초조한 걸음으로 광고판 앞을 떠났다.

집으로 돌아 와 보니, 신열이 四十[사십]도가 가까운 유경이가 신문을 움켜쥐고 좁은 한간 방을 미친사람처럼 삥삥 돌아가고 있었다.

「아이구머니나! 혜경이가 이게 무슨 일이요?」

운옥은 머릿밭에 약병을 놓고 정신없이 삥삥 돌아가고 있는 유경이의 팔목을 부여잡았다.

「혜경이, 바람 쐬면 어떻걸려구 이러는 거유, 글쎄?」

운옥은 유경을 억지로 끌어다가 다시금 자리에 눕혔다.

「언니, 약 값이 얼마죠?」

유경은 약 값을 걱정하고 있었다.

「글쎄 괜헌 걱정을 하셔요. 약 값이 무척 싸던데요.」

「나는 죽음 죽었지, 약 값 외상은 안 질테야요. 나는 죽음 죽었지, 남한테 싫은 소린 안들을테야!」

그러다가 유경은 운옥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그러나 나 언니한텐 암만 해두 신세를 갚지 못하구 죽을 것만 같아요!」

「또 쓸데없는 소리를 자꾸만 되풀이 하지. 내가 혜경이게 신세를 졌지, 그래 혜경이가 나한테 신세를 졌는가요? ── 자아, 이 약 먹구 푹 땀을 내면 날테니까.」

유경은 약을 먹고 나서 어린애를 받아 젖꼭지를 물리면서 내일 일제이 학도병들이 입영한다는 신문기사를 골돌히 생각하고 있을 때

「저 혜경이.」

하고 운옥은 말했다.

「나 내일 아침 잠깐 외출 좀 해야겠어요. 두 시간 동안만 ──」

「어딜 가슈?」

「저, 내 먼 친척 되는 사람이 이번에 학병으루 나가요. 그래 내일 아침 역에 좀 나가 봐야겠어요. 앓는 사람 내버려 두고 가진 안 됐지만 내 잠깐만 나갔다 올께요, 네?」

「학병!」

그것은 분명 중얼거림에 틀림 없었다. 그러나 그 중얼거림은 외침 이상의 충동적인 한 마디었다.

유경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친적임 고향 사람이예요?」

「네 ──」

「고향이 평양이람 평양 부대에 입영하지 않아요?」

「반드시 그렇지두 않대나 봐요. 평양 부대로 들어가는 사람두 있구 용산 부대로 온 사람두 있대요.」

「그래요? ──」

어린애를 끼고 유경은 또 정신없는 사람처럼 천정만 쳐다본다.

그이두, 그렇다면 그이두 용산 부대로 왔을런지 누가 알아?……

「현지 훈련(現地訓練)임 북지로 떠나겠군요?」

「북진지 남양인지, 그건 자세히 알 수 없어요. 하여튼 바로 싸움터로 나가는 것만은 사실이예요. 훈련도 시키지 않고 바로 싸움터로 내보내서 총알막이로 쓰자는 거지 뭐야요? 지독한 놈들이야요!」

운옥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한다.

「지독한 놈들!」

유경은 잠고대처럼 중얼거렸다.

저녁 무렵에는 열이 조금 내렸던 유경이의 몸이 밤 열 시 쯤부터 불덩어리처럼 또 달아왔다. 가슴이 답답하다고 자꾸만 가슴을 허치는 유경이를 밤새도록 머릿맡에 앉아서 간호를 하면서 운옥은 탑골동을 생각하고 도라지탑의 전설을 생각하였다.

「도라지, 불쌍한 도라지! 도라지의 일편단심을 법월(法月)은 왜 죽기 전에 알아 주지를 못했을꼬?…… 내가 죽으면, 내가 그 분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면 그 때는 그 분도 불쌍한 운옥을 위하여 한방울 동정의 눈물을 흘려 주겠지!」

포연탄우(砲煙彈雨) 속에서 중상을 받고 쓰러진 그리운 사람 백 영민을 부둥켜 안고 눈물 짓는, 야전병원의 간호부 한 사람을 운옥의 환상은 그림 그려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