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2권/4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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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무정[편집]

1[편집]

용산 부대에 입영한지 엿새 만에 영민은 현지 훈련이란 명목하에 북지로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도 빨리 끌어 낼 줄은 정말 몰랐다. 적어도 二[이], 三[삼]개월 동안 국내에서 훈련을 받을 줄로만 믿었던 학병들이었다.

그러던 것이 입영한지 三[삼], 四[사]일 만에 북지로 파견되리라는 소문이 떠돌더니 닷새째 접하는날 , 즉 어제 오후에 그것이 정식으로 발표되었다.

「우리들은 국가를 위하여, 그리고 어떤 고귀한 분을 위하여 지금으로부터 큰 일을 하러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남자 일생에 있어서 무엇 보다도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높은 단 위에 올라서서 부대장이란 작자가 그런말을 하였다.

북지로 떠나리라는 소문을 듣고 영민은 어제 아침 부랴부랴 석장의 편지를 썼다. 하나는 봉서로 아버지께, 두 장은 엽서로 오 창윤과 신 성호에게 썼다. 그러나 오 창윤이가 며칠 전부터 온양 온천에 가 있는 줄을 영민은 물론 알 바가 없었다.

「꼬마, 이게 무슨 짓인가!」

신 성호는 왈칵 달려들어 영민의 목을 꽉 껴안았다. 영민은 맞받아 부둥켜 안으며 외쳤다.

「콘사이스!」

「영민아!」

「성호야!」

신 성호는 운다. 영민의 볼에다 자기 볼을 무섭게 부비면서 신 성호는 운다.

춘심이도 운다.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말없이 자꾸만 운다. 울어야만 할 이유가 춘심에게는 좀더 많았던 것이다.

「신군, 울음을 끝쳐라. 내가 이처럼 울지 않고 견데 배기는데 군이 울어서야 되겠나?」

「형아, 내 존경하는 형아! 대학을 나온 형이……이제부터 큰 일을 할 형이 끌려 나가고…… 나 같은, 나 같은 보잘 것 없는 인간이 편히 앉아 있다는 것이 미안하네!」

그때 영민은 터져 나올려는 격한 울음을 꾹 참으며

「신군!」

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내가 군을 부른 것은 군의 우는 얼굴을 보고서 한 것이 아니야. 보라, 머리를 들고 사방을 돌아다 보라. 떠나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이나 모두가 다 하나 같이 울고 있지 않느냐? 신군, 우리는 억지로라도 웃으면서 떠나 보내고 웃으면서 떠나 가 보세. 군은 곧잘 화를 낼 때 눈물을 짓고 슬플 때 사람을 웃기지만 내가 군을 부른 것은 군의 그 비웃는 얼굴이 무척 보고 싶었던 때문이 아닌가.」

그 말에 신 성호는 후딱 눈물 젖은 얼굴을 들고 두 손으로 영민의 양 어깨를 턱 벌려 집으면서 형아 내 재주가 그처럼 「 , 비상하질 못하여 형을 이 마당에서 웃겨 보낼 수가 없구나! 용서 하여라, 꼬마야! 이럴 줄 알았더라면 대동강변 부벽루에서 땅개를 좀 덜 패 주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사모치게 일어 나네.」

「응?……」

「다 아네, 다 알아. 춘심이의 오빠 애꾸눈이가 오늘 색시를 맞아 들인다네. 춘심이가 어제 저녁 오빠의 집에 갔다가 모든 것을 다 듣고 왔다네.」

「음, 운수가 불길하여 요모양이 되었네. 그런데 자네는……」

하고 영민은 그때 흐늑흐늑 울고 있는 춘심을 바라보았다.

「응, 춘심이가 종시 남비 밥을 끓여 보겠다는 거야. 몇 달 동안이나 끓여 볼래는지, 그리 신통치는 않지만……」

「나두 다 아네, 나두 다 알아.」

하고 영민은 신 성호의 말투를 본받아 보았다. 오 창윤에게서 벌써 다 들은 이야기다.

「허어, 어떻게 그걸?……」

「무선전신이 다 통하고 있는 거야.」

「참 저 김 준혁 병원에 있던 허 운옥이가 자네의 자네의……?」

「그건 또 다 어떻게……?」

「무선전신이 다 통하고 있는 거야.」

이번에는 신 성호가 영민의 말투를 본받았다.

「영민씨!」

하고, 그때 좌악좌악 울고 섰던 춘심이가 머리를 들어 영민의 얼굴을 다정하게 쳐다보면서

「분이는 본래부터 나쁜년은 아니었어요!」

그 한 마디를 톡하고 배앝아 놓고는 또 자꾸만 느껴 우는 춘심이었다.

「백군, 춘심을 용서해 주고 가게. 말이 모자라서 못 다 하는 춘심이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여 주고 가게. 이번 못 만나면 사과할 기회를 영영 놓치겠다구, 오빠의 잔치에도 안가고 부랴부랴 달려 온 춘심을 관대히 처분해 주고 가게. 기생이 된 춘심을 생각하지 말고 탑골동 분이를 생각해 주고 가게.」

「…………」

그러나 영민은 끝끝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춘심이의, 아니 박 분이의 심정을 모르는 영민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춘심이가 제 멋대로 동행하고 제 멋대로 원하는 소원을 다 받아 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 즈음 얼굴의 절반을 목도리로 포옥 가리운 운옥이가 저편 돌기둥 뒤로 몸을 숨기듯이 하며 영민의 성장한 늠름한 자태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니 지금 영민이 , 앞에서 울고 있는 것이 저 무서운 박 준길이의 누이 동생이 아닌가?……

부르르 운옥은 몸을 떨었다.

2[편집]

그때였다.

이 역사적인 비분과 흥분 속에서 파동치며 흐르는 군중의 머리 위에 돌연 요란한 발차의 종이 사정없이 울리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후닥닥 놀랐다. 예기하지 못했던 종 소리는 결코 아니언만 그 차디찬 금속성의 요란한 음향도는 오늘 이 마당에 있어서는 신경을 가진 그 무슨 괴물인 양 무섭게 흥분해 있는 것 같았다.

「으와아 ──」

하는 우렁찬 함성(喊聲)!

「반자이 반자이!」

를 미친듯이 부르는 흥분한 군중! 난무하는 깃발의 파도! 짓궂이게 울려대는 발차의 종소리!

아들과 부모, 아내와 남편, 오빠와 누이, 형과 아우, 친구와 친구 ── 떠나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의 오오, 눈물의 바다여, 권력의 마당이여, 비분의 수라장이여!

「하야꾸 · 미나 · 죠오샤 · 시롯! (다들 빨리 차에 오르라) ──」

세 명의 수송 지휘관의 벽력같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뉘 분부라 거역하랴. 지남철에 끌리는 쇠부치와도 같이 가족들은 차창 가로 허벙지벙 밀려들 갔다.

영민은 들창으로 머리를 내밀며 느껴우는 춘심을 향하여

「분이, 감사하오. 이 마당에 있어서 나는 과거의 모든 것을 잊어 버렸소.

안심하고 신군을 오래 오래 모셔 주시요.」

「영민씨!」

그러면서 춘심이가 한 걸음 바싹 창가로 다가 섰을 때 짓궂이게 울리던 발차의 종이 딱 멎어 버렸다.

「꼬마, 성공하게!」

「음 ──」

그것은 아까 귓속말로 속삭인 영민의 탈주 계획을 의미하는 한 마디었다.

「성공하면 북경으로 가서 장 일수를 만나 주게. 만나서 내 말을 전해 주게. 내 청춘에 불을 붙였다가 물을 끼얹은 어여쁜 여인과 지금 남비 밥을 끓이는 중이라고 ──」

「음, 전하구 말구 ──」

「그리고 일본 역사에 낙젯국만 먹다가 야마모도에게 뺨을 얻어 맞던 문학 소년 콘사이스가 멀지 않아 세상을 경도시킬 대걸작을 발표할테니 그때를 기다려 달라구 ──」

뚜우, 뚜우, 뚜우우우 ── 그때 이 비극의 최후의 막을 닫히는 발차의 기적소리가 사람들의 고막을 찢듯이 울렸다.

「반자이!」

「반자이!」

「으와아아 ──」

홈이 떠나 갈것 같은 우렁찬 만세성과 발광을 하듯이 휘날리는 어지러운 깃발의 물결 속에서 영민은 그 순간, 극히 낯익은 얼굴 하나를 발견하고

「아아 ──」

하고 기절을 할 듯이 외쳤을 때는 이미 그 육중한 차체가 덜컹하는 둔한 충동과 함께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반자이!」

「반자이!」

함성은 그칠 줄을 모르고 깃발의 물결은 멎을 줄을 모른다.

「운, 운옥이가……운옥이가 아닌가!」

그것은 분명 운옥 임에 틀림 없었다. 저편 돌 기둥 옆에서 눈물을 씻으며 씻으며, 찢어져 나갈듯이 손수건을 흔들어대는 오오, 五[오]년 전 그대로의 가여운 모습 허 운옥의 얼굴이 거기 없었던 것이다.

「아아, 운옥이, 운옥이!……」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영민의 감각이, 기억이 번개같이 새로워지는 순간, 밀물처럼 쏴하고 영민의 전신을 격렬히 습격해 오는 형언할 수 없는 반가움이여, 그리움이여, 눈물겨움이여!

「운옥이다! 운옥이다!」

도라지탑의 전설에서 사랑의 정의(定義)를 가르치던 운옥이…… 절망의 구렁지에서 애국가를 부르던 운옥이……태극령 고개에서 준길이의 겁탈을 죽음으로 막은 운옥이 ── 그러한 운옥이가 가지가지의 가엾은 자태가 영민의 잠자고 있던 심장을 비수처럼 쑤시고 지나가는 순간,

「운옥이를 만나야 한다!」

하고 부르짖자 훌떡 들창을 넘어 나갈려고 한 발을 문지두리에 휙 올려 놓던 또 바로 그 찰나였다.

기차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마주 보이는 층층대를, 뭐라고 연방 외치면서 정신없이 뛰어내려오는 또 하나의 낯익은 얼굴이 후딱 영민의 시야에 뛰어 들어왔던 것이니

「아앗, 유경이!」

그렇다. 그것이야말로 몽매에도 그러던 오 유경 ── 어린애를 꽉 부여안고 산산이 흩으러진 머리카락을 연방 추켜 올리며, 물결치는 군중 속을 미친 듯이 헤매이는 안경 쓴 얼굴 오 유경!

「유경이! 아아, 유경이다!」

그렇게 한번 더 부르짖자 마자 휙하고 영민의 몸뚱이는 들창을 넘어 나갔다.

아니, 들창을 넘어 나가는 그 순간,

「아부나잇!(위험하다) ──」

하고 고함을 치면서 영민의 몸뚱이를 왈칵 부둥켜 안은 것은 수송 지휘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렇다. 위험 천만의 일이다. 그때는 벌써 아우성을 치며 따라 가던 가족들도 그만 넋을 탁 잃어버리고 멎지 않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면 안 되리만큼 기차의 속력이 빨라진 때었다.

「반자이!」

「반자이!」

짓궂인 만세성도 인제는 멀어지고……

「유경이! 운옥이! 유경이! 운옥이……」

휘익 바람을 일으키면서 구내를 빠져 나가는 들창밖으로 뒷다리를 잡힌 채 상반신을 미친 사람처럼 내저으며 영민은 마치 함정에 빠진 맹수(猛獸)처럼 안타깝게, 절절하게 고함을 쳤다.

「유, 경, 이 ──」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고함을 쳤다.

「운, 옥,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