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3권/32장
밤 안개 흐르는 항구에서
[편집]1
[편집]밤 열 시가 거의 가까운 무렵이었다.
명월관 사무실에 들러서 물어 보니 춘심은 없었다. 손님이 불러서 인력거를 보내긴 하였으나 춘심은 벌써 다른 요정으로 불리워 간 뒤가 되어서 인력거꾼 박 서방은 그냥 돌아 왔다는 것이다.
「그래요? ─」
성호는 머리를 기웃거렸다. 분명히 박 서방과 같이 나간 춘심이가 아닌가.
「그래 손님은 하는 수 없이 딴 기생을 불렀답니다.」
그러면서 젊은 사무원이 의심쩍은 얼굴로 성호를 쳐다 보았다.
「미안하지만 손님은 어떤 분이었읍니까?」
「당신은 누구신데요?」
「춘심이의 남편입니다.」
성호는 그 어떤 수치감을 무릅쓰고 당당한 춘심이의 남편이라는 얼굴을 크게 한번 지어보였다.
「아, 그러십니까! 신 성생이시구려. 난 또 누구시라구?」
교활한 사무원은 춘심이와 동거 생활을 하고 있는 신 성호를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한 것이다. 출판사 관계로 성호도 이 사무원과는 몇 번인가 대면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손님은 누구요?」
「아, 저…… 저……」
사무원의 혀 끝이 잘 돌아가지 않는다.
「최 달근이요?」
「어디가요? 저, 저…… 아현동 오선생입죠.」
춘심이의 경력을 잘 알고 있는 사무원이었다.
「오 창윤!」
성호는 가느다란 신음과 함께 다시금 손을 뻗쳐 온 오 창윤의 능글맞은 얼굴을 뇌리에 그려 보며
「박 서방 좀 만나게 하여 주세요.」
「네, 네 ─」
사무원은 황급히 보이를 불렀다. 성호는 보이의 뒤를 따라 현관 밖으로 나가 인력거 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박 서방을 불러 주고는 다시 들어 갔다.
「아, 선생님이 어떻게?」
박 서방은 꺼불 허리를 굽혔다.
「춘심은 어디 갔어?」
「아, 춘심 아가씨…… 에헤헤헷……」
「바른대로 말을 해. 어디 갔어?」
「네, 그것이 말씀이야요.」
「빨랑빨랑 말을 못 하겠나?」
「네, 헤헷…… 아가씨를 모시고 돈화문 앞까지 왔을 때, 손님이 누군지 모르느냐고 묻길래, 아마 아현동 오 선생일 껏이라구, 아까 오 선생이 오시는 걸 봤냐구 혔더니, 아가씨는 암말없이 대륙극장(단성사) 앞까지 와서, 에이, 세상이 모두 귀찮어! 박 서방, 물 구경이나 가요, 물 구경이나 가요, 하면서 자꾸만 한강으로 나가자는 겁지요. 그래 아까씨 미치셨느냐구 했더니, 뺑하니 화를 내시면서, 박 서방이 무슨 참견이야? 돈 냄 되지 않어? 안 갈려거든 그만 둬! ─ 아, 그래 어떡헙니까? 한강까지 모시구 갔읍지요.」
「그래서?…… 그래 그 다음을 빨리 이야기 해!」
「한강 다릿목에서 차를 내려 난간에 기대고 서서 한참동안이나 강물을 내려다 보고 섰더니 또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도루 들어 가자고 하면서 차을 탔읍지요. 그래 잘 됐다구 생각하면서 경성역까지 와서 아가씨는 또 차를 내렸답니다.」
「경성역 앞에서?」
「네, 그리고는 돈 백 원을 집어 주면서 어서 들어가라는 거야요. 그래 아가씨, 어딜 가시느냐고 물었더니만 그런 건 물을 필요 없으니, 요정으로 가서는 그저 없어서 못다려 왔다고 하면 되지 않느냐고요.」
「인력거에서 내려서는 어디로 갔는지 몰라?」
「아주 풀끼없는 걸음걸이루 경성역 안으로 들어 가셨답니다. 그래 하두 근심이 되어서 지금 막 신 선생 댁을 찾아 가려는 참에 신 선생이 오시지 않았읍니까!」
「인천이다! 춘심은 월미도로 간 것이다!」
「옛, 월미도라굽쇼? ─」
그러는 박 서방을 남겨두고 신 성호는 요정 앞 좁은 골목을 허둥지둥 빠져 나오기가 바쁘게 때마침 눈 앞에서 손님을 부리우는 종로 三[삼]정목 정류장에서 경성역행 전차를 잡아 탔다.
2
[편집]인천행 기차는 한 시간 만에 있었다. 성호는 기차를 탔다. 기차가 부평을 지날 무렵부터 창 밖에는 짙은 밤 안개가 흐르고 있었다.
열한 시가 훨씬 넘어서 성호는 인천에 내리는 몸이 되었다. 인천 거리에는 해무(海霧)가 더한층 짙었다. 그 젖빛깔 도는 짙은 안개의 담벼락을 뚫고 성호는 쏜살같이 월미도로 달려 갔다.
「이 길을 춘심이도 분명 걸었을 것이다!」
육교(陸橋)를 건느면서 성호는 자기의 발자국마다 춘심이의 발자국을 발바닥에 느끼는 것이었다. 통행금지 시간이 지난 해안통에는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한두 번 순찰 경관의 불심검문을 받았으나 사정을 말하고 통과를 하였다.
성호는 곧장 초탕 옆에 있는 간이식당을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고 한두 번 본 적이 있는 낯익은 여급에게 춘심이가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때 여급은 머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아 ─ 니요. 보이지 않았어요.」
하며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늘밤 이 근방에서 투신 자살을 한, 무슨 그런 사건은 없었읍니까?」
「몰라요. 그런 말은 통 못 들었는데요. 왜 무슨 그런 염려가 계신가요?」
「아니, 그저 공연히……」
성호는 간이식당을 나와 저번 춘심이가
「죽을래면 이런 데서 죽는 게 제일일 꺼야.」
한, 바로 그 바위 위로 찾아 가 보았다. 두꺼운 안개의 장막 속에서 옭옭 해조음(海潮音)이 들려 온다. 성호는 일종 비장한 감정으로 위태로운 바위 사이를 조심성스럽게 걸어서 절벽 위에 서 있는 커다란 바위에 올라가 보았다. 캄캄한 사방이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춘, 심, 이 ─」
성호는 커다란 목소리로 춘심을 불러 보았다.
「춘, 심, 이 ─」
또 한번 불러 보았으나 성호의 귀에 들리는 것은 다만 옭옭 하는 해조음뿐이 아닌가. 성호는 성냥을 그어 바위 위를 휘이 둘러 보았다. 혹시나 춘심이의 흰 고무신이 한 컬례 고스란히 놓여 있지나 않을까하고……
「내가 너무 지나치게 생각을 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은 정녕 다행한 일이다. 성호는 다시금 바위에서 내려와 간이식당 앞을 지나면서
「오늘 밤이구, 내일 아침이구, 혹시나 춘심이가 들르면 제발 꼭 집으로 돌아 오라구, 내가 신신 부탁을 하더라구, ─ 그렇게 꼭좀 말을 전해 주시요.」
그런 말을 여급에게 부탁을 하고 성호는 다시 육교를 건너 이번에는 축항 근처로 가 보았다. 축항 근처에는 심신이 다같이 피곤한 성호의 한 몸을 쉬일 수 있는 여관이 있었다. 춘심이와 한두 번 묵어간 여관이다.
「춘심이가 정말로 죽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야!」
거닐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런 결론이 생기는 것이었다.
「내일 아침 집으로 돌아 가면 사시미와 정종이 또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지!」
성호는 빙그레 입가에 미소를 띄었다.
축항 근처에 오다가다 하나씩 선 전등불이 짙은 안개 속에서 후광(後光)과 같은 원을 그림 그리고 있었다. 출렁거리는 물결 소리 뿐, 아무 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성호는 가만히 쇠말뚝 위에 걸터앉아 보았다.
「후우 ─」
하고 긴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성냥을 그으려 하였을 때 어디선가
「첨벙 ─」
하는 물소리가 났다. 그것은 분명히 그 무슨 육중한 물건이 수면에 떨어져 내리는 소리임에 틀림 없었다.
3
[편집]「응?……」
성호는 거의 반사적으로 쇠말뚝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항내의 즐비한 배 돛대의 수풀이 안개 속에서 몽롱하게 내다 보일 뿐이 아닌가. 안개 속에서 울고 섰던 춘심이가 세상이 정말 귀찮아져서 최후의 결심을 하고 축대 위에서 물 속으로 몸을 내던지는 광경이 마치 무슨 영화에서 본 그러한 장면과 「더불」되어 성호의 상상력을 극도로 자극하였다.
그러나 그 첨벙 ─ 하는 소리가 어느 방향에서 들렸는지, 성호의 기억은 명확하지를 못하여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거 누구야? ─」
하고 고함을 치는 굵다란 사나이의 목소리가 축대 맨 끝 토막에서 들려오지를 않는가. 그러나 거기에 대답은 없고 또 한번 사나이의 목소리가
「거 누구야? ─」
하다가 이번에는 기겁을 하여
「앗, 사람이다! 사람이 빠졌다.」
그것은 분명 배 위에서 들리는 외침이었다. 뒤이어 이 배, 저 배에서
「뭣, 뭣이?」
「사람이 빠졌다! 사람이……」
「어디서…… 어디서?」
「여기다, 여기다!」
뱃사람들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 왔고 칸테라의 불빛이 앞을 탁 막아 놓은 안개의 장막 속에서 도깨비 불처럼 우쭐우쭐 춤을 추면서 이 배 저 배에서 갈팡질팡이다.
「춘심이다! 춘심이로구나!」
한낱 기우였었다고, 그리고 한낱 기우이기를 바라고 일시적이나마 마음을 놓았던 성호는 그만 펄떡 정신을 채렸다. 오싹하고 달려드는 격렬한 몸서리가 그의 전신을 쳤다. 그는 목을 놓아 커다란 소리로
「춘심이 ─ 춘심이 ─」
하고 외치면서 우쭐거리는 칸테라의 불빛을 향하여 총알처럼 달음박질을 쳤다. 꿈결처럼, 정녕 꿈길과 같은 허벙지벙하는 발걸음이다.
「첨벙 ─」
뒤이어
「첨벙 ─ 첨벙 ─ 첨벙 ─」
뱃사람들이 물에 뛰어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앗, 저기다! 저기 떠내려 간다!」
「보이질 않어! 불빛을 불빛을……」
헤엄을 치면서 부르짖는 목소리다. 그때, 축항이 끝나는 맨 끝 토막에 정박해 있던 배에서 칸테라 불이 이리저리 춤을 추면서
「앗, 축항 밖으로 떠내려 간다! 이리들 와요! 빨리, 빨리!」
첨벙첨벙, 물장구 치는 소리가 점점 성호의 귀에 가까이 들렸다. 성호가 축항 끝까지 달려 가 보았을 때, 거기에는 배에서 뛰쳐나온 사람들이 어쩔 줄을 모르고 있다.
「춘심이 ─ 춘심이 ─」
기겁을 하여 달려가 성호는 보이지 않는 해면을 향하여 고함을 쳤다.
「춘심이 ─ 춘심이 ─」
성호는 부리나케 양복을 벗기 시작하였다.
「아, 아시는 분이요?」
뱃사람 하나가 다가 와 물었다.
「아내입니다! 내 아내입니다!」
「아, 그러셔요?……」
첨벙 ─ 이윽고 양복을 벗어버린 성호는 샤츠 바람으로 물 속에 뛰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