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3권/3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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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수선 봉황호[편집]

1[편집]

석달 전, 뒷탑골 논두렁 길에서 인생의 거머리인 박 준길을 쓰러뜨리고 아버지 묘 앞에서 자살을 결행하였으나 하늘은 어이하여 홍 금순 아니, 허 운옥으로 하여금 안식의 보금자리를 갖게 하지 않으시고 오늘날 또 이 마당에서 이러한 처참한 꼬락서니를 운옥으로 하여금 보게 하는지 통 알 바가 없다.

인간의 고적과 우주의 적막 속에서 운옥은 허덕이며 훤하게 동 터오는 효명(曉明)의 험한 길을 정처없이 헤매이다가 그날 저녁 수수밭 길과 논두렁 길만을 골라 걸어서 머터니(馬灘里[마탄리])나루를 거쳐 평양 의성에 도착하였다.

외성에는 운옥이가 五[오]년 전, 식모살이를 하던 먼 친척 집이 있다. 거기서 역시 동자 일을 거두어 주면서 한달 폭이나 지나다가 허스럼한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도 구식으로 빗고 평양을 떠나 서울로 올라 왔다.

이렇다할 하등의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서울은 운옥에게 있어서 제 二[이]의 고향과도 같았다. 서울에 내리고 보니 운옥의 발걸음은 이상하게도, 그러한 욕망은 추호도 없었건만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김 준혁 박사의 병원을 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구[九]월 초순 어떤 날 저녁 무렵이었다. 그러나 운옥의 발길은 병원을 향하여 걸어는 왔으나 또 한편 이상하게도 운옥의 발길은 병원의 문지 두리를 넘지를 못하고 한 시간 동안이나 행길에서 망서리고 있었다. 해가지고 전기 불이 왔을 때까지 운옥은 공연히 병원의 주위를 삥삥 돌고만 있었다.

갈 곳이 없다. 어디를 가느냐, 어디서 오래느냐? ── 운옥은 준혁을 생각하였다. 一[일]년전, 자기에게 결혼을 청하던 김 준혁 박사를 생각하였다.

선생님의 품에 어린애처럼 안기어서 그저 좍좍 울고 싶어만 지는 운옥이었다.

「선생님은 물론 제 일신을 거두어 주시겠지. 애정으로도 그렇고 인간적으로도 그렇고……」

그러나 이미 죽음의 길을 떠났던 운옥으로서는 단지 한 사나이와의 애정관계 만을 가지고는 일단 취했던 죽음의 길을 단념할 수는 없었다. 자기가 일단 김 준혁 박사 앞에 나타난다는 것은 곧 김 박사와의 결혼을 의미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 누구와의 안일한 결혼생활을 꿈꿀 수 있는 운옥의 생리는 아니었다. 갈 곳이 없어서 준혁을 찾는다는 것이 한낱 나 어린 소녀들의 장난과도 같았다. 갈 곳이 없어서 찾아 간 자기를 옛날처럼 온 정열을 가지고 맞이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갈 곳이 왜 없다는 말이냐? 나에게는 갈 곳이 너무나 뚜렷하게 있지 않느냐!」

운옥은 몸을 생각하였다. 처음에는 강물을 생각하였으나 다음에는 바닷 물을 생각하였다. 그 순간, 탁 막혔던 운옥의 앞길이 훤하게 트이기 시작하였다. 아버지 묘 앞에서 권총을 이마에 갖다 대었을 때 보이던 백도(白道) ── 무한한 길이를 가지고 지구 위에 길게 뻗친 한 줄기 찬란한 흰 길 운옥의 눈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운옥은 그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우선 그 흰 길은 운옥을 인천 앞 바다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운옥은 그 길로 기차를 타고 인천으로 갔다.

운옥은 아버지 묘 앞에서 결행하지 못한 것을 이번엔 꼭 결행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평양 객주집 마누라의 친절로 말미암아 그날 밤으로 결행하려던 운옥의 생각이 시간적으로 연장이 되었던 것이다.

「보매 외로운 몸인것 같구만, 집에서 하룻밤 누하구 가라구.」

귀에 익은 평안도 말투가 다사로워 그날 밤을 평양 객주에서 운옥은 묵었다.

2[편집]

장사아치와 선원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여각이다. 고맙고 송구해서 아침 일찌감치 일어나 주인 마누라를 따라 부엌으로 나간 것이 인연이 되어

「도리어 미안하구만. 우리 집은 늘 이렇게 바빠서…… 색시 같은 이가 좀 있어 주었으면 오죽 좋겠나!」

그러는 마누라를 뿌리치고 나올 수도 없어서 하루 이틀, 하루 이틀 하다가 그만 이집 식모 이쁜이가 되고만 것이었다.

뱃 사람들의 밥상 보기로, 술상 보기로 하루 종일 시달리다가 밤이 되면 운옥은 골방 한 구석에서 주인집 더벅머리 아이들과 함께 골아 떨어지곤 하였다. 그러다가 재밤중 같은 때 뚜우 . 뚜우 . 하는 기적소리에 번쩍 눈을 뜨면 운옥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영민을 생각하였고 혜경을 생각하였다.

영민이의 애인이 하필 왜 혜경이냐고, 운명의 희롱을 한탄도 하여 보았으나 정녕 그것은 꿈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악착한 현실이 아니었던가.

「금동이가 그이의 소생이었다!」

운옥은 눈물이 펑펑 쏟아져 베개를 적시었으나 그 누구를 원망할 수 있는 몸도 아니었다. 원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자기 일신의 괴롭지 못한 운명일 따름이다.

영민에게 그러한 애인이 있다는 것을 좀더 미리 알았었던들 자기의 몸을 영민의 앞에 내 놓음으로서 영민에게 그러한 고민을 주지도 않았을 것이며 또한 이미 그러한 사실을 알아채린 운옥으로서 만일 영민이가 그러한 불구의 몸이 아니었던들 운옥은 영민을 탑골동까지 모시고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영민씨! 이 한 몸을 영영 당신의 앞에 내 놓지 않을 터이오니, 조금도 마음 괴롭게 생각지 마시고 혜경이를 길이, 길이 사랑하여 주세요! 그리고 혜경이도 그이를 길이, 길이……」

이윽고 울음을 그친 운옥은 정녕 진심으로, 정녕 티끌 한점 없는 맑은 심경으로 그것을 신명에 원하고 바랬다. 그리고 언젠가 한번은 자기의 몸을 다사롭게 품어 줄 황해의 거센 물결을 생각하곤 하였다.

하루 이틀 날이 갔다. 선원들의 입으로부터 운옥은 이쁜이라고 불리워지기 시작하였다. 언젠가 주인 마누라가

「색시 이름이 무어노?」

하고 묻길래 홍 금순이라고 대답을 했었지만 홍 금순이 보다도 이 집에선 이쁜이가 한층 더 유명하였다. 밥상이나 술상을 나르는 이쁜이에게 말 한 마디라도 걸어 보는 것을 선원들은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전연 생각해 본 적도 없는 하나의 딴 의욕이 운옥의 허탈된 정신 속에 깃들기 시작하였다 . 뱃 사람들을 잘 사귀기만 하면 위험한 압록강을 거치지 않고도 중국으로 밀항을 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중국은 운옥에게 있어서는 마음의 고향이다. 어머니의 유골과 동생의 뼈가 묻힌 곳이다. 十五[십오]년 동안이나 어린 운옥의 영혼을 복돋아 준 추억 많은 땅이다. 조국에 돌아와서부터 품었던 가지가지의 희망의 줄기가 완전히 끊어져 버린 운옥의 마음 속에 살며시 깃들은 것은 한 줄기 가느다란 삶에의 의욕이었다. 애국가를 부른 사상범으로서 그리고 현직 경찰관을 살해한 살인범으로서 필경 지명 수배를 받았을 운옥의 몸으로서는 중국으로 무사히 건너갈 수만 있다면 가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운옥이와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는 장 일수도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운옥이가 고기잡이 배 봉황호의 선장 황일봉이의 호의로서 노자 한 푼 없는 몸으로 중국행을 결심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한달 전의 일이었다.

3[편집]

어선(魚船) 봉황호는 표면으로는 근해 어로(魚撈)를 일삼는 조그만 배였으되 실상은 금이나 아편을 비롯하여 기타 금제품을 밀수하는 배로서 신의주와 안동 사이를 왕래하는 밀선이었다.

선원들의 입에는 무수히 오르내리는 이쁜이기는 하였으나 누구 한사람 이쁜이의 손목 한번 잡아 본이가 없었기 때문에 이쁜이의 약간한 호의가 선장 황 일봉을 적지않게 우쭐하게 하였다.

황 일봉은 중국말이 능숙하다. 그래서 운옥이도 한두 마디 중국어로 대꾸를 한 것이 계기가 되어 두사람은 남이 알아 듣지 못하는 중국 말을 곧잘 썼다.

「어렸을 때 중국서 자랐어요. 금년 여름 뜻하지 않은 병마에 부모를 여의고 오빠 한 분 서주라던가 제남이라던가 하는데 있기는 하지만 아버지와 싸우고 집을 나간 후부터는 통 집안을 돌보지 않아요. 오빠를 한번 찾아 볼래두 여비가 없어서요.」

그러나 눈치 빠른 황 일봉은 운옥이가 단지 여비 문제로서 중국을 못 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금 밀수품이나 아편 밀수입, 그렇지 않으면 그 외의 무슨 중대한 약점이 있어서 밀항을 계획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배가 떠날 임시에는 세관 관리들이 배 조사를 한다지요?」

괜찮어 「 . 우리 배는 고기잡이 배니까 그런 걱정은 없어.」

그 이상 더 자세한 말은 없었으나 이 한 마디의 대화로서 황 일봉은 운옥의 약점을 잡았고 또 그 약점에 대하여 눈 감아 준다는 약속이 암암리에 성립 되었던 것이다.

「한 보름 동안 남선엘 갔다 올테니 기다려.」

그것이 한달 전 이야기인데 남선에 갔었던 황 일봉이가 다시 운옥이 앞에 나타난 것은 바로 어제 저녁의 일이었다.

「오늘 밤 한 시에 떠날테니 열한 시 쯤해서 축대 맨끝 방파제 앞에서 기다려.」

오늘 저녁을 먹고 나가면서 황은 그런 말을 운옥의 귀에 속삭이었다. 그래서 열한 시에 운옥은 조그만 보따리 하나를 옆구리에 끼어 몰래 안개 흐르는 방파제 앞으로 나갔다. 과연 황은 안개 속에서 운옥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이쁜이!」

황은 운옥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배를, 배를 타기 전에 내 말을 들어 줘!」

「무슨, 무슨 말인데요? ──」

아차, 실수였구나! 하고 뉘우쳐 보았으나 일은 무척 절박하였다.

「뭘 그래?……다 알지 않어?……자아……」

황은 돌연 운옥의 목덜미를 무섭게 끼고 운옥이의 몸뚱이와 함께 축대 위에서 딩굴기 시작하였다. 준길이 만이 아니라, 사나이들의 세계에는 이러한 함정이 항상 있는 것일까?…… 운옥의 전신이 오싹하였다.

「떠들기만 해 봐라! 네가 왜 중국으로 밀항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지를 내가 다 알고 있다!」

알 리가 만무하지만 그러나 무서운 야욕에 불타는 황은 있는 말 없는 말을 섞어 가면서 운옥을 무섭게 협박하였다.

운옥은 무섭다기 보다도 그저 죽고 싶어 졌다. 조그마한 여유만 있대도 운옥은 자진하여 물속으로 뛰어 들어 가고 싶은 욕망이 불길처럼 일어 났다.

「아버지!」

무서운 반항을 계속하면서 운옥은 아버지를 찾았다.

한편 황은 손수건으로 운옥의 입을 틀어막고 이러한 경우가 있을 상 싶어 미리 준비해 두었던 허릿 발을 꺼내 운옥의 두 발목을 가까스로 동여 매는데 성공을 하였다. 준길이의 눈을 찌른 어머니의 은장도는 불행히도 보따리 속에 들어 있었다.

발목을 동여매는데 성공한 황은 이번에는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손수건을 목구멍까지 틀어막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운옥의 두 팔목은 황의 구두발 밑에서 능그러지기 시작하였다.

운옥은 가만히 생각하였다 . 생각한 끝에 운옥은 저항하기를 멈추었다. 운옥의 저항이 멎는 것을 본 황은 비로소 회심의 웃음을 입 가에 짓고 몸을 일으키며

「자아, 이쁜이! 인제 반항을 그만 두고 내 말을 들어!」

그 순간이었다. 운옥은 있는 힘을 다 하여 떠밀어 내고 빗비슴히 경사가 진 축대 위에서 자기 몸뚱이를 축대 벼랑턱으로 힘껏 굴려 보내고 말았다.

딩굴딩굴 굴다가 운옥의 몸뚱이는 마침내

「앗!」

하고, 부르짖는 억압된 황의 가느다란 외침과 함께 벼랑턱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첨벙 ──」

하는 물 소리를 들으며 일순간 정신없이 서 있던 황 일봉은 그 어떤 공포감으로 말미암아 이쁜이를 구출할 생각도 없이 다름박질을 치어 발판을 사뿐사뿐 건너서 자기 배 봉황호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누구냐?」

하는 고함 소리는 그와 거의 동시에 다른 배에서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