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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극장/3권/4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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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조서의 일귀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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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으로 허 운옥은 경기도 경찰부에서 엄중한 문초를 받은 후 즉시로 유치장에 수감되는 몸이 되었다.

그러나 그후, 이 사건은 북경에서의 방 월령(나미에) 살해 미수, 또는 장욱과의 공범관계(共犯關係)로서 문 정우(고지마) 의 一[일]명의 헌병을 살해한 성질에 비추어 군법회의에 붙이느냐?……또는 단순히 경찰관 박 준길을 살해한 범인으로서 검사국으로 넘기느냐? ── 하는 문제를 싸고 헌병대와 경찰 사이에 약간의 옥신각신이 있기는 하였으나 결국 최 달근이가 양보를 하였기 때문에 범인 체포의 공로가 경찰 당국에 있기도 하여서 마침내 사건을 검사국에서 취급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열흘 만에 운옥의 몸은 치안 유지법 위반(治安維持法違反), 무기 불법 소지죄, 살인 미수 二[이]건(박 준길과 방 월령), 살인 三[삼]건(박 준길과 문정우외 一[일]명의 헌병)── 등의 어마어마한 죄명으로서 엄중히 처단하여 달라는 경찰부의 기소 의견서(起訴意見書)를 첨부하여 피의자 신문 조서(被疑者訊問 調書)와 함께 송국 되었다.

이제 그 대략을 추려 보면 ── 피의자 허 운옥은 어려서부터 열렬한 독립 운동자인 그의 아버지 허 상진과 함께 만주, 북지, 중지 방면으로 돌아 다니면서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보고 자라는 동안에 항일 사상이 굳세게 배양되어 허 상진이가 죽을 때에 물려 준 한 자루의 권총을 항상 베개 속에 넣어 두고 자기의 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 그러다가 야학 졸업식 때 불온한 독립가를 불러 군중을 선동하였다는 것, 돌아오는 길에 마침 애국 청년 박 준길이가 나서서 피의자의 불온 사상을 포기하도록 열렬히 ( )유하였으나 끝끝내 듣지 않고 도리어 장두칼로 박 준길을 죽일려고 찌른 것이 다행히도 눈만 상하고 말았다는 것, 그날 밤으로 양부(養父) 백 봉학의 집을 떠나 행방을 감추고 다니던 중, 서울서 불령선인(不逞鮮人) 장 욱과 알게 되자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항일 행동을 취하는데 보조를 같이 할 것을 굳게 약속하였다는 것, 그러다가 작년 一(일)월 북경으로 가서 장 욱을 만나 온갖 모략과 선전과 파괴 공작에 종사하였다는 것, 그러던 중 캬바레 ─

「용궁」에서 작당을 하여 문 정우씨와 헌병 야마구찌를 살해하고 「용궁」

의 매담 방 월령에게 중상을 입혔다는 것, 작년 八(팔)월에 모종의 불온 사명을 품고 돌아 왔다가 경관 박 준길이가 장모의 환갑으로 고향인 탑골동에 갔었다는 소문을 듣고 뒤를 따라 가서 독립가를 부른 자기의 비밀을 영원히 숨겨버릴 목적으로 박 준길을 총살하고 자취를 감추었던 바 마침내 청량리에서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대강 이러한 골자를 가진 범죄 내용이었다.

운옥의 이러한 진술의 태도로 추측하건데 운옥은 자기 이외의 모든 사람을 사건과의 관계에서 제외할 결심이 엿보일 뿐만 아니라, 환경적인 온갖 외부의 조건을 의식적으로 음폐함으로서 그 죄 가운데서 흠연히 자기 한 몸을 이 세상에서 말살하고자 하는 심경이 알알히 나타나 있었다.

이러한 운옥의 태도는 검사국으로 넘어 와서도 변함이 없었다.

시종이 여일하게 운옥은 경찰에서 한 진술을 되풀이 할 따름이었다.

송국 초일에 있어서의 구류 신문 조서(拘留訊問調書) 가운데 다음과 같은 한 대목이 있었다.

문 ── 경찰서에서 한 네 진술은 틀림이 없는가?

답 ── 대개는 틀림이 없읍니다.

문 ── 약간은 틀린 데가 있다는 말인가?

답 ── 대개는 틀림 없지만 그러나 제가 그처럼 훌륭한 애국자로서 당신네들의 재판을 받는다는 것이 대단히 기쁘면서도 한편 무척 부끄럽습니다.

문 ── 애국자이니 기쁘다?

답 ── 그렇습니다.

문 ── 그러면 네가 또한 부끄럽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답 ── 제 돌아가신 아버님의 영혼 앞에 부끄럽습니다. 경찰 당국의 의견과 같이 그처럼 훌륭하지를 못 했으니까요.

문 ── 그래 너는 지금도 네 행동을 훌륭하다고 생각하느냐?

답 ── 그렇습니다. 다만 제가 만족할 수 있도록 훌륭하지 못한 것을 뉘우칠 따름입니다.

그후 운옥은 여러 차례에 걸쳐 검사의 준엄한 신문을 받고 피의자의 이익이 될만한 증거물이나 증인이 있거든 이야기 하라고 하였으나 운옥은 한 사람의 증인도 필요 없다고 대답하였다.

검사는 피의자에게 대하여 적지 않게 불유쾌한 감정을 품었으나 이 극형에 처할 만한 범죄를 추호도 변명함이 없이 그대로 순순히 인정하는 운옥에 대하여 약간의 호의와 또한 의혹의 념을 품고 피해자의 부친 박 삼룡과 현장의 목격자인 그의 아내 윤 영실과 피의자의 양부 백 봉학을 불렀다.

박 삼룡은 애당초부터 운옥을 극형에 처하기를 원하는 위인인 만큼 운옥에 대한 준길이의 야심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경찰의 의견서를 그대로 승인하였다.

그러나 윤 영실은 달랐다. 약간 다르기는 하였으나 박 삼룡의 협박으로서 성립된 사전 타협으로 말미암아 준길이의 불순한 야욕에 관해서는 어쨌던 자기의 남편이기 때문에 역시 입을 굳세게 다물어버렸다.

백 초시가 증인으로 서는 날, 영민도 아버지와 함께 법정에 나타나서 운옥을 위하여 증인으로 설 것을 자청하여 박 삼룡의 집안과 백 초시 일가의 관계 운옥을 민며느리로 들였다는 이야기, 운옥과 자기와의 관계, 운옥과 준길이와의 관계 애국가를 , 부른 동기, 준길의 겁탈 행위에 대한 운옥의 자기 방위, 운옥의 행방불명, (그러나 김 준혁의 지시를 받아 장 일수를 간호한 대목은 물론 제외하였다) 자기의 학병 출정의 행방을 더듬고자 북경으로 왔던 운옥이가 거기서 장 일수를 만나 용궁에서의 참극에 당면한 이야기, 야전 병원으로 부상당한 자기를 찾아 와 제대가 되어 같이 고향으로 돌아 왔다가 거기서 우연히 박 준길을 만나 준길이의 야욕으로부터 자기를 방위하고 저 권총을 쏘았다는 이야기를 쭉 하고 오늘날의 허 운옥의 범죄를 구성하는 온갖 원인이 모두 자기 자신의 방위를 도모하기 위한 불가피한 피동적인 행위 임을 역설하고 나서, 피의자 허 운옥은 이상과 같은 사실을 전부 숨김으로써 죄 이상의 벌을 원하고 있는 것이니 검사는 그 점에 특히 유의하여 주시와 공정한 입장에서 죄를 벌하여 주도록 간청하였다.

그러나 검사는 피의자 자신이 범죄 사실을 전부 그대로 시인하는 이상, 영민의 증언은 단지 하나의 심증문제(心證問題)로서 밖에 더 취급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미심한 것은 운옥은 그의 진술에 있어서 자기는 백봉학의 양녀라고 말한 점이다. 이제 이 점에 관한 조서의 한 대목을 소개하면 ── 문 ── 너는 증인 백 봉학이의 민며느리로 들어 왔다는데 왜 거짓 진술을 하느냐?

답 ── 아니 올시다. 아버지께서는 혹시 그러한 생각을 가졌을는지 몰라도 저는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수양녀 올시다.

문 ── 백 영민을 장래의 남편으로 생각하고 있었지?

답 ── 아니 올시다. 아무리 제가 배운 것이 없는 몸일지라도 제 동생을 남편으로 생각할 수야 있겠읍니까?

문 ── 증인 백 봉학 부자가 다 그것을 증언하고 있는데 너는 왜 그런 쓸데없는 허위의 진술을 하는가?

답 ── 검사께서는 도리어 그분네들에 증언이 허위에서 나온 것임을 왜 믿지 않는지 모르겠읍니다.

허 상진의 묘 앞에 묻어 두었던 권총을 증거물로 내보이며 피의자가 이것을 그 전부터 가지고 있던 사실을 아느냐고 물었을 때 백 초시 부자는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사실에 . 있어서 그것을 몰랐던 것이다. 제대가 되어 운옥이와 같이 돌아올 때 차중에서 비로소 영민은 알았으나 귀찮아서 몰랐다고 대답하였다.

어쨌던 운옥 자신이 살 길을 찾지 않는 한 영민은 도저히 운옥의 감형을 위하여 노력할 방도가 없었다. 영민 자신이 죽어서 운옥을 구출할 수 있다면 영민은 그것을 서슴치 않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죽어서 운옥을 구해 낼 방도조차 영민에게는 없었다. 손 학규 변호사에게 부탁하여 검사를 누차 찾아보게 하였으나 운옥으로 하여금 삶에 의욕을 갖게하여 운옥 자신이 자기 변명을 일삼지 않는 이상, 감형의 길은 전혀 없었다.

거기서 영민은 박 삼룡과 윤 영실을 누차 방문하여 참된 증언을 하여 달라고 모든 자존심과 적개심을 버리고 머리를 숙였으나 그럴 때마다 삼룡의 기세는 자꾸만 더 올라 가기만 하였다. 입을 악물고 백 초시도 삼룡이 앞에 머리를 숙였다. 그러나 거기 대한 삼룡의 보답은 비웃음과 오만에 찬 홍소(哄笑)가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윤 영실은 언( )나 입을 꼭 다물고 시아버지의 얼굴만 쳐다 볼뿐, 이렇다 할 일언반구도 없었다.

「삼룡이, 한번만 자비심을 베풀어 다고! 이 백 봉학이, 지금까지의 온갖 자존심과 모든 체면을 버리고 이렇게 네 발 밑에 머리를 좁는다!」

백 초시는 대청 위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삼룡을 향하여 댓돌에 꿇어앉아 머리를 숙였다.

「사정을 들어 줄 마음이 생기다가두 네 말버릇이 고약해서 못들어 주겠다! 내가 언제 네 친구였더냐? 내가 언제 너의 집 행랑살이를 했다더냐?」

백 초시는 한층 더 머리를 숙이며

「박, 박……박 주사!」

그것은 정녕 말이 아니고 울음이었다.

「아버지!」

그 순간, 영민은 입을 악물고 엎드려진 아버지의 몸을 안아 일으키었다.

「가십시다, 아버지!」

「영민아, 너무 서둘지말고 가만히 기다려라! 기다리면 박……박 주사께서…… 자, 자비심을 내리신다!」

「아닙니다, 아버지! 저런 자에게 자비심은 무슨 자비심이……」

영민은 아버지의 노쇠한 몸을 무리로 일으켜 가지고 다짜고짜 대문 밖으로 끌고 나갔다.

「하, 핫, 핫, 핫……금 같은 논을 팔아 대학엘 보냈더니 학교는 헛 댕겼구만! 그래 변호사 나리가 됐다면서두 제 예편네 하나 못 내 놔 줘?……

핫, 핫, 핫, 핫 ──」

다방골 골목에 매연이 자욱한 어떤 몹시 추운날 저녁 무렵이었다.

영민의 부축을 받으며 백 초시는 두 눈을 꽉 지레감고 소경이 된채로 주첨주첨 걸어간다.

「아버지, 아버지를 그 자에게 머리를 숙이게 한 죄는 모두 이, 이 못난 자식에게 있읍니다! 용서하세요, 아버지!」

「아, 아니다. 모두가 다 이 미련한 아비의 탓이니라! 시대가 다른 줄을 모르고 자식은 아비의 말을 듣는 줄로만 생각했던 내가 불찰이었다!」

「아버지!──」

영민도 눈을 감았다. 아버지와 아들은 둘이가 다 소경이 된채 정다운 동무인 양 어깨동무를 하고 어둑어둑한 다방골 골목을 터벅터벅 걸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