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도
<序曲> 創造의 마음
[편집]자유로 하여 된 꿈일진댄 아름다운 꿈이라도 꾸고 싶다. 세상을 경도시킬 걸작이야 꿈엔들 그려보기 바라련만 하다못해 <마코>라도 한갑 생기거나 그렇지 않으면 계집이라도…… 쓸모 없는 시시한 꿈이 비록 몇 시간 동안이나마 현실의 시름을 잊고 지날 수 있는 행복된 잠을 또 깨워놓는다.
어디로 들어왔는지도 모를 한 마리의 새앙쥐 - 바르르 책상 귀로 기어올라 꿰어진 양말짝을 하릴없이 쏜다. 그리던 그림에 붓대를 대다 말고 조심스레 손을 어이돌려 책상 위로 늘어진 꼬리를 붙드는 찰나, 날쌔게도 고놈의 새앙쥐 팩 돌아서며 손잔등을 물고 늘어진다. 아야아 놀래어 손을 뿌리치니 어이없다. 새까만 방안은 보이는 것 없이 눈앞에 막막하고 곤히 잠든 아버지의 숨소리만이 웃목에 한가하다.
무슨 꿈이야 못 꾸어서 하필 새앙쥐에게 물린담. 꿈조차도 아름답게 못 가진 자신이 가엾기도 했다.
상하는 반듯하게 누웠던 몸을 모으로 뒤챘다.
눈을 뜬대야 보일 턱이 없는 새까만 방안이요, 게다가 눈을 감기까지 했건만 눈앞은 환히 밝다. 빽빽이 둘러선 송림, 그 산턱을 떨어져 약수터 풀밭 길을 오불꼬불 금주는 걸어 내려온다.
「벌써 아침 물참을 보고 오십니까?」
「네, 머 번보다 별로 일러뵈지도 않는데요.」
「아침 물은 방불이 차지요 ?」
「막 가슴이 뚫어지는 것 같에요 」
제법 만나기나 한 듯이 말을 주고받기까지 해본다.
이렇게 금주가 안타깝게 잊히지 않은 것은 그 여자에게 반했으므로설까. 아무리 이성에 주렸었기로서니 가슴이 반이나 썩어진 듯한 그의 표정 - 배꽃을 비웃는 하이얀 얼굴은 금시라도 피를 콸콸 쏟아낼 듯한 정경이 아닌가. 그런 여자, 그 여자를 못 잊는다면 대체 어찌 해볼 심판인가. 그래도 그 여자가 못 잊힌다면 자기는 오직 한가지만을 아는 짐승과 같지 않은가. 이것이 자기의 본성일까. 사람의 마음일까.
문득 이상한 촉감에 몸서리를 쳤다. 이성을 상대로 일어나는 불길임을 알았다. 초저녁 한동안을 이불 속에꺼 쌔우치던 불길이다. 맹렬히 붙음이 안타깝다. 끌 수 없음이 가엾다. 공상과 공상의 접촉은 기름과 같이 기세를 더한다.
등잔에 불을 켜고 일어나 앉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운 꼴이다. 담배라도 있으면 하니 <마코> 향기가 혀끝에 일층 새롭다.
몇 번이고 털어 봐도 없던 담배가 있을 턱 없는 지갑귀를 다시 털어 보니 소용이 있을까. 삿귀라도 돌아가며 들쳐보자니 없는 꽁초는 샘날 수 없다.
허하지 않는 담배는 있었다. 선반 위에 아버지의 장수연 갑이다. 도덕상 금단의 율칙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율칙을 범하기 벌써 몇번 - 초저녁에도 꺼내고 남은 것이 몇대 되지 않음을 안다. 노여(勞餘)에 아껴가며 한대씩 피는 담배여니 이제 마지막 남은 밑바닥을 긁어내기 거북함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을 그리는 마음보다 못지 않은 형세의 담배맛이다. 참을래 참을 수 없어 한대에 적당할이만한 분량을 다시 집어내어 궁여의 고안 그대로 신문지 여백을 죽 찢어 두르르 말아 침으로 붙인 다음, 성냥갑을 더듬어 들고 문 밖으로 나왔다.
스무날 달이 하늘에 밝다. 누동 옆 개천에 돌돌돌 물소리가 청아하다. 달밤에 물소리는 이상히도 마음을 당긴다.
담배를 붙여 물고 누동으로 나갔다.
한바퀴 뚜렷한 달이 개천 속에 떨어져 잠겼고, 물을 헤치고 달을 찢으며 잘박잘박 역류하는 송사리떼 - 귀엽다 말을 할까. 나불거리는 지느러미, 오물거리는 주둥이, 달빛에 번득이는 찬란한 비늘 - 몸을 뒤챌 때마다 눈이 부신다.
물 속에 가만히 손을 넣으면 놀래어 흩어진다. 그러나 얼마 아니 있어 다시 송사리떼는 몰려와 툭툭하고 길을 막는 손바닥을 주둥이로 치받친다. 정신을 차려 먹고 날쌔게 줌을 쥐니 포드르르 줌 안에서 한 마리의 송사리가 생명을 원하는 듯 꼬리를 떤다.
다시 한번 또 한번 거듭하여보는 사이, 올라가고 또 내려오고 수없이 뒤를 따라 오락가락 몰려다니는 송사리떼임을 깨닫고 평범한 행동에서의 향락만이 아님을 알았다. 본능에 충실하려는 봄의 행사임이 틀림없었다.
본능의 만족을 위한 거룩한 행사에 구속의 손을 대었음이 극히 죄송한 듯하였다. 본능의 만족, 자연의 행사 - 거기에는 털끝만큼이라도 구속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자유는 생명과 같이 절대하다. 미련도 없이 둔덕에 집어던졌던 몇 마리의 송사리를 다시 물 속에 집어넣었다. 물 밖에 자유를 잃었던 몸이 둔탁하게 헤엄을 쳐간다. 오그그 송사리떼가 다시 몰려와 그놈을 에워싼다.
문득 한 마리의 새가 깃을 펴고 물 속에 나타나며 송사리떼를 놀래고 달을 가린다. 누동으로 날아드는 공중에 뜬 해오라기다.
돌아옴을 반겨 맞는 듯 버드나무 상가지 둥우리 옆에 앉았던 한 놈이 끼익 끽 소리를 지르며 목을 뺀다.
무심코 바라보던 상하는 거기에도 봄이 왔음을 알았다. 위태로운 가지 끝에서도 생동의 힘에 못 참는 장난이 한 자웅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생동의 힘, 봄의 사자 - 그것은 물 속에도 공중에도 찾아왔다. 그러나 오직 땅위에 선 자기에게만 없는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촉감에 다시 몸서리를 쳤다. 둘 곳 없는 심사에 담배꽁지를 개천 속에 힘껏 메어던지니 마음이 씨언할까, 난데없는 물살에 송사리떼만이 놀래어 흩어진다.
1. 慾望
[편집]어느 것이라고 맘의 자유에 깃을 쳐본 때가 있었으련만 예술과 계집에의 자유에 깃이 없음이 더욱 한스러웠다. 예술의 신비 속에 생을 찾고, 계집의 아름다움에서 향락을 구했다. 계집에 마음을 두었음이 어찌 이번이 처음이었을까, 여사무원을 건드린 것이 이렇게 자유를 구속하는 원인이 될 줄은 몰랐다.
사장이 눈 건 계집이라고 맘두지 말란법 없지만 사장이 눈 건줄을 모르고 허투루 다룬 것이 실책이었다. 사원 감원은 축출의 빙자요, 눈치에 걸린 것이 축출의 원인이었다.
그렇지만 않았던들 XX회사에는 달마다 오십여 원의 월급을 틀림없이 지출할 것이요, 그것은 또 족히 생활을 지탱해주고 있을 것이다. 돈에 자유가 없으니 예술도 빛을 잃고 계집도 없었다. 부탁은 삼사 곳에 두었으나 용이히 나서는 일자리가 아니다. 기다리기까지의 생활을 객지에서 붙안아가는 수가 없다, 그렇다고 집으로 돌아오니 놀고 먹기가 어렵지 않은가. 어머니 아버지는 밭갈이와 씨뿌리기에 날마다 나섰다. 자기 한 몸의 수양을 위하여 이미 전답 낟가리를 모두 욹어다 썼으니 궁여의 아버지를 받들어야 마땅할 것이나 뜻에 없고 부모의 뜻대로 진작 장가라도 들었더라면 한가지 괴롬만은 모르고 지날 것을…… 또 부모의 조력인들 안될 것인가. 학교를 마치고 얻자, 가정을 이루기까지의 토대를 닦고 얻자, 보다더 완전한 살림에의 포만을 모르는 욕망이 이제 와서 가까스로 괴로움을 던져 주었다.
2. 藝術
[편집]쓸데없는 지난날의 되풀이는 마음만 산란한다. 캔버스를 들고 산으로 올라갔다. 심심하니 소일로서가 아니다. 예술적 감흥에 못 참아서다. 산간의 시내, 곡간의 괴석, 약수터의 풍경-어린 날 모르던 이 모든 고향 풍물이 상하의 붓대를 끌었다. 오늘은 약수터의 풍경을 눈담고 떠난 것이다.
산턱을 떨어져 박힌 커다란 바위 위에 두 다리를 죽 버드러치고 앉았다. 경사진 켠 아래를 내려다 보니 한 폭의 그림 같다.
-건너 산 너머 바라보이는 드높은 교회당 지붕, 그 산턱 밑 떨어져 일대엔 채찍을 들고 소를 몰아 밭가는 농부, 좀더 가까이 앞으로 큰길엔 무엇이 분주한지 끊일새 없이 줄달아 속보를 놓는 행객, 눈 아래 약수터엔 생명을 붙안고 싸우는 수객들- 모두 생을 위한 싸움임에는 틀림없으나 그 아름다운 자연의 경개임에도 흥취를 잃고 허덕이는 고달픈 인간이 상하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다.
약수터엔 지금도 수객들이 때를 잊지 않고 모여들었다. 담창장이․속증앓이․긴병장이 -건강을 잃은 가지가지의 환자가 표주박을 들고 행렬을 짓는다. 금주도 의연히 그들의 행렬에 끼이기를 잊지 않았다.
벼랑진 돌틈 새로 솔솔솔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약수 - 받으면 표주박 안에 보이하게 안개가 서리는 물, 산 속의 정기와도 같은 이 물에 생명을 맡기고 봄을 찾는 그들.
그러나 이 산길에는 이미 봄이 무르녹았으되 그들에게는 봄이 오지 않았다.
벌레 먹은 몸이 서리에 절고, 바람에 시달려 그대로 한겨울 동안 눈 속에 생동의 힘을 빼앗겼던 산간의 생명인 온갖종족- 잣나무․들매나무․설나무․구름나무․소나무 켠을 등지고 떨어진 평지엔 소민재리 ․도라지 ․범부채 ․깜박덩굴․칡덩굴-꼽을래 꼽을 수 없는 초목들은 파랗게 잎새에 초록물이 오르고 줄기는 싱싱하게 살이 찐다.
이것들의 생명을 길러내는 대자연-하늘을 엄한 아버지라면 땅은 자애로운 어머니다. 하늘에 솟은 해는 아버지의 눈이요, 땅속을 흐르는 물은 어머니의 젖이다. 어머니는 젖을 주어 살을 찌우고 아버지는 열을 주어 건강을 단련시킨다. 비교적 숙성이 빠른 진달래와 동동할미는 이미 꽃까지 피웠다.
그러나 이 같은 아버지, 같은 어머니를 가진 자연 속에 생명의 부여는 받았으나 한번 시들은 인간에게는 같은 산 속의 정기를 받되 어머니나 아버지의 단련도 아무러한 효과가 없었다.
삼십 명은 확실히 넘을 수객들의 얼굴에는 한점의 봄빛을 찾을 길이 없고 구름같이 무거운 우울 속에 주름살을 못 편다.
금주, 이미 이 자연의 혜택을 받고자 세고에 병든 몸을 이끌고 산 천리 물 백 리, 천 백릿길을 더듬어 이 산 속을 찾아온 지 이미 이태- 산간의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며 산간의 종족을 길러내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젖가슴 속에 안기어 두 돌의 봄을 맞았건만 금주에게는 봄을 주지 않았다.
그래도 금주는 게을리 하지 아니하고 하루같이 산 속을 뒹굴며 때 찾아 약수터로 내려 왔다.
이렇게 지성을 들여 삶을 위하여 마음을 다하면 서리에 절었던 풀잎이 거센 땅을 들치고 다시 봄을 맞아 파랗게 생을 빛내며 살이 쪄 자라는 것과 같이 금주에게도 다시 봄이 돌아올까. 두드러진 뺨을 능히 감추고 살이 올라 배꽃같이 하이얀 그 얼굴에도 진달래 꽃빛 물이 들어볼까.
이것을 그리는 것은 자유요, 그것은 예술이었다.
데쌍에 시험의 붓을 들었다.
표주박을 한 손에 들고 골짜기의 잔디밭 위에 넋없이 앉은 한 여인의 횡면-흰닭에 검정닭 모양으로 뛰어나게 차린 품이. 그리고 그 날씬한 몸맵시가 금주임에 틀림없었다.
한 사람의 폐병환자를 취급할 것은 잊을 수 없는 대상이었으나 하필 금주를 기리고자 한 바는 아니었건만 참을래 참을 수 없는 예술의 충동에서 시험하려는 붓끝에 못 잊는 금주가 모르는 듯 날아들음이 이상한 감흥을 자아내주었다.
폐병환자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당기는 금주, 애타는 속에서도 못 잊는 예술의 감흥,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심경, 그것을 자연미와 조화시켜놓으려는 충동-그 소재의 하나가 금주다. 금주는 예술이다. 예술 속에 금주가 있다. 금주는 내 붓끝에 가리가리 요리될 것이다. 금주는 이미 내 것이다.
상하의 붓끝은 금주의 얼굴에서 몸까지 선에 힘을 주고 다시 그었다.
금주는 나를 그리라는 듯이 움직도 아니하고 앉아서 장글장글한 햇볕을 가슴에 받으며 산간 너머로 그린 듯이 앉았더니 두세 번의 얕은 기침 끝에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더듬어 오른다. 일상 가서 앉는 샘칫가 바위 위이려니 하였더니 뜻밖에도 상하를 향하여 직로를 놓는다.
「오늘도 풍경이세요 ?」
상하의 앞에 우뚝 와 마주서며 하는 인사다.
「네 그저…… 요샌 어떠십니까?」
「머…… 그저 그래요. 미안하시지만 제 초상 하나 그려주실 수 없을까요 ?」
자진하여서라도 그려주고 싶은 상하의 마음이다.
그러나 대번에 승낙은 싱겁다.
「내가 뭐 그림을 잘 그리나요? 어디.」
「천만에요.」
하다가 금주는 풍경 속에 그려진 여자 위에 문득 눈이 가고 시선에 힘을 준다. 아직 선으로밖에 되지 않은 그림이지만 그 윤곽만으로도 어딘지 그것이 자기임을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 이게 제가 아니에요 !」
금주는 자못 놀라며 물었다.
「네?」
「왜 풍경 속에다 저를 이렇게 그리세요?」
「그걸 모르십니까 ?」
금주는 가볍게 미소를 짓는다.
「알 수 없이 금주씨가 그립습니다.」
「알겠어요. 그러나 선생님 용서하세요. 저는 며칠을 못 가 죽을 인간인가보아요. 오늘도 각혈을 했답니다. 」
「모르지 않습니다. 」
「그러시면서 선생님은……」
「내 마음을 나도 모릅니다. 까닭 없이 금주씨가 그립습니다. 」
「선생님, 절 잊어주세요. 저는 살겠다는 욕망밖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저도 봄이 그립습 니다. 봄을 잊을 길이 있겠어요.」
세상이 쓰림을 못 참는 듯 한숨 끝에 주려잡은 눈가의 주름.
상하는 다시 더 말을 못했다. 삶의 위대한 힘에 마음이 찔린 것이다.
삶의 힘, 그것은 금주의 욕망의 전부다. 청춘에 살려는 봄꿈의 보금자리에서 썩어지는 봄의 생명이 가엾기도 했다, 안타깝기도 했다.
상하는 이 가엾은 생명을 예술의 힘으로 영원히 살리고 싶었다. 다시 붓끝에 정신을 모았다.
「저를 그린 그림은 저를 주셔야 해요. 네? 선생님 약속하여주실 수 있겠지요?」
금주는 두 번 세 번 당부를 한다.
3. 愛慾
[편집]그림을 그리는 며칠 동안 쉬임 없이 자란 산 속은 진초록으로 푸름이 거울같이 맑다. 산 속은 청춘의 요람이라고 할까, 생기에 뻗은 산 속, 이 산 속에서 금주가 시들음이 거짓말 같지 않은가.
상하는 금주의 신변에 염려를 못 잊으며 일단의 정성을 다하여 끝낸 그림을 들고 산으로 기어올랐다. 샘칫가 도랑을 끼고 잔솔을 피하여 기름진 풀잎을 밟으며 오불꼬불 돌았다.
샘칫가 바위 위에는 언제나 같이 금주가 앞가슴을 풀어놓고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할미꽃은 벌써 머리를 다 풀었군요. 」
「진달래꽃도 지나봐요. 」
하다가 금주는 캔버스 위에 주었던 눈을 문득 돌려,
「아이, 다 되었군요, 그림이……」
그리고 손을 내밀어 그림을 눈앞으로 당긴다
「원하셨던 초상만을 그린 것이 아니라 금주씨의 마음에 어떨까 해서 퍽 자제됩니다. 」
다 그려졌다고 아는 그림이언만 상하는 그래도 어딘지 만족할 수 없는 듯이 들여다본다.
「아녜요. 이 그림이 제겐 더욱 좋아요.」
「글쎄 그러시다면……」
「이게야 완성한 예술품이 아니에요? 이 그림 속에는 생명의 고민상이 여실히 표현되어 있어요. 봄을 모르는 제 심정이 제 얼굴에 어떻게 이렇게 드러났을까요. 」
「영원한 기념으로 드립니다. 」
「아이, 고맙습니다. 」
하기는 하나 맘에 없는 그림을 받는 듯이 별안간 표정이 구름같이 흐린다.
상하는 까닭을 몰라 다음 말에 간난을 느끼고 준비에 바쁜 동안,
「현실은 참 괴로운 것이예요. 이것이 산 인간의 풍경이 아니겠어요? 생명은 무엇으로 따 질 수 있습니까? 선생님 !」
「글쎄요, 욕망의 전부라고나 할까요. 」
「적절한 말씀이에요. 욕망이 제어된 곳에 생명은 없을 거예요. 청춘이 구깃구깃 구기운 제 심정이 어떠할 것입니까? 선생님 !」
「가는 봄은 다시 돌아올 때가 있습니다. 」
「아녜요, 그야 위로엣말씀이지요. 인생의 봄은 거기에 적용되지 못하고 영원히 늙는가 보 아요. 이제 보세요. 제가 며칠을 더 사나. 모든 것은 다 거짓이에요. 속아서 사는 것이 인 생의 진리 같습니다. 저 너머, 저 교회당의 종소리는 성스럽게도 사람의 마음을 유혹합니 다만 인간의 생명이야 좌우할 수가 있겠어요. 전도부인의 설교에 이 약수터에서도 벌써 몇 사람이나 쫓아가 기도를 받았습니다만 기적도 없었습니다. 저는 이제 이 그림 속에서 만 영원히 살까 합니다. 요구하였던 초상이 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그림을 얻게 되니 저라는 고깃덩어리는 썩어져도 정신만은 영원히 살 것이에요.」
「세상을 그렇게만 해석하실 수 있을까요 ?」
「그렇지 않으문 뭐 기적이게요 ! 단지 제가 요구하던 제 초상만을 그리셨다면 저라는 인간밖에 더 그린 것이 되겠어요? 여기에는 제가 모든 인간을 대표한 한 본보기로 된 것이 더욱 좋아요. 세상을 비웃고 제 정신만을 살린 것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새파란 청춘이 거기에 영원히 남는 것 같습니다.」
「그러시면 애초에 초상을 원하셨던 뜻은……?」
「그건 묻지 마세요. 」
「비밀인가요?」
「비밀이랄 건 없지만 말씀드리기 거북해요.」
「거북한 일 같으면야 나더러 원했으리라고요 ?」
「그럼 걸 기어코 알으셔야 하나요? 뭐 말씀 못 드릴 것도 없긴 없어요. 그럼 얘기하지요. 저는 이미 약흔을 했드랍니다. 결혼을 앞으로 얼마 남기지 않고 참다 못해서 이리로 왔에 요. 그러니 사랑하는 이를 이렇게 멀리 떠나 보내고 객지에서 그이가 오죽이나 제사 그리 울 게야요. 그래서 저는 아내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그이의 심정을 위로하여 드리려고 선생님에게 제 초상을 원하였던 게지요. 말하자면 저는 괴악한 년이에요. 제 목숨만이 살 아나겠다고 아내로서의 책임을 피하는 년이 괴악한 년이 아니에요, 선생님 !」
상하는 놀랐다. 금주를 위하여 정력을 다한 예술품이 자기를 박차고 금주를 사랑하는 사나이의 청춘을 위로함으로 금주의 사랑에 만족을 줌이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예술화시킴으로 만족할 것 같던 상하의 심정은 예술에 있지 아니하고 애욕 속에 있었다.
애욕, 그것은 예술보다도 위대한 힘으로 상하의 마음을 불태웠다. 이 세상에서의 온갖 힘으로도 꺾을 수 없는 가장 큰 힘 같았다.
누가 그러고자 해서 그런 힘을 길러왔을까? 한 포기의 풀이 때가 오면 아무리 꺾어버려도 몇 번이고 거센 땅을 들치고 나와 기어이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그것과도 같이 꺾이지 않는 힘이었다.
「금주씨 ! 그 그림을 내 눈앞에서 용감하게 찢어 보일 수 없습니까? 없습니까? 금주씨!」
그것은 곧 자연의 힘이요, 생명의 부르짖음인 듯이 열정에 카는 외침이었다.
벅찬 소리를 듣는 듯이 고민의 표정이 깊어간다고 보여지는 순간, 금주는 서너 번의 괴로운 기침 끝에 붉은 핏덩이를 선지로 쏟는다.
뿌리박은 사랑의 위대한 힘에 용납할 수는 없는 고민의 상징일까. 그렇지 않으면 사랑에 제어된 구기운 청춘의 발버둥일까.
상하는 오직 아연하고 더할 말에 간난을 느꼈다.
4. 生命
[편집]마음의 평화를 잃은 상하는 그날 밤을 거의 새다시피 고요히 앉아서 이러한 경우에 들어맞을 선철의 명귀를 무수히 끌어다 자위에의 수단을 일삼아도 보았으나 그것은 모두 거짓부렁이었다.
자기의 예술은 금주의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힌 것같이 아무리 하여도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힐 길이 없었다.
그것은 마치 생명을 잃은 것과도 같았던 것이다.
예술은 곧 자기의 생명이 아니었던가. 십여 년 동안 예술을 위하여 닦은 공부는 그대로 자기의 생명이었다. 만일 자기에게 예술이란 세계가 제어되어 있었던들 자기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영원한 예술 속에 깊이 잠들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오직 예술 그 속에서만 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거지같은 오늘의 생활-그것도 다만 예술에 충실하려는 마음이었다. 밥만을 위하여 삶을 찾았더라면 자기는 결코 이러한 처지에서 한대의 담배에조차 궁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에서 축출을 당할 때 XX회사도 자기를 끌었고, 00사에서도 말이 있었다.
그러나 예술을 희생하고 뜻 아닌 곳에서 밥을 빌 수는 없었다. 그것은 곧 자기라는 생명을 희생하는 것과도 같았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결코 그것을 후회하는 것이 아니다. 한 개의 예술을 창조할 때 그 속에서 생을 찾고, 생의 가치를 느낌으로 자기라는 존재를 내다본다. 불안한 세태에 참을 수 없는 고독을 느낄 때에도 어떠한 예술적 소재를 머릿속에 두고 캔버스와 마주앉을 때 그리하여 새로운 세계가 붓끝에서 창조될 때 역시 자기의 생은 그 속에서 빛났다.
약수터의 풍경을 그릴 때에도 금주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정성을 다하여 기울여 넣었다. 그리하여 예술 속에 남아질 영원한 생명을 꿈꾸고 세상을 비웃었다.
그러나 금주의 사랑 앞에서는 예술의 힘도 생명을 잃는다. 확실히 자기는 금주를 못 잊는 것으로 자기의 아픔을 증명할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이 자기의 마음일까, 사람의 본성일까. 상하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를 풀 길이 없었다.
내어다볼 수 있는 죽음을 앞에 놓은 금주나, 씩씩한 건강을 자랑하는 자기나 생명이 있는 점에 있어서는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금주의 생명을 가이없어하며 캔버스 위에 그려놓은 자기의 생명도 반드시 가이 없게 보아주어야 마땅할 것이다. 아니 금주의 생명이 도리어 자기의 생명을 비웃을는지도 모른다. 그림을 원하여 은근히 자기의 마음속에 알뜰하게 사랑의 패를 주는 듯하다가 약혼설을 말하여 냉정히 돌려따는 것은 자기를 조롱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더우기 그 그림으로 사랑하는 이의 만족을 주자는 것은 확실히 자기의 예술을 비웃어줌도 되는 것이다.
금주를 마음대로 할 수 있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 그림을 다시 빼앗아 금주의 눈앞에서 빠악빡 찢어 불살라버리든지 하지 아니하고는 언제까지나 마음의 평화는 올 것 같지 않았다.
<終曲> 生命의 性格
[편집]이튿날 상하는 약수터의 아침 물참에 금주를 찾아 떠났다.
그러나 이태 동안을 하루같이 빠져본 일이 없다는 금주가 오늘은 약수터에도 산 속에도 보이지 않았다. 반나절 동안을 산 속에서 기다려보았어도 금주의 그림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상하는 문득 그날의 각혈을 연상하고 그의 죽음을 뒤미처 생각해보며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금주는 죽음의 길을 찾아간 것이 아니요, 삶의 길을 찾아간 것이다. 금주가 거처하던 주인집을 찾으니,
「네에, 그 아가씨요 ? 회당으로 갔지요. 전도부인이 늘 예수를 믿으면 병이 낫는다구 해 두 쓸데없는 소리라구 귀담아도 듣지 않더니 어젯밤 피를 연거푸 세 번인가를 토하고는 근 력없이 밤새도록 누워서 뜬눈으로 새고 나서 무슨 생각으로 아침 일찌기 그리로 갔답니 다.」
주인마누라는 분명히 대답하였다.
상하는 금주의 흉보를 듣는 것에 못지 않게 놀랐다. 그렇게도 믿지 못하던 교회당을 필야엔 금주도 찾아가고야 만 것이다. 생명을 위하연 알고라도 속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금주의 마음이었다.
상하는 교회당을 향하여 발길을 옮겼다. 황혼의 불그레한 노을 속에 잠긴 신비로운 교회당의 지붕을 바라보며 산턱 길을 추어 올랐다.
뜻밖에도 금주는 교회당 뒤 솔밭 잔디밭 위에 힘없이 앉아서 건너 산허리 밑의 마알간 바다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리로 또 오세요? 왜 자꾸 이렇게 저를 따라다니는 게에요?」
상하의 그림자를 대하기가 바쁘게 금주는 독을 뿜는 듯한 날카로운 눈초리로 새침하여 쏜다.
상하는 그 대담함에 놀라고 멈칫 섰다.
「젊은 계집이 산 속에 혼자 앉았는데 따라오는 것은 무슨 뜻이에요 ?」
「어제는 실례했습니다. 」
대답에 궁하여 늦어진 인사를 어색하게 하였다.
「글쎄 안 그래요? 선생님 ! 선생님에게 생명이 있다면 응당히 저에게도 생명은 있어야 옳을 것이 아닙니까? 생명은 선생님의 전유물만이 아니니까 말이에요. 안 그래요? 선생님!」
「그러나 선생님은 선생님의 청춘만을 위하여 남의 청춘을 짓밟으려는 것이 욕망의 전부 이지요? 다 알고 있어요. 저인들 왜 청춘이 그리울 길이 없겠습니까? 빠아에서 카페로 카 페에서 티이루움으로 이렇게 굴러다니는 동안 가지가지의 세파에 마음이 늙은 계집이랍니 다. 왜 청춘이 그리울 길이 없겠어요. 청춘에 목말랐지요. 영원한 청춘에 목이 말랐에요. 그러나 선생님 ! 생명이 있고야 청춘이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된 팔자에 머 거리낄 것 있겠어요? 털어놓고 시원히 말씀드리지요. 저는 실상 남편도 아무 것도 없는 계집이에요. 선생님이 다자꾸 저에게 맘을 두는 눈치를 엿보고 선생님의 사랑의 정도를 저울질하여보 자고 제가 초상화를 청해본 것이에요. 그랬드니 그 그림 속에서 선생님의 사랑이 열정적 인 것을 찾고, 어떡하면 그 열중된 선생님의 사랑의 불길을 고이 재워볼 수 있을까 하는 데서 냉정히 선생님의 마음을 단념시키자는 것이 남편이 있다고 거짓말을 꾸며대인 원인 이었드랍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럼에두 불구하시구 저더러 그 그림을 찢으라고 열정적 으로 부르짖으실 때 저같이 천한 계집을 그처럼 사랑해주시는 선생님의 그 정열에 감복하 여 청춘의 힘을 이길 길이 없이 흥분되는 마음에 그만 각혈까지 하게 되었드랍니다. 마음 이 흥분되면 또 각혈을 할까 두렵습니다. 저를 다시는 괴롭히지 말아주세요, 네? 선생 ! 이게 저는 선생님에게 알뜰한 원이에요. 영원히 잊어주실 수 있겠지요? 네? 선생님!」
말끝을 여물게 맺을 길이 없이 뒤미처 스미는 눈물을 금주는 걷어잡지 못한다.
순간, 상하는 금주의 농락에 불쾌함을 느끼기보다 뜨겁다 못하여 냉정하지 않을 수 없는 금주의 그 청춘의 정열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춘에 끓는 그의 마음이 오죽이 괴로왔을까. 괴롭다 못하여 냉정하여졌을까. 냉정히 거절을 하고도 참을 수 없이 떨어뜨리는 눈물-청춘에 끓는 정열의 눈물이 아니었던가. 생명이 발버둥치는 냉정한 눈물이 아니었던가. 생명은 곧 청춘의 힘이다. 이 눈물 앞에 어찌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자기가 생명으로 아는 생명과 금주가 생명으로 아는 생명과의 그 생명을 가지는 성질은 비록 다르다 하되 생명인 점에 있어서는 공통된다. 오직 목숨을 생명으로 아는 금주에게 있어선 이 이상 더 생명을 사랑할 줄 아는 아름다운 맘씨를 가지기 바랄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이러한 맘씨가 금주의 마음속에 숨어 있었음에도 헤아리지 못하고 그의 마음을 괴롭혀온 상하는 자책의 마음에 고개가 숙었다. 대답에의 빈곤을 느껴 어리둥절하는 동안 교회당의 저녁 종소리가 성스럽게 산곡을 울린다.
뜨앙! 뜨방! 땅땅! 땅……
그것은 마치 상하의 난처한 정경에 동정이나 하려는 것처럼 금주를 불러들였다
비탈진 산턱 길에 조심스레 발을 옮겨 짚은 금주의 힘없는 거동을 멀거니 바라보며 성스럽게 들려오는 종소리의 음향 속에서 상하는 알듯하면서도 알 수 없는 생명의 성격에 고요히 생각을 깃들이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