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등잡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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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삽화(秋夕揷話)[편집]

일 년 삼백육십 일 그중의 몇 날을 추려 적당히 계절 맞춰 별러서 그날만은 조상을 추억하며 생의 즐거움에서 멀어진 지 오래된 그들 망령을 있다 치고 위로하는 풍속을 아름답다 아니할 수 없으리라.

이것을 굳이 뜻을 붙여 생각하자면, 그날그날의 생의 향락 가운데서 때로는 사(死)의 적막을 가끔 상기해 보며 그러함으로써 생의 의의를 더한층 뜻있게 인식하도록 하는 선인(先人)들의 그윽한 의도에서 나온 수법이 아닐까.

이번 추석 날 나는 돌아가신 삼촌 산소를 찾았다. 지난 한식(寒食)날은 비가 와서 거기다 내 나태가 가(加)하여 드디어 삼촌 산소에 가지 못했으니 이번 추석에는 부디 가 보아야겠고 또 근래 이 삼촌이 지금껏 살아 계셨던들 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 적이 많아서 중년에 억울히 가신 삼촌을 한번 추억해 보고도 싶고 한 마음에서, 나는 미아리(彌阿里)행 버스를 타고 나갔던 것이다.

왼 산이 희고 왼 산이 곡성(哭聲)으로 하여 은은하다. 소조(簫條)한 가을바람에 추초(秋草)가 나부끼는 가운데 분묘는 5년 전에 비하여 몇 배수나 늘었다. 사람들은 나날이 저렇게들 죽어 가는구나 생각하니 저으기 비감하다. 물론 5년 동안에 더 많은 애기가 탄생하였으리라. 그러나 그렇게 날로 날로 지상의 사람들이 바뀐다는 것도 또한 슬픈 일이 아닌가.

다섯 번 조락(凋落)과 맹동(萌動)을 거듭한 삼촌 산소가 꽤 거친 모양을 바라보고 퍽 슬펐다. '시멘트'로 땜질한 석상(石床)은 틈이 벌었고 친우(親友) 일동이 해 세운 석비(石碑)도 좀 기운 듯싶었다.

분토(墳土) 한 곁에 앉아 잠시 생전의 삼촌 그 중엄하기 짝이 없는 풍모를 추억해 보았다. 그리고 운명하시던 날, 장사 지내던 날, 내 제복(祭服) 입었던 날들의 일, 이런 다섯 해 전 일들이 내 심안(心眼)을 쓸쓸히 지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또 비명(碑名)을 읽어 보았다. 하였으되,


公廉正直 信義友篤  (공렴정직 신의우독)
金蘭結契 矢同憂樂  (금란결계 시동우락)
中世摧折 士友咸慟  (중세최절 사우함통)
寒山片石 以表哀情  (한산편석 이표애정)


삼촌 구우(舊友) K씨의 작(作)으로 내 붓 솜씨다. 오늘 이 친우 일동이 세운 석비 앞에 주과(酒果)가 없는 석상이 보기에 한없이 쓸쓸하다.

그때 고 이웃 분묘에 사람이 왔다. 중로(中老)의 여인네가 한 분, 젊은 내외인 듯싶은 남녀, 10세 전후의 소학생이 하나, 네 사람이다. 젊은 남정네는 양복을 입었고 젊은 여인네는 구두를 신었다. 중로의 여인네가 보퉁이를 펴 드니 주과를 갖춘 조촐한 제상(祭床)을 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향을 피우고 잔을 갈아 부으며 네 사람은 절한다.

양복 입은 젊은 내외의 하는 절이 더한층 슬프다. 그리고 교복 입은 소학생의 하는 절은 너무나 애련하다.

중로의 여인네는 호곡한다. 호곡하며 일어날 줄을 모른다. 젊은 내외는 소리 없이 몇 번이나 향 피우고 잔 붓고 절하고 하더니 슬쩍 비켜서는 것이다. 소학생도 따라 비켜선다.

비켜서서 그들은 멀리 북망산(北邙山)을 손가락질도 하면서 잠시 담화하더니 돌아서서 언제까지라도 호곡하려 드는 어머니를 일으킨다. 그러나 좀처럼 일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때 이날만 있는 이 북망산 전속의 걸인이 왔다. 와서 채 제사도 끝나지 않은 제물을 구걸하는 것이다. 그 태도가 마치 제 것을 제가 요구하는 것과 같이 퍽 거만하다. 부처(夫妻)는 완강히 꾸짖으며 거절한다. 승강이가 잠시 계속된다.

이 광경을 바라보고 앉았는 동안에 내 등 뒤에서 이 또한 중로의 여인네가 한 분 손자인 듯싶은 동자(童子) 손을 이끌고 더듬더듬 나려오는 것이었다. 오면서 분묘 말뚝을 하나하나 자세히 조사한다. 필시 영감님의 산소 위치를 작년과도 너무 달라진 이 천지에서 그만 묘연히 잊어버린 것이리라.

이 두 사람은 이윽고 내 앞도 지나쳐 다시 돌아 그 이웃 언덕으로 올라간다. 그래도 좀처럼 여기구나 하고 서지 않는다.

건너편 그 거만한 걸인은, 시비(是非)의 무득(無得)함을 깨달았던지, 제물을 단념하고 다시 다음 시주(施主)를 찾아서 간다.

걸인은 동쪽으로 과부는 서쪽으로─.

해는 이미 일반(日半)을 지났으니 나는 또 삶의 여항(閭巷)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리라. 코스모스 핀 언덕을 터벅터벅 내려오면서 그 과부는 영감님의 무덤을 찾았을까 걱정하면서 버스 선 곳까지 오니까 모퉁이 목로술집에서는 일장(一場)의 싸움이 벌어진 중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거성 입은 사람끼리다.

구경(求景)[편집]

전문(專門)한 것이 나는 건축인 관계상 재학 시대에 형무소 견학을 간 일이 더러 있다. 한번은 마포(麻浦) 벽돌 공장을 보러 간 일이 있는데 그것은 건물을 보러 간 것이 아니라 벽돌 제조의 여러 가지 속을 보러 간 것이니까 말하자면 건축 재료 제조 실제를 연구하는 한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죄인들의 생활이라든가 혹은 그들의 생활에 건물 제조를 어떻게 적응시켰나를 보러 간 것이 아니고 다만 한 공장을 보러 간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까 직공들은 반드시 죄인들일 필요도 없거니와 또 거기가 하국(何國)의 형무소가 아니어도 좋다. '클래스' 전부라야 열두 명이었는데 그날 간 사람은 겨우 칠팔 명에 불과하였다고 기억한다.

옥리(獄吏)의 안내를 받아 공장 각 부분을 차례차례 구경하기로 되었다. 구경하기 전에 옥리는 우리들에게 부디부디 다음 몇 가지 점에 주의해 달라고 일러 주는 것이었다. 즉 담배를 피우지 말 것, 그들에게 무슨 필요로든 결코 말을 건네지 말 것, 그네들의 얼굴을 너무 차근차근히 들여다보지 말 것 등이다. 차례대로 이윽고 견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벽돌 제조 같은 것에는 추호의 흥미도 가지지는 않았다. 죄인들의 생활, 동정(動靜)의 자태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이 견학이 나로 하여금 즐겁게 하여 주는 이유의 전부였다. 나는 일부러 끝으로 좀 쳐지면서 그 똑같이 적토색(赤土色) 복장을 몸에 두르고 깃에다 번호찰(番號札)을 붙인 이네들의 모양을 살피기로 하였다. 그런데 과연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끝없는 증오의 시선을 우리들에게 던지는 것이 아니냐. 나는 놀랐다. 가슴이 두근두근해 왔다. 그리고 제출물에 겁이 나서 얼굴이 달아 들어오는 것을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너무나 똑똑이 불쾌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들을 나는 차마 바로 쳐다보는 재주가 없었다.

자기의 치욕의 생활의 내면을, 혹 치욕이라고까지 하지는 않더라도 결코 남에게 떠벌려 자랑할 것이 못 되는 제 생활의 내면을 어떤 생면부지 사람들에게 막부득이(莫不得已) 구경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누구나 다 싫어하리라. 앙불괴어천 부천쾌어인(仰不愧於天 俯天快於人), 이런 심경에서 사는 사람이라도 그런 일점(一點)의 흐린 구름이 지지 않은 생활을, 남이 그야말로 구경거리로 알고 보려 달려들 때에는 저으기 불쾌할 것이다. 항차(況此) 죄인들이 자기네들의 치욕적 생활을 백일(白日) 아래서 여지없이 구경거리로 어떤 몇 사람 앞에 내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에 그들의 심통함이 또한 복역의 괴로움보다 오히려 배대(倍大)할 것이다.

소록도(小鹿島)의 나원(癩院)을 보고 온 이의 이야기를 들으면 아무리 석존(釋尊) 같은 자비스러운 얼굴을 한 사람이 내도(來到)하여도 그들은 그저 무한한 증오의 눈초리로 맞이할 줄 밖에 모른다 한다. 코가 떨어지고 수족이 망가진 자기네들 추악한 군상을 사실 동류 이외의 어떤 사람에게도 보이기 싫을 것이다. 듣자니 그네들끼리는 희희낙락하기도 하며 때로는 연애까지도 할 듯싶은 일이 다 있다 한다.

형무소 죄인들도 내가 본 대로는 의외로 활발하게 오히려 생활난에 쪼들려 헐떡헐떡하는 사파(娑婆)의 노역군들보다도 즐거운 듯이 일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만 그러면서도 남의 어떤 눈도 싫어하는 까닭은 말하자면 대등의 지위를 떠난 연민, 모멸, 동정, 기자(忌恣), 이런 것을 혐오하는 인정 본연의 발로가 아니고, 다름없는 것이 아닐까 한다.

가령 천형병(天刑病)의 병원(病源)을 근절코자 할진대 보는 족족 이 병 환자는 살육해 버려야 할는지도 모르지만 기왕 끔찍한 인정을 발휘해서 그들을 보호하는 바에는 될 수 있는 대로 그들의 심정을 거슬려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하다면 그들이 제일 싫어하는 '구경'을 절대로 금해야 할 것이다. 형무소 같은 것은, 성(盛)히 구경시켜서 써 죄과(罪過)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좋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좀처럼 구경을 잘 시키지 않는 것은 역시 죄수 그들의 심정을 건드리지 않도록 하는 깊은 용의(用意)에서가 아닌가 한다.

예의(禮儀)[편집]

걸핏하면 끽다점(喫茶店)에 가 앉아서 무슨 맛인지 알 수 없는 차를 마시고 또 우리 전통에서는 무던히 먼 음악을 듣고 그리고 언제까지라도 우두커니 머물러 있는 취미를 업수이 여기리라. 그러니 전기기관차의 미끈한 선, 강철과 유리 건물 구성, 예각(銳角), 이러한 데서 미(美)를 발견할 줄 아는 세기(世紀)의 인(人)에게 있어서는 다방의 일게(一憩)가 신선한 도락(道樂)이요 우아한 예의(禮儀) 아닐 수 없다.

생활이라는 중압은 늘 훤조(喧噪)하며 인간의 부드러운 정서를 억누르려 드는 것이다. 더욱이 현대라는 데 깃들이는 사람들은 이 중압을 한층 더 확실히 감지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를 보아도 교착(交錯)된 강철과 거암(巨岩)과 같은 콘크리트 벽의 숨찬 억압 가운데 자칫하면 거칠기 쉬운 심정을 조용히 쉴 수 있도록, 그렇게 알맞은 한 개의 의자와 한 개의 테이블이 있다면 어찌 촌가(寸暇)를 에어 내어 발길이 그리로 옮겨지지 않을 것인가. 가(加)하기를 한 잔의 따뜻한 차와 가구(街衢)의 훤조한 잡음에 바뀌는 아름다운 음악이 있다면 그 심령들의 위안 됨이 더한층 족하다고 하지 않으리요.

그가 제철공장의 직인이건, 그가 외과의실의 집도인이건, 그가 교통정리 경관이건, 그가 법정의 논고인이건, 그가 하잘것없는 일용 고인(雇人)이건, 그가 천만장자의 외독자이건 묻지 않는다. 그런 구구한 간판은 '네온사인'이 달린 다방 문간에 다 내려놓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다 같이 심정의 회유(懷柔)를 기원하는 티 없는 '사람'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곳에서는 누구나 다 겸손하다. 그리고 다 같이 부드러운 표정을 하는 것이다. 신사는 다 조신하게 차를 마시고 숙녀는 다 다소곳이 음악을 즐긴다.

거기는 오직 평화가 있고 불성문(不成文)의 정연하고도 우아 담박한 예의 준칙이 있는 것이다.

결코 이웃 좌석에는 들리지 않을 만큼 그만큼 낮은 목소리로 담화한다. 직업을 떠나서 투쟁을 떠나서 여기서 바뀌는 담화는 전면(纏綿)한 정서를 풀 수 있는 그런 그윽한 화제리라.

다 같이 입을 다물고 눈을 홉뜨지 않고 '슈베르트'나 '쇼팽'을 듣는다. 그때 육중한 구두로 마룻바닥을 건드리며 장단을 맞춘다거나, 익숙한 곡조라 하여 휘파람으로 합주를 한다거나 해서는 아주 못쓴다. 왜? 그렇게 하는 것은 이곳의 불성문인 예의를 깨뜨림이 지극힌 큰 고(故)로.

나는 그날 밤에도 몸을 스미는 추랭(秋冷)을 지닌 채 거리를 걸었다. 천심(天心)에 달이 교교(皎皎)하여 일보 일보가 저으기 무겁고 또한 황막(荒漠)하여 슬펐다. 까닭 모를 애수 고독이 불현듯이 인간다운 훈훈한 호흡을 연모케 하는 것이었다. 나는 달빛을 등지고 늘 드나드는 한 다방으로 들어섰다.

양삼인(兩三人)씩의 남녀가 벌써 다정해 보이는 따뜻한 한 잔씩의 차를 앞에 놓고 때마침 '사운드박스' 울리는 현악 중주의 명곡을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도 또한 신사답게 삼가는 보조(步調)로 그들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고 그리고 차와 음악을 즐기기로 하였다.

오 분 십 분 이십 분, 이 적당한 휴게가 냉화(冷化)하려 들던 내 혈관의 피를 얼마간 덥혀 주기 시작하는 즈음에─.

문이 요란히 열리며 4, 5인의 취한(醉漢)이 고성 질타(高聲叱咤)하면서 폭풍과 같이 틈입하였다. 그들은 한복판 그중 번듯한 좌석에 어지러이 자리를 잡더니 차를 청하여 수선스러이 마시며 방약무인하게 방가(放歌)하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음악은 간곳없고 예의도 간곳없고 그들의 추외(醜猥)한 성향(聲響)이 실내를 흔들 뿐이다.

내 심정은 다시 거칠어 들어갔다. 몸부림하려 드는 내 서글픈 심정을 나 자신이 이기기 어려웠다. 나는 일 초라도 바삐 이곳을 떠나고 싶어서 자리를 걷어차고 일어나서 문간으로 나가려 하는 즈음에─.

이번에는 유두백면(油頭白面)의 일장한(一壯漢)이 사자만이나 한 '셰퍼드'를 한 마리 끌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대경실색하여 뒤로 물러서면서 보자니까 그 개는 그 육중한 꼬리를 흔들흔들 흔들며 이 좌석 저 좌석의 객(客)을 두루두루 코로 맡아보는 것이다.

그때 취한 중의 한 사람이 마시다 남은 차를 이 무례한 개를 향하여 끼얹었다. 개는 질겁을 하여 뒤로 물러서더니 그 산이 울고 골짝이 무너질 것 같은 크낙한 목소리로 이 취한을 향하여 짖어대는 것이었다.

나는 창황히 찻값을 치르고 그곳을 나와 보도를 디뎠다. 걸으면서 그 예술의 전당에서 울려 나오는 해괴한 견폐성(犬吠聲)을 한참 동안이나 등 뒤에 들을 수 있었다.

기여(寄與)[편집]

그다지 명예롭지 못한 그러나 생각해 보면 또 그렇게까지 불명예라고까지 할 것도 없는 질환을 가지고 어떤 학부 부속병원에를 갔다. 진찰이 끝나고 인제 치료를 시작하려 그 그리 보기 좋지 않은 베드 위에 올라 누웠다. 그랬더니 난데없이 수십 명의 흑장속(黑裝束)의 장정 일단이 우─ 틈입하여서는 내 침상을 둘러싸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학부 재학의 학생들이요, 이것은 임상강의 시간임에 틀림없다. 손에는 각각 노트를 들었고 시선을 내 환부인 한 점에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의사 즉 교수는 서서히 입을 열어 용의주도하게 내 치료받고자 하는 개소(個所)를 주무르면서 유창한 어조로 강의를 개시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 참으로 천만의외의 일일 뿐 아니라 정말로 불쾌하기 짝이 없는 봉변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들은 대체 누구의 허락을 얻어 나를 실험동물로 사용하는 것인가. 옆구리에 종기 하나가 나도 그것을 남에게 내보이는 것이 불쾌하겠거늘 아픈 탓으로 치부를 내보이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자그마한 기회를 타서 밑천 들이지 않고 그들의 실험동물을 얻고저 꾀하는 것일 것이니 치료를 받기 위하여는 반드시 이런 굴욕을 받아야만 된다는 제도라면 사차불피(辭此不避)일 것이나 그렇다 하더라도 이 변(變)만은 어디까지든지 불쾌한 일이다.

의사의 진보 발달을 위하여 노구치 박사는 황열병(黃熱病)에 넘어지기까지도 하였고 또 최근 어떤 학자는 호열자 균을 스스로 삼켰다 한다. 이와 같은 예에 비긴다면 치부를 잠시 학생들에게 구경시켰다는 것쯤 심술부릴 거리조차 못 될 것이다. 차라리 잠시의 아픔과 부끄러움을 참았다는 것이 진지한 연구의 한 도움이 된 것을 영광으로 알아야 할 것이요 기뻐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또 생각해 보면 사람은 누구나 다 반드시 이렇게 실험동물로 제공되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은 아니리라. 환부를 내어 보이는 것은 어느 사람에게 있어서도 유쾌치 못한 일일 것이다. 의학만이 홀로 문화의 발달 향상을 짊어진 것은 아니겠고, 이 사회에서 생활을 향유하는 이 치고는 누구나 적든 많은 문화를 담당하는 일원임에 틀림없다. 허락없이 의학의 연구 재료로 제공될 그런 호락호락한 몸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의사는, 교수는, 박사는 그가 어떤 종류의 미미한 인간에 불과한 경우일지라도 반드시 그의 감정을 존중히 하여 일언 간곡한 청탁의 말이 있어야 할 것이요 일언 승낙의 말이 있은 다음에야 교재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겠다. 요는 이런 종류의 기여를 흔연히 하게 하는 새로운 도덕관념의 수립과 새로운 감정 관습의 보급에 있을 것이다.

어떤 해부학자는 자기의 유해를 담임하던 교실에 기부할 뜻을 유언하였다 한다. 그의 제자들이 차마 그 스승의 유해에 해부도를 대이기 어려웠을 줄 안다. 또 어떤 학술적인 전람회에서 사형수의 두개골을 여러 조각에 조각조각 켜 놓은 것을 본 일이 있다. 얼른 생각에 사형수 같은 인류의 해독(害毒)을 좀 가혹히 짓주물렀기로니 차라리 그래 싼 일이지, 이렇게도 생각이 되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혼백이 이미 승천해 버린 유해에는 죄가 없는 것일 것이니 같이 사람대접으로 취급하는 것이 지당한 일일 것이 아닐까. 또한 본인의 한마디 승낙하는 유언을 얻어야 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통상의 예를 갖추어 주어야 옳으리라.

나환인(癩患人)을 위하여─첫째 격리가 목적이겠으나─지상의 낙원을 꾸며 놓았어도 소록도에서는 탈출하는 일이 빈빈히 있다 한다.

만일 그런 감정이나 도덕의 새로운 관념이 보급된다면 사형수는 의례히 해부를 유언할 것이요 나환자는 자진하여 소록도로 갈 것이다.

'내 치부에 이러이러한 질환이 발생하였는데 일찍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듯하오니 아무쪼록 여러 학자와 학생들이 모여 연구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나서는 기특한 인사가 출현할는지도 마치 모른다. 그렇다면 여러 학생들 앞에 치부를 노출시키는 영광을 얻기에 경쟁들을 하는 고마운 세월이 올는지도 또 마치 모르는 것이요, 오기만 한다면 진실로 희대의 기관(奇觀)일 것은 기관일 것이나 인류 문화의 향상 발달에 기여하는 바만은 오늘에 비하여 훨씬 클 것이다.

실수(失手)[편집]

몇 해 전까지도 동경 역두(驛頭)에는 릭샤─즉 인력거가 있었다 한다. 외국 관광단을 실은 호화선이 와 닿으면 제국 호텔을 향하는 어마어마한 인력거의 행렬을 볼 수 있었다 한다. 그들 원래(遠來)의 이방인들을 접대하는 갸륵한 예의리라.

그러나 오늘 그 '달러'를 헤뜨리고 가는 귀중한 손님을 맞이하는 데 인력거는 폐지되었고 통속적인, 그들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통속적인 자동차로 한다고 한다. 이것은 원래(遠來)의 진객(珍客)을 접대하는 주인으로서의 갸륵한 위신을 지키는 심려에서이리라.

그러나 그 코 높은 인종을 모시는 인력거는 이 나라에서 아주 없어진 것이 아니다. 아닐 뿐만 아니라 아직도 너무 많다. 수일 전 본정(本町) 좁고도 복작복작하는 거리를 관류(貫流)하는 세 채의 인력거를 목도하였다. 말할 것도 없이 백인의 중년 부부를 실은 인력거와 모 호텔 전속의 안내인을 실은 인력거다.

그들은 우리 시민이 정히 못 알아들을 수밖에 없는 국어로 지껄이며 간혹 조소 비슷이 웃기도 하고 손에 쥐인 단장을 들어 어느 방향을 가리키기도 한다. 자못 호기(好寄)에 그득 찬 표정이었다.

과문(寡聞)에 의하면 저쪽 예의 준칙으로는 이 손가락질 하는 버릇은 크나큰 실례라 한다. 하면 세계 만유(漫遊)를 하옵시는 거룩한 신분의 인사니 필시 신사리라.

그러하면 이 젠틀맨 및 레이디는 인력거 위에 앉아서 이 낯선 거리와 시민들에게 서슴지 않고 실례를 하는 모양이다.

'이까짓 데서는 예를 갖추지 않아도 좋다.' 하는 애초부터의 괘씸한 배짱임에 틀림없다.

일순 나는 말할 수 없는 불쾌한 감정에 사로잡혀 마음대로 하라면 우선 다소곳이 그 인력거의 채를 잡고 있는 거부(車夫)를 난타한 다음 그 무례한의 부부를 완력으로 징계하여 주고 싶었다.

그러나 또 생각하여 보면 그들은 내가 채 알지 못하는 바 세계적 지리학자거나 고현(考現) 학자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은 단지 일개 평범한 만유객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적지 않은 '달러'를 이 땅에 널어 놓고 갈 것이요 고국에 이 땅의 풍광과 민속을 소개할 것이다. 어쨌든 이들은 족히 진중히 접대하여야만 할 손님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내가 이들을 징계하였다는 것이 도리어 내 고향을 욕되게 하는 것이리라. 그렇건만─.

그때 느낀 그 불쾌한 감정은 조곰도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쪼록 많은 수효의 외국 관광단을 유치하는 것은 우리들 이 땅의 주인 된 임무일 것이며 내방한 그들을 겸손하고도 친절한 예의로 접대하여 써 그들로 하여금 이 땅 이 백성들의 인상을 끝끝내 좇도록 하는 것 또한 지켜야 할 임무일 것이다.

그러나 겸손을 지나쳐 그들의 오만과 모멸을 용납할 수 없다. 이것을 말없이 감수하는 것은 위에 말한 주인으로서의 임무에도 배치되는 바 크다.

이 땅에 있는 것을 그들에게 구경시켜 주는 것은 결코 동물원의 곰이나 말승냥이가 제 몸뚱이를 구경시키는 심사(心思)와는 다르다. 어디까지든지 그들만 못하지 않은 곳 그들에게 없는 그들보다 나은 곳을 소개하고 자랑하자는 것일 것이어늘─.

인력거 위에 앉아서 단장 끝으로 손가락질을 하는 그들의 태도는 확실히 동물원 구경에 근사한 태도요 따라서 무례요 더없는 굴욕이다.

국가는 마땅히 법규로써 그들에게 어떠한 산간벽지에서라도 인력거를 타지 못하도록 취체(取締)하여야 할 것이다.

그들이 부두, 역두에 닿았을 때 직접 간접으로 이땅의 위신을 제시하여 놓아야 할 것이다. 그것을 우선 인력거로 실어 숙소로 모신다는 것은 해괴망칙하기가 짝이 없는 일이다. 동경뿐만 아니라 서울 거리에서도 이 괘씸한 인력거의 행렬을 보지 않게 되어야 옳을 것이 아닌가.

연전에 나는 어느 공원에서 어떤 백인이 한 걸식(乞食)에게 오십 전 은화를 시여(施與)한 다음 카메라를 희롱하는 것을 지나가던 일위(一位) 무골(武骨) 청년이 구타하는 것을 목도한 일이 있다. 이 청년 역 향토를 아끼는 갸륵한 자존심에서 우러난 행동이었음에 틀림없으리라. 그러나 이것은 그 이방인은 어찌 되었든 잘못된 일일 것이니 '투어리스트 뷰로'는 한낱 관광단 유치에만 부심할 것이 아니라 이런 실수가 미연에 방지되도록 안으로서의 차림차림에도 유의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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