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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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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이야기의 하나이다.

옛이야기라니 태고적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생애의 비교적 이른 시절에 속하는 이야기란 말이다.

이른 시절이라고 하여도 나의 나이 지금 오십의 고개를 반도 채 못넘었으니 이르고 지지고 할 것이 없지만 철 들고, 눈뜸이 나날이 새로운 지금으로 보면 무폭하고 주책 없던 그때는 옛시절이었었다. 따라서 이 이야기에나 이야기 속의 행동에 지금으로서 본다면 어리고 불미한 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만한 시간의 핸디캡을 붙여 가지고 읽어 주어야 할 것이다.

해마다 해마다 겨울이 되어 굵은 눈송이가 함박같이 퍼붓는 시절이면 스스로 생각나는 이 많다. 깊은 겨울 고요한 밤 가난한 화로전을 끼고 창밖에 퍼붓는 눈소리를 들을 때에 해마다 겨울마다 변치 않고 생각나는 것은 일찌기 작별한 노군이다. 이글이글 타오는 페치카를 둘러싸고 탁탁 튀는 석탄 소리와 사모바아르의 물끓는 소리를 들으며 검은 창밖에 날리는 눈을 때 아닌 꽃으로 알며 붉은 책 노랑 책 들추면서 옛날의 왕자와 왕비 이야기에 꽃 피울 그 북국의 겨울을 이 땅을 떠난 지 오래인 그는 지금 어떻게나 지내고 있을까 하고 생각할 때에는 그에 대한 회포도 한층 더 깊다. 어떤 눈구덩이에 가 파묻히지나 않았을까. 깃들인 곳 없이 깊은 밤의 추운 거리를 벌벌 떨며 헤매이지나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마을 끝에 딸랑딸랑 방울소리 남기며 개에 맨 썰매 타고 눈 깊은 벌판을 달리고 있을까. 혹은 어떤 거리의 으슥한 회관에 모여서 낯설은 동지들과 함께 일을 꾀하고 있을까……생각할수록 궁금하여지고 동무의 자태가 그리워진다. 그러나 그가 이곳을 떠나 북에 잠긴 지 이미 오래이고 그 후로는 도무지 소식이 없었으니 그의 생사조차 알 길이 아득하다.

이제 고요한 밤 홀로 화로전을 끼고 앉아 밖의 함박눈 소리를 들으려니 그의 뒷일을 궁금히 여기는 회포 심히 간절하다.

큼직하던 노군, 호기롭던 노군, 그를 생각할 때마다 변함 없이 나의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은 당시 군의 가정에 일어났던 조그만 이야기이다. 옛날의 왕비 이야기는 페치카를 둘러싸고 사모바아르 끓는 소리에 귀기울이는 그들에게 맡겨 두고 노군을 생각하는 나는 눈 깊은 이밤 여기서 이야기를 되풀이하려 한다.

생각하면 노군은 나의 가장 친한 동무의 한 사람이었다. 죽마고우는 아닐지라도 막역지정이 두 마음속에 깊이 뿌리 박고 있었다. 하기는 세상에 죽마고우라는 것도 다 믿을 것이 못된다. 자라서 뜻이 다르고 길이 어긋나면 대천지원수로 변하는 소도 없지 않아 있으니까 말이다.

이와 반대로 이르는 바 죽마고우가 아니고 사귄 지 불과 사흘일지라도 생각이 맞고 행동이 같다면 죽마고우지정 이상 몇몇 배의 더 굳은 정이 두 마음을 한 끈에 굳게 얽어매 놓을 것이다. 이미 중학을 같이 하였으니 비록 사흘의 사귐은 아닐지라도 노군과 나와의 경우가 이러하였다.

중학도 삼년을 마치고 사년이 되면서부터는 바야흐로 철이 나고 심이 들 때이다. 단순하고도 하잘것없는 학과를 파지만 말고 좀더 눈을 넓게 떠서 유다른 책도 읽어 보고 동무와 모여 앉으면 색다를 이야기도 하여 볼 때이다. 환경과 생활을 의식하고 넓은 세상을 짐작하고 사회를 알고 시대를 느끼고 세상의 여론에 모름지기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야 할 때이다.

노군과 나와의 사이가 가까와진 것도 이런 때였다. 몇해 동안 서로 무심하였던 것만큼 뜻이 맞는 이상 두 사람의 친분은 컸다. 틈만 있으면 같이 모이고 모여만 앉으면 이야기였다. 철저치는 못하나 일찌기 크로포트킨을 애독하고 ××을 알고 ××××를 짐작하였다. 여름의 서늘한 나무 그늘 속을 찾을 때나 겨울의 따뜻한 화로전을 낄 때에나 항상 이런 이들의 저서를 품에 지니지 않은 때는 없었다.

〈상호 부조론〉의 영역을 샀을 때이다. 어찌도 그것을 애지중지하였든지 표지를 싸고 속을 아끼고 둘 없는 보배로 여겼었다. 다른 책 다 제쳐 놓고 읽기 시작하여 좀 부치는 영어의 힘에 수많은 단어를 충실히 찾아가면서 한 줄 두 줄 한 장 두 장 꾸준히 읽어 간 것이 불과 몇 달이 안되어 〈상호 부조론〉영역 한 권을 훌륭히 독파하였다. 읽고만 나면 아낌없이 동무들에게 돌려가면서 빌려주었다. 좀 암직한 동무들을 모아서 책 읽고 토론하는 토요회(土曜會)를 조직하여 끝까지 꾸준히 끌고 나간 것도 노군이었다. 어떻든 잘 읽고, 잘 배우고 잘 이야기하였다. 때로는 입에 거품을 품으면서 모여앉은 학우 앞에서 마음껏 떠들어도 보고 때로는 분기 등등하게 세상을 비분강개도 하였다.

사실 그 열정만은 누구나 다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이때에 벌써 그에게는 상당한 이론의 체계가 보금자리 잡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이미 손아귀에 든든히 파악한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 체계가 점점 조직적으로 굳어갈수록 그 열정도 차차 커가고 익어갔다. 그때로 보아서는 자뭇 놀라운 일이었다.

이러한 노군과 뜻과 생각이 맞는 나와는 나날이 절친하여졌다. 책도 책이려니와 나중에는 돈주머니까지 내 것 네 것 없게 된 무던 착한 마음씨도 시원한 것이지만, 그의 굳센 용모도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의 하나였다. 거친 끌로 되고 말고 쪼아논 선 굵은 조각― 이런 느낌을 주는 것이 그의 얼굴이었다. 크고도 검은 눈에는 열정이 출출 넘치고 반듯한 콧날은 강한 의지의 초점이었다. 넓은 이마는 밝은 지혜의 권화인 듯하고 단단한 몸집에 굵게 뿌리박은 목덜미는 무진장의 정력을 감추고 있는 듯하다. 이런 얼굴에 어울려 이를 데 없이 조화를 주는 것은 그의 검은 네모테 안경이었다.

노군 역시 반갑지 않은 중산계급에 태어난 한 사람이었다. 군의 부친은 당시 수급관청의 벼슬아치였다. 그러니 노군과 뜻이 맞을 리 만무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가정의 따뜻한 맛이라고는 모르고 자랐다. 자연히 집을 싫어하고 밖을 그리워하였다. 현대 교육의 허위를 느끼고 일본으로 가만히 건너 뛴 것은 그가 중학을 마치던 해 봄이었다. 거기서 노동을 하면서 세상을 알자는 생각이었다. 다시 바다를 건너와 마지막 편지를 남겨 놓고 끔찍이도 큰 포부를 품고 북으로 영영 종적을 감춰 버린 것은 바로 그해 여름이었다.

이만 하여 두고 잠간 이야기로 옮겨 가자.

노군이 중학을 다닐 때였다.

이른 여름 어느 날 아침 노군의 집에 난데없는 도적이 들었다. 집안은 한바탕 발끈 뒤집혔었다―고 하여도 현장에서 범행하는 도적을 잡은 것이 아니라 겨우 알아 채고 집안이 들썩하였을 때에는 이미 도적을 맞은 뒤였다.

도적 맞은 뒤에 도적이야!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아침에 들었는지 그 전날 밤에 들었는지도 모르는 도적을 이제와서 야단을 한대야 도적이 나설 리 만무하였다. 그런 변을 당한 것이 처음도 처음이려니와 무엇보다도 피해가 적지 않았으니 법석을 안할 수도 없었다. 현금 백원만 하여도 보기에 따라서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니 게다가 시계 양복 은잔하고 보면 결코 피해가 적다고 볼 수는 없었다. 집안은 요란하였다. 그러나 노군과 그의 아우들은 이미 학교에 간 뒤였다.

일도 딱하게 되기는 되었었다. 도적이 들어도 하필 노군의 부친의 방에였다. 밖에 일이 있어 방을 비우자 공교롭게도 도적이 들었다. 다른 것은 고사하여 두고 단벌의 양복이 없어졌으니 제일 시급한 것이 출근 문제였다.

의걸이를 열어제치고 장 속을 들추고 벽장 속을 뒤진대야 없어진 양복이 생길 리 만무하였다. 아무리 소동을 일으켰으나 집안 사람은 한 사람도 도적의 그럴 듯한 실마리를 종잡는 이 었었다. 아침에도 그 전날 밤에도 이상스런 사람의 출입은 없었고 물론 집안 사람의 나들이도 없었다. 방이래야 빤히 건너다보이는 사랑방이니 잠시 비어 두거나 안 비어 두거나 별 다름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도적을 맞은 것을 어떻게 하랴. 가방 속에 든 돈을 쥐가 안물어가고 벽에 걸린 양복이 제 발로 안 걸어 갔다면야 도적은 확실한 도적이다. 도적이라면 쥐도 마음대로 못 드나드는 성벽 같은 가정에 예사로 침입하였으니 용하기도 하다.

양복과 시계 같은 것이야 눈에 뜨이는 것이니 손쉽게 집어갈 수 있으려니와 가방 속에 깊이 묻힌 현금 백원을 감쪽같이 빼낸 것은 사실 귀신을 울릴 노릇이었고 더 놀라운 것은 농속 깊이 싸두었던 은잔을 들어간 것이다. 이것은 너무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만큼 수상도 하였다. 깊이 파묻힌 그 은잔의 존재를 발견하려면 적어도 하루 종일 동안을 허비하여야 할 것을 불과 몇분 동안에 곱게 들어갔으니 어찌 놀랍지 않으랴. 동시에 괴상한 일이요 의심쩍은 일이었다. 이것이 마침 그 어떤 암시를 주었다.

두말없이 안잠자기와 침모를 다졌다. 범행을 하였거든 곱게 자백을 하라고 권유도 하여 보고 벌을 주겠다고 위협도 하여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다진다 하여도 없는 죄야 어찌 있다고 할 수 있으랴. 마침내 밖에 있는 행랑어멈까지 불러 들였으나 그들의 태도로 보아서든지 말을 듣든지 역시 혐의를 건 것이 애매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을 들으면 전날 밤에 대문은 단단히 잠갔었고 행랑과 안채 사이에 있는 중문도 단단히 단속하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자정때까지는 별다를 사람의 출입은 일절 없었다 한다. 담이 높고 문이 단단한 다음에야 어찌 밖에서 도적이 들 수 있으랴. 그러면 안에도 도적이 없고 밖에서도 들지 않았다면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지 않은 다음에야 그 도적이 어디서 생겼단 말인가.

나중에는 도난계까지 하고 가까운 전당포까지 수소문하여 보았으나 역시 아무 단서도 잡을 수는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학교에 갔던 노군과 그의 아우들도 학교를 파하고 돌아들 왔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더구나 아무 생각나는 바 없었다. 요새 가난한 사람이 날로 생기니 도적 맞기도 예사가 아니냐는 것이 노군의 하는 단 한 마디의 말이었다.

그러자 그날 저녁때는 되어서 사랑방 책상 위에서 다음과 같은 글발이 발견되었다. 이것으로 하여 사건의 진상을 얼마쯤 밝힐 수 있었다. 그것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써 놓은 글발이었다. 가해의 동기, 가해자의 심경, 사과, 양해를 비는 말을 급한 글씨로 휙휙 내적어 놓은 것이었다.

너무도 미안합니다. 미안한 줄 알면서 이런 짓을 하지 않으면 안된 것이 더욱 미안합니다.

그러나 결코 사복을 채우려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지금 어떤 조그만 회의 일을 보아 나갑니다. 여기서 무슨 회라고 회의 이름을 못 알으켜드리는 것을 용서 하세요. 요번에 마침 어떤 일이 돌발하여 회에 얼마간의 경비가 꼭 필요하였읍니다.

원래가 가난한 회이므로 회의 얼마 안되는 경비로는 도저히 그런 것을 일일이 써 갈 수 없기에 여러 가지로 주선하여 보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고 그렇다고 마땅히 처리하여야 할 일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절대로 없고 일도 원체 급한 일이므로 마침내 이 짓에까지 미치게 되었읍니다. 결코 사복을 채우려는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을 위한 일에 바칠려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어 주시고 양해하여 주셔야 합니다.

그럼 왜 당당하게 와서 보조라도 해달라지 못하고 이따위 짓을 하느냐고 하시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하여서 일이 잘된다면 오죽이나 고마운 세상이겠읍니까. 그렇지 못한 세상에 나서 이런 향기롭지 못한 짓을 하게 된 것만 슬픈 일이 아닐까요. 어떻든 잘 양해하여 주시고 너무 노여워는 마세요.

요번 일이 잘 해결되고 후일 회의 경비도 충실하여지면 이번의 피해는 반드시 도로 갚아 드리겠읍니다. 일이 원체 급해서 이 짓에까지 나왔다는 것을 거푸 말합니다. 너무 요란하게 하시지는 마세요.

주제넘게 이런 글발고 안 남겨 놓을 것이오나 처음으로 이런 일을 당하신다면 너무도 가증한 행동에 놀라실 듯하여서 두어 자 적어 양해를 비는 바이올시다.

오전 두시쯤, 가해자

종일 볶아쳐도 알 길이 없던 도적의 정체는 여기 와서 명백히 나타났다. 가난한 회를 위하여 일을 하여 나가는 사람이 긴급히 필요한 회의 경비를 얻으려고 마침내 범행을 하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 그런 일을 당한 것은 섭섭하였으나 그런 줄을 안 것은 도리어 시원한 일이었다.

범행을 하였으면 그만이지 그 뒤에 자기의 마음속을 고백하여 놓는다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얄밉기도 하나 다시 한편으로 보면 그 넉넉한 태도가 사랑스럽기도 하였다. 집안 사람들은 같지않은 듯이 나중에는 웃어 버렸다.

「오래 살려니 별꼴을 다 보겠구나. 도적질을 하면서 편지질은 웬 편지질야.」

「시체 도적은 문명을 해서 그렇답니다.

하나 그런 글발이라고 남겨서 그런 줄을 알게 한 것은 시원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마음에 폭 씌지 않는 것은 가해자의 침입한 경로와 손쉽게 한 범행의 맑은 흔적이었다.

새로 두시쯤에 침입하였다면 대체 어디로부터 침입하였단 말인가. 높은 담을 뛰어넘지 못하였을 이상 반드시 대문으로 들어 왔을 것이니 그때에 걸려 있었을 대문을 따준 것은 누구이며 아침에 일어났을 때에 대문은 역시 빈틈없이 닫혀 있었으니 그가 나간 뒤에 대문을 이렇게 빈틈없이 닫은 것은 대체 누구인가.

아무리 보아도 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가방 속에 든 현금을 곱게 꺼낸 것도 이상하거니와 농 속에 든 은잔을 그런 줄 알고 꺼낸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 필적으로든지 글투로 보아서 밖에서 확실히 가해자가 침입한 것이지 집안에 범인이 잠재하여 있다고는 볼 수 없었다.

어떻게든 마음에 폭 씌지 않는 점이 많았다. 그러자 그 이튿날 아침에 노군에게 어디선지 다음과 같은 편지가 왔다. 이 편지는 이 사건의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나 물론 노군의 집안 사람들에게는 보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차차 날이 가니 소동도 가라앉고 달이 넘으니 도적 맞았다는 기억조차 점점 흐려갔다. 그 편지의 내용은 대강 아래와 같았다.

아침 차로 내려 왔네.

하룻밤 수면 부족에 피곤하기 짝이 없네. 이렇게 힘이 든다면야 어디 일을 해 갈 수 있겠나. 그러나 요번에 주선된 것만은 기쁜 일일세. 이만하면 요번 일은 훌륭히 처리하여 나갈 수 있을 것일세. 무엇이라고 다 군에게 감사하였으면 좋을는지 모르겠네. 군의 계획과 권유도 고마왔거니와 이 조그만 운동을 위하여 다하는 군의 지극한 열성과 노력은 한갖 동무로서의 눈물로 사의를 표할 따름일세.

한 가지 마음에 께림한 것은 요번 우리의 행동이 당당치 못하였다는 것일세. 너무도 못 생기고 치사스럽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물론 목적을 위하여서는 수단이야 고를 바 아니겠지만 그래도 같은 값이면 수단조차 좋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지금 와서 그것을 바란들 무엇 하겠나. 아마도 새로 두시쯤이나 되었던지 군은 문 밖에 섰고 내가 방에 선뜻 들어 섰을 때 그때부터 벌써 마음에 알 수 없는 고통을 느꼈네. 그런데다가 이렇게 일을 저질러 놓고 나니 나는 것은 한갖 후회의 염뿐일세. 황급히 주섬주섬 걷어가지고 군의 집을 나왔을 때 그때의 초조와 불안이라 참 이를 데 없었네. 왜 이런 짓을 하면서까지 우리의 일을 하여 나가지 않으면 안되나 함을 생각할 때 세상이 야속하고 알지 못할 것이었었네.

더구나 군의 가정에 대한 미안한 생각이야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나. 나의 마음이 이럴 제는 군의 마음이야 오죽이나 쓰리겠나. ― 아무리 우리의 밟는 길과 어긋난다 할지라도 군이 그렇게까지 가정에 반역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니 말일세.

너무도 미안한 마음에 방을 나올 때에 두어 자 사과의 말을 적어 놓았네. 이것으로 하여 집안이 소동이나 안되면 다행일 줄 아네.

그럼 우선 이만하고 일 되어 나가는 대로 또 편지함세.

××역두에서 P

노군에게

노군의 집안에 소동을 일으킨 가해자가 P였고 이 일을 인도한 이는 곧 노군 자신이었음이 다시 말하지 않아도 명백하여졌을 것이다. P는 당시 우리의 선배였다. 노군과 나와의 서생시대에 P는 이미 적으나마 한 사람의 농민 운동자였었다. 노군과 P의 사이는 친하였었다. 따라서 나와의 사이도 친하였다―고 하여도 그 친함은 더 많이 선배에 대한 경모의 염에 가까운 것이었다. 사실 그로 하여 미숙한 생각이 많이 개발되었다.

이야기는 이만이니 이것으로도 능히 노군의 큼직한 풍모의 일단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왜 그가 그렇게까지 자기 가정과 어긋났느냐 하는 것이 의심될 것이나 이것을 말하자면 이 짧은 이야기에서는 너무도 장황할 것이다. 그러나 어떻든 이미 생각이 남보다 한 걸음 앞선 그로서는 그의 옛 가정과는 당연히 딴 걸음을 걷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여기서 그들의 행동의 시비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요 독자의 비판을 바라는 바도 아니다. 나어린 시절에 벌써 그의 생각이 그만큼 달랐다는 것을 알아주면 그만이다.

무릇 비판이라는 것 그것이 벌써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털끝 하나의 용납도 허락지 않을 만한 그런 엄숙한 객관적 절대적 판단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존재시킬 수는 있겠지만―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판단이 일상 생활에 그다지 필요치도 않을 것이며 그런 판단으로만은 이 복잡한 세상을 해석하지도 못할 것이다. 대체 세상 물상이라는 것이 이모로 보면 이렇게 보이고 저모로 보면 저렇게 보이고 시각의 각도와 입장을 따라서 눈에 비치는 바 마음에 비치는 바가 각각 다를 것이다.

밤은 깊었다.

화롯불은 마저마저 스러지고 창밖에 눈송이 더욱 깊다.

생각나는 것은 노군.

그는 지금 눈 구덩이에 가서 파묻혀 있을까. 깊은 밤 추운 거리를 잠잘 곳 찾아서 헤매이고 있을까. 혹은 방울소리 딸랑딸랑 개에 맨 썰매를 타고 눈 깊은 벌판을 달리고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북국의 거리 으슥한 회관에 모여서 낯설은 동지들과 일을 꾀하고 있을 것인가…… 어디를 가 있든 비나니. 건재하라 ! 잘 싸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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