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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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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날 동안 양기 없이 캄캄하고 바람불던 날은 지나갔다. 어제부터 비로소 맑았다. 그러나 바람은 몹시 불어서 애닯은 가슴에 길손의 심사(心事)를 부어주었다. 어제 저녁에도 늦은 잠 야윈 꿈을 어리다가 오늘 아침에도 상 위에서 일어나니 붉은 햇빛이 창에 가득히 쏘였다. 하늘은 파랗게 구름은 한 점도 없는 듯하나 한결같은 구름에 덮히었는 까닭이다. 어떻게 된 셈인지 하늘은 전날보다 낮아 보인다.

닭의 홰 아래에서 네 활개를 웅크리고 자는 듯 하던 개가 이따금 이따금 눈을 커다랗게 뜨고 뒷꼬리를 살금살금 두루면서 가만가만 두어 마디씩 짖는다. 거러지의 조반(早飯) 비는 썩세인 목소리가 대문 밖에서 우렁차게 붉우직인다. 개는 대문으로 기운있게 달려간다. 참새는 이리저리 흩어 날며 양기있게 지저귄다. 개의 성나게 짖는 소리가 들리인다. 연기 그은 처마 밑에는 아무 것도 넣어두지 않은 「뒤웅치」가 서너개 걸려 있다. 바람이 살작살작 지나갈 때마다 흔들흔들 드렁거린다. 먹이를 찾으며 돌아가던 닭의 무리 한 떼가 뒷마당을 돌아서 앞뜰로 오다가 갑자기 수탉 한 마리가 「꼬꾸요오」 하고 길게 느리게 운다. 암탉의 무리도 꾸둑꾸둑하며 분주히 서 드러내인다.

구름은 뜨지 않았는데도 햇빛은 갑자기 그물어진다. 바람결에 떠돌아가는 먼지들이 봄비에 세수하고 봄바람에도 문질리어 푸른 단장을 고이고이 하였다. 잔디풀은 아직 누렇게 마른 잎새에 새엄이 쎄워 있다. 뻐꾹새가 맘 서럽게 뻐꾹뻐꾹을 지저낸다. 앞들 무논 위로 벌써 아지랑이가 어리우기 시작한다. 밖에는 일꾼이 거름 실고 나온 누런 소를 한편 구석에 세우고 거름 그릇을 내리워서 무덤처럼 밭고랑마다 거름을 쌓아 놓았다.

나는 그냥 더 윗봉으로 올라가려는 생각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잔디를 밟고 어린 솔포기를 헤치며 길없는 멧발을 치어다보며 걸음을 내여놓았다. 섶나무에는 벌써 어린 벌레가 어물어물 구물거린다. 자개돌 질러 놓은 「어린애」의 무덤들이 비탈진 골짜기에 산산하였다. 비탈진 골짜기 바위 틈에는 바알간 진달래꽃이 저 혼자 곱살스러이 피어 있다.

날은 차차 흐리는 것같이 「누리그물어」 하여 진다. 나는 뫼의 왼 윗봉에 올라섰다. 종달새 한 마리가 발끝에서 소리를 내고 훨씬 공중으로 솟는다. 뫼탁 「움막집」 마당에는 어린 며느리가 이편 가추 끝과 저편 가추 끝에 빨래줄을 건너 매노라고 낡은 지붕 썩은 영깃에다 곱다랗게 비슨 머리를 다 흩어쳐 버렸다.

저편 촌가(村家) 가까운 묏발에는 콩새와 후치들 같은 작은 새를 사냥하려고 「창애」를 들고 다니는 촌 새서방님들도 있고 아이들도 보인다. 밭고랑에 파묻혔는 작은 돌 깨어진 기와조각을 일어집고 새밋기할버러지-딱쟁이-를 잡는다. 「야, 민숭아, 장난은 좀 그만두고 밥 먹고 새하러 가려무나」 하는 여인의 야발은 목성이 들리운다. 열대여섯 살 먹은 새서방이 방금 「창애」에 미끼를 물리노라고 대답을 미처 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야 민숭아」잇대어 서너번 여인의 같은 목소리가 들리운다. 그제야 그 새서방님은 이제 내려가노라고 대답을 한다.

새떼가 많이 앉은 밭귀에다 창애를 메워 놓고 손길을 휘휘 내두루며 머리를 기울거리는 바람에 머리에 썼던 「관」 째박이 벗겨지는 것을 움켜쥐고 달려내려 간다. 저편 촌에서는 머리에 흰 수건 잡아맨 농사꾼들이 집마다 마당에 모여 섰다가는 긴 담뱃대에 불을 붙여 입에 물고 제가끔 저 갈 데로 헤어져 간다.

등 뒤에 인적이 있는 듯하기에 나는 갑자기 돌아섰다. 발 벗고 곳곳이 뚫어진 것을 검은 실로 꾹꾹 주리쳐 잡아맨 흰 적삼 흰 치마를 입은 계집 아이가 조그마한 둥지를 들고 나 섰는 묏발 아래에서 허리를 굽혔다 일어섰다 하는 것이 보이운다. 나이 열한두 살이 되어 보이는 듯하다. 그 계집 아이는 나 섰는 줄을 모른다. 언덕의 마른 풀포기를 뒤적거리다가는 그 풀포기를 부여잡고 기운없이 언덕으로 차차 올라온다. 캄하게 뒤로 땋아 느리웠던 머리털이 다 흩어져 앞이마 위에 하수룩하게 덮히웠다. 커다랗고 동그란 눈에는 눈물이 어리웠다. 살빛 흰 이마와 파스러한 두 뺨에는 까아만 먼지가 덮히고 덮히웠다. 가끔가끔 몸을 움츠리고 새빨간 발을 냉큼냉큼 들었다 놓는다.

그 계집 아이는 머리를 숙이고 양지귀를 가려 걸어가며 작은 가늘은 입안에 넣은 소리로 이러한 노래를 부른다. 노래는 가끔가끔 목메인 소리 속에 떨리며 끊어진다.

엄마야 오늘도 해가 떴고나

죽으신 엄마는 그리도 곱고

살았는 엄마는 왜 니악한지.....

엄마야 오늘도 나 이렇고나

오늘도 이렇게 너 생각한다.

그 계집 아이는 내가 섰는 것을 보았다. 눈물 어룰이 발개지며 얼른 언덕 모루로 돌아섰다.

나는 웃마을 사는 「년순」의 딸인 줄을 알았다. 얼마 전에 그를 낳아놓은 어머니는 죽고 새어머니가 들어와서 맏아내의 남긴 혈육(血肉)인 어린 딸아기에게 몹쓸게 군다는 말을 어디선지 들은 듯하다. 아마 오늘 아침에도 그 새어머니가 아침 밥상에 놓을 나물을 캐어 오라고 이른 아침에 쫓아낸 듯하다.

날빛은 새리새리하여 진다. 부엉이 소리 뻐꾸기 소리 참새 소리 멧새 소리 애닯게 울지기 시작한다. 그 계집 아이의 그림자는 어디로 사라져 갔나! 말집에는 희끔희끔 날리는 빨래 서답이 맘좋게 이리저리 날라 비친다.

1919년 4월 18일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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