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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권30.pdf/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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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성이 창건한 불국사

가실왕嘉悉(實)王6세기경 가야의 왕.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 우륵으로 하여금 12현으로 된 가야금을 만들게 하였다. 가야가 멸망하자, 우륵은 신라 진흥왕에게로 돌아갔다고 전하는데, 당시의 6가야 중 어느 가야인지 알 수 없다. 가보왕(嘉寶王)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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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 동상

강감찬姜邯贊(948~1031)고려의 명장. 옛 이름은 은천, 시호는 인헌, 본관은 금주이다. 삼한 벽상공신 궁진의 아들이다. 성종 때 갑과에 장원 급제하고 예부시랑이 되었다. 현종 1년(1010),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자, 고려에서는 강 조가 30만 군사를 이끌고 나가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당시에 많은 신하가 왕께 항복하기를 권했으나, 강감찬이 이를 반대하고 하공진을 적진에 보내 설득케 하여 물러가게 하였다. 현종 9년(1018)에 다시 거란의 성종이 소배압을 시켜 고려를 침공케 하자, 강감찬이 상원수가 되어 군사를 이끌고 나가 진격을 계속하는 거란군의 뒤를 공격하여 귀주에서 크게 이겼다. 이 싸움에서 거란군의 시체는 석천에서 반령에 이르기까지 들을 덮었으며, 강감찬이 수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거두어 돌아오자 왕은 친히 나와 환영하였다. 추충협모 안국공신의 호를 받았다. 연로하여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자연과 글을 벗하며 여생을 보냈다.

강경애姜敬愛(1907~1943)여류 작가. 황해도 출신으로 1931년 장편소설 「어머니와 딸」을 발표함으로써 작가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중앙 문단에는 나서지 않고 가정에서 글을 썼다. 뒤에 간도로 옮겨 갔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작품으로는 「인간문제」 「지하촌」 「부자」 「소금」 등이 있다.

강고내말强固乃末신라 경덕왕 때의 조각가. 본피부(지금의 경주군)에 살았으며 분황사의 약사여래 동불상을 제작하였다. 이 때가 바로 석굴암을 한창 만들 때였으므로 그도 이 사업에 종사했을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강맹경姜孟卿(1411~1462)조선의 명신. 자는 자장, 시호는 문경, 본관은 진주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를 지냈으며, 세조의 집권에 공이 있어 좌익공신의 호를 받고 영의정이 되었다. 담론에 능하고 학문이 깊어 황 희의 밑에 있을 때 매우 촉망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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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첨

강민첨姜民瞻(?~1021)고려의 장군. 목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현종 때에는 여진의 침입을 막았으며, 강감찬 장군의 부장이 되어 흥화진에서 소손녕의 거란군을 격파하였다. 이 공으로 지중추 부사·병부상서에 올랐다. 본래 선비 출신으로 무예에는 능하지 못하였으나 의지가 강하여 거듭 전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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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영

강선영姜善泳(1925~ )무용가. 서울 출신. 본명은 강춘자(姜春子). 안성여자고보 출신으로 한성준에게 사사(師事)했다. 1943년의 제1회 무용발표회(부민관)를 출발로 8·15광복이 될 때까지 만주·일본 등지에서 무용공연을 가졌다. 광복 후에는 '강선영무용연구소'를 개설하는 한편 여러 차례의 신작무용발표회를 가졌다. 1960년에 파리 국제민속예술제, 1962년과 1964년엔 일본에서, 1968년엔 중화민국에서 공연, 1972년엔 뮌헨올림픽 한국 민속예술단 지도위원으로 세계 각지를 순회공연했다. 1965년 서울특별시 문화상(「장희빈」), 1965년 아시아 문화예술제 문화 부문 작품상 등을 수상, 주요 작품으로는 「수로부인(水路夫人)」 「장희빈(張禧嬪)」 「열두무녀도」 등이 있다. 무용협회 부회장 역임. 현 강선영무용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