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인환丘仁煥(1929~ )소설가·국문학자. 충남 장항 출생. 서울사대 국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 졸업하고 1962년 『현대문학』에 「판자집 그늘」 「광야」가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그는 주로 인간생활의 저변을 통한 인간존재의 해명과 상실한 낙원을 갈구하는 현대인의 고민을 그리며, 간결한 문체와 고백체이면서도 3인칭의 주어와 주관적인 서술어로 이미지의 전환에 의한 상황적인 작품을 쓰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 「동굴 주변」 「내일은」 「산정의 신화」 「별과 선율」 「창문」 등이 있다. 이 밖에도 50여편의 문학 연구논문을 발표했으며, 창작집으로 『뒹구는 자화상』 『벽에 갇힌 절규』 등과 『문학의 원리』 『그날을 위하여』 『자아완성과 여성파괴』 등을 발간했다.
궁예弓裔(?~918)마진·태봉의 시조(재위 901~918). 성은 김씨이며 신라 헌안왕의 아들, 또는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그의 출생이 불길하다는 일관의 말에 따라 유모와 함께 도망하여 자랐는데, 이 과정에서 애꾸눈이 되었다. 10세가 되었을 때 자신이 왕자임을 알고는 학문과 무술을 연마하였다. 당시 신라는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궁예는 처음에는 승려가 되고자 세달사에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나와 도적 기훤의 부하가 되었다. 그러나 기훤에게 실망하자, 양 길의 부하가 되어 철원 등 10여 성을 빼앗고 스스로 장군이라 하였다. 왕 건이 항복해 오자 그를 철원군 태수로 임명하고, 901년 왕위에 올라 국호를 후고구려라 하였다. 후에 국호를 다시 마진·태봉으로 바꾸었는데, 차차 세력이 강성해지자 날로 오만하여 백성들의 신망을 잃어갔다. 그리하여 918년 신숭겸·홍 유 등이 왕 건을 왕으로 추대하자, 왕위를 빼앗기고 도망가다가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다.
권경유權景裕(?~1498)조선의 문신. 자는 군요, 호는 치헌, 본관은 안동이다. 김종직의 제자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연산군 때 정세가 변함을 보고 교리로서 제천 현감 등을 지냈다. 그 후 김일손과 함께 사관으로 있을 때,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역사책에 실은 것이 원인이 되어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일손과 함께 처형되었다. 중종 때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권근의 글씨
권 근權近(1352~1409)조선의 학자·명신. 자는 가원, 호는 양촌, 시호는 문충, 본관은 안동이다. 18세 때(공민왕 16)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 검열이 되었다. 윤승순과 함께 사신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는데, 이때 가져온 문서의 글이 원인이 되어 유배되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중추원사가 되었다. 1396년 중국 명 태조가 자기에게 바치는 글을 잘못 썼다 하여 그 글을 쓴 정도전을 잡아들이라고 할 때, 대신 가서 해명을 잘 하여 극진한 예우를 받고 돌아왔다. 그가 지은 『입학도설』은 우리 나라 최초로 그림을 넣어 학문을 설명한 책으로 후에 이 황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정몽주 밑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문장에 능하였다. 저서로 『양촌집』 『상대별곡』 등이 있다.
권 남權擥(1416~1465)조선의 문신. 자는 정경, 호는 소한당, 본관은 안동이다. 문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감찰을 지냈으며, 수양 대군과 함께 『역대병요』를 편찬하였다. 단종 때 김종서를 제거할 때에 앞장서서, 1등 공신이 되어 우부승지에 올랐으며, 세조가 즉위하자 이조참판이 되었다. 그는 수찬관으로 『국조보감』을 편찬하였으며, 활을 잘 쏘았고 문장에도 뛰어났다. 그러나 횡포가 심하고 많은 돈을 모아 탄핵을 받았다.
권동진
권동진權東鎭(1861~1947)독립운동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호는 우당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대한제국 정부의 육군참령을 거쳐 남원군수가 되었다. 갑신정변 때에는 손병희·오세창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3·1운동 때 독립선언문에 서명하여 3년간 투옥되었다. 출옥 후에는 '신간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이 되었으며, 천도교의 장로로서 교세 확충에 노력하였고 민족운동의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권병덕權秉悳(1868~1944)독립운동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호는 청암, 본관은 안동이며 청주에서 출생하였다. 18세 때 동학교도가 되었으며 동학혁명에 참가하고 각처를 돌아다니며 역사학을 연구했다. 1908년 손병희가 일본에서 돌아와 천도교를 일으키자 이에 입교하였다. 천도교에서 시천교로 분리할 때 시천교 종무장을 거쳐 육영사업에 힘썼다. 3·1운동 때 독립선언문에 서명하여 2년간 복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권상연權尙然(?~1791)조선의 천주교 순교자. 전라북도 진산에서 출생하였으며 윤지충과 함께 천주교를 신봉하였다. 1791년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천주교식으로 제사를 지낸 것이 군수에게 알려져 윤지충과 함께 구금되었다. 당시는 조정에서 천주교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도덕을 문란하게 한 자라 하여 사형에 처하였다. 이 두 사람의 순교 사건을 가리켜 '신해박해' 또는 '진산사건'이라고 한다.
권영대權寧大(1908~1985)물리학자.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나 1933년에 일본 홋카이도 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한 뒤 1946년에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60년부터 1969년까지 한국 물리학회 회장으로서 국내 기초물리학의 기반을 다졌으며, 이후 한국 에너지 연구소 학술 고문, 한국 과학사학회 회장 등을 지냈다. 우리나라 유일의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