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학자. 자는 명언, 호는 고봉·존재, 시호는 문헌, 본관은 행주이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사관을 거쳐 사정이 되었으나, 훈구파에 의해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선조 때 대사성이 되었다. 그 뒤 해직된 다음에 다시 부제학 등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퇴하고 고향으로 가던 중 병을 얻어 전라북도 고부에서 죽었다. 어려서부터 독학하여 고전에 능통하였고 문학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이 황의 제자가 되어 김인후 등과 왕래하면서 새로운 학설을 많이 제시하였다. 특히, 이 황과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해 8년 동안이나 논란을 편 것은 유명한 일이다. 이 일 이후로는 이 황도 그의 이론을 많이 따르게 되었다. 그는 글씨에도 재주가 뛰어나 종계변무의 주문(奏文)을 써서 3등 광국공신으로 덕원군에 추봉되었다. 저서에 『고봉집』 『주자 문록』 『논사록』이 있다.
기대승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영월당
기자箕子기자 조선의 시조로 전설적인 인물. 이름은 서여 또는 수유로 기나라의 왕으로 봉해져 기자로 불리었다. 중국 은나라 사람이라는 설과 우리 나라 사람이라는 설이 있다. 앞의 설에 대해서는 주 무왕이 은을 점령하자, 기원전 1122년에 동쪽으로 도망쳐서 단군 조선에 들어와 예절을 비롯하여 옷 짜는 법과 '8조 법금'을 가르쳤으며, 후에 한 무제가 임명하여 조선의 왕이 된 것으로 전한다. 이 학설은 중국의 역사에서도 앞뒤가 맞지 않아 인정되지 않고 있다. 한편, 뒤의 설에 대해서는 기자의 성이 기씨가 아니라 한이라는 성을 가진 우리 나라 사람이며, 기자가 동쪽으로 와서 대동강 유역에 나라를 세운 것은 당시 중국을 받들고 있던 사대사상에 젖은 고려 시대의 우리 조상이 꾸며낸 설이라고 한다. 현재는 이 학설이 크게 인정받고 있다.
기자헌의 필적
기자헌奇自獻(1562~1624)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사정, 호는 만전, 본관은 행주이다. 성균관에서 공부하여 선조 때(1682) 문과에 급제하였다. 호조참판으로 진하사가 되어 명에 다녀온 뒤 좌의정 벼슬에까지 올랐다. 그는 선조의 사랑을 받아 정사를 함께 의논하곤 하였다. 선조가 세자인 광해군을 폐하고 영창 대군을 세자로 삼으려 하자 이를 끝까지 반대하였다. 1608년에는 유영경 등이 영창 대군을 왕위에 앉히려 하자, 이에 대항하여 광해군을 왕위에 올려놓는 데 공헌하였다. 1614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인목 대비를 폐하자는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여 길주로 유배되었다. 1620년 광해군의 특명으로 덕평 부원군에 봉해지고 영중추 부사가 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 모의 때 김 유, 이 귀 등이 사람을 시켜 그의 뜻을 물었으나 신하로서 왕을 폐할 수 없다 하여 거절하였다. 인조반정 후 역모죄로 중앙에 압송되었다가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들과 합세할 것이라는 모함을 받고 가족과 함께 몰살당하였다. 후에 이원익·이 귀 등의 상소로 관직이 복구되었다.
길선주吉善宙(1869~1935)독립운동가이며 목사.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호는 영계이며 평남 안주에서 출생하였다. 처음에는 불도를 닦으며 한의학을 연구하다가 기독교인이 되어 세례를 받았고, 1901년 안창호 등 17인과 함께 독립협회의 평양지부를 조직했다. 1907년 평양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6명과 함께 한국 최초의 목사가 되어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신앙 운동에 정진하는 한편, 교육사업에 힘써 숭실학교와 숭덕학교 등을 설립했다. 1915년 『만사성취』라는 한국판 『천로역정』을 저술하였다. 3·1운동 때 기독교 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2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였다. 그 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전국 교회 부흥운동을 일으키는 등 전도 사업에 이바지하다가 평안남도 고창 교회에서 설교 도중 뇌일혈로 사망하였다. 신설 교회 60여 곳, 2만여 회의 설교를 통해 구도자 7만 명을 냈다. 저서에 『만사성취』 『해타론』 『말세학』 등이 있다.
길 재
길 재吉再(1353~1419)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 자는 재부, 호는 야은(冶隱)·금오산인(金烏山人), 본관은 해평이다. 포은 정몽주, 목은 이 색과 함께 '3은'이라 불리고 있다. 11세 때 절에 들어가 글을 배우고, 18세 때 박 분에게 『논어』 『맹자』를 배웠으며, 그 뒤 박 분과 함께 송도로 가서 이 색·정몽주·권 근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후에 성균관 박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창왕 때에는 문하주서가 되었으나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조선이 건국된 후인 1400년(정종 2), 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세자 이방원에 의해 태상박사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 하여 거절하고 고향인 선산에서 후배 양성에 힘썼다. 그의 성리학은 김숙자·김굉필·조광조 등에게 이어졌다. 세종이 즉위하던 해인 1419년에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려의 옛 도읍지 송경(지금의 개성)을 찾았을 때 읊은 시조 「고려 유신 회고가」는 유명하다. 저서에 『야은집』 『야은 언행 십유』 등이 있다.
김가진金嘉鎭(1846~1922)정치가·독립 운동가. 호는 동암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사복시정·동부승지 등의 벼슬을 한 후 여러 해 동안 대사의 자격으로 일본에 가 있었다. 그 후 귀국하여 공조판서·농상공부 대신 등을 지냈고, 황해도 관찰사·중추원 의장·대한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후에 일본 정부가 남작의 작위를 주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3·1운동에 참가하였다. 독립단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