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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권30.pdf/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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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벗어나 현실과 정치, 사회적인 풍자와 관념에 치우치게 되었다. 1955년 시집 「진주만」으로 아시아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주로 동아일보를 통하여 예리한 정치 평론을 하였다. 1960년에는 초대 참의원에 당선되어 5·16 군사정변 전까지 정치 생활을 하였다. 저서로 『나의 거문고』 『진주만』 『목격자』 『세대의 삽화』 『적과 동지』 『김동명 문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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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삼

김동삼金東三(1878~1937)독립운동가. 본명은 긍식, 호는 일송이며 경북 안동에서 출생하였다. 1907년 고향에서 협동중학교를 세우고, 1909년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여 만주 통화현에서 이시영 등과 만주에 거주하는 교포들을 위해 논의하고, 교포들의 자치기관인 '부민단'을 조직하였다. 3·1운동 때에는 '한족회'를 결성하여 이상룡 등과 서로군정서를 조직하여 한족 대표 대회에 참석하였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안창호의 뒤를 이어 노동국 총판이 되었으며, 김좌진·지청천·황학수 등과 함께 임시 혁신의회를 조직하였다. 만주사변 후, 이원일과 함께 하얼빈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10년형을 선도받고 경성 형무소에서 복역중 옥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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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

김동인金東仁(1900~1951)소설가. 호는 금동이며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일본에서 유학하여 그곳에서 주요한·전영택·김 환 등과 함께 순문예 잡지인 『창조』를 발간하여 리얼리즘이라는 근대 문예 사조가 처음으로 주장되었다. 1921년 이후, 자연주의적 작풍에 의한 단편을 계속 발표하고 예술 지상주의적 경향의 작가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직선적인 성격과 탐미적인 경향으로 '한국의 와일드'로 불리었다. 1·4 후퇴 당일 서울에서 신병으로 사망하였다. 저서로 『약한 자의 슬픔』 『광화사』 『수양 대군』 『운현궁의 봄』 『적막한 저녁』 등이 있다.

김동진金東振(1913~ )작곡가.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1936년에 숭실전문 영문과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 고등 음악학교를 졸업하였다. 광복 후 평양 교향악단을 만들어 지휘자로 있었다. 월남하여 50년 해군 정훈 음악대 창작부장 겸 지휘자로 있다가 53년 서라벌예술대학 교수, 54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63년에 경희대학교 음대 교수를 거쳐 동 학장을 지냈다. 국민훈장 모란장, 3·1 문화상 예술상을 받았다. 가곡집 『내마음』, 오페라 「심청전」, 교향곡 「조국」 「민족의 축원」, 교향시곡 「제례악」 「만가」 「양산가」, 가곡 「가고파」 「봄이 오면」, 군가 「육군가」 「6·25의 노래」 「조국찬가」 등이 있다.

김동환金東煥(1901~?)시인. 호는 파인이며 함북 경성에서 출생하였다. 서울 중동고를 마친 후, 도쿄 동양대학 문과에서 수업하였다. 1924년 우리 나라 최초의 서사시인 「국경의 밤」으로 시단에 등장하였으며, 민족주의적인 정열의 시인으로서 평가를 받았다. 한편, 조선일보·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1929년 『삼천리』를 창간하였으며, 6·25전쟁중 납북되었다. 시집으로 『승천하는 청춘』 『국경의 밤』이 있으며, 기행문 「나의 반도 산하」 등이 있다.

김두량金斗樑(1696~1763)조선의 화가. 자는 도경, 호는 남리, 본관은 경주이다. 인물·풍속·산수에 뛰어난 화원으로서 별제를 지냈다. 특히 용맹스러운 장수를 잘 그렸으며 웅장한 화풍이 특징이다. 작품으로 「추동 전원 행렵 승회도」 「목우도」 「월하계류도」 등이 있다.

김두한金斗漢(1918~1972)제3대·제6대 국회의원.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일제 말기부터 주먹의 힘으로 민족적·의협적인 행동을 해왔다. 광복 후, 한독당 재정위원·대한 민주청년 연맹 부위원장·대한 노조 총연합회 최고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또 반탁 운동과 노동 운동에 종사하였다. 제3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하여 선거 소송, 오물 사건, 한독당 내란 음모 사건 등 계속적인 물의와 투옥으로 독특한 정치 생활을 하였다. 정계에서 은퇴한 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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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신의 그림 「강변회음도」

김득신金得臣(1754~1822)조선의 화가. 자는 현보, 호는 긍재·홍월현, 본관은 개성이다. 화원으로서 초도첨사를 지냈다. 영조 때의 화가 정 선·심사정과 더불어 영조 때의 3재라고 불린다. 작품으로 「노안도」 「풍속도」 「파적」 「설경산수도」 「강변회음도」 등이 있다.

김마리아金瑪利亞(1891~1945)독립운동가.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하였으며, 서울 정신여고를 졸업한 뒤 모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히로시마 여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메지로 여자학원 전문부에 입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졸업을 며칠 남기고 귀국하여 독립 사상을 고취하다가 체포되었다. 출옥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