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 음악협회 회장·서울대학교 음악대학장을 지냈고, 현재 『월간 객석』 발행인 겸 편집인·서울대 명예교수·예음 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있다. 문화훈장 대통령장·예술원상 등을 수상했다. 대표 작품으로 가곡 「동심초」 「관현악을 위한 조곡」 등과 저서로 『악전』 『화성법』 등이 있다.
김성한金聲翰(1919~ )소설가. 함남 풍산 출생. 일본 도쿄 대학에서 수업했으며, 해방 후 서울 문리사대·한국 외국어대학 강사를 역임했고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주필을 지냈다. 195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무명로」가 당선된 후 59년도부터 활동했으며, 단편 「바비도」로 제1회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또 제1회 자유문학상 수상자이다. 지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고, 작품에 「암야행」(1951), 「오분간」, 장편 「이성계」 3부작이 있다.
김세중
김세중金世中(1928~1986)조각가. 경기도 안성 출생. 1951년 서울대 미대 교수가 되었다. 1952년 서울대 대학원을 수료하고, 1962년 한국 미술협회 부이사장, IAPA(국제 조형미술협회) 한국위원회 사무총장 및 국전 심사위원을 지냈다. 또 1969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69년 현대미술관 운영위원이 되었다. 작품으로는 유엔 탑, 광화문 충무공 동상 등이 있다.
김소운金素雲(1907~1981)시인·수필가. 본명은 교중이고 부산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일본에 가서 기타하라에게 배우고 한국의 민요를 일본에 번역·소개하였다. 저서로는 일역 시집 『조선 민요선집』 『조선 현대 시집』, 수필집 『마이동풍첩』 『삼오당 잡필』 『하늘 끝에 살아도』 등이 있다.
김소월
소월 시비
김소월金素月(1902~1934)시인. 본명은 정식, 아호는 소월이며 평북 정주에서 출생하였다. 1917년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스승인 김 억의 영향으로 시를 써서 뛰어난 재질을 나타내었다. 1920년 김 억의 주선으로 『창조』지에 소월의 첫작품인 「낭인의 봄」 「그리워」 등을 발표하였고, 1922년 『개벽』지에 「진달래」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하였다. 이어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먼 후일」 등 주옥 같은 작품을 내었고, '영대'의 동인으로 활동하며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였다. 그 외 「못잊어」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가는 길」 등의 시를 썼으나, 그 이후로는 민요풍의 서정시에 주력하였고, 3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시집으로 『진달래꽃』 『소월 시집』 등이 있다.
제1회 대한민국국악제에서 열창하는 명창 김소희
김소희金素姬(1917~1995)전북 고창 출생. 판소리 명창. 본명은 순옥(順玉)이며 소희(素姬)는 예명이다. 명창 송만갑 문하에서 소리를 공부했다. 김소희의 창법은 가성을 쓰지 않고 상·중·하청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점이 특징이다. 16세 때 서울로 올라와 활동했다. 한성준에게 살풀이를 배웠고, 1934년에는 정정렬 문하에서 판소리 공부를 계속했으며, 김종기에게 가야금, 거문고를 배워 소리, 춤, 기악을 두루 익혔다. 1936년에는 최초로 정정렬·임방울과 함께 나누어 부른 춘향가를 녹음했으며, 판소리 다섯 마당도 모두 녹음했다. 1939년부터 화랑창극단에 참여했고, 조선성악연구회에 가입했으며, 박귀희와 함께 여성국악동회를 조직했다. 1962년에 유럽, 1964년에 미국을 순회 공연하는 등 우리 전통 예술을 보급하는 데 이바지했으며 1964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김수로왕 탄강성적비
김수근金壽根(1931~1986)건축가. 서울 출신. 1957년 일본 도쿄예술대학 건축과 졸업, 1959년 도쿄대학 대학원 다카야마연구실 석사학위 과정을 수료, 석사학위를 획득했으며, 1962년 동 대학원의 박사학위 과정을 수료했다. 1955년~1956년 도쿄의 마쓰다 건축설계사무소에 근무했으며, 1960년 국회의사당 건축설계안 모집에 응모하여 1등으로 당선했다. 1961년 이래 건축연구소를 자영하는 한편 홍익대학에 재직중, 1964년에 조교수가 되었다. 1961년 워커힐 설계위원, 1962년 서울특별시 도시계획위원, 자유센터 건설분과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