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와 전망/러시아 역사발전의 특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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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이 문장에서는 1905년 제1차 혁명을 가리킴-역주)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예기치 못하게 다가온 것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오래 전에 러시아에서 혁명이 불가피함을 예견했다. 자본주의의 발전과 화석화된 절대주의 체제 사이의 갈등의 결과로서 혁명이 일어나게끔 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다가올 혁명의 성격을 예견했다. 마르크스주의는 러시아 혁명을 일종의 부르조아 혁명이라고 부름으로써, 그 혁명의 즉각적․객관적 과업들이 "부르조아 사회 전반의 발전을 위한 정상적인 조건들"을 창출하는 데 있음을 지적했다.

마르크스주의가 옳았음은 입증되었다. 이 점은 논의할 필요도 증명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이제 마르크스주의자들 앞에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과업 하나가 기다리고 있다. 전개 과정 중에 있는 혁명의 내적 구조(메커니즘)를 분석함으로써 그것의 여러 가능성들을 포착하는 것이 그것이다. 만약 우리의 혁명을 단순히 1789-93년의 사건(프랑스대혁명을 말함-역주)이나 1848년의 사건(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주의자 선언』을 공표한 직후에, 유럽 대륙을 휩쓸었으나 영구혁명이 되기 직전에 차단당한 노동계급 혁명을 말함-역주)과 동일시한다면 어리석은 과오이리라. 자유주의의 배양처인 역사 유비론(歷史類比論)이 사회 분석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은 전적으로 특수한 성격을 지닌다. 그 이유는 우리 사회 전반의 역사적 발전의 특수한 추세 때문인데, 이번에는 혁명의 그러한 특수성이 전적으로 새로운 역사적 전망을 우리 앞에 펼쳐 주는 것이다.



제1장 러시아 역사 발전의 특수성

우리가 러시아의 사회 발전과 다른 유럽 국가들의 사회 발전을 비교해 보면-유럽 여러 나라들의 역사가 공통으로 지니고 있으면서 러시아의 역사와는 변별적(辨別的)으로 구별되는 측면이란 점에서 그 나라들을 일괄해서 취급할 수 있겠다-러시아 사회의 발전에서 주된 특징은 상대적인 원시성과 완만성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필자가 이 자리에서 이와 같은 원시성의 자연적 원인들을 고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러시아의 사회 생활이 좀더 빈곤하고 좀더 원시적인 경제적 기초 위에 성립되었다는 사실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사실로 남아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생산력의 발전이 사회·역사적 과정을 결정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경제적 법인체들과 계급 및 (전자본주의 사회의 위계질서인)신분(estate)은 생산력의 발전이 일정 수준에 달했을 때에야만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신분과 계급의 분화는 분업의 발전과 보다 전문화된 사회적 기능들의 창출에 의해 결정되므로, 직접적인 물질적 생산에 동원된 인민들이 자기들 자신이 소비해야 하는 것(필요 생산물-역주) 말고도 그 위에 여분의 생산물, 즉 잉여(생산물-역주)를 생산해야 함을 전제하고 있다. 즉, 잉여를 소외시킴으로써만 비생산 계급이 등장해서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직접 생산자 계급 자체 내의 분업은 농업이 일정 정도 발전하여 농업 생산물을 비농업 인구에게 공급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사회 발전에 관한 이러한 기본적인 명제들은 이미 아담 스미스(Adam Smith)에 의해 명확히 정식화된 바 있다.

이런 사실의 당연한 귀결로서 다음과 같은 지적을 할 수 있겠다. 즉, 우리나라 역사에서 노브고로뜨(the Novgorod) 시기는 유럽의 중세초기와 일치하지만, 자연적·역사적 조건들(불리한 지리적 입지 조건, 낮은 인구밀도 등)로 인한 완만한 페이스의 경제 발전이 계급 형성 과정을 억제하여 그 과정에 좀더 원시적인 성격을 부여하였다.

만약 러시아가 고립되어 그 자체의 내적 경향들의 영향력만 받았더라면 러시아의 사회 발전이 어떤 모습을 취했었을 것인가에 대해 말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러시아의 사회 생활은 일정한 대내적 견제 토대 위에 성립되었지만, 줄곧 대외적인 사회·역사적 환경의 영향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직접 그러한 압박 아래 놓여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사회·국가 조직체(organization)가 그것의 형성 과정에서 이웃의 다른 (사회·국가)조직체들과 충돌하게 되면서, 자신의 경제 관계의 원시성과 이웃의 비교적 고도(高度)로 발전된 경제관계가 후속 과정에서 이 조직체를 결정적으로 규정하는 역할을 했다.

러시아 국가(state)는 원시적인 경제 토대 위에서 성장하여 더 고차원적이고 더 안정된 토대 위에 세워진 국가 조직체들과 관계를 맺고 갈등도 겪게 되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앞에 놓여 있다. 즉, 모스크바 공국(the moscow State)과의 투쟁에서 몰락한 킵차크 국(the Golden Horde:몽고족이 13세기 중반에서 15세기말까지 러시아를 지배할 당시 건설했던 국가-역주)처럼 러시아 국가도 몰락하든가 혹은 경제 관계의 발전에서 이운 국가들을 추월하여 고립된 상태로 남아 있는 경우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활력을 흡수하든가의 두 가지 가능성이 그것이다. 그런데, 러시아의 경제는 몰락의 가능성이 현실화되는 것을 막기에 이미 충분할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러시아-역주)국가는 엄청난 경제력의 압박을 받으면서도 붕괴되지 않고 오히려 성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러시아가 외적에 의해 사면초가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실만으로는 러시아의 처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사실, 이 점은-아마도 영국은 예외일 수도 있지만-유럽의 다른 어떤 나라에도 적용되는 얘기일 것이다. 이들 유럽 여러 나라들은 상호 생존경쟁에서 거의 동일한 경제적 기초에 의존하였으므로, 그 나라들의 국가 조직체의 발전은 이렇게도 강력한 외압에 좌우되지 않았다.

크리미아(Crimea)와 노가이(Nogai)의 따따르족(Tatars)에 대항한 투쟁은 극도의 노력을 경주하게 만들었지만, 말할 나위 없이 영불간의 백년전쟁 중에 기울인 노력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구(舊)러시아로 하여금 소형 화기(火器)를 도입하고 스뜨렐치(Streltsi) 상비군 연대를 창설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은 따따르족이 아니었다. 즉, 기병 기사단과 보병 부대를 창설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은 따따르족 때문이 아니라 리투아니아(Lithuania)와 폴란드 및 스웨덴의 압박 때문이었던 것이다.

서구측의 이런 압박의 결과로 (러시아-역주)국가는 잉여 생산물의 대부분을 소모해 버렸다. 즉, 러시아 국가는 당시 형성되고 있던 특권 계급들에게 손해를 입힘으로써만 존속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그 특권 계급들의 기존의 완만한 발전마저 억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국가는 농민의 필요 생산물조차 강탈해 갔다. 국가는 농민의 생계를 위한 생산물을 박탈했던 것이다. 결국, 농민은 자기 땅에 제대로 정착할 시간조차도 갖지 못한 채로 자기가 가꿔 놓은 경작지를 도망치듯이 떠나야만 했다. 이렇게 해서 국가는 인구의 증가와 생산력의 발전을 저해하게 된 것이다. 또한, 잉여 생산물 중에서 터무니없이 많은 부분을 국가가 소모해 버렸기 때문에, 국가는 그나마도 속도가 완만한 신분(estate) 분화 과정을 더욱 완만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필요 생산물 중의 중요한 부분을 가로채 버림으로써 국가는 바로 자신의 토대가 되고 있던 원시적인 생산 기반조차도 파괴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가가 존속하고 기능하기 위해서, 그리고 특히 사회적 생산물 중에서 자신이 필요한 부분만큼을 양도받기 위해서 국가는 여러 신분들을 위계(位階)적으로 계층화시켜 조직하는 것을 필요로 했다. 바로 이 때문에 러시아 국가는 자신이 발전하는 데 필요한 경제적 토대를 잠식하고 있으면서도, 그와 동시에 억지로 정부의 법적 강제 조치들을 통해서 그러한 토대를 발전시키려고 애썼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신분제의 발전 과정을 국가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돌려 놓으려고 애썼던 것이다. 러시아 문화사 학자인 밀류꼬프(Milyukov)는 러시아의 바로 이러한 점이 서유럽의 역사와 정반대되는 점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떠한 반대되는 사실도 실제로는 없는 것이다.

후에 관료제적 절대주의로 발전한 중세의 봉건 군주제는 일종의 국가 형태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것은 특정한 사회적 이해관계들을 강화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출현해서 존재하게 된 이상, 이러한 국가 형태도 그 자체로 고유한 자신의 이해관계를 갖게 되며, 그러한 이해관계는 하층 계급들의 이해관계뿐만 아니라 상층 계급들의 이해관계와도 상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반 대중과 국가 조직체 사이에서 사회적으로 필수불가결한 '중간 벽'을 구성하고 있던 지배적인 신분들은 국가 기구에 압력을 행사해 국가의 실제적인 활동의 내용을 자신들의 이익과 부합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국가 권력은 하나의 독자적인 힘으로서, 상충 신분들의 이해관계를 자신의 고유한 관점으로부터 바라보게 되었다. 국가 권력은 상층 신분들의 욕망에 대해 저항하기 위한 장치들을 마련했으며 그들을 자신에게 복종시키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국가와 제 신분계층간의 관계의 실제 역사는 이같이 결국은 역학적 상관관계에 의해서 결정되는 궤도를 따라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러시아에서도 근본적으로는 이와 동일한 과정이 일어났다.

국가는 발전하고 있던 여러 경제 집단들을 이용하려 노력했으며, 그것들을 국가 자신의 고유한 특정 재정적․군사적 목적들에 종속시키려고 애썼다. 당시 출현하고 있던 지배적인 경제 집단들은 국가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유리한 위치를 신분적 특권 형태로 만들어 더욱 공고히 하려고 노력했다. 러시아에서의 여러 사회 세력들의 이러한 활동의 전개 과정은 서유럽의 경우보다도 훨씬 더 국가 권력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노동 대중의 희생 위에 기초한 국가 권력과 사회 상층 집단들간의 상호봉사 관계는 권리와 의무, 세금과 노역의 부담과 특권의 분배 방식으로 표현되기 마련인데, 이 관계는 신분제에 기초한 중세 서유럽의 군주제와 비교해 볼 때, 러시아의 경우 귀족 및 사제들에게는 덜 유리한 것이었다. 이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밀류꼬프처럼 서구에서는 제 신분이 국가를 만들었지만 러시아에서는 국가 권력이 자신의 고유한 이해관계에 따라 신분들을 만들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주 과장된 표현이며 또한 전혀 균형 감각이 결여된 말이 될 것이다.

신분들은 국가의 행위, 즉 법에 의해서 창조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회 집단이 국가 권력의 도움을 빌어서 특권 신분으로 부각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신분은 이미 자신의 사회적 이점들을 십분 활용해서 경제적으로 발전되어 있어야만 한다. 이에 정해져 있는 어떤 위계 서열표나 또는 포상 규범에 따라서 신분계층들이 제조될 수는 없는 법이다. 국가 권력은 보다 높은 단계의 경제 구성체로 나아가는 근원적인 경제발전 과정을 자기가 지닌 모든 자원을 통해서 촉진시켜 줄 수밖에 없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러시아 국가는 국민의 생산력 중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독차지했으며, 따라서 사회 구조의 고착화 과정을 방해해 왔다. 그러면서도 국가는 동시에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위해 그러한 과정이 필요했다. 따라서 당연히 러시아 국가는 구조적으로 보다 분화된 서구의 영향과 압력 하에-이러한 압력은 군국주의적 국가 조직체를 통해서 전달되었다-뒤늦게나마 원시적인 정제 토대를 바탕으로 사회 분화를 강제로 촉진시키려고 노력했다. 더구나, 사회·경제적 구성상의 취약성에서 비롯된 바로 이 같은 강제성의 필요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국가는 국민의 보호자로서의 자신의 역할과 더불어, 자신이 지닌 막강한 권력을 자신의 고유한 재량에 따라 상층 계급의 발전 방향을 감독하는 데 사용하려고 노력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감독 활동이 커다란 성공을 거두기도 전에, 국가는 먼저 바로 자신의 조직이 지니는 취약성과 원시적인 성격 때문에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같은 국가 조직체의 원시적인 성격은, 앞에서 우리가 언급한 것처럼 바로 사회 구조의 원시성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러시아의 경제적 조건을 토대로 해서 세워진 러시아 국가는 보다 발전된 경제적 토대 위에서 성장해 온 인접 국가 조직체들의 우호적이거나 때로는 적대적인 압력에 밀려서 전진해 나가고 있었다. 어떤 일정한 시점부터-특히 17세기 말부터-러시아 국가는 자신의 모든 권력을 동원해서 나라의 자연 경제적 발전을 가속화시키려고 노력했다. 말하자면, 새로운 분야의 수공업, 기계류, 공장, 대기업, 자본 등이 자연경제의 줄기에 인공적으로 접목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의 자본주의는 국가의 산물(産物)인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러시아의 모든 학문은 정부의 노력에 의한 인위적인 산물, 즉 국민의 무지(無知)라는 자연적인 줄기에 인공적으로 접목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공장처럼 학교가 국가의 인위적인 산물이었음을 깨닫기 위해서는 국가와 학교 사이의 초창기 관계들을 나타내 주고 있는 특징들을 회상해 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교육을 위한 국가의 노력은 이러한 ‘인위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학업을 게을리 하는 학생들은 사슬에 묶여 처벌을 받았다. 학교 전체가 사슬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학업은 일종의 부역의 한 형태였다. 학생들은 급료를 지급받았던 것이다. 기타 등등의 사실들.-L.T.

(L.T.)는 뜨로츠끼 자신의 註이다. 특별한 표시가 없는 것은 영역자의 註이다.)

러시아의 사상은 러시아의 경제와 마찬가지로 서구의 보다 발전된 경제와 보다 차원 높은 사상의 직접적인 압력 하에 발전했다. 경제 조건들의 자연 경제적 성격 때문에, 즉 대외 교역의 빈약한 발전 때문에,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는 거의 전적으로 국가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이러한 나라들로부터의 영향은 그들과 러시아 국가간의 직접적인 경제적 경쟁 관계로 표출되기보다는 오히려 러시아 국가 자체의 존립을 위한 치열한 싸움으로 표현되었다. 서구 경제학은 러시아의 경제학에 국가를 매개로 해서 영향을 미쳤다. 보다 잘 무장된 적대적인 나라들 사이에서 살아 남을 수 있기 위해서 러시아는 어쩔 수 없이 공장들을 세우고, 항해 학교들을 설립하며, 축성술에 대한 교과서들을 출판하는 등의 일들을 해야 했다. 그러나 만일 이처럼 광활한 나라의 국내 경제의 전반적인 흐름이 국가가 추구하는 방향과 동일한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만일 제반 경제 조건들의 발전으로 인해서 순수과학 및 응용과학을 위한 수요가 창출되지 않았더라면, 국가의 모든 노력들은 결실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자연스럽게 실물 경제로부터 화폐 및 상품 경제로 발전해 가고 있던 국민경제는 단지 그 같은 발전에 부합되는 정부 조치들에 대해서만 반응했으며, 또한 그 조치들이 자신의 발전과 부합하는 범위에만 국한해서 작동했다. 이상과 같은 분석을 가장 잘 입증해 주는 것은 러시아의 공업 및 통화 제도, 그리고 국가 대부(國家貸付)의 역사이다.

멘젤레에프(Mendeleyev)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다수의 공업 분야들은(금속, 제당, 석유, 정유 및 섬유 공업까지도) 정부 조치들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조성되었으며, 때로는 대규모의 국가 보조금의 도움을 받기조차 했다. 그리고 특히 정부는 언제나 의식적으로 보호 정책을 펼쳤던 것이다. 짜르 알렉산드르의 통치 기간 내내 정부는 이 같은 정책을 솔직하게 구호로 내세웠다.‥‥‥보호주의의 원칙들을 전적으로 수용하여 러시아에 적용시킨 정부의 고위 당국자들이 우리나라의 지식인 계급 전체보다도 더 진보적이었음이 입증되었다“ (D.맨젤레예프,『러시아에 대 한 이해를 위해서』, 뻬쩨르부르끄,1906, p.84)

공업 보호 정책을 이처럼 찬양한 박식한 멘젤레예프 교수는 정부의 그러한 정책이 공업 생산력의 발전에 대한 관심과는 전혀 상관없이 단지 재정상의 이유와 부분적으로는 군사 기술상의 이유로 강요된 것임을 덧붙여 말하는 것을 잊어 버렸다. 바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보호 정책은 공업 발전의 근본적인 이익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실업가 집단들의 개별적인 이익들과도 종종 대립되곤 했던 것이다. 실제로, 방적 공장의 소유주들은 "면화에 대한 높은 관세는 면화 재배를 장려할 목적에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재정상의 이익을 위해서 부과되고 있다"라고 드러내 놓고 말하곤 했다. 정부가 신분계층을 "창출"할 때 무엇보다도 먼저 국가의 목적을 추구하는데 열심이었던 것처럼, 공업의 "이식"에서도 마찬가지로 주된 관심사는 국고의 재정을 충당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토양에 공장화된 생산 체계를 이식하는데 전제주의 체제가 전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발전하고 있던 부르조아 집단들이 서구의 정치 제도를 도입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한 시점에 이르렀을 때, 전제주의 체제는 이미 유럽 국가들과 완전히 동일한 물질적 수단으로 무장하고 있음이 판명되었다. 전제주의는 중앙집권화된 관료 기구에 의거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관료 기구는 새로운 사회관계를 확립하는 데는 전혀 무용지물이었지만 체계적인 탄압을 수행하는 데는 커다란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국토의 광활함은, 제반 행정 활동에 지령을 내려 주고 탄압 활동을 비교적 단순하고 신속하게 수행하도록 해주는 전신 설비에 의해서 극복되었다. 철도는 나라의 한 끝에서 다른 한 끝으로 군대를 급파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다. 혁명 이전의 유럽의 전제주의 정부들은 철도나 전신과 같은 설비들을 거의 알지 못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절대주의가 소유한 군대는 엄청난 것이었다. 물론 이 군대는 러일전쟁과 같은 심각한 고비에는 무용지물임이 판명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 안의 통치를 위해서는 충분히 쓸모 있는 것이었다. 대혁명 이전의 프랑스 정부뿐만 아니라 1848년 혁명 당시의 프랑스 정부조차도 오늘날 러시아의 군대와 유사한 군대는 결코 갖지 못했다.

조세 및 군사 기구를 통해서 나라를 최대한도로 쥐어짜면서 러시아 정부는 연간 20억 루블이라는 어마어마한 예산을 설정하게 되었다. 이처럼 거대한 군대와 예산을 보증으로 해서 전제주의 정부는 유럽의 금융시장(원문에는 증권거래소로 되어 있음-역주)을 국고 조달원으로 활용하였으며, 러시아의 납세자들은 이러한 유럽의 금융시장에 공물을 바치는 구제불능의 공납자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19세기의 80년대와 90년대에 와서 러시아 정부는 무적의 위세를 지닌 거대한 군사·관료 조직으로서, 그리고 재정 및 채권거래 조직으로서 세계와 상면하게 되었다.

절대 군주제의 재정적·군사적 위세 앞에 유럽의 부르조아지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자유주의자들 역시 압도당했으며, 또한 눈이 멀어버렸다. 그래서 러시아의 자유주의자들은 절대주의에 공공연히 도전해서 한판을 겨루어 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모든 신념을 상실해버렸다. 절대주의의 군사적·재정적 위력은 러시아 혁명에 관한 한 어떠한 기회도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정확히 그 반대의 경우가 사실로 입증되었다.

정부가 더욱 중앙집권화되고 더욱 사회와 유리된 독자적인 것이 되어 갈수록, 그것이 사회 위에 군림하는 전제주의적인 조직으로 되어버리는 일이 보다 빨리 일어난다. 그 같은 조직의 재정 및 군사력이 보다 커질수록 그 조직은 보다 오랫동안, 그리고 보다 성공적으로 존립을 위한 투쟁을 지속할 수 있다. 비록 러시아 국가가 사회 발전의 가장 초보적인 요구들조차도 더 이상 만족시키지 못할지라도, 그리고 국내 행정상의 요구들뿐만 아니라 군사적 방위를 위한 요구들조차도 더 이상 만족시키지 못할지라도(그런데 원래 이처럼 강력한 국가는 군사적 안보의 유지를 위해서 형성되었던 것이다), 연간 20억 루블의 예산을 쓰며 80억 루블의 부채를 안고 있고, 수백만 명의 무장된 병사들로 구성된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이처럼 거대한 중앙집권화된 국가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같은 상태가 오랫동안 답습되어 감에 따라 경제 및 문화 발전의 요구들과 정부의 정책 사이의 모순은 더욱 커져만 갔다. 정부는 자신이 지닌 타성을 '수십억 배'로 보다 강력하게 발전시켜 왔던 것이다. '급조된 위대한 개혁들'의 시대가 지나간 뒤에-그런데 그 개혁들은 이러한 모순들을 해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그 모순들을 처음으로 생생하게 드러내 주었다-정부가 자발적으로 의회주의의 길로 들어서는 깃은 훨씬 더 어려워졌으며, 또한 심리적으로도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렸다. 결국 이 같은 상황이 사회에 지시해 준 이러한 모순들로부터의 유일한 출구는, 절대주의라는 보일러 내에서 절대주의 자체를 폭발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양의 증기를 축적하는 길이었다.

따라서, 사회 발전에도 불구하고 절대주의를 계속 존속시켜 줄 수 있었던 국가의 행정적․ 군사적․재정적 위세는 자유주의자들의 의견처럼 혁명의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혁명을 유일한 출구로 만들어 준 것이다. 더구나, 이 혁명은 절대주의의 위세가 자기 자신과 국민 사이에 파놓은 심연의 깊이에 비례해서 더욱더 철저한(radical) 성격을 띠어 갈 것임이 이미 분명해졌다.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는 오직 자신만이 이러한 발전의 방향을 설명했으며, 또한 그러한 발전의 일반적인 형태들을 예고해 주었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맨젤레예프 교수와 같은 반동적인 관료도 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공업 발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관찰을 하고 있다:"이점에 관해서 사회주의자들은 무엇인가를 감지했으며 부분적으로나마 그것을 이해했지만, 그러나 길을 잘못 들어섰다. 그들은 그들의 고유한 어법(!)에 따라서 폭력에 의지할 것을 호소하고 있으며, 하층 천민들의 난폭한 본능에 영합해서 혁명과 권력을 추구하고 있다." (『러시아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p.120))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가장 황당무계한 ‘실천지상주의'에 만족하고 있었으며, 혁명적 "인민주의자"들(나로드니끼)은 환상으로, 그리고 기적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사회 발전 전체가 혁명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혁명의 동력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