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와 전망/1789-1848-1905년의 혁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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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반복하지 않는다. 러시아 혁명을 프랑스 대혁명과 아무리 비교해 보아도, 전자가 결코 후자의 재반복으로 변화될 수는 없다. 그것은 바로 19세기가 결코 헛되이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848년은 이미 1789년과는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프러시아의 혁명이나 오스트리아의 혁명이 프랑스 대혁명에 비해서 별로 진전된 것이 없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놀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서는-역주) 이 혁명들은 너무 일찍 발생했다고 볼 수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부르조아 혁명으로서는-역주) 너무 늦게 일어났다고 볼 수도 있다. 부르조아 사회가 구시대의 영주들을 철저하게 청산하는 데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엄청난 노력들은 오직 다음 두 가지의 경우에만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즉, 국민 전체가 봉건적 전제정치에 대항해서 궐기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해방되려고 노력하는 이러한 국민 내부에서 계급투쟁이 강력하게 발전되어야 하는 것이다. 1789년부터 1793년에 걸쳐서 일어났던 일은 바로 전자의 경우에 해당되는데, 이 경우 구질서의 맹렬한 저항에 의해서 압축된 국민적 에너지는 전적으로 반동에 대한 투쟁에 쓰였던 것이다. 다른 한편, 후자의 경우는 역사적으로 아직 일어난 적이 결코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단지 하나의 가능성으로서만 생각하고 있는데, 만일 그러한 경우가 실현된다면, 역사의 암흑 세력들을 타도하는데 필요한 실제적인 힘은 부르조아 국가 내에서 일종의 '격렬한 내전적인' 계급 전쟁에 의해서 생성된다. 그 같이 가차없는 내전적인 갈등은 막대한 양의 국민적 에너지를 흡수해 버릴 것이며, 또한 부르조아지로부터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 버릴 것이다. 따라서, 부르조아지의 적대자인 프롤레타리아를 전면에 부각시키게 될 것이며, 단시일 내에 프롤레타리아에게 10년에 해당하는 경험을 안겨 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에게 상황의 주도권을 부여할 것이며, 또한 단단하게 조여진 권력의 고삐를 그들에게 건네줄 것이다. 단호하고 의심을 모르는 이 계급은 사건들의 회오리를 휘몰아쳐 올 것이다.

만약 어떤 국민이 혁명을 달성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국민 전체가 마치 도약할 준비를 하는 사자처럼 스스로 하나로 결집되는 경우거나, 그렇지 않으면 국민 전체가 투쟁 과정에서 포괄적으로 분열되면서 그들 가운데 최상의 부분이 해방되고, 또한 바로 이들에 의해서 국민 전체로서는 수행할 수 없는 과제들이 해결되는 경우이다. 이상과 같은 두 가지의 서로 다른 경우를 이루는, 역사적 조건들의 집합은 서로 상반되며, 만일 두 집합을 완전히 추상화된 순수 형태로만 파악한다면, 물론 양자간의 대립은 한낱 논리학에서의 대우명제의 관계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많은 경우들에서도 그러하듯이, 이러한 대립선상에서 중간의 길로 나아간다는 것은 가장 최악의 길이다. 그런데, 1848년의 혁명은 이러한 중간의 길로 나아갔던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 기간 동안에는 프랑스의 부르조아지가 진보적이었고 능동적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위치가 지니고 있는 모순들을 아직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으며, 역사는 그들에게 프랑스의 다 낡아빠진 제도들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의 반동세력들에 대항해서 새로운 질서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을 지도하라는 임무를 부과했다. 따라서 부르조아지는 철저하게, 그리고 그들 내부의 파벌이야 어떻든 간에, 자신을 국민의 지도자로 간주하였고, 대중을 투쟁에 결집시켰으며, 이들에게 투쟁 구호 및 전술들을 제시해 주었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국민 전체를 결속시켰다. 민중, 즉 농민과 노동자들 및 도시 쁘띠부르조아지는 부르조아를 자신들의 대표로 선출했으며, 이들 대의원들이 자신의 선거인들로부터 위임받은 권한들은 자신의 구세주적 사명을 의식하게 된 부르조아지의 언어로 문서화되었다. 비록 계급적 적대 관계가 이미 드러나 있었다 할지라도, 혁명기간 내내 혁명 투쟁의 강력한 관성은 시종일관 부르조아지 중에서 보다 보수적인 인자들만을 정치적 궤도 밖으로 내동댕이쳐 버렸던 것이다. 어떠한 계층도 자기 바로 뒤에 위치한

계층에게 자신의 혁명적 에너지를 넘겨주고 나서야 비로소 궤도에서 밀려났다. 따라서 일반 국민은 보다 예리하고 보다 단호한 방식으로 그들의 목적을 위해 계속 투쟁해 나갔다. 대부르조아지의 상층부가 운동을 촉발시켰던 국민의 중핵과 결별하고 루이16세와 동맹을 형성하였을 때, 국민의 민주주의적 요구들은 이러한 대부르조아지에 대항하는 방향을 지향했으며, 따라서 민주주의의 논리적, 필연적 형태인 보통선거와 공화국 수립으로 귀결되었다.

프랑스 대혁명은 실로 범국민적인 혁명이었다. 그리고 나아가서, 그러한 국민적(national : '부르조아 사회 일반'의 발전이라는 뜻임-역주) 테두리 내에서 지배권과 권력과 완벽한 승리를 위한 부르조아지의 세계적인 투쟁이 고전적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쟈꼬뱅주의라는 낱말은 현재에는 현자인 것처럼 행세하는 모든 자유주의자들에게 일종의 욕설로 통용되고 있다. 혁명, 대중,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의 힘과 장엄함에 대한 부르조아지의 증오는, 그들이 겁에 질리고 분노에 차서 내뱉는 이 한마디의 외침 -쟈꼬뱅주의!-속에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의 국제 전위대인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쟈꼬뱅주의와 역사적 결말을 보았다. 현재의 국제 프롤레타리아 운동 전체는 쟈꼬뱅주의의 전통에 대항한 투쟁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또 그 투쟁을 통해서 강력하게 성장해 온 것이다. 우리들은 쟈꼬뱅주의의 이론들을 비판했으며, 그것의 역사적 한계, 사회적 모순, 공상적 이상 및 미사여구들을 폭로했다. 즉, 우리들은 수십 년간 혁명의 성스러운 유산으로 여겨져 왔던 쟈꼬뱅주의적 전통들과 단절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빈혈증에 걸려 무기력해진 자유주의자들의 멍청한 욕설과 중상모략 등과 같은 공격에 대해서는 쟈꼬뱅주의를 옹호한다. 부르조아지는 그들의 역사적 전성기에 이루어 놓은 모든 전통들을 파렴치하게 배신했으며, 현재 그들의 후계자들은 자기 조상들의 무덤을 욕되게 하고 이미 해골이 되어 버린 조상들의 이상을 비웃고 있다. 부르조아지의 혁명적 과거의 명예로운 유산을 떠맡아 현재 보존하고 있는 것은 바로 프롤레타리아이다. 사실, 아무리 철저하게 부르조아지의 혁명적 전통들과 결별했다고 할지라도 프롤레타리아는 여전히 그 전통들을 위대한 열정과 영웅적 투쟁과 진취적 기상의 성스러운 유물로서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쟈꼬뱅들이 국민의회(La Convention nationale)에서 보여 준 언행의 대담성에 대해서 심정적으로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프랑스 대혁명의 전통이 아니었다면 자유주의에게 어떤 매력이 있었겠는가? 1793년 로베스삐에르를 중심으로 한 쟈꼬뱅, 상뀔롯뜨(Sans-culotte;주로 소상인, 임금 소득자, 부랑자로 구성된 급진 공화주의자- 역주)들의 공포 민주주의(terrorist democracy)의 기간만큼이나 부르조아 민주주의가 높이 치솟아 민중의 가슴 속에 위대한 불꽃을 타오르게 한 때가 도대체 언제 있었겠는가?

부르조아 급진주의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그것이 보여 준 왜소함과 파렴치함으로 인해서 간단히 막을 내려 버린 시기에, 쟈꼬뱅주의 말고 다른 무엇이 프랑스의 다양한 색조를 지닌 부르조아 급진주의로 하여금 민중의 압도적 다수 및 심지어 프롤레타리아에 대해서까지도 그토록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만들 수 있었는가?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끌레망소(Clemenceau), 밀랑(millerand), 브리앙(Briand), 부르죠아(Bourgeois)와 같은 프랑스의 급진주의자들과 급진주의적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적어도 빌헬름 2세 밑의 저 우둔한 융커(Junker:19세기 중반 프러시아의 특권 귀족당의 당원-역주)들 보다는 졸렬하지 않은 방식으로 부르조아 사회의 대들보를 방어하는 법을 알고 있는 모든 정치가들을 키워 주고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이겠는가?-그것이 만일 그 추상적인 정치 이데올로기, 신성 공화국에 대한 그 숭배, 의기양양한 그 선언문들과 더불어 쟈꼬뱅주의가 발산하는 매력이 아니라면 말이다. 다른 나라의 부르조아 민주주의자들은,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에 대한 선망의 눈길로 프랑스의 급진주의자들을 쳐다보고 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들은 급진주의자들의 정치적 장점의 근원인 영웅적 쟈꼬뱅주의에 대해서는 중상모략을 퍼붓고 있다.

많은 희망이 깨어져 버린 지금에 와서조차도 쟈꼬뱅주의는 여전히 민중의 기억 속에 하나의 전통으로 남아 있다. 과거의 언어는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말하는 데에 오랫동안 여전히 사용되었다. 산악당(La Montagne:프랑스 대혁명 당시 로베스삐에르와 당똥을 중심으로 한 국민의회의 좌파 대의원들을 일컬음; 이들은 통상 회의장내에서 가장 높은 데 위치한 좌석에 앉아 있곤 했다-역주)의 정부가 붕괴된 지 거의 반세기가 지난 1840년, 즉 1848년 6월의 혁명이 발생하기 바로 8년 전에 하이네(Heine)는 파리 외곽의 생 마르소 공장 지대(faubourg de Saint-Marceau)에 있는 몇 개의 작업장을 둘러보았다. 그는 거기서 "하층 계급들 중 가장 견고한 부분"인 노동자들이 독서하는 것을 보았다. 이 광경에 대해서 그는 한 독일 신문에 다음과 같이 기고했다:"나는 거기서 과거 로베스삐에르의 알려지지 않았던 몇몇 새로운 연설문들과 아주 값싸게 제본되어 돌아다니고 있는 옛날 마라(Marat)가 쓴 소책자들을 발견했다. 또한 그밖에도 많은 것들이 있었다. 까베(Cabet)의 『혁명사』, 까르메넨(Carmenen)의 적의에 찬 풍자시들, 『바뵈프(Babeuf)의 가르침과 음모』와 같은 부오나로띠 (Buonarroti)의 각종 저술들,‥‥‥즉 피비린내를 풍기는 모든 글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어서 그 시인은 다음과 같은 예언을 한다:"이러한 씨앗이 거둘 결실 중의 하나로서, 조만간 새로운 공화국의 탄생이 프랑스에 도래하게 될 것이다. "

1848년에는, 부르조아지가 이미 과거와 필적할 만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권력을 향한 길을 가로막고 서 있던 사회체제를 혁명적으로 일소할 의향이 없었으며, 또한 그럴 능력도 없었다. 지금에 와서 우리는 당시 부르조아지가 왜 그러했는가를 명확히 알고 있다. 그들의 목적은 자신들만의 독점적인 정치적 지배가 아니라 단지 구시대의 세력들과 권력을 나누어 갖는 데 필요한 보장 조치들을 구체제 내에 도입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점을 명확히 의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 부르조아지의 과거 경험들을 통해서 비열한 짓을 하는 데는 더욱 현명해졌으며, 프랑스 부르조아지의 배신을 통해서 부패하였고, 이들의 실패로 인해서 겁을 집어먹었다. 1848년의 부르조아지는 대중을 인도하여 구질서를 덮치는 데 실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구질서에 의지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가라고 그들에게 압력을 가하던 대중을 배척했던 것이다. 프랑스 부르조아지로 말하자면 자신들의 대혁명을 완수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의 의식은 사회의 의식이 되었으며, 어떤 것이든지 간에 하나의 제도로서 확립될 수 있으려면 반드시 먼저 부르조아지의 정치의식 속에서 창출될 필요가 있다는 판정을 받아야만 되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부르조아 세계의 한계를 스스로 감추기 위해서 종종 극적인 몸짓을 취하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혁명만은 완수했던 것이다.

반면, 독일 부르조아지는 애초부터 '혁명을 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을 혁명으로부터 유리시켜 버린 것이다. 그들의 의식은 그들의 정치적 지배를 위한 객관적 조건들과 정면으로 대립했다. 따라서 혁명은 부르조아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대항해서만 수행될 수 있었다. 민주주의적인 제도들은 부르조아지의 마음 속에서, 쟁취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안락을 위협하는 것으로 비춰졌던 것이다.

1848년의 경우에는, 부르조아지 없이도 그리고 부르조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사건을 떠맡을 수 있는 계급, 즉 부르조아지에게 압력을 가해서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결정적인 순간에는 부르조아지라는 정치적 산송장을 궤도 밖으로 내던져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계급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도시의 쁘띠부르조아지나 농민들은 이것을 할 능력이 없었다.

도시 쁘띠부르조아지는 과거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해서도 적대적이었다. 이들은 아직 중세적인 관계들 속에 얽매여 있었으나 이미 '자유' 상공업에 대항할 능력은 없었다. 아직은 도시에 자신들의 자취를 새겨 나가고는 있었지만, 그러나 이미 중간 부르조아지와 대부르조아지에게 굴복하고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편견에 깊이 빠져 있었으며, 사건 전개의 폭발적인 굉음에 귀가 먹어 버렸다. 이들은 착취하면서 착취당하는 존재들로서 탐욕스러웠으며, 또한 자신들의 탐욕을 만족시키기에는 어쩔 수 없이 무기력해야만 했다. 이처럼 궁지에 빠져 꼼짝 못하게 된 존재인 쁘띠부르조아지는 당시의 엄청난 사건들을 통어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농민은 쁘띠부르조아지보다도 훨씬 더, 독자적인 정치적 주도력(이니셔티브)이 결여되어 있었다. 수세기 동안 속박당해 왔으며 궁핍으로 괴로워하고 분노에 차 있는, 그리고 또한 구시대의 착취와 새로운 시대의 착취의 모든 실타래가 자신에게 감겨 있는 농민은 어떤 시점에서는 혁명적 동력의 풍부한 원천을 이루었다. 그러나, 조직화되어 있지 못했고, 산개(散開)된 채로 문화와 정치의 중추부인 도시로부터 유리되어 있었으며, 도시가 당시 생각하고 있던 모든 것들에 대해서 무관심한 채로 각자 자신의 촌락에 국한된 한정된 시야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주도 세력으로서의 어떠한 비중도 차지할 수 없었다. 농민들은 봉건적 의무라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벗어나자마자 즉시 진정되었으며, 그들의 권리를 위해서 싸워 온 도시에게 엄청난 배은망덕한 보답을 했다. 즉, 해방된 농민들은 '질서'의 광신자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지식인 민주주의자들에게는 계급으로서의 힘이 결핍되어 있었다. 이 집단은 어느 순간에는 자신들의 선배 격인 자유주의자 부르조아지를 정치적으로 추종했다가 또 다른 순간에는, 즉 위급한 순간에는 자유주의자 부르조아지를 버림으로써 자신들의 고유한 약점을 노출시켰던 것이다. 그들은 풀리지 않는 모순 속에서 혼란을 겪고 있었으며, 또한 가는 곳마다 이러한 혼란을 달고 돌아다녔다.

프롤레타리아는 너무 약했으며, 조직과 경험, 그리고 인식이 결핍되어 있었다. 낡은 봉건적 관계들의 폐지가 필수적일 만큼 자본주의는 충분히 발전되어 있었으나, 새로운 생산관계의 산물인 노동계급을 결정적인 정치 세력으로서 전면에 부각시킬 정도로 충분히 발전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혁명의 내부적 마찰은 프롤레타리아에게 정치적 독자성에 대한 절박성을 인식시켜 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대중의 활력과 행동통일을 약화시켰으며, 쓸데없는 힘의 낭비를 초래했고, 또한 최초의 성공을 거둔 후부터는 혁명을 너무 지지부진하게 지체시켜 버렸으며, 따라서 반동 세력의 반격에 어쩔 수 없이 퇴각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혁명 기간 중에 제반 정치적 관계들이 갖고 있던 이러한 미완의 불완전한 성격을 특히 명확하게, 그리고 비극적으로 보여 주는 예는 바로 오스트리아의 경우였다.

1848년 비엔나의 프롤레타리아는 경탄할 만한 영웅적 행위와 지칠 줄 모르는 활력을 보여 주었다. 오직 어렴풋한 계급적 본능에 이끌려서, 그리고 투쟁의 목표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 설정도 갖추지 못한 채로 단지 암중모색의 상태에서 이 구호에서 저 구호로 옮겨 다니면서, 비엔나의 프롤레타리아는 거듭해서 몇 번이고 격전 속으로 돌진했던 것이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의 지도력이 당시 유일하게 활동적인 민주주의자 집단인 학생들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충분히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학생들은 자신들의 활동 덕택에 대중에게 거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으며, 따라서 사건의 추이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들이 바리케이드 선상에서 용감하게 싸웠으며 또한 명예롭게 노동자들과 동지애로 결속될 수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거리에서의 '독재적인 권위'를 그들에게 넘겨 준 혁명의 앞으로의 발전과정을 그들이 지도할 수는 전적으로 없는 것이었다.

조직화되어 있지 못했고 정치적 경험이나 독자적인 지도력도 갖고 있지 못했던 프롤레타리아는 학생들의 뒤를 따랐다. 개개의 위급한 순간마다 변함없이 노동자들은 '머리로 일하는 양반들'에게 '손으로 하는 자신들의 도움'을 제공해 주었다. 학생들은 어떤 순간에는 노동자들에게 싸울 것을 촉구했으며, 또 다른 순간에는 학생들 스스로가 변두리에서 도시로 진입하는 노동자들의 길을 가로막았다. 때때로 자신들의 정치적 전위를 활용하면서, 그리고 사관생도대의 무력에 의존하면서, 노동자들이 자기들 자신의 독자적인 요구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것은 명백히 프롤레타리아 위에 군림하는 시혜적(施惠的)인 혁명적 독재의 고전적인 형태였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의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왜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을까? 즉, 5월 26일 비엔나의 모든 노동자들이 학생들의 부름에 따라, 사관생도대의 무장해제를 막으려고 과감히 일어섰을 때, 수도의 거주민 전체가 도시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엄청난 힘으로써 비엔나를 점령하였을 때, 오스트리아 전체가 무장한 비엔나 편을 들었을 때, 군주제가 도피행각을 벌이면서 모든 위신을 상실했을 때, 민중의 압력의 결과로서 군대가 완전히 수도로부터 철수했을 때, 그리고 오스트리아 정부가 후임 정부를 지명하지도 않은 채로 사퇴했을 때-국가 권력을 장악할 만한 정치 세력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유주의자 부르조아지는 그같이 강탈적인 방식으로 확보된 권력을 잡지 않겠다고 고의적으로 거절했다. 그들은 오직 티롤(Tyrol) 지방으로 도망친 황제의 복귀만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노동자들은 반동 세력을 패퇴시킬 정도로 충분히 용감했으나, 그러나 이들의 자리를 대신 점유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조직화되어 있지는 못했으며, 또한 그러한 의식을 가지고 있지도 못했다. 강력한 노동운동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정치적 목적을 지닌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은 아직 충분히 발전되어 있지 못했던 것이다. 권력을 장악할 수 없었기에 프롤레타리아는 이처럼 위대한 역사적 과업을 완수할 수 없었으며, 그리고 종종 그러하듯이 아주 시급한 순간에 부르조아 민주주의자들은 살그머니 뺑소니를 쳐 버린 것이다.

이러한 도망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게끔 강제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임시 노동자 정부를 수립하는데 필요한 것만큼의 활력과 성숙된 의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결국, 그 당시 어떤 사람이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다음과 같은 사태가 발생했던 것이었다: "현재 비엔나에 공화국이 수립되어 있는 셈인데 불행하게도 아무도 이 점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공화국은 합스부르크(Habsburg) 왕가에 자리를 넘겨주고 오랫동안 무대에서 퇴장 당하게 되었다. 일단 흘려 보낸 기회는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다.

헝가리와 독일에서의 혁명의 경험으로부터 라쌀레(Lassalle)는 이제부터 혁명은 오직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에서만 그 지주(支柱)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 냈다. 1849년 10월 24일자로 마르크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라쌀레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헝가리에서의 투쟁은 다른 어느 나라에서보다도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올 기회가 있었다. 그것은 특히 헝가리의 당이 서유럽과는 달리 분열이나 날카로운 대립 상태에 처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거기에서의 혁명은 특히나 민족 독립을 위한 투쟁의 형태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헝가리는 패배했다. 그것도 정확히 말해서 민족적인 국민당의 배신으로 인해서 말이다.
〔라쌀레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러한 경험과 그리고 1848~49년의 독일 역사는 나로 하여금 어떠한 혁명도 애초부터 그것이 순전히 사회주의적인 것이라고 선언되지 않는다면 유럽에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끔 만들었다. 만일 '사회 문제'들이 투쟁 속에 일종의 어렴풋한 요소로 들어가서는 단지 그 투쟁의 배경 속에만 머물러 있게 된다면, 그리고 투쟁이 민족의 부활이나 부르조아적인 공화주의의 깃발아래 수행된다면 어떠한 투쟁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단호한 결론들을 비판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벌써 19세기 중반에 정치적 해방이라는 문제가 전국민의 압력이라는 만장일치로 합의되는 전술로써 해결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자신의 계급적 입장에 근거해서-그리고 오직 그러한 입장에만 근거해서-투쟁을 위한 힘을 결집시킨다는, 오직 프롤레타리아의 독자적인 전술들만이 혁명의 승리를 보장해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1905년의 러시아 노동계급은 결코 1848년 당시의 비엔나의 노동자들과 닮지 않았다. 이 점을 가장 잘 증명해 주는 것은 러시아 전역에서 노동자 대표들로 구성된 소비에트들이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이 소비에트들은 봉기의 순간에 노동자들에 의한 권력 장악을 목적으로 전부터 미리 준비된 음모적인 조직들이 아니었다. 결코 그렇지가 않았다. 소비에트들은 대중의 혁명적 투쟁들을 상호 연결시키기 위해서 대중 자신에 의해서 고안되었으며 또한 그렇게 건설된 기구들인 것이다. 그리고, 대중에 의해서 선출되었고, 또한 대중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이 소비에트들은 의심할 여지없는 민주적인 제도들로서 혁명적 사회주의에 근거한 아주 단호한 계급 정책을 수행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의 사회적 특성은 특히 국민을 무장시키는 문제에서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국민방위군이라는 일종의 민병대의 창설은 모든 혁명마다 제일 먼저 제기되는 요구였으며, 또한 제일 먼저 얻어내는 성과였다. 1789년에도 그러했으며 1848년 파리, 이태리의 모든 지방국가들, 비엔나, 베를린에서도 그러했다. 1848년의 경우, 국민방위군은, 즉 유산계급 및 '교육받은 계층'의 무장은 정부와 대립한 부르조아지 전체의 요구였다. 심지어는 가장 온건한 부르조아 분파까지도 여기에 가담했다. 그들의 목적은 획득한 자유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위로부터의 보수적인 의지에 어긋나게 '수여된' 자유들을 지키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부르조아지의 사유재산을 프롤레타리아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민병대의 창설 요구는 명확히 부르조아지의 계급적 요구였다. 이태리의 통일을 연구한 영국의 어느 자유주의자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무장한 시민들의 민병대 때문에 전제 정치가 앞으로 더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이태리인들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밖에도 그러한 민병대는 장차 있을지도 모르는 무정부 상태 및 하층 계급으로부터의 어떠한 종류의 교란에 대해서도 유산계급을 보호해 줄 수 있는 확실한 방책인 것이다." (볼튼 킹(Bolton King), 『이태리 통일의 역사』, 러시아어 판, 모스크바, 1901, 제1권, p.220.) 그래서, 무정부 상태, 즉 혁명적 대중에 대처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수의 병력을 작전의 요충지에 갖고 있지 못했던 반동적인 통치 세력은 부르조아지를 무장시킨 것이었다. 절대주의는 먼저 공민(公民, 즉 재산세를 내는 시민)에게 노동자들을 제거하고 진압하는 것을 허용해 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공민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진압했던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민병대 창설의 요구가 부르조아 정당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무장력이 갖는 중대한 의미를 이해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절대주의가 그들에게 몇 개의 실제적인 교훈을 주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그들도 프롤레타리아와 별개인 혹은 프롤레타리아에 대항하는 민병대를 러시아에서 창설한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은 이해하고 있다. 상점주인들과 학생들 및 법률가들이 왕실 근위대의 장총을 어깨에 메고 허리에는 군도를 찬 반면에 자신들은 겨우 곡괭이와 돌로써 무장했던 1848년의 노동자들과 러시아의 노동자들은 닮지 않았던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혁명을 무장시킨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맨 먼저 노동자들을 무장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점을 알고 또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들은 결국 민병대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조차 삼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한번 싸워 보지조차도 않은 채로 절대주의에 대해서 자신들의 입장을 양보하고 있다. 마치 노동자들을 무장시키는 것을 피하려는 이유만으로 파리와 프랑스를 비스마르크에게 굴욕적으로 넘겨 준 저 부르조아 정치가 띠에르(Thiers ;파리 꼬뮌 당시 정부측에 서서 노동자들을 탄압한 장본인-역주)처럼 말이다. 자유민주주의자들의 합동 선언문에서-그들의 논문집의 제목은 『입헌국가』이다-지벨레고프(Dzhivelegov)는 혁명의 가능성을 논하면서, "사회는 필요한 순간에는 스스로 자신의 헌정을 수호하기 위해서 일어설 각오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고 전적으로 옳은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으로부터 도출되는 논리적 귀결이 민중의 무장에 대한 요구인 이상, 이 자유주의자 철학자는 반동으로의 복귀를 방지하기 위해서 "모두가 무기를 소지할 필요는 전혀 없다"(『입헌국가』, 논문집, 제1판, p.49.)라고 "부연 설명할 필요성"을 느꼈다. 단지 필요한 것은 사회 자신이 저항할 채비를 하고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저항 방식인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만일 이러한 견해로부터 어떠한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민주론자들의 마음 속에는 무장된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공포가 전제주의의 군대에 대한 공포보다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일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혁명을 무장시키는 과제는 전적으로 프를레타리아에게 달려 있다. 1848년 당시 부르조아지의 계급적 요구인 시민 민병대의 창설은 러시아에서는 그 시초부터 민중의 무장을 위한 요구, 즉 무엇보다도 먼저 프롤레타리아의 무장을 위한 요구인 것이다. 러시아 혁명의 운명은 바로 이 문제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