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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닢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시인 월트 윌먼을 가졌음은 인류의 행복이다


“세상에 기적이라는 게 있다면 요 며칠 동안의 제 생활의 변화를 두구 한 말 같어요, 이 끔찍한 변화를 기적이라구 밖엔 뭐라구 하겠어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어딘지 먼 하늘에서나 흘러오는 듯 삼라만상과 구별되어 궛속에 스며든다.

준보는 고개를 돌리나 먹같은 어둠 속에서는 그의 표정조차 분간할 수 없다. 얼굴이 달덩어리같이 훤하고 쌍꺼풀진 눈이 포도 알같이 맑은 것은 며칠 동안의 인상으로 그러려니 짐작할 뿐이다. 실과 사귄 지 불과 한 주일이 넘을락 말락 할 때다.

“그건 꼭 내가 하구 싶은 말요. 지금 신비 속에 살고 있는 것만 같아요. 이런 날이 있을 줄을 생각이나 해봤겠수. 행복은 불행이 그렇듯 아무 예고두 없이 벼락으로 닥쳐오는 모양이죠.”

“되래 걱정돼요. 불행이 뒤를 잇지 않을까 하는.─그만큼 행복스러워요.”

“행복이구 불행이구 사람의 뜻 하나에 달렸지 누가 무엇이 우리들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요. 사람의 의지같이 무서운 게 세상에 없는데.”

“그 말이 제게 안심과 용기를 줘요. 웬일인지 자꾸만 겁이 났어요. 낮과 밤이 너무두 아름다워요. 모든 게 요새는 꼭 우리 둘만을 위해서 마련돼 있는 것만 같구먼요.”

방공연습이 시작된 지 여러 날이 거듭되어 밤이면 거리는 등화관제로 어둠 속에 닫혀졌다. 몇 날의 밤의 소요를 계속하는 두 사람은 외딴 골목을 골라 걸으면서 단원들의 고함을 들을 때 마음의 거슬리는 것이 없지는 않았으나 평생의 중대한 시기에 서 있는 준보에게는 그 정도의 사생활의 특권쯤은 그다지 망발이 아니리라고 생각되었다. 하물며 낮 동안에 일터에서 백성으로서의 직책과 의무를 다했다면야 그만큼의 밤의 시간은 자유로워도 좋을 법했다.

아내를 잃은 지 채 일년을 채우지 못했으나 그 한 해 동안의 적막이 준보에게는 지난 반생의 어느 때보다도 크고 쓰라린 것이었다. 사랑 속에 있으면서 때때로 느끼는 적막감은 오히려 사치한 감정이요, 사랑을 잃었을 때 비로소 사람은 사랑이라는 것이 단순한 추상적인 용어가 아님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야심이며 희망이며 청춘의 모든 욕망을 가리고 바치고 걸러서 마지막으로 쳇바퀴 속에 남는 것이 역시 사랑임을 새삼스럽게 느낀 듯도 했다. 준보에게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쉴새없이 뒤를 이어 그 무엇이 앞에 나타나고 생활 속에 스며들기는 했으나 그 전부가 반드시 사랑이라고 만도 할 수는 없었다. 사랑으로까지 발전하기 전에 선 채로 끝나 버린 적도 있었고 단순한 감상적인 경우도 있었고 또 일시의 허물에 지나지 않는 때도 있었다. 동무들이 그를 염복가라고 부러워하는 그런 의미의 행복감의 연속 속에서 살아왔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내를 잃은 후만 해도 지난날의 어느 때보다도 인물들은 가장 많이 나타나서 그 짧은 일년이 다른 때의 십년 맞잡이는 되게 풍성풍성은 했으나 마음속을 파고드는 한 줄기 쇠사슬 같은 쓸쓸한 심사는 어쩌는 수 없었다. 현재의 만족감 이상으로 가버린 아내에게 대한 슬픔과 뉘우침이 큰 까닭이었다. 결국 준보는 그를 둘러싼 화려하고 다채하게 장식된 분위기 속에서 단 한 사람 아내를 사랑해 왔다고 할까. 비늘구름 같은 자자부레한 꿈의 조각들을 허다하게 가슴속에 가지면서도 단 하나 아내에게 사랑을 길러오고 북돋아 왔음을 아내를 잃은 후에야 비로소 자각하게 된 셈이다. 아내의 추억 속에서 남은 반생을 살아야겠다는 순교자다운 경건한 마음을 먹어 본 적도 없지는 않았으나 준보의 체질과 기질로는 필경은 당치않은 일만 같아서 역시 다음 숙명을 기다리는 희망이 그 어디인지 마음 한 귀퉁이를 흐르고 있었다. 사랑을 얻는 것도 잃는 것도 다 같이 하나의 숙명적인 인연이다. 아내를 대신할만한 정성과 열정이 아무때나 작정된 때에 반드시 차려져 오려니 하는 기대가 없다면 사실 살인적인 그 한해의 고독은 견디어 올 수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헐어진 가정을 쌓아서 새로운 생활을 설계해야 하고 고독을 다스려서 보다 높은 사업을 이루어야 함이 인간경영에 주어진 영원한 과제인 까닭이다. 자멸의 길을 버리고 창조의 길을 찾아야 함이 인류의 행복을 가져오는 까닭이다.

다음 숙명을 준보는 실에게서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너무도 빠르고 이른 발견인지는 모르나 발견이란 원래 그렇게 당돌하고 돌발적인 것이다. 실 이전에 나타난 뭇 인물 중에서 숙명의 대상을 보지 못하고 뛰엄뛰엄 몇 고비를 넘어가서 하필 실에게서 그것을 찾아낸 것도 숙명의 숙명된 까닭일 듯싶었다. 애써 말한다면 간 아내가 가졌던 인상의 그 어떤 향기를 그에게서 맡은 까닭이라고나 할까. 그 어디인지 구석구석 방불한 곳이 있어서 그것이 모르는 결에 준보의 마음을 끌어당긴 모양이었다. 불과 며칠에 감정이 통하고 정서가 합하고 생각과 취미가 맞음을 알았다. 걸어드는 피차의 걸음이 무섭게도 빨랐다. 술래잡기의 술래같이 왈칵 서로 부딪쳐서 이마가 맞닿았을 때 깜짝들 놀라면서 그 며칠 동안의 순식간의 변화를 기적이니 신비니 하고들 느끼는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에게 다 기적이요 신비요 꿈이요─사랑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꼭 한 사람 제일 존경할 수 있는 분을 찾자는 것이 오늘까지의 저의 노력이었어요, 복잡하다면 복잡할까, 지난날은 제겐 오늘 이 목표에 이르기까지의 오랜 방랑생활이었다구두 할 수 있어요. 그 방랑이 오늘 끝났어요. 선생을 만나자 생애가 새로 시작됐어요.”

“당신같이 날 존경하는 사람두 난 드물게 봤소. 세상 사람들은 흔히 서로 좋다는 말만들을 하는데 그 위에 존경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에 한층 빛을 더하는 것이라구 생각해요.”

공회당 앞 언덕길을 몇 차례나 오르내리며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두운 거리를 눈앞에 짐작만 하면서도 두 사람의 마음속은 점점 밝아가고 빛나 갔다. 사랑의 길은 의론하지 않아도 제물에 옳게 찾아진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이 며칠 동안에 찾아낸 길은 지도에도 오르지 않았을 지금까지 걸어 본 적도 없던 여러 갈래의 숨은 길이었다. 좁은 골목을 들어서 주택지대를 올라서니 바로 서기산 뒷턱이었다. 아직 낙엽지지 않은 나무들이 지름길 양편에 늘어서 어두운 속에서 한층 으슥하고 깊은 느낌을 준다. 산 위 주택에서 새어 나오는 한 줄기의 창의 등불이 두 사람의 마음을 상징하는 듯 따뜻하고 포근하다.

“커다란 한이 있어요. 왜 선생을 더 일찍이 못 만났던가 하는, 제일 처음 만난 어른이 선생이었더면 얼마나 더 행복스러웠겠어요. 지난날의 상처를 생각하면 몸에 소름이 돋군 해요.”

나무그늘 아래에 이르자 실은 준보에게서 팔을 뽑고 몸을 떼면서 가늘게 한숨을 쉬는 것이 들렸다. 준보도 대강 말의 뜻을 짐작할 수 있어서 그 역 자기의 상처에 손이 닿는 것도 같은 일종의 야릇한 감정이 솟았다.

“난 그런 소리 듣기를 좋아하지 않은데, 괜히 다 아문 허물을 다시 땃작거릴 필요가 있을까.”

“좋아하시든 안 하시든 한번은 모든 것 다 들어주세야죠. 무지의 행복을 저두 잘 알아요. 그러나 정작 필요한 건 지식을 거친 이해와 달관이 아닐까요.”

“과거를 말한다면 피차 일반이지 누군 샘 속에서 솟아 나온 동잔가요.”

“선생님이 그렇게 이해하시는 것과 똑같이야 어디 세상이 봐요. 항상 오해와 악의를 더 많이 준비해 가지고 있는 세상인데요.”

“무엇이 귀에 들리든 지금의 내 열정을 지울 힘이 없음을 장담해두 좋아요. 난 거저 이 열정만을 가지구 모든 것과 항거해 볼라구 해요.”

그러나 실은 조심조심 한 꺼풀씩 자기의 과거를 벗기기 사작했다. 시련이나 받는 선량한 교도와도 같이 준보는 마음을 다구지게 먹고 굳은 몸을 약간 떨고 있었다.

실은 열아홉 살까지의 명예롭지 못한 직업 시대의 사정을 말하고 다음 세 사람의 이름을 들면서 각각 세 경우를 이야기했다. 대략 거리의 소문으로 스쳐 들은 자료를 좀더 자세히 고백한 것이었으나 준보는 침착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듣는 동안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다. 실업가와 문학청년과 사회주의자의 세 사람이 다 같이 실의 애정을 요구한 것은 인간으로서의 특권인 것이니 누가 만류할 수 있었으랴만, 다만 슬프다면 준보가 그들보다 뒤져서 실을 알게 된 사실이었을까. 깊은 원시림 속에 아무도 모르게 맺힌 한 송이의 과실을 누가 원하지 않으랴만 세상은 도대체 복잡하다. 번거로운 것이다. 원시림 속에 과실이 어느 때까지나 눈에 안 뜨이고 몸을 마칠 리는 없는 것이다. 준보에게 필요한 것은 열정과 용기였다. 용기─지금까지 그는 사랑에 이것이 필요한 것임을 모르고 지내왔다. 오늘 그것을 알아야 할 날이 온 것이다. 그의 인생은 한 테두리 몫을 더한 셈이다.

“생각하면 울구만 싶어요. 왜 하필 인생이 그렇게 시작됐을까요.”

실은 짜장 울려는 듯 나무그늘 속으로 뛰어들더니 나무에 등을 기대고 고요히 섰다. 준보가 가까이 갔을 때 왈칵 몸을 던져 오면서 코를 마셨다. 쥐이는 손이 몹시 차다.

“불쾌하셨으면 용서하셔요.─그러나 실상 지난 그것들은 아무것두 아니었어요. 사랑이 이렇다는 것은 오늘이야 처음 알었어요. 전 아무두 사랑하진 않았어요. 오늘 나서 처음으로 사랑을 알았어요. 이 말을 믿어 주세요.”

“걱정할 게 없어요. 오늘의 당신을 사랑했지 누가 지난 경력을 사랑했나요. 오늘의 그 얼굴과 교양과 취미를 사랑하고 인격을 존중히 하는 것이지 누가 지난날을 캐자는 것인가요.”

“인제 세상이 둘의 새를 알고 펄쩍들 뛰구 와글와글 끓이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땐 제가 싫어지겠죠.”

“사랑두 세상눈치 봐가면서 해야 되나. 세상을 좀 멸시하면선 못 살아가나. 난 남의 비위만 맞추면서 사는 사람이 못되는데.”

실은 슬픈 속에서도 얼마간 마음이 놓이고 용기를 회복했는지 준보의 뜻대로 다시 팔을 걸고 길을 더듬어 내렸다. 거리는 여전히 어두우나 공습해제의 틈을 타서 등불이 군데군데 비치어 약간 훤해졌다가는 다시 어두워지곤 했다. 흡사 두 사람의 마음속같이 한결같지 못한 밤이었다.

“내가 지금 사랑하는 게 음악가 이외의 무엇이란 말요. 동경 가서 공부하는 음악학도를 사랑하는 것이지 지난 이력이 내게 아랑곳이란 말요. 원래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날 때 그런 자격 이외의 무엇으로 나타났게.”

여학교가 있고 기숙사가 있고 교회당이 있고 병원이 있는 조용한 둔덕 골목길을 들어섰을 때 준보는 실의 심정을 좀더 즐겁게 낚구어 보고 싶었다.

“이 알량한 음악가. 괜히 온전한 음악가로 여기셨다가 되려 실망이나 마셔요.”

“날 처음에 유혹해 낼 때 음악의 이름을 빌지 않구 어쨌소. 토스카를 들으러 오라구 전화가 왔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아우.”

준보가 웃는 바람에 실도 따라서 웃게 되어 그 웃음으로 말미암아 응겼던 마음 활짝 풀려지는 것도 같았다. 여학교 기숙사에서인지 문득 피아노 소리가 들려 온 것도 그 한때의 호흡을 맞추어 주는 셈이 되어서 개어가는 두 사람의 감성의 반주인양 싶었다. 마음의 거리의 같이 몸의 거리도 밤의 힘을 빌어 가까울 대로 가까웠다.

토스카와 라보엠과 마담 버터플라이 등의 가극의 신판을 새로 구했으니 들으러 오지 않겠느냐는 뜻의 전화를 실에게서 받던 날 준보는 의외의 소식에 당황해서 반날 동안 그 생각으로 머리 속이 가득 차 있었다. 그때까지 실은 만난 것이 서너 번, 그의 부드럽고 밝은 인상을 가슴속에 간직해 두었을 뿐이던 준보에게는 문득 한 줄기의 당돌한 직각이 솟으면서 그것이 마음을 억세게 지배하게 되었다. 전화를 건 것은 아무편이래도 좋은 것이다. 두 사람의 준비된 감정에 불을 지른 것이 실이었다는 것이 조금 잔겁한 준보에게 되려 용기를 주는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실의 형이 경영해 나가는 찻집 한구석에서 그날 밤 두 사람은 가극의 신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음악과는 먼 이야기에 정신이 없었다.

“다따가 전화를 걸어서 놀라셨죠. 동료들은 뭐라구 그러지들 않아요. 학교래서 그런지 전화 걸기가 거북했어요. 여자가 먼저 덜렁덜렁 나서는 걸 두렵다구 생각하시지 않았어요.”

“기뻤죠. 제가 못 거는 걸 먼저 걸어 주셔서. 물론 놀라기두 하구요.”

“어쩌면 그렇게 한 번두 가게에 안 내려오셨어요. 속으로 얼마나 은근히 기다렸게요. 뵌 지 한달이 넘었거든요. 전 그래두 행여나 먼저 전화해 주시지나 않나 하구 생각하구 있었죠.─그 바람에 동경두 이렇게 늦었어요. 내일 떠난다, 모레 떠난다, 별러만 오면서 여름 휴가로 나왔다가 늦은 가을까지 이게 무슨 꼴인지 모르겠어요.”

“오라 참, 동경 가서 공부하시는 학생이죠. 음악공부쯤 아무데선 못하나요.”

“음악공부쯤 그만두면 어떤가요.─하구는 못 물으셔요.”

“그럴 용기와 결심이 준비됐다면야.”

“경우에 따라선요.”

다음날 호텔에서 만찬을 같이한 것을 시초로 이곳저곳에서 식사를 함께 하는 날이 늘어갔다. 하루저녁 실은 처음 선사로 책 한 권을 가지고 왔다. 도스토예프스키야 부인이 기록한 「남편 도스토예프스키의 회상」이었다. 준보는 아직 읽지 못한 그 책의 뜻을 여러 가지로 짐작하다가 그들 부부의 사이의 이해가 컸고 남편에게 대한 부인의 사랑이 깊었다는 실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 선물의 의미를 대강 알아채었다. 한편 실의 문학적 교양에 준보는 차차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소설 대개 다 읽었어요. 제 마음의 세상이 얼마나 넓어졌는지 모르겠어요. 생활감정두 꼭 제 비위에 맞구요. 유례니, 관야니, 미란, 세란, 단주, 일마, 나아자, 운파, 애라─인물들의 모습이 지금 눈앞에 선히 떠올라요.”

“그런 변변치 못한 이름들을 기억하지 말구 좀더 고전 속의 중요한 인물들을 알아두는 편이 뜻있지 않을까요.”

“중요한 인물들이라는 게 뭐예요. 베아트리체니 헬렌이니 햄릿이니 그레첸이니, 왜 하필 그런 인물들만이 중요한가요. 제게는 어쩐지 일마니 미란이니 운파니 하는 이름들이 더 가깝고 친밀하게 들려오는데요.”

“어쩌면 그렇게 고전문학에 횅하단 말요. 음악가가 아니구 문학가인 것처럼.─그럼 하나 물을까요. 엘리사, 엘리사는 어때요. 비위에 맞아요, 안 맞아요.”

“멘탈테스튼가요. 엘리사─난 매운 여자는 좋아하지 않아요. 아마도 지드의 인물들 중에서 제일 싫은 것이 엘리사일까 봐요.”

“그럼 쇼오샤는. 마담 쇼오샤.”

“토마스 만 말이죠. 마담 쇼오샤는 아마두 엘리사와는 대차적인 인물일 것에요. 좀 허랑한 데가 있기는 하나 엘리사보다야 훨씬 인간적이죠.─그럼 문학시험은 이만하세요. 그러다 제 짧은 밑천이 봉이 빠지 겠어요.”

“나를 점점 놀래게만 하자는 셈이지 고전에서 현대문학까지 그렇게 통달할 줄야 어찌 알았겠수. 문학을 안다는 게 인간으로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르는데. 문학을 알구 모르는 건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가 있는데.”

“너무 지나게 평가하셨다 괜히 점점 실망이나 마세요. 그저 애써 공부 할 작정이에요. 제겐 욕심이 많답니다. 뭐든지 알구 싶어요. 선생님과 어울릴 수 있을 정도의 교양을 가지구 싶어요.”

실의 결심을 장하다 생각하며 그의 철저한 마음의 준비에 준보는 짜장 놀라는 수밖에는 없었다.

아내를 잃었을 뿐이 아니라 가지가지의 불행을 겪은 묵은 집을 떠나려고 벼른 지 오래이던 준보는 마침 이때를 전후해서 교외의 새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새집에서는 마음도 갈아지고 생활도 새로워지리라는 기대가 모르는 결에 그를 재촉했던 것이다.

대충 정돈이 되고 마음을 잡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실은 카네이션의 꽃묶음을 들고 찾아왔다. 층계로 된 포치를 올라서 도어를 열고 마루방에 들어왔을 때 코트를 벗어서 의자에 걸치더니,

“꼭 아파트의 방 같아요. 이렇게 넓고 높은 게─.”

벽에 걸린 액 속의 뎃상을 쳐다보고 책장의 책들을 훑어보면서 속히 의자에 걸어앉을 염은 안하고 책상 위 화병을 찾아서는 서슴지 않고 새풀과 단풍가지를 뽑아내더니 대신 파라핀지에 싸 가지고 온 카네이션을 꽂았다.

“꽃가게에 새로 나왔게 사가지구 왔어요. 좋아하세요. 전 이 흰 것과 붉은 것과 분홍빛의 각각 그 뜻을 안답니다. 흰 것은─난 애정에 살구 있어요구. 붉은 것은─난 당신의 사랑을 믿어요. 분홍은─난 당신을 열렬히 사랑해요.”

준보가 부엌에 나가 포트에 커피를 달여 들고 들어오려니 실은 피아노 앞에 앉아 악보 없이 쇼팽의 야곡인지를 울리고 있는 중이었다. 오랫동안 적막하던 검은 기계체가 오래간만에 우렁찬 음향으로 방안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음악 속에서 비로소 책들도 그림도 꽃도 생기를 띠우고 기쁨에 젖어 있는 듯싶었다. 그러나 실은 음악에서도 곧 물러나서 의자를 갈아 앉으면서,

“황송해요. 손수 이렇게 끓여 가지구 오실 법이 있나요, 내일부터라두 와서 거들어 드리구 싶어요.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불편은 하나 독신자의 특권을 좀더 향락해 보는 것두 좋을 것 같아서요.”

“애기들은 다 어쩌구 있어요. 주미와─수미와 언제인가 부인 잡지에 실린 가족사진으로 기억했었어요. 얼마나 쓸쓸들 하겠어요.”

“저쪽 방에서 잘들 놀구 잘들 공부하구 하죠. 쓸쓸한 속에서 그 애들두 배우는 게 많을 것예요. 자라서 독립할 때 누구보다두 굳센 사람되겠죠.”

“아버지의 사랑두 크시겠지만 얼른 따뜻한 어머니의 애정 속에서 어항 속의 금붕어같이 흐뭇하게 젖어 살아야죠. 남의 일 같지만 않게 가엾어서 못 견디겠어요.”

유리잔에 그득 담은 커피를 마시면서 실의 커다란 눈동자는 다시 희망에 빛나기 시작했다.

“다음 번에 올 적엔 버터를 갖다 드릴께요. 미국 선교사들이 들어갈 때 팔고 가는걸 여남은 폰드 사둔 게 있어요. 두 폰드들이 커다란 통이 아직 두 대여섯 개 언니의 집 냉장고 속에 있다나요. 갖다 드릴께 문덕문덕 많이 발러 잡수셔요. 얼른 저만큼 살이 붙게요.”

“난 원래 살이 붙지 말라는 마련인 것 같은데.”

“두구 보세요. 제가 꼭 살찌게 해 드릴께. 치밀한 일과표를 짜구 합리적인 생활설계를 세우거든요. 음식과 운동과 오락과 공부와─과학적인 방법 아래에서 성공하지 않을 리가 없어요. 불과 일년이 못 가 이렇게 되게 해드릴께요.”

두 손으로 커다란 테두리를 짜면서 과장된 형용을 하는 것이 준보에게는 더없이 신시어하게 들려서 마음을 울렸다. 진심으로 건강을 걱정해 줌같이 알뜰한 사랑의 표현이 없다.

실의 정성을 준보는 말끝마다 잡으면서 거기에 정비례해서 깊어가는 스스로의 애정을 느끼는 것이었다. 준보가 피아노 앞에 앉아서 바이야 교칙본을 펴놓고 간단한 곡조를 울릴 때 실이 뒤로 돌아와서 등 너머로 고음부를 짚으니 곡조는 듀엣을 이루어서 곱절의 우렁찬 화음으로 울렸다. 간단한 곡조의 듀엣은 아름다운 것이다. 간단하므로 서툴므로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준보의 목덜미에 실은 따뜻한 숨을 부으면서 준보가 밟는 페달에 맞추어 행복감을 호흡하였다.

“절 왜 좋아하세요. 어디가 좋아서 사랑하세요.”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으레히 어리석은 질문을 되풀이하는 법인가보다.

“음악을 하니까! 문학을 공부하므로? 왜 좋으세요. 말씀해 보세요.”

“거저 좋은 것이지 사랑에 이유와 조건이 무에 있겠수. 실례의 말이지만 누가 그리 알량한 음악가구 끔찍한 문학가라구 여기는데요. 그런 모든 것을 떠나서 단지 인간으로서 사랑할 수 있는 것이죠.”

“물론 저두 그 말이 듣구 싶었어요. 문학을 좋아하지 않는다구 절 좋아하지 않으셨다면─생각만 해두 무서운 일예요.”

“나를 사랑하는 덴 그럼 조건이 있었수. 글줄이나 쓴다구? 학교에서 어학마디나 가르친다구?”

“제게두 마찬가지로 소설가가 아니래두 좋았구 교수가 아니래두 상관없구 ─아니 들에서 밭 가는 지애비였던들 제 맘이 움직이지 않았겠어요. 그야 서로 교수구 소설가구 음악가구 문학소녀의 한 것이 보다 좋기는 하지만 그렇지 않단들 왜 사랑이 없었겠어요. 조건두 이유두 없구 거저 맹목적인 것─그런 것만이 참사랑이라구 생각해요. 조금 낡은 투지만요. 조건은 사랑이 있은 후에 천천히 오는 문제가 아닐까요.”

“또 한 가지 알어 두어야 할 것은─난 가난하다는 것. 지금두 가난하지만 앞으로두 커다란 유산이 굴러들 가망이 지금 같아선 엷다는 것. 따라서 세속적인 뜻으로 당신을 행복하게 하기는 어려우리라는 것.”

“제가 사치와 호사를 원한다면 벌써 제 한 몸 처치했지 왜 이때 이날까지 기다리구 있었겠어요. 제 나이가 벌써 사분지일 세기를 잡아먹었는데요. 이래 뵈어두 제게두 이상두 있고 안목두 보통사람과는 다르답니다. 조건 조건하시니 선생께 요구하는 조건이 꼭 한 가지 있다면 그건─언제까지든지 절 사랑해 줍소서 하는 것. 결코 한눈을 파시지 말구 평생 저만을 생각해 주셔야 할 것예요.”

“그야 물론이지 그까짓 게 다 조건인가.─한눈을 팔다니 누가 그렇게 장난꾼이랍디까.”

“말 마세요. 거리의 소문으로 죄다 알구 있어요. 대단한 염복가시라구요. 그러나 전 그걸 그리 슬퍼하진 않아요. 이왕이면 여자에게두 인기가 있는 것이 좋죠. 촌촌거리구 평생에 연애 한 번두 못 차려지는 그런 사내라는 건 생각만 해두 진저리가 나요.─ 실례지만 한 가지 물을께 노여워 마시구 대답해 주세요─.”

악보의 페이지를 번기니 다음 곡조는 알레그로다. 그 빠른 멜로디를 내기에 분주해서 두 사람의 마음은 반은 음악 속에 뺏기어 들어갔다.

“─로테와의 관계는 어떻게 하겠어요. 그 유명한 병오생의 로테 말예요. 말끔히 청산되셨나요.”

이미 거리에 소문까지 흘리게 된 사건이라면 준보도 반드시 뜨끔해 할 것은 없었다. 사실 그 일건을 생각할 때나 말할 때 준보는 벌써 충분히 침착한 태도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이다.

“로테라면 내가 베르테르인 셈이게요. 그러나 실상은 그와 반대리다. 차라리 내가 베르테르의 불행을 가질 수 있었다면 더 행복스러웠으리라구 생각해요. 너무두 어려운 경우였어요. 그렇다구 골듀스의 마디를 끊을 알렉산더의 장검두 가지지 못했었구 그러는 동안에 차차 그의 성격의 결함을 발견하게 된 것은 차라리 다행이었죠. 사람이 너무 거세구 사교라면 조석두 잊어버리구 정신없이 허둥거린단 말예요. 슬퍼서 울었다던 날 금시 버얼겋게 화장을 하구 옷을 갈아입구 사내들과 마주앉아 노닥거리는 걸 예의라구 생각하는 버릇─그 한 가지 경우로 나는 그를 철저히 멸시할 수 있었어요. 조선의 가난한 집에 태어났으면서두 마치 구라파의 복판에나 살구 있는 듯이 착각하구 그걸 교양이요 예의라구 생각하는 그 그릇된 태도 그것이 내 맘을 차차 식혀 주었어요. 대단히 행복스런 결말이라구 할 수 있죠. 짜장 베르테르의 설음을 가졌더라면 어떡할 뻔 했게요.”

“제발 전 그렇지 않았으면요. 병오생이 아니니까 염려는 없어두요. ─그러나 성격두 사랑으로 정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정복했다구 생각하는 건 착오일 때가 많아요. 선천적인 근성이라는건 아무것에두 굴하는 법 없이 언제나 한 번은 정직한 자태를 나타내는 것이니까요.”

“그러길 잘했죠. 안 그랬더라면 제 존재가 말살을 당했게요.”

질투의 감정을 아직은 차곡차곡 포개서 가슴속에 간직해 두었는지 어쨌는지 비교적 담박한 실의 태도였다.

“또 하나 묻겠어요.─동경에 있는 여류화가 그에게선 요새두 편지가 오나요. 이것두 거리에서 소문으로 들었습니다만.”

흡사 하나씩 하나씩 대답을 밝혀 가는 학동의 방법과도 다르다. 준보에게는 교사로서의 엄정한 태도를 요구하는 셈이었다.

간 아내의 후배인 그 화가는 준보가 불행을 당하자 우연히 편지를 띄우기 시작한 것이 드디어 대단한 정성과 애정을 먹과 종이에 부탁해서 보내 오게 된 것이었다. 같은 여학교의 선배인 아내에게 대한 흠모와 존경이 그대로 준보에게로 고삐를 돌린 셈이었다. 준보는 편지와 사진만을 받았을 뿐 아직 접해 보지 못한 그 새로운 인격을 머리 속에 그려 보면서 일종 야릇하고 안타까운 심사였다. 편지에 나타난 인품과 교양과 열정으로만은 전 인격의 인상을 옳게 잡기 어려웠던 까닭이다. 한 줄기 어렴풋한 꿈과 희망을 주고받으면서 이상스런 사귐이 근 반년 동안 계속해 왔건만 직접 감각의 문을 통하지 못한 그 가상적인 사랑은 두 사람 사이에 바다와 강산의 먼 거리를 두고는 종시 활활 타오르지 못한 채 조금의 발전도 없이 침체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여름 동안 공을 들여 제작한 작품을 가을에 제전에 출품했다가 낙선을 됐으나 그다지 낙담을 하고 있지 않는다는 소식을 전해 온 것을 일기로 하고 웬일인지 편지가 금시 딸꾹질을 시작한 것처럼 끊어지기 시작했다. 준보가 실과의 교섭을 가지게 된 것이 바로 이 무렵을 전후해서였다.

“우리들의 소문을 들었는지 어쨌는지 요새는 도무지 소식이 없어요. 하긴 하나씩 하나씩 제물에 해결되어 가는 것이 편한 노릇이긴 하지만.”

“어떤 분예요. 사진과 편지 언제 한번 뵈여 주세요. 고우시겠지. 저보 담 젊구 지저분한 과거두 없을 테구.”

“언젠가의 편지엔 고향과 가정과 현재의 형편 이야기를 하군 반생 동안 적어온 일기가 참회의 연속이라구 했었으니 원 무슨 뜻이었든지. 남의 지내온 날을 자기가 아니고야 누가 똑바로 알겠수. 사람의 가슴속같이 복잡하구 신비로운 것이 없는데.”

“제가 만약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이와 맺게 됐겠죠. 똑바로 말씀하세요.─그러구 보면 모든 게 거저 인연만 같아요.”

“결말이 어떻게 됐을지를 누가 알겠수. 사람은 앞일을 아무것두 헤아릴 수는 없는데 사랑에 먼 거리같이 금물은 없다구 생각해요. 모르는 동안에 금시 눈앞에 무엇이 일어나 있는지 알 길이 있어야죠. 가을에 이곳까지 스케치 여행을 나오겠다구 벼르던 그에게 행여나 불길한 변이나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구 원해요.”

“그림과 음악과─어느편을 더 좋아하세요. 음악을 좋아하시는 건 알아두 그림두 좋아하시죠. 그렇죠.”

“뭐요. 그건. 게정이란 말요. 실이두 게정을 부릴 줄 아나. 실이─실리이─바보. 바보두 그런 쓸데없는 감정의 노예가 되나.”

실은 문득 피아노를 멈추더니 그 자세대로 준보의 등에 왈칵 전신을 의지해 버리고 말았다. 준보는 앞으로 쓰러지려는 몸을 바로 세우고 어깨너머로 넘어온 실의 두 손을 잡았다.

“다 잊어버려 주세요. 저 이외의 것은 죄다 이 머리 속에서 지워 주세요. 저의 꼭 하나 바라는 조건이 그것에요. 자 약속하세요.─앞으론 평생 한눈을 파지 않겠다구. 저만을 생각하겠다구.”

사랑은 왜 두 사람만의 뜻과 주장으로서 족한 것이 못될까. 두 사람 사이에 세상이라는 쓸데없고 귀찮은 협잡물이 끼어 들어옴을 알았을 때 준보는 움칫해지며 불쾌한 느낌이 전신을 스쳐 흘렀다.

실과 약속을 한 지 불과 며칠을 넘지 않아 준보는 친구 윤벽도의 방문을 받은 순간 직각적으로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 있었다.

“자네 요새 무엇을 하구 있었나. 거리는 자네들 소문으로 온통 발끈 뒤집혔으니.”

기쁜 때나 슬픈 때나 신변에서 가장 가까이 돌면서 허물없는 사귐을 맺어오는 그 친우의 말이라면 대개는 귀를 기울여 오는 사이였건만 이번 경우만은 웬일인지 그 첫마디가 벌써 준보의 마음에 섬찟하게 울려오는 것이었다.

“뭣 말인가. 우리들의 사랑 말인가.”

“사랑은 다 뭐야. 신중하게 사람을 가려 가면서 사랑을 하든지 어째든지 하지 사람이 왜 그리 자기 몸을 애낄 줄을 모르나. 옥씨의 집안이 어떻구 과거가 어떤 줄이나 알구서 그러나.”

“알구 말구. 아니까 더욱 사랑하게 됐네. 자넨 집안과 과거만을 알았지 본인의 인격과 교양과 기품은 모르는 모양이지. 나는 과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인격을 사랑하는 것이네. 풍부한 교양에 접하면 자네쯤은 땅을 치구 부끄러워해야 하리.’

준보는 웬일인지 버럭 항거하고 싶은 생각이 솟아 어세를 높여 보았다.

“말하는 꼴이 벌써 새가 깊어진 모양 같네만 자네 생각만 옳다구 하지 말구 세상의 의견에두 한번은 귀를 기울여봐야 하잖겠나. 결혼까지 간단 말을 듣고 나두 놀랐네만 거리에서 만나는 동무마다 한 사람이나 찬성하는 이가 있을 줄 아나. 다들 입들을 벌리구 입맛을 다실 뿐이지. 자네는 예술가니까 독창정신을 실생활에두 살려서 상식을 무시하구 남 안하는 괴이한 짓두 해보구 때로는 괜히 속세에 반항두 하구 싶은 충동을 느끼는 줄을 짐작하네만 평생의 중대한 일을 그렇게 경솔히 작정해서야 쓰겠나.”

“소태를 먹어두 제멋인데 왜 남의 일을 가지구 걱정들을 하라나. 도대체 난 세상의 말이라는 걸 일종의 저널리즘이라구밖엔 생각하지 않네. 자넨 진정으로 나를 위해서 걱정하는 줄을 아네만은 자네가 거리에서 만나는 열 사람이면 열 사람이 다 결국은 경박한 가십장이밖에는 못 된단 말야. 부질없이 남의 말하기 좋아하구 농하기 좋아하구 헐기 좋아하는 저널리스트 이상의 무엇인 줄 아나. 실없는 그것들의 말을 일일이 들어선 할 수 있나. 파리떼같이 와글와글 끓게 내버려 두는 수밖엔 아무 말이 귀에 들려와두 뜨끔하지 않네.’

“자네들이 그만큼 유명하다는 걸 알아야 되네. 자네나 옥씨나 고석쟁이에 숨어 있는 사람이라면 세상에서 문제나 삼겠나. 화젯거리가 될 만 하니까 화제를 삼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자네의 책임두 성립되는 것이네. 사회에 이름이 있다는 건 벌써 개인의 자유행동에 그만큼 구속을 받구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야. 개인만의 개인이 아니구 사회를 위한 개인이야. 사실 자네를 애끼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니네. 어떤 동무는 심지어 휼계를 써서 자네들의 연애를 방해하자구까지 하데만 약속하다구 여기지 말구 그런 우정을 고맙게 받아 보게.”

벽도는 준보에게 입을 열 기회와 여유를 주지 않고 혼자만 앞을 이어 갔다.

“자네네 학교 학생들에게 자네 인기를 떠보지 않았겠나. 어학만의 강의를 받기가 아까워서 자네에게 수신의 교수까지를 청하겠다구 교장이 교섭 중이라네. 그렇듯 자네를 존경하는 제자들의 기대두 저버려서야 되겠나. 여러 가지로 자네 책임은 크단 말이야.”

“자네두 문학을 한다는 사람이 생각이 왜 그리두 범용하구 옹색한가. 사랑엔 인물 차별과 지경이 없다는 걸 실물로 교육할 수 있다면 얼마나 더 인간적인 교육이 될 수 있다는 건 생각해 보지 못하나. 한 사람의 인물에 대한 소문과 진실이 얼마나 다르다는 것, 사람은 누구나 일반이라는 것, 사랑은 자유롭다는 것, 행복은 주위 사람들의 시비에도 불구하고 당사자들의 의지로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 많은 교훈을 난 말없이 다만 한 번의 행동으로서 만 사람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이네. 학생들은 흔연히 이 교육을 받을 것이요. 그 인간적인 영향과 효과두 백 권의 수신서를 읽는 것보다 나으리. 자네들의 상식 이상으로 이것은 참으로 건전한 생각이라는 걸 알아 두게. 그리구 자네 내일부터 문학을 그만두게나. 문학은 인간 되자구 하는 것이지 심심파적으로 숭상하는 건 아니니까.”

“자네의 귀에 아무리 경을 읽어야 소용있겠나. 벌써 굴레를 씌울 수 없는 뛰어난 말이니.─그럼 어서 행복될 도리나 설계하게나. 행여나 장래라두 내게 와 왜 그때 더 말려주지 않었던구 하구 뉘우치지나 말구.”

준보의 굳은 결의에는 벽도도 하는 수 없이 한 수 꿀려 활을 거두는 것이었다. 충고는커녕 되려 톡톡히 설교를 받은 셈이 되어 얼떨떨한 심사를 금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다시 이 일엔 더 참견 말구 거리에서 쓸데없이 번설을 하구 노닥거리는 녀석이 있거든 그 비굴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자네두 행여나 그런 유가 아닐꾸 하구 반성하구 슬퍼해 보게나.”

그러나 벽도가 그 자리에서 그렇게 만만히 꿀렸다고 생각한 것은 준보의 오산이었다. 한 수 두 수 동무를 생각하는 그의 애정은 깊어서 충고의 손은 실에게까지 뻗쳤던 것이었다. 다음날 밤 준보가 가게 이층에서 실을 만났을 때 웃음을 잊은 얼굴에 커다란 눈이 깜박거리지도 않고 동그랗게 노염을 품고 있었다.

“아이 분해.”

혀를 차면서 웃입술이 갸웃이 삐뚤어지는 것이었다.

“어제 벽도씨가 제게 와서 무어란 줄 아세요.”

“벽도가? 흠 적극적 활동을 시작한 모양이군.”

“이 땅의 예술가 준보 죽이지 말라구요. 준보는 한 사람의 차지가 아니구 사회에 소속한 사람이라구요. 어이구 무서운 소리. 누가 선생을 후려차 가지구 먼 세상으로 내뺀단 말인가요. 제게로 오신다고 글 한 줄 못쓰게 되구 세상에서 매장을 당한단 말인가요. 모든 책임을 제게만 씌운단 말예요. 대체 그이가 무엇이게 우리들 일에 그렇게 발벗구 나서는 것일까요.”

“근본은 착하구 정직한 사람인데 진정으로 생각해 준다는 것이 말이 원체 투박스러워서 그런 인상을 주게 되나 부우. 그래 뭐라구 대답했수.”

“다짜고짜로 그 말인데 대답을 어떻게 해요. 거저 멍하니 입만 벌리구 있었죠. 선생의 건강이 염려되는데 각별히 내조의 공을 이루울 자신이 있느냐는 등 제가 편지를 전문학교 교수보다구 잘 쓴다구 선생이 칭찬하셨다는데 그 정도의 교양에 안심해서는 안 된다는 등 별별 말이 많았어요. 거저 저 하나 죽일 사람됐죠. 거리에서 건둥거리는 보통여자로밖엔 알아주지 않는 것이 분해 못 견디겠어요.”

“편지 잘 쓰는 건 잘 쓰는 거지 실력에두 에누리가 있을까. 이름만 전문학교 선생이랍시구 사실 편지 한 장 옳게 못쓰는 위인이 얼마나 많게. 웬일인지 난 그런 떳떳치 못한 조그만 사회적 사실에 대해서두 노여워지면서 항의하구 싶은 생각이 솟군 해요. 편지의 실력뿐이 아니라 당신이 일상 쓰는 말에 대해서두 그 아름다운 용어와 발음을 효과있게 살리려구 비상한 주의와 노력을 하는 것을 난 무엇보다두 높게 평가하려구 해요. 내가 간혹 이상스런 형용사를 쓸 때 그것을 곧 되물어 가지구 기억하려구 하는 기특한 생각─세상 사람이 소홀히 여기구 주의할 줄 모르는 그런 조그만 각오에서부터 나날이 아름다운 생활은 창조되어 나간다구 생각해요. 벽도가 무어라구 하든지 간에 충분한 자신을 가져두 좋아요.”

“일들두 없지 왜들 남의 일에 간섭인지 모르겠어요. 거 보세요. 세상이 시끄러우리라구 걱정했더니 아니나다를까요.”

준보의 위로로 실은 자신과 용기를 회복해 우울한 속에서 다시 웃음을 머금고 어느 날보다도 도리어 즐거운 밤이었으나 외부의 간섭은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거리의 소문은 해와 악의 테두리를 겹겹으로 더해서 두 사람을 둘러싸고 시끄러운 포위진을 각각으로 조여들었다. 몇날이 건너지 못해 실은 한층 흥분된 표정으로 준보의 방문을 두드렸다. 커다란 눈이 깜박거리지 않고 조그만 입이 침묵하면서 잠시는 가제 온 신부같이 의자에 잠자코만 있었다.

“……오늘 길에서 옛날 동무 명주를 만났더니 또 그 소리를 하겠나요. 남편에게서 들었다는데 자기들 총중에선 죄다들 알구 화젯거리가 됐대요. 그 남편은 벽도씨에게서 들었다나요. 왜 그리 번설들일까요.”

“놀랄 것두 없잖우. 세상이 한꺼번에 발끈 뒤집힌대두 이제야 겁날 것이 없는데.”

“말이 우습잖아요.─제가 일반에게 그런 인상을 줘 뵈는지 너무 사치하니까 가정생활에 부적당하리라고요. 오래오래 원만하기를 기대하기가 어려우리라구요. 자기들보다두 몇 곱절 더 생각하구 각오를 가진 줄은 모르구 웬 아랑곳인지들 모르겠어요. 자기들보다 못한 사람인줄만 아나부죠.”

“이 기회에 애무하게 남을 발가벗겨 놓구 멋대로들 난도질을 하는 모양이지.”

“외딴 섬에나 가 살구 싶어요. 이렇게 시끄러울 줄 몰랐어요.”

“불유쾌한 세상이구 귀찮은 인심이야.─우리 시나 한 줄 읽을까.”

준보는 뒤숭숭한 잡념을 떨쳐버리려는 듯 애락하게 자리를 일어서서 실의 손을 이끌고 책장 앞으로 갔다.

“맘이 성가실 때는 시를 읽는 게 첫째라우. 난 벌써 여러 해째 그 습관을 지켜 오는데 세상에 시인같이 정직하구 착한 종족이 있을까. 그 외엔 모두 악한이요 도적인 것만 같아요. 시인의 목소리만이 성경과 같이 사람을 바로 인도하구 위로해 주거든요.─무얼 읽을까. 하이네? 셸리? 예이츠?”

책꽂이를 한층 한층 손가락으로 더듬더니 두둑한 책 한 권을 뽑아냈다.

“윌먼은 어때요. 오래간만에 윌먼을 읽어 볼까요. 예이츠들과는 다른 의미로 좋은 시인이죠. 그는 한 계급의 시인이 아니라 전 인류의 시인이에요. 아무와도 친하게 이야기하구 똑같이 사랑하는 가장 허물없는 스승이에요. 월트 윌먼─인류가 아마두 예수 다음에 영원히 기억해야 할 꼭 하나의 이름이 이것에요. 나는 그를 읽을 때 용기가 솟구 희망이 회복되군 해요.”

“고요한 목소리로 한 구절 읽으세요. 눈을 감구 들어 볼께요.”

준보가 앉은 의자 발밑에 실은 그대로 주저앉으면서 준보의 무릎에 손바닥을 놓고 그 위에 사붓이 얼굴을 얹었다. 준보가 야트막한 목소리로 천천히 임의의 구절구절을 낭독하기 시작할 때 실은 짜장 눈을 감고 시의 세상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것이었다.

…………

태양이 그대를 버리지 않는 한 나는 그대를 버리지 않겠노라.

파도가 그대를 위해서 춤추기를 거절하고 나뭇잎이 그대를 위해서 속살거리기를 거절하지 않는 동안,

내 노래도 그대를 위해서 춤추고 속살거리기를 거절하지 않겠노라.

나는 그대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하노라─그대가 나를 만났기에 적당한 준비를 하기를 나는 요구하노라.

내가 올 때까지 성한 사람 되어 있기를 요구하노라.

그때까지 그대가 나를 잊지 않도록 나는 뜻 깊은 눈초리로 그대에게 인사하노라.


“좋아요, 참 좋아요. 저를 위해서 쓴 것만 같아요. 어머니보다두 인자해요.─태양이 그대를 버리지 않는 한 나는 그대를 버리지 않겠노라. 저두 윌먼을 좀더 일찍 알았더면 더 행복스러웠을 것을요.”

실은 얼굴을 벙긋이 들고 준보를 쳐다보면서 입안에 그뜩 젖을 머금은 어린아이와도 같이 행복스런 얼굴이었다. 준보는 실의 머리 위에 한 손을 얹고 페이지를 들척거렸다.

“윌먼을 가지게 된 것은 인류의 행복이예요. 까십만을 일삼는 거리의 소소리패들에게 윌먼을 읽혀 드렸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인, 앉은 여인, 걷는 여인─혹은 늙고 혹은 젊고

젊은이는 아름다우나─늙은이는 젊은이보다 더 아름다워라.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다 아름답구 고르구 평등하고 사랑스럽지 하나나 추하구 밉구 차별진 것이 있나요. 예수같이 인자하구 바다같이 관대해요. 또 한 수 여자를 노래한 것─.”

나는 여성의 시인이며 동시에 남성의 시인이니라.

나는 말하노라, 여자 됨은 남자 됨과 같이 위대한 것이라고.

또 말하노라, 남자의 어머니 됨같이 위대한 것은 없노라고.

“더 읽으셔요. 자꾸자꾸 읽으셔요. 종일 들어두 싫지 않겠어요. 밥같이 암만 먹어두 싫지 않겠어요. 속세의 번거로움을 떨쳐버리구 윌먼 한 권만을 가지구 단둘이 어딘지 모를 먼 고장에 가서 살 수 있다면 오죽이나 좋을까요.” 하면서 한숨짓는 실의 목소리는 그대로가 한 구절의 시를 읽는 것과도 흡사했다.

영웅이 이름을 날린대도 장군이 승전을 한대도 나는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았노라.

대통령이 의자에 앉은 것도 부호가 큰 저택에 있는 것도 내게는 부럽지 않았노라.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우정을 들을 때 평생 동안 곤란과 비방 속에서도 오래오래 변함없이

젊을 때에나 늙을 때에나 절조를 지키고 애정에 넘치고 충실했다는 것을 들을 때 그때 나는 머리를 숙이고 생각하노라.

부러워서 못 견디면서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나노라.

낭독이 끝난 후까지도 실은 얼굴을 들려고 하지 않고 같은 자세로 무릎 위에 엎드리고 있는 것을 준보는 감동에 젖어 있는 것이거니만 생각한 것이 문득 머리를 드는 서슬에 눈에 어리운 눈물자국을 보고 가슴이 짜릿해졌다.

“왜 운단 말요.”

책을 놓고 두 손으로 무릎 사이에 그의 얼굴을 받들어 끄으니, 실은 아이와도 같은 무심한 눈동자로 멍하니 준보를 쳐다본다.

“너무두 행복스러워서요. 윌먼의 시두 좋거니와 이렇게 선생님과 마주 앉아 시를 읽게 된 것이 얼마나 행복스러운지 아마두 한평생의 추억거리가 될 것에요. 세상에 가지가지 행복두 많겠지만 여기에 지나는 행복이 또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자꾸 울구만 싶어요.” 하면서 다시 글썽글썽 눈물이 새로워지는 것을 보고는 준보는 거의 충동적으로 그의 얼굴을 가까이 잡아끌었다.

“이 행복감을 고이고이 길러서 언제까지든지 끌고 나갑시다. 세상의 장해가 아무리 크다구 하더래두 용감스럽게 그것을 뛰어 넘어갑시다. 그것이 꼭 하나 우리의 작정된 길이니까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 사랑하는 사람의 자태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 이었던가.

민주빈의 등장은 윤벽도의 그것과는 스스로 성질이 달러서 준보들의 마음속에 한 줄기의 빛을 던졌다고 하면 던졌을까.

신문의 지방판의 기사를 맡아 쓰고 있는 주빈은 그 직책의 성질과 준보들의 일건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고 있을 처지에 있으면서도 까딱 그 눈치를 보이지 않는 것은 은근한 그의 성격의 탓이라고 할까.

“하긴 나두 사실 첨엔 놀랐어요. 형이 그렇게 대담한 줄은 몰랐거든요. 그야 문학을 일삼으시니까 생각이 남보다는 다르시겠지만 결혼을 한대두 거저 무난하구 순결한 경우를 택하신 줄 알았지 이렇게 문제의 파도 속에 즐겨서 뛰어드실 줄을 몰랐어요.”

주빈은 준보의 눈치를 보면서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순결이란 대체 무어요. 마음을 떠나서 순결만의 순결을 찾음은 뜻 없는 일이라구 생각해요. 참으로 훌륭한 마음 앞에는 몸의 희생쯤 문제가 아닐 것예요.─벽도의 말을 들으면 모두들 반대라는데.”

“전 반드시 그렇지두 않습니다만. 모든 문제 다 깔아버리구 아름다운 이와 결혼한다는 다만 그 조건만으로두 좋지 않아요. 사람에겐 기질의 타입이 있다구 생각하는데, 가령 벽도군과 나와는 전연 대차적인 입장에 있는 것 같구 가깝다면 아마 내가 형과는 제일 근사한 타입일 것예요. 연애니 결혼이니 하는 것두 결국은 그의 그 성격의 타입이 작정하는 것이 아닐까요. 옥씨만한 인물과 미모라면 다른 조건 다 희생해두 좋구 말구요. 그 점에서 난 찬성이구 형의 그 자유로운 심정과 태도에 여러 가지로 반성되구 줏대없는 내 마음에 매질해 보군 했어요. 막상 내가 그런 경우에 처했다면 혹시 주저했을는지두 모르니까요. 마음의 자유대로 행동할 수 있구 행동해서 조금두 꺼리지 않는다는 것이 여간 장하구 존경할만한 일이 아니예요.”

“형은 그렇게 말해두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존경은커녕 얼마나 비웃는지 몰라요. 결국 난 세상을 아직두 퍽 야만스런 곳이라구 생각해요. 참으로 정직한 판단이 없이 편견과 말썽으로 부화뇌동하구 경솔하게 떠들썩하는 그런 버릇이 있어요. 세상이 그렇게 우매하다는 것과 내가 내 뜻을 존중히 하는 것과는 물론 별문제이지만.”

준보는 주빈의 이해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하고 바로 며칠 전에 겪은 조그만 변을 문득 생각해 내면서 그것을 붙여 말하고 싶었다.

─준보는 벌써 거리낄 것 없이 실과 함께 거리를 걷고 교외로 산보 가는 것이었으나 그날 늦은 오후의 영화를 보고 관을 나오는 때였다. 빽빽이 쏟아지는 인총 사이에 피곤한 몸을 맡기고 제물에 행길로 밀려나와 골목을 벗어났을 즈음 두 사람은 어느결엔지 뭇시선의 대상이 되어 있음을 몰랐다. 그 많은 총중에서 왜 하필 유독 그들만이 무대 위의 배우같이 사람들의 눈을 끌었을까를 생각하면 불쾌하기 짝없는 것이었으나 문득 귀익은 발음소리를 듣고 비로소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이었다. 뒤편에서 웅얼웅얼 자기들의 이름을 외이는 것임을 알았다. 목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드디어 또렷이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다.

“아나. 저게 준보와 옥실이라네.”

확실히 그렇게 들렸다. 그러나 그 자리로 경명하게 고개를 돌릴 수도 없어 모르는 체하고 걸어가는 동안에 그들의 회화는 두 사람을 둘러쌀 지경으로 요란해졌다.

“인전 제범 대담들 하지. 내로라구 보라는 듯이 끼구들 다니니.”

“대담한지 철면핀지 모르겠네. 허구많은 경우 다 두고 왜들 하필 세상을 이렇게 떠들썩하게 해놀꾸.”

“남이야 아무러거나 말거나 왜들 떠들썩들 하라나, 떠들썩하는 편이 어리석지, 남이야 아무 멋을 부리건 말건.”

두 사람을 옹호하는 듯하면서도 기실 악질의 야유인 것을 쉽사리 느낄 수 있었다.

“옥실이와 준보가 결혼을 할 테면 하랬지 뭐가 어떻게 됐단 말인가. 음악가와 소설가이기로서니 그렇게 법석들을 할 법이야 있나.”

두 사람의 이름을 커다랗게 외치면서 옆을 스치는 후리후리한 청년을 옆 눈으로 보았을 때 준보는 문득 피가 용솟음치면서 눈이 화끈 달았다. 청년도 흘끗 두 사람을 곁눈질하더니 즉시 자기들끼리만의 의미를 가진 복잡한 미소를 띠었다.

“다정다한한 남녀들이라 미상불 부럽기두 해. 세상을 한번 요란하게 하는 것두 자랑스런 일이 아닌가.”

조롱과 야유에 넘치는 그 말에 준보는 드디어 견딜 수 없어서, “버릇없는 것들.” 하고 몸을 불끈 솟구었으나 실이 민첩하게 팔을 붙들어 끌면서,

“참으세요. 그들에게두 말의 자유가 있잖아요. 우리에게 행동의 자유가 있듯이.” 하고 도리어 길옆으로 피해 서는 동안에 소소리패는 여전히 고개를 흘끗들 거리면서 두 사람을 스쳐 지나고 말았다.

이상스러운 것은 준보는 순간 눈앞이 화끈 다는 듯하더니 웬일인지 금시 노염이 풀리면서 실의 손목을 꼭 쥐게 된 것이었다. 그의 유유한 마음씨에 감동하고 냉정한 이지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던 것이다. 실의 원만한 인격으로 말미암아 그 시각으로 외부의 수난쯤은 솔곳이 잊어버리게 된 것을 준보는 더없이 행복스런 것으로 여겼다. 실과의 행복 앞에서는 버릇없는 후리후리한 청년도 세상의 야유도 조롱도 그림자가 흐려지면서 먼 곳으로 비슬비슬 멀이지는 것이었다─.

주빈은 가느다란 눈 가장자리에 주름을 잡으면서 그 조그만 에피소드를 듣고 나더니,

“그러나 세상이란 완고한 것 같다가두 실상은 의외로 무른 것예요. 결국 가장 세인 것은 개인의 의지라구 생각해요. 거저 내 뜻대로 나가는 것─그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요 훌륭한 태도죠. 청년들에게 야유를 당한 후에 즉시 사랑의 행복을 느낀 것을 생각해 봐요. 그 행복 이상으로 값나갈 무엇이 세상에 있겠나를.”

“의론한 법두 없구 내 일 나 혼자 처리하려구 하는데 모두 괜히 한몫씩 참여하려구들 드는구료. 끝까지 세상과 싸워 볼 작정이예요. 필경 누가 못 배겨나나 보게.”

“하긴 벽도군은 서울로 원병을 청하러 갔다나요. 혼자 힘으론 부치니까 서울의 동무를 죄다 역설해서 일대 반대운동을 일으키겠다구. 샅바끈을 단단히 졸라매셔요. 괜히 까딱하다 넘어지지 말게요.”

또 새로운 소식에 준보는 귀가 뜨이면서 주빈의 괴덕스런 목소리로 자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벽도두 열정가야. 동무를 진정으로 위한다면 그만한 밸은 있어야지. ─세상은 재미있는걸. 점점 재미있어 가는걸. 사람들은 이 맛에 사는 것이 아닐까.”

주빈이 전한 말이 헛소리가 아님은 그가 다녀간 지 이틀만에 준보는 서울서 온 의외의 편지 한 장을 받게 된 것이었다. 준보가 기왕부터 알고 있는 한 사람의 직업 여성으로부터 온 충고의 편지였으니 그것이 벽도의 원병운동의 제일착의 첫소리였던 셈이다. 아마도 벽도가 술을 먹으러 가서 비분한 장광설을 한 결과 사연을 듣게 된 그가 동감찬성하고 드디어 편지를 띄운 것이라고 추측되었다. 서면은 대단한 달필로 여러 장을 들여서 준보의 생각이 미흡하고 행동이 그릇되었음을 지적한 것이었다.─

현재의 쓸쓸한 심경을 살필 수는 있지만 평생의 중대사를 어떻게 그렇게 소홀히 작정하느냐─소중한 몸을 아낄 줄 모르구 왜 그리 천하게 굴리느냐 ─당신 마음을 그토록 댕긴 그 여자의 매력을 미워해야 할는지 존경해야 할는지 모르겠다. 동무들이 대단히 걱정하는걸 민망해서 볼 수 없다.─이 자리로래두 뛰어가서 만류하구 싶으나 먼 길에 그럴 수두 없으니 두 번 세 번 신중히 생각해서 처리해라…….

대강 이런 뜻의 걱정을 적었는데 웬일인지 황겁지겁 설렌 듯한 그의 자태가 눈앞에 보여 오는 것 같아서 준보는 픽 웃어 버렸다.

“괜히들 설레누나. 공연히 필요 이상으로 안달들이구나. 세상이 금시 뒤집힌 거나 같이.”

준보야말로 그 원래의 간섭을 미워해야 할는지 존경해야 할는지 모르면서 반천리길이나 일부러 가서 겨우 그런 졸병을 통해서 첫 화살을 보내게 한 벽도의 수고가 또 한번 생각났다. 편지를 그대로 꾸깃꾸깃해서 휴지통에 넣으려다가 준보는 문득 돌려 생각하고 다시 편지를 곱게 펴들었다.

“이대로 두었다가 실에게 보이자. 그의 감회가 어떤지 누구의 태도가 더 의젓한지 달어나 보나.”

편지를 보고 실은 그다지 분개도 하지 않고 도리어 허물없는 웃음을 띠었다.

“글두 명문이구 글씨두 잘 썼구.─그러나 웬 아랑곳일까 주제넘게. 그 여자의 매력이라니 다 무어야 망칙하게.”

웃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웃는 것은 아니었다. 역시 한 줄기 섭섭한 감정이 그의 눈썹 위에 흐르고 있음을 보고 준보는 그런 것을 보인 것이 뉘우쳐도 졌다.

“자꾸만 이렇게 반대들이 일어나면 필경은 곰곰이 반성하시구 제가 싫어지겠죠. 아무리 굳은 마음인들 왜 주위의 지배를 안 받겠어요.”

“쓸데없는 소리 또 한다. 그러라구 편지를 뵈었던가. 그 자리로 찢어버리구 안 뵈일 수두 있었는데.”

“이대로 솔곳이 죽구만 싶어요. 행복스런 동안에 죽어 버리는 것이 제일 아름다울 것 같아요. 앞으로 또 무엇이 올까를 생각하면 진저리가 나요.”

“되려 고소해 하는 것들 많게. 그것들 보기 싫어서두 오래 살아야 하잖우. 소문두 한때지 언제까지나 남을 쫓아오겠수, 마음을 크게 담차게 먹어요.”

준보도 사실 가끔 마음의 평온함을 잃곤 했으나 실의 앞에서는 또 의젓하게 그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윌먼의 시집을 찾아내서 다시 읽기도 하고 서투른 피아노의 합주를 하기도 하고 말없이 의자에 앉고 실은 그 무릎 아래에 앉아서 손을 마주잡고 어느 때 까지나 그 소박한 행복감에 잠기기도 했다.

거리의 소문은 언제면 완전히 꺼져 버리려는지 주일이 거듭되고 달이 넘어도 조그만 도전과 걱정거리는 삐지 않았다. 준보가 학교에서 별안간 요란스럽게 울리는 수화기를 잡으면 면목은 있으나 그다지 귀익지 않은 여자의 목소리가 두 사람의 사건을 비웃는 듯 야유해 왔고 거리에서 간혹 동무들과 술좌석을 같이 하면 입술을 비죽들 거리면서 누구나 한 촉의 화살을 준보에게 던지려고 대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그런 험악하고 적의에 넘치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 마음은 도리어 단련되고 굳어져 가는 것도 사실이었다. 누가 못 견디나 보자 하는 앙심이 생기면서 사면초가의 외로운 속에서 끝까지 항거해 보려는 결의가 솟을 뿐이었다.

보라는 듯이 떳떳이 거리를 다니고 교외를 소요하는 심정 속에도 그런 대항의식이 숨어 있다고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집스럽게 바라들 보고 빈정거리는 사람들의 시선들을 목석같이 무시해 버리고 두 사람은 두 사람만의 길을 꼿꼿이 걸었다. 두 사람만의 세계를 그렇게 성벽같이 주위와 구별해서 지키면서 그것으로서 도리어 밖 세상까지 또 지배하려고 함은 행복스런 일이었다. 그 성벽 속에서는 단 두 사람만의 세계이므로 사랑과 이해는 한층 굳어져 가고 밖 세상을 지배하려 함에는 커다란 자랑과 교만이 상반하는 까닭이었다. 내 몸의 실력이 충실할 때 밖에 대해 교만함은 유쾌한 일이다. 그 내면에서 솟아 나오는 유쾌한 느낌을 지우고 보충하려는 것이었다.

산속 길을 걸으며 낙엽을 밟고 강을 굽어보고 짙어가는 가을을 관상할 때 실은 다시 장래의 생활설계를 치밀하게 세웠다. 하루에 몇 시간씩 책 읽고 음악 연습하고 아이들을 지도하겠다는 것, 찻그릇은 어떤 것을 쓰고 요리는 어떻게 만들겠다는 것까지를 찬찬히 계획했다. 그렇게 희망에 넘치는 실의 얼굴은 또 어느 때보다도 빛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세상이 정 시끄럽구 말썽이거든 우리 촌에 나가 염소나 기르구 닭이나 쳐요, 네.”

실의 이런 제의도 또한 기특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여자의 포부와 각오가 항상 더 원대하고 굳은 것일까.

“좋구 말구. 속세에 그렇게 연연해 할 것두 없는데 남은 반생을 차라리 전원의 목가 속에서 살 수 있다면 그 역 좋구 말구요.”

“소와 돼지까지를 기를 수 있다면 더욱 좋겠어요. 일년 먹을 햄을 맨들어 두구 소는 젖을 짜구요. 소가 잘되면 버터 제조업을 시작해두 좋죠. 집에서 손수 버터를 맨들어 먹을 수 있는 처지─전 이걸 인간생활의 최대의 이상이라구 생각하구 있어요.”

“어디 이상을 실현해 봅시다 그려. 과히 어렵지 않다면야.”

가랑잎이 발아래에 요란스럽게 울리는 수풀 사이에서 헌칠한 나뭇가지 너머로 푸른 강물을 내려다보고 그 너머 마을의 인가들을 세이면서 전원의 명상에 잠김은 그것이 실현되든 안되든 단지 그것만으로도 행복스러웠다.

초가을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사이는 두어 달을 지나는 동안에 모든 장해를 넘어 더욱 깊어가서 흡사 시절의 걸음과 발을 맞추려는 듯도 했다. 시절이 깊어가면 갈수록에 영혼들도 맑아가고 그 열정을 가다듬어 갔다. 날이 으슬으슬해 가고 공기가 차감을 따라 산속을 거니는 날이 적어지고 방 속에서 꿈과 설계에 빠지는 날이 늘어갔다. 첫서리가 허옇게 내려 땅을 덮은 날 실은 조금 조급하게 설렜다.

“정신없이 늑장을 대구 있느라고 이 옷 주제 좀 보세요. 거리에선 벌써들 겨울옷들을 입기 시작했는데 아직두 이게 첫가을의 차림 아녜요. 옷 벌이란 옷벌은 전부 동경에 두었거든요. 얼른 가서 첫째, 옷을 가져와야 겠어요.”

“그렇소. 지금 남은 일은 꼭 한 가지밖엔 없소.─얼른 동경 들어가서 짐을 가지구 나올 것.”

“참으로 무서운 변화예요. 다시 들어가 공부를 계속할 줄 알았지 누가 짐을 꾸리게 될 줄 알았던가요. 여름 휴가로 나왔다가 꼭 두 달 동안에 이 기적이 오구 말았어요.”

“되려 섭섭한 것두 같죠. 커다란 변화란 아무리 그것이 행복된 것이래 두 한 줄기 섭섭한 느낌을 주는 법인데.”

“짐이 좀 많아요. 피아노, 축음기, 의장, 침대, 옷, 레코드, 책. 옳게 꾸려서 부치려면 아마두 두 주일은 걸릴 것예요. 두 주일 동안 안녕하시구 그리구─한눈 파시지 마세요.”

언제나 그것이 걱정인 모양이었다. 준보는 번번이 그것을 대답하기가 실없어서 눈에 웃음을 머금고 실의 귓불을 짐긋이 끌어당겼다.

“이 걱정쟁이 같으니 누굴 칠면조나 카멜레온으로 아나부다.”

“저 없는 동안에 모두들 충충대서 마음을 변하게 하문 어떻게 해요. 정말 걱정예요.─전 그렇게 되면 죽을걸요 뭘.”

“어서 내 염려 말구 당신 마음의 고삐나 든든히 잡아 둬요. 행여나 대중없이 노여나지나 말게.”

“인전 그만둬요 그런 소리. 듣기만 해두 소름이 끼쳐요.”

지난 두 달 동안의 변화와 수많은 굴곡을─행복과 불행의 가지가지를 반성하면서 벌써 그것이 과거가 되고 추억이 된 것이 신기해서 견딜 수 없었다. 뭇 인물들의 왕래와 미묘한 인심까지를 아울러 생각할 때 두 사람이 꾸며 놓은 그 조그만 한 폭의 역사가 또한 인간생활의 장한 한 페이지로 여겨졌다. 그 한 폭을 주초로 하고 앞날의 발전이 훤하게 내다보이는 것이 두 사람의 마음을 한량없이 밝게 해주었다.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들 개척해 가는 용기 앞에는 하나의 확고한 결정이 있을 뿐이었다. 미래에 속하되 미래가 아닌 결정이었다.

삼한이 풀리고 사온이 시작되는 날 드디어 실은 동경으로 길을 떠나게 되었다.

날마다 학교로 오는 전화가 그날은 특별히 아침 일찍이 왔다.

“오늘 떠나게 될는지두 모르겠어요. 안녕히 계셔요.”

실은 역에서 보냄을 받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질에 떠나는 날짜의 결정을 언제나 확적히 작정하지 않고 흐려오던 것이었다. 세상에 작별같이 마음 성가신 일이 없어서 역에서 마주보고 눈들을 붉히면 도저히 떠날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언제나 떠나게 되면 말없이 가만히 떠나겠다고 하던 것을 생각하고 그날 아침 전화로 준보는 혹시 이날이 아닌가 설레면서 물었다.

“몇 시에 떠난단 말요. 몇 시에.”

“모르겠어요. 떠날지 안 떠날지 모르겠어요. 아이들 데리구 얼마나 고생하시겠어요. 제발 몸 주의하세요. 병원에 자주 다니시구 많이 잡수시구요. 제발제발 건강하세요.”

열 번 백 번 듣는 이 몸에 대한 주의가 번번이 마음을 울리는 것이었다. 조급하게 차시간을 거듭 묻고 되물었으나 종시 대답이 없는 전화는 끊어졌다.

떠나도 필연코 밤이려니 생각하고 준보는 학교를 일찍이 나와 그를 보낼 약간의 준비를 갖추어 가지고 저녁 무렵은 되어 가게로 전화를 거니 그의 언니의 대답이 이미 세 시 차로 떠났다는 것이었다. 준보는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서 실망이 컸으나 생각하면 실의 말마따나 그 편이 되려 성가시지 않고 개운하거니 하고 마음을 눅여도 보았다.

밤에 가게로 내려가니 언니는 금시 장난을 하고 난 아이같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기어코 가만히 떠나고 말았어요. 그애 성질이 원래 그래요. 여럿이 나가면 결국 울구불구해서 못 떠나구 만답니다. 잠시 적적은 하시겠으나 그 동안 건강하실 테니 되려 안심이라구 기뻐두 해요. 서울 가서 제 심부름을 보군 바로 동경 들어가기로 했어요. 서울서나 동경서 장거리 전화를 걸겠다구요.”

“이젠 전화나 기다리는 수밖엔요. 무사하게나 다녀온다면 더 바랄 것이 없죠. 날짜의 길흉을 몹시 가리더니 오늘이 그럼 대안날인가요.”

“그렇답니다. 삼벽 대안이에요. 이것 보셔요.” 하면서 가리키는 벽의 괘력을 바라보니 조그만 글자가 그렇게 짐작되었다.

“떠나두 대안, 돌아와두 대안, 대안날 제발 무사태평하구 만사형통 하소서.”

축원의 말을 마음속에 외이면서 준보는 두 주일 동안 만나지 못할 실의 자태를 머리 속에 떠올려 보았다. 달덩어리같이 훤한 얼굴과 포도알 같이 맑은 눈이 분명하게 뚜렷이 떠올랐다. 맑은 목소리가 아울러 귀에 울려왔다.

“……제발 몸 주의하세요. 병원에 자주 다니시구 많이 잡수시구요. 제발제발 건강하세요.”

실의 육체와 영혼의 한 방울 한 방울이 한 점 빈틈없이 준보의 속에 그대로 살아 있었다. 준보는 그것을 마음과 육체를 가지고 역력히 느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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