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류드
─ 여기에도 한 서곡이 있다
1
[편집]“나 ─ 한 사람의 마르크시스트라고 자칭한들 그다지 실언은 아니겠지.─ 그리고 마르크시스트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 없으렷다.”
중얼거리며 몸을 트는 바람에 새까맣게 끄스른 낡은 등의자가 삐걱삐걱 울렸다. 난마같이 어지러운 벅숭이 밑에서는 윤택을 잃은 두 눈이 초점 없는 흐릿한 선을 맞은편 벽 위에 던졌다. 윤택은 없을망정 그의 두 눈이 어둠침침한 방안에서 ─ 실로 어둠침침하므로 ─ 부엉이의 눈 같은 괴상한 광채를 띠었다.
‘그러지 말라’는 ‘죽지 말라’의 대명사였다.
가련한 마르크시스트 주화는 밤낮 이틀 동안 어두운 방에 틀어박혀 죽음의 생각에 잠겨 왔다. 그가 자살을 생각한 것은 오래되었으나 며칠 전부터 그것은 강렬한 매력을 가지고 그의 마음을 전부 차지하였던 것이다. 그는 진정으로 자살을 꾀하였다. 첫째 그는 자살의 정당성을 이론화 시키려고 애쓰고 다음에 그 방법을 강구하고, 그리고 가지가지의 자살의 광경을 머리 속에 그렸다.
자살의 ‘정당성’의 이론화 ─ 삶의 부정과 죽음의 긍정 ─ 이것이 가장 난관이었다. 그래도 많은 사람이 무조건으로 긍정을 하여 왔을망정 한 사람도 일찍이 밝혀 보지 못한 ‘인류 문화 축적의 뜻과 목적’을 그는 생각하였다. 인류 이전에 이 지구를 차지하였던 동물은 파충류(爬蟲類)였고 그 이전의 동물이 ‘맘모스’였음은 학자의 증명하는 바이다. 이러한 역사에 비취어 보더라도 인류가 영원히 지구를 차지하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니 인류 다음에 올 고등동물은 ‘캥거루’이라고 간파한 학자도 이미 있지 않은가.
‘캥거루’의 세상에서도 인류의 문화가 의연히 통용될 수 있을 것인가. 쌓이고 쌓인 인류 문화의 찬란한 탑은 자취도 없이 헐리어져 버릴 것이다.
그때에 어디에 가서 인류 문화의 뜻과 간 곳을 찾을 수 있으리요. 문화의 탑 ─ 그것은 잠시간의 화려한 신기루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신기루를 둘러싸고 춤추고 애쓰는 것이 그것이 벌써 애달픈 노력이고 우울한 사실이 아닌가. ─ 이렇게 주화는 생각하였다.
세상의 일만 가지 물상이 변증법적으로 변천하여 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또한 혁명이 있은 후의 상태라고 결코 완전무결한 마지막의 상태는 아닐 것이니 티가 없다고 생각되는 그 상태 속에는 어느결에 이미 모순이 포태되어 그것이 차차 자라서 다음의 혁명을 가져올 것이다. 결국 변천하고 또 변천하여 그칠 바를 모르는 것이니 최후의 안정된 절대의 상태라는 것을 사람은 바랄 수 없을 것이다.
이 또한 안타까운 사실이 아닌가. 그리고 어디까지든지 통일을 구하여 마지않는 사람은 이 그칠 줄 모르는 변천 가운데에서 공연한 헛수고에 피로하여 버릴 것이다. 인류의 모든 움직임과 혁명을 조종하는 근본은 식과 색이니 이 단순한 동물적 충동에 끌려 보기 흉하게 날뛰는 사람들의 꼴, 이것이 또한 우울한 것이 아닌가. ─ 이렇게도 주화는 생각하였다.
혁명과 문화의 뜻이 이미 이러하거늘 그래도 괴롬을 억제하고 바득바득 애쓰며 건설자의 한 사람으로서의 힘을 다하지 않으며 안될 필요가 나변에 있는가. 그것은 밝히지도 못하고 세상 사람이 공연히 삶을 위한 삶을 주장하고 용기를 위한 용기를 외침은 가소로운 일이다. 사람은 왜 살지 않으면 안되느냐 ‘장하고 거룩한’문화를 세우려. 문화는 왜 세우느냐? ─ 여기에는 대답이 없고 설명이 없다. 요컨대 문제는 ‘취미’의 문제요, ‘흥미’의 문제인 것이다. 사람은 삶에 ‘취미’를 가졌기 때문에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에 ‘취미’를 잃은 때에는 죽는 것이다. 즉 삶도 죽음도 결국 ‘취미’의 문제이다.
삶에 ‘취미’를 가지거나 죽음에 취미를 가지거나 그것은 누구나의 자유로운 동등한 권리이다. 삶에 ‘취미’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 죽음에 ‘취미’를 가지고 죽는 사람을 논란할 권리와 자격은 조금도 없는 것이다. 자살의 길을 패부의 길이라고 비난한다면 자살자의 입장으로서는 죽지도 못하고 질질 끌려가며 살려고 애쓰는 사람의 가련한 꼴이야말로 그대로가 바로 패부의 자태라고 비난할 수 있을 것이다. 자살이 삶의 도피라면 삶은 죽음의 도피가 아닌가. 어떻든 삶에 ‘흥미’를 잃은 때에 삶과 대립되는, 그러나 동등한 지위에 있는 죽음의 길을 취함은 극히 정당한 일이다. 그는 제삼자의 어리석은 비판을 초월하여 높게 서는 것이다.
마르크시즘과 자살. 마르크시즘은 삶 이후의 문제이다. 혹 삶이 마르크시즘 이전의 문제인 만큼 죽음도 마르크시즘 이전의 문제이다. 마르크시스트의 자살 ─ 결코 우스운 현상이 아니다. 비웃는 자를 도리어 가련히 여겨 자살한 마르크시스트의 얼굴이 창백한 웃음을 띄우리라.
밤이 맞도록 날이 맞도록 이렇게 생각하고 되풀이하고 고쳐 생각하여 이틀 동안에 주화는 어떻든 처음부터 계획하였던 그의 얻고자 한 결론을 얻었다.
마르크시스트인 그가 무릇 마르크시즘의 입장과 범주와는 멀리 멀리 떠난 마르크시스트의 이름을 ─ ‘ ’ 상할지언정 위하지는 못할 이러한 경지에서 방황하여 그의 요구하는 결론을 얻기 전에 뒤틀어서 꾸며냈던 것이다.
그러나 ‘스켑티시즘’과 ‘로맨티시즘’과 ‘소피즘’과 ‘니힐리즘’의 이 모든 것을 섞은 칵테일과 범벅 가운데에서 나온 그의 이론과 결론이 아무리 구부러지고 휘어진 것이었든지 간에 그의 마음은 이제 일종의 안정을 얻었다. 어지러운 머리 속과 어수선한 감정이 구부러졌든 말았든 간에 마지막의 통일을 내렸던 까닭이다. 혹은 그 일류의 칵테일의 향취에 취한 까닭일지도 모른다.
“─ 나는 단연코 죽을 것이다.”
어떻든 이 결론을 마지막으로 중얼거렸을 때에 주화의 창백한 얼굴에는 한 단락을 지은 뒤의 비장하고 침착한 표정이 떠올랐다. ─
마지막 작정을 하고 등의자에서 일어선 주화는 문득 책시렁 위에 놓인 거울 속에 비친 그의 이지러진 용모에 새삼스럽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깎아내린 듯이 여윈 두 볼, 윤택 없는 두 눈, 그 자신이 정이 떨어졌다. 이렇게 여위고서야 사실 죽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 고 그는 생각하였다. 벽 위에 붙인 마르크스의 초상이 가련히 여겨서인지 그를 듬짓이 내려다보았다. 주화는 그의 체면으로는 차마 정면으로는 마르크스를 딱 치어다보지 못 하였다.
“마르크스도 지금의 나와 같이 마음과 물질에 있어서 이렇게까지 궁해 본 적이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였을 때에 그러나 주화는 별안간 불끈 솟아오르는 반감을 느꼈다. 그의 조상이요, 스승이요, 동지인 마르크스에 대하여 그는 전에 없던 반감을 이제 불현듯이 느꼈던 것이다.
신경질로 떨리는 그의 손은 어느결엔지 벽 위의 초상을 뜯어 물었다. 다음 순간 마르크스의 수염이 한 사람의 제자의 손에서 가엾게도 쭉쭉 찢겼다.
“죽어가는 마지막 날에 이 호인인 아저씨에게 작별의 절을 못할망정 이렇게까지 참혹하게 그를 모욕할 필요가 있었을까.”
찢어진 초상화의 조각조각이 어지러운 방바닥에 휘날려 떨어질 때 주화에게는 한줌의 후회가 없을 수 없었다. 별안간의 그의 신경의 격동과 경솔한 거동을 책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히스테릭한 것도 결국 이 며칠 동안 굶었던 탓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니 그 자신의 가련한 신세에 눈물이 푹 솟았다.
눈을 꾹 감아 눈물을 떨어트려 버리고 그는 가난한 책시렁에서 가장 값있는 자본론의 원서 두어 권을 빼어 들었다. 그가 대학에서 공부할 때부터 그를 인도하고 배양하여 온 머리의 양식이 이제 그의 자살의 약값으로 변하는 것이다.
재학시대의 유물인 단벌의 쓰메에리를 떨쳐입고 책을 낀 채 주화는 어두운 방을 뛰어나갔다.
2
[편집]아무 미련도 남기지 아니하고 오랫동안 숭배하여 오던 마르크스를 두어 장의 얇은 지폐와 바꾼 주화는 단골인 매약점에 가서 잠 안 옴을 칭탁하고 사기 어려운 ‘알로날’ 한 갑을 손에 넣었다. ‘칼모린’ ‘쥐약’ ‘헤로인’ ‘청산가리’ ‘스토리키니네’ ‘알로날’ ─ 병원에 있는 친구에게 틈틈이 농담 삼아 물어두었던 이 수많은 약 가운데에서 그는 ‘알로날’ 을 골랐던 것이다. 한 주먹 안에도 차지 않는 조그만 한 갑에 일 원 이십오 전(壹圓二十五錢)은 확실히 과한 값이었으나 그것이 또한 영원의 안락을 가져올 최후의 대상이라는 것을 생각하였을 때에 그는 두말없이 새파란 미소를 남기고 약점을 나왔다.
저무는 가을 저녁이 쌀쌀하게 압박하여 왔다. 오랫동안 거리에 나오지 않았던 그에게는 지나쳐 신선한 가을이었다.
맑은 하늘에는 이지러진 달이 차게 빛났다. 오늘의 번화한 이 거리를 내려다보고 또한 내일의 폐허가 되어 버릴 이 거리를 아울러 내려다볼 그 달이 므로인지 몹시도 쌀쌀한 용모다 ─ 고 주화는 느꼈다.
어두운 방으로 돌아가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신선한 밤거리를 한 바퀴 돌아볼 작정으로 그는 번화한 거리에 막연히 발을 넣었다.
‘어리석은 인간들의’참혹한, 혹은 화려한 각가지의 생활상이 구석구석에 애달게 빛났다. 거기에는 천편일률인 ‘습관’의 연속과 ‘평범한 철학’의 되풀이 이외의 아무것도 없다. 부르주아나 프롤레타리아나 그 모래 같은 평범 속에 ‘취미’를 느끼는 꼴들이 그에게는 한없이 어리석게 보였다.
찬란한 일류미네이션의 난사를 받는 거리에는 가뜬하게 단장한 계집들이 흐르고 밝은 백화점 안에는 여러 가지 시설의 생활품과 식료품이 화려하게 진열되어 있으나 한 가지도 그를 끄으는 것은 없다. 라디오와 레코드가 양기롭게 노래하나 그의 마음은 춤추지 않았다. 죽기 전에 먹고 싶은 것은 없나? 하고 휘둘러보았으나 그의 마음은 “없다” 하고 확연히 대답하였다. 진열장에 얼굴을 바싹 대고 겨울 옷감을 고르고 섰는 아름다운 한 쌍의 부부의 회화도 그를 유혹하지는 못하였다.
“이 거리에는 한 점의 미련도 없다!”
결국 이렇게 결론한 그는 올라가던 거리를 중도에서 되돌아섰다. 찌그러진 나의 마음속에는 확실히 호장된 고집이 뿌리박고 있을는지는 모르나 적어도 나의 감정은 바른 것이다 ─ 고 주화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번잡한 거리를 나와 넓은 거리를 지나고 다시 좁은 거리거리를 빠져 나온 그의 집으로 향하는 길에 역시 마지막으로 그가 일상 사랑하던 정동고개에 이르렀다.
“결국 나는 싸늘한 저 달과 동무하여야 할 것이다.”
인기척이 없고 거리의 음향이 멀리 들리는 적막한 고개를 넘으면서 그는 다시 달을 치어다보았다. 차고 맑고 높은 달의 기개에 취하여서인지 그의 마음은 죽음의 나라로 길 떠나기 전의 맑은 정신, 고요한 심경 그것이었다.
─ 별안간 그의 귀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확실히 달려오는 발소리였다.
무심코 돌아섰을 때에 멀리서 고개를 달려오는 한 개의 동체가 있었다. 상반은 희고 하반은 검은 단순한 색채가 흐릿한 달빛 속을 급하게 헤엄쳐 올라오는 것이다.
주화는 그 자리에 문득 머물러 서서 그 난데없는 인물의 동향을 살폈다.
숨차게 고개를 헤엄쳐 올라온 색채는 주화의 앞에 바싹 달려들어 머물렀다. 스물을 넘을락 말락 한 가뜬한 소녀였다. 한편 팔에는 종이뭉치를 수북이 들고 있었다.
“당신은 무엇입니까?”
낯모르는 소녀의 이 돌연한 질문에 주화는 가슴이 혼란하였다.
“무엇 무엇이라니요.”
“형사 아니예요?”
“형사? 아니외다.”
순간 약간 긴장이 풀린 듯한 소녀의 자태는 비상히 아름다웠다. 솟아 보이는 오똑한 코와 굵은 눈망울이 높은 향기같이 달빛 속에 진동쳤다. 거룩한 것을 대한 듯이 주화의 가슴속은 몽롱하게 빛났다.
“뒤에서 나를 좇아오는 사람이 있으니 만나거든 이 고개를 곧게 내려갔다고만 말해 주세요.”
“…………?”
“그리고 미안하지만 이 삐라를 이곳에 어지럽게 뿌려 주세요.”
소녀는 날쌔게 말하고 들었던 삐라뭉치를 주화의 손에 넘겨주고는 길 옆 긴 담 모퉁이 으슥한 곳에 부리나케 가서 숨어 버렸다.
아름다운 소녀의 광채로 인하여 몽롱하여진 주화는 영문 모를 소녀의 분부와 거동에 다시 정신이 혼란하였다. 그러나 막연이나마 소녀의 신변에 위험이 있다는 것을 직각한 그는 소녀의 분부대로 삐라를 그곳에 난잡히 뿌리면서 소녀가 달려온 고개를 내려다보았다.
시커먼 두 개의 그림자가 날쌔게 뛰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주화는 시침을 떼고 돌아서서 그의 길을 태연히 걸어 내려갔다.
몇 걸음 못 가서 그는 고개를 뛰어 넘어온 두 사람의 사나이에게 붙들렸다.
“뛰어가는 여자 한 사람 못 보았소?”
인상이 좋지 못한 한 사람의 사나이가 황급하게 물었다.
“이 길로 곧게 내려갑디다.”
“이 삐라는 웬 것이야”
“그 여자가 뿌리길래 주운 것이외다.”
“이런 것 줍어서는 안돼.”
사나이는 거칠게 주화의 손에서 삐라를 빼앗았다. 그리고 주위에 흐트러진 삐라를 공들여 한 장 한 장 ─ 모조리 다 주워 가지고는 소녀의 간 곳을 찾아 언덕을 날래게 뛰어 내려갔다.
그러나 남은 한 사람의 사나이는 동료의 뒤를 좇지는 않고 그 자리에 머무른 채 주화를 날카롭게 노렸다.
“나는 서의 사람인데 자네는 무엇 하는 사람인가.”
그러리라고 짐작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으나 이렇게 정면으로 당하고 보니 주화는 마음이 언짢고 불안하였다.
“별로 하는 것 없소이다.”
“무직이란 말인가. ─ 장차 하려고 일은 무엇인가.”
“장차 ─ 죽으려고 하는 중이외다.”
“죽어 ─ ?”
형사는 주화의 대답이 그를 모욕하려는 농담인 줄로 알고 괘씸하다는 듯이 주화를 노렸다.
“가진 것 무어”
“없소이다.”
형사는 그의 손으로 주화의 주머니 속을 마음대로 뒤졌다. 웃주머니 속에서 몇 장의 명함이 나와 길바닥에 우수수 헤어지고 아랫주머니 속에서는 ‘알로날’의 갑이 나왔을 뿐이었다.
“무엇이야?”
“잠자는 약이외다.”
“흠 ─ ”
형사는 무엇을 깨달은 듯이 ‘알로날’의 값을 달빛에 비취어 보면서 질문을 계속하였다.
“─ 아까의 그 여자와는 어떠한 관계가 있나?”
“관계라니요, ─ 나는 그를 모릅니다.”
“정말인가?”
“거짓말이 아니외다.”
“그 여자가 어데로 갔나?”
“이 길로 곧게 내려갑디다.”
“정말인가?”
“거짓말이 아니외다.”
아까의 구조 그대로 시침을 떼고 대답한 것이 아무 부자연한 기색을 형사에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주화를 한참이나 찬찬히 다시 훑어보더니 나중에 제의하였다.
“─ 더 물을 것이 있으니 잠깐 서에까지 같이 가야 돼.”
그다지 마음에 쓰이지 않는 제의였다.
“물을 것이 있거든 여기에서 다 물어주시오.”
“잠깐만 가.”
그의 손을 붙들었다.
“죽을 사람이 서에 가서는 무엇 한단 말요.”
손을 뿌리쳤으나 형사는 다시 그의 손을 든든히 잡아끌었다. ─
자살하기 전에 거리 구경을 나왔다가 마지막 이 고개에서 이 돌연한 변을 당하는 것이 주화에게는 뼈저린 희극으로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서로 끌려가는 것이 그로서 겁날 것이 없었으나 소녀에게 대하여 좀더 곡절은 알고 싶은 충동이 그의 뒤를 궁금하게 하였다. 아까 소녀가 주던 삐라의 내용은 대체 무엇인지 황급한 바람에 그것도 읽지 못한 자기의 경솔을 그는 책하였다. 형사에게 끌려 고개를 내려가는 주화는 몸을 엇비슷이 틀어 소녀가 숨어 있는 담 모퉁이를 멀리 흘긋흘긋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소녀의 자태가 ─ 어글어글한 눈방울이 ─ 오똑한 코가 ─ 높은 향기 같이 그의 마음속에 흘러왔다. 이 거리의 이 세상의 아무것에도 미련을 느끼지 않던 그의 가슴속에 이제 확실히 처음 본 그 빛나는 소녀에게 대한 미련이 길게 길게 여운의 꼬리를 진동시켰던 것이다.
3
[편집]호모도 그 자신의 탓이 아니요, 전연 뜻하지 아니하였던 아름다운 처녀와의 우연한 교섭으로 인하여 애매한 사흘 동안의 검속 구류를 마친 주화는 나흘 되는 날 늦은 오후 C서를 나왔다. 물론 사흘 동안의 취조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우러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공연히 막연한 혐의에 사흘씩이나 고생하게 된 것이 그에게는 매우 애매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억울한 첫 경험을 그다지 분하게는 여기지 않았다. 이 첫 경험을 인도한 것은 아름다운 처녀였고, 그 아름다운 처녀의 자태는 그를 만난 첫 순간부터 주화의 가슴속에 빛나기 시작하였으니까.
처녀의 오똑한 코와 어글어글한 눈방울이 어두운 사흘 동안 높은 향기 같이 그의 가슴속에 흘렀고 지옥같이 어둡던 그의 마음속을 우렷이 비치었다.
실로 그의 앞에 나타난 그 돌연한 등불로 인하여 그는 한번 잃었던 삶에 대한 미련을 회복하였고 나흘 전의 무서운 악몽은 그의 마음속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억울한 사흘을 그다지 괴롭게는 여기지는 않았기에 서를 나오는 이제 그의 마음은 명랑히 개이고 그의 걸음은 스스로 가벼웠다.
“뜻하지 아니하였던 한 점을 중심으로 하고 고요히 열린 재생의 날 ─ 또한 아름답기도 하다!”
이렇게 중얼거리고 그가 아침에 취조실에서 그를 빈정거리며 ‘알로날’의 갑을 감추어 버리던 형사의 시늉을 이제는 도리어 귀엽게 생각하며 서의 문을 나섰을 때에 쾌청한 가을 오후의 햇빛이 뜻하고서인지 그의 전신을 폭신히 둘러쌌다. 따뜻한 젖에 목이 메여 느끼는 어린아이와 같이 그는 따뜻한 햇빛에 전신이 느껴졌다.
며칠 전 차디찬 달빛 밑에서 죽음의 지옥을 생각하던 그의 마음은 이제 이 따뜻한 햇빛 밑에서 재생의 기쁨에 타오르는 것이다. 이 끔찍하고 신기한 마음의 변동에 그는 그 자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달빛과 햇빛만큼이나 차이가 큰 죽음과 삶의 사이를 수일 동안에 결정적으로 헤매이던 움직이기 쉬운 그의 마음에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또 그는 그때의 그의 감정은 어떠한 것이었든지 간에 쉽게 자살을 작정한 경망한 그의 이론과 생각을 꾸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떻든 이제는 재생의 햇빛이 그의 전신을 둘러쌌고 그의 마음은 기쁨에 뛰노는 것이다.
서의 앞을 떠나 거리를 걸어가던 주화의 눈에는 이제 거리의 모든 것이 일률로 신선하게 비치이고 그의 마음의 백지 위에 새로운 뜻을 가지고 뛰놀았다.
“이 기쁜 마음으로 속히 나의 마음의 등불 ─ 그 처녀를 만났으면 ─ ”
며칠 전의 ‘니힐리즘’을 쏘아 죽이고 이제 새로이 ‘삶’에 대한 취미를 발연이 일으키는 햇빛 밑 ‘새로운’거리거리를 걸어가는 그의 뛰노는 가슴속에는 아름다운 처녀의 자태가 유연히 솟아올랐다.
그러나 그 처녀의 사는 곳을 당장에 찾을 길이 없는 그는 우선 자기 숙소로 향할 수밖에는 없었다.
어수선한 뒷골목을 지나 주인집에 이르렀을 때 그는 끄스른 대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섰다. ─ 방세 밀린 주인을 행여나 만날까 두려워하면서 어둠침침한 방, 어지럽게 늘어놓은 방 ─ 방문을 연 순간 그는 정이 뚝 떨어지는 듯하였다. 명랑한 밖 일기에 비하여 얼마나 음울한 분위기인가. 이러한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 속에 들어박히고야 사실 죽음밖에는 생각할 것이 없으리라고 생각하매 그는 그가 나흘 전 마지막으로 죽음을 작정한 것은 실로 그의 사는 방이 어둡고 침침한 까닭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두운 방에 살게 된 것은 그에게 일정한 생활의 보증이 없는 까닭이요, 일정한 생활의 보증이 없음은 그에게 직업이 없고 그렇다고 부유한 계급에 속하지도 못하는 까닭이다. 결국 그가 결정적으로 자살을 꾀한 것은 그가 빈한한 계급에 속하고 그 위에 몸과 마음을 바쳐서 해나가는 일이 없는 까닭이었다. 즉 그가 삶에 ‘취미’를 잃은 것은 풍족한 생활에 포화(飽和)된 탓이 아니요, 실로 모든 물질에 있어서 극도로 빈궁한 까닭이었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
이 단순한 논리를 이제야 겨우 깨닫게 된 것이 그에게는 오히려 괴이한 일이었다.
침침한 방에 들어서니 어수선한 발밑에는 조각조각 찢어진 마르크스의 수염이 어지럽게 밟히었다.
그는 몸을 굽혀 나흘 전에 그의 손으로 쪽쪽 찢어 버렸던 마르크스의 초상화를 조각조각 공들여 주웠다. 나흘 전에 신경질적 격분에 떨리던 그의 손은 이제 스승에 대한 죄송한 참회의 염에 떨렸다. 떨리는 손으로 그가 초상화의 조각을 한 조각 두 조각 주워 가노라니 어지러운 휴지 가운데에서 문득 그의 시선을 끄는 한 장의 종이가 있었다.
날쌔게 집어드니 한 장의 엽서였다. 서신의 내왕조차 끊인 지 이미 오래인 그에게 돌연히 어디서 온 편지일까 하고 들여다보니 표면에는 발신인의 씨명이 없고 이면 본문 끝에 ‘주남죽(朱南竹)’ 이라는 여자의 솜씨다운 가는 필적이 눈에 띄었다. 낯모르는 초면의 여성에게서 온 편지! 호기에 뛰노는 마음에 그의 시선은 서면의 글자를 한 자 한 자 탐내 훑어 내려갔다. 훑어 내려가는 동안에 그 미지의 여성의 정체가 요연히 그에게 짐작되었다. ─
전날 밤 정동고개에서는 초면에 돌연히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 때문에 뜻하지 아니한 변을 당하시는 것을 담 옆에서 엿보고 있으려니 미안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들어가셔서 그다지 고생이나 안 하셨는지요. 나오시는 대로 한번 찾아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날 밤 가신 뒤 행길바닥에서 선생의 명함을 주웠고 그 속에서 선생의 주소를 발견하였던 까닭에 이제 사례 겸 두어 자 적어 올리는 터입니다.
××동 89 ─ 주남죽
“그가 주남죽이었던가. ─ 주남죽!”
그는 너무도 기쁜 마음에 한참이나 엽서를 손에 든 채 다시 탐스럽게 한 자 한 자 내려 읽었다. 그리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주남죽!”을 부르며 속으로 그에게 감사하였다.
“주남죽. ─ 고맙다.”
돌연히 솟아오르는 기쁨에 그는 마침 자리를 뛰어 일어났다.
“이 길로 곧 찾아가 볼 것이다.”
엽서를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초상화의 조각을 어지러운 방 속에 그대로 버려 둔 채 그는 방을 뛰어나갔다.
저무는 석양의 거리를 급한 걸음으로 재촉하여 화동길을 올라간 그가 좀 복잡한 골목을 이리저리 빠져서 목표의 번지를 찾고 보니 끄스른 대문의 낡은 집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대문을 열었을 때에 바로 대문 옆 행랑방에서 십오륙 세의 단정한 소녀가 나와서 그를 맞았다.
“주남죽씨 계십니까?”
“안 계십니다.”
“밖에 나가셨나요?”
“공장에서 아직 안 돌아오셨어요.”
“공장에서요?”
“네 ─ . 요새 공장에 풍파가 생겨서 언니의 돌아오시는 시간이 날마다 이렇게 늦답니다.”
“바로 그분이 언니가 되시나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어쩐지 전날 밤 달빛 밑에서 만난 짧은 순간의 기억이언만 그의 인상과 이 소녀의 용모와의 사이에는 콧날이며 눈방울이며 비슷한 점이 많음을 그는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소녀에게 대하여 돌연히 친밀한 느낌이 버썩 나서 그는 지나친 짓이라고는 생각하면서도 마침내 그들의 일신상에까지 말을 돌렸다.
“부모님도 이 댁에 같이 계신가요”?
“아니예요. ─ 고향은 시골인데 우리 두 형제만이 올라와서 이 방을 빌려 가지고 살아간답니다.”
하며 소녀는 약간 주저되는 듯이 행랑방을 가리켰다. 그 태도가 몹시 귀엽게 생각되어서 주화는 미소를 띠우며 소녀의 신상을 물었다.
“그래 학교에 다니시나?”
소녀는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이며,
“아직 아무데도 다니는 곳은 없어요.”
“그럼 놀고 계시나?”
“─ 시골학교에서 동맹파업 사건을 출학을 당하였지요. 그래서 집에서 놀고만 있기도 멋적어서 언니를 따라 올라온 것이지 별로 학교를 목적한 것은 아니예요.”
“흠. ─ 그러고 보니 어린 투사이시군.”
부끄러워서 다시 고개를 숙이는 소녀의 귀여운 용모 가운데에 사실 장래의 투사를 약속하는 듯한 굳센 선이 흘러 있음이 그에게는 반갑고 믿음직하게 생각되었다.
소녀와의 몇 마디의 문답으로 하여 주화는 그 두 자매의 내력과 위인을 대강 짐작하였고 처녀의 처지와 방향을 한 가닥 두 가닥 알아가면 갈수록 그의 처녀에게 대한 애착과 희망은 더하여 갈 따름이었다.
그러나 처녀도 없는 동안에 대문간에 오랫동안 서서 소녀와 너무 장황하게 문답하는 것도 떳떳한 짓이 아닌 듯하여 그는 명함 한 장을 내어 소녀에게 주고 부탁하였다.
“언니가 돌아오시거든 이것을 드리고 찾아왔었다는 것을 말하여 주시오.”
말이 막 끝나자마자 그의 등뒤에서 대문이 삐걱 열리며 단순한 색채가 가볍게 흘러 들어왔다.
“이제 오세요 언니.”
하고 반갑게 맞는 소녀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을지라도 상반은 희고 하반은 검은 그 단순한 색채가 전날 밤 정동고개에서 만난 바로 그 색채임을 주화가 직각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의 가슴속은 다시 몽롱히 빛나며 약간 후둑이는 것을 또한 억제할 수 없었다.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소녀가 이렇게 고하기보다도 먼저 처녀는 주화를 인식하였던 것이다.
“주화씨예요!”
하며 반갑게 인사하는 처녀에게 주화도 고개를 숙이며 반갑게 답례하였다.
“주신 편지 감사히 받았습니다.”
그러는 즈음 다시 대문이 열리며 처녀와 같이 와서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섰는 듯한 삼십줄을 훨씬 넘어 보이는 어른 한 분이 들어왔다.
“방으로 들어오세요.”
한 걸음 먼저 방에 들어간 두 자매는 주화에게 들어오기를 청하였다.
“서선생님도 들어오세요.”
처녀의 청에 응하여 중년의 어른은 서슴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고 주화도 누차의 청을 거절하기 어려워서 마침내 방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의 손님을 맞아들이니 좁은 방은 빽빽하였다. 그러나 주화는 그다지 협착한 느낌을 받지는 않고 도리어 넉넉하고 안온한 느낌을 받았다.
두 손님에게 자리를 권하고 나중에 사뿐히 자리에 앉는 처녀는 두 사람에게 미소를 등분으로 던지다가 나중에 ‘서선생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분이 바로 일전에 말씀한 그분예요.”
별안간 소개를 입은 주화는 어쩔 줄을 모르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하, 그러신가. 이 자리에서 돌연히 만나게 되어 미안하외다.”
이렇게 겸손하게 답례한 ‘서선생’은 그의 성명을 통한 후,
“일전에는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하며 그의 손을 청하여 굳은 악수를 하여 주었다. 겸손한 서선생의 이 의외의 굳은 악수를 주화는 깊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그는 서선생들의 엄숙한 영토 안에 이미 한 걸음 들여놓은 듯한 엄숙한 느낌을 받았다.
“얼마나 고생하셨어요?”
처녀는 미소를 띠우고 그의 며칠 동안의 구류를 위로하였다. 그러나 단 사흘의 고생을 가지고 이 아름답고 장한 처녀의 과한 치하에 대답하기에는 자못 겸연쩍어서 주화는 바른 대답을 발견치 못하였던 것이다. ─
이럭저럭 십 분 동안이나 이야기가 어우러진 뒤였을까, 서선생은 시계를 내보더니 어조를 변하여 가지고 처녀에게 말하였다.
“자, 그럼 이만 가봅시다.”
“네 ─”
처녀는 대답하고 미안한 듯이 주화에게 양해를 빌었다.
“요사이 공장에서 일이 터진 까닭에 동무 직공들을 조종해 나가기에 매우 바쁘답니다. ─ 모처럼 오셨는데 미안하지만 또 와주세요. 저도 쉬이 한번 가 뵙겠습니다.”
뒤를 이어 서선생의 당부였다.
“앞으로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소이다.”
이 처녀의 사죄와 서선생의 당부가 그에게는 과분한 듯이 생각 되어서 주화는 또 바른 대답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
집을 같이 나와 뒷골목에서 서선생과 처녀에게 작별하고 혼자 거리를 걸어 내려오는 주화의 가슴 속에는 아름다운 처녀의 자태가 더한층 빛나기 시작하였고 그의 행동이 처음 만난 서선생의 인상과 아울러 그의 마음속에 굳게 들어붙었던 것이다.
4
[편집]뜨거운 샘물같이 뒤를 이어 솟고 또 솟았다. 그득히 고여서는 양편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붉은 피가 고여 있을 사람의 몸 어느 구석에 맑은 물이 이렇게 많이 고여 있을까 하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으리만치 그것은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어느덧 베고 누운 베개의 양편이 축축이 젖었다. 시력이 흐려져 버린 눈앞에는 고향의 자태가 몽롱이 떠올랐다. 늙은 양친의 자태와 어린 누이동생들의 자태가 번갈아 눈앞을 지나갔다. 그들의 구체적 자태는 눈물로 어지러워진 주화의 시각 앞에서 어느덧 가난한 계급 일반의 늙은 양친, 어린 누이동생들의 추상적 자태로 변하였다가 다시 주화 자신의 양친과 누이동생들의 구체적 자태로 변하였다. 눈을 부르대고 그를 책망하는 공격적 태도가 아니요 빈곤과 쇠약에 쪼들려 단 하나 믿었던 한 사람의 자식이요 한 사람의 오빠인 주화 자신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는 가련한 그들의 자태이므로 그것은 더욱 힘있는 공격이요 그들의 무력한 화살이 주화의 가슴을 더욱 찌르는 것이다.
답답한 가슴을 쥐어뜯으려 할 때에 바른손에 꾸겨 들었던 고향 아버지에게 온 편지의 한 구절이 다시 그의 눈에 띄었다.
“─ 장차 주림이 닥쳐올 날도 앞으로 며칠 남지 않은 듯하다. 이제는 다만 매일과 같이 어린것들과 손잡고 울밖에는 별도리가 없다는 것을 너도 짐작할 줄로 생각한다.……”
단순한 사실의 기록이 기실은 무거운 호소의 쇠공이가 되어서 그의 전신을 내려치는 듯도 하다.
“세상에 가난한 어버이를 가진 것은 너 한 사람뿐이 아니다.”
늘 들어오던 이 경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비색한 처지에 놓이니 그에게는 오히려 가난한 어버이를 가진 것은 그 한 사람뿐인 듯한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사실 몇 해 전부터 벌써 쇠운의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한 그의 집안이 그가 돌아가 보지 못한 여러 해 동안 얼마나 많은 기울어졌을까가 그에게는 아프게 짐작되었다.
그러나 대체 어떻게 하였으면 좋은가. 어떻게 하면 가련한 그의 집안을 건질 수 있을 것인가 ─ 를 생각하면 다만 눈앞이 캄캄하여질 뿐이다.
캄캄하여지는 눈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솟아 흘렀다. 흐르는 눈물 사이로 집안 식구들의 자태가 다시 한 사람 한 사람씩 희미하게 떠올랐다. 헐벗은 누이동생들의 이름을 하나씩 하나씩 불러보고 싶은 충동을 그는 느꼈다.
오래간만에 ─ 며칠 전 그가 죽음을 꾀하였을 때에도 집안에 대한 걱정과 절망적 염려가 그의 의식 속에 잠재하여 있지 않은 바는 아니었으나 ─ 끊어졌던 아버지의 편지를 문득 받으니 집안에 대한 걱정이 새로이 그의 말랐던 눈물을 푹 짜냈던 것이다.
돌연히 고요한 그의 방문을 노크하는 가는 소리가 그의 귀를 스치지 않았던들 진종일 흐르는 그의 눈물은 어느 때까지나 그칠 바를 몰랐을 것이다.
벌떡 일어나서 눈물을 씻고 문을 여니 의외의 손님임에 그는 먼저 놀랐다.
“참으로 뜻밖입니다.”
“돌연히 찾아올 일이 있어서요 ─.”
양기로운 미소를 띠우며 돌아오는 손님의 명랑한 표정을 주화는 이때까지 침울한 눈물을 흘리면서 누웠던 그 자신의 어지러운 표정으로 대하기가 부끄러워 얼굴을 정면으로 들기조차 주저되었다.
“대단히 어지럽습니다.”
방도 어지럽거니와 그의 주제도 어지러워서 그는 이렇게 변명하면서 얼굴을 돌려 버렸다.
그러나 손님은 그의 표정을 날쌔게 살핀 듯하였다.
“너무 침울하게만 지내실 때가 아니지요.”
좀 지나친 충고였지만 지나친 것으로 주화에게는 그것이 더욱 친밀한 느낌을 가지고 고맙게 들렸다. 주화가 그를 만나는 것은 이것이 단 세 번째임에 지나지 않았으나 주화의 어느 모를 관찰하고서인지 이렇게 믿음직한 말을 던져 주는 것이 일전의 그의 행동과 아울러 주화에게는 말 할 수 없이 고맙게 들렸다.
“지금 시절에 있어서 개인적 형편이 딱하지 않은 사람이 어데 있겠어요.─”
친절한 손님 ─ 주남죽 ─ 은 주화의 괴로운 형편의 내용까지 짐작하였는지 한층 친절한 어조로 그를 위로하며 말을 이었다.
“─ 한 개인의 난관으로나 가정의 형편으로나, 혹은 기타 여러 가지의 계루로 인한 번민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야 없겠지요. 그러나 한 걸음 나가 그런 번민을 떨쳐버리고 ─.”
그에게 대하여서는 계몽적 언사에 지나지 않으나 남죽의 친밀한 충고이므로 그것은 주화에게 같지않게 들리지는 않고 도리어 고맙게 생각되었다.
“집안 형편이 하도 딱해서요.”
“그러니까 더욱 용기를 내셔서 나서야지요.”
“─ 작정은 벌써 하였으나 간간이 마음이 침울하여지는 것은 어쩔 수 없어요.”
“든든한 신념으로 그것을 극복해 가야지요.”
알 맺힌 말을 주화는 속으로 은근히 기뻐하는 한편 감사히 여겼다.
“마음이 침울하신 것은 아마 일이 없는 까닭이겠지요.”
“그런지도 모르지요.”
“그러면 일을 좀 맡으세요. ─ 사실 오늘 이렇게 돌연히 찾아온 것은 친한 부탁이 있어선데요.”
“무슨 부탁입니까.”
“들어주시겠어요. ─ ”
무거운 시선으로 주화의 안색을 깊이 살피며 그는 가져왔던 책보를 조심스럽게 풀기 시작하였다.
근 오백 매나 될까. 도련이 단정한 반지판대(半紙版大)의 종이뭉치가 나왔다.
그것을 들어서 주화의 앞에 내놓았다.
“이것을 좀 처치해 주셔야겠는데요.”
“…………”
좁은 지면에서 진한 먹 냄새가 신선하게 흘러왔다. 굵고 작은 활자의 나열과 그것이 가져오는 의미가 그의 시각을 쏘았다. 순간 박하를 마신 듯한 짜릿한 느낌을 받았다. ─ 항상 이지러진 문자와 말살된 구절에 익어온 그의 시선이 이제 이렇게 처음으로 자유롭고 신선하고 완전한 문자를 대하니 찬란한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낱낱의 명사와 동사와 형용사에서 박하의 신선미가 흘러왔던 것이다.
“전일의 것과 성질은 비슷한 것예요.”
“그날 밤 것 말씀이지요.”
입으로 물을 뿐이요 주화의 시선은 지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감동에 타는 시선이 그것을 한 줄 한 줄 탐스럽게 훑어 내려갔다.
“손이 부족하기에 할 수 없이 주화씨에게까지 청을 왔어요.”
“고맙습니다.”
하고 감사하기보다도 먼저 그런 일은 처음 당하는 터이라 주화는 가슴이 움칫하여짐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그를 신뢰하여 주는 것이 그에게는 끔찍이도 기쁘고 고맙게 생각되었다. 그들 자신 주화를 예민히 관찰하여 믿음직한 점을 발견한 탓도 탓이겠지만 전일 정동고개에서 그를 처음으로 만나던 때부터 그 후 그를 찾아갔을 때에 서선생과 같이 그를 친하게 대하여 주던 일이며, 또 오늘 이렇게 친히 찾아와서 중한 일을 맡기는 것이며─ 이렇게까지 그를 믿어 주는 것이 주화에게는 말할 수 없이 고마웠다.
그 고마운 마음에 무거운 임무에 대한 염려와 불안을 차버리고 주화의 가슴에는 대담한 감격이 솟아올랐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단연한 결정을 준 것은 다만 이 대담한 감격뿐이 아니요 그의 마음속에 깊이 숨은 무거운 양심의 채찍이었으나 하여간 그는 돌아온 이 첫 책임을 기쁘게 승낙하였던 것이다. ─
“맡어 보지요!”
듬직한 그의 승낙에 남죽은 무거운 미소를 던지며 감사를 표하였다. 어글어글한 두 눈 ─ 정동고개에서부터 그에게 깊은 인상을 준 그 두 눈이 기름진 윤택을 띠우고 주화를 듬짓이 바라보았다. 아까의 수심과 눈물을 완전히 잊은 주화의 두 눈이 역시 감격에 빛나며 ‘동지’의 시선의 일직선상을 같이 더듬었다.
“오늘밤에 꼭 처치해 주세요.”
“하지요!”
그날 밤이 깊어 가기를 기다렸다가 주화는 드디어 그 일을 하여 버렸다.
예측치 아니한 열정이 솟아오름을 느꼈다.
맡은 구역은 넓고 달빛은 지나쳐 밝았다. 달빛에 끌리는 그림자를 귀찮게 여겨 빌딩 옆으로 바싹 붙어 긴 거리를 달았다. 날도 쌀쌀은 하였지만 첫 경험이라 가슴과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러나 장장을 알뜰히 붙이고 널어놓으면서 긴 거리를 훑어 달으니 전신에는 진땀에 빠지게 흘러내렸다.
가끔 뒤를 돌려다 보면 일해 놓은 뒷자리를 살펴볼 여유조차 없도록 마음과 손이 바빴다.
일을 다 마친 것은 거의 삼경을 넘은 뒤였을까.
고요히 잠든 거리를 바쁜 걸음으로 달려서 집에 돌아왔을 때에 겨우 안심의 숨이 길게 새어나왔다.
5
[편집]이튿날 오후 주화는 공장의 파업시간을 대중하여 남죽을 집으로 찾았다.
지난 밤 맡은 임무의 자취 고운 성과를 보고도 할 겸, 또 다른 그 무슨 소리도 들을 겸.
그러나 공장에서 나올 시간이 훨씬 지났을 터인데도 남죽의 자태는 보이지 않고 전일과 같이 그의 동생이 그를 맞을 뿐이었다.
그 동생의 자태에도 전일과 같이 기뻐하는 기색은 없고 만면 침울한 기색이 돌고 있음이 주화에게는 이상스럽게 생각되었다.
방에서 혼자 울고 있는 듯한 침울한 기색 ─ 아니 두 볼에는 확실히 눈물 흔적이 고여 있음을 주화는 발견하였다.
“왜 울었소?”
“끌려갔어요.”
“응?”
“이른 새벽에 몰려들 와서 언니를 끌고 갔어요 ─ ”
주화는 가슴이 뭉큿하였다. “아차!” 하는 때늦은 탄식이 입을 새어나왔다.
누이동생은 노여운 구조로 말을 이었다.
“─ 저도 같이 끌려가서 종일 부다끼다가 이제야 겨우 나온 길예요. ─ 언니는 언제 나올는지도 모르지요.”
“무슨 일입니까.”
“아마 어젯밤 ×문 사건인가봐요.”
“호 ─ .”
그러려니 짐작은 하였지만 이런 변을 당하고 보니 주화는 가슴이 내려앉으며 감정이 요동하였다.
“새벽에 들어가니 서선생님도 어느결엔지 벌써 와 계시더군요.”
“호 ─ .”
“일은 심상치 않은가 봐요.”
주화의 불안은 더하여 갔다.
“─ 그다지 고생이나 하지 않았소.”
“간단히 취조만 하더니 내보내더군요. ─ 저야 그까짓 하루 동안이니 고생이라고 할 것이 있나요. 그러나 언니들은 아마도 좀 고생할 것 같애요.”
“너무 걱정 마시오.”
그러나 이렇게 위로하여 주던 주화 자신 그들의 신변이 매우 걱정되었다.
우두커니 침울한 기색에 빠져 있던 소녀는 별안간 정신을 가다듬고 주화를 바라보았다.
“참, 얼른 가세요!”
“에?”
“여기에 오래 계시지 말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세요.”
“왜 ─ 왜요?”
“이곳은 위험지대예요. ─ ”
소녀는 황급한 구조로 설명하였다.
“아마 이 근처를 샅샅이 뒤지고 우리 집은 며칠 동안 감시할 것이예요.─ 아까 제가 서를 나올 때에도 오늘 우리 집에 오는 사람의 이름을 일일이 적어 두라고 같지않은 부탁을 하더군요. ─ 이따쯤은 우리 집에다 ‘하리꼬미’ 의 감시망을 베풀 것예요. 그러니 대단히 위험해요. ─ 속히 이곳을 떠나시는 것이 좋아요.……”
주화는 소녀의 충고를 요연히 양해하였다. 임박하여 있는 그 자신의 위험을 깨닫고 전신이 긴장되었다.
“가겠소.”
“언니가 나오시면 일러드리겠으니 그때까지는 찾아오지 않으시는 것이 유리할 것 같애요.”
“알았소. ─ 고맙소.”
소녀의 건재를 빌고 주화는 그곳을 떠났다.
별안간 골목쟁이에서 쑥 내달아 붙잡지나 않을까를 염려하여 빠른 걸음으로 골목 골목을 빠져서 화동거리에 나섰을 때에 그는 약간 침착한 의식을 회복하였다.
자신의 신변의 위험과 남죽들에게 대한 걱정으로 인하여 어수선한 그의 머리 속에는 지난 밤의 그의 행동에 대한 사상이 이제 가달가달 풀려나왔다.
지난 밤의 사소한 그의 행동에 대하여 물론 ‘영웅적’자랑을 느끼는 바는 아니었으나 자취 맑게 행한 그의 첫 임무에 대하여서 그는 일종의 기쁨과 쾌감을 느끼지 아니치 못하였다. 거대한 기개의 중추에는 참례치 못하였다 할지라도 그의 행동이 그 복잡한 작용 속의 한 조그만 나사의 작용은 되리라고 생각하매 흔연한 쾌감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 대한 남죽의 신뢰를 감사히 여기는 동시에 그들의 엄숙한 영토 안에 이미 한 걸음 완전히 들어선 듯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날이 얕고 경력이 적은 그로서, 물론 그 느낌은 지나친 자부(自負)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 영토 안에 들어설 줄은 잡은 것이요, 또 그가 그것을 애쓰는 것만은 사실임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한 여자를 줄로 하여 그 줄을 더듬어서 엄숙한 세상 속에 들어가고 있는 현재의 과정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처녀를 처음 만났을 때에 그의 마음속에 비치인 처녀의 뜻은 다만 그가 한 사람의 일꾼이라는 뜻과는 다른 것이었고 지금까지도 역시 그의 심정 속에 비치는 처녀의 인상과 인격 속에는 일면 그러한 뜻이 흘러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러나 주화가 지금의 그의 과정에 이른 것은 다만 ‘그러한 뜻’의 시킨 바 뿐이 아니라 그 배후에는 실로 그 자신의 잠을 깨인 양심과 명령과 지도가 엄연히 서 있던 것이다. 즉 말하자면 잠을 깨인 그의 양심이 처녀의 울리는 종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났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양심의 불에 처녀가 기름을 부었던 것이다.
“여기에 ─ .”
그의 ‘서곡’이 있고 생애의 출발이 시작되었다고 주화는 생각하였다.
‘서곡’에는 여러 가지의 음조가 있을 것이다. 그 여러 가지의 음조 속에서 주화의 경우와 같은 것도 확실히 그 음조의 한 가지의 양식(樣式)이리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현재의 그의 심경과 수일 전 자살을 계획하던 때의 심경과의 사이에는 얼마나한 큰 변천과 차이가 있는가. 그 소양지판의 변천을 생각할 때에 그는 처녀의 공덕을 크다고 아니할 수 없으며 그에게 대한 애착과 감사를 깊이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화동길을 걸어 내려가 넓은 거리에 나선 주화의 머리 속에는 남죽에게 대한 걱정이 서리어 오르며 동시에 그이 앞에는 앞으로 닥쳐올 괴롬과 위험의 험한 길이 구불구불 내다보임을 깨달았다.
저무는 서편 하늘 일대는 때아닌 노을이 뱉어놓은 붉은 피에 젖어 있었다.
붉은 피 속으로는 무거운 해가 몰락을 섭섭히 여기어 최후의 일순을 주저하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뻔히 결정된 마지막 운명을 게두덜거리며 다투고 있는 해의 꼴이 주화의 눈에는 흉측스럽게 비취었다.
내일의 여명은 찬란히 빛나리라! ─ 1월 7일 기(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