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묻은 편지 몇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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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馬山)에 온 지도 벌써 두 주일이 넘었습니다. 서울서 마산을 동경할 적에는 얼마나 아름다운 마산이었는지요!

그러난 이 마산에 딱 와서 보니까 동경할 적에 그 아름다운 마산은 아니요, 환멸과 섬섬함을 주는 쓸쓸한 마산이었나이다. 나는 남들이 두고두고 몇 번씩 되짚어 말하여 온 조선 사람의 쇠퇴라든지 우리의 몰락을 일일이 들어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조선 안에서 다소간이라도 여행해 본 사람이 보고 느낀 바를 나도 보고 느끼었다 하면 더할 말이 없을 듯합니다.

병의 차도는 아직 같아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열도가 오르내리는 것이나 피를 뱉는 것은 전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날마다 아침이나 저녁으로 산보를 하는 것이 나의 일과입니다. 친구도 없고 아는 사람도 별로이 없는 이곳은 나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유쾌히 하여 주는 이가 없습니다. 도리어 고적함과 답답함은 차디찬 얼음으로 나의 생명을 저려놓는 듯할 뿐입니다. 형님이 소개하여 주신 이군(李君)은 날마다 한 번씩 찾아와 줍니다. 어떤 날은 함께 바닷가로 산보도 나가는 일이 있고, 어떤 때는 저녁 늦게 같이 놀다가 자고 가는 날도 있습니다. 그는 나에게 퍽 친절히 하여 줍니다. 무엇이든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하여 줍니다. 어떠한 때는 거짓말이나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하게까지 그는 열정적이요, 진실하고 충실하게 나의 일을 보아줍니다. 만일 그가 없었다 하면 나는 당장에 서울로 뛰어갔을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병은 일조일석에 낫지 않을 것을 저는 압니다. 이 병이 멀지 않은 장래에 나의 생명을 빼앗지나 않을까 하는 의구의 생각까지 나는 때가 있습니다.

베개를 베고 눈을 감고 누웠을 때 온 세상이 죽은 듯이 고요하면 나는 무서운 생각이 납니다. 세상이 아니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어디로 오지나 아니하였나 하는 무서운 생각이 나서 나는 미친 사람 모양으로 눈을 뜨고 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봅니다.

어떠한 때는 무덤 속에 편안히 누웠으면 나의 해골을 덮어 논 흙과 돌 틈에서 흐르는 나의 살 썩은 물흐르는 소리를 듣는 듯하기도 하고, 나의 살을 먹고 피를 먹고, 또 골수를 씹어 먹은 벌레들의 두리번두리번 하는 인광(燐光)같은 눈알도 보이는 듯한 때도 있습니다.

꿈은 많습니다. 꿈이 만일 어떠한 숙명을 예시한다 하면 나의 운명은 장차 그렇게 복잡다단할 수가 없을 터이지요. 그러나 이상한 것은 흉한 꿈을 꿀 때에는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는데 상서로운 꿈을 꿀 때에는 마음이 섭섭합니다.

어떻든 신경이 뾰족할 대로 뾰족하여져서 과민하게 활동을 할 때에는 나 자신도 나 자신을 걱정하게 되는 때도 많습니다.

마산의 바다는 좋습니다. 바다의 공기를 마시고 그것을 내뿜을 때는 마치 바다를 삼켰다가 배앝는 듯한 때가 있습니다. 구마산(舊馬山) 지저분한 부두에 섰을 때라도 바다를 내다 볼 때, 멀리서 흰 돛을 단 배가 유리 같은 바다 위로 미끄러져 갈 때에는 돛대 끝에 내 맘 한 끝을 매고 한없이 먼 나라로 나의 마음을 끌어가는 듯합니다.

오늘은 일기가 좋은 데다가 마침 일요일이라고 이군과 함께 신마산(新馬山) 구경을 가기로 하였습니다. 나에게 일요일이 별달리 있겠습니까마는 사람의 관념이라는 것은 이상한 것이 되어서 어쩐지 일요일이 되면 마음이 풀어집니다.

신마산은 일본 사람의 시가입니다. 깨끗하고 한적한 시가입니다. 우리는 정거장 뒤의 방축 위에 앉아서 발밑에 와서 부딪쳤다가 깨어지는 물결도 보고 공중에 산같이 모였다가 사라져 없어지는 구름도 쳐다보았습니다.

마산만 중앙에 배같이 떠 있는 돛섬을 돌아드는 고깃배도 좋거니와 꼬리를 내젓는 듯 연기를 토하고 멀리 가는 기선도 마음을 끕니다.

바람도 없고 물결도 없습니다. 바다가 아니요 호수 같은 마산만의 푸른 물은 마치 어떠한 그릇에 왜청을 풀어서 하나 가득 담은 듯이 묵직하고 진합니다. 그 위로 사람이 굴러도 빠지지도 않고 거칠 것도 없을 듯이 잔잔하고 평탄합니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정열과 단꿈을 향기에 섞어 가져오는 것 같습니다. 피로하던 몸과 새침하여진 정신은 다시 산 듯이 뜨거움이 가슴에서 돌고 광채가 눈에서 돌아 손 내밀어 잡을 듯한 곳에 행복이 온 것 같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래 위에 눕기도 하였습니다. 휘파람도 불었습니다. 노래도 하여 보았습니다. 그리고 과자도 맛있게 먹었습니다.

내가 머리를 두 손 깍지 위에 얹어 놓고 공중을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구인지 나의 머리 바로 곁으로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본시 길이 좁은데 아무리 사람이 적은 바닷가라도 길을 가로질러 누운 것이 잘못이지마는 지나가던 사람의 구두는 나의 머리를 건드렸습니다.

가뜩이나 흥분하기 쉬운 나의 감정은 마치 전기같이 타올랐습니다. 마치 머리를 그 사람에게 짓밟힌 것 같이 모욕을 깨닫는 동시 그자의 삼갈성 없는 것을 분개하였습니다.

나는 살같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나의 머리를 모욕한 자를 흘겨보았습니다. 옆에 누웠던 이군은 고개만 들고 그자를 바라보았습니다.

그자라는 사람은 남자가 아니요 여자였습니다. 여자라 하여도 나의 생각으로는 그런 여자가 이런 곳에 있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할 만한 아름다운 여자이었습니다.

새로이 유행하는 머리를 틀었으나 조금도 난해 보이는 곳이 없고, 옷은 아래위로 다른 투피스로 나누어 입었는데 조금도 어색하거나 서투른 곳이 없어 온몸의 윤곽을 잘 나타내었는데, 걸음을 걸을 적마다 두 발자국이 땅을 단단히 밟았다가 뗄 때에 그의 온몸에는 침착한 기운이 무거운 구리 동상이 걸어 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 여자가 나의 머리를 찼다는 것이 얼마나 경솔한 일이읍습니까? 그렇게 침착한 여자로서 남의 머리를 찬다는 것은 나로서는 생각지 못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그럴 것이, 우리의 누워 있는 곳은 사람 하나가 다닐락 말락 한 길인 것을 가로질러 누운 데다가, 또 나의 단장이 풀 위에 놓여 있었으므로 그 여자는 나를 피하여 나의 머리맡 철망한 울타리를 피해 간다는 것이 내 옆에 가로놓여 있는 단장에 걸키며 그 바람에 걷잡을 새 없이 한 발로 나의 머리를 찼던 것입니다.

그때 나의 얼굴을 지금 내가 추상하더라도 얼마나 신경질적이었으며 무서웠으며 두 눈에는 불같이 타는 듯한 예리한 광채로 그 여자를 흘겨보았을는지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그 여자는 미안한 중에도 어쩔 줄을 모르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예를 하며,

『아, 실례하였습니다.』

하고 그는 가지도 않고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마치 나의 입에서 당신의 잘못을 용서합니다, 하는 말을 기다리는 것 같이.

그 순간에는 나도 말이 없고 또 이군도 말이 없었습니다.

만일 상대가 여자가 아니고 남자이었더면 혹시 우리의 입에서 무슨 군소리라도 한 마디 나왔을는지 알 수 없었겠지마는 그가 여자인 까닭에 우리는 아무 말도 없었다는 것을 여기서 정직하게 말씀하여 둡니다. 그것이 여자를 한층 아래로 보아서 쉽사리 용서하는 마음으로 그리하였든지, 양키들 모양으로 여자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리하였든지, 그것이 여자의 자랑거리든지 남자의 약점이든지 그것을 여기서 해석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의 눈! 미안과 사죄로 찬 눈. 그 눈이 나의 얼굴을 볼 때, 나는 제육감(第六感)으로써 그 여자의 순진한 마음속을 본 것 같았습니다.

더구나 자기 혼자가 아니요, 자기 뒤를 따라오던 동무를 보면서,

「어떻게 하면 좋으냐?」

하는 듯이 멈칫멈칫할 때 나는 더 말할 말을 갖지 않았습니다.

『천만의 말씀을 다 하십니다!』

하고 도리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같이 있던 이군은 그 여자를 보더니, 마치 안면은 있으나 인사가 없는 사람을 어떠한 특수한 곳에서 만난 것 모양으로 일어나 앉아서 목례하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여자들은 지나갔습니다.

그 여자의 뒷그림자를 볼 때, 그의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찰랑찰랑 구두 위에서 울렁대는 치맛자락이 나의 마음을 공연히 흔들어 놓고 다시 어디로인지 저 가는 데로 끌고 가는 듯하였습니다.

그가 저쪽 창고 뒤로 돌아서 그림자까지 사라졌을 때 나는 이군을 보고,

『그게 누구야?』

하고 물었습니다.

『누구? 마산서는 일류가는 미인일세.』

『저 여자가!』

『그래.』

미인이란 말이 나에게 무슨 새삼스러운 울림을 주는 것은 없었습니다마는 어떻든 흔히 볼 수 없는 침착한 여자, 영리한 여자, 또는 차디찬 여자라는 것을 느낄 때, 나는 마음은 잔잔한 파도에 진주 한 알을 떨어뜨린 것 같이 가늘게 떠는 파문이 일어났습니다.

『집이 어딘데?』

나는 그를 어떤 집 부인이 아니면 서울서 동무의 집에 다니러 온 신가정의 주부(主婦)로 본 것이 맨 처음 인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군의 말을 나는 듣기는 하면서 믿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군은 몹시 재미있고 다변이요 잔친구이어서 어떤 편으로 경망한 폐단까지 없지 않으므로 나로서는 어찌 말을 건져 듣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을 들어 나의판단을 내리는 것이 매사의 첩경이므로 나는 그의 하고자 하는 말을 듣는 것보다도 나의 듣고 싶은 말만 들었습니다.

『집은 구마산야.』

『누구 아낸가?』

『아내? 아내가 뭐야? 여태 처년데.』

『나이는 몇인데? 무엇을 해?』

『나이는 아마 스물 셋인지 둘인지. ○○학교 교원이야.』

『고향은 어디고?』

『서울서 와 있어.』

『서울? 이름은?』

『장영옥.』

서울이라는 말이 나에게 다소간에 그리운 마음을 낳게 하였습니다.

이군과 앉아서 쓸데없는 농담과 잡담을 하고 집으로 향하여 들어올 때 이 군은 나에게,

『나 같은 사람으로서는 감히 말도 해보지 못할 여자지』

하는 말에는 무서운 단념 가운데에도 떨어지지 않는 애착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나도 속으로 너의 마음을 알았다 하면서 일부러,

『어째서?』

하고 물었습니다. 그런즉 이군은 자기의 마음이 나에게 알아채어지지나 아니하였나 하고 슬쩍 아까 말을 흐리마리하여 버리는 수작으로,

『나 같은 자에게 그런 행복이 닥쳐올 리가 있을 리가 만무하니까 말이지.』

『하지만 이군이 너무 얼핏 단념을 하는 것은 그만큼 이군이 그 여자를 생각하는 도수(度數)가 얕은 증거가 아닐까?』

『글쎄. 혹 그렇게 해석될는지는 모르지마는 단념을 하면 단념하는 도수만큼 그 사랑이 반동적으로 고조되는 일이 없지도 않으니까.』

얼마나 불쌍한 말입니까? 그의 말소리까지 불쌍하였습니다. 그의 가슴 속에는 그만큼 고조되어 가는 남모를 고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침울한 날입니다. 비가 올 듯합니다. 여름이 되어서 그러한지 침중한 공기가 약한 가슴을 누릅니다. 가슴이 답답하여 숨이 막힐 것 같습니다.

하늘에는 누더기에서 꿰져 나온 솜 같이 보기도 싫은 검은 구름장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무슨 물형(物形)이 되었다가 그것이 때때로 변할 때에 나의 눈에는 무서운 환상이 어른어른하는 듯하여 하늘을 쳐다보기도 싫습니다.

이군도 아직 오지 아니하고 나 홀로 앉아 있을 때, 공연히 마음이 처량하여지며 세상이 좁아지는 듯합니다. 오늘도 아침에 서너 번이나 피묻은 담을 뱉았습니다. 몸에서 한 방울 두 방울씩 새빨간 피가 샐 적마다 저의 눈앞에는 무서운 죽음이 보이며 다만 낙망이 되어서 가뜩이나 약한 몸에 마음까지 점점 약하여 가니 이제는 더 살 수가 없을 것 같을 뿐입니다.

사람은 입으로는 만 번이나 죽어죽어를 말하지마는 참으로 죽음이 딱 당할때에는 무서움과 지나간 과거의 그리운 회상과 생의 집착이 점점 강하여 지는 것이지요. 나도 이와 같은 날 외로이 있어서 손을 가슴 위에 얹고서 힘없이 팔딱대는 심장의 고동을 들을 때에는 앞을 가리는 것이 절망의 그림자뿐이어서 부질없이 애상(哀傷)의 깊은 곳으로 빠질 따름입니다.

몸이 약하매 정신이 또한 건전치 못하여 매사에 취미를 잃어버리고 흥을 느끼지 못하니만치 나의 생명에는 아무 빛(色)도 없고 하모니도 없이 다만 시들어지는 꽃과도 같고 줄 끊어진 악기(樂器)와도 같을 따름입니다.

아무리 생각을 하여 보아도, 향내와 빛을 잃어버린 꽃은 그것을 뿌리와 줄기와 잎사귀를 살려야 다시 향기와 빛을 회복할 수 있으며, 하모니를 잃어버린 악기는 복판을 고르게 하고 그 줄을 가지런히 하여야 다시 소리를 얻을 수가 있는 것 같이, 나의 침체한 정신이며 광채와 시흥이며 법열을 잃어버린 정신은, 나의 육체의 피를 고르게 하고 신경을 든든히 해야만 다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든 꽃에 나비가 온다 하면 그 나빈들 불쌍히 여길지언정 어찌 머무를 마음이 나며, 다 깨어진 악기를 훌륭한 음악가의 손에 준다 하더라도 그 음악가는 자기의 재주를 붙일 곳이 없음을 개탄할 따름일까 합니다.

형님! 나는 지금 몹시 비관하는 중에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무엇에게도 이 말할 수 없는 슬픈 마음을 호소해야 좋을지 모릅니다. 말을 한다 한들 들어 줄 사람이 없을 것이며, 호소한들 그 호소가 무슨 힘을 나에게 주겠습니까?

다만 사형 일자를 기다리는 죄수와 같이 나의 눈앞은 죽음이라는 검은 그림자로 덮는 때만 기다릴 수밖에 없지요? 아아! 그러나 그렇게 참혹한 일이 어찌 사람으로 아니라 어찌 나로서 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나는 어떤 때는 얼핏 죽자! 하루라도 일찍 죽자! 한때라도 이 괴로운 세상에서 떠나가자! 하고 의사에게서 얻어 가지고 온 약을 내던져 버리고 일부러 먹지 않는 때도 있었으며 공연히 몸을 함부로 군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서운 삶의 집착은 다시 무서운 회한과 함께 마음을 가라앉히고 약을 입에 넣게 하였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동생들을 생각하고, 옛날에 놀던 즐거운 벗들을 생각하면 어디 숨어 있었던지 뜨거운 정열이 가슴을 싸고 돌아 나 혼자 감격에 흐르는 눈물이 옷깃을 적십니다.

옛날의 어머니 무릎이 새삼스럽게 그리우며, 아버지의 은근하신 사랑이 더욱 힘있게 그윽하며, 동생들의 철없고 순결한 얼굴이 옹기종기 내 눈앞에 보입니다.

아, 이것을 잊어버리고 그것을 내버리고 어찌 날더러 하나님이 세상에서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실 리가 있습니까? 그것이 거짓말이라 하면 이보다 더 큰 거짓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라가 침체된 때, 그 나라의 모든 문명이 쇠퇴하였을 때 어찌 예술 하나만 찬란한 광채를 내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심신이 아울러 쇠패하여 가는 나로서 무슨 사랑을 향락(享樂)할 수가 있겠습니까?

전에 말씀하였지마는 신마산 방축 위에서 그의 발끝으로 나의 머리를 건드린 여성을 나는 지금껏 잊지 않습니다.

목이 마를 적에 더욱 물이 그리우며, 나라가 망할 적에 더욱 지사나 영웅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지금 이렇게 외롭게 있으매 더욱 마음 맞는 친구와 위로해 줄 애인이 그립습니다.

그러면 어찌 여성이 그 여자뿐이겠습니까마는 한 번 나의 마음 거울에 비쳤던 그림자는 웬일인지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떤 때 몹시 외로운 때, 그의 생각을 끌어내어 혼자 공상에 취하였을 때야말로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또 어떤 때, 혼자 나의 무모한 헛된 공상을 나 스스로 비웃을 때에는 나 자신은 더욱더욱 비애와 환멸로 자기의 도수가 더하여 갈 뿐입니다.

나는 그를 생각하면서 울었습니다. 그를 언제 내가 보았으며 내가 언제 그를 알았겠습니까마는 나의 마음은 그때 방축 위에서 나의 마음에 일으켜 준 파동과 함께 그의 치맛자락이 울렁대는 대로 끌고간 채 지금까지 돌려보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언제든지 빈 듯하여, 마치 봄철에 노곤한 양지쪽 밑에서 멀리멀리 산너머 가는 계집애의 피리소리를 듣는 것 같이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처량하고 슬플 따름입니다.

만일 이것이 사랑이라 하면 나는 영원한 불행을 스스로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지금 나의 모든 것이 과연 꽃답고 향기나고 하모니가 있는 아름다운 사랑을 나에게 허락하겠느냐 하면 그것은 전에도 말씀하였지마는 되지 않을 말입니다.

만일 나의 생명이 기적적으로 오래 계속되어 그것이 건전한 생명이 되는 때가 있다고 하면 그때에는 혹시 사랑을, 행복스러운 사랑을 향락할 수가 있을는지 모르지마는, 지금 같은 형편으로는 결코 사랑을 할 수가 없을 것 입니다. 즉 몰락한 사회에 예술의 꽃이 피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겠지요. 사랑을 단념하자! 생명에서 윤택과 끈적끈적한 맛과 향기를 불살라 버리자!

어찌 무서운 말이 아닙니까? 그러나 나는 날마다 군밤 장수의 소리같이 이 말을 혼자 외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그렇게 외지를 말고 죽자! 어서 죽자! 하는 것이 도리어 나을는지 나는 알 수가 없습니다.

평범한 날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평범한 날을 살아왔습니다. 이 세상 어떠한 사람이든지 똑같이 살아온 평범한 날이었습니다.

아무리 천재라도 이 평범한 날을 아니 살아올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은 평범한 것에서 평범지 않은 것이 숨이 있는 것을 찾아내며, 또는 평범하던 것을 평범치 않게 만드는 예지와 투철한 힘을 가졌습니다.

불행히 천재가 못되는 나에게 이러한 평범한 날을 주었다는 것은 너무 심심하고 답답하여 자기 자신을 씹어 먹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전까지는 더할 수 없이 평범한 날이었습니다마는 오후에 내가 해안 산보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그것이 그리 평범하지 않던 날이었던 것을 지금 이 편지를 쓰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간이 지나간 지 여러 날 여러 달 혹은 여러 해만에 비로소 다시 의미가 있게 되는 일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오늘 오후는 이상한 찬스를 우연한 가운데 나에게 만들어 주어 그것이 한 가지 기적 같은 사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마침 자리를 펴고(대낮이지마는 몸이 불편하면 언제든지 자리 펴는 습관이 있습니다) 막 누워서 신문을 뒤적일 때 누구인지 밖에서 나를 찾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상스러운 맘으로 바깥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는 주인의 인도로 내 앞에 와서 모자를 벗었습니다.

나는 혹시 다른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에게 목례를 하여 그의 예에 답례를 하고,

『누구를 찾으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런즉 그 젊은이는 똑똑한 어조로,

『○○씨십니까?』

하고 나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생면부지의 젊은 사람이 나를 찾으므로 혹시 잘못 알고 그러는 것이나 아닌가 하고 의아한 생각이 났었으나 나의 이름을 똑똑히 부르는 것을 보고 다시 호기심이 나면서,

『네, 그렇습니다.』

한즉 그 젊은 사람은 반가운 듯이 다시 말소리에 힘을 주어서,

『네 그러세요?』

하며 주머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 주었습니다.

나는 편지를 받아들고 그를 방안으로 들어오기를 권한 후에 피봉을 뜯어 보니까 그 편지 내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서울 있는 박군(朴君)의 소개장인데, 자기의 친구인 장군(張君)을 나에게 소개한다는 말이며, 장군이 이번에 마산포까지 내려가는데 특별히 나와 사귀고 싶어하는 의향인즉 두터운 교제를 하여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적적히 지내는데 친구 하나라도 얻은 것이 반가운 나는 그를 반가이 생각하고,

「이렇게까지 일부러 찾아 주시는 것은 너무 황송합니다」는 뜻으로 사례를 한 후,

『그럼 유숙하실 데는 따로 정하셨습니까?』

하고 나와 같이 있자고 하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었으나, 나로 말하면 본시 남들이 가까이하기를 꺼리는 터이므로 억지로 말할 수는 없어 그의 의향을 들으려 하였습니다.

『네, 여기 저의 누이가 있으니까 누이 집에 있기로 정하였어요.』

『누님이 계셔요? 무엇을 하시는데요?』

나는 그때에는 그 신마산 방축 위에서 나의 머리를 차던 여자는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학교 교원으로 와 있어요.』

『네?』

나는 평범하게 대답하여 버리려 한즉, 그는 다시 자기 누이가 여기 있는 것을 더욱 힘있게 하려고 그리하였는지, 그렇지 않으면 날더러 알 듯한데 모른다고 하느냐는 듯이,

『장영옥이라구요』

하고 자기 누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나는 그 이름을 듣고서야,

『네에.』

하고 한참이나 네 소리를 길게 잡아 끌면서 장군을 쳐다보았습니다.

『네, 그러세요.』

그러나 뒷말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장군은 자기 누님을 알아 주어서 만족하다는 웃음을 웃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만일 장군이 날더러 어떻게 자기 누님을 알았더냐고 묻거나 친분이 있느냐고 할 것 같으면 나는 무엇이라 대답해야 옳았을는지 알 수 없었을 터이나 그것을 물어 주지 않아서 다행하였습니다.

장군은 몹시 숙성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나이는 스물이 될락말락한 사람이 키는 나보다도 더 크고 몸은 비대하고 골격이 완강하게 생겼고, 또는 그리 묵중하지도 않으나 이군처럼 입이 가볍지도 않은 듯하여 아직 그의 성격이나 재질이나 감정을 쉽게 알아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장군은 잠깐 앉았다가 가 버렸습니다. 간 뒤에 홀로 앉았으매 세상 일이 재미있고 신기한 듯하기도 하고, 또는 장군이라는 의외의 인물이 뛰어들어서 나의 생활에 이상한 기운(機運)을 만들어 주는 것 같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장군이 다녀간 뒤에는 공연히 마음이 어수선하여지며 가라앉지를 않아서 잠도 잘 자지 못하였습니다. 장군을 생각하고 그의 누님을 생각할 때 마음은 공연히 흥분되었습니다.

마산만의 파도는 마치 한꺼번에 몰려들어 마산 시가를 씻어낼 듯이 울렁거리며 출렁대며 노했다가 성냈다가 합니다.

하늘 빛이나 바다 빛이나 똑같이 시꺼멓게 흐려 그것이 저쪽 멀리 수평선 위에서 서로 합하여 하늘이 바다를 누르는지 바다가 하늘을 치받는지 위대한 세력이 그 속에서 움직거릴 뿐입니다.

가슴이 적다 해도 그 파도가 모두 나의 가슴에 몰려들어 그것이 한복판에서 출렁거리는 것 같아서, 무슨 큰 힘이 누르는 것 같기도 하고, 또는 뒤흔들어 내는 것 같기도 합니다.

마치 무슨 큰일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방에 혼자 앉아 있을 때 찾아온 사람은 이군이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의 이야기는 어제 찾아온 장군에게로 옮기며 다시 장영옥에게로 옮기었습니다.

남자들이나 여자들이나 이성(異性)에 대하여는 어째 그런지 몹시 말썽부리기 좋아하는 충동이 있지요. 남자는 여자의 흠점이나 약점을 아무 이해없이 들추어 놓으려 하고, 여자 역시 남자의 단처나 흠점을 말하기 좋아하며, 칭찬들을 하게 되면 끝없이 칭찬을 하였다가 다시 흉보고 욕하러 들면 여지가 없이 해 버립니다.

쉽게 말하면 여자와 남자는 다시 말할 수 없는 원수요, 또다시 말할 수 없는 친구입니다.

즉, 원수인 친구요, 친구인 원시가 되어서 서로 미워하며 따르며 따르면서 미워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무서운 마력이 있어서 욕을 하여도 밉지 않고 얼마든지 붙어 있어도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오늘도 이군과 둘이 다섯 시간 동안이나 여자를 욕도 하여보았다가 칭찬도 하여보았다가 찧고 까불고 하느라고 시간 가는 줄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둘이 저녁을 같이 먹기로 하였을 때, 마침 장군이 찾아왔었습니다.

장군과 이군에게 인사를 시키고 세 사람이 같이 상을 받았을 때 장군은 몹시 미안해 하는 표정으로,

『저녁까지 이렇게 대접을 하시니 고맙습니다마는 퍽 미안합니다. 집에 가면 누님하고 같이 먹을 것을.』

하는 데는 어느 귀퉁인지 아직 어린 곳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 말에 대답을 하고 밥을 다 먹은 뒤에 과일을 서로 벗겨 먹기로 하였습니다.

그때 장군은 사과 하나를 들면서,

『사과와 배를 삼랑진 오다가 두 채롱이나 사 가지고 왔는데요. 누님과 둘이 먹다가 남은 것이 집에 있는데…』

하며 말을 채 못 마쳤습니다. 나는 얼핏 그의 말을 받아서,

『그런 것을 사 오시면 서로 나눠 자실 것이지 남매분이서만 자시오? 남은 것은 먹으러 갈까요?』

하고 농담 비슷 장군에게 가도 괜찮겠느냐는 의향을 물어 보매 장군은 허락한다는 어조로,

『가시지요. 그렇지만 먹던 찌꺼기를 대접할 수야 있나요』 하고 민망해 하는 빛이 보이므로 나는,

『무어 관계찮습니다. 하필 사과만이 맛입니까? 다른 것이라도 한턱만 내시면 그만이지요』

실상 한턱을 받는다는 것보다도 장군의 누님을 만나보려 하는 욕망이 더하였던 것은 그 자리에 앉았던 세 사람이 똑같이 감각하였을 것입니다.

장군은 그 이튿날 오후에 저녁 먹지 말고 자기 집까지 와 주기를 나와 이 군에게 청하였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갈 제 나의 손을 꼭 쥐며,

『꼭 기다립니다. 꼭 오세요.』

하고 자기 집으로 갔습니다. 나 혼자 마루 끝에 섰을 때에는 서쪽 하늘에 닷새쯤 되어 보이는 달이 새파랗게 떠 있었습니다.

네 눈이 한꺼번에 번쩍하였습니다. 이쪽 봉우리에서 저쪽 봉우리로 홱 지나가는 번개가 중간에서 딱 부딪친 것 같았습니다. 장영옥의 눈과 나의 눈이 서로 마주쳤을 때 나는 미리 알아차린 것이 있었지마는 저쪽에서는 뜻밖의 일임에 놀랐던 것인 듯합니다.

『나는 누구시라구?』

그의 눈은 웃었습니다. 신기한 가운데 더욱 친절함을 느끼는 듯하였습니다.

『일전의 잘못은 용서하여 주십시오.』

『천만의 말씀을 다 하십니다.』

할 제 영옥의 말소리는 마치 명주실에 구슬을 꿴 듯이 마디마디가 또렷또렷하게 나왔습니다.

오라비 장군은 어찌 된 일인지를 몰라서 우리 기색만 살피고 있었습니다.

영옥의 얼굴은 조금 창백한 빛을 띤 난형(卵型)이었습니다. 그 위에는 영롱한 두 눈이 별같이 박혀서 그의 재기(才氣)를 여실히 말하고, 그의 오똑한 코는 그의 가슴속에 단단히 뭉친 의지를 나타내며, 조금 크다고 하면 클는지 모르는 입은 얼핏 보아 조금 천한 기운이 있으나, 그의 붉은 입술을 다물 때는 얼굴의 조화는 어디로인지 가리어 버립니다.

그는 얼핏 보기에는 몹시 침착하고 냉정한 듯하여 보이나 실은 의지로써 정열에 탈을 씌워 놓았을 뿐이요, 그의 가슴속 깊이깊이 깊은 구석에서는 뜨거운 정열이 폭발될 때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침착하였다가 갑자기 웃을 때에 강렬한 향기를 발사하는 듯한 그 웃음을 보아서도 알 수 있으며, 시꺼먼 눈동자 깊이깊이 그윽한 속에서 반짝이는 가늘고도 광채나는 안광을 보아서도 알 것입니다.

그날 저는 오래 앉아서 몸이 몹시 거북한 것도 참으면서 그와 이야기도 하고 트럼프도 하며 놀았습니다.

트럼프를 할 때 여자들의 미세한 감정을 잘 찾아낼 수 있는 것을 나는 알았습니다. 여자는 자기 앞에 무조건으로 굴복하는 자가 있을 때 즐거워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러한 노력도 없이 요행의 승리를 얻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자기가 남에게 지는 일이 있거나, 혹은 굴종하지 않아서는 아니되게 될 때 그들은 아무러한 반성도 없이 저주하며 원망합니다. 그것은 우스운 장난에서도 잘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웬일인지 나 한 사람만 지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내가 질 적에는 그는 손뼉을 치며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지고 내가 이기었을 때는 그는 나를 꼬집어 뜯었으면 좋을 듯이 원망하였습니다.

밥들을 먹다가 나는 영옥을 쳐다보았습니다. 흘끔 다시 한 번 쳐다보니까 영옥도 자기를 내가 유심히 보는 데 무슨 의미나 없는가 해서 나를 흘끔 쳐다보며,

『왜 보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우연히 입 밖으로 나온다는 말이 옛사람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얼굴은 여자의 양심이지요. 그 얼굴을 보면은 그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있지요』

하였더니 세 사람은 일제히 웃었습니다. 영옥은 웃는 웃음을 입으로 참으면서,

『그럼 제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말씀해 보세요』

하고 말하기가 부끄러운지, 그야말로 얼굴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운지 고개를 착 숙이고 말을 잘 못하였습니다.

나는 그때 영옥에게,

「당신께서는 지금 성적 번민(性的 煩悶)을 가지고 계십니다」

라고 말하여 버리려 하였으나 입 밖으로 그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가 성적 번민을 가졌다는 것은, 즉 나의 가슴속에 성적 번민이 있으므로 상대방의 여자까지 그렇게 보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러나 나이 스물이 넘어 삼년이 지난 독신 여자가 성적 번민이 없다는 것도 또한 거짓말이라고 하겠지요.

나는 하는 수 없이,

『글쎄요, 지금 말씀할 수는 없는데요.』

하고 웃음을 지은즉 그 여자는 갑자기 무엇을 깨달은 사람처럼 눈을 아래로 깔고 말이 없었습니다.

어떻든 오늘은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오전에는 저녁에 장군 남매를 만나 볼기대로 가슴을 뛰게 하다가 저녁에는 여성에게, 더구나 나의 마음을 빼앗아 간 여성의 향기와 색채 속에 잠기어 꿈같은 시간을 보낸 것이 즐거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일주일이 넘었습니다. 사흘 동안이나 장군이 놀러오지를 아니하였습니다. 나는 장군을 볼 적이면 영옥을 본 것 같이 반가왔습니다. 그에게 지지 않은 애정이 끊어올랐습니다.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저녁을 먹고 이군과 함께 장군을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장군을 찾아가는 것이지마는 그것은 거죽뿐이요, 실상은 장영옥을 보고 싶은 마음에서 저절로 마음에 끌려가는 것이므로 우리는 가면서도 주저하였습니다.

더구나 나의 마음속에서는 이상한 기름불이 차차 타기를 시작하는 까닭에 얼마든지 나는 반성을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젊은 사람은 누구나 갖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나는 남만한 자긍(自矜)을 갖기는 가졌습니다마는, 자포자기하는 마음이 있어서 대담할 때에 대담하지 못하고 용기를 낼 때 용기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장군은 집에 있었습니다. 영옥이도 있었습니다. 영옥은 나를 보더니 들어오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때의 나의 마음은 왜 그리 수줍은지 마치 처녀가 정혼한 남자 앞에 나와 앉은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창을 열어 놓은 바로 그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창이 동쪽으로 향하여 있었으므로 거기 앉아서 내다보면 동남쪽으로 가리어 있는 산 위에서 떠오른 달이 바다 위에 비친 것처럼 보이었습니다. 달은 동에서 그 집 창을 비추고, 그 창 앞에 가지가지로 늘어져 흩날리는 버들가지를 통하여 방안까지 흘러들었습니다. 방에서 바깥을 내다보면 공중에 달린 달이 바로 창 앞 버들가지에 매달려서 버들이 흔들거릴 적마다 그 달도 이리 흔들 저리 흔들 하는 것 같았습니다.

영옥과 우리는 잠깐 앉아 이야기를 하다가 달구경 나가기로 의견이 일치하였습니다.

우리는 다시 신마산 방축 위에서 소요하였습니다.

바닷면에 비친 달빛은 마치 하늘에 달린 달덩이가 바다 밑에 잠겼다가 그것이 다시 방울이 되고 조각이 되어 금진주 은진주같이 반짝거리기도 하고, 다시 하늘을 쳐다보면 그 은진주 금진주가 허공 중천에 다시 승화(昇華)한 듯하기도 하였습니다.

바람도 잔잔하고 물결도 고요하고 사면도 적적하였습니다.

영옥과 나는 나란히 서서 바다를 내다보고 서 있었습니다.

멀리멀리 바다 한복판 금진주가 날뛰는 듯한 물결 위로는 돛대 하나 삿대 하나를 실은 배가 금물결, 은물결을 헤치며 지나갔습니다.

영옥은 내 옆에 서서 정신없이 바다만 내다보더니 또다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세상에 만일 큰 비극이 있다고 하면, 자기의 마음속을 툭 털어 말 못하는 것처럼 큰 비극은 또다시 없을 것이지요?』

그는 갑자기 이 말을 묻고서 나의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그의 몸에서는 여자의 향내가 나의 취각을 흥분시켜 주었습니다.

나는 그 묻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없다는 것보다 섬뜩 가슴이 내려앉았다가 다시 평상시로 회복할 때 그 말 속에 숨긴 영옥의 뜻을 찾아낼 열쇠를 갖지 못한 것이 한(恨)이 되었습니다. 다만 헤매는 생각으로 가슴을 뒤숭숭하게 할 뿐이었습니다.

『그렇겠지요?』

그 말에 힘있는 공명(共鳴)을 갖는다는 듯이 대답을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마음을 알아 주는 이가 없는 것도 비극일 거예요.』

그는 또다시 말 한 마디를 하였습니다. 그것이 나의 귀에 몹시 의미 있게 들리어 다시 그 말대답을 하려 할 세,

『저리로 가시죠』

하고 그는 앞장을 서서 언제 무슨 말을 하였더냐는 듯이 말이 없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맨 처음의 그 자리, 즉 그가 나를 발끝으로 차고 나의 마음을 끌어가던 그 자리에 다다랐습니다.

『여기였죠?』

영옥은 가던 다리를 멈추며 웃는 눈으로 나를 보았습니다. 그의 얼굴에 은빛 같은 달이 비치며, 마치 백합꽃 위에 떨어진 이슬이 반짝거리듯 그의 눈이 반짝거렸습니다.

그때 나는,

「네, 당신이 나의 머리를 차지 않고 나의 마음을 차서 영원히 흔적이 남게 한 곳이 바로 거기였지요」

하고 대답을 하고 싶었습니다. 만일 그때 그 자리에 이군도 없고 장군도 없었더면 그리하였을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는 물론 아닙니다. 다만 나 혼자가 가슴속에 애타는 정을 숨겼다 하면 그것은 정말일는지 모르지마는, 장영옥의 가슴은 내가 사람이요 귀신이 아니매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멀리 마산만 한 귀퉁이에서 임자가 모르는 사랑으로 속을 태우면서 하룻밤을 그 무정한 사람과 재미있게 지내었다는 것만 알아 주십시오. 나의 생명은 짧습니다. 마치 뱃전 위에 켜 놓은 촛불 같을는지 모르지마는, 그러나 그와 같이 불쌍한 사람 가슴 가운데 다만 한때라도 사랑을 깨닫고 그것을 느끼고, 또는 그것을 스스로 혼자 향락하였다 하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오늘은 나 혼자 스스로 장영옥의 집에 놀러갔습니다. 나의 가슴속에서 고조되어 가는 사랑은 그만큼 나를 대담하고 용기 있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영옥은 혼자 있었습니다. 장군은 그 근처 다른 친구들 보러 갔었습니다.

그날 영옥은 나의 얼굴을 보더니,

『무슨 번민이 계십니까? 신색이 아주 못되었으니…』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갑자기 옆에 있는 거울을 보았습니다. 나의 얼굴은 마치 기름먹은 유지에 주황으로 코나 눈이나 입을 그려 놓은 것 같이 핼쓱하고 보기가 싫었습니다.

나는 스스로 책망하였습니다. 「이 꼴을 하고 무엇하러 왔느냐?」고.

사람의 마음은 공통한 것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눈에 미감(美感)을 주는 것은 사랑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물리치는 것은 사실입니다. 더구나 사랑에 들어서 그러하니 사람의 감정은 이론(理論)으로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애인을 가질수록 몸을 든든히 하고 아름답게 하려는 것이 결코 이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다. 나는 풍모가 나 자신까지 낙망시키도록 무섭게 된 것을 보고 몸 편치 않은 것을 핑계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오매 세상이 너무너무 허무한 것 같을 뿐이었습니다.

세상이란 무엇입니까?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만족에 불과하고, 자기가 잘 살자는 데 불과한 것이지요. 나도 남보다 더 힘 있고 뜨거운 생활을 하여보고 싶습니다. 자기의 욕망을 채워 가며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생각한 대로, 뜻한 대로 되지 않습니다.

형님! 왜 나는 어젯저녁에 영옥의 집에서 「무슨 번민이 계시냐」고 물을 적에 나의 마음을 다 이야기하지 못하였을까요? 왜 그렇게 얻기 어려운 기회를 잃어버리었을까요? 그렇습니다. 내가 사랑을 하는 것이 결코 죄악이 아닌 이상 정직하고 떳떳하게 나의 마음을 상대자에게 피력하는 것이 옳은 것 아닙니까? 상대자가 나를 생각하여 주든 아니하여 주든 그것은 그편의 자유이지마는, 나의 사랑을 상대자에게 말하는 것이 조금도 어리석은 일도 아니요, 비열한 일도 아니건만 나로서는 그 말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마음에 혼자 넣고 속태우느니보다 속맘을 말로 하고 끝을 내는 것이 혹은 현대인의 사랑을 구하는 법일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어느 편으로 생각하면 말하지 않는 것이 말한 것보다 오히려 아름다운 곳이 있었을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세월은 너무 쓸쓸하고 단조합니다. 마치 감옥에 들어앉은 것 같아 나의 생활은 단순합니다. 그러니 요사이 며칠은 기침이 심하고 객혈(喀血)이 더하여 몹시 신음하는 중입니다. 피가 가슴속 고통과 함께 떨어질 때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부인(否認)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결코 참다운 「생」이 아니라고.

세상을 부인하고 사랑을 부인하고 나중에는 죽음까지 부인하여 버리려 하다가도 나는 그것 하나는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서운 죽음이 나의 눈 앞에 있어 나를 누르고 위협하고 끌어 잡아당기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병상에 누워서 생각한 것이 있었습니다.

나도 지금까지의 모든 생을 단념하는 동시에 장영옥에게 가는 사랑까지 단념하자고.

사랑을 합니다. 그 사랑은 반드시 완전한 결심을 요구합니다. 행복을 추구합니다.

옛날 사람이 쓴 소설에는 여러 가지 이상적 사랑을 비극에서 끝을 맺게 한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나라는 사람이 옛적 사람보다 다르다는 것은 얼핏 모든 것을 단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상(理想)에서 현실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단념처럼 큰 비극은 없을 것입니다. 단념하자! 모든 것을 단념하자! 여기에 인생의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단념하겠다, 사랑을 단념하고 영옥을 단념하겠다고 몇 번이나 자신의 인격을 두고 맹세하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안 된다. 나의 사랑은 결코 좋은 결과를 맺지 않으리라고 나는 단정하였습니다. 아! 구름장 하나, 무서운 구름장 하나가 나의 「생」 위로 배회합니다. 그 구름장은 멀지 않아서 나의 눈을 덮고 영(靈)을 덮어, 다시 이 눈은 영옥을 보지 못하고 이 영은 영옥을 생각지 못하겠지요? 아아! 삶! 사랑! 영옥! 나는 이 모든 것을 단념하지 않아서는 안 된답니다.

오늘은 눈앞에 환각(幻覺)을 일으키도록 몸이 피곤하였습니다. 그 환각에 대하여서는 여기서 말씀할 필요까지 없을까 합니다.

어찌하였든지 오늘이나 어제와 같이 몸이 피곤하고 더욱 쇠퇴하여 간다고 하면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게 되겠습니다. 몸이 약하매 마음이 무척 약하였습니다. 더구나 없던 번민, 「아름다운 번민」이 하나 더 생기나 마음이 더욱 약할 대로 약하여질 뿐입니다.

나는 때때로 웁니다. 무엇이라고 말을 할 수는 없는데 눈물은 자꾸 납니다.

더구나 요사이 며칠 마산을 떠나야 하겠다는 생각을 할 제 가슴은 아리는 듯이 섭섭하였습니다.

오늘 장군이 사흘만에 왔습니다. 자기 누이가 오늘 저녁에 저녁을 같이 먹자고 나를 청하더란 말을 하였습니다.

고마웠습니다. 반가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호의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몸이 약한 것도 약한 것이지마는 나는 영옥이와 만나는 것을 단념하였습니다.

「무서운 행복」은 영옥과 만나는 것입니다. 만나면 만날수록 나의 가슴속에는 오뇌와 번민이 고조될 뿐입니다.

아아! 안 만나겠습니다. 다시는 안 만나겠습니다. 죽음이 가까운 사람이 어찌 영옥의 생활까지 침범하려는 대담한 마음을 갖겠습니까? 내가 참으로 영옥을 사랑하니까 그와 만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가지고 가지요. 나의 관 뚜껑을 덮을 때 나의 가슴에는 그의 사랑을 가지고 영원히 가렵니다.

오늘은 지팡이를 짚고서 마산 온 뒤에 갔던 곳은 모조리 한 번씩 돌아다니었습니다.

더구나 장영옥의 집 앞에 홀로 서서 다만 창 옆에서 흩날리는 버들가지를 볼 때 나는 나의 마음을 그 버들가지에 매어 놓고 왔습니다. 바람에 버들가지가 창을 두드릴 때면 거기 내 맘이 달려 있는지를 영옥은 알는지요? 모든 것을 꿈으로 돌려보내기는 너무 애닯고, 그렇다고 분명한 세상 일로 보기는 너무 가슴이 쓰립니다.

모레는 마산을 떠납니다. 무엇이 덜미를 쳐서 몰아내는 것 같습니다.

천 가지나 되고 만 가지가 되는 감회가 가슴을 누릅니다. 어젯저녁에 자리에서 밤새도록 솟아오르는 눈물이 오늘은 한 방울 나오지 않습니다.

짐을 싸는 것을 보니까 초상집에서 죽은 이의 입던 옷, 쓰던 물건을 뭉치는 것 같아서 싫었습니다.

나는 맨 나중, 나의 생전의 맨 나중 인사를 하러 영옥에게 갔습니다.

영옥은 놀랐습니다.

『왜 그렇게 갑자기 가세요?』

하고 그 눈이 동그랗게 떠질 때 나는 그의 가슴에 엎디어 울고 싶었습니다.

갑니다! 영원히 갑니다! 인제 다시 영옥을 나는 보기를 못하겠지요? 보지 못해도 좋습니다.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랑! 그에게서 남 몰래 나 혼자 나의 가슴에 맺힌 사랑은 어느 때까지든지 가지고 가렵니다.

정거장에서 나는 세 사람을 작별하였습니다. 이군과 장군과 또 영옥을.

영옥은 눈물 괸 눈으로 나를 보고 수건을 흔들었습니다.

아아! 눈물! 영옥은 나에게 두 가지를 주었습니다. 한 번은 잊지 못할 발길과 또 한 번은 가슴에 사무치는 진주 같은 눈물을. 기차는 어김없이 떠났는데 멀리 공중에서 저녁 별 하나가 깜박거릴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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