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담 사화 전집 (차상찬)/공당 문답
- 공당문답(公堂問答)
서울 북촌에서도 한 복판인 가회동(嘉會洞)막받이에는 맹현(孟峴)이라는 조그만 한 고개가 있으니 (가회동에서 화동으로 넘어 가는 고개) 그 고개는 세상에서 혹은 또 맹감사재(孟監司峴)라고도 한다. 그러면 그 고개를 어찌 하여 맹감사재라고 부르게 되었을까, 그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옛날 세종 대왕(世宗大王)때에 유명하던 맹고불 맹정승(孟古佛孟政丞)이 아직 일국의 정승이 되지 못하고 일개 지방의 감사(監司)로 있을 때에 일찌기 그 고개를 밑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었다. 그 맹정승의 본 이름은 사성(思誠)이요,자(字)는 성지(誠之), 또한 자는 자명(自明)이요, 호(號)는 동보(東甫), 고불은 그의 별명이니 원래 충청남도 온양 태생이었다. 그의 부친은 희도(希道)니 벼슬이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이르고 효성이 갸륵하여 효자 정문까지 내리게 되고 그의 조부 유문(裕文)은 벼슬이 상서(尙書)에 이르렀다.
그는 원래 어려서부터 천성이 온화하여 항상 춘풍화기가 가득한 태평재상의 기상이 있을뿐 아니라 효성이 또한 지극하여 열살 때에 능히 아들된 도리를 다하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찌기 그의 어머니가 돌아 가시게 되니 그는 밤낮으로 일주일 동안이나 식음을 전폐하고 지극히 애통하며 또 장례를 지낸 뒤에는 묘소 앞에다 여막을 짓고 그곳에서 삼년 상을 치르되 삼시로 꼭 죽만 먹고 지냈었다. 그리고 또 어머니 묘소앞에다 잣나무(栢木[백목])를 몇 주 심어 놓고는 아침 저녁으로 정성스럽게 가꾸고 북돋아 주어 잘 자라게 하더니 하루는 뜻밖에도 그 몹쓸 놈의 산 도야지가 와서 그 잣나무의 뿌리를 주둥이로 쑤시고 물어 뜯어서 나무가 아주 말라 죽게 하니 맹사성은 그것을 보고 퍽도 분하도 애처럽게 생각하여 눈물을 흘리며 혼자 말로
『아이구 그 몹쓸 놈의 도야지 같으니 아무리 무지한 놈의 짐승이기로 남의 산소 앞에 정성스럽게 가꾸어 심어 놓은 나무를 저렇게 죽게 하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이냐,우리 어머님께서 만일 영혼(靈魂)이 계시다면 그놈의 도야지를 당장에라도 때려 죽여 버렸을 것인데.』
하고 쉴사이 없이 자꾸 자꾸 울며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런데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의 효성이 그렇게도 지극하니까 무지한 동물까지도 무슨 감응이 있어서 그리 되었던지 어떤 호랑이가 그 도야지를 물어 죽여다가 그의 산소 앞에다 던져두고 가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호랑이까지도 그의 효성에 감동이 되어 그렇게 하였다 하여 퍽 신기하게 여기고 나라에서는 또 그 소문을 들으시고 그의 효성을 기특하게 생각하시고 효자 정문까지 나렸다. 그는 일찌기 고려 말년(高麗末年〓禑王丙寅[우왕병인])에 과거를 보아 장원급제(壯元及第)를 하고 이씨 왕조에 들어 와서 대사헌 벼슬을 하게 되었다. (대사헌은 지금 재판장 같은 벼슬이다)
그때 태종대왕(太宗大王)의 둘째따님 경정공주(慶貞公主)는 조대림(趙大臨)이라 하는 사람에게 하가(下嫁)를 하였는데, 대림은 원래 위인이 광폭하고 탐재 호색하기로 유명한 인물인데 한번 부마(駙馬)가 된 후부터는 그 세력을 믿고 광폭한 악성을 더욱 나타내어 국가의 법률과 제도를 무시하고 그야말로 안하무인으로 가진 횡포한 행동을 마음대로 하니 세상사람들이 악망위(惡亡尉)라고까지 별명을 짓게 되었다. 그러나 원체 그의 세력이 광대하고 서슬이 푸른 까닭에 누구나 감히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하고 그저 꿀꺽 꿀꺽하고 참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맹사헌은 항상 분하게 생각하고 언제든지 기회만 있으면 한번 치워 없애 버리려고 별르고 별르던 차에 마침 조씨가 어떤 사건으로 또 나라의 법을 범하게 되니 그는 지평 박안신(持平朴安信)과 상의하고 크게 결심한 후에 금부도사(禁府都事)에게 명령하여 조씨를 잡아다가 옥(獄)에 단단히 가두고 나라에는 상주(上奏)치도 않고 조금도 기탄과 용서함이 없이 엄중하게 고문 취조하여 그 죄상을 밝히니 일반 사람들은 크게 통쾌하게 여겼으나 태종(太宗)께서는 크게 노하시고 그와 박안신을 모두 사형(死刑)으로 논죄하여 장차 육시(肉市〓육시는 시가에서 여러 사람이 보는 중에 죽이는 것이다)를 하게 되었더니 그때에 영의정(領議政)으로 있는 성석린(成石磷)이 지성으로 간하여 다행히 사형은 면하고 잠시 귀양을 보냈다가 오래지 않아 다시 벼슬길에 나와 여러 가지 벼슬을 하다가 세종말년 정미(世宗末年丁未)에는 우의정(右議政)이 되고 또 얼마 아니 있어서는 다시 좌의정(左議政)이 되었다. 그는 천성이 결백하고 청렴하여 비록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란 일국의 정승 지위에 있으면서도 그의 생활은 일개 빈한한 선비의 생활과 조금도 다름이 없어서 집도 허술한 오막사리 초가집에 바람과 비를 잘 가리우지 못하여 비가 올때면 우산(雨傘)을 받고 비를 피하게 되고 의복도 굵은 무명이 아니면 거칠은 베옷 뿐이요, 반찬도 역시 된장 찌개나 비지 찌개이외의 채소 한두 접시 뿐이었다.
한번은 병조판서(兵曹判書〓지금의 국방장관 격이다)가 그에게 무슨 국사를 품할 일이 있어서 그의 집에를 찾아 갔었는데 때마침 비가 와서 지붕으로 새나려오는 빗물이 그의 관복에 떨어져서 관복을 함빡 더렵혔다. 병조판서는 크게 감격하여 집으로 돌아와서 혼자 탄식하되
『일국 정승의 집이 그와 같은 터에 그의 밑에 있는 소위 병조판서로서 이와 같이 높고도 큼직하며 으리으리한 집안에서 홀로 호사스러운 생활을 한다는 것은 양심에 죄송스럽고 미안한 일이다.』
하고 그날로 자기 집의 줄행랑을 모두 헐어버리고 간단하고도 조촐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서울에 살며서 일년에 몇번씩 그의 고향인 온양(溫陽)으로 나려가서 근친(覲親)을 하게 되었다. 보통의 인물같으면 일국의 정승은 그만두고 일개 미관 말직을 다닐지라도 자기의 고향을 가게된다면 소위 금의환향(錦衣還鄕)이라고 자기의 위엄도 보일겸 자랑도 할겸 하여 분수에 넘치는 행차를 차려가지고 가는 것이 통례이지만은 그는 절대로 그러한 속된 생각을 가지지 않고 떨어지고 찢어진 더러운 옷을 입고 소(牛)를 타고 다니되 지나가는 지방의 관리들이 알게 되면 해를 끼칠가 염려하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자기 스스로가 혼자서 오고 가고 하니 누가 보던지 일국의 재상으로는 보지 않고 일개 촌 농부나 또는 나무 장사 영감으로 알게 되었다. 그런데 한번은 진위(振威)와 양성(陽城) 두 지방의 군수(郡守)가 그의 온양행차(溫陽行次)한다는 소문을 듣고 서로 의논하되
『맹정승께서 아무리 우리들의 폐를 덜어 주시기 위하여 항상 소문도 없이 암행을 하신다 하더라도 연로에 있는 우리 지방관으로서 그저 모르는 척하고 그대로 있다는 것은 너무도 미안한 일이니 이번만은 어찌 알게 되었던지 그의 행차가 이곳으로 지나가는 것을 알았은즉 장호원(長湖院)으로 가서 등 대하고 있다가 한번 영접을 하자.』
하고는 몇몇 사람이 장호원으로 모여서 어떤곳에다 상당한 접대의 준비를 하여놓고 군수 이하가 아침부터 등대를 하고 있었고 또 일반으로는 관하의 모든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일반 백성으로 하여금 그의 지나가는 도로의 소제를 시키고 또는 잡인의 통과 하는 것을 금지시키게 되었다. 관하인들은 군수의 명령대로 도로에 늘어서서 길거리의 청소도 시키고 또 일반 잡인들이 지나가는 것을 엄중히 금지 시키니 나뭇군이나 농군이나 일반의 행객이 감히 그 길을 통과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날 저녁때에 마침 어떤 촌 노인 같은 늙은 영감 하나가 뿔이 꼬부라진 누런 암소를 타고 마치 옛날 영척의 기우도(寧戚騎牛圖) 한 폭을 펼처 놓은것과 같이 사양방초(斜陽芳草) 우거진 길로 어슬렁 어슬렁하게 지나 가는 것이었다. 관하인들은 그가 정작 맹정승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크게 소리를 질르며
『에 ─ 라 끼놈 ── 이놈 길 비켜라 ── 오래지 않아서 맹정승 대감이 지나 가신다.』
하였다. 그러나 맹정승은 그들의 소리치는 것을 들은체 만체 하고 방약무인(傍若無人)하게 그대로 지나갔었다. 관하인 들은 그가 자기네의 하는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보고 크게 분개하여 뒤를 가까이 쫓아가서 소리를 크게 질으며 욕설을 하되
『이놈의 영감이 귀가 먹었나. 아무리 무지 막지한 촌 영감이기로 맹정승 대감도 몰라! 지금 이길로 누가 지나 가시는지 알기나 하나? 우리 고을 사또께서도 모두 저기 오셔서 등대 하시고 계셔. 어서 빨리 내려와, 늙은 영감이 봉변 하지 말고.』
하며 맹정승을 잡아 끌어 내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맹정승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빙그레하고 웃으며 말하되
『아이구 이 사람들아 너무나 과하게 굴지 말게. 맹정승 가는 길에 맹생원이 좀 가기로서니 어떻단 말인가. 나는 온양 사는 맹고불이란 사람인데, 이 고을 사또와도 서로 안면이 있는 터이니 돌아가서 사또를 보거던 내가 지나 가더라고 말이나 전해 주시요.』
하고는 다시 천연스럽게 지나가니, 관하인들도 다시 어찌하지 못하고 그대로 달려가서 군수에게 이상과 같은 경과의 말을 전하니, 군수들은 그가 지나가기만 고대하고 있다가 하인들의 보고하는 말을 듣고는 깜짝 놀라서
『아이구 우리가 무심하게 있다가 실수하였구나, 그 대감이 원래 소탈하시다는 말은 들었지마는 정말 그렇게 홀몸으로 소만 타고 지나가실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지금이라도 빨리 쫓아가서 사죄라도 하여야 되겠다.』
하고 황급하게 뛰어 나서는 바람에 그 앞에 놓였던 인뚱(印盒)을 땅에 떨어뜨려서 그 인뚱이가 굴러 그 옆 연못(淵)으로 들어갔으므로 그로 인하여서 그 연못의 이름을 인침연(印沈淵)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한번은 그가 역시 온양 고향을 다녀 오는 길에 용인(龍仁)땅에 당도하였는데 마침 소낙비(驟雨[취우])를 만나서 어떤 주막(酒幕)으로 들어가 유숙하게 되었다. 그 주막은 시골 주막으로는 집도 상당히 크고 방도 비교적 정결하게 차려 놓았으나 벌써 어떤 시골 사람이 많은 일행을 데리고 와서 안방 건너방 대청마루까지 통차지함은 물론이요 마굿간에도 말을 몆필씩 잔뜩 들여다 매고 뜰아래 방에는 말군 사인들 등이 웬통 차지를 하여 대대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맹정승은 허름한 남루한 의복에다 한필의 소와 한 사람의 하인 만을 데리고 들어서니 누가 보든지 행색이 초라하여 일국의 정승은 그만두고 촌면장으로도 인정할 수 없을만 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와서 자리 잡고 있는 나그네들은 물론이거니와 주인까지도 그를 푸대접하여 뜰 아랫방 한칸을 사처로 정해 주고 그의 타고가던 소는 마구간 차지도 못하고 대문밖 한데다가 매어 두게 되었다. 그러나 원래 천성이 소탈하고 평민생활을 좋아하는 그는 그것을 조금이라도 불만하게 생각하지 않을뿐 아니라 도리어 재미 있게 생각하고 한가롭게 앉아서 비오는 광경이며 주막집 문앞에 있는 수양버들이 비바람에 멋있게 너울거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그 주막의 안방과 대청을 먼저 독차지 하고 있던 손은 너무도 심심하니까 대청마루로 나와서 바지춤에다 손을 집어 놓고 혼자 흥얼흥얼하며 한시(詩)를 읊고 나서 뜰 아랫방에 홀로 있는 맹정승을 향하여
『여보쇼 영감, 누구신지 모르사아오나 우중에 그 방에 혼자 있기가 심심치 않으시요? 이리로 올라와서 같이 이야기도 하고 놉시다.』
하니 맹정승도 심심하던 차에 그의 말을 듣고는 또한 반가이 여겨 그의 방으로 올라가서 서로 인사를 하니 그 사람은 본래 경상도 사람으로 자기 집은 상당한 재산이 있어서 그 지방에서 남부럽지 않게 호화로운 생활을 하지마는 아직까지 벼슬이라고는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번에 특별히 서울로 벼슬을 하나 얻으러 가는 길이라고 한다. 그들은 원래부터 서로 안면이 없었지마는 피차 심심한 까닭에 일면여구로 서로 친하게 되어 혹은 바둑도 두고 혹은 고담, 혹은 농담도 하다가 최후에 그 영남(嶺南) 사람이 맹정승에게 말하되
『여보 영감 글 질 줄 아시오? 알면 나하고 시(詩)나 한수씩 지어 봅시다.』
하였다. 맹정승도 원래 양촌 권근(陽村權近)의 제자로 일찌기 문학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어 문과에 장원급제까지 한 분이라 웬만한 한시(漢詩)쯤이야 그까짓 시골 촌뜨기 선비에 비할바가 아니지만 그 사람의 하는 태도가 너무도 건방지고 우수우니까 짐작하고 대답하되
『예 말씀은 매우 좋으나 나는 원래 무식한 까닭에 한시는 지을 줄 모르니 그냥 육두 문자로 무슨 글자의 운을 내어 가지고 서로 말글이나 지어 봅시다.』
하였다. 그 사람도 또한 좋다고 하였다.
그들은 또 다시 약속을 하되 운자(韻字)는 공(公)과 당(堂) 두 자를 내되 무슨 말이든지 꼭 그 자음을 맞춰서 문답을 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맹정승은 먼저 그에게 묻는 말로
『당신은 무슨 일로 서울로 가는 공(公)』
하였더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벼슬을 구하러 간당(堂)』
하였다. 맹정승이 웃으며 말하되
『그러면 내가 당신을 위하여 주선해 주면 어떨 공(公)』
하니 그는 또 대답하되
『그리 할 수 없당(堂)』
하였다. 그 말은 물론 당신 같은 인물이 능히 그런 주선을 할 자격이 못된다는 의미였다. 그들은 그럭저럭 그곳에서 하루를 보내고 서로 헤어졌다.
그 뒤 며칠 후에 맹정승은 서울로 올라와서 상부(相府)에 있었더니 마침 그 시골 사람이 녹사 뽑는 시험(綠事選拔試驗[녹사선발시험])을 보러 왔었다.
맹정승은 그 사람을 보고 웃으며
『요새 재미가 어떤공(公)』
하였더니 그 사람은 그제야 그가 맹정승인 줄 알고 땅에 엎드려 사죄하되
『죽여 지당(堂)(죽여 마땅하다는 뜻이다)』
하였다
만좌한 백관들은 그것이 어떤 의미인 것을 알지 못하고 맹정승에게 물은즉 맹정승은 전날에 그 사람과 만나던 전후 사실을 자세히 말하였더니 만조백관들이 모두 박장대소를 하였다. 그때 맹정승은 그 사람을 특별히 탁발(擢拔)하여 상부의 녹사(相府綠事)를 삼았다가 다시 추천하여 지방관을 삼았더니 그는 가는 곳마다 군수 노릇을 잘 하여 치적(治蹟)이 쟁쟁하니 세상사람들이 그 군수를 지목하여 공당군수(公堂郡守)라고 하고 한때의 한 이야기거리가 되었다. 그는 그렇게 온후하고 원만하지마는 일을 처리하는 데는 퍽 엄격 정중하고 대의를 주장하므로 누구나 감히 경홀히 여기지 못하였다.
그는 그렇게 태평 재상으로 일생을 지내다가 칠십이세의 많은 나이로 돌아가니 세종대왕께서는 친히 병상에까지 임어하셔서 위문을 하시고 돌아간 뒤에는 또 문정(文貞)이라는 시호(謚號)를 나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