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한국 야담 사화 전집 (차상찬)/녹두장군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녹두장군(綠豆將軍)

갑오(甲午)동학란(東學亂)은 우리 나라의 역사가 있는 뒤로 제일 큰 민중 운동이었다. 조금 멀리 말하면 고려말의 이태조 기병(起兵)과 신라말의 견훤 궁예 왕건 등의 봉기와 가까이 말하면 이괄 홍경래 등의 궐기가 다 같이 그 당시의 현상에 대한 혁명운동이 아님이 아니었으나 그런 운동의 대개는 주모자의 영웅심리와 거기에 뒤따르는 사람들의 정권욕에 의하여 일어나며 또 결과를 맺은 것으로서 거기에는 진정한 세도(世道)를 위한 감격과 주의를 위한 투쟁이 아닌 것이 보통이었으나 갑오의 동학란에 있어서는 재래의 혁명 운동과 그 의의 달리하여 인내천(人乃天)이라는 동학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는 정책을 이상으로 하여 거의 혁명적 감격과 정열로서 움직였기 때문에 여기에 동학혁명의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첫째 원인(遠因)은 앞에 말한 바와 같이 이태조의 고려조 혁명운동은 일종의 정권획득운동에 불과 하였고 그 밖에도 재래의 폐정을 개혁하고 다소의 신시설을 행한 것은 그 정권을 유지키 위한 민중 회유책(懷柔策)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집권자가 그리하였을 뿐이 아니라 봉건식 사회의 집권계급의 형태는 대개로 그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조 전기 약 삼백년간은 고려의 폐환(弊患)을 게을리 하지 아니하고 또는 그간에 인도주의를 발휘한 인군명상(仁君名相)이 없지 아니하여 왕실을 중심으로 한 덕화(德化)와 인혜(仁惠)가 자못 민중에게 철저함이 있었으나 이조말엽 약 이백년 간은 재래의 인정주의 그것이나마 일소되고 오직 당시의 지배자인 특권계급 왕실을 중심으로 한 관리 유생(儒生) 토호(土豪)의 전제 잔악 주구(誅求)가 속출하던 중 그들의 포악 정도는 최근 오륙십년 이래 민가일족(閔家一族)이 세도를 잡으면서 그 극에 달하였다. 그래서 각지에는 탐관오리를 쳐부시기 위한 민요(民擾)가 봉기하며 일반의 민정은 극도로 험악하여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전 약 이 삼십년간은 실로 산우욕래풍만루(山雨慾來風滿樓)의 감이 있었으나 이와같은 이조말기의 말할 수 없는 부패된 정치가 동학혁명의 원인이 되고 근인도 된 것이다.

둘째 동학란의 근인(近因)은 물론 동학(東學)이 생겨난 거기에 있는 것이다.

동학이란 것은 서기 일천팔백 육십년(철종 십일년 경신)전에 경상도 경주 최수운(이름은 제우)으로부터 창도(唱道)된 일종의 사상단체요 주의결사로서 그의 신조(信條)는

『사람은 이 천지간의 최고 존재자인 동시에 사람을 떠나서 또 다른 천지 의 주재자(主宰者)가 없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곧 하늘인 동시에 이와 같은 하늘사람 사이에는 어떠한 차별이나 침모(侵侮)나 박탈을 인정할 수 없고 오직 사해일가(四海一家) 만족일인(萬族一人)의 새 세상을 세움이 있을 뿐이다.』

하여 그들은 먼저 국내문제로「보국안민」을 제창하고 세계문제로「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을 주장하여 삼남 일대에서 굉장히 많은 동지자를 규합(糾合)하였는데 그것이 곧 당시 집권자의 기휘(忌諱)에 걸려서 동학수령 최수운은 창도(唱道)한지 제오년되는 갑자 삼월 십일에「좌도난정(左道亂政)」의 죄목으로서 대구에서 처형되었으나 그의 여세는 요원(遼原)의 불과 같이 치성하여 최해월(崔海月)이라는 새로운 중심인물을 얻어 가지고 갑오혁명이 일어날 그 전기쯤 해서는 전라 충청 경상 경기 강원 황해 등지에 분포된 도인이 약 백만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동학의 형세가 날로 뻗어나가는 반면에는 그를 압박하고 지탄하여 관헌의 취체와 토호의 지목이 날로 심하여 가던 중 특히 당시의 탐관오리와 지방토호는 동학취체를 구실로 삼고 그의 생명과 재산을 임의로 박탈하므로 그들의 반항심은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심하게 되었다.

이에 그들은 크게 거사할 준비를 행하되 처음은 지난해 대구에서 참살된 수운선사(水雲先師)의 원(寃)을 신(伸)하고 당면의 관리압박을 금해 달라는, 말하자면 그때의 당국을 상대로 하는 소원운동(訴願運動)을 시작하였으니 그 실머리는 일찌기 신미년(서기 일천 팔백 칠십일년)에 이필(李弼)이 영해 영덕등지의 도인을 휘동한 일로부터 시작하여 후임진(後任辰) 칠월에는 서인주 서병학 등이 충청 감찰사 조병식과 전라 감찰사 이경식 등에게 동일한 신원의 소원을 드렸으며 다음해 계사 정월에는 단번에 중앙정부에 정소신원(呈疏伸寃)하기로 되어 청주군 송산리에 봉소도소(奉疏都所)를 정하고 만반의 준비를 가추고, 이월 초순에 서병학 손천민 김인국 등이 도중(道衆) 수만을 데리고 광화문 밖에서 진소하였는데 도중에는 이때부터 병복을 갈아입고 병정들과 협동하여 정부를 전복 시키자는 의논이 성하였으나 시기미숙으로 치르지 못하고 단지 귀가안업즉의원시지(歸家安業則依願施之)하라는 말을 듣고 헤어져서 집으로는 돌아갔으나 관리의 횡폭과 토호의 발호는 점점 더 깊어 가던 바 그해 삼월에는 다시 시위 운동을 하기로 하여 팔도 도중에게 일제히 내회할 것을 통지하였으니 그것을 대략 말하면

『숙계(叔季)로부터 안으로는 지키고 막는 정략을 실행하지 못하고 밖으로는 침략하는 형세가 더욱 급하게 되었지만 관리들은 너무도 광폭 방자하여 자기의 세력을 마음대로 하고 토호들은 함부로 착취를 하여 그칠 줄을 모르고 학자들의 학문은 아직 변변히 못하지만 모두 자기가 훌륭하다고 하여 문호를 세우는 터이요, 백성들은 아주 약해져서 조금도 진취성이 없으니 그 위급한 실정이야 큰 화근이 조석(朝夕)에 있지만 조금도 깨닫지를 못하니 이야말로 진실로 근심스럽고 탄식함을 금할 수 없다. 우리들은 모두 스승의 화를 입은 여생(餘生)이요 나라에서 길러주신 유민이지만 아직도 스승의 원한을 씻지 못하고 국가에 은혜를 갚지 못하였다. 부득이하여 장차 소리를 높히어 글장을 올리어 진정을 하려고 하여 이같이 통문을 하니 여러 교도들은 기일 내에 일제히 모여서 우리 도(道)를 지키며 우리 스승을 높이는 사람이 되고 또는 나라를 도와서 백성을 구제하는 정책이 되기를 진실로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사월 십일일 날이었다. 위에 쓴 통지문을 접한 팔도의 도중이 소정지점인 보은(報恩)장내로 일제히 모였는데 그 수는 수십만을 헤아리던 중 그들은 각각 봉(棒)을 들어 기(旗)를 삼고 돌을 모아 성(城)을 쌓고 호령을 하고 명령을 듣는데 있어서 위의가 정제하고 가영송주(歌詠誦呪)에 기쁜 마음이 합쳐서 장차 하늘을 찌르고 땅흘 뒤흔들 듯한 기세을 보였다.

이 소식을 들은 중앙당국은 크게 놀라며 충청병사 홍계훈(忠淸兵使洪啓薰)으로 하여금 병정을 인솔하고 보은에 주둔케 하는 반면에 어윤중을 선유사로 파송하여 그 동정을 탐지하였다.

이에 동학수령 최해월은 친히 도중의 행렬앞에 나서서 일일히 도중을 위열(慰閱)하고 별도로 각포(各包〓포라 함은 그때 그 결사(結社)의 조그만 단체의 이름)의 대접주(大接主)와 포명을 차정(差定)하고 충경대접주(忠慶大接主)에 임규호, 청의대접주(淸義大接主)에 소천민, 충의대접주에 손병희, 문청대접주(文淸大接主)에 임정재, 옥의대접주(沃義大接主)에 박석규, 관동대접주(關東大接主)에 이원팔, 호남대접주(湖南大接主)에 남계천, 상공대접주(尙公大接主)에 이관영 등을 임명하여 묘당을 직격하기로 하고 한 달 반 동안을 시위하다가 어윤중의 봉칙만류로 또 한 번 뒷날 이르기로 하고 미루어 두었다.

이와 같이 도중의 시위가 빈번하고 기세가 당당함을 본 각처의 백성들이 잇달어 입도하니 이에 각 포의 접주들은 제각기 포소를 정하고 일체의 사무를 진행한바 마치 각 군혁명위원회가 급히 마련된 것 같은 감이 있었으며 그중에도 옥천 박석규 보은 임규호 예산 박희인 문의 임정호 청산 박원철 부안 김낙철 무장송화충 남원 김개남 청풍 성두한 홍천 차기석 인제 김치운 등은 각기 자기군으로서 분포를 조직하고 도소(都所)를 별도로 설치하였으며 전봉준(全奉準)은 자기 부하의 도중을 데리고 김구군 원평(金溝郡院坪)에 주재하였다.

이와 같이 도인이 혹은 모이고 혹은 흩어져서 오늘인가 내일인가 하면서 시기를 고대하던 것이 임진 칠월계사년 말까지 이르렀으며 그것이 다음해 갑오에 이르러 폭발된 것이 광고미유(曠古未有)의 동학란이었다.

갑오 정월 초닷샛날이다. 전북 고부 도인 전봉준(全北高阜道人全琫準)이 자기가 사는 군내에다 포고문을 띄어 도인이고 도인이 아니고간에 오천명을 본군 마항시(馬項市)에 소집하고 그후 십육일에 동군백산(고부에서 동쪽으로 십리쯤에 있음)에 이둔(移屯)하는 한편 다음 십칠일에는 무장(茂長)의 손화충이 또 역시 도중수천명을 데리고 태인(泰仁) 부안(扶安)등을 순회하여 전봉준과 동일한 행동을 취하며 나왔다.

이에 전라감사 김문현(全羅監司金文鉉)이 포군(砲軍) 이천과 부상(負商) 일천을 거느리고 사월 칠일에 고부 서쪽 이십리되는 황토현(黃土峴)에서 전봉준과 접전하여 사상자 천여명을 남기고 여지없이 패퇴하니 이것이 동학혁명운동의 첫 봉화였다.

생각하건대 동학은 갑오의 그때로부터 삼십여년전에 창도(唱道)되어 인내천(人乃天)의 주의와 보국안민의 목적으로서 그때까지 동지를 규합하고 시위를 속행한바 물론 어느 시기로서 일제 궐기하여 당시의 특권계급을 일체 박멸하고 사인여천주의(事人如天主義)에 따르는 무차별무계급의 새 나라를 건설할 순서였으나 그 일으키는 시기의 결정에 있어서는 스스로 의견이 같지 않았다.

즉 그때 동학의 유일한 영수인 최해월은 일이 큰 일이니 좀더 시기를 정관할 것이라 하였음에 반하여 한편에서는 즉시 일을 치르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아무 때에나 하려고 한 일이라 결국 전부가 움직이기는 움직였으나 일의 불리한 점은 여기에 많이 달려있었다. 황토현 접전에서 제일차의 승리를 얻은 혁명군은 정읍 함평군등을 돌아 다니다가 정성군에 이르니 가는 곳마다 민중이 운집하여 수만명을 헤아릴수 있었다.

이에 군오(軍伍)를 짜서 삼삼오오의 진법(陳法)을 취하여 만천의 성상(星象)을 짓고 깃발은 청흑백황홍(靑黑白黃紅)의 오색을 썼으며 대를 깎아 창(槍)을 만들고 또 바랑(鉢囊[발낭])을 지어 각각 어깨에 메었으며 전봉준은 흰갓 흰옷(고부에서 민요를 일으키다 희생된 자기 부친의 상중에 있었던 고로)으로 손에 백오염주(百五念珠)를 들고 입으로 삼칠성주(三七聖呪〓至氣今至願知[지기금지원지])를 외우며 각포사(各砲士)로 하여금 어깨에 궁을(弓乙) 두자를 붙이고 몸에 동심의맹(同心義盟)의 네 자를 품고 깃발의 바탕에는 오만년수운대의(五萬年受運大義)의 일곱 글자를 날리니 실로 공전전후의 변화막측한 신장기병(神將奇兵)이었다.

이로부터 모든 군의 인심이 바람에 쏠리는 것과 같이 따르는데 전봉준은 한편으로 도(道)를 강의하며 한편으로 병정을 훈련시켜 그 기세가 점점 커져서 나라 전체가 동요하니 동아(東亞)의 풍운이 날로 급하게 되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초토사(招討使) 홍계훈으로 하여금 강화병(江華兵) 육백 병을 거느리게하고 밤길을 걸어 남하하여 장성의 남쪽 황룡시가에서 교전하다가 역시 참패하여 대포 삼문까지 빼앗기고 영광군으로 도망쳐 들어가니 이에 혁명군은 승승장구로 전주영(全州營)을 돌격하여 감사 김문현을 쫓아 내고 재빠르게 전주를 점령하니 때는 갑오 사월 하순이었다. 사흘 후에 홍계훈이 다시 전주성을 포위하고 약 칠일간을 교전하였으나 결국 어찌할 수 없으므로 혁명군과 화(和)를 맺고 돌아가매 전봉준도 역시 부하들을 거느리고 장성으로 잠시 되돌아왔다.

고부의 기동(起動)을 봉화로하여 각처의 동학당이 다 각기 보국안민을 부르짖고 일어나니 단지 정부의 힘으로써 막아낼 도리가 없음을 알은 당시의 수구당(守舊黨) 당국자는 주경청국총리사 원세개(駐京淸國總理事袁世凱)와 협의하고 직례총독 이홍장(直隷總督李鴻章)에게 급히 청하여 청군을 청구하매 일본에서는 천진조약을 앞세우고 역시 조선에 출병하여 결국 삼국 병정이 합세하여 동학군과 대전하게 되었다.

오월 십구일에 전봉준은 담양군에 이르러 청장 유영경(淸將劉永慶)의 화의를 거절하고 다시금 창의격문(倡義檄文)을 발하여 보국안민의 대의를 전하니 이에 김개남은 남원에서, 이유형은 호서에서, 손화충은 무장에서, 김덕명은 김구에서 차치구(보천교 차경석의 부친)는 정읍에서, 정진구는 고창에서 일어나 전봉준군과 연합하여 전주로 중심지를 삼고 임시의 군정(軍政)을 포하되 관으로부터 박탈한 민간의 모두 나누어 주고 모든 억울하고 원통하게 갇혔던 죄수와 노예들을 모두 해방하며 기타 수백년간 내려오던 폐정(弊政)을 일제히 개혁하니 민심의 돌아오는 것이 물이 흘러내려 가는 것과 마찬가지었다.

이때(六[유]월 二十二[이십이]일부터 七[칠]월 二十[이십]일까지)서울의 중앙정부에서는 일대변혁이 생겨서 청국세력을 배경으로한 수구의 민당(閔黨)이 물러나고 일본 세력을 배경으로한 조희연 김가진 유길준등 개화당이 대원군을 받들고 새로 내각을 조직하여 이른바 갑신의 서정개혁을 단행하니 이것은 전혀 동학혁명의 파동에 따르는 부산물이었다.

그래서 이 신정부에서는 동학당과 강화를 하느니 토벌을 하느니 하다가 밖으로는 옆에 있는 나라의 떠받침과 안으로는 자기의 이해를 생각한 결과 역시 토벌키로 되어 이두황(李斗璜)으로 하여금 병정 삼천여명을 거느려 삼남대토벌(三南大討伐)을 행하였다.

전주일대를 평정한 동학군은 다시 대군을 몰아 북으로 호서를 점령하고 이어서 서울로 육박하여 중앙정부를 전복하는 동시에 혁신의 대업을 완성하기로 하고 동년 구월에 십만의 대군을 전주 삼례(參禮) 평야에 집합하여 일절의 준비를 하고, 전봉준이 스스로 도원수가 되어 북진할때 서호(西湖)의 경계선인 금강을 건느면서 제일착으로 여산영장(礪山營將) 김갑동군과 공주유장(公州留將) 이유상군을 격파하여 그를 생포하고 강경평야를 통과하여 대군영(大軍營)을 논산에 머물러서 진을 치게 하고 세갈래 길로 나누어서 호서의 수부인 공주를 향하여 쳐들어갈 때 깃발이 하늘을 뒤덮고 병갑(兵甲)이 햇빛에 비쳐서 그 위풍이 당당하여 실로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혁명군이 이와 같이 공주성을 향하고 똑바로 쳐들어갈 때 충청 관찰사 박제순의 휘하에서 관군을 통솔한 이규태 성하영 홍운섭등 제장이 일본군과 힘을 같이하여 이인 효포 봉황산등지에 진을 치고 혁명군의 전진을 막으므로 혁명군은 이에 방향을 변경하여 시월 이십오일에 봉황산의 후면으로 웅진(熊津)을 몰래 건너서 공주성을 직박(直迫)하니 이에 비로소 관군과의 접전이 생겨서 남월촌 추병 지추 금반산 등지에서 육탄혈우(肉彈血雨)의 처절한 격전을 결행하여 당일 어슴프레하게 해가 지며 어둑할 때 효포(孝浦)를 점령하고 이어서 대교 우금시 웅진 금시 등지에서 약 칠일간의 혈전을 계속하여 양군의 사상이 수만에 달하던중 그야말로 혈해시산(血海屍山)의 일대 참극을 연출하고 결국 스즈기(鈴木) 모리오(森尾)등의 훈련이 잘되어있는 일본군대와 합친 관군에게 패하여 논산으로 퇴진하니 혁명군의 치명상은 실로 여기에 있었다.

이에 앞서 동학선생 최해월은 각포의 도중을 총동원하여 손병희(孫秉熙〓삼일운동 당시의 주모자)로 하여금 대군을 통솔케 하고 전봉준과 논산에서 모여서 길을 같이하여 북상할 것을 약속하고 대군이 보은장내로부터 출발하여 공주 이인역을 지나가다가 관군과 더불어 접전하여 일시 싸움에 이겼으나 그 후 관군은 일본군의 원조를 얻어 다시 재전하매 십여차의 혈전을 행하다가 결국 불리하여 처음 약속한 바와 같이 논산으로 돌아와서 만나니 전봉준이 싸움에 패한 뒤에 온것이라 두 거두(巨頭)와 두대군이 서로 울고 서로 위무하며 며칠동안 머물러 있는 동안 한편으로는 도를 강의하고 주문을 외우면서 또 한편으로는 병정을 훈련하여 전략을 세우는 등 당시의 광경은 참으로 비절장절(悲絶壯絶)하였다.

이때에 전봉준이 송병희를 돌아보며 무연(憮然)히 탄식을 지어 가로되

『내 언제나 일이 중하고 급한 것만을 생각하고 급거히 일을 일으켜 수 없는 민재와 생명을 없이하고 형세 이에 이르렀으니 내 한몸은 이제 죽어도 한이 없으나 도탄중에 들은 저 많은 생명을 어찌할까. 이제라도 선후책을 강구하여 최후의 일심으로 공주를 직격하면 충분히 희망이 있으나 도라보건대 호남 도중은 여러번 싸운 끝에 피곤하여 저러하니 원컨대 기호(畿湖)의 도중이 동심협력하여 대사를 협성함이 있기를 바라오.』

이에 두 사람은 서로 손목을 잡고

『일의 되고 안되고는 하늘에 있고 운에 있는지라, 우리끼리 나무랠바가 아니며 우리는 다만 하고 싶은 일을 할수 있는데까지 할 뿐이오.』

하고 크게 삼군을 호궤(犒饋)하여 기운을 회복하고 십일월 삼일 이른 아침에 진군하여 성하영의 통솔한 관군을 이인역에서 대파하고 질풍신뢰(疾風迅雷)와 같이 관군을 추격하여 우금시 주봉 웅시 등 요새(要塞)를 포위 공격하기 약 엿새 동안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최선최후의 혈전을 다하여 싸웠으나 결국 무기가 부족되며 병졸들의 훈련이 덜되었으므로 인하여 불행히 패퇴하니, 이에 남어지의 대군은 대업이 어그러진 것을 알아채고 사방으로 분산되고 그후 십이월에 전봉준은 순창구로리(淳昌龜老里)에서 관군한테 잡히어 서울로 압송되고, 김개남은 태인에서, 손화충은 무장에서 잡히어 전봉준 손화충은 서울에서 형살(刑殺)되고 김개남은 전주에서 효수(梟首)되었으며, 최해월은 강원도 방면으로 피신하였다가 뒤에 무술(戊戌)년에 역시 서울감옥에서 교살(絞殺)되고, 손병희는 그후 중국방면으로 망명하였으며, 그 나머지 운동에 관련된 두령이나 병사는 모두 교살 포살 매살 분살 참살 열살 타살 투수살 등 그 처참한 모양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으며 더욱 그에 관계되는 부모 처자 형제 전답(田畓) 축류(畜類)까지를 몰수하여 삼남 일대의 당시의 참극은 실로 천일(天日)이 구명(具冥)할 지경이었다.

동학란의 실전을 대략 이와 같이 기술하였으나 이것은 물론 그 실전의 만분의 일도 못된다. 그때의 그 운동은 동학을 믿는 도인(道人)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다같이 봉기한바 도저히 그것을 차례차례로 적을 수가 없고 끝으로 한마디를 보기(補記)할 것은 황해도 강령(康翎) 문화 재령 등지에 있는 도인(道人) 임종현 김유영 월용일 한화석 오용선 방찬두 등이 수만의 도중을 모아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하여 수십차의 접전을 하여 죽고 다친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었으며, 평안도 강서 용강등지의 도인 김사영과 함흥의 김학수와 강계의 이백초등이 역시 민중을 모아서 봉기한 일이 있었으며 상우경 남진주등에서 교인 수만명이 본군(本郡)고승당산상(孤僧堂山上)에서 관군과 싸우다가 장열한 죽엄을 할것도 잊을 수 없는 일이다.

동학혁명운동은 이와 같이 일어나서 이와 같이 참패하였다. 이 운동에 희생이 된 대중의 수를 대략 헤어보더라도 십만 이상이 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실패하였음에 불구하고 동학혁명이 당시의 우리나라 정국(政局) 또는 동양 시국에 미친 영향은 실로 굉장하였으며, 더욱 우리나라의 일반 민심에 미친 영향은 막대한 큰 점이 있었다.

즉 동학란이 일어났으므로 해서 수구당의 중앙정부는 곧 개혁이 되어 한국유신(韓國維新)의 단서가 열렸으며 이어서 일청(日淸)의 전경을 일으켜 동양의 풍운은 이로서 급전하였고 우리나라 오백년 동안을 뿌리박은 양반과 토호의 성루(城壘)가 이로서 무너지게 되고 사민평등(四民平等)이 이로서 실현되었으며, 더욱이 무엇보다도 이 혁명이 우리에게 남겨준 큰 의의는 민중의 힘이란 것은 이러한 것이며 민중의 요구는 이러한 것이라는 것이다.

비록 일시의 실패를 당하였을지라도 우리 민중은 어느 때일지라도 이와 같은 민중본위의 새 세상을 세우고야 말것이며 그래서 세우기까지는 언제든지 이와 같이 싸울 것이다 하는 가장 중요한 교훈을 우리 남아있는 민중에게 피와 불로써 전해준 그것이다.

최후로 목이 끊어질 때의 전봉준의 남긴 말은 실로 기왕의 의취(意趣)를 전하기에 충분하니 이것은 다른 말이 아니라 전봉준을 취조할 당시의 관인이 그를 고관으로써 꼬인즉 그는 소리를 높혀 꾸짖어 가로되

『너는 나의 원수요 나는 너의 원수니 너는 다만 나를 죽일것 뿐이지 무슨 말이 이렇게 많단 말이냐.』

하고 최후까지 반항으로서 죽엄의 길을 떠났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