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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담 사화 전집 (차상찬)/백발 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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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홍장(白髮紅粧)

때는 바로 이조(李朝) 인조대왕(仁祖大王) 시대였다. 해주 정씨(海州鄭氏) 중에 정효준(鄭孝俊)이라 하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전날 문종대왕(文宗大王)의 사위 되는 영양위정종(寧陽尉鄭棕)의 현손(玄孫)이었다. 보통 때와 같으면 영양위는 일국의 부마(駙馬)이니 평생에 부귀영화를 만족하게 누릴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자손들까지도 남 부럽지 않게 좋은 벼슬도 얻고 세력도 상당하였을 것이지마는 시대를 잘못타고 나고 운수가 불길한 탓으로 문종대왕의 아드님 되는 단종대왕이 열두 살의 어린 몸으로 왕위에 나간지 삼년 되던 해 여름에 그 심술 굳고 욕심 많은 작은 아버지 되는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강원도의 협읍(峽邑)인 영월(寧越) 땅으로 귀양 살이를 갔다가 정축 시월 이십사일 (丁丑十月二十四日)에 애처러운 죽엄을 당하여 이른바『일편청산에 만고함원(一片靑山萬古含寃)』이라는 만고의 슬픈 역사를 지어 놓고 단종대왕을 옹호하던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등의 고명지신(顧命之臣)을 위하여 사육신(死六臣)과 안평대군(安平大君) 금성대군(錦城大君)등 여러 대군이 모두 그의 연좌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게 되니 단종대왕의 매부 그중에도 단종이 친어머니 같이 믿는 그의 매씨 경혜공주(敬惠公主)의 남편 되는 정종(鄭琮)이야 더군다나 어찌 화를 면할 수 있었으랴.

그 때에 그는 공주와 같이 전라도 광주(全羅道光州)로 위리안치(圍籬安置)가 되었다가 그 뒤에 여러 승려(僧侶)들과 같이 반역음모(反逆陰謀)를 하였다는 혐의로 사형(死刑)을 받고 경혜공주는 순천(順天)의 관비(官婢)가 되었다가 다행히 정희왕후(貞熹王后〓世祖王后[세조왕후])의 후은을 입어 세조대왕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대내(大內)로 불려 들어 가게 되니 그가 광주에서 귀양살이 할 때에 낳은 어린 아들까지도 궐내에서 길러 나게 되었다.

그의 아들이 육칠세 되었을 때에 대궐 안뜰에서 장난을 하고 놀았더니 세조대왕이 지나가다가 우연히 그를 본즉 미모가 청수하고 기골이 비범하므로 특히 사랑하여 가까이 오라고 하시며『그 아이가 누구의 자손이냐고』고 물으니 왕후도 그제는 감히 속이지 못하고 사실대로 대답하되『경혜공주의 아들이 올시다』고 말하니 전날에 그렇게 몹시 굴고 악착스럽게 골육지친(骨肉之親)을 함부로 죽이던 세조도 그때에는 양심이 회복 되었던지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되『문종대왕의 혈손(血孫)이라고는 오직 너 하나 뿐이로구나』하고 이름을 미수(眉壽)라 지어 주고 자산군궁(者山君은 成宗[성종]의 어렸을 때의 封號[봉호])에 가서 자산군을 모시고 같이 있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는 장성한 뒤에 단종대왕의 왕비 송씨(端宗大王妃宋氏)의 소청에 의하여 그의 시양자(侍養子)가 되어 송씨를 봉양하다가 또 송씨가 돌아간 뒤에는 문종대왕의 왕후 권씨(顯德王后權氏[현덕왕후권씨])와 단종대왕 내외분의 사당까지 모시고 외손봉사를 하게 되었다.

단종이 화를 입은 뒤에 세조는 그의 모후인 현덕왕후 권씨의 능을 파내서 관(棺)을 해변에 버리고 또 종묘(宗廟)에 있는 위패(位牌)까지 없애서 문종대왕은 독사당으로 있게 되었으므로 권씨는 그 외손 정씨가 봉사하였다.

정미수는 그뒤 성종(成宗)때에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해풍 부원군(海豊府院君)까지 봉하였으나 원래 화가여생(禍家餘生)인 까닭에 그의 자손은 그리 혁혁하게 되지 못하고 그의 증손 정효준(曾孫鄭孝俊)의 시대에 이르러서 는 집안이 더욱 열세하여 늦게 겨우 진사(進士) 하나를 얻게 되었다.

때는 마침 광해군(光海君)시대로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박승종(朴承宗) 유희분(柳希奮) 등의 대소북인파(大小北人派)가 당국하여 여러가지의 악정치를 하는중 또 모후(母后) 인목대비 김씨(仁穆大妃金氏〓宣祖王妃[선조왕비])를 폐하려고 의논을 주장하니 그는 자기의 세력이 미약한 것도 불구하고 다만 의리만 생각하여 어몽염(魚夢濂) 정택뢰(鄭澤雷)등과 연명의 반대 상소를 하고, 또 박안제(朴安悌)등과 같이 태학관(太學舘)에를 가서 폐모론(廢母論)에 가담한 관학 유생들을 내쫒고 또 계속하여 이이첨(李爾瞻)을 귀양 보내자고 상소를 하니 이이첨은 그것을 크게 원한을 품고 정효준의 성명을 벽위에 써붙여 놓고 그를 무슨 죄명으로나 몰아서 죽이려고 하니 효준도 할 수 없이 몸을 피하여 한참 동안 함경도(咸鏡道) 방면으로 내려가서 방랑의 생활을 하였다.

그 뒤 인조반정(仁祖反正)초에 효준은 다시 서울로 올라 왔으나 여러해 동안을 그렇게 유랑의 생활을 하며 돌아다녔으니 그 집안 살림이 말이 아니며 가난한 것은 이루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중에 처자복(妻子福)까지 남보다 유달리 박복하여 나이 마흔 일곱살이 되도록 자식 하나도 없고 상처를 세 번째 하고는 홀로 단신의 외로운 몸으로 홀아비 생활을 하면서 날마다 그 이웃에 사는 병사이진경(兵使李眞慶)이라는 이의 집으로 놀러 다니며 술과 찬밥신세도 지고 또 장기로 날을 보내니 누가 보든지 그리 궁한 신세는 또 다시 없었다. 그는 남의 집에 가서 그렇게 놀 때에는 세상 일을 모두 잊어 버리지마는 집안에 돌아오면 너무 쓸쓸하고 만사가 한심하던 차에 자기 증조 이래로 현덕왕후 권씨와 단종대왕 내외분의 봉사를 하고 또 자기의 조상 봉사를 하다가 자기의 대에 와서 아주 후사까지 없이 장래에 향화(香火)를 끊게 될 것을 생각할 때에 참으로 가슴이 메어질듯이 쓰라리고 아프며 또 죄송스럽기 한이 없었다.

그리하여 어떤 때에는 자기의 외가나 본가 사당앞에 가서 소리를 놓아 통곡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자기의 손으로 아주 그 사당을 불질러 버리고 자살을 하여 죽으려고 결심도 하였다.

하루는 전과같이 이병사 집에 가서 밤이 늦도록 장기를 두다가 집에 돌아 와 자고 있으려니까 꿈속에서 어떤 백발 노인이 와서 자기를 보고 하는 말이

『그대가 처자가 없어서 그렇게 애를 쓰니 내가 좋은 여자를 하나 지시하여 아들 딸 낳고 장래에 복록이 진진하게 잘 살게 하여 주마.』

하고 자기를 인도하여 어떤 곳으로 가더니 자주 옷을 입은 처녀를 가리키며 그것이 자기의 천생 배필 이라고 말 하더니 그만간데 온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효준은 깜짝 놀라 깨어본즉 꿈이었다. 마음에 퍽도 이상히 여기어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느라고 잠도 잘 자지 못하고 밤을 그대로 밝히고 그 이튿날 아침에 조반을 먹고는 전날에 하던 일을 되풀이 하여 이병사 집으로 또 놀러 갔었다. 그 전날에는 아무리 그 집에 놀러가도 여자라고는 그 집에서 심부름하는 계집종 밖에 볼수 없더니 그날에는 공교롭게 그 집 대문 앞에 처녀가 나와서 있다가 자기를 보고 피하여 들어 가는데 이상하게도 전날 꿈에 노인이 지시하여 주던 그 여자와 얼굴 모습도 똑 같고 의복의 빛갈까지도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효준은 마음에 퍽 신기하게 생각하고 그 집에 있는 하인에게 넌지시 묻기를

『아까 대문 앞에 나왔던 처녀가 누구이며 나이가 또한 몇 살이냐?』

고 물었더니 하인은 대답하되

『그 처녀는 바로 주인 이병사의 막내 따님이며 올해 열여섯살이 올시다.』

하였다.

효준은 그 하인의 말을 듣고는 혼자서 생각하되

『어제밤 꿈이 퍽 이상하기도 하며 또 오늘 본 처녀가 꿈에 보던 처녀와 신기하게도 같기는 하지만 무엇을 비교해 보아도 자기 집과 이병사 집은 가세로 말하더라도 천양지차로 빈부의 차이가 심할 뿐만 아니라 자기는 나이 벌써 오십이 다 되어 두 귀밑에 백발이 성성한데다가 그중에 사취(四娶)나 되고, 그 처녀로 말하면 방년이 이팔에 꽃으로 치면 이제 피어나오는 봉오리 같은 어여쁜 처녀에게 감히 혼인 하자는 말도 부쳐볼 염치가 없으니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하고 마음이 산란하여 그날에는 전과같이 오래도록 장기도 두지못하고 몇판을 두고는 몸이 아프다고 핑계를 하고 도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그날은 낮부터 밤까지 그일을 가지고 고민하다가 그 이튿날 아침에 최후로 결심을 하여 재판에 질 송사(訟事)는 아무래도 한다는 옛말과 같이 번연히 될 수는 없는 혼인이니까 그다지 애쓸 필요도 없고 또 누구를 중간에 넣어서 말할 여지도 없은즉 되고 아니되는 것은 별문제이고 남자의 뱃심에 직접적으로 이병사를 보고 자기의 소청을 한번 말이나 하여 보자 하고 그날에는 다른 날보다 조반을 일찍 먹고 이병사의 집으로 갔다.

그러나 급기야 이병사를 대하고 보니 염치에 자마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생각 저런 생각하다가 꾀를 내가지고 이병사와 장기 두기를 청하되 그날에는 특히 무슨 내기를 하자고 하였다.

그 내기의 조건은 이러하였다.

즉 이병사가 지면 자기를 장가들여 주고 자기가 지면 이병사의 아들 노릇을 하겠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물론 이병사가 지면 그의 딸을 자기에게 주고 자기가 지면 그에게 사위 자식이 되겠다는 엉뚱한 생각이니 다시 말하면 이기나 지나 그의 사위가 되겠다는 말을 부쳐 보자는 수작이었다.

효준은 이렇게 미리 계획하고 하는 말이지만 이병사는 원래 그런 일은 꿈에도 생각을 아니 하였기 때문에 효준의 말에 그저 농담으로 여기고 효준의 내기 청하는 것을 한마디에 허락하고 장기를 두기 시작하였다.

전날에는 이병사의 장기 두는 솜씨가 효준보다 좀 높아서 열번에 육칠차씩은 번번히 이기었더니 이날은 무슨 신조가 있는 듯이 삼판양승에 효준이가 어렵지 않게 이기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혼인하자는 말거리를 얻지 못하여 고심 하던 끝에 그렇게 승리를 하게 되자 효준으로서는 두번도 없는 좋은 기회였다.

장기판을 집어 치우고 효준이는 이병사에게 말하되

『여보 영감, 어찌 하시렵니까. 내 장가를 꼭 들려 주셔야지요.』

하고 여러 번 졸랐다.

이병사도 처음에는 그저 농담으로 그러는 줄 알았더니 효준이가 진심으로여러번 조르는 것을 보고 그도 또한 농담으로 여기지 않고 사실대로 대답하되

『글쎄 ― 말이요, 그까짓 장기 내기야 했건 않했건 우리 교분에 장가를 못들여 줄것은 없으나 당신이 당신의 사정을 잘 알다시피 집에 돈은 한푼도 없고 나이 근 오십에도 사취까지나 되니 어디 누가 딸을 주겠소. 정말 장가가 가고 싶다면 기회를 보아서 어디 과부라도 하나 얻어 줄 터이니 조금만 참으시오.』

하였다.

그러나 효준이는 굳이 또 청하되

『나도 돈 한푼 없는 늙은 놈이 상처를 세 번이나 하고 무슨 염치에 장가를 들려고 하겠소마는 영감도 아시는바와 같이 나는 우리 정가의 종손은 고사하고 증조부 이래로 막중한 왕실의 외손 봉사를 하다가 내 대에 와서 절사할 생각을 하니 죄송하기 짝이 없어서 염치를 불구하고 장가를 들려고 하는 것이올시다. 다른 곳에 말을 하자니 아는 곳도 없고 엄두도 나지 않아 이왕 말이 난 김에 미안합니다마는 한 말씀을 하겠읍니다.』

하고 부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나오지 않는 말을 억지로 꺼내서

『저어…… 다른 말씀이 아니라 들은즉 영감님의 따님이 지금 이팔방년이 되고 인물이 극히 미인이라 하오니 불필타구(不必他求)로 나를 주었으면 어떠하겠오.』

이병사는 원래 성벽 있는 사람이라 장기를 지고 졸리는 것만도 불쾌한데 얼토 당토 않은 청혼 말을 들으니 여간 노여운 것이 아니었다.

그 말을 듣고는 얼굴 빛이 별안간 변하여 일어나며

『여보, 당신이 정신 빠졌단 말이요. 미쳐도 분수가 있지 그런 말을 어찌 감히 내앞에서 한단 말이요. 그런 말을 할려면 다시는 우리 집에 오지도 마오……』

하고 안으로 뿌리치고 들어가니 정효준도 아주 무안하여 혼자서 후회하되

『번연히 안될 것을 알면서도 내가 왜 그런 섣부른 말을 하였는고.』

하고는 그길로 바루 자기 집으로 돌아와 두문불출하고 이병사의 집에는 발 그림자도 들여놓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만 끊지고 말았다면 아주 문제가 없었겠지만 이상하게도 그날 밤에 이병사는 꿈을 꾼즉 어떤 놀라운 왕자(王者)의 거동 행차가 자기 집으로 들어오더니 곤룡포에 익선관을 쓴 젊은 임금(그는 물론 단종대왕이었다)

이 대청에 와서 좌기를 차리고 이병사를 부르더니 명령하여 가로되『너의 딸과 정효준과 혼인하게 하라.』

고 명령하듯이 말하였다.

이병사는 꿈에도 불복을 하며 여쭙기를

『어명은 황송하오나 정효준과 소인의 딸과는 나이의 차가 몹시 심하므로 혼인을 할 수 없나이다.』

하였더니 임금님은 또 말씀하되

『비록 나이의 차이는 많으나 혼인을 한다면 귀한 자손도 많이 날 것이요 효준의 수명도 연장시켜 너의 딸보다 더 오래 살게 할 것이니 범연히 듣지 말고 혼인케 하라.』

하고 완연히 그 집을 떠나 버렸다.

이병사는 이런 꿈을 꾸고 이상히 여겨 부인에게 이야기하였더니 그 부인도 역시 그런 꿈을 꾸었다고 말하였다.

그들 부부는 이런 꿈을 이상히 여기기는 하였지만 원체 자기 딸과 정효준과는 여러 가지가 상적하지 않고 또 꿈이란 허탄한 편이 많은 까닭으로 그냥 불문하고 지냈더니 수일 후에 또 그런 꿈이 꾸어지고 세 번째 꿈에는 왕이 대노하여 이병사를 꾸짖으며, 특히 이병사의 부인은 평소에 그 혼인을 반대했다고 종아리를 때리더니 깨어 본즉 그 부인 종아리에는 매맞은 자리가 완연히 있을 뿐더러 아직까지도 아프며 또 그날 밤에 딸은 꿈을 꾼즉 자기 집에 장기 두러 다니던 정진사(鄭進士)가 커다란 알(卵[란]) 다섯개를 갖다 주므로 그것을 치마에 받아 넣었더니 그것이 모두 화하여 용(龍)이 되었었다.

그의 딸은 그 꿈을 꾸고 또한 그 부모들에게 말하니 그의 부모들은 점점 신기하게 생각하고 부부가 서로 의논하여 탄식하되 천생의 연분은 인력으로 할 수 없다고 하고 다시 효준에게 혼인 하기를 허락하고 택일을 하여 이팔의 꽃다운 처녀와 백발이 성성한 사십칠세의 중늙은이와 혼례식을 거행하게 되니 그 광경이야 말로

이팔가랑육십옹(二八佳娘六十翁)
소소백발대홍장(蕭蕭白髮對紅粧)
광풍불식동군의(狂風不識東君意)
취송이화압해당(吹送梨花壓海棠)

― 意譯[의역] ―

이팔 가인에 육십 신랑
백발 홍장이 가관일세
사나운 광풍 무정도 하여
배꽃을 날려다 해당화 덮는다.

라고 한 옛사람들이 노신랑이 젊은 처녀에게 장가 가는 것을 조롱한 글 그대로 그려 놓은 듯 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누구나 기괴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원래에 천생 배필이요 돌아간 임금까지도 현몽하여 이루어진 혼인인즉 어찌 범연할리가 있으리요. 그들은 혼인 하던 그달부터 태기가 있어 십삭만에 아들을 낳고 또 계속하여 사형제를 낳으니 바로 정식(鄭植), 정익(鄭榏), 정석(鄭晳), 정박(鄭樸), 정적(鄭積) 등 오형제였다. 그들은 모구 인물도 잘났거니와 문재(文才)가 비상하여 오형제가 모두 문과급제(文科及第)를 하여 고관에 이르고 그의 손자 중휘(重徽)도 또한 과거를 하여 효준은 나이 팔십구세 극(極) 상수를 하니 나라에서도 크게 장하게 여기어 노직가자(老職加資)를 시켜 벼슬이 지사(知事)에까지 이르고 해풍군(海豊君)을 습봉(襲封)하니 근 오십이 되도록 처자가 없어 무실 무가하게 곤궁한 생활을 하다가 노령에 그런 행복을 받은 사람은 고금 역사에 참으로 드물 것이다.

그리고 그의 부인은 그에게 귀한 아들 오형제를 낳고 두 부부가 해로하다가 그의 남편보다 삼년을 앞서서 먼저 죽고 후손이 지금까지 번창하였으니 누가 이팔청춘으로 반백발된 노인과 결혼한 것을 비웃을 수 있으랴.

이 사실을 본다면 나이 많고 돈없는 늙은 홀아비라도 과히 낙심들을 하지 말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