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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담 사화 전집 (차상찬)/숙종대왕과 장희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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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대왕(肅宗大王)과 장희빈(張禧嬪)

때는 바로 이조 때에 영특하고 사납기로 유명하던 숙종대왕(肅宗大王) 시대였다.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는 어느해 봄날에 숙종대왕은 여러 군신들과 같이 창경궁 비원(昌慶宮 祕苑)에서 꽃 구경을 하시고 이어서 원중에 백화연(百花宴)을 열었다.

당시 왕족 중에 제일 인물 잘나고 총애를 많이 받는 동평군 이항(東平君李杭 ─ 后煥[후환]의子崇善君澂[자숭선군징]의子[자])을 위시하여 여러 왕자 왕손과 만조 백관이 다 모인것은 물론이고 후궁의 삼천 궁녀들도 한사람 빠지지 않고 모두 참례 하였다. 요량한 풍악소리는 태평의 가곡을 화답하고 가득한 금옥의 술잔은 성수의 만세를 봉축(奉祝) 하였다. 꽃향기와 주흥에 도취한 숙종대왕은 여러 궁녀들을 돌아 보시고 흔연히 웃으시며 말씀하되

『오늘의 연회는 특히 꽃 구경을 하는 연회이니 너희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꽃 이야기를 한마디씩 하되 특히 나와 같은 꽃이 무슨 꽃인 것을 가르쳐 말하라, 만일에 그 말이 내 마음에 들게 된다면 그 사람은 특별히 후한 상을 주겠노라.』

고 말씀 하셨다.

이말을 들은 여러 궁녀들은 제각기 왕께 곱게 뵈고 상을 타려고 한사람씩 두사람씩 앞을 다투어 나와서 꽃 이야기를 하였다.

그 이야기 중에는 물론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왔다. 혹은 성주(聖主)께서는 만인에게 은택(恩澤)을 입히시니 여러 만민의 옷이 되는 주라꽃(木棉花[목면화])과 같다는 사람도 있었고 혹은 귀가 왕위에 계시니 달속에 계수나무와 같다는 사람도 있었고 성수무궁 하시니 무궁화(無窮花)와 같다는 사람도 있었고 또는 풍류를 좋아하시니 홍도벽도 삼색도(紅桃碧桃三色桃)와도 같다는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성씨가 이씨이시니 이화(梨花)와 같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와 같이 여러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한마디의 말을 하는데 오직 말석에 있는 궁녀 한 사람이 나오지 않고 잠자코 앉아 있기만 하였다.

왕이 이상하게 생각하시고 그 궁녀를 불러 어전에 가까이 오라고 하시고 한번 살펴보시니 그는 방년이 겨우 열 일곱 여덟이 될까 말까 한데 자색이 천하에 절륜(絶倫)하여 구름같이 고운 머리는 옛날 고구려(高句麗)의 관나(貫那 〓 중천왕(中川王)때의 궁녀(宮女), 미인이고 머리털이 구척(九尺)이나 되었다고 한다.)와 같고 요염한 태도는 고려의 연쌍비(高麗連雙飛)가 갱생한 듯하며 부용같은 얼굴과 버들같은 눈섭, 추수같이 맑은 눈, 자개같이 고운 이(齒)는 중국의 왕소군(王昭君)이나 양귀비(楊貴妃)도 눈물을 흘릴 만하였다.

대왕은 한번 보시더니 정신이 황홀하여 혼자 생각하시기를 우리 후궁에 저런 미인이 있는 것을 어찌하여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나 하고 친히 이름을 물으시니 그는 군관 장희재(軍官 張希載)의 누이 장궁인(張宮人)이었다. 왕은 희색이 만면하시며 다시 장씨를 보시고 물으시되

『여러 궁녀들이 모두 꽃 이야기를 하는데 홀로 너 한 사람만 아무 이야기도 안하니 웬 일이냐?』

고 하셨다.

장씨는 머리를 숙이고 구슬 같은 목소리로 천천히 아뢰옵되

『아무리 대전(大殿)께옵서 꽃 이야기를 하시란 어명이 계시오나 존엄하신 대전을 감히 꽃에 비하여 말씀하기 황송하와 그저 잠자코 있었을 뿐이올시다……』

라고 하니 왕이 더욱 기특히 여기시고 다시 말씀하되

『너의 말이 기특은 하나 오늘은 내가 이미 허락한 터이니 조금도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마음 먹은 대로 말을 해보아라.』

고 하였다.

장씨는 그제야 아래옵되

『대전께옵서는 사람 중의 왕이시고 모란은 꽃 중에 왕이온즉 대전을 꽃에 비하온다면 모란과 같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은 그 말을 크게 기특히 여겨 특히 후상을 주시고 늙은 여관(女官)에게 명하여 홍도화 한가지를 꺾어다가 장씨의 머리 위에 꽂아주니 일반 궁녀들이 모두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그 뒤로부터 장씨의 이름이 궁내 궁외에 가득하고, 상감의 총애는 장씨 한몸으로 집중 되었다.

그때 숙종대왕의 춘추 이미 설흔에 가까웠으나 전왕후 김씨(仁敬王后[인경왕후]) 몸에도 아무 소생이 없었고 계후(繼后) 민씨(仁顯王后閔氏[인현왕후민씨])도 가례를 치른지 여러 해가 되어도 또한 자녀를 낳지 못하니 효종대왕(孝宗大王)이래 삼대독신이신 숙종대왕은 그 슬하가 적막하신 것을 항상 느끼시던 중 더우기 연로하신 대왕대비(大妃〓顯宗妃明聖王后趙氏[현종비명성왕후조씨])가 주야로 크게 걱정을 하시어 민씨는 마음속으로 송구스럽고 불안하게 여기어 숙종께 후궁을 다시 간택하시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숙종께서는 민후가 아직 나이가 젊으시므로 처음에는 듣지 않았으나 민후가 극력으로 권할뿐 아니라 대비도 또한 희망하시는 기색이 있으므로 숙종도 또한 어찌할 수 없이 후궁 간택할 전교를 내리시니 민후는 원래에 미인 장씨의 자색이 절특하고 성질이 영리한 것을 잘 아시는 이외에 평소에 숙종이 또한 그를 사랑하시는 것을 짐작하고 후궁으로 추천하였다.

그때에 왕대비와 정명옹주 ─ 이분은 선조(宣祖)의 따님으로 영안위 홍주신(永安尉洪株臣)에게 출가(出嫁)한 분이니 그때 나이 일흔살이었다 ─ 는 장씨의 얼굴이 너무 어여쁘고 부덕이 적은 것을 염려하여 중지하기를 간절히 권하였으나 민씨가 듣지 않으므로 결국 장씨가 간택에 뽑히게 되니 이는 장씨의 일가의 행운인 동시에 뒷날 민씨가 쫓겨나갈 근원이 된 것이었다.

이로부터 장씨에 대한 은총은 나날이 두터워져서 숙종 십이년 병인(丙寅)년에는 단번에 뛰어올라 숙의(淑儀)의 봉작을 받고 노비 일만구(奴婢一萬口)를 얻게 되었으니 그의 세력이 국내에 크게 떨쳤으며 내외 친척이 다 상당한 벼슬 자리를 얻는 동시에 거기에 아부하는 무리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장씨의 어머니는 원래 조사석(趙師錫)의 집 침모(針母)였던 까닭에 정묘년(丁卯年)에 조씨가 우상(右相)이 되었고 또 정언 한성구(正言韓聖垕)는 장씨의 봉작(封爵)을 반대하여 상소(上疏)를 하다가 벼슬이 떨어졌다.)

그러다가 숙종 십사년 무진 구월 이십 팔일 유시(酉時)에 장씨가 왕자를 탄생하니 이는 뒷날의 경종대왕(景宗大王)으로 왕가에 있어서는 그만한 경사가 없는 동시에 장씨 문중에 또한 큰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그로 인하여 장씨에 대한 숙종의 총애가 더욱 깊어지고 따라서 장씨의 세력이 더 커진 것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장씨의 사친은 어명으로 궁중 출입을 무상하게 하였는데 하루는 장씨의 모친이 팔인승 옥교(玉轎)를 타고 건양문(建陽門)안으로 통과하였더니 지평(地平) 버슬로 있는 이익수(李益壽 ─ 西人派[서인파])가 그것을 분히 여기어 그 옥교를 때려 부시어 불 살르고 그 하인들을 잡아다가 큰 매질을 하니 숙종이 크게 노하여 내수사(內需司)에 명하여 금리(禁吏) 두사람을 형살(刑殺)하니 국내에 여론이 자못 높았다.

보잘것 없는 사람이라도 자기가 세력만 있으면 교만해지는 것이 보통이거니와 하물며 재기(才氣)와 지모(知謀) 정략(政略)을 겸유한 절세의 미인 장희빈(張禧嬪)에 있어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일을 뒤흔들었다.

그는 후궁에 있을 때에는 극히 온화 유순하였으나 급기야 지위와 세력을 얻어보니 여러 가지의 숨었던 야심이 발로되어 민비 일파의 세력을 한 발로 차버리고 자기 세력을 확장하려고 고심하였다. 더구나 전날의 서인파 이익 수가 자기 모친이 탄 옥교를 부셔 태우고 하인까지 난타하여 욕한 것은 평생에 사모치는 원한이 되는 일이므로 그것을 보복 하는데는 무엇보다도 지난 해 경신(庚申)년 옥사 이후로 크게 몰락을 당하여 크게 불만과 불평을 하는 서인파의 구적(仇敵)되는 재야당 남인파(在野黨 南人派)와 손을 잡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먼저 남인과 밀접한 관계가 많은 동평군 이항(東平君 李杭)에게 추파를 보내고 또 자기의 오빠 되는 장희재(張希載)를 중간에 넣어서 일대 활극을 연출 하게 하였으니 그 제일막은 왕자의 호(號)를 정하는 운동이요 제이막은 민비의 폐출 운동이었다.

이 연극의 여러 광대 노릇을 한 이는 물론 숙종대왕이었다.

기사년(己巳年) 초열흘 날이었다.

이 연극의 푸로그람을 맡은 숙종대왕은 여러 대신과 기타 백관을 부르시고 왕자의 정호 문제를 꺼낸 말씀한 다음에 이어 말씀하시기를

『비록 재신고관 중에서라도 이일에 이의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즉시 벼슬을 사직하고 가는 것이 옳겠다.』

고까지 하시니 이것은 물론 장씨와 남인파의 책동으로 당시 정권을 잡고 있는 서인파에 대한 한개의 큰 폭탄적 선언이었다.

이 운동이 성공되면 남인의 세력이 크게 확대되어 서인의 경신년 옥사의 보복을 받는 동시 따라서 서인을 배경으로 한 민비의 지위가 위태할 것은 명백한 일이었다.

이것을 미리 짐작한 서인은 원자의 정호를 반대하는 것보다도 자기들 세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반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영상 김수흥(領相 金壽興)을 위시하여 이판 남룡익(吏判 南龍翼), 호판, 유상운(戶判 柳尙運) 병판 윤지완(兵判 尹趾完), 공판 심재(工判 沈載), 대간 최규서(大諫 崔奎瑞)등, 서인파의 거두들은 숙종의 엄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히 반대를 하였으나 결국 아무 효과도 얻지 못하고 그달 열 사흗 날에 애초의 간계(奸計)에 의하여 왕자를 원자(元子)로 호(號)를 정할 일을 전교하시고 동 열엿새날 에는 정식으로 왕자를 원자로 봉하고 또 장씨는 희빈(禧嬪)으로 봉(封)하였다.

그러나 당시 서인의 일파는 일상, 불만한 생각을 가지고 그해 이월(二月)에는 송시열(宋時烈 尤庵[우암])이 또 원자의 봉작 시기가 아직 이르다는 상소를 하니 때는 벌써 왕자로 봉한지 이미 한달이 지난 후이므로 숙종은 말씀 하기를

『원자를 봉한 이상에는 이미 군신(君臣)의 문의가 정해진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소를 하는 것은 필경 세자에 대한 불만을 가진 것인즉 그대로 용서하여 둘 수가 없어.』

하시고 친히 희정전(熙政殿)에 임어(臨御) 하사 다시 여러 신하들을 불러 놓으시고 송시열의 상소한 내의를 하문하시니 때에 남인파(南人派) 우부승지 이현기(右副承旨 李玄紀) 교리 남치훈(校理 南致薰) 동부승지 윤빈(同副承旨 尹彬)등이 그 상소중에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또한 전날에 송시열이 일개 사사일로 윤증(尹拯)과 분렬하여 조야의 분쟁을 일으킨 일을 재론하니 숙종께서 크게 노하셔서 즉시에 송시열을 제주도(濟州島)로 귀양보내고 영상 김수흥을 파직시키고 그외 이사명(李師命) 이익(李翊), 김익훈(金益薰) 이순명(李順命) 김만중(金萬重)등을 멀리 귀양보내고 남인파 목래선(睦來善) 김덕원(金德遠)을 특배하여 좌우상(左右相)을 삼고 목창명(睦昌明) 권유(權愈)등은 승지(承旨)를 제수하고 경신년에 옥사한 사람을 신원하며 당시에 소위 보사공신(保社功臣)이었던 광성 부원군 김만기(光城府院君 金萬基) 청성 부원군 김석주(淸城府院君 金錫冑)등의 관작을 추탈하니 정국은 일시에 큰 변동이 생겨서 여러해 동안 억압당하면서 원한을 품고있던 남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고 서인은 일망 타진으로 몰락의 비운을 당하였다.

이와 같이 장씨의 몸에서 난 왕자가 세자가 되고 서인의 세력이 하루 밤 사이에 추풍낙엽 같이 권세가 땅에 떨어지고 망하게 되매 크게 공포를 느끼게 된 이는 민비였다.

민비는 원래 서인의 거두 병판 민유중(兵判 閔維重)의 둘째 딸이요 동춘 송준길의 외손녀(同春宋俊吉外孫女)로 청성 김석주가 중매하여 왕후가 된 관계로 서인과는 운명을 같이 할 지위에 있었다. 처음에는 민비가 자기 문중(門中)의 사람을 후궁으로 천거하였으나 급기야 장씨가 숙종께 특총을 받게 되니 시앗에는 돌부처도 돌아 앉는다고 아무리 점잖고 덕 있는 민비일지라도 자연 질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병인년에 장씨가 숙의(淑儀)로 승격될 때에는 몽사(夢事)로 칭탁하고 숙종께 여쭙기를

『선왕과 선후께서 친히 말씀하시되 내전관 김귀인(金貴人)은 복록이 길고 또 자손의 복이 선조대왕 같이 많으나 장씨는 팔자에 자손이 없을 뿐 아니라 또한 복이 없어서 만일 그가 궁중에 오래 있게 된다면 반드시 경신년에 옥사한 사람들의 여당과 결탁하여 국가에 큰 화를 미치리라…….』

하였다.

그리고 또 왕자를 탄생하였을 때에는 미리 여자 모자를 지어 두었다가 남자가 낳은 것을 보고는

『나는 여자를 낳을 줄 알았더니 뜻밖에 남자를 낳았읍니다.』

고 하며 또 한번은 상감께 여쭈어 가로되

『장씨는 원래 전생에서 요사스러운 짐승으로 태어 났다가 주상께 잡혀 죽었던 바 그것을 보복하기 위하여 다시 태어 낳온 것인즉 반드시 주상을 해칠 것이올시다.』

고 하며 또

『장씨는 팔자에 자식이 없는 터인즉 아무리 원자를 봉(封)한다 하더라도 헛수고만 할뿐이 올시다.』

고 하였다.

이러한 말이 날때마다 숙종은 민비를 좋지 않게 생각 하시던 차 하루는 숙종께서 희빈의 궁으로 들어가신즉 장씨의 집에서 기르던 개(犬)한 마리가 뜰에서 피를 토하고 자빠져 죽었으므로 상감께서 이상스럽게 생각하시고 장씨에게 물은즉 장씨는 아무 말도 아니하고 잠잠히 있다가 눈물이 글썽 글썽하며 여쭈어 가로되

『주상께서는 신첩의 천한 목숨을 사랑하시와 하루라도 속히 문밖으로 내어 보내어 자유스러운 생활을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니 숙종은 더욱 의심스럽게 여기셔서 자세히 영문을 물으시니 장씨는 대답하기를

『오늘 중궁 전하께옵서 음식을 보내시었는네 음식의 빛이 너무 이상하기에 의심이 나서 먹지를 않고 시험으로 개를 주었더니 저와 같이 죽었읍니다…… 오늘은 다행히 천은(天恩)으로 그것을 발견하고 죽지는 않았사오나

만일에 뒷날에 또 이러한 일이 있다면 신첩은 남이 죽는 줄도 모르게 죽게 되겠사오니 그 얼마나 놀라우며 가공(可恐)할 노릇이며 가련하지 않겠읍니까.』

하니 숙종은 장씨의 말을 측은하게 생각하는 동시에 민씨를 천고의 죄인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기사(己巳)년 사월 이십 삼일(四월 二十三日) ── 민비의 생일 날(誕日[탄일])을 당하여 중궁에서 대전과 장씨에게 생일날 차린 음식을 진상(進上)하게 됨에 전날 독약사건에 놀래인 장씨는 이번에도 또한 그런한 위험한 일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주상께 그 음식 진어에 주의하실 일을 말하고 그 외에도 민비에게 불리한 말을 많이 하니 상이 그 말을 곧이 들으시고 그날에 진상한 단자와 백관의 아래 단자를 전부 퇴각 시키시고 또 진상한 음식은 후원에다 파묻은 뒤에 그것을 가지고 온 내시 주빈(朱彬)을 내옥에 가두워 두게 하시고 대신과 종이품(從二品)이상을 불러서 어전에 세우시고 민비를 폐출(廢出)할 일을 선언 하시고 또 죄상을 들어서 폐출하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리시니 좌승지 이저만(左承旨 李著晩), 수찬 이만원(修撰 李萬元) 대신 이상진(大臣 李相眞) 등이 힘써 간(諫) 하다가 파직(罷職) 혹은 정배(귀양)를 당하고 응교 박태보(應校 朴泰輔) 판서 오두인(判書 吳斗寅) 참판 이세화(參判 李世華)등 여든 여명(八十餘名)이 반대 상소를 하다가 죄를 입어 형살 또는 유배를 당하고 세자 책봉을 할 때에 반대 상소를 하다가 귀양간 송시열 김수흥등 이삼명은 사약(賜藥)을 내리고 민씨의 족속 중에 관작을 가진 사람은 모두 파직을 시키며 유월 사일(六月四日)에는 민비를 안국동(감고당 ─ 지금 덕성고녀자리)으로 축출하여 유폐(幽閉)시키고 공상미(供上米)와 내전 수라 진공까지 시키는 동시 장씨는 승작하여 왕비로 봉하고 그의 부친 장형(張炯)은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 모친 고씨(高氏)는 부부인(府夫人)을 봉하고 그의 오빠(장희재)는 훈련 대장(訓練大將)을 봉하니 당시 정권은 거의 장씨의 수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장씨는 일개 후궁의 천한 몸으로 이와 같이 일조에 왕후의 귀한 자리를 차지하고 일문이 모두 극도의 부귀 영화를 누리게 되니 그 교자 횡포함이 날로 늘어만 갔다.

안으로는 민비파의 세력을 일소하기 위하여 평소 민씨와 접근하던 사람이면 심지어 궁인과 액졸까지 다 쫓아 내고 심한 때에는 자객을 보내어 유폐된 민비를 수차 암살하려고 하고 또 숙종의 총애하는 최숙빈(崔淑嬪〓英祖[영조]의 親母[친모])을 사형 학대(私刑虐待)하며, 밖으로는 남인파와 결탁하여 서인파라고는 정계에 감히 그림자도 내놓지 못하게 되니, 숙종도 점차 장씨를 싫어하는 생각이 나고 따라서 전날에 민비를 폐출한 것을 후회하는 생각이 나게 되었다.

이때 서인파 중에는 김춘택(金春澤〓號[호] 北軒[북헌)이란 사람이 있으니 그는 재기발발하고 음모 잘 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기사(己巳)년 이래로 몰락당하고 있던 서인 세력을 항상 만회 하려고 서인파 중요 인물과 책동을 하는 중 자기는 누구보다도 선두에 나서서 여러 가지로 암중 활약을 하였다. 제일 먼저 글로 창선감의록(倡善感義錄)이라는 소설(小說)을 지어 궁중에 흘러 들어가게 하여 숙종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그 다음에는 또「장다리」민요(民謠)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이다. 미나리는 민씨, 장다리는 장씨를두고 한 말이니 민씨는 사철 잘되나 장씨는 일시 뿐이란 뜻이다 ──)를 지어 민간에 퍼뜨려서 인심을 수습하며, 또 한쪽으로는 한중혁(韓重爀) 강만태(康晩泰) 등과 백방으로 운동하여 수천금으로 궁인의 누이를 사서 첩을 삼고 뇌물로 장희재의 처첩을 매수하여 희재의 처「자근 아기」는 간통까지 하고 첩 숙정(淑正)도 또한 밀접한 관계를 맺어 궁중과 장씨의 비밀을 탐정하였다.

그러다가 숙종 이십년 갑술(甲戌)에 와서 그들의 음모가 결국 성공되어(이 음모를 하던 중 일시 발각되어 춘택 이외 여러 사람이 금부에 갇히어서 처형까지 하게 되었다가 요행히 면한 일이 있었다) 숙종이 태도를 일변하여 남인파를 정계(政界)에서 일제 몰아 내어 그때 구월(九月)에는 민비를 다시 복위 시키고 장씨는 희빈으로 강봉하고 장씨 일족의 관직을 삭탈하고 또 먼 섬으로 귀양을 보내게 되니 한때 부귀영화를 자랑하던 장씨의 세력도 그만 일장춘몽으로 화하고 남인파가 잡았던 정권은 다시 서인파로 돌아가고 말었다.

장씨는 자기의 죄과는 어찌 되었든지 자기의 몸에서 난 아들이 이미 한나라의 세자가 되었고 자기도 또한 한나라의 왕후까지 되었는데 일조에 폐위삭작(廢位削爵)을 당할뿐 아니라 자기의 부모까지 삭탈직을 하고 아우 희재는 멀리 귀양을 보내니 그 원한이야 어찌 형언할수 있으랴. 더구나 자기의 정적(政敵)인 민비가 자기 아들까지 차지하고 소위 낳은 어머니 되는 자기와는 얼굴도 서로 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통절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비록 심중에 혼자 퇴축을 당하고 있으나 다시 정변을 일으키려고 주야 고심하여 밖으로는 남인파의 잔당(殘黨)과 결탁하고 안으로는 여러가지의 음해 저주(呪咀〓예방)를 하여 민씨가 서인파를 해치고저 하였다.

그러다가 숙종 이십칠년 신사(辛巳) 삼월에 민비가 담종(痰腫)병으로 승하하니 숙종은 그가 평생에 일점 혈육이 없고 또 전날 폐비되었던 때에 무한히 고생하던 일을 생각하며 자기의 잘못한 것도 후회되고 민씨의 불쌍한 생각이 더욱 간절하였다. 그러던 차 주사야몽(晝思夜夢)이라 할까, 하루 밤은 숙종이 꿈을 꾼즉 전날에 죽은 내시 하나가 와서 엎디어 아뢰옵기를

『궁중에 요물이 많아서 중전께서 화를 입으셨고 장차 전하와 세자도 이롭지 못하오리다.』

하며 장씨 있는 취선궁(就善宮)을 손으로 가리키고 갔다. 그 뒤에 또 꿈을 꾼즉 민비가 온 몸에 피투성이를 하고 와서 하는 말이

『신첩이 죽은 것은 본명이 아니고 장씨가 예방(呪咀)을 한 탓이오니 부디 이 원수를 갚아 주사이다.』

하면서 어디론지 갑자기 사라져 버리니, 숙종이 깜짝놀라 깨어 크게 괴이하게 여기고, 즉시에 숨을 죽이고 슬금슬금 장씨의 궁으로 가서 본즉 밤은 벌써 깊었는데 장씨가 모든 시녀와 장희재의 첩 숙정과 같이 예방하던 제구(祭具)를 수습하고 있었다.

그것은 물론 장씨가 평소에 민씨에 대하여 예방 하던 것으로 민씨 죽은 뒤에 그것을 없이 하는 것이었다.

숙종은 별안간에 문을 열고 그것을 하문하니 일동이 깜짝 놀라며 어쩔 줄을 모르면서 세자께서 마마(疫疾[역질]하실 때에 축원하던 것이라 하고 혹은 중궁 마마 환후(還後)의 평복 하시기를 기도 하던 것이라고도 하며 대답하는 모양이 이랬다 저랬다 하며 사리(事理)에 맞지 않으니 평소에도 꿈을 잘 믿던 숙종은 그 몽사를 더욱 신기하게 생각하는 동시에 장씨를 더욱 괴악하게 생각하여 당장에 장씨에게 호령 하시되

『국모(國母)를 살해한 요망한 역도(逆徒) 같으니……….』

하시면서 구월 이십 사일에 전교로 장씨의 죄악을 열거하여 약을 먹고 자결하게 하고, 그의 오빠 희재와 궁녀 축생(丑生) 설향(雪香)등 수십명을 모두 사형에 처하니 이른바 신사무고사건(辛巳誣告事件)이라 하는 것이요 장다리 노래의 주인공인 당대 미인 장씨의 일장 비극도 이에 막을 닫게 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