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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담 사화 전집 (차상찬)/열녀의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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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烈女)의 혼(魂)

지금으로부터 약 삼십여년 전 일이었다.

강원도의 관동팔경 중의 하나인 유명한 총석정(叢石亭)이 있는 통천군(通川郡)에는 이시택(李時澤)이라고 하는 한 농부가 있었다.

그는 직업이 명색 농부이지마는 자기 집에 토지가 없고 남의 토지로 약간의 소작농을 하는 까닭에 피땀을 흘리고 손톱이 빠지도록 힘써 농사를 지어도 추수 때가 되어 지주의 소작료를 주고 비싼 구실(租稅)을 치르고 나면 겨울 먹을 양식이 없으므로 농한기(農閑期)가 되면 부업(副業)으로 소금장사를 하여 산촌(山村)으로 돌아다니며 소금과 곡식을 바꾸어다가 근근히 생활을 하였다.

한번은 역시 소금 한섬(一石)을 등에 지고 그의 인근읍(隣近邑)인 회양군 장양면(淮陽郡長楊面)의 어느 깊은 산골을 찾아가게 되었다.

그 중로에는 강원도에서도 크고 험악하기로 유명한 장대령(長大嶺)이란 고개가 있는데 이씨(李氏)는 초행으로 그 고개를 넘게 되므로 노정(路程)도 잘 알지 못하고 그대로 가다가 겨우 영(嶺) 밑에까지 갔을 때 이미 해가 저물어 버렸다.

그러지 않아도 무인지경의 산골길이 무시무시하여 등골에서 땀이 저절로 흐르는 터에 해가지고 주위가 캄캄해지니 그의 가는 길은 저승길을 가는 것보다도 더 무시무시하여 한발자국을 떼어 놓는 것이 다른 곳에서 몇 발자국을 떼어 놓는 것보다 더 힘이 들고 싫어졌다.

그러나 이 영(嶺)을 넘지 않고는 또한 다른 데로 갈 곳이 없으므로 아무리 무섭고 싫어도 그 길을 가지 않을수 없었다. 하는수없이 죽을 용기를 다 내어가지고 한참 가다가 산(山) 모퉁이에 있는 성황당(城隍堂) 앞에서 잠간 쉬고 있으려니까 길 가운데 웬 자루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소금 장수는 혼잣말로

『이렇게 깊은 산골에 웬 자루가 이렇게 떨어져 있을까.』

하고 중얼거리며 그 자루를 집어서 소금섬 위에다 얹어 가지고 또 한참동안 걸어갔다.

이럭저럭 걷는 사이에 어느덧 거의 영 밑 막바지까지 다다랐다.

이곳까지 수십 리 길이나 와도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만날 수가 없고 개와 닭의 소리까지도 전연 들어볼수 없던 적막한 산중에서 뜻밖에도 조그마한 오막살이집 한 채가 길 모퉁이에 있고 그 집 울타리 틈으로 새어 나오는 등불 빛이 마치 가을철의 반딧불 모양으로 반짝반짝하게 보였다.

그는 죽었던 목숨이 다시 살아난 듯이 퍽 반가웠다.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이 오아시스를 만난 것보다도, 풍랑에 표류하던 선박이 육지를 만난것보다도 몇백백 더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염치며 체면이며 도무지 돌보지 않고 자기 집에 찾아 들어 가듯이 소금짐을 집 문 앞에다 내려 놓고 큰 소리로

『여봅쇼 ── 주인님, 여봅쇼 주인님』하고 두세 번 찾아도 아무 대답이 없더니 한참 찾으니까 그제서야 약 설흔살 쯤 되어 보이는 어여쁜 여자 하나가 문을 열고 나오며 고은 목소리로

『누구십니까, 이 밤중에 무슨 일로 찾으십니까.』

『녜, 다른 일이 아니라 길을 가다가 깊은 산중에서 날은 저물고 잘 곳이 없어서 미안하지만 하룻밤을 자고 가려고 찾았읍니다.』

그 주인 여자는 조금도 서슴지 않고

『녜 그러세요, 그것이야 무엇 어려울 것 있읍니까. 이 밤중에 더 가시려면 대단히 위험합니다.』

하고 선선히 허락하며 친절히 맞아들여 방까지 치워 주었다.

소금 장수는 소금 짐을 방문 앞에 갖다놓고 방안에 들어가서 피곤한 다리를 펴고 누워 있으려니까 그 여자는 저녁 밥을 차리느라고 드나들다가 소금짐 위에 얹힌 자루를 집어 들고는 별안간에 두눈이 동구래지며 뛰어 들어와서 소금 장수를 보고

『여봅쇼, 이 자루가 손님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소금 장수는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아니올시다. 이 영 밑에서 누가 떨어뜨린 것을 주서 가지고 왔읍니다.』

하고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부인은 그 말을 듣고 두 눈에서 눈물이 핑핑 돌며 하는 말이

『이것 참 큰일 났읍니다. 이 일을 어찌한단 말씀이오. 우리 집 주인이 분명히 호랑이에게 물려 갔읍니다.』

그리고 그는 숨도 쉴 새 없이 다시 말을 이어

『여보시오. 우리 집 주인이 아까 점심 때 저 산너머 동네 잔치 구경을 갔는데, 그 집에 부조를 하느라고 이 자루에다 쌀 한말을 가지고 가더니 돌아오는 길에 영밑에서 아마 호랑이에게 해를 입은 모양입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읍니까.』

하고 목을 놓아 울기를 시작하였다.

소금장수는 무섭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그저 말없이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여자는 다시 눈물을 그치고 하는 말이

『이왕 일이 이 지경이 된 바에야 울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읍니까. 아무리 밤중이라도 이제 가서 시체나마 찾아와야 되겠읍니다.』

하고 다시 힘 있는 말로

『손님』

하고 부르더니

『여보세요. 손님께서 오늘밤에 이런 불행한 집에 와서 주무시게 된 것도 역시 불행이오니 이미 주객이 된 이상에는 미안하나마 나의 말씀을 좀 들어 주셔야 하겠읍니다.』

하고 말하였다.

소금장수는 가뜩이나 무서운 판에 또 무엇을 시키려나 하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어찌할 줄 모르고 그저 몸만 벌벌 떨고 있었다.

그 여자는 마당으로 나아가서 싸리나무 홰에 불을 켜가지고 오더니

『여봅쇼 손님, ── 어서 나오십시요, 같이 가십시다.』

하였다.

소금 장수는 그제야 겨우 말을 내어

『가기는 어디를 갑니까, 이 밤중에 어디를 가요 나는 무서워서 못 가겠읍니다.』

하고 그냥 털석 주저앉었다.

그 여자는 별안간에 얼굴 빛이 파래지며 눈으로 소금장수를 한참 노려 보더니 다시 독기있는 어조로

『여보쇼, 그러면 할 수 없어요. 우리 집 주인의 송장도 찾지 못할 바에야 당신까지도 죽이고 나도 죽을 수밖에 없지요.』

하고 부엌으로 뛰어 내려가서 날이 시퍼런 식칼을 가지고 와서 달려 들었다. 소금장수는 깜짝 놀라서 무섭던 생각도 다 어디로 가고 다만 그 여자 앞에 엎드려서 그저 사과하기를

『녜 잘못하였읍니다. 하루밤을 자도 만리성을 쌓는다고, 댁에 와서 잠시라도 신세를 끼치고서 주인댁의 불행한 일을 보고도 동정 못하는 것은 참 잘못입니다. 제발 용서하시고 아무 것이라도 시키시면 시키시는 대로 하겠읍니다.』

하고 그 여자의 명령대로 횃불을 잡고 영밑에 자루가 놓여있던 곳까지 더듬어 갔다.

그곳에 가서 보니 과연 그 근방에는 비린내가 코를 찌르고 새빨간 피가 보기에도 소름이 끼치게 군데군데 떨어지고 호랑이의 발자국이 이곳 저곳 남아 있었다.

그 광경을 본 부인은 그만 미쳐서 날뛰는 사람 모양으로 피흘린 자국을 따라 머루다래 덩굴이 엉킨 컴컴하고 깊은 산림 속으로 한 이마장쯤 들어가니 과연 바위 아래에 두 귀가 쭉 찢어지고 무늬가 어룽어룽하며 몸집이 산더미 같이 큰 호랑이가 송장을 옆에 놓고 으르릉 거리며 노리고 있었다.

그 부인은 송장을 보자마자 나는 듯이 그야말로 번개불 같이 호랑이 옆에 뛰어가서 송장을 어깨에 둘러메고 길가까지 내 달려오니 호랑이는 밥을 잃고 어흥소리를 치며 부인의 치맛자락을 물듯이 뒤를 따라 왔다.

그 부인은 소금장수를 향하여 크게 소리 지르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횃불을 가지고 뒤에서 오겠읍니까 송장을 가지고 앞에서 가시겠읍니까.』

무서워서 정신이 다 빠진 소금장수는 얼른 생각에도 두 가지가 다 못할 일이지마는 피가 줄줄 흐르는 송장을 등에 지고 가기보다는 횃불을 잡고 가는 것이 나을듯하여 뒤에서 횃불을 잡고 가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소금 장수는 불을 잡고 뒤에서 오며 본즉 두 눈이 불덩이 같은 호랑이가 금방 사람을 잡아먹을듯이 뒤를 따랐다.

소금장수는 그만 혼이 빠져서 황급히

『여보 부인, 나는 나는 송장을 지고 앞에서 가겠읍니다.』

하고 다시 송장과 횃불을 바꾸어 가지고 집에까지 왔다.

집에까지 와서 부인은 소금장수를 방안에 가두어두고 문을 거적대기로 잔뜩 가리워 놓고 자기는 남편의 송장을 안고 움 속에 들여다 놓고, 다음에 움문에다 토막나무를 쌓아 동그란 문을 내고 도끼를 가지고 문안에 서서 호랑이가 오기를 기다렸다.

조금 있더니 과연 호랑이놈이 송장 냄새를 맡고 움 앞까지 쫓아와서 머리를 움속으로 벗썩 들어 밀었다.

움안에서 지키고 있던 부인은 들고 있던 도끼로 죽을 힘을 다하여 호랑이의 머리를 냅다 쳤다.

놀라운 열녀(烈女)의 일편단심(一片丹心)! 그는 비록 힘이 약한 여자였으나 한 번에 기어이 그 호랑이의 머리를 깨뜨렸다. 그 호랑이는 벽력같은 소리를 한번 크게 지르고 그만 거꾸러져서 죽고 말았다.

그럭저럭 그날 밤을 새우고 날이 밝은 후 소금장수는 소금짐까지 내버리고 그 집을 떠나고자 하니 부인은 여러 가지 감사의 뜻을 표하고 궤 속에서 인삼(人蔘) 한 뿌리와 벼 한 필을 주며

『집안에 있는 것이 이것뿐이니 이것이나마 받아 가시요.』

하므로 소금장수는 한참 사양하다가 그것을 받아 가지고 그 집을 떠났다.

그 소금장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모양으로 속이 시원도 하고 정신이 얼떨떨하였다.

그 집에서 얼마만큼 걸어오다 다시 돌아다본즉 그 여자는 자기 남편의 송장을 안고 지붕위에 올라서서 자기의 손으로 집에다 불을 지르고 무참하게도 그 불속에 뛰어들어 타죽고 말았다.

옛날 같으면 열녀정문(烈女旌門)이나 열녀비각 같은 것이라도 나라에서 해 세웠을 것은 물론이고 시(詩)와 전기(傳記) 같은 것이라도 당연히 있을 일이지마는 일이 한 농촌에 숨은 여자의 일이기 때문에 아직껏 이 세상에서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고 다만 그 지방의 나뭇군들 입에서 일종의 전설과 같이 그 여자의 이야기를 전할 뿐이다.

그런데 그 여자는 출처내력도 잘 알 수 없고 그저 열녀 최씨(烈女崔氏)라고만 전하여 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