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담 사화 전집 (차상찬)/원한의 농성
- 원한(怨恨)의 농성(籠城)
때는 인조(仁祖) 십사년 병자(丙子) 십이월 십사일.
만호장안 한양성중은 금시에 법석거리며 물끓듯 하였다.
『난리 ─.』
『난리 ─.』
『되놈이 지금 경기 땅을 들어 섰다지?』
『경기 땅이 무엇이야 되놈의 군사가 시방 창의문 밖에 진을 치고 있어,
남녀 노유를 물론하고 보이는 대로 막 묶어 간다네.』
이렇게 온 성중 배성들은 모두 쑥덕거리었다. 요 근자 며칠을 두고 무학재 봉수대에는 봉화불이 끊일새 없고 서도에서 달려오는 역마의 말방울 소리는 귀를 요란스럽게 하였다.
노병(虜兵〓청나라 군사)이 구일에 창성(昌城)을 넘어서 서울을 향하여 올라갔다는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의 장계(狀啓)가 올라온 것이 지난 십일일, 이어서 그 다음 날인 십이일에는 적이 안주(安州)를 지나 갔다는 도원수(都元帥) 김자점(金自點)의 장계가 왔고, 또 십삼일에는 평양, 십사일에는 중화(中和), 그날 저녁에는 장단(長端), 이렇게 순차로 장계가 올라왔다.
적군이 국경을 건너선지 불과 오륙일 사이에 서울 근방에까지 이르렀다.
워낙 방비가 미약한 까닭에 아무도 나서서 이를 저항하는 사람이 없었다.
더욱 우스운 것은 장단 부사(長端府使) 황직(黃稷)은 적군에게 잡히어 머리를 깎이고 졸오(卒伍)에 편입되어 꾸벅꾸벅 딸리어온 일까지 있었다.
이와 같이 아무 거침 없이 무인지경으로 들어온 것이다.
종로 네거리를 위시하여 남대문 일대와 그리고 수구문 동대문 동소문을 통하는 큰 길거리에는 피난가는 사람으로 길이 메었다. 남부여대하고 울며 불며 달아나는 군중, 세간과 양식들을 실은 마바릿떼, 태평을 누리고 번화를 자랑하던 서울은 어느덧 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아아 처참한 이 광경!
이야기가 좀 옆길로 가지만, 대관절 이번 이 사변이 어찌하여 생겼는지 여기에 대하여 궁금히 생각하는 이가 있겠기에 먼저 이번 일이 일어난데서부터 잠간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리의 선조대왕(宣祖大王) 시절에 장백산 아래 사는 여진족(女眞族) 가운데 누르하치(弩爾哈赤)라 하는 영특한 인물이 하나 있었다. 그가 처음에 건주부(建州府) 부장이 되었더니 점점 세력을 얻어 여러 부락을 통일하고 우리 광해주(光海主) 십년(서력 一六一八[일육일팔]년)에는 혁도아랍(赫圖阿拉)에서 한(汗)의 위에 오르고 나라 이름을 금(金)이라 하였다. (십 팔년 후에 다시 청(淸)으로 고치었다.) 이때 명나라와 우리 나라의 연합군은 청국 군사와 싸워 많은 희생을 내고 여지없이 패하였고, 청국은 욱일승천(旭日昇天)의 형세로 강성하여 만주 땅을 거의 다 차지하다 싶이 하였다. 그 뒤 청국이 요동(遼東)을 함락시키니 거기를 지키고 있던 명나라 장수 모문용(毛文龍)이 쫓기어 우리 땅에 들어와 용천에 와 머물며 가도(椵島)에 근거지를 두고 장차 요동을 회복하리라고 선언 하니 청국은 이것이 큰 화근이라 하여 자꾸 말썽을 삼으므로 우리나라 입장으로서는 외교상 여간 난처한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일이 있던 한편으로 또 갑자년 이괄(李适)의 난에 패하여 만주로 도망간 한윤(韓潤)의 무리의 충동도 있어 청나라 태종(太宗)은 그 사촌 동생 아민(阿敏)을 시켜 군사 삼만으로써 압록강을 건너와서 모문용을 쫓고 우리 나라가 자기 나라에 대하여 적대 행위를 한다는 것을 말하며 군사를 평산(平山)에 머무르게 하고 우리 나라에 대하여 화친을 청하였다. 이때 세자는 전주에, 왕은 강화에 각기 난을 피하여 갔다. 이에 서로 화호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알고 두 나라의 대표가 강화에 모이어서 맹단(盟壇)을 쌓고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아래와 같이 맹세하였다.
금국(金國)의 서문(誓文)
〈금국 왕은 대금국 두 왕자로 더불어 맹세를 세우노라. 우리 두 나라가 이미 강화가 되었은즉 이로부터는 서로 마음과 뜻을 같이할 것이며, 금국이 만약 조선으로 더불어 수원을 맺고저 하여 군사를 내어 침범하면 황천이 재화를 나리시리라.〉
조선의 서문
〈조선국은 이제 정묘년 갑진월 경오일로서 금국으로 더불어 맹세를 세우노라. 우리 두 나라가 이미 화호를 작정 하였은즉 이로부터는 두 나라가 약조를 지켜서 제가끔 자기 영토를 지킬 것이니 만약 우리 나라가 금국으로 더불어 수원을 맺고저 하여 화호를 어기고 군비를 정리하고 성보(城堡)를 새로 세우거나 마음을 옳치 못하게 가지면 황천이 재화를 나리시리라〉
이와 같이 우리와 청국은 형제국으로 영구히 화호를 지킬 서약을 맺은 것이었다.
이것이 인조 오년 정묘(丁卯)년 삼월 삼일에 된 일로 역사에서 정묘호란(丁卯胡亂)이라 이르는 것이 곧 이것이다. 이렇게 나라와 나라 사이에 소중한 맹세를 한번 맺은 다음에는 서로 국제적 신의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어느 때까지든지 그 약조대로 잘 지켜서 영원히 평화를 보존하였으면 오죽이나 좋았으랴마는 불과 몇 해가 못되어 이렇쿵 저렇쿵 하다가 결국 피차에 화란을 일으키게 됨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통유한 국제 관계라 할 것이다.
청국서는 그 후 도무지 그 약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혹은 양식을 강청하며 혹은 명나라를 치는 데에 사용할 병선을 징발 하는 등 무리한 압박이 갈수록 더욱 심하였다.
또 그들의 군사들이 국경을 건너와 마음대로 민가를 약탈하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로 인하여 국내에서는 배금열(拜金熱)이 다시 격렬하게 일어났다.
인조 십사년에는 청국에서 다시 전에 맺은 형제의 맹세를 군신의 언약으로 고치자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온 조정의 놀라움은 그 절정에 달하였다.
장령(掌令) 홍익한(洪翼漢) 같은 이는 상소하여 국서를 가져온 사신의 목을 베고 국교 단절을 하고자까지 하였으며, 여러 신하가 다 청국에 대하여 척화(斥和) 선전(宣戰)을 열렬히 주장하였다. 왕께서도 이들의 주전론(主戰論)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청국 사신을 불러 보지 아니할 뿐아니라 비변사(備邊司)를 시켜서 선전할 이유를 적은 유지(諭旨)를 팔도에 내리게 하였다.
청국 사신은 조선 정부의 태도가 극도로 불온 하며 일반의 형세가 각 일각으로 험악하여 가는 것을 목도하고 급거히 도망하여 갔다. 가는 길에 유지 한 장이 우연히 수중에 들어오게 되므로 이것을 유일의 증거물로 하여 태종에게 갖다 바치었다.
이것이 이번 전쟁의 근인(近因)이 된 것이다. 청국 태종은 도리어 우리 나라에 대하여 맹세를 저버린 죄를 돌리고 만주 몽고 한인을 합하여 무릇 십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온 것이다. 십이월 구일에 그 선봉장 마부대(馬夫大)가 강을 건너서 의주 부윤 임경업이 백마산성(白馬山城) 요새를 지키고 있음을 피하여 사이 길로 하여 풍우같이 몰아서 심양(瀋陽)에서 떠난지 십여 일 만에 서울에 이르렀다.
이 경보를 받은 조정에는 일이 너무 다급한 까닭에 어찌 할 줄을 모르고 그저 황황망조할 뿐이었다.
사세가 이 지경에 이르니 여기에 대응할 계책은 세 가지 길밖에 없었다.
첫째는 적군을 맞어 들여 한번 크게 싸워서 흥하거나 망하거나 간에 통쾌히 끝장을 내는 것이요.
둘째는 굴욕적 강화를 하는 것이요.
셋째는 다른 곳으로 피하여 가서 팔도 근왕병(勤王兵)을 불러 적을 대항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중에 어느 것을 취할 것인가?
첫째의 것은 실력의 부족으로 될수 없으니, 당시 형편을 살펴 보면 군사에 미리 준비가 없었기 때문에 도성안에 있는 만명도 못되는 군사로서는 도저히 정예한 십만의 대병을 대적한다는 것은 아예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더우기 평소에는 주전론을 높이 부르던 사람들도 실상 이때를 당하여서는 한 사람도 싸우자고 나서는 이가 없었다.
둘째의 것은 체면상으로 도저히 안될 일이니 의관 문물이 찬연한 문명국으로서 저 금수와 같은 오랑캐에게 굴복하는 것이 크게 수치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임진란에 우리 나라를 구원 하여준 명 나라의 은의를 잊을 수 없는데, 우리가 명나라의 원수인 청국과 화친을 하면 우리가 명나라에 대하여 죄인 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들은 셋째의 계획을 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왕은 강화(江華)로 파천하기로 작정하였다.
강화는 옛적 고려 시대부터 피란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전국이 다 적군에게 짓밟히더라고 오직 여기만은 안전지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 고종(高宗)이 거기에 피란하여 몽고(蒙古)의 화를 피하였고, 바루 얼마 전에도 정묘노란(丁卯虜亂)에 피란한 일도 있었다. 어느 때든지 북방 민족이 침입할 때에는 아무데보다도 으례히 강화로 가는 것이 준례가 된 것이다. 예방승지(禮房承旨) 한흥일(韓興一)을 명하여 종묘 사직의 신주와 동궁 빈궁(嬪宮) 봉림대군(鳳林大君) 인평대군(麟坪大君)을 모시고 강화로 향하게 하며,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檢察使)로 이민구(李敏求)를 부찰사(副察使)로 하여 이에 배종하게 하였다. 심기원(沈器遠)은 유도대장(留都大將)을 삼아 서울을 지키게 하였다.
적군은 점점 서울을 육박하여 온다. 인심이 극도로 흉흉하였다. 왕이 방금 거동하기로 준비 할 사이에 사복사(司僕司)에는 말 몰잇군이 다 흩어져 달아나고 하나도 남아 있지 아니하므로 내승(內乘) 이성남(李星男)이 어마(御馬)를 몰고 왔다. 왕은 창황히 궁문을 나가 숭례문까지 이르렀다. 이때 적군이 벌써 삼개(麻浦[마포])건너 편인 양철평(良鐵坪)에 이르렀다는 보고가 왔다. 양철평은 지금의 고양군 은평면 역촌리(高陽恩平面驛村里)의 남쪽인데 서울서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그리고 적군의 수백기(數百騎)는 홍제원에 이르렀고 일지대(一支隊)는 어느 사이에 양천강(陽川江)을 건넜다. 이리 하여 강화로 가는 길은 그만 이로 인하여 막히었다. 왕은 부득이 어가(御駕)를 돌리어 남대문 누상에 임어 하시고 신경정(申景禎)은 문 밖에 진을 쳤다.
길가에는 갈 길을 찾지 못하여 갈팡질팡 헤매이는 군중이요, 온 성중에는 부자 형제 부부 서로 잃고 통곡하는 소리가 온 천지를 진동하니, 이 무슨 참변이냐! 왕은 황급히 좌우에 있는 신하들에게 어떻게 할 방책을 물으셨다. 전 철산부사(鐵山府使) 지여해(池如海)는 삼척 장검을 집고 들어가 왕의 앞에 엎드려
『지여해는 아뢰오. 적군이 국경을 넘은지 겨우 사흘이 못되어 천리 원로를 단참에 달려 왔사오니 군사나 말이 몹시 피곤하였을 것은 정한 일이오이다. 포수(砲手)로써 사현(沙峴)〓지금 현저동 서대문 형무소 근처)에 매복하였다가 적군의 선봉이 넘어 오거던 그를 쳐서 다 함몰 시켜 버리면 적군이 감히 전진하지 못할 것이 오이다. 이럴 지음에 대가(大駕)가 강화로 향하는 것이 좋을 줄 아옵나이다. 원컨대 정병 오백명만 소신에게 주시오면 곧 나가서 적군을 영격 하오리다.』
하고 물러 섰다.
왕은 지여해의 아뢰는 말에 대하여 어떠하냐고 물으셨다. 그러나 누구 하나 말하는 이가 없고 적군의 십만 대군을 겨우 오백명의 군사로서 대적한다는 것이 문제가 되느냐 하여 이 문제는 자연 묵살되고 말았다. 그때에 판윤(判尹) 최명길(崔鳴吉)이 어전에 나섰다.
『신이 적진에 가서 관변(觀變) 하고 오겠읍니다.』
『사세가 이미 이렇게 된 바에 그리 한들 무슨 별 방책이 있겠는가.』
『적군이 이제 양철평에까지 왔다 하온즉 곧 한강을 건느기만 하면 이날 안으로 도성으로 들어 닥칠 것이요, 파천 하신 줄 알면 곧 뒤를 추종하여 올 것이니, 안위을 알 수 없겠읍니다.』
『그런즉 어찌하면 좋겠는가.』
『신의 생각에는 노부(鹵簿)를 남한(南漢)으로 옮기심이 어떠하올가 합니다. 그리하오면 신이 적진에 가서 적군의 오는 길을 늦구어서 거동하시는 길에 거리낌이 되지 않게 하고저 하옵니다.』
최명길은 이와 같이 상주하고 동중추(洞中樞) 이경직(李景稷)과 함께 적진으로 달려 갔다. 그리하여 술과 고기로 군사들을 대접하고 출병한 이유를 물어 이런 말 저런 수작으로 시간을 허비하게 하여 군사의 행진을 늦구어서 이 틈에 완전히 피란하게 하였다.
북풍이 맹렬히 불고 눈보라가 날리어 근래에 드문 추위였다. 왕은 길을 돌리어 구리개로 해서 수구문을 나가 남한산성을 향하여 갔다. 대소 관리는 걸어서 그 뒤를 따랐다. 피란민들도 한데 섞이어 따라갔다. 상하 귀천의 분별이 없이 말 없이 묵묵히 한 걸음 두 걸음 애끓는 간장과 슬픔을 간직한 채 힘없이 걸어간다.
해는 어느덧 저물어 점점 어두움이 엄습한다. 험준한 산길, 더욱이 눈이 쌓여 전후 좌우를 분간할 수 없는데, 땅바닥은 얼어 빙판이 되어 발을 붙일 수 없게 미끄럽다. 보름달이라 하지마는 운무(雲霧)가 가리워서 그믐밤이나 어둡긴 마찬가지었다.
왕은 여기에서부터 말에서 내리어 걷기 시작하였다. 땅 바닥에 엎드러지시기를 여러 번 하셨다. 거의 성문에 다다를 때에 웬 사슴 한 마리가 길을 가로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군중 가운데서는
『야 이것은 속히 환궁할 길조(吉兆)다.』
고 소리를 질르는 자가 있었다.
가까스로 산성에 들어가니 때는 밤 이경((二更)〓 오후 아홉시경), 다시 강화로 이어(移御)하자는 영상 김류 등의 의견도 있었으나 그대로 여기에 머물러 있기로 되었다.
그리고 각도에 사람들 보내어 근왕병을 모으며 한편으로는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였다.
그날로서 적군은 서울에 들어왔다. 약탈과 살육은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십육일 이른 아침에는 적병이 산성을 포위하였다.
서울에 있던 우리 군사는 물러 나와 점차 산성으로 모여 들었다. 훈련대장 신경정(申景禎)과 중군 이현달(李顯達)을 동문에, 호위대장 구굉(具宏)과 수원부사 구인구(具仁垕)를 남문에, 총융대장 이서(李曙)를 북문에, 수어사 이시백(李時白)을 서문에 각각 지키게 하였다.
이때 성중에 있는 군사 수는 일만 일천명, 문무관리가 이백명. 왕족과 그 부측자가 이백명. 노비가 삼백명이요, 곡식은 일만 사천 삼백석, 장이 이백 이십 여동이, 소금이 구십석, 화약이 일만 팔천근, 은이 칠천 육백량이 있었다.
이것으로서 간신히 오십 여일은 견디어 갈 수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