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담 사화 전집 (차상찬)/정 이방의 귀동딸
- 정 리방(鄭 吏房)의 귀동딸
비단결 같은 금강(錦江)이 구비구비 감돌아 흐르고 수려한 봉황산(鳳凰山)이 병풍 같이 둘러싼 충청남도(忠淸南道)의 명도(名都) 공주(公州)에는 지금으로부터 약 삼백 수십년 전 선조(宣祖) 말년 경에 일개 여장부가 고고(呱呱)의 소리를 치고 탄생하였으니 그는 그곳 부호(富豪)로 유명한 이방(吏房) 정모(鄭某)의 귀동딸(貴童女)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질이 비범(非凡)하고 문필(文筆)이 능란하고 지감(知鑑)이 있었는데 검하여 인물(人物)이 또한 어여쁘게 잘 생기어 부모(父母)가 특별(特別)히 애지중지(愛之重之)할 뿐 만 아니라 그 동리(洞里) 사람들까지 모두가 그를 칭찬하여 방년이 이팔에 이르니 마치 꽃향기를 맡은 벌떼들 모양으로 이곳 저곳에서 청혼이 빗발치듯이 들어왔었다.
그 청혼(請婚)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자기네와 지벌이 같고 돈이 많은 아전의 아들도 있고, 가풍(家風)이 좋고 인물이 미려(美麗)한 촌 양반의 아들들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군수(郡守)의 아들이 양첩 혹은 후취로 장가들겠다는 청까지 있었다.
부모는 속으로 기뻐하면서 어떠한 곳이든지 그중에서 제일 좋은 곳을 선택하여 시집 보내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그 딸은 무슨 까닭인지 청혼이 들어오면 들어오는 족족 모두 깨끗이 거절해 버리는 것이었다.
어떠한 양반이고 부자이고 미남자이고 간에 전부를 거절하고 자기 부모에게 말하기를
『저는 언제든지 제 눈으로 보아서 저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아니면 비록 청춘홍안(靑春紅顔)이 반백발이 될지라도 결코 시집을 가지 않을 결심이옵니다.』
하고 우겨대니 부모들도 어찌하지 못하고 다만 딸의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어느 해 가을철이었다.
추수(秋收) 때가 임박하여서 그 이방(吏房)의 집에 두었던 머슴이 어디로 달아나 버리니 곧이어 다른 머슴을 구하게 되었다.
하루는 어떤 더벅머리 총각이 그의 집을 찾아와서 머슴살이 하기를 청하는데 키가 구척장송(九尺長松) 같고 그 얼굴이 검으틱틱한 것이 마치 숯가마에서 금방 나온 숯장수 얼굴 같고 몸집은 크기가 깍지더미 같았다.
그집 주인은 그를 한번 보고는 경풍을 하다싶이 깜짝 놀래었으나 그의 몸집이 그와 같이 장대하니 물론 힘이 세고 일도 잘 하리라고 생각하여 집에 두고 일을 시키게 되었다.
그는 모양이 그와 같이 장대하게 생긴만치 힘이 또한 천하에 장사이어서 쌍수산성(雙樹山城) 같은 곳으로 나무를 하러 가면 남처럼 낫이나 도끼를 가지고 가지 않고 그냥 맨손으로 가서 큰 나무를 마치 무나 배추를 뽑는 듯이 쑥쑥 뽑아서 등에 걸머지고 오니 동리(洞里) 사람들이 모두 하품을 하고 놀랬다.
그러나 원체 위인이 말이 없고 또 우직(愚直)한 까닭으로 종일(終日)가도 남하고 공연히 실없는 말 한마디를 안하고 남이 시킬 때에 대답만 할뿐, 자기의 할일만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의 근본도 내력도 성명도 도무지 알지를 못하고 다만 기축년(己丑年)에 낳은 까닭에 이름을 기축(己丑)이라고 부를 뿐이었다.
이러하니 남들이 그를 별명짓기를 바보 장사니 바보 기축이니 하고 마구 조롱을 하며 그 집주인과 심지어는 하인들 까지도 그를 일은 잘한다고 칭찬은 할지언정 사람으로는 아주 바보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그집 주인의 딸만은 그를 특별히 마음속으로 사랑하고 흠모하여 무슨 음식이던 맛난 것이 있으면 잘 거두어 먹이고 의복(衣服) 같은 것도 찢어지면 곧 다른 옷으로 바꾸어 주었다.
그러나 누가 보든지 그 처녀가 그를 사람으로 불쌍히 여기어서 그리하지 그를 남달리 사랑해서 그리하리라고는 상상이라도 하였으랴!
그러나 천만 뜻밖에도 그 처녀는 기축을 벌써 자기의 남편될 사람으로 인정하고 적당한 시기(時期)에 정식으로 결혼식(結婚式)을 하리라고 굳게 마음속으로 결심까지 다 하였다.
(물론 기축과 다른 관계가 생긴 것은 아니다)
그의 부모는 그러한 사정도 모르고 하루는 어떠한 집과 약혼(約婚)을 하려고 그 처녀에게 다시 의사(意思)를 물어 보았다.
얼마 전까지도 자기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아니면 결혼하지 않는다던 그 처녀는 아주 대담하게도 부모에게 말하되
『저는 벌써 남편 될 사람을 선택하여 놓았으니 다만 결혼식 할 것이 문제이지 다른 곳과 약혼은 문제도 삼을 것이 없읍니다.』
하였다.
그의 부모는 깜짝 놀라며
『네가 미쳤느냐 남편을 정하다니 부모도 모르는 사이에 무슨 남편을 정했단 말이냐, 만약 정하였다면 어떤 놈이란 말이냐.』
하고 노발대발하니
그 처녀는 천연한 안색(顔色)으로 대답하되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오나, 소녀의 남편 될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집에서 머슴 노릇 하시는 기축이올시다. 남이야 흉을 보던말던 저는 그 사람과 결혼을 못하게 된다면 차라리 약(藥)이라도 먹고 죽거나 그렇지 않으면 금강(錦江)에 가서 빠져 죽겠읍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의 부모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아무말도 못하고 있다가 다시 별의 별 말을 다 하였으나 이미 죽기로 결심한 그 처녀는 절대로 부모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일이 이와같이 되고 보니 부모도 또한 그를 죽일 수도 없고 하여서 다만 집안의 운수(運數)를 한탄하면서 결혼을 하게 하였다.
그러나 집안 사람과 동네 사람들 보기에 하도 창피하여 약간의 돈냥을 변통하여 주고 먼 지방으로 가서 죽든지 살든지 하고 다시는 부모의 눈앞엔 보이지도 말라고 하여 기축 부부는 하는 수 없이 그 집을 떠나 북(北)으로 북으로 유리하여 온다는 것이 바로 서울의 새문밖 평동(平洞)이었다.
그는 원래 지감이 있어서 자기의 손으로 그 일을 맨든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부모를 원망치 않고 도리어 장래에 돌아올 행복을 기뻐하며 술장사 영업(營業)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마치 옛날에 사마상여(司馬相如)와 탁문군(卓文君) 모양으로 부인은 친히 술을 붓고 기축은 온갖 심부름을 하였다.
남이 보면 기축은 역시 술집 더부살이 같이 보였다.
그러나 그 부인은 조금도 그를 업신여기지 않고 지성껏 공경하며 부지런히 영업을 하여 불과 일년(一年)동안에 미천도 상당히 모으게 되었다.
그때에 광해주(光海主)라는 임금이 여러 가지의 악정(惡政)을 하여 심지어 그의 모후(母后)되는 인목대비 김씨(仁穆大妃金氏 〓 宣祖王妃[선조왕비])를 서궁(西宮)에 가두고 자기의 아우 여러 형제를 또한 무참하게 죽이며, 정부대관(政府大官)은 모두 대북(大北) 일파가 차지를 하여 서인(西人)들은 꼼짝 못하게 하니, 서인(西人) 중에 김류(金瑬), 최명길(崔鳴吉), 이귀(李貴), 장유(張維), 신경진 등의 여러 불평객들은 광해군(光海君)을 들어내고 인조대왕(仁祖大王)을 왕으로 맞아들여 세워서 서인(西人)의 세력(勢力)을 다시 회복하려고 혹은 강정(江亭)으로 혹은 절간으로 모여다니며 음모를 하였는데, 그때 서울에서 제일 수석(水石)이 좋고 제일 으슥한 곳은 창의문(彰義門) 밖이기 때문에 그들은 매일 놀이를 하는척 하고 그곳으로 모이게 되었다. 하루는 김류(金瑬), 최명길(崔鳴吉), 이귀(李貴), 장유(張維), 신경진등 여러 서인(西人)들이 시회(詩會)를 베푸는체 하고 홍제원(弘濟院) 솔밭으로 모이게 되었다.
그때에 기축의 부인은 벌써부터 여러 사람들이 반정(反正)의 음모를 하는 것을 짐작하고 항상 그들의 동정을 살피더니, 마침 그날 이같은 모임이 있음을 알고 좋은 술과 안주며 떡이며 가진 음식을 특별히 작만하여 기축에게 한 짐을 잔뜩 지워주고 또 통감제사권(通鑑第四卷)을 주되 그중 한곽광(漢霍光)이 창읍왕(昌邑王)을 폐(廢)한 구절을 표하여 주며 부탁하되
『이 음식을 곱게 지고 저기저기 무학재 고개를 넘어서 홍제원으로 가면 그 뒷 솔밭에 어떤 선비들이 칠팔인(七, 八人)이 모여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 터이니 아무말도 하지 말고 그냥 말하기를 저는 촌사람으로 이 글을 배우고자 약간의 음식을 차려가지고 왔노라하고 그들에게 음식을 전하여 먹이고, 그 책을 펴서 표한 곳을 묻되, 만일 누가 보냈느냐 하거던 우리 집에서 내가 보냈다고 하고 돌아올 때는 그들과 같이 우리 집으로 모시고 오십시오.』
하고 부탁을 하였다.
기축은 원래가 우직(愚直)한 사람인 까닭에 자기의 부인이 앉으라 하면 앉고 누으라고 하면 눕는 사람인지라 꼭 그 부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다.
그날에도 그 부인이 시키는 대로 그곳을 찾아가서 아무 말도 없이 부인이 일러 준 대로 말을 하니 여러 사람들이 대경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음식을 그대로 잘 먹은 다음에 서로 수군수군 하며 말하기를
『도대체 그 여자는 귀신이 아니면 이인(異人)인즉 우리가 반듯이 찾아가서 보는 것이 옳을 것일세.』
하고 그길로 기축을 따라 그 집으로 갔었다.
기축의 부인은 그들을 흔연히 맞아들여 조용한 방에 앉히고 말하되
『제가 비록 아는 것은 없사오나 여러분의 큰 뜻을 짐작한지 오래였읍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모이실 곳이 없어서 산곡(山谷)이나 절간(寺[사])으로 가끔 가시오니 그러시다가 남에게 발각이나 되어 대사(大事)가 낭패가 될 것 같으면 어찌하시겠읍니까. 제 집이 비록 누추는 하오나 조용은 하고 술맛도 또한 좋으니 무슨 모임이 있으시면 안심(安心)하시고, 저의 집으로 오십시오.
저의 남편 기축은 비록 못생겼으나 사람이 우직하고 힘이 천하(天下)에 장사라 여러분이 시키시면 무엇이든지 몸을 아끼지 않고 잘 할터이오니 믿고잘 써 주시고 장래 대사를 이룬 뒤에 잊지나 마시옵소서.』
하였다.
여러 사람들은 그 부인의 생각이 탁월한 것을 보고 또한 기축의 힘센 것을크게 감복하고 기뻐하여 그 후부터는 매사를 의논(議論)할 때는 반드시 그의 집으로 모이게 되고 반정(反正)에 대한 여러 가지 계획도 그의 가르침이 많았다.
그중에 이서(李曙)라는 사람은 기축을 특별히 친애(親愛)하여 형제같이 지내니 인조(仁祖)가 어명(御命)으로 이서(李曙)의 종제로 삼고 성(姓)을 이씨(李氏)라 하여 이름도 기축(己丑)을 기축(起築)으로 고치게 하였다.
기축 ─ 이후부터는 기축(己丑)은 기축(起築)으로 씀 ─ 은 원래 힘이 장사인 까닭에 장단부사(長湍府使李曙[장단부사이서])의 부하에 있어서 여러 반정(反正) 공신(功臣)과 통신(通信)을 하는데 장단(長湍)에서 매일 서울을 왕래하여 일년내(一年內)에 말(馬) 허리를 세필(三匹)이나 꺾었다.
그뒤 반정(反正)할 때에는 이서(李曙) 군(軍)의 선봉장이 되어 연서역(延瑞驛)에 이르니 인조(仁祖)가 크게 기뻐하여 친히 어포(御袍)를 벗어서 기축에게 입히었다.
그때에 창의문(彰義門)을 도끼로 패서 깨뜨린 사람은 세상에서 흔히 원두표(元斗杓)라 하지마는 사실은 이기축(李起築)이 앞장으로 서서 깨뜨린 것이었다.
반정(反正)뒤에 그는 정사삼등공신(靖社三等功臣)의 상(賞)을 타고 완계군(完溪君)으로 봉작(封爵)되었으며 그 부인은 또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되니, 전날에 그를 천(賤)히 여기고 박대하던 그의 부모 친척들이 모두 기뻐하여 비로소 그 부인의 지혜에 탄복하였다.
그 뒤 병자년(丙子年)에 기축(起築)은 인조(仁祖)를 모시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 가서 호병(胡兵)들과 싸우니 많은 적군을 죽이고 세자(世子)가 심양(審陽)에 볼모로 잡혀가는 치욕을 당할 때에는 팔장사의 한 사람으로 세자(世子)를 보호(保護)하고 심양까지 갔다가 병이 나서 먼저 돌아와 죽었는데 시호(諡號)를 양의(襄毅)라 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