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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염사/산상왕의 경희 소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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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 (고구려) 宮中 (궁중) 名花 (명화) 山上王 (산상왕)慶姬 (경희) 小后 (소후)

고구려의 역대 왕궁(高句麗 歷代 王宮)에서 미인을 찾자면 첫째는 위에 소개한 중천왕(中川王)의 총희 관나(寵姬 貫那)요 그 다음은 여기에 소개하려는 산상왕의 소후(山上王 小后)다.

이 소후는 고구려 주통촌(酒桶村)에서 탄생하였으니 그의 어머니가 그를 잉태할 때에 무당에게 점을 한즉 장래의 왕후 될 딸을 낳겠다고 하므로 그의 어머니는 속으로 혼자 기뻐하더니 十삭이 지난 후에 과연 옥녀를 낳으니 마음에 더욱 기뻐하여 그의 이름을 후녀(后女)라고 지었다.

그는 비록 궁벽한 촌에서 생장하였으나 자색이 출중하고 재질이 특이한 까닭에 어려서부터 그의 부모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것은 물론이어니와 온 동리 사람들까지도 모두 칭찬하고 흠모ㅎ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방년이 二十에 달하니 그의 아리따운 소문이 점점 넓리 퍼져서 마치 만개한 꽃떨기에 봉접(蜂蝶)의 무리가 모여들듯이 이곳저곳에서 통혼이 들어왔다. 그러나 달 속의 단계(丹桂)는 심상한 노상 행인의 손에 꺾일 바 아니요 유곡의 난초(幽谷蘭草)는 보통 속객의 발에 짓밟히게 될 것이 아니었다. 산상왕(山上王)과 주통촌의 처녀— 전생에 그 무슨 기연이 있었든가— 그 여자에게는 아무리 좋은 곳에서 통혼이 들어와도 그의 부모거나 본인이거나 도무지 승락을 하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는 듯이 그대로 한 달 두 달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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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때다. 고구려의 임금 산상왕(山上王)은 일찌기 우후(于后)를 맞아서 왕후를 삼았으나 나이 많도록 아들이 없어서 항상 걱정을 하다가 어떤 술법(術法)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명산대천(名山大川)에 기도(祈禱)를 하며 아들 낳기를 축원하였더니 하루는 비몽사몽간에 우의(羽衣)를 입은 천사(天使)가 공중으로 내려오며 말을 전하되 너로 하여금 소후(小后)를 얻어 귀한 아들을 낳게 하여 줄 터이니 조금도 염려 말라고 하였다. 그 말이 끄친 지 얼마 아니하여 때마침 교제=郊祭=(교제는 들에서 천제 지내는 것)에 쓰려고 동여 놓았던 도야지(豚) 한 마리가 빠져서 도망을 갔다. 그것을 맡았던 사람은 그 도야지를 쫓아서 山을 넘고 물을 건너 이리로 가고 저리로 가다가 우연히 주통촌까지 다다르니 뜻밖에 二十세 가량 된 어여쁜 처녀가 얼굴에 웃음을 디우고 앞길도 뛰어나와서 그 도야지를 잡아 주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이상히 여겨 남모르는 밤중에 그 처녀의 집을 찾아가서 하루밤의 아름다운 인연을 맺으니 그 처녀는 그날부터 태기가 있었다. 산상왕의 왕후 우씨(于氏)는 본래 음일하고 질투심 많기로 유명한 여자였다. 그 소식을 한번 들으매 질투심이 머리 끝까지 뻗쳐서 혼자 생각하기를 후녀(后女)는 자기보다 나이 어릴 뿐 아니라 얼굴이 천하절색인 데다가 더구나 왕의 아이까지 배었으니 그 여자가 만일에 왕자를 낳는다면 자기는 사랑을 빼앗길 뿐 아니라 장래에는 지위까지도 빼앗기게 되기 쉬울 것이니 일을 미연(未然)에 방지하는 것이 옳겠다 하고 비밀히 병사(兵士)를 보내서 후녀를 죽이려고 하니 후녀는 미리 그 음모를 알고 밤중에 남복을 하고 도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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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후녀는 원래 약한 여자의 몸이라 아무리 먼저 도망을 하였지마는 굳세고 빠르게 쫓는 병사에게 그여히 붙잡히게 되어 생명이 위급하게까지 되었다. 보통의 여자 같으면 겁만 집어먹고 말 한마디도 못하고 있다가 속절없이 병사의 칼날에 원통한 귀신이 되고 말았을 것이지마는 원래에 재질이 영리하고 임기응변을 잘하는 그는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이 병사를 보고 책망하기를 나 같은 사람은 아무리 죽인다고 해도 관계가 없겠지마는 내 몸에는 벌써 왕자가 잉태되어 있으니 이 나라의 병사로써 이 나라의 왕자를 죽이는 것이 의리상 어찌 될 수 있는 일이냐고 하니 병사가 그를 감히 해치지 못하고 도리어 사죄를 하고 돌아갔다. 그 뒤에 그는 일개 왕자를 탄생하며 산상왕은 크게 기뻐하여 그를 다시 궁중으로 맞아들여 소후(小后)를 봉하고 또 그의 아들은 교제(郊祭) 지내려던 도야지가 도망한 탓으로 낳게 되었다고 하여 이름을 교체(郊彘)라고 지었으니 그는 곧 고구려에 유명한 동천왕(東川王)이다. 동천왕은 우후(于后)의 가장 미워하는 소후(小后)의 몸에서 탄생하니만큼 어려서부터 우후에게 여러 번 위해(危害)를 입을 번하였다. 그러나 왕은 원래에 천실이 너그럽고 어질기 때문에 그 음험하고 질투 많은 우후도 어찌하지를 못하고 도리어 감화가 되어 최후에는 자기의 소생한 아들과 같이 사랑하고 필경은 왕자로 봉하게 되어 산상왕(山上王)의 왕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그가 어렸을 때에 우후가 그에게 대하여 인물의 어떠한 것을 시험하던 이야기를 잠깐 소개하자면 한번은 우후가 궁중에 있는 말(馬)의 갈기를 다 잘라 버렸더니 왕은 그것을 보고 측은한 안색으로 후께 말하여 말의 갈기는 사람의 머리와 같이 귀중한 것인데 말 못하고 자유 없는 짐승의 것이라고 그렇게 함부로 자르는 것은 가엾지 않으냐고 하여 우후로 하여금 그의 마음 착한 것을 감복하게 하고 또 한 번은 밥을 먹을 때 심부름하는 사람을 시켜서 일부러 국(羹)을 엎질러서 옷을 젖게 하였더니 그는 역시 조금도 성내는 빛이 없고 도리어 심부름하는 사람더러 손을 데지 않았느냐 하니 후와 일반 사람들이 그의 인물이 관대한 것을 탄복하였다. 관나(貫那)와 이 소후는 다 같은 고구려 궁중에 총애를 받은 미인이지마는 관나는 왕자를 하나도 낳지 못하고 연후(椽后)를 음해하려다가 최후에 자기가 먼저 비명횡사를 하고 이 소후는 동천 같은 성군을 낳고 그 질투 많은 우후와도 감정을 잘 융화하여 자기도 부귀를 누리며 잘 지냈다. 이것을 보면 자래 미인박명이니 미인악덕이니 하는 것도 결국은 사람을 따라서 다른 것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