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염사/선화공주
- 善花 公主
선화 공주(善化 公主)는 신라 진평왕의 세째 따님이다. (新羅 眞平王의 第三女) 그는 어려서부터 아름답기로 신라 일국에만 이름이 났을 뿐 아니라 이웃나라 백제(百濟)에까지 소문이 났었다. 그때 백제의 서울 남지(南地) 못가에는 어떤 과부의 아들이 있었으니 그는 남보다 지모(智謀)와 국량(局量)이 특이하나 집이 가난하여 항상 들에 가서 마(薯)를 캐서 그것을 팔아 생활을 하니 남들이 이름 짓기를 서동(薯童)이라고 하었다.
이 서동은 선화 공주의 어여쁘다는 말을 듣고 칼로 자기의 머리를 선뜻 깎은 뒤에 신라의 서울인 경주로 향하여 가니 그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자기가 무슨 방법으로든지 그 선화 공주를 꾀어내서 자기의 아내를 삼고저 함이었다. 그리하여 서동은 마를 한 짐 잔뜩 짊어지고 신라의 서울 거리로 돌아다니며 여러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며 이러한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 『선화 공주님은
- 남몰래 시집 가려고
- 밤에랑은 서동의 방을 찾어 간다오』
- 남몰래 시집 가려고
—(原歌)—
- 善花公主主隱
- 他密只嫁良置古
- 薯童房乙夜矣卯(卵?)乙抱遣去如
아이들은 이 노래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불러 퍼쳤다. 하루 이틀 동안에 신라 성 안은 이 동요를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리자 이것이 궁중에까지 문제가 되어 마침내 선화 공주를 멀리 귀양 보내게 되었다.
선화 공주는 귀양길을 떠나게 되니 왕후는 그를 불쌍히 여겨 남모르게 순금 한 말을 주었다. 서동은 자기가 모든 일을 계획적으로 해놓은 것인만큼 한편으로 미안도 하였으나 또 한편으로는 뜻대로 되어가는 것이 무한히 기뻤다. 그리하여 공주의 뒤를 밟아가다가 어느날 밤 공주와 좋은 연분을 맺고 그 자세한 이야기를 한 뒤에 같이 백제를 향하여 도망하였다.
백제 서울에 이르러 새살림을 사는 동안 그들은 차차 인망을 얻어 마침내 백제의 왕이 되니 그는 곧 백제의 제三十대 왕인 무왕 장(武王 璋)이었다. 이 무왕은 임금이 된 뒤에 선화 부인과 같이 익산(益山)에 거동하여 용화산(龍華山) 위에 미륵사(彌勒寺)와 미륵상(彌勒像)을 건설하니 신라 진평왕이 여러 공장이를 보내서 그 일을 도와주었다. 그 석탑은 높이가 두어 길이나 되니 조선에서 가장 큰 석탑으로 지금까지 익산에서 큰 고적으로 보관하게 되었다.
—(三國遺事 參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