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염사/의병장 김면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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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亂 (임란) 義兵將 (의병장), 金沔 (김면) 夫人 (부인)

임진란(壬辰亂) 때에 의병장으로 명성이 혁혁하던 병사 김면(金沔)이라면 별로 모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공을 이루고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무론 그의 열렬한 충의와 절륜한 무용이 있는 까닭이겠지마는 사실은 그의 충의와 무용보다도 그 부인의 특이한 지모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면은 원래 소년 시대에 집이 가난하기로 유명하여 밥 굶기를 그야말로 있는 집 사람들의 떡먹듯 하고 옷도 또한 헐벗으니 누가 사위 삼기를 즐겨할 수 있으랴. 나이 二十이 훨씬 넘어 왜총각이 되도록 장가를 가지 못하고 있으니 이웃 사람들이 모두 노총각이라고 조조를 하였다. 그런데 그때 그 근처에는 마침 한 처녀가 있었으니 얼굴이 추하고 못생기기로 유명하여 역시 二十이 훨씬 넘도록 누구나 다려가지를 않고 그냥 규중에서 꽃다운 청춘을 허송하게 되었다. 두 노총각과 노처녀는 우연한 기회에 서로 알게 되매 피차에 동정심도 생기고 정의가 소통하여 남 유다른 사랑을 하다가 아주 정식의 결혼을 하여 부부가 되었다. 그 부인은 외모가 비록 그렇게 추하고 못생겼지마는 옛날의 제갈량 부인 황씨(諸葛亮 夫人 黃氏) 모양으로 지모와 식감이 비상하니 김면는 자기 아내로 알 뿐 아니라 선생처럼 대접하여 무슨 말이나 그 아내가 시킨다면 일호도 거역지 않고 일일 복종하였다.

하루는 그 부인이 별안간에 하인을 부르더니 수중에서 은자(銀子) 석 낭을 꺼내주며 분부하되 이 길로 아무 장터를 가면 어떤 사람이 아주 파리하고 비지 먹은 말 한 필을 팔려고 할 터이니 아무 말도 말고 이 은을 다 주고 그 말을 사 오라고 하였다.

하인은 그의 말이 너무도 이상하여 마음에 미덥지 않았으나 양반 부인의 분부라 감히 거역지 못하고 반신반의하며 가르쳐주는 그 장터로 간즉 과연 그 부인의 말과 틀림없이 그러한 말이 있고 그 값도 또한 틀림없는 은자 석 냥이었다. 하인은 신기하게 여겨서 그 말을 사가지고 오니 부인은 크게 기뻐하며 자기의 손으로 친히 말을 먹이며 또 침도 주고 쑥으로 떠 주기도 하니 불과 며칠에 그 말이 병이 다 났고 살이 두루미 찌듯 쪄서 누가 보든지 한다 하는 용마로 보게 되고 또 타고 달리면 걸음이 빠르기 비호와 같아서 일행천리를 하니 김면이 특히 사랑하여 뒷날 의병장이 될 때에도 그 말을 타고 항상 동서로 횡치하며 군사를 지휘하였다.

그리고 그가 사는 동리의 남쪽에는 큰 벌이 있었는데 해마다 장마가 지면 냇물이 그리로 넘쳐 흐르고 모래와 돌이 싸여 묻혀서 곡식 하나 심을 수 없으므로 몇 十년을 사황지(沙荒地)로 그대로 버려 두었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 부인이 남편을 보고 동리 사람들을 청하라고 하여 술과 밥을 많이 차려 먹이고 다 같이 힘을 써서 그 벌판에 논을 치자고 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코웃음을 치며 못될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남편 되는 김면은 그 부인의 말을 천신 같이 믿는 까닭에 여러 사람들을 강권하여 새로 작답을 시작하였더니 얼마 아니하여 별안간 비가 오기 시작하여 며칠을 계속하고 해마다 그 벌로 흘러오던 홍수가 뜻밖에 그 건너편 뚝을 붕괴시키고 터져 흘러가고 그전날에 진흙 바다가 되던 그 벌은 아주 안전지대가 되며 작답하였던 논은 모두 일등 답이 되어 농사를 잘 지어 먹게 되니 동리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탄복하여 그를 귀신같이 믿게 되고 그 뒤에는 무슨 일을 시키든지 시키는 대로 다 듣게 되어 농사를 하는 데도 그 부인이 콩을 심으라 하면 콩을 심으며 팥을 심으라 하면 팥을 심고 또 그 부인의 말하는 대로 다 잘 되었었다.

그뒤 선조(宣祖) 二十二년 신묘년 봄(辛卯春)을 당하였다. 다른 해 봄에는 그 부인이 동리 사람들을 지휘하여 어느 논에는 무슨 벼를 심고 어느 밭에는 무슨 곡식을 심으라고 하더니 그해 봄에는 특별히 아무 곡식도 심지 말고 꼭 박(匏)만 심으라고 지휘하였다. 다른 사람이 만일 그런 말을 한다면 물론 듣지 않았겠지마는 평소에 귀신같이 믿는 그 부인이 그렇게 시키니 아니 들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하여 온 동리 사람들이 모두 박 농사를 힘쓰니 그 동리는 모두 논에도 박이요 밭에도 박이요 산비탈에도 박이요 논뚝 밭뚝에도 박이어서 온 동리가 아주 박 천지가 되고 가을에 따 드리니 박이 집집마다 마치 산떼미 같이 쌓여 있게 되었다. 부인은 다시 동리 사람을 지휘하여 그 박으로 모두 뒘박을 파게 하고 뒘박은 또 송연(松烟)으로 시꺼멓게 칠을 하여 대까지(竹竿)에 꿰어놓고 또 일방으로 무쇠(鐵)로 뒘박을 만들어 흑칠(黑漆)을 하고 철장에 꿰어 놓으니 얼른 보면 어느 것이 정말 쇠뒘박인지 분별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쇠뒘박은 모아서 자기가 따로 광속에 간수하여 두고 보통 뒘박은 동리 사람에게 집안 식구 수대로 나눠주어서 잘 간수하라 하니 동리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그저 그 부인이 하라는 대로 유유복종할 뿐이었다. 그 익년 임진(壬辰) 四月이었다. 뜻밖에 큰 난리가 나서 적군이 하루에 부산(釜山)을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각지를 쳐서 들어오니 조선팔도가 모두 무인지경같이 감히 대항하는 자 없고 곳곳마다 남녀노소가 피난을 가느라고 울며불며 물 끓듯이 야단을 쳤다. 그때 와서 그 부인은 동리 사람들을 모아놓고 약속하되 지금에 적세가 창궐하여 팔도가 모두 그 해를 입게 되었은즉 누구나 만일 이 동리서 한발작이라도 옮기게 된다면 모두 어육지변을 당할 터이요 내 말을 잘 들어 지휘하는 대로 한다면 살아난다 하니 동리 사람들이 한 사람도 요동을 하지 않고 다 그의 명령을 복종하게 되었다. 부인은 그제야 자기가 감추어 두었던 쇠뒘박을 꺼내어 동구 밖에 적병이 들어오는 길가에다 벌려 놓고 동리 사람은 모두 정말 뒘박을 채워 동구 밖에 진을 치고 적병이 오기를 등대하였다. 며칠 뒤에 적군은 과연 그 동리 앞으로 지나다가 그 동리가 백여 호 대촌인 것을 보고 들어가 습격을 하려고 조수 밀듯이 떼를 지어 그 동리로 들어오다가 길가에서 쇠뒘박을 보고 이상히 여겨 들어보니 그 무게가 三四十 근은 무려 하게 되어 누구나 감히 땅뜀을 못하고 서로 드려다만 보고 있는 중 별안간 동구밖 산 밑에서 북소리가 나며 오륙백 명이 일제히 쇠뒘박과 꼭같은 뒘박을 메고 고함을 치며 내달으니 적군이 크게 놀라며 서로 경계하되 이곳은 모두 장사들만 사는 곳이니 침범하였다가는 큰 화를 당하겠다 하고 모두 도망질을 치고 김면은 그 기회를 타서 뒤로 추격하니 적군이 크게 패하였다. 그 부인은 그 후 점점 동리 사람을 독려하여 적군을 방어ㅎ게 하고 또 남편을 독려하여 의병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때 다른 동리는 모두 적군에게 해를 입었으나 유독 그동리만은 팔년 동안에 아무 걱정 없이 안전하게 잘 피난을 하고 김면도 또한 의병대장으로 여러 번 큰 공을 이루었다. (錦溪筆讀)

—다른 記錄에는 이 事實을 金千鎰 夫人의 事實로 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