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염사/이귀의 여 예순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反正 亂中 三大 女傑
—李貴女 斷髮娘 李禮順—

광해군(光海君) 十五년 癸亥 —西紀 一六二三— 三月 十五日 밤에 청천벽력과 같이 일어난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정변은 그 전날에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을 쫓아내고 자기가 들어서던 소위 세조반정(世祖反正)과 또 중종(中宗)이 연산군(燕山君)을 쫓아내고 대신 임금이 되던 중종의 반정(中宗反正)과 아울러 이조 역사상(李朝 歷史) 삼대 정변으로 치는 큰 변이였다.

그 반정운동의 표면에 나서 가진 음모와 활략을 다 하던 사람은 물론 당시 서인파(西人派)의 김류(金瑬), 최명길(崔鳴吉), 이귀(李貴), 김자점(金自點), 신경진(申景禛), 이서(李曙), 심기원(沈器遠), 장유(張維) 등 여러 사람이였지만은 만록총중 일점홍으로 그 이면에 남모르게 숨어 있어서 모든 탐정과 모든 알선을 하야 반정운동에 큰 원조를 한 무명의 여류호걸이 세 사람이 있었으니 한 사람은 그 반란에 큰 공신으로 유명하던 연평부원군 이귀(延平府院君 李貴)의 딸이례순(李禮順)이오 그 외 두 사람은 역시 그때의 공신 완남군 이후원(完南君 李厚源)의 형수 조부인(兄嫂 趙夫人)과 이기축의 부인 정씨(李起築 夫人 鄭氏)다.

이례순은 원래 자색이 출중하고 재가 비범하야 어려서부터 말을 잘 하고 시문(詩文)에 또한 능한 까닭에 그 아버지에게 여러 그 남매 중 제일 사랑을 많이 받았었다. 그러나 재자가인은 원래 박명이 많은 탓이라 할지 그는 일즉이 김자점의 아우 자겸(金自點弟 自兼)에게 출가하였다가 불행이 청춘에 과부가 되어 적막한 공규(空閨)에서 가련한 독신의 생활을 하다가 불법(佛法)을 신앙하는 관계로 참찬 오겸의 아들 은관(參贊 吳謙의 子 彥寬)과 비밀한 정을 통하고 세상 사람의 이목을 피하야 멀리 남으로 남으로 경상남도 거창(慶南 居昌)으로 도망을 하야 산중 굴속(石窟)에다 사랑의 복음자리를 정하고 비밀의 생활을 하더니 호사다마로 일이 발각이 되니 당시에 소위 법을 맡은 사나운 관리는 은관을 잡어다가 부녀를 유궤도주(誘捌逃走) 하였다는 죄명으로 장지타지(杖之打之)하야 무참하게 형살(刑殺)을 하니 례순은 자기의 신세와 세상 일을 아주 비관하고 생명같이 아끼던 그 탐스러운 머리를 가위로 선득 잘러 버리고 여승이 되었었다.

그리하여 전날에 녹비홍안의 귀여운 미인이던 그는 일조에 가사속락의 가련한 신세가 되어 가을 하늘에 뜬 구름 모양으로 이 불당 저 불당으로 정처 없이 돌아다니며 청승스럽게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고 무정한 사바 세계를 저주 원망하다가 그럭저럭 다시 서울 부근의 어떤 사찰에 와서 몸을 의탁하고 한적한 세월을 보내였다. 그러나 얼마 아니 하야 그의 신변에는 뜻밖에 또 큰 재변이 생겨났으니 그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그 절에 있는 하인 놈이 도적질을 하다가 금부(禁府=지금 檢事局 같은 것)에 잡히게 된 까닭으로 그까지 그 연좌에 죄를 입어 자수궁(慈壽宮) 궁비(宮婢)의 천역(賤役)으로 적입(籍入)된 것이였다. 그때에 그는 자기의 신세타령을 하며 자탄시 한 수를 지었으니 그 시는 명작도 명작이니와 그 사의가 매우 비창하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또한 동정의 눈물을 흘리게 한다.

 (自詩) 祗今衣上活黃塵, 何事靑山不許人.
       圓宇只能囚四大, 金吾難禁遠遊身.

그가 그때에 그렇게 애매한 연좌의 죄를 입어서 궁비의 천역까지 하게 된 것은 물론 그러한 불행이 없겠지만은 한편으로 보면 또 다행한 일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는 원래 재색이 출중하고 매사에 영리한 까닭에 그 궁에 있는 동안에 궁인에게 많은 신임을 받어서 그 궁인이 무슨 일로 궁중 출입을 할 때이면 반듯이 그를 다리고 다니게 되고 그 인연으로 또한 당시 궁중에 일대훈천의 세력을 가졌던 김상궁(金尙宮=이름은 개똥이)과 알게 되었었다.

김상궁은 그를 한번 본 뒤로 특별히 사랑하야 자기의 양딸을 삼고 자기 집에다 다려다 두니 례순과 김상궁 간의 정의는 비록 친모녀의 정이라도 따를 수가 없고 따라서 례순의 말이라면 김상궁이 들어주지 않는 것이 없으니 례순은 명의는 비록 천역이나마 엄연이 궁중에 큰 세력을 가지게 되었었다. 그리 하야 그는 인조의 반정운동에도 직접 간접으로 남모르게 많은 원조를 하야 여간한 큰 힘을 준 것이 아니였다. 아니 다만 원조뿐이 아니라 그 때에 만일 그 이씨가 궁중에 있어서 전후의 내정탐보(內情探報)와 알선을 하지 않었더면 반정파(反正派)가 성공은 고사하고 먼저 적족의 참화(赤族 慘禍)를 입었을 것이다. 그중에도 한 례를 들어 말한다면 바로 반정의 기빨을 들던 수 월 전 —계해(癸亥) 정월이였다. 이귀 등의 반정음모가 어찌 하야 그랬던지 미리 누설이 되어 한유상(韓惟翔)이 지급히 장계를 하니 그때 반정파의 화란은 일발의 위기에 당하였다. 이귀는 그 시기에 자기의 딸로 하야금 김상궁에게 말하야 부명(父命)을 애걸케 하고 자기는 형식으로 아들 형제(李時白, 李時坊)를 친히 다리고 명을 등대하며 광해군에게 변명의 상소를 하였다.

『전하께서 신에게 이천(伊川)에서 사찬(賜饌)을 하시고 곡산(谷山)에서는 사주(賜酒)하시고 장성(長城)에서는 상포(賞布)를 주시고 숙(肅川)에서 또 사주(賜紬)하신 것은 —그 전에 광해군이 이귀에게 그러한 사은(賜恩)이 있었다— 천양이 무궁하도록 성은을 잊기 어려운 바이올시다. 신을 낳은 사람은 아비요 신을 살리시는 이는 전하이온대 이제 모역의 악명을 쓰게 되오니 신의 부자를 속히 죽여 주십소사………』

이러한 상소를 보고 광해군이 반신반의하는 중에 그의 가장 신임하는 김상궁이 극력 변명하야 말하되 이평산(李平山은 李貴)은 이 세상의 무명 인물로 가련한 인생이요 김자점(金自點)은 일개 서생인즉 족히 가론할 바 못된다 하니 광해군은 그저 웃고 듣게만 되야 드디여 화를 면하였다. 그리고 또 한 번은 반응하던 바로 당일에 이유성(李惟聖)이 그 내용을 박승종(朴承宗)에게 말하야 승종이 예궐 고변하니

(그때의 사실로 말하면 처음에 이후원(李厚源)이 이유홍(李惟弘)의 아들 이문(以紋)에게 반정에 참가를 권유하얐더니 (유홍이 강계(江界)에 구양 갔을 때에 그때 부사 김류(府使 金瑬)와 서로 친한 까닭) 이문이 그 삼촌 유성(惟聖)에게 말하고 유성은 김신국(金藎國)에게, 김은 또 박에게 말한 것이다.)

대신과 및 금부 당상(禁府 堂上)이 모도 궐하에 뫼혀서 처분을 기다리게 되매 화가 또한 급박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제에 민활한 김자점은 주찬과 뇌불로 김상궁을 매수하고 이귀는 또 자기의 딸을 시켜서 그렇지 않은 것을 김상궁에게 극구 변명하야 김상궁으로 하야금 광해군에게 또 변명을 하게 하는 광해군이 김상궁의 말을 고지 듣고 고변장도 본체만체하며 그냥 안심하고 궁인들과 가치 태평하게 연회만 하고 놀다가 날이 그럭저럭 저물어 궐문을 닫치게 되니 대신과 금부관들이 부득이 궐문 밖 비변사(備邊司)에 퇴류하며 명을 기다리고 있다가 밤중에 이르러 별안간 반정군이 궁궐을 습격하게 되니 만사가 다 와해되고 인조 일파의 반정당이 크게 성공을 하게되었다. 반정 뒤에 이례순은 과연 어찌 되었는지 그것은 기록에 전한 것이 없어서 잘 알지 못하는 것이 큰 유감이나 례순은 당시 일류 여정객이였던 것은 넉넉히 알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