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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헌 세계일주 기행(1회)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조선아 잘 있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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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대륙에 삼복이 가까워 오는 까닭인지 오늘 밤은 몹시도 덥다. 아직 5월 31일이니 춘복을 입어도 견딜 듯 하건만은 웬걸, 금년 철은 이상하여 벌써 며칠 전부터 쨍쨍 내리 쬐는 폭양 볕에 얼음 수채(화채)가 그립고 맥고 모자에 산뜻한 베옷이 간절히 생각난다. 더구나 내가 바야흐로 향하려 하는 곳이 태양이 직사하는 저 남쪽나라라 하니 저절로 머리 속조차 뜨거워져서 서울을 떠나는 오늘 밤에는 흰 하복(夏服)조차 떨쳐 입고 나섰다.

남대문 정거장에는 나와 나의 딸 정숙(貞淑)이를 보내주는 여러분이 나와 서주셨다. 실로 내가 생각하여도 나의 이번 발길이 언제 다시 이 정거장 흙을 밟아 보게 될는지 모르겠다. 밟는다 해도 몇 십 년 뒤가 될런지 또는 그 몇 십 년 뒤에도 살아서나 밟게 될런지 아무 근심이 없고 아무 거리낌이 없는 사람으로도 십 만 리의 먼 길을 떠난다 하면 곱다랗게 돌아오기를 장담을 못하려든 하물며 우리같이 가도 근심 와도 근심인 기구한 나그네의 몸이야 어느 날 어떠한 운명이 앞에 가로 막아 섰다가 나의 생명과 육신을 물고 뜯을 줄 알랴.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남산(南山)위의 솔밭과 북백악(北白岳)의 연봉(連峰:이어진 산봉우리)을 바라보니 말할 수 없는 감개에 가슴이 설레기 시작함으로 나는 얼른 여러분과 갈라져서 경부선 차 속으로 뛰어 들었다.

아무쪼록 일 초 동안이라도 내가 나서 자라던 이 땅의 흙을 더 밟어보고 또 이 날 이때까지 존경하며 신뢰해오던 여러 벗의 따뜻한 손목을 더 붙잡아 보고 싶은 생각이야 불붙듯 나는 터이나 그것이 도리어 떠나는 나에게 견디기 어려운 괴로움을 준다 하면 어쩌랴. 기차는 끝끝내 떠난다. 휘황(輝煌)한 전등 속에 명멸(明滅)하는 숭례문(崇禮門)의 우뚝 솟은 거옥(巨獄)의 그림자를 남겨놓고 기차는 남으로 남으로 자꾸 떠난다.

나는 아예 보지 말자고 꼭 감았던 눈을 참지 못하여 다시 한번 떠서 그 남대문(南大門)이 서고 있을 하늘 위를 쳐다보면서 속으로 기어코 다시 한번 살아와서 저 문을 쳐다보자고 맹세하였다. 아모켜나 가는 몸이라 그리운 조선이여 잘 있을지어다. 그 동안에 아무쪼록 크고 건강하고 배움이 많아서 조그마한 이 몸이 가져다 드리는 뒷날의 선물을 웃고 받아주소서.

태평양 위의 달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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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오사카에서 며칠 지내다가 6월 16일 아침에 요코하마(橫濱)를 떠나는 태양환(太洋丸)에 몸을 싣고 하와이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배는 꽤 컸다. 2만 2천톤짜리라 한 즉, 실로 해상의 산옥(山獄)같은 큰 부성(浮城)이라 할 것이다. 들으니 3등객은 아침 여덟 시 전에 올라타야 하고 1등객은 11시 또 우리같은 2등객은 아홉 시 까지에 올라타야 한다기에 요코하마해운통(橫濱海岸通)에서 항해에 필요한 물건 몇 가지를 사 들고 우리 부녀는 정각까지에 배 칸에 분주히 오르니 그 큰 배도 벌써 손님으로 가득 찼다.

열한 시 반이 되자 태평양 저 쪽으로 가는 우편을 가득 실은 우편선이 포포포하고 분주히 본선(本船)에 달려와서 하물을 실어버리더니 배는 곧 기적을 울리면서 떠나기 시작했다. 도쿄에서 와주신 몇몇 분을 작별하려고 정숙이와 함께 갑판에 나서니 그 넓은 부두에는 우리 배의 손님을 작별하려 온 사람들로 가득찼다. 아마 3천명은 거의 될 것 같다. 그 사람들이 모두 빨갛고 노랗고 푸른 종이를 한 끝을 갈라 쥐고 배가 떠남에 따라 그 줄이 점점 풀리어 바다 위로 5색 무지개같이 둥실둥실 퍼져질 때, 보내는 사람은 가는 사람의 건강을 빌어 만세를 부르고 또 배 위의 사람은 배 아래 사람을 향하여 잘 있거라 라고 외치는 소리에 요코하마의 하늘은 흔들릴 지경이었다. 아까 갑판 위에서 서로 몸을 부둥켜안고 그렇게 갈라지기를 애처로워하던 서양인 노파도 이제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부두에 파리 대가리가치 아물거리는 전송객을 바라보다가 물결 위로 지나가는 물새들에게 눈을 주고 만다.

생각하면 요코하마 바닷물은 날마다 수없이 보내고 가는 동서양 사람의 이별 눈물로 개항 60여 년에 수 척이나 수심이 싶어졌으리라. 미국(米洲)이나 유럽(歐羅巴)으로 간 우리 형제도 많으니 조선사람의 눈물도 몇 촌이나 이 수심을 깊게 했는가.

이제부터는 순전히 해양생활이다. 일본의 보소반도(房總半島)조차 수평선 저쪽에 사라지자 어디를 보아도 파-란 바다 물결 뿐이다. 바다에 오면 산이 그립고 산에 오면 바다가 그립다던가. 수려한 산악을 날마다 쳐다보며 자라던 나는 바다가 어떻게나 갑갑한지 모르겠다. 해는 벌서 져버렸다. 해조차 서산을 넘지 않고 서해를 넘는 것이 어쩐지 섭섭하다. 아무튼 이제는 이 바다물결과 싸우면서 3,310리의 수로를 가야하겠다. 이 배의 속력이 한 시간에 15해리 씩이라 하니 하루에 잘 가야 360리 밖에 못갈 터이니 에그 그러면 하와이까지 가자면 십삼-사일 동안이나 걸려야 할 모양이다. 어떻게 십여 일을 육지를 못보고 살아가나?

선실의 영어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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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해상생활을 모두 조반 먹고 운동하고 음악을 듣고 댄스를 하고 영화를 보고 또 밥 먹고 자는 것으로 지내는 모양이나 나는 어학공부에 밤낮 선실문을 닫아걸고 땀을 빼었다.

영어야 청년시절에 한성외국어학교(漢城外國語學校)에서 나슌날 5권 정도를 배웠고 그 뒤에도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英美法德)에 갈 생각을 품고 2개년 동안이나 서울에서 어떤 영국인(某英人) 밑에서 개인교수를 받았으며 또 도쿄 가서도 메이지 대학(明治大學)에 다닐 때에 법률 외에 어학에 은근히 힘을 써서 그 때만 해도 영자신문 쯤은 거리낌이 없이 보아왔었지만 그 동안에 놓은지 하도 오래되어서 이제는 밥 먹으란 말도 외우지 못할 지경이다. 이래서야 어떻게 서양 가서 코 크고 눈 푸른 사람 행세를 하려고. 미국 샌프란시스코(美國桑港)에 내릴 때까지 열심으로 독습(獨習)하기로 했다. 그야 출발 전 2개월 간을 서울에서 영어전공을 다시 했으나 아직 수줍어서 영미인을 붙잡고 말을 걸어볼 용기조차 나서지를 않았다.

어학에 피곤한 머리를 쉬이려고 밤에 갑판에 나가면 장두(檣頭:돛대의 꼭대기)에 둥글고 밝은 달(一輪明月)이 걸린 것이 정말 좋았다. 江天一色無織廘 皎皎明月孤月輪(원문:江天一色無纖塵,皎皎空中孤月輪)이라고 장약허(張若虛)가 옛날에 읊었다더니 실로 그런 광경은 중국의 동정호(洞庭湖) 같은 월광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9만리 장공(長空)아래 끝없이 벌려진 이런 태평양 대해 위의 월경(月景)에서 읊어질 것인가 한다.

그러나 이렇게 달구경이 하도 좋다가도 갑자기 검은 구름장이 해양을 덮으면서 산같은 파도가 배를 삼킬 듯이 맹렬히 선창을 때릴 때에는 정말 이를 데 없이 장엄하고 참혹하다(壯絶慘絶)기보다, 간이 말라드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리 철갑선이라도 자연의 거칠고 사나운 위세(暴威) 아래에 머리가 들리랴. 성미 급한 분은 하루에도 몇 번씩 파선(破船)을 생각하고 하느님께 기도 드리는 것까지 보았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면 나는 파선을 당해 보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명의 절대한 위협을 받아 본다면 담력이 그야말로 철석같이 다져지리라. 내 생각에는 파선이 된다 해도 나만은 배창의 널문을 뜯어 허리에 깔고 용감스럽게 헤엄을 쳐서 뒤에 무선전신을 받고 달려오는 구조선에 구명(救命)이 될상 싶다. 그렇다면 이 기행문도 다소 재미(滋味)있어지련만은 아뿔사, 이것도 늙은 청춘의 한 때에 그리는 로맨틱한 화폭인가.

부유한 하와이 형제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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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떠난 지 열 나흘만인 1926년 6월 29일 아침에 그립던 하와이의 「호놀룰루」항구에 도착하였다.

무선전신을 받아보고 그곳 민단총회장 최창혜(崔昌惠), 기독교중앙교회목사 민찬호(閔贊鎬), 홍한식(洪韓植), 몇 해 전 고국방문으로 오셨던 김누디아 여사 등 사람들을 위시하여 동포 다수가 부두에까지 나와 우리 부녀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 모양이 어찌나 진정이고 열렬한지 그냥 귀를 맞잡고 삼삼 돌아가며 입을 맞출 지경이다. 나도 고국에 돌아온듯이 어찌나 기쁜지 뛰고 싶었다.

여기에서 나는 개발회사(開發會社)이래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잇는 하와이 제도를 잠깐 소개 해봐야겠다.

하와이라 함은 태평양 상의 한복판에 콩알만한 섬 여덟 개가 모여서 된 곳이니 비록 면적은 6천 평방리라는 큰 고양이 이마빡에 불과하지만은 군사상 정치상은 무를 것도 없고 아시아와 유럽, 미주와 동양을 다니는 교역상 중요한 곳이 되어 유명한 곳이다. 도내인구 24만 중 우리사람은 약 7,000명 있고 중국인도 수만이 있고 일본인도 약 10만이나 있다. 그 외에 영미인이나 포르투갈, 필리핀,인도,하와이인 등 각국 종족이 모두 모여와 사는데 주권이 미국에 있기는 하나 우리사람들은 토지소유권이나 시민권도 가지고 있어서 생활이 풍요로울 뿐더러 사회적으로도 각국인에 비해 우세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교육과 사회시설의 완비에는 놀랐으니 미국의 공사립 학교수가 330여교(校), 교원 수 1,820여명, 학생 42,070여명이며 또 중학교가 7교(校), 대학이 2교(校) 이외에 도서관 유치원 등이 곳곳에 있었다. 하와이의 수도인 「호놀룰루」라는 항구는 시가의 장려(壯麗)한 것이 놀랄만 한데 인구는 서울의 4분의 1이나 되는 70,000여명이 산다고 한다. 여기 우리사람들도 백인과 마주 앉아 크나 큰 상포(商舖)도 벌리고 여러 층 양옥도 쓰고 살며(略-원문)

나는 여기에서 여러분이 청하는 대로 교민단과 청년회와 교회당을 돌아다니며 고국사정도 이야기하며 우리 일에 대하여 수차 연설도 했다. 그 곳에서 약 열흘 동안을 묵는 사이에 「호놀룰루」뿐 아니라 각처로 돌아다니며 연설한 회수가 아마 수십 차는 되었을 것이다. (中略-원문)

나는 미국대학을 졸업하고 온 우리나라 여학생을 만났으나 그 분이 말을 몰라 통역을 세우고 겨우 문답을 했을 때에는 어쩐지 제 나라말을 몰라주는 것이 야속하기도 하고 서운한 생각이 나더라. 그 교회학교의 성장을 비는 마음은 내가 하와이를 떠난 뒤 오늘까지 사라지지 아니한다.

미국으로 미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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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크림」에다가 바나나를 볶아서 먹는 맛과 그 곳 특산과실인 「파파야」나 「망고」나 입에 들어가면 녹아버릴 듯한 「페어(서양 배)」같은 맛나는 과일로 여러 날 식미(食味)를 자랑하다가 또 하와이 형제자매의 살을 베어줄 듯한 친절한 대우에 심신을 녹이다가 또 생어장(生於長:태어나고 자람)을 그곳에서 한 학동(學童)들이 고국으로 대려다 달라고 조르는 애처로운 정의(情義) 속에서 지내다가 우리들은 7월 8일에 잊혀지지 아니하는 하와이를 뒤에 두고 할 수 없이 미국을 향하여 또 배를 탔다.

그때 부두에서 이별해주던 광경이야 내가 관속에 든들 잊혀지랴. 그러나 나는 하와이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산과 같이 많으면서도 아무 말도 못 하고 마는 것을 이에 슬퍼 아니할 수 없다. 더구나 어린아이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날더러 금강산이고 서울 이야기를 더하여 달라고 조를 때에 알 수 없게 목이 메이는 듯한 무슨 압박을 받게 되더란 말도 모두 피하는 것이 여기에는 좋겠다.

우리가 탄 미국 샌프란시스코 가는 배는 무슨 대통령의 이름을 딴 삼 만 여 톤 짜리 배인데 묘령의 백인여자들이 어찌나 많이 탔는지 식당에나 갑판 위의 운동장이나 무용실(舞蹈室)에 들어가보면 남성 금기(禁制)가 아닌가 하리만치 꽃같이 어여쁜 여자들이 가득차서 재깔거리고 잇는 것이 실로 장관이다.

그 등의자에 걸터앉아 대패로 민 듯 간 듯하게 생긴 두 정강이를 내어 놓고 방글방글 웃어 가며 저이끼리 속살거리는 그 모양을 바라보면 「브라우닝(Robert Browning)」이라는 영국시인이

아아 다시 젊어져
연애하고 싶다
다시 한 번만 사랑하고 싶다

하고 부르짖던 모양으로 또 「괴테」의 「파우스트」가 「메피스트(메피스토펠레스)」의 힘을 빌어 다시 청춘이 되어 즐기듯이 나도 한 번만 젊어지고 싶은 생각에 가슴이 탄다. 어여쁜 여자란 남의 가슴을 집어 뜯는 것이 천직인 모양으로 태평양 위의 선(船)중에서 나는 한참 땀을 빼었다. 그러나 나비같은 그네들을 만남으로 나는 젊어지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늙어지지나 않는가. 껄껄(呵呵).

꿈과 현실의 헝클어진 실마리 속에서 이레(일주일) 동안을 지낸 7월 14일이 되니 우리 배는 태평양안(太平洋岸)의 대표도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이로부터 나의 발길은 황금의 나라, 물질문명지상(物質文明至上)의 나라, 자본주의 최고봉의 나라, 여자의 나라, 향락(享樂)의 나라, 자동차의 나라인 북미합중국 땅을 밟게 되엇다. (계속=文責在記者)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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