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염에 싸인 원한
1
[편집]오월의 안동(安東)─ 경상도 ─ 하늘은 왜청빛으로 끝없이 개이어 깨끗한 창공을 맥없이 배회하는 구름장 하나 찾아낼 수 없다.
북으로 영남산이 우두커니 솟아 그 허리 중턱에는 만개한 복사꽃이 드문드문 늘어서서 누구를 부르는지 연지 입술을 바른 듯한데 남으로 서로 휘어드는 낙동강(洛東江)에 남강(南江)이 합수되어 영호루(映湖樓) 옛 집을 쳐다 본 듯 만 듯 다시 남으로 흐르려고 서악사(西岳寺) 저편에서 허리를 두른다.
김상인(金相仁)은 어제야 비로소 여장을 풀어놓고 처음으로 동료인 이종수(李種秀)와 은행 집무를 끝마치고 영호루와 서악 부근의 이름난 고적도 찾을 겸 오월 하늘에 가득한 향내 도는 바람도 마시고 시원히 흐르는 강물에서 자동차 바람에 마신 티끌도 떨려니와 눈으로 보기만 하여도 살 속으로 스며드는 청렬한 기운을 쏘여 보기로 하였다
영호루에 올랐다. 다 떨어지는 판대기라도 오히려 옛날의 영화를 자랑하는 듯 가장자리 이러지고 쪽이 떴으며 글자가 시치인 헌액들을 쳐다 볼 때 그는 끝없이 그윽한 옛날 일을 추억하며 지금 거기 선 사람의 감개무량함을 속 깊이 느끼었다.
종다리 하늘을 송곳질 할 듯이 높이 떠서 바람개비 모양으로 날개 치며 종알대다가 저쪽 보리밭을 향하여 떨어지면 땅 속으로 들어갈 듯이 내려 앉는다.
두 사람은 영호루를 내버리고 둑 위로 걸어갔다. 발길에 스치는 부드러운 풀냄새며 가장자리에 늘어선 작고 큰 나무들의 기름 향내가 신선한 기운을 콧속으로 전하여 준다.
바람이 분다. 여름 폭풍도 아니요 겨울 찬 바람이 아니라 연하고 부드러운 봄바람이니 바람이라 함보다도 향기다.
상인은 모자를 벗어 옆에다 끼고서 단장을 끌며 걸어가며 다만 유한한 맛에 취하여 말이 없을 때,
『여보세요 상인 씨』
하고 조선옷에 뒷짐을 진 종수가 말을 꺼낸다.
『말씀을 들으면 상인 씨 삼촌 어른께서 상인 씨를 퍽 종애하신다는데요』
하며 의성(義城)서는 굴지하는 부자요 양반이요 또는 문필도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상인의 삼촌을 끄집어 내어 상인의 다복한 것을 부러워하는 동시 더 높은 교육을 받고 더 넓은 사회에서 명예 싸움도 하여보고 지위 다툼도 하여보지 않은 것이 제 딴은 애석하다는 뜻으로 말을 꺼낸 것이다.
상인은 언제든지 자기 앞에서 자기 심촌의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을 피하는 터라 더구나 사랑하고 사랑치 않는 말을 무엇이라 대답할는지 주저 아니할 수 없어,
『언제 뵌 일이 계십니까?』
하고 종수의 눈치를 보았다.
『녜. 한 번 보인 일이 있지요. 언젠가 은행에서 무슨 일로 갔다오라고 해서 갔던 일이 있었는데 참 대접을 썩 잘 받았읍니다. 그러고 어떻게 고맙게 구시는지 몰라요.』
상인은 말이 없었다. 종수는 다시 무심히 나오는 말처럼,
『그리고 신수도 잘 나셨더군요. 근력도 좋으시구. 지금 춘추가 근 육십 되셨죠. 아닌 게 아니라 정정하세요』
하고 종수는 싱긋 웃었다. 첩을 일년 이태에 하나씩 갈아세우는 잡스런 노인 말을 하고나니 웃음이 터지나 옆에 선 상인을 생각하니 웃음을 아니 참을 수가 없어서 눈속 콧속 입속으로 저 혼자 웃었으나 눈치 빠른 상인은 벌써 알아채고,
『정정하신 게 걱정이죠.』
의미있는 말을 한 후 입맛을 다셨다.
종수는 벌써 자기의 수작을 상인이가 알아챘다는 말인 줄 알고,
『허허 글쎄요. 연로하면 그런 생각도 나는지 모르지만 너무하시는 모양인가 보더군요.』
이제는 점점 내놓고 말하기를 시작하였다.
상인은 그런 말을 들을 적마다 부끄럽고 분하고 추잡스러웁고 또는 불같이 타는 의협심이 일어나는 까닭에,
『그래서 집안에는 언제든지 풍파가 끝나지 않죠. 저도 장차는 그 집안 후사가 될 사람입니다마는 그것 때문에 삼촌 어른과 충돌이 언제든지 생기지요. 삼촌 어른의 음행이나 명예나 그까짓 것은 그만두고 그 까닭에 희생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만 어쩔 줄을 모르게 분하고 불쌍합니다그려』
하고는 얼굴에 피가 오르고 주먹이 떤다.
까만 머리를 윤기있게 갈라붙인 데다가 혈색 좋은 얼굴에 정돈된 이목구비며 광채나는 두 눈동자, 사람의 마음을 간질이는 속눈썹, 웃지 않아도 웃는 듯한 입 가장자리와 크지도 않고 적지 않은 키며 수족이 스무 살로는 조금 숙성하고 스물 한 살로는 조금 어린 티가 있으나 그의 말에는 열이 있고 힘이 있고 감격이 있다.
『녜.』
종수는 대답할 말이 없는지 땅만 보며 걸어간다.
『그동안에 벌써 몇인지 모릅니다…』
할 때 그 앞에는 함지박을 앞에다 들고 양복 입은 상인을 쳐다보며,
『떡 좀 사쇼』
하는 노파가 있다. 허연 보자기를 몇 번이나 빨았는지 새까맣게 된 보자기를 들치는 노파의 손가락은 대장간에서 쓰다 던져둔 집게같이 녹이 슬고 무디어 보인다. 떡장수는 이 양반은 사기만 한다 하면 한 십 전어치 팔아 줄줄 믿었던 것이다.
상인은 떡장수보다도 종수를 보았다. 의견을 묻는 것이다. 종수의 눈치는 사서 먹으면 풍치가 없지도 않다는 뜻인지 소위 말 좀 해보자는 수작인지,
『십 전에 몇 개요?』
『열 개요.』
『에 여보, 열 두 개 주어야 하우, 그렇지 않으면 안 사우. 가우.』
『원 나리도.』
두 사람은 떡을 샀다. 팔다 나머지라 해서 십 오 전어치나 샀다.
그들은 풀 위에 앉아서 떡 먹느라고 다시 삼촌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2
[편집]그들은 법흥(法興)으로 해서 다시 그 둑을 내려왔다.
날이 거의 저물어 가는데 멀리 읍에는 공중에 자주빛 저녁 연기가 층을 지어 둘러 있다.
『오늘 서악에는 못 가겠읍니다.』
『글쎄 날이 늦었으니까 거기는 이 다음 일요일에 가죠.』
『그것도 좋죠.』
『그럼 집으로 가십시다.』
상인과 종수는 각각 읍으로 향하여 들어오는데 큰길은 먼지가 많고 분주하다 하여 샛길로 밭을 가로질러 가기로 하였다.
상인은 인후 가장자지를 쥐면서,
『목이 대단히 마릅니다. 이 근처 물 얻어먹을 곳이 없을까요?』
하고 몹시 목이 말라 한다.
『조금 더 가면 우물이 있으니까 거기 가서 자시는 수밖에 없을 걸요.』
상인은 다시,
『아까 떡을 먹어서 그런가 봅니다. 종수 씨는 괜찮으십니까?』
하며 웃옷을 벗었다. 잔등이에는 기름을 약간 부은 듯 고단한 땀이 축축히 났다.
『왠 걸요. 나도 몹시 마른 걸요. 여기만 돌아가면 되니까 조금 참는 수밖에 없죠.』
허우적허우적 걸어서 한 귀퉁이를 돌아서니까 따는 둔덩 아래 버들이 늘어진 곳에 우물이 있어 가장자리에서 방울이 떨어지는 것이 햇빛에 번득인다.
중년 아낙네가 물을 이고 갔다. 옆에서 기다리던 편발한 처녀가 두레박을 우물에 잠갔다. 고개를 숙이고 우물만 보면서 한 두레박 두 두레박 방구리에 부었다. 두레박에서 방구리에 들어가는 물은 멀리서 보기에 마치 흰 엿을 늘여 붓는 것 같았다.
멀리서 인기척이 나니까 그 처자는 힐끗 고개를 쳐들어 보았다. 그러자 상인과 종수도 그 처자를 보았다.
『저것이 주막집 처녀 아니요?』
상인은 마치 날짐승을 손으로 잡으려는 사람처럼 발길을 멈추고 종수 귀에다 가만히 말하였다.
『그렇구료.』
종수는 서있는 상인을 돌아다보더니 이상히 여기는 눈으로 웃으며,
『가서 물 좀 달래시죠.』
『글쎄요.』
상인도 마주보며 웃었다. 그는 펌프의 물이 오르듯 가슴 복판에 힘있게 뜨거운 피가 모여드는 것을 느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종려가지에 달린 은종령(銀鍾鈴) 같은 심장은 소리를 높이고 미칠 듯이 흔들렸다. 새로 만든 물건에 서설이 앉는 것 같이 순진한 그의 마음은 부끄러움으로 나타났다. 그는 여자같이 부끄러워하였다. 그의 얼굴은 담 밑에 새로 핀 작약(芍藥)꽃 같았다.
물긷는 처녀의 두레박질은 웬일인지 속하였다. 두 사람은 우물 앞에 와 섰다. 상인은,
『물 좀』
하고 두레박에 손을 내밀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야금 줄을 탁 한 번 튀긴 듯이 떨리어 그 나머지 울림이 손끝까지 전하였다.
처녀는 두레박을 우물 가장자리에 내던지듯 놓았다. 그러고는 또아리를 머리에 놓고 물동이를 이었다. 복사꽃 같이 붉어진 얼굴에는 물방울이 흘러서 이슬같이 떨어졌다. 그는 새침하다기보다도 암상스러운 데 가까운 얼굴로 입을 꼭 다물고 돌아섰다.
그러고는 물동이가 달아나는지 몸둥이가 닫는지도 모를 만치 속하게 가버렸다.
두 사람은 기가 막혀 서로 보기만 하다가 다시 가는 쳐녀의 뒤를 바라보았다. 처녀는 골목을 돌아설 때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더니 보이는 듯 마는 듯 웃음 한 번을 생긋하더니 발허리에 걸은 신짝이 벗어질 만치 달음질하여 담 모퉁이에서 사라졌다.
없는 사람의 뒤 그림자를 보고 있던 상인은 무안하기도 하고 또는 분하기도 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제 손으로 물을 떠먹으면서,
『계집애가 되어서 내외를 하나? 그렇게 달아날 것이 무어야?』
하며 그야말로 머쓱하여 자기의 사처로 돌아왔다.
3
[편집]사처라는 곳은 그곳 어떤 사람의 집 사랑채를 장지를 드려 아래 윗 간에 나누어 상인은 넓은 아래 간에 있고 주인은 윗 간에 있다. 그러고 식사는 그 건너 주막에서 해서 나르니 즉 아까 물뜨러 왔던 처녀가 그 집 딸인 것이다.
상인은 세수를 한 후에 발을 씻고 문을 열어젖뜨리고 누워서 옆에 간에서 주인이 시조 읖는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까 마루 위에다가 밥상 갖다놓는 소리는 들렸으나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다.
상인은 속으로,
「이건 벙어리가 밥상을 가져왔단 말이냐, 밥을 가져왔으면 말을 할 것이지」하고 일어나서 바깥을 내다보니까 밥상을 가져온 처녀는 밥상만 갖다 놓고 벌써 줄달음질치며 문 밖까지 갔다. 처녀는 여전히 한 번 돌아다보고 부끄러움 섞인 웃음을 웃고는 뒤도 안 돌아다보고 가버렸다.
『이상한 계집애로군!』
상인은 혼자 중얼거리며 상을 들고 들어갔다.
그는 아까 우물에서 물 달라고 하다가 그 꼴을 당한 것을 생각하면 분하고도 무안한 데다가 또 밥상을 놓고 말도 없이 달아나는 것은 괘씸도 하거니와 어쩐지 미안스러운 일이다. 아까도 한 번 돌아다보고서 웃었으며 이번에도 또 한 번 가다가 돌아보고 웃는데 상인의 마음은 그대로 평온할 수가 없었다.
비록 주막집 딸이라 하나 천착스런 때가 묻어 보이지 않고 난잡한 태가 없어 늘씬한 허리에 치렁치렁한 머리며 반듯한 얼굴에 또렷또렷한 눈이나 마늘쪽 같은 코라든지 혈색 좋은 두 뺨이 젊은 상인의 마음을 그대로 두었다 하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상인은 밥을 먹으며 생각하였다. 밥상을 가지러 오거든 내 말을 좀 붙여볼 터이라고.
밥상을 밀어놓고 신문을 보면서도 계집애 오기만 기다린다.
조금 있다가 삐걱 싸리짝 문 여는 소리가 났다.
『왔다!』
일어나서 내다보기도 전에,
『상 주쇼』
하는 무되디 무된 소리가 기대하던 상인을 여지없이 낙망시켰다. 그러나 어찌하랴 너는 가고 처녀가 와서 가져가랄 수도 없는 일이라 상인은 한 손으로 주나 어쩐지 서운한 듯하여,
『얘』
하고 머슴녀석을 쳐다보았다.
중국사람 요술장이가 접시로 재주를 부리듯이 한 팔로 상을 번쩍 들어 그대로 어깨 위에 둘러맨 머슴녀석이,
『녜.』
하고 이상히 쳐다본다.
『너 지금 몇 살이냐?』
『열 아홉 살입니다.』
『그러면 장가가야 겠구나.』
녀석은 픽 웃으며 고개를 외로 튼다.
『웃기는 왜 웃어. 얘 네 집 처녀 나이가 지금 몇이냐?』
녀석이 또 웃는다. 의뭉이 그 얼굴에 가득하다.
『저도 잘 몰라요.』
『이 녀석 거짓말한다. 뭘 몰라? 열 칠팔 세 되었지?』
『힝』
머리를 부비면서,
『열 여덟이라나요.』
『이름은 무엇이고?』
『종아(種兒)요.』
『아직 정혼한 곳은 없니?』
『그런 것을 더구나 제가 알 수 있읍니까?』
『뭘 몰라. 의뭉스러워서 말을 안 하지. 너하고 혼인해 보지.』
녀석은 달아날 듯이 물러서며,
『원 어림도 없는 소리를 다 하십니다. 저 같은 놈이야 어디 눈이나 떠보는 줄 아십니까. 그 아버지 어머니가 누구든지 돈 많은 곳으로 보내서 덕을 보려고만 하는데요. 여기 밥상 들고 오는 것도 다른 데 같으면 어림없읍니다. 김 주사 나리니까 그렇지요』
하는 품이 속정이 있는 말이다.
『그럼 지금 상 가지러 오지는 않고 네가 왔니?』
『녜, 그것은 밤 물 길러 가느라고 못 왔죠.』
『밤 물이라니.』
『물이 헤프니까 밤이면 물을 길어다 독을 채우지요.』
『언제까지 긷는단 말이냐?』
『대중 없어요. 어떻든 주막에 저녁 손이 다 비어야 그만두니까요.』
주막에 저녁 손이 빌 때면 적어도 아홉 시는 넘어야 할 것이다. 상인의 마음속에는 무슨 계획이 스며 은근히 기뻤다.
『어서 가봐라. 너무 오래 이야기를 시켜서 안 됐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머슴은 갔다. 머슴을 보내니 더욱 쓸쓸하다. 그는 방안에 앉아서 멀거니 먼 산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긁고 벌떡 일어섰다.
눈 익지 않은 곳에 온 지가 얼마 안 되니 울적한 심사도 없지 않는 데다가 오던 맡에 이상한 사람을 만나니 또한 마음이 뜨지 않고 가라앉을 리가 없다.
상인은 종수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얼마간 앉아 이야기하다가 다시 자기 집으로 가기를 청하였다.
밤이 늦지는 않았으나 길거리가 부신듯 고요하고 띄엄띄엄 가게집 등잔과 주막집 아궁이에서 일어난 불이 보일 뿐인데 아직 대엿새밖에 안 되어 보이는 반달이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보아야 보이고 허리 굽혀 땅을 살펴야 알게 떠 있다.
종수와 상인은 자기 집을 거진 다 와서 주막 앞을 지나게 되었다.
머슴녀석이 반갑게 쑥 나오며,
『어디 다녀 오십니까?』
하고 앞에 선다.
『응, 너냐』
하고 대답을 채 마치기 전에 집 앞에서 부녀의 목소리로,
『그 뉘시냐』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요.』
상인은 돌아다보았다.
『아 김 주사 나리십디까. 들어오시요. 담배라도 한 대 태우시고 가시죠.』
주인이라 손님을 사귀어 두는 것도 좋지마는 이름난 부자의 자식이요 외양이 똑똑하고 재주있어 보이고 시골 서울로 다녀서 때도 쏙 빠졌으므로 자기 집에 청해서 청주 한 잔 대접하는 것도 공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상인은,
『들어오시오』
하는 소리를 듣고 좋기는 하나 또 한 옆으로는 또 부끄럽기도 하고 서먹서먹하였다. 그래서 주저주저하다가 종수를 곁눈으로 보니까 그는 대답도 없이 먼저 주막으로 들어갔다.
상인은 따라 들어갔다. 주인이란 계집은 나이가 사십이 되어 근 오십이 되어 보이는데 눈이 삿갓눈이요 몸이 뚱뚱하고 입이 변덕스러웁게 생겨서 누가 보든지 저런 데서 그런 딸이 어떻게 나왔나 하도록 모녀의 생김생김이 다르다.
술을 붓는다 안주를 굽는다 야단이나 상인에게는 소용이 없다. 먹을 줄 모르는 것을 억지로 먹을 수도 없어서,
『본시 못 먹으니까 그만 둡시다』
하며 애걸을 하면 종수는 덩달아 권하며,
『조금만 드시구려, 주인이 그렇게 열성으로 권하는 술이니…』
『글쎄 미안하지만 못 먹는 걸.』
『그럼 이다음 일요일에는 상인 씨 환영회를 한다는데 그때는 어떻게 하시려오?』
『그때라고 별 수 있을라구요.』
주인은,
『글쎄, 젊으신 양반이 고만 술을 못 자신단 말씀이요. 자 드시오.』
척 농쳐가며 권한다. 상인은 술잔에는 본시부터 마음이 없는 터라 눈도 가지 않건마는 처녀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것이 심화날 일이다. 그는 이곳에서 부스럭 저곳에서 덜컥 하기만 하여도 귀를 기울이고 눈알을 굴리나 거죽으로는 나타내지 않느라고 애를 썼다.
종수는 술을 서너 잔 거푸 들더니,
『여보 주인』
하고 주인을 찾았다.
『왜 그러십니까?』
『그래, 주인 딸이 그럴 수가 있단 말이요?』
주인의 얼굴도 변하였거니와 상인의 심장은 은방망이로 튀긴 듯이 내려앉았다.
『왜 무엇을 어쨌나요?』
『그런 게 아니라 아까 말이요. 영호루를 다녀 오다가』
『두 분이요?』
상인은 종수를 말리며,
『그만두쇼. 그런 이야기는』
하며 달아나고 싶은 듯이 두 다리를 모으고 앉았다.
『괜찮아요, 우리가 목이 말라서 요 뒤 우물에 오지 않았소. 그랬더니 마침 주인 딸이 물을 긷더란 말이요. 그래 이 양반이 물 좀 달라 하니까 두레박을 내던지고 뺑소니구려. 그래 내가 더 무안합니다그려.』
주인은 껄껄거리며 한참 웃더니,
『저런 계집애 좀 봐. 그것 참 황송하게 되었읍니다그려, 그것이 무얼 알아야죠』
할 때 뒷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종아다. 들어오는 것을 본 상인의 가슴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종아의 얼굴은 의외의 일에 어찌나 놀랐던지 얼굴이 거의 질리도록 해쓱하여졌다.
『호랑이도 제 얘기 하면 온다나. 알기도 잘 알지.』
어머니의 말이다. 계집애는 말도 못하고 돌아섰다. 그 등은 상인을 바로 등졌다.
『그렇지 않아도 네가 너무 버릇없다고 이 주사 나리가 꾸중이시란다.』
웃음 반 귀염 반 섞어가며 이야기다. 상인은 만났으면 보았으면 서로 말했으면 하다가도 딱 앞에 세워 놓으니 또 계면쩍고 면구해서,
『자 가겠소. 또 틈있는 대로 놀러오지.』
두 사람은 가버렸다. 문 나서는 상인을 곁눈으로 보는 가을 물같이 맑은 눈에는 잠시나마 가버리는 사람을 원망하는 정열이 어렸다.
종아는 상인이 다 가도록 그대로 돌아섰다가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려니까,
『너 아까 김 주사에게 어떻게 하였니?』
종아는 어린 마음에 속 맘먹은 것을 어머니가 아는가 하여 겁이 덜컥 나서,
『무얼?』
하며 보았다.
『우물에서 말야?』
종아는 부끄러워 웃으며,
『물을 달래기에.』
『그래.』
종아는 말이 없다가,
『그것은 왜 그리 묻소.』
『물으면 어떠냐?』
『부끄러워 견딜 수가 있어야지.』
종아의 눈에서는 심판이나 받는 듯한 떨림과 목구멍으로 말이 넘어올 적에 싸고 넘어오는 감격 때문에 두 눈에서 눈물 방울이 그렁그렁하다.
『그래서.』
『그래서 그냥 두레박을 내던지고 도망해 왔지.』
돌아서며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미친년. 나이가 내일 모레면 스물이야.』
쩍쩍 혀를 차고 말이 없다가,
『국솥에 불이나 때라. 내일 새벽 장꾼들 늦지 않게.』
머슴녀석이 툭 뛰어들었다. 종아가 우는 것을 보더니 시치미를 뚝 떼고 아궁이에 불을 집어넣는다.
종아도 내려왔다. 머슴녀석하고 불은 땐다. 어미는 방에서 잠깐 잠이 들었다.
『너 왜 울었니?』
머슴녀석이 부지깽이로 불을 헤치며 물었다.
『울기는 누가 울어?』
입끝이 샐쭉해서 톡 쏜다.
『안 운 게 뭐야, 내가 봤는데.』
뱃심이 유하게 추근추근 묻는다.
『보긴 뭘 봐. 어서 불이나 때.』
『흥.』
한참 궁리를 하는 체하였다.
『너 김 주사가 네 이름하고 나이하고 다 묻더라.』
종아는 말이 없다.
『아마 너에게 반했나 보더라. 아까 그 대답하느라고 학질 뗐다.』
종아는 아까 톡 쏠 때보다는 훨씬 풀렸다.
『빌어먹을 녀석, 듣기 싫어』
하고 생긋 웃음을 웃었다.
『그러고 얘, 네가 약혼했는지 안 했는지까지 물으면서 날마다 널더러 상을 가져 오라드라』
뒷말은 능청이다.
『이런 능청스럽게 뭘 그이가 그랬을까. 죄다 네 말이지.』
『아따따. 물어보렴.』
『누구더러.』
『김 주사더라 말이야.』
『듣기 싫다. 누가 물어봐』
하며 일어서서 국솥 뚜껑을 바로 닫았다. 솥뚜껑의 열도나 자기 가슴의 열도가 어느 것이 더 더운지 잘 알 수가 없었다.
4
[편집]며칠인지 지나갔다. 더디더디 넘는 해가 가까스로 서산에 지고 저녁 연기가 길 위에 기어갈 때 상인은 동창을 몇 번인지 헤일 수 없이 열었다가 닫았다가 하였다.
희미한 달빛이 앞마당 복숭아나무 그림자를 창 위에 갖다 비쳤다.
상인은 밤빛이 깊어갈수록 기쁨도 깊어갔다.
옆에 방에서는 주인이 문을 열어젖뜨리더니 달을 보고 시조를 읊조린다.
느릿느릿 길쭉길쭉 올라갔다 뚝 떨어지고 굵었다가 가늘어지는 시조를 들으니까 어째 조급히 기다리는 시간이 느즈러지는 것 같았다.
『김공』
시조가 중단되더니 주인이 장지 한 겹 격해놓고 상인을 부른다.
『녜.』
『오늘은 산보 안 가시우?』
『글쎄요.』
『대관절 밤마다 어디로 산보를 그렇게 다니시우?』
『이곳 저곳 일정한 데 있나요.』
『여보, 말 들으니까 밤중마다 누구하고 만나러 다니신답니다그려. 그런데 나같은 사람도 한 몫 낍시다.』
『원 천만의 말씀을 다 하십니다그려. 그런 소문이 날 리가 있나요.』
『나는 못 속이죠』
하고 또 무슨 시조가 생각되는지 혼자 시조를 외며 무르팍을 친다.
상인은 에크 눈치들을 채는구나 하고서 빙그레 혼자 웃다가 다시 조심스런 생각이 나서 궁리를 한다.
여덟시가 넘었다. 달이 너무 밝다. 그는 단장 하나만 짚고서 문 밖으로 나섰다. 그는 일부러 장거리를 돌아서 밭고랑을 들어서 둔덩을 올라섰다가 다시 내려서는 곳은 말할 것 없는 우물이다.
돌로 가장자리를 쌓은 우물에는 푸른 물이 출렁출렁 고였는데 그 옆의 버들가지는 늘어질 대로 늘어져 우물 위에서 누구를 기다리는 듯한 텅 빈 두레박을 얽어맨 듯하다.
사람이 없고 사면이 고요하니 달이 허공에서 외로운 듯하고 기다리는 사람이 옴직한데 오지 아니하니 빈 가슴만 조이는 듯하다.
상인은 왔다갔다 하였다. 하늘에서는 운성 하나가 하늘 복판을 지나갔다. 먼 데서는 개가 짖었다.
『온다.』
종아가 와서 말도 없이 동이를 우물가에 놓았다. 동이에 묻은 물이 달빛에 비쳐서 수은 칠을 한 듯이 번득거렸다.
『오래 기디리셨죠.』
『아니.』
『오늘은 달이 퍽도 밝죠.』
『그래.』
종아는 물을 길려 두레박을 잡으려 한다. 상인은 종아 옆에 가서 두레박 끝잡은 손을 붙들며,
『왜 우리 약조가 있지?』
하니 두레박은 놓였는데 두 손만 그대로 잡혀 있다.
『무슨 약조요?』
『물은 내가 푸고 나르기만 종아가 하기로』
『그래두요. 점잖으신 어른이.』
『무어야? 종아와 나 사이에 귀천이 있고 점잖은 여부가 있나. 자 내 뜰께.』
손을 놓고 우물을 보니까 하늘의 둥근 달이 우물에 잠겨서 가느스름한 물결이 있을 적마다 빙글빙글 웃는 듯하다.
상인은 종아를 보았다. 두 사람의 고개는 우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두레박을 놓으면 저 달이 깨어질 텐데 어떻게 하누.』
상인은 주저하듯이 종아에게 물었다. 종아는,
『깨졌다가라도 잔잔만 하여지면 제대로 될 걸요. 퍼내고 또 퍼내도 언제든지 변치 않고 있는 것은 우물 속의 달이예요.』
상인은 그 말에 감격하였다. 그는 종아를 바싹 잡아다니며,
『그렇지만 달은 지면 우물만 남지. 언제든지 없어지지도 않고 지지도 않는 건 무어?』
종아는 고개를 돌렸으나 몸은 주고 반쯤 웃으며 말이 없다.
『내 맘이지?』
상인은 더 한층 가까이 정열이 가득한 눈으로 종아를 보았다.
『아뇨. 제 맘이죠.』
종아는 상인의 얼굴을 농담하는 사람처럼 쳐다보았다.
『무얼, 종아의 맘이 그럴까.』
『그럼 그렇지 않아요.』
종아는 깜짝 놀라며,
『너무 늦으면 사살 들어요. 어서 가야죠』
하고 그는 물을 길려 하였다. 상인은 대신 두레박을 들었다.
『갖다 두고 또 오지.』
『기다리실 테에요?』
『그럼 기다리고말고.』
종아는 한 번 집에 다녀오더니 어린애같이 손뼉을 치며,
『여보세요. 우리 천천히 이야기해요. 아버지는 어제 촌에 나갔으니까 말할 것도 없지만요. 어머니가 돈 받으러 저 웃마을에 갔대요. 조금 늦어도 좋아요.』하며 상인의 소매를 이끌듯이 가까이 선다. 물동이는 내려놓고 두레박도 집어 치우고 두 사람은 우물가에 앉았다.
자세히 보면 반짝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 보이는 자그마한 별들이 공중에 났다. 은하수 좀생이 북두칠성이 공중에 박힐 대로 박혀 있다.
『저는 달나라에 한 번 가 봤으면 좋겠어요.』
종아는 말을 꺼냈다.
『달나라에는 살아서는 못 가죠. 죽어서는 갈 수가 있어도요.』
『달나라에를 가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정한 사람이 아니면 가지를 못해.』
상인이 옛날 이야기같이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게 옛날에도 콩쥐는 갔어도 팥쥐는 못 갔죠.』
『달나라 가는 것도 좋지마는 그것은 죽어서도 갈지 말지 하니 이 세상에서 좋은데는 가기 싫어?』
『세상에서 좋은 데가 어디에요?』
한참이나 궁리하더니,
『대구, 대구 한 번 가보았으면 평생 원이 없겠어요. 나서 십 팔 년이 되도록 지금껏 가본 곳이라고는 한 곳도 없어요. 언제든지 저를 그런 곳에 데려다 주실 테에요?』
감히 어깨에 매달리지는 못하지마는 마음은 상인에게 탁 실리었다.
『종아는 어디든지 나 가는 곳이면 따라가지?』
『그러믄요. 어디든지요』
『의성이나 대구나 서울이나 어디든지.』
『서울요? 참 서울 한 번 가보았으면 좋겠어요. 가고 말고요. 어디든지 따라가요. 서울은 그만두고 죽는 것일지라도요.』
5
[편집]어떤 토요일날 저녁이다. 상인은 숙정(淑貞)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숙정은 자기 고향 여자로 열 세 살 된 상인에게 열 일곱에 시집온 여자이다. 그러나 숙정은 상인을 언제든지 불만히 여겼다. 첫째 자기는 벌써 성숙기를 지났으나 상인은 아직 어린애요 철없는 것이 언제든지 불만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의 사이는 남보다도 더하였다. 한편에서는 열렬히 요구하는 것을 수응치 못하는데 적지 않은 파란이 생길 것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시집에 보다 친정에 많이 있었다. 왔다갔다 하는 돗수가 늘어가더니 일 년이나 시집에 오지 않았다.
그러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숙정이가 애 뱄단 소문이 있었다. 시집서는 눈이 둥그랬다. 여러가지로 수소문도 해보고 사실도 하여 보았으나 애 뱄다는 것은 헛소문이고 일가집 어떤 서방님하고 달구경 나갔던 것은 사실이었다.
숙정의 삼촌은 대구로 숙정을 불러냈다. 신학문한 삼촌은 상당히 들고 일어서도 듣지 않고 학교에 보냈다. 학교를 고등녀고 삼년급까지 다니더니 밤마다 달성공원(達城公園) 산보가 잦았다. 그러더니 한 번은 야단이 나는데, 어떤 놈에게 실연을 당했다고 죽는다 산다는 문제가 일어나서 온 대구 복판의 말거리가 되었었다 한다.
상인은 편지를 들고 앞뒤를 보더니 그대로 뜯을 생각도 없이 방구석에 내던졌다.
『더러운 년.』
사실 그의 얼굴은 예쁘지 못했다. 아직까지도 여드름이 있고 눈 가장자리가 검푸르고 살빛이 흑동색(黑銅色)이다. 독부형으로 되어서 눈에 비수를 품은 듯이 날카로운 맛이 있거나 얼음장 같이 저린 맛이나 있으면 오히려 근접치 못할 위엄이나 있겠지만 이것은 송충이 눈썹에 분가루가 끼고 검은 입술이 송기떡으로 오려붙인 듯하며 보기에 무더워 보이고 속 답답해 보인다. 거기다가 다만 단장을 다하여 가꾸는 머리와 아침 저녁 고치는 비단옷이 무서운 생색을 낸다.
편지를 다시 집은 상인은 불유쾌하기 짝이 없음은 물론이어니와 가느다랗게 떠는 양심의 무서움이 있었다.
숙정은 아내다. 인습의 관념이 경고하였다. 아니다, 종아가 새로운 아내다.
참 아내다. 새로운 사상이 정열과 함게 소리쳤다.
그러나 어떻든 편지를 뜯고 보니까,
─ 지금 저는 의성 와서 있읍니다. 대구서도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 하옵시고 또 이제는 저도 그만하면 상인 씨를 모시고 지내는 것이 옳은 줄로 생각하였읍니다. 지난 모든 것은 용서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
상인은 철 모른다 하던 어렸을 적에 내심으로 분하던 것이 지금 다시 끓어 올라 오는지 편지를 찢을듯이 꾸깃꾸깃 단단히 한 손에 쥐었을 때 그이 얼굴은 선지피 같았다.
『용서! 안 될 말이지. 안 될 말. 일평생 내 눈앞에 보이지도 못하게 할 터이니!』
하고 편지를 찢으려고 볼 때 눈에 띄는 글자는,
—— 모레는 의성을 떠나 안동으로 가려 합니다. 모두 친히 뵙고 사죄도 할 겸.
이라는 것이다. 상인은 벌떡 일어났다. 그는 멀거니 말이 없었다.
6
[편집]동리에 소문이 났다. 주막집 처녀하고 김상인하고 정분났다는 것이다.
『어린 년이 눈이 높아서 양복쟁이 서방이 아니면 눈에 차지를 않고, 흥. 속 못차렸다. 뱁새가 황여 걸음을 따라가려면 가랑이가 찢어지지.』
동리 총각이 비꼬는 수작이요,
『될 일인가. 그의 삼촌이 알아보게, 당장 벼락이 나리지. 그래 양반이요 부자에다 어디 색시가 없어서 주막집 계집애를. 나이 어려 철없는 짓이지. 당장에 일이 날 걸.』
이것은 봉당마루에 모여 앉은 늙은이들 수작이다.
계집의 애비도 그 말을 들었고 또 어미도 그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눈치만 보고 말을 아니 하니 말려서 이로울 것도 없고 안 말려서 해로울 것도 없음이었다. 도리어 잘만 되면 한 번 올라앉는 셈이라 일이 잘 되기만 기다려 볼까 하는 중이다.
『여보 마누라, 아직 그애에게 그런 내색도 보이지 마시우.』
영감은 불을 끄고 마누라를 어루만지면서 말을 했다.
『영감이나 말마슈. 술이 취하면 할 말 안 할 말 다 하면서.』
마누라가 정에 겨워 톡 쏜다.
『아따. 가만히 말은 못하나.… 대관절 한 판 씨름이지. 잘만 되어 보구려. 이 아니꼬운 주막쟁이로 늙겠소. 적어도 어디를 가려면 자동차 바람에 어깨가 으쓱할 텐데.』
마누라는 정말 어깨가 으쓱하며,
『그렇게 되면 작히 좋겠소.』
이것은 종아 애비 내외의 공상이다.
이러는 동안 일요일이 되었다. 마침 장날이라 구름같이 모인 사람을 헤치고 자동차가 닿았다. 거기서는 남의 눈에 띌 만치 모양을 낸 여자 즉 숙정이가 내렸다. 그는 내리면서 사면을 둘러보았다. 구경꾼은 옷고름에 묻은 것처럼 줄줄 따라 다녔다.
그는 상인을 찾았다. 상인은 그래도 이면치레로 저만치 서서 숙정이에게 고개로 아는 체를 하였다. 숙정이 상인 앞으로 가자 구경꾼들은 두 사람을 에워싸고 꼴들만 본다. 어떤 애 녀석은 때묻은 손으로 담대하게도 윤나는 숙정의 옷자락을 만져 보는 놈도 있다.
그 속에 섞인 주막집 머슴녀석은 연해 두 사람 얼굴을 쳐다보면서 신기한 듯이 빙그레 웃고 있다.
두 사람이 집까지 갈 때까지 꽁무니들을 따랐다. 그것도 또 소문이 되고 말았다.
상인은 마땅치 않은 얼굴로 숙정을 보고,
『어디서 머물 테요?』
하였다. 숙정은 상인을 따라 들어가기도 무엇하여,
『여기 학교에 동무가 와 있어요』
하고 분부만 기다리듯이 상인만 보았다.
『그럼 거기 가서 쉬구려. 내 이따라도 갈께.』
『녜.』
야속한 대답이다. 숙정은 다시,
『그러면 제가 이따 저녁에 오죠』
하고 파라솔을 폈다.
『맘대로 하구려.』
숙정은 애 녀석 하나를 따라서 동무에게로 갔다.
7
[편집]『여기까지 무엇하러 쫓아왔소?』
상인은 그날 밤 찾아온 숙정을 보고 서리 같은 눈으로 말을 하였다.
『상인 씨 뵈러 왔지요.』
숙정의 얼굴에는 조그마한 주저나 서투른 빛이 없었다.
『나는 봐서 무엇하오. 숙정이 입으로 일평생 다시 안 본다고 하지 않았소. 어린애니 철딱서니가 없느니 못났느니 바보니 나중에는 병신이라고까지 안했소? 그런 사람을 무슨 필요가 있어서 찾아왔느냔 말이오.』
『지나간 것을 모두 용서해 달라구요.』
『용서?』
말꽁무니를 꾹 눌렀다 뗀 상인은 흥하고 한 번 웃으며,
『내가 당신을 용서할 권리도 없거니와 당신이 날더러 용서해 달랄 것도 없소. 엎질러진 기름을 제대로 담으려면 되겠소. 때는 벌써 늦었소. 당신은 시간이란 것이 어떤 것을 알 것이 아니오, 어제 그제도 아니오. 벌써 칠팔 년 전에 틀어진 것을 당신 맘대로 그것이 바로 잡혀질 줄 알우.』
숙정은 상인의 말이 딴은 옳다 하였다. 하지만 자기가 지금 상인을 정복하고 정복하지 못하는 데 자기 생활의 중대 의미가 있는 것을 발견한 이상 어떠한 수단을 다해서라도 상인의 마음을 자기 손에 아니 잡을 수가 없었다.
숙정의 꿈 같은 공상은 어느덧 환멸로 사라지고 무서운 현실에서 자기 몸을 보게 된 지금 그는 말할 수 없는 공포까지 느끼게 되었다. 그는 여자다. 그의 생활을 보장함에는 무엇보다도 상인의 마음을 붙들어 거기에 단념과 은둔의 생활일지언정 아니 구할 수가 없다.
과거를 생각하면 부끄럽고 후회되고 또는 스스로 웃음을 아니 웃을 수가 없다. 그는 그 과거에서 얻은 것은 남자를 무단히 우습게 보고 밉게 보는 것 외에 순진한 상인의 마음쯤이야 하고 얕잡아 보는 것이다.
『그것이 쉬운 일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아녜요. 그렇지만 상인 씨 마음에 달리신 것이 아녜요.』
『내 마음에 무엇이 달렸단 말이오. 나는 그런 말의 뜻을 아지 못해요.』
『그렇지만 어떻든지 저는 상인 씨 댁 사람이며 상인 씨의 아내가 아닙니까?』
『아내?』
상인은 숙정을 흘겨보며 소리를 높였다. 숙정은 그대로 말을 이어,
『댁에서도 모두 용서하여 주셨어요. 저는 그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날 만치 감격해요.』
눈물은 안나고 눈썹만 깜박깜박 한다.
『집에서 용서하였거나 말거나 그것이 나에게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오.
그렇거든 집에 가서 살든지 말든지 하구려.』
『상인 씨는 그렇게 영원히 저를 버리신단 말에요?』
『내가 버리기는 무엇을 내버려요? 손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을 내버리기 부터 하는 법은 없으니까요.』
두 사람의 말은 얼마 동안 중단되었었다. 문 틈으로 새어든 벌레가 램프 불 옆에서 팔락댄다.
숙정은 의외로 상인의 마음이 굳은 데서 아니 놀랠 수가 없었다.
숙정은,
『상인 씨』
하고 부르고서 한참 말이 없었다.
『왜 그러우.』
상인은 귀찮은 듯이 대답하였다. 조금 있다 유지 장판한 방바닥에는 구슬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상인은 연해 연방 떨어지는 눈물을 보매 마음이 좋지는 못하였다.
『울기는 왜 우. 누가 무엇이라 하였소, 여기까지 따라와서 사람을 귀찮게 굴 것이 무엇이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저는 아무것도 상인 씨에 바랄 수가 없어요. 다만 지나가는 거지를 거두어 두는 셈만 치시고 저를 상인 씨 댁에 두어 주세요. 저는 감히 상인 씨에게 사랑하여 주십시사 아내로 알아 주십시사 말씀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상인 씨에게 원할 것은 이렇게 객지로만 돌아다니지 마시고 댁에 가서 삼촌 어른을 잘 모시고 계시게 하도록 하세요.』
말을 모두 귓전으로만 듣고 있던 상인은 그 말에 와서 갑자기,
『걱정 말아요. 내가 가고 안 가고 밥을 빌어 먹어 다니고 안 다니는 것은 내 맘대로 할 것이니까…』
하고 돌아 앉았다. 숙정은 그대로,
『그것도 그러하시겠지만 제 생각 같아서는 젊으신 혈기에 잘못 하시는 일 같아요. 상인 씨의 신상이라든지 또는 장래도 생각하셔야 할 것이 아녜요. 아버지(양부)께서 물론 잘 하신다고 할 수 없지마는 늙으신 어른의 망령으로 돌려보내면 그만이 아닙니까? 상인 씨도 언제든지 은행이나 회사로만 다니시면서 창창한 앞길을 그르치실 테에요.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하여 보세요』
하니까 상인은 증을 버럭 내고,
『듣기 싫어요. 어서 가서 자기나 하우. 잉』
하고 닫았던 앞 창을 와락 열어젖뜨렸다. 상인은 마당을 보고 간담이 서늘하여졌다. 종아는 마당에서 방안을 엿듣다가 갑자기 문을 여는 바람에 오도 가도 않고 섰다.
상인의 목소리는 떨렸다. 종아는 원망 시기가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모르느냐는 듯이 빤히 쳐다보고 섰다.
종아는 아까 낮에 머슴녀석에게 분하고도 절통한 조롱을 받았다.
『너 헛물 켰드라. 아까 자동차에서 여학생이 내리는데 그것이 김 주사 색시라드라. 김 주사하고 같이 김 주가 사관으로 갔어. 내 어쩐지 언제든지 위태해 보이더니 그저 그렇지』
처음에는 이 소리를 듣고 가슴속에서 만 근이나 되는 무엇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는 설마 그러랴 하는 마음에 머슴녀석을 붙잡고 캐물었다.
『정말이냐. 녀석 거짓말을 잘하니까 믿을 수가 있어야지.』
『정말이고 말고. 나 혼자 봤다드냐. 장거리에 모였던 사람들이 모두 보았다. 누구더러든지 물어 보렴.』
정말이라 하면 어찌 이린 일이 또 있으랴. 가슴이 막히나 울 수도 없는 일이요 머리를 쥐어 뜯고 제 살을 깨물어도 오히려 시원치가 못하다.
그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발이 놓일 데 놓이지 않았다. 하루 종일을 조수같이 밀려오르는 분한 맘과 불같이 타는 질투로서 지내다가 밤중이 되어서는 견딜 수가 없어 상인의 사랑을 찾아온 것이다.
그 온 것은 상인에게 푸념을 하러 온 것도 아니요 물론 발악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정말이지, 정말이면 정말이라 하여 주고 거짓말이면 거짓말이라 하여 달라고 매달려 간청을 하러 왔던 것이다. 그것이 다 마침 와서 보니 딴은 들은 바와 같은 여자가 상인 씨와 대하여 있는 것을 보고 불 같은 마음에는 무슨 일이든지 났을 것이지마는 꿀꺽 참고 이야기를 엿듣던 것이다.
숙정의 눈에도 이 꼴이 보였다. 그는,
『웬 계집애가 남의 이야기를 엿들어. 네가 누구냐?』
하고 마루 끝으로 나섰다. 숙정은 상인의 얼굴을, 당신의 인격을 나는 의심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보였다.
종아는 여전히 말이 없이 서 있다. 가슴이 두근거리어 상인은 억지로 흥분되는 것을 누르고 될 수 있는 대로 냉정히 하려 무한히 신고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아,
『이 밤중에 웬일이야?』
하는 목소리는 떨렸다.
『잠깐 보이려 왔어요.』
『나를?』
『녜.』
『밤중에 무슨 볼일이야, 계집애가?』
『밤중에 보이려 다니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상인은 조마조마하고 답답하였다. 종아가 자기 맘은 모르고 숙정에게 무슨 기색을 보이면 어찌하나 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두 사람을 다 돌려 보내고 조용한 기회에 자세한 말을 하리라 하였더니 종아의 입에서 불쑥 이런 말이 나오매 참괴한 생각과 너무 당돌한 듯한 생각에 말이 콱 막혔을 때 숙정은 상인을 훑어 보며,
『녜, 인제 알겠읍니다. 다 이런 조건이 있으니까 그러셨읍니다그려. 자, 어서 들어와서 앉으시지요. 대단히 실례를 했읍니다.』
한참 비꼬더니 상인을 보고,
『나는 갑니다. 재미있게 이야기하십시오. 그런 줄 알았다면 일찍 갈 걸 공연히 방해를 했읍니다』
하고 내려 선다. 상인은 할 말이 없다. 그는 하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고 문지방에 한 발을 얹고 있었다.
숙정은 종아 앞을 지나면서 「어디 좀 보자」는 듯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건방지게. 될 줄 아니』
하고 나가 버린다.
숙정이 간 뒤에 상인은 그제야 종아를 보고,
『왜 왔어. 무슨 할 말이야』
하였다. 그 말소리는 조금 따뜻한 맛이 있고 풀어졌다.
『대관절 이리로 들어오지.』
종아는 들어가려고도 않는 것을 상인을 끌어들였다.
『지금 그이가 누구예요?』
종아는 앉자마자 그 말부터 물었다.
『그가 부인이시라죠.』
종아의 입에서는 거퍼 말이 나왔다. 그는 두 손을 얼굴을 가리면서,
『그렇게 사람을 속이세요』
하고 고꾸라져 울었다.
『저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계집년이라고 공연한 사람을 버려 놓으셨으니 인제부터 저는 어떻게 하란 말씀예요?』
상인은 두 계집의 호소를 듣기에 얼떨떨하였다. 그는 어떻게 이 순결한 계집애의 가슴에 받은 의심의 상처를 고쳐 줄 수 있으랴 하였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남부끄럽지도 않아. 무슨 일인지 자세히 알지도 못하고 그러거든. 자 울지 말아, 응 울지 말아요.』
상인은 정성껏 종아의 어깨를 흔들면서 타이른다.
『그만 두세요. 그만 두세요.』
종아의 목이 메어서 말이 잘 안들린다.
『제가 모두 들었어요』
하더니 울음 소리가 더 높아간다.
『듣기는 무엇을 들어 글쎄.』
상인은 기가 막혀서 웃음을 웃었다.
『아까 그이가 부인이시죠? 그렇죠?』
종아는 다짐이나 받듯이 말에 힘을 준다.
『그런 부인이 계시니까 저 같은 것은 생각이나 하시겠어요. 한때 풍정으로 이럭저럭 하시다가 휙 떠나 버리시면 저는, 구만 리 같은 전정이 있는 젊은 년은 어떻게 하라는 말씀예요. 제 눈이 뒤집혀서 분수에 당하지도 않는 생각을 먹었다가 그런 꼴 당하는 것을 누구를 원망해요. 하지만 분해요. 저는 속은 것이 분해요.』
한참 울음 반 한숨 반 섞어가며 늘어놓더니 다시 상인의 무릎에 고꾸라졌다.
『글쎄 속지 않았어. 속기는 무엇을 속았다고 그래.』
『속지 않고 무엇이예요. 그럼 지금부터라도 저를 어떻게 하실 터입니까?』
『어떻게 하긴 지금 새삼스럽게 또 물어볼 게 무어야.』
『그럼 저를 전에 말씀한 것 같이…』
흑흑 느꼈다.
『그럼, 어디든지 같이 가자 하지 않았어.』
『하지만 그것도 말씀뿐이었죠. 정말 부인은 어떻게 하시고요. 저 같은 계집을 데리고 가세요? 그만 두세요. 저는 오늘 낮에 부인이 오셨다는 말씀을 듣고 속으로 맹세하였어요. 다시는 만나뵈올 것도 없고 저를 보러 오실 것도 없어요. 저는 혼자 산 속에 들어가 중이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혼자 평생을 지내든지 할 터예요. 이제부터는 저를 생각지 마시고 잊어주세요.』
눈물은 더벅더벅 방바닥을 두들기듯이 떨어졌다.
상인은 종아가 자기의 마음을 몰라 주고 어찌된 사정도 알지 못하고 울어가며 푸념을 하는 것을 들을 적에는 속에서 열화가 오르고 증이 나더니 다시 만나지 않겠으니 단념하여 달라는 데는 적이 마음이 좋지 않아지며 따라서 눈물까지 핑그르르 돈다.
『글쎄 왜 그런 불길한 소리를 해, 여태까지도 나를 그렇게 의심해서 어떻게 해. 우리가 약조까지 한 일이 있지. 죽기까지 맹세한 일이 있지 않아. 자 자세한 이야기를 할께 눈물 씻고 바로 앉아. 그렇게 무슨 일을 쉽게 결정을 하니까 오해가 생기지. 자 자.』
상인은 종아를 끌어 일어 앉혔다. 그리고 자초지종으로부터 이야기를 다 하였다.
나중에는 종아의 눈에 눈물이 마르고 상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이제도 나를 의심할 테야. 이렇게 불쌍한 사람에게도 그런 무정한 소리를 할 테야.』
상인은 어린애 같이 울었다. 종아는 우는 상인을 보더니 어떻게 가엾고 불쌍한지 목을 안고 역시 울어가며 빌었다.
『제가 잘못했읍니다. 용서해 주세요』
하며 서로 어우러져서 밤 가는 줄을 모르고 울었다가 웃었다가 하였다.
8
[편집]상인은 은행에서 집무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웬일인지 다른 날보다 유달리 마음이 가라앉고 정신이 시원하였다. 전 같으면 숙정이 종아의 생각이 물레방아처럼 돌아가서 얼마만 생각을 하고나면 정신이 띵하고 머리가 아팠을 터인데 오늘은 그런 무엇을 모두 잊어버리고 높은 곳에 시원히 누운 것 같다.
일기가 몹시 좋아서 양지가 들고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드는 관계도 있지마는 그에게는 이상할 만치 유쾌하고 안정된 심기다.
거의 퇴사할 때 쯤 되어서다. 주막집 머슴녀석이 은행에 와서 자기를 찾는다. 그놈은 비쭉비쭉 몸을 옆으로 기대서며 마치 군청이나 경찰서에나 들어온 듯이 으리으리하고 무시무시한 듯이 떠듬거리는 말소리로,
『지금 좀 나오시라구요』
하며 못나게 머리를 비비적댄다.
상인은 머슴녀석이 은행까지 쫓아 온 것도 전에 없는 일이거니와 올 필요도 없는 데다가 지금 나오라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시간 있는 사람을 지금 나오랄 적에는 무슨 큰일이 나지 않고는 없을 일이다.
머슴녀석은 땀을 씻으며 눈을 꿈벅꿈벅하며 사면을 둘러보고 있다.
『대관절 누가 나오라든?』
상인은 머슴녀석에게 물었다.
『의성서 누가 오셨다고 얼른 나오시래요.』
『의성서?』
『녜.』
『의성서 누가 오셨단 말이냐?』
상인은 철필대로 머리를 긁으며 생각하였다. 암만해도 알 수가 없으므로 다시,
『너 그이를 보았니?』
『녜.』
『노인이든 젊은이든?』
『노인이신데요. 당나귀 타고 시커먼 안경을 쓰시고 오셨어요.』
『응!』
상인은 자기 삼촌인 것을 알았다.
『그래 지금 어디 계시냐?』
『김 주사 어른 계신 사랑에 계셔요.』
상인은 그 말을 하고 허락을 받은 후 조퇴를 하였다. 상인의 삼촌은 별로 볼 일은 없으나 은행의 빚 얻어 쓴 것을 얼마간 연기하여 달랄 일과 또는 상인이와 숙정이가 와 있으니 만나도 보고 오래 집에만 들어앉아 있으니까 갑갑도 하여 소풍차로 온 것이다.
조금 있더니 누구누구 지명하는 친구가 찾아왔다. 은행에서는 지배인이 왔다. 한참 분주한 심부름을 하고 나서 저녁 상을 들이게 되었다. 방 한가운데 긴 장죽을 물고 도사리고 앉아 연경을 딱 버티고 위엄있게 앉아 있을 때 주막에서는 특별히 차린 저녁상에 반주를 곁들여 종아가 그것을 들고 들어왔다.
가만히 놓고 슬그머니 나갈 적에 늙은이는 연경을 슬쩍 아래 코로 떨어뜨리더니 안경 너머로 종아를 한 번 다시 보았다.
점잖은 손님 앞에 나간다고 머리를 새로 빗어 제비부리 자줏댕기를 느지막하게 드리고 새 옷 입고 새 버선 신고 분세수까지 하여 그렇지 않아도 눈에 띄는 인물이 색마 늙은이의 눈을 그대로 거칠 리가 없다.
더구나 성숙한 엉덩이며 후리후리 늘씬히 흐르는 키, 퉁퉁한 젖가슴을 볼 때 늙은이의 침이 흐른 것도 무리가 아니다.
종아가 문지방을 넘으려 할 때,
『얘』
하고 종아를 불렀다. 옆에서 이것을 보던 상인은 선뜻 자기 삼촌의 꼴을 보았다.
종아는,
『녜.』
나가도 못하고 들어가도 못하고 서 있다.
『네 이름이 무어?』
『종아올시다.』
『몇 살인구?』
『열 여덟 살요.』
『허어 숙성하구나. 대관절 술이나 한 잔 쳐주고 가야지. 상만 놓고 달아나면 어찌하나.』
종아는 할 수 없이 술을 쳤다. 노인은 한 잔을 마신 후에,
『네 애비는 무엇을 하니?』
노인은 말을 하려는데 상인은 종아에게 눈짓을 하여 피해가도록만 하였다.
그렇지만 종아는 어째야 좋을 줄 몰라 난처하였다.
『하는 것이 없어요.』
『그럼 놀고 먹어. 그게 될 말인가? 그러고 밥장사는 누구 하나? 네 어미가 하니?』
『녜.』
『으응.』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니,
『또 한 잔 부어라』
하고 주전자를 주었다.
주전자를 들고 부끄러움을 띠는 종아를 노인은 다시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그렇게 부끄러울 것 없어. 늙은이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무엇이야』
하고 한참 다시 자세히 보다가
『열 여덟 살이라지』
하고 다시 물어 본다.
『녜.』
종아는 대답하였다. 노인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한참 멀거니 앉아 고개를 끄덕끄덕 하였다.
『그럼 시집갈 나이가 넘었군. 어째 여태까지 있었을까? 정말야. 너 시집가고 싶은 생각은 없니?』
종아는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돌려 외면을 하였다.
『가고 싶은 게로군. 속으로는 육조배관을 하고도 거죽으로는 저렇겠다. 어디 내가 중매 하나 들어 줄까. 이런 데서 그냥 지내기는 참 아까워.』
노인이 사흘을 묵더니 의성으로 가버렸다. 의성으로 간 지 이틀만에 그 집 상노가 안동에 왔다. 첫째 자기 댁 서방님께 문안을 드렸다.
『무슨 일로 왔니?
『영감 심부름을 왔읍니다.』
『무슨 심부름?』
『다른 것이 아니오라 서방님 식사해 나르는 주막집 바깥주인이 누구인지 노자까지 주시면서 오늘은 늦을 터이니 안동서 묵고 내일 데려오라는 분부가 계시어서요.』
상인은 이 말을 듣고 상을 찌푸렸다.
『그것은 왜?』
『소인은 알 수 있읍니까. 그래 나는 분부만 들어 대령할 뿐입죠.』
상노 녀석이 나간 뒤에 상인은 생각하였다. 이제야 참으로 무서운 싸움은 시작되려 한다. 그는 울렁거리는 가슴과 끓는 피를 억지할 수가 없었다.
9
[편집]주막 주인은 갓을 뒤통수에 비스듬히 딱 붙여쓰고 담뱃대에다 여느 담배를 담아 피웠다 껐다 하면서 술이 얼근하여 집에 돌아왔다.
밤중이지마는 마누라를 부르더니,
『여보 술 한 잔 부시오.』
호기있게 술을 청하더니
『무어 안주 없니? 쇠고기 좀 더 썰어라』
하는 통에 마누라가,
『어디서 술이 잔뜩 취했구려. 또 무슨 술을 내란 말요?』
『아따 잔소리 말고 내어. 술이 취하긴 무슨 술이 취했다고 그래.』
『대관절 의성 그 영감이 갑자기 왜 불렀읍디까? 돈이나 좀 듬뿍 주겠답디까?』
『가만 있어. 급하기는 이렇게 돈도 주고 땅도 주고 집도 준답디다.』
어떻든지 화기가 만면이다. 마누라는 궁금증이 나서 그 속을 알려고 탁주도 따라놓고 삶은 고깃점도 썰어놓고 하며,
『자 약주나 자시며 천천히 이야기하시우. 갑갑하구려.』
『종아는 어디 갔소?』
『저 건넌방에 있는 게지.』
바깥주인은 한참 말이 없더니 제법 나직나직한 목소리로,
『여보 이런 게 장땡이라는 거야』
하며 젓가락으로 쟁반을 친다.
『무엇이?』
마누라는 눈이 둥그래서 가까이 앉는다.
『내 의성을 가지 않았소?』
『그래.』
『갔더니 이 영감이 하는 말이 종아를 주지 못하겠느냐고 하지 않겠소.』
마누라는 벌떡 뒤로 물러앉았다.
『에그 망칙해라. 그 노인이.』
『내 말을 들어요. 그러면서 주막살이를 언제든지 해서 되겠느냐고 일변 지내는 것을 물어 보며 또 군색한 것이 있거든 당장에 말을 하라는구려. 그렇지만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아서 무엇이라 대답을 할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그래 나 혼자 난 자식이 아니니까 가서 서로 상의해 본 후에 기별을 하마 하였더니 올 적에 영감이 문 밖까지 나오며 부탁이로구려.』
마누라는 말을 듣고 한참이나 말이 없이 있다가,
『그럼 영감 생각에는 어떻게 해야 좋을 것 같소?』
『내 생각이야 별다른 생각 있소. 달라니 주지.』
『글쎄 주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마는 그 늙은이를 주면 계집애 신세는 망치는 것 아뇨. 또 김 주사에게 잔뜩 맘이 있어 하는데 일이 난처하게 되지 않았소.』
『아따 별 빌어먹을 소리를 다 듣겠네. 그 늙은이가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 지 누가 안단 말이오. 가 있다가 영감 죽은 후에 개가하면 그만이지. 지금 세상에 정절 지켜보게. 저 호강하고 어미 애비 잘 살리면 열녀지.』
『그래도 아무리 내 자식이라도 한 번 물어 보기나 합시다그려.』
『아따 물어봐서 무엇해. 어미 애비가 가라면 가는 것이지 그런 소리는 두 번도 말어.』
이때 옆방에서 이 소리를 모조리 듣고 있던 종아가 문을 박차며 뛰어나왔다.
그는 얼굴에 독이 가득 차고 무서운 용기로 뛰어 왔다.
『무엇이 어째요. 지금 무엇이라 했소?』
애비 앞에 바짝 들어앉았다. 애비는 술잔을 들었다가 얼떨결에 다시 놓고 하도 의외의 일이므로 물끄러미 종아를 개개 풀린 눈으로 바라보다가,
『무얼 무어래, 네 혼인 이야기 했지. 시집가기 싫으냐? 호강하기 싫어?』
말 뒤를 번쩍 들더니 입맛을 다신다.
『나는 호강은 못해도 그런 늙은 영감한테로 가기는 싫소.』
『무엇이 어쩌고 어째. 세상이 망하려니까 송아지가 엉덩이에서부터 뿔이 난다고, 계집애년이 어쩌고 어째. 애비 에미가 보내는 대로 다소곳하고 가는 것이지 건방지게 싫소 좋소란 말이 무슨 말이야. 허허 기막힌 일이로군. 어디서 계집년이 부끄러워서도 그런 말이 안 나올 터야. 늙은 영감이 어떻단 말야. 돈이 생겨도 싫어?』
『돈도 싫고 아무것도 싫어요. 나는 죽어도 그 영감에게는 갈 수가 없소.』
애비는 한 잔 먹은 김이라 팔뚝에 분이 올라서 옆에 있던 사발로 종아를 한번 후려치더니 어느덧 바른손에다가 머리를 칭칭 감고,
『응』
하더니 발길로 등줄기를 내려 밟았다.
『이년 죽어라. 애비 말 거역하고 어쩌고 어째.』
『에구구 어머니, 사람 살리우.』
아우성 소리가 나더니 어미는 영감의 팔에 가 매달려,
『이게 무슨 짓이오. 글쎄 자식을 말로 이르지 이렇게 때리는 법이 어디 있소』
하며 울어가며 권한다.
『저리 가.』
영감이 휘뿌리는 바람에 마누라는 저쪽 독 앞에 가 나가동그라졌다.
『이년, 그래도 잔소리를 할 테냐?』
무서운 발길은 또 엉덩이를 찼다.
『죽여보구려. 그리로 가나. 죽어도 그리로는 가지를 않을 테니까.』
마누라가 다시 일어나서 영감에게 매달리며,
『글쎄 사람 죽이겠소. 이것 좀 노. 놔요』
하고 감아쥔 종아의 머리를 풀으려고 손아귀를 뻐개니 쇠 같은 손이 요지부동이다.
『이년아, 너는 딸에 역성드니.』
이번에는 계집에게로 달려들어 계집을 친다.
『이것봐라, 사람친다.』
마누라 역시 다소곳하지 않는다. 영감은 좌충우돌로 여기 한 번 치고 저기 한 번 치면,
『에구구 사람살류』
『이놈아 누구를 치니』
하고 야단이다.
동리 사람이며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여서 가까스로 싸움을 말려놓았는데 이럭저럭 영감과 마누라는 잠이 들어 버리고 밤도 늦어서 세상이 죽은 듯한데 홀로 깨어 있는 것은 종아였다.
생각하면 분하고 억울하고 절통하여 못 살겠다.
더구나 돈밖에 모르는 제 애비가 그 늙은이에게 자기를 보내고 말 것은 사실이니 그 늙은이에게 죽어도 가기 싫은 것도 싫은 것이어니와 늙은이의 조카요 또는 아들인 상인을 생각하면 그것은 짐승이 되기 전에는 진정으로 갈 수 없는 일이다.
한 옆에서는 돈을 가지고 꼬이면 그 돈을 본 자기 어미 아비는 위력으로
누를 터이니 섬섬약질의 계집애가 어찌 그것을 면하랴.
죽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일어나기 시작하여 그대로 낙동강을 향하여 줄달음질치려다가 그래도 한 번 서로 의논이나 하여보고 죽기라도 같이 죽고 그렇지 못하면 그 앞에서라도 죽으리라는 생각에 매무시를 고쳐 하고 살그머니 집을 빠져 상인에게로 향하여 갔다.
밤은 깊어 여름이라 해도 바람이 신선하고 풀 끝의 이슬은 바람이 지날 적마다 우두둑 떨어진다. 동리집에서 닭이 울고 개가 짖는다. 온 세상은 죽은 듯이 고요한데 사면을 두른 산그림자가 멀리 희미하게 보인다.
『주무세요?』
문을 두드렸으나 대답이 없다.
『주무십니까?』
그래도 잠이 깊이 들었는지 대답이 없다.
『문 좀 여세요.』
여전히 고요하다. 종아는 야속한 생각이 나서 눈에서 눈물이 돈다.
사랑문을 본시 밖에서 열 수가 있었으나 종아는 그것을 잘 몰랐다. 그러다가 어떻게 힘을 주니까 덜컥 열렸다. 어떻게 시원한지 자기 가슴이 열리는 것 같았다.
그는 창문으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불은 껐는데 상인이가 잠들어 자는 숨소리만 들렸다.
『여보세요.』
상인은 잠꼬대처럼,
『그 누구냐?』
하며 기지개를 튼다.
『저예요.』
목소리가 벌써 종아인 것을 알았다.
『이 밤중에 웬일이야?』
문을 열고 맞아들이고 불을 켰다.
상인은 종아의 얼굴을 보았다. 눈이 퉁퉁히 붓고 두 눈이 아직도 마르지 않았다.
『여보세요, 저는 지금 죽으러 가려고 하든 차에요.』
종아는 그대로 쓰러져서 운다.
『저같은 년은 죽어야 마땅해요. 살아서는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계집예요.』
상인은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분수가 있지 무슨 영문인지를 알 수가 없어서,
『죽기는 왜 죽어. 말을 해야지 울기만 하면 알 수가 있나. 이렇게 일어나 앉아서 이야기를 해요. 자』
상인은 종아를 일으켜 앉혔다.
『자 울지를 말고 자초지종을 이야기 해.』
그래도 종아는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서
『제가 만일 죽는다 하면 김 주사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저를 위해서 눈물이라도 한 방울 흘려 주시겠어요?』
『그래도 또 그런 소리를 해. 죽기는 무슨 까닭으로 죽어.』
『죽지 않고 무엇해요. 오늘 아버지가 의성 다녀오더니…』
『그래 그래 그렇게 이야기를 해.』
『어머니하고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데』
『응 그래』
『지난번 오셨던 영감이』
『어째 영감이』
『돈을 많이 줄 것이니』
『옳지』
『저를 영감이 달라시더라고요.』
『영감이 달라고?』
상인은 주먹을 쥐고 이를 악물었다. 그는 몸이 떨렸다.
『안 될 말. 내가 있는데 종아를 내놓을 줄 아나 보군. 어림없지. 돈이 다 무엇이야. 어디까지 나는 해볼 터이니까.』
혼자 방바닥을 쳤다.
그는 다시,
『그래 어머니와 아버지가 무어래?』
『아버지가 더 미워요. 어쩌면 자기 자식을 그렇게 합니까? 돈 생기고 집 생기고 땅 생기어 어미 애비 잘 살리고 저 호강하면 열녀라고 하기에 분하고 절통해 견딜 수 없기에 말마디나 들이댔더니 사정없이 때려서 지금도 각처가 아파요.』
상인은 더럽고 괘씸하고 분한 마음 같으면 그대로 뛰어가서 대신 분풀이를 하고 싶지마는 그대로 참으면서,
『그래서 죽으려고 하였단 말야? 무얼 그까짓 일에 죽으려고까지 해. 아무 염려 말아. 내 담당할께. 내 내일 아버지 어머니 보고 사정 이야기를 잘 말하고 그렇게 못하게 하고 또 의성 가서도 내 잘 말씀해서 그러시지 않게 하고 할 터이니 아무 걱정 말아요. 그러고 우리 둘이서 안동서 살게 되면 안동서 살고 의성서 살게 되면 의성서 살지.』
『그렇지만 모두들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해요?』
『말을 안 들을 리가 있나?』
『왜요. 집의 아버지는 고집이 여간 아닌데요. 그러고 돈이라면 목숨 내놓고 덤비는 이예요.』
『우리도 목숨 내놓고 덤비지. 우리도 다해 봐서 안 되면 죽기라도 하지.』
상인의 말에는 감격과 뜨거움이 있다.
『그러면 저하고 같이 죽기라도 하실 테에요?』
종아는 든든한 듯이 상인을 물어 보며 물었다.
『죽게 되면 같이 죽지. 어디든지 같이 가고 언제든지 같이 죽고.』
서로 한참 부여잡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왜 이런 방자스런 말을 해. 이런 말은 할 것이 무엇야. 우리는 얼마든지 살아야지. 잘 살아야지. 모든 것을 이기고 잘 살아야 해.』
『그렇지만 아무리 해도 잘 살 것 같지는 않아요. 얼마 아니해서 우리에게는 무서운 팔자가 닥쳐올 것 같아요. 그때는 저는 아무리 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이 없이 촛불만 본다.
未完[미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