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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해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어젯밤에 개인 적은 비는 다시금 가을빛을 새롭게 하였다.

나비의 꿈인 듯한 코스모스의 가볍고 깨끗한 모양이 아침 볕에 새로운 키스를 이기지 못하여, 온몸을 움직이고 있는 한편에 처음 핀 국화의 송이송이에 맺혀 있는 이슬 방울이, 바로 보면 은(銀)인 듯하다가 비껴 보면 금인 듯도 하였으 나, 맑은 바람이 지나간 뒤에 다시 보면 그것은 은도 아니 오 금도 아니오 이상한 수정이었다.

그것을 바라보고 마음도 없이 가을 향기를 맡으면서 문지 도리를 의지하고 고요히 서 있는 스무 살이 될락말락한 예 쁜 여자는 잊었던 일을 깨우친 듯이 빠르면서도 한가하게 몸을 돌리면서, 갓 마친 단장을 거울에 비춰서 가볍게 두어 번 손질한 뒤에, 삼층장 위에 놓여 있는 바느질 그릇을 내 려놓고 다시 장문을 열고 무엇인지 꺼내려 할 즈음이었다.

"경순(敬淳)씨, 오늘도 또 바느질이요?"

하면서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창수(昌洙)의 말소리는 명랑하 였다. 창수를 미처 보지 못하고 말소리만 들은 경순은 조금 놀라면서 둘러보더니 다시 웃는 입술로,

"여자가 바느질이나 하지 그럼 뭘 해요."

하고 장 안에서 하다 두었던 모시 진솔 두루마기를 꺼내어 놓는다.

"여보, 오늘 일기도 좋고 여러 날 바느질하노라고 갑갑도 할 터이니, 우리 밤이나 주워 먹으러 갑시다."

창수는 문지방에 두 손을 짚고 서서 경순을 바라보고 말한다. "밤을 주워 먹으러 가다니요?"

하고 경순은 무슨 말인지 의미를 모르는 듯이 돌려 물었다. "밤 주워 먹는 것 모르오? 나무에 열린 밤을 따서 주워 먹 는단 말이요."

"어디 가서요?"

"안양(安養)으로 간답니다."

"안양이 어디여요?"

"안양이 수원(水原) 못미쳐 있는데, 경성역에서 차를 타면 몇 정거장 아니 가서 내리게 됩니다. 잇수로 말하면 한 육 칠십 리 될까?"

"거기 밤은 임자가 없나요?"

"왜 없어요? 다 있지요."

"임자가 있으면 어떻게 다른 사람이 주워 먹어요?"

"남의 것을 거저 먹을 수가 있나요? 돈을 주고 몇 나무를 사서 따먹는 거지요."

"예!"

하고 경순은 비로소 밤 주워 먹으러 간다는 의미를 알았다 는 듯이 마음의 고개를 끄덕이고,

"그럼 누구 다른 이들도 가나요?"

하고 물었다.

"오늘 ○○ 신문사 주최로 습율 대회(拾栗大會)를 하는데, 거기에는 여자만이 참가할 수 있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 기 참가할 것 없이 가기는 같이 가더라도, 따로이 밤나무를 사서 우리끼리만 따가지고 옵시다."

하고 창수는 가기를 재촉하였다.

"신문사에서 가면 여러 사람이 갈 터인데, 남부끄럽게 같이 갈 것이 무엇 있어요. 가려면 훗날 따로 가는 것이 좋지."

하고 경순은 갈 생각은 있으면서도 여러 사람이 가는 중에 같이 가기를 수줍어하는 듯하였다.

창수는 밤줍기 놀이가 수년래로 각 신문사에서 한 해에 한 번씩은 반드시 주최하는 일로, 서울의 여자로서는 거의 상 식으로 되어 있는 것인데, 경순은 아직 그러한 일을 모르고 여러 사람과 같이 가기를 부끄러워하는 것을 볼 때에, 조금 갑갑하고 불쾌한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이 학생출 신이 아닌 구식 여자로서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부끄럽기는 무엇이 부끄러워, 나하고 같이 가는데. 그리고 창옥이도 갈 터인데 어서 옷이나 갈아 입우."

"창옥이도 가요?"

경순은 신문사 주최로 여러 사람이 간다는 말에 조금 주저 하다가, 창옥이도 같이 가게 된다는 말에 새로운 용기를 얻 어서 조금 크게 뜨는 눈에 웃음의 흔적을 띠었다.

"그럼, 창옥이를 이리로 오라고 했으니까 곧 올걸. 어서 옷 이나 갈아 입어요."

하고 창수는 사랑스러우면서도 웃지도 아니하고 짐짓 엄숙 한 듯이 재촉하는 빛을 짓는다.

"그럼 문 닫고 저리 가세요."

하면서 방긋이 웃는 경순은 문 닫고 가라는 의미를 모르는 듯이 그대로 서 있는 창수를 보면서,

"어서 문 닫고 저리 가세요, 옷 갈아 입게요."

하고 의장문을 연다.

"원 별소리가 다 많아. 옷 입는 것쯤 보면 어떻담."

하고 창수는 영창을 비뚤어지게 닫은 채로 돌아서면서 성 냥을 그어서 궐련에 불을 붙인다.

"언니."

하고 대문간에서부터 소리를 지르고 들어오는 창옥은, 창 수가 마당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오빠 왜 혼자 있우? 언니 어디 갔우?"

하고 너무 빨리와서 가쁜 듯이 숨을 돌린다.

"방에서 옷 입는단다. 너 좀 들어가서 옷 좀 입혀 줘라, 어 서 가게."

하고 창수는 방문 편을 돌아보며 소리 없이 웃는다.

"에그 오빠두, 언니가 왜 옷 입을 줄 모르나? 너무 맵시있 게 입어서 걱정이라나."

하고 창옥은 종종걸음으로 가서 영창을 방긋이 열면서,

"언니 옷 입으시우? 찬찬히 입어요, 오빠 말 듣지 말고. 차 시간이 아직 멀었는데."

하고 시계를 쳐다보더니,

"나는 오빠가 얼른 오라고 야단하는 바람에, 옷을 되는 대 로 입고 뛰어왔더니 어떻게 되었나 모르겠어."

하고 자기의 옷 입은 것을 살펴보더니,

"나도 들어가서 조금 고쳐 입어야겠군."

하고 창수를 돌아보고 웃더니, 뒷마루에 놓았던 핸드백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간다. 방에서는 소곤거리는 소리가 나더 니, 다시 작은 웃음 소리가 난다.

큰걸음으로 뜰 앞을 거닐면서 시계를 내어 보고 혼잣말로,

"허 이거 망건 쓰다 장 파하겠군."

하고 창수는 타다 남은 궐련 깍대기를 손도 대지않고 혀끝 으로 밀어서 마당에 떨어뜨린 위에 발로 밟아서 썩썩 비빈다. "오빠는 사내라도 양복 입을 때 보면 넥타이를 매었다 풀 었다 하고, 면경을 요리조리 보면서 한 나절씩이나 입으시 면서, 남의 흉을 잘 보시지. 여자 옷 입는 것이 그렇지두 않 을까 뭐."

하는 창옥의 소리가 조금 날카롭게 들리더니, 경순의 소곤 거리는 소리가 난 뒤에 다시 두 사람의 웃음 소리가 난다.

"자 어서 가세요, 재촉만 하지 마시고."

하고 창옥이 앞에 나오자, 웃는 입술을 다 다물지 아니한 채로 뒤를 따라나오는 경순은, 고개를 숙여서 자기의 치마 앞과 발등을 다시 보더니, 흐르는 눈으로 창수의 기색을 살 펴보고 다시 얼굴빛을 고친다.

서늘한 듯하면서도 따스한 가을의 아침 볕은 그들의 새 단 장을 비춰 주어서 무슨 뜻이 있는 듯하였다.

창수는 취운정(翠雲亭) 어귀를 나서서 바로 재동 네거리로 나오려다가, 다시 머뭇머뭇하더니 어느 전방으로 들어가서 전화로 자동차를 불렀다.

"자동차는 왜 불러? 조금 가다가 전차 타면 그만인데."

"글쎄 말이야."

이렇게 서로 말하는 경순과 창옥은 길의 한편으로 비켜 서 서 끊임없이 무슨 말을 속삭이고 있었다. 어느 겨를에 자동 차는 와서 그들을 싣고 경성역에 이르렀다.

정거장에는 습율 대회에 가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 은 신문사에서 가는 것으로 영솔하는 사람과 기자, 사진사 등 몇 사람을 제하고는 전부가 여자였다. 그들의 의복과 행 장과 모든 차림차림은 가지각색이었다. 그들은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곳에 가는만큼 될 수 있는 대로 모양을 내었다. 그 중에는 밤줍기에도 편리하고 여흥(餘興)에도 한몫보려고 일 부러 수수하게 차린 사람도 없는 것은 아니나, 그러나 그러 한 여자는 몇 사람이 못 되었다. 그들은 왔다갔다하며 아는 사람끼리 이야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의 인사 소개도 하고, 서로 찾고 부르고 야단법석이었다.

"이게 얼마만야."

"이런 데서야 만나 보겠군."

"그런데 아주 몰라보게 되었어, 어쩌면."

"어린애를 낳고, 게다가 부엌데기 노릇을 하니까 그렇지.

아주 모양 없이 되었지?"

"아니야. 그런 의미로서가 아니라, 얼굴이 좋아졌다는 말이야. 발육이 대단히 피었는데."

"인사 소개나 좀 할까. 이분은 숙명(淑明) 출신으로 동경가 서 사범(師範)을 마치고 지금은 모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신 이 ○○씨."

"이분은 한참 스크리인의 여왕이라고 하던 인기자로서, 지 금은 현모양처가 되신 박 ○○씨."

"이번에는 밤을 좀 많이 주워야 할 텐데. 작년에는 아주 못 주웠어."

"나는 밤을 줍는 것보다도 여흥에 일등상을 타야겠어."

"에그, 나는 그런 것보다도 친구 만나기 위해서 나왔어. 이 런 기회가 아니면 여러 친구를 만나 볼 수가 있어야지."

"에그, 나는 점심을 싸놓고도 잊어버리고 나왔어."

이러한 말들로 유난히 수선을 떠는 여자들이 많았다. 그들 은 거의 전부가 신여성들로, 모든 행동이 쾌활한 듯도 하였 지마는, 그보다도 경박한 편이 많고 친절한 듯하면서도 수 다한 편에 가까웠다. 별로 이유도 없이 자기 예쁜 것을 드 러내려고 하는 것이 여자로서의 본능이라면 그들은 더욱 그 러한 듯하였다. 그들의 웃고 말하고 고요하고 움직이는 모 든 것이, 다 다른 사람들의 예쁘게 여김을 받으려는 애교의 동작 같이 보였다.

창수는 그들과 경순을 비교하여 보려고도 아니하였으나 자 연히 다른 점을 보게 되었다. 경순이 천연적으로 타고난 얼 굴의 예쁜 것과 태도의 아름다운 것으로서의 다른 것은 말 하지 말고라도, 쪽찐 머리에 긴 치마를 입고 솜버선에 고무 신을 신은 것이라든지, 천연하고 침착한 중에 알지 못하게 나타나는 수줍어하는 기색이, 어디로 보든지 그들에게는 섞 이지 않는 구식 여자였다. 경순은 창수를 따라다닐 뿐이어 서 자기의 무엇을 남에게 보이고 들리려고도 아니하였지마 는 또한 남의 행동을 그다지 보고 들으려고도 아니하였다.

이따금 밤 주우러 가는 여자들의 행동을 눈주어 보었으나 그들의 행동에 대하여 무슨 비판을 하는 것 같지도 아니하 였다.

경순은 그들의 사교적이요 개방적인, 활발이라고도 할 수 있고 경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에 대하여 부러워 하는 기색도 없었지마는, 그렇다고 그것을 비웃는다든지 흉 보는 눈치도 없었다. 그러면 경순은 그만한 것을 판단할 만 한 능력이 없어서 그러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경순은 사슴의 눈과 같이 순하면서도 영채가 도는 눈이라든지, 둥 글고 또 여물게 된 머리라든지, 있기는 확실히 있으면서도 잘 나타나지 않는 재주 기운이 그러한 일을 판단하고도 남 음이 있음 직하건마는, 모든 것을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듣 고도 못 들은 체하는 것은 그에게 그러한 것을 삼킬 만한 도량이 있고 그러한 것을 용납할 만한 덕이 있는 까닭이었다. "오빠, 나는 저기 가서 놀다 올께요."

하고 창수에게 말하는 창옥은 다시 경순을 보고,

"언니, 나하고 저기 가서 놀다 올까?"

하고 손으로 여러 사람들 있는 곳을 가리킨다.

"나는 싫어, 혼자 갔다 와요."

하는 경순의 말에,

"가면 어때, 나는 아는 동무들도 있고, 갔다 올께"

하고 빠른 걸음으로 가는 창옥의 뒷모양을 보다 창수는 다 시 경순의 거동을 살펴보았다. 경순은 여자로서 먼저 나타 나는 인물과 맵시가 별로 빠질 것이 없고, 얌전스럽고 침착 하고 영리한 듯하면서도 덕이 있어 보이는데, 가정 부인으 로서 마땅히 있어야 할 조건이 구비된 듯하였다. 게다가 특 별히 아는 체하고 된 체하면서 허영심이 쌓여서 경박한 행 동을 하기 쉬운 신여성에 비하면, 둔박하고 정숙한 것이 많 은 차이가 있어 보였다.

창수는 새삼스럽게 자기가 경순이 같은 아내를 둔 것이 행 복스럽게 생각되었다. 자기의 주장으로 신여성에게 장가를 가지 아니하고, 일부러 학교 출신이 아닌 그식 여자에게 장 가를 가게 된 것이 더욱 만족하였다. 경순의 아름다운 것은, 얼굴이나 태도에서보다도 바라지고 촐랑대지 않는 구식스러 운 데 있다고 생각하였다. 자기는 어떠한 여자의 남편이 된 것보다 경순의 남편 된 것이 영원한 행복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정거장에 있는 모든 남자와 플랫포옴에서 차 에 오르고 내리는 수많은 남자들이 모두가 경순이 같은 좋 은 아내를 두지 못한 불행한 사내들이라고 생각되었다. 그 리하여 창수는 경순을 보면 볼수록 예쁘고 대견하여서, 경 순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아끼고 싶지 아니하였다.

"아차 깜박 잊었군, 점심을 준비해야지."

하고 창수는 경순을 향하여,

"조금만 기다리오, 내 잠깐 다녀올 테니."

하고 빠른 걸음으로 정거장을 나가더니 달음질로 정거장의 건너편에 있는 벤또 집으로 향한다.

경순은 슬금슬금 창수의 뒤를 따라서 정거장의 동편 문을 나서려 할 즈음에, 뒤로부터 경순의 손에 무엇을 쥐어 주는 사람이 있었다. 경순은 무심코 가는 중에, 자기의 손에 무엇 이 쥐어지는 것을 깨달았으나, 별로 놀라지도 아니하고 쥐 어진 것을 보았다. 그것은 틀림없는 무슨 편지였다. 그제야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으나 오고 가는 사람이 복잡한 틈에 누구의 소위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경순은 다시금 놀랍고 부 끄러워서 얼굴빛이 변하였다. 경순은 그 편지를 어떻게 주 체할는지 모르다가 우선 손으로 꼭꼭 눌러 구겨서 허리춤에 다 찔렀다. 경순은 얼굴에 불을 담아 붓는 듯이 화끈거리고 등에서 땀이 흐른다.

? 이것이 무슨 편지일까? 대관절 누구의 짓일까? 어느 부 랑자의 짓일까? 아는 사람의 장난일까? 무슨 비밀한 일일까? 이상한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경순은 무섭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으로 궁금하기도 하였다. 으슥한 곳에 가서 그 편지를 찢어서 버리고 싶었으나, 편지 내용이 무엇인지 몰라서 한 번 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만일 연애 편지 같은 것을 많 이 받아 본 여자라면, 가만히 편지를 쥐어 주는 것쯤은 그 다지 놀랄 일도 아니오, 또는 누구의 소위인지는 모를지라 도 그 편지의 내용은 짐작할 것이며, 가령 그 편지의 내용 이 연애에 관한 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호기심으로 그 편지 에 대하여 무슨 기대를 가질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그 러한 일은 꿈에도 모를 뿐 아니라, 같은 동무간에도 편지를 주고 받고 한 일이 별로 없는 경순으로는, 어떤 사람으로부 터 편지를 몰래 손에 쥐어 주는 일은 천지간에 큰 괴변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경순은 마음을 진정하 려면 할수록 더욱 흔들렸다. 경순은 처음에 정거장을 나을 때에는 창수를 따라가서 무엇을 사든지 받아 가지고 오려고 하였으나, 편지를 받은 뒤엔 그러할 용기조차 없어졌다. 그 러나 그 자리에 있기도 불안하여 앞마당으로 전차길을 향하 여, 방향없이 가는 사람처럼 기운 없이 나오다가, 벤또를 사 가지고 다시 과실전에 가서 과실 한 뭉치를 싸가지고 오는 창수를 보았다.

창수를 본 경순은 갑자기 무슨 죄를 지은 것처럼 울렁거리 던 가슴이 다시 내려앉는 듯하면서 몸둘 곳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억지로 진정하고, 마주 나가서 창수의 들고 오는 것을 다 받으려 하였으나 창수는 다 주지 아니하고 과실 그 릇만 주었다. 다른 때 같으면 창수와 어깨를 견주어서 나란 히 올 것이로되, 경순은 자기의 기색을 감추기 위하여 짐짓 창수의 뒤에 따라갔다. 창수도 경순의 기색이 평시와 다른 것을 깨달았으나 특별히 이상히 여기지는 아니하였다.

정거장에서는 경부선 차가 떠난다고 외치는 소리가 나고, 승객들은 플랫포옴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창수와 경순은 달음질로 오다가 차표를 사들고 마주 나오는 창옥을 만나서 바삐 들어가는 바람에, 경순의 이상한 기색은 그리저리 감 추어지고 말았다. 경순은 그러한 기회를 타서 적이 안심도 하고, 허리춤에 찔렀던 편지를 손길하여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안양 정거장에는 홀연히 사람의 바다를 이루었다. 안양은 조그마한 촌락으로 아직 초창한 곳이니만큼, 한꺼번에 그만 한 사람을 맞는 것도 적지 아니한 성황이었다. 많은 사람들 은 신문사원의 인도를 받아서, 준비하여 놓은 휴게소로 향 하였으나 창수의 일행은 다른 곳으로 향하였다.

안양은 신문사의 주최로 습율 대회를 하는 처소 중의 한곳 으로 밤의 명소처럼 알려졌지만, 밤나무가 그다지 많은 것 은 아니었다.

"밤나무 있는 데가 어디요?"

하고 묻는 경순의 말에,

"나도 처음이라 모르겠어."

하고 다시,

"오빠, 밤나무 있는 데가 어디요?"

창옥은 경순의 말을 받아서 창수에게 다시 묻는다.

"저게 다 밤나무 아니냐."

하고 창수는 벌판에 드문드문 선 밤나무를 가리킨다.

"저기 가 밤줍기놀이 하는 덴가요?"

경순은 창수에게로 다가가면서 조금 이상한 듯이 말하였다. "그럼, 저기서 밤줍기도 하고 여흥도 하고 그렇지요."

창수는 경순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나는 밤나무가 많은 줄 알았더니, 어디 얼마 된다구요."

하는 경순은 생각하던 것보다는 아주 틀린다는 듯이 가볍 게 실망을 느낀다.

"글쎄 말이야, 나도 밤나무가 퍽 많은 줄 알았더니 저것뿐 이면 아주 껄렁한데."

창옥은 창수가 대답하기 전에 경순의 말을 거들었다.

"밤나무가 저만하면 무던하지, 얼마나 많아. 저 밤나무 하 나만 따도 얼마를 딸는지 모르는데."

하고 창수는 다시,

"저 밤나무 밑에서 좀 쉬어요. 나는 가서 밤나무를 사야지." 하고 동리로 들어간다.

경순과 창옥은 거기 앉아서 조금 쉬다가 가까이 있는 밤나 무 밑으로 가서 거닐었다.

"여기 알밤이 떨어졌어."

하고 창옥이 풀 속에서 밤하나를 주워서 경순에게 보이면 서,

"이것 좀 봐, 알밤이야."

하였다.

"참말 어쩌면 아주 밤이 크고 좋은데 가운데 톨이로구면.

가운데 톨이 떨어졌을 때는 양쪽 갓톨도 떨어졌겠지. 어디 찾아볼까?"

하고 경순은 오른발로 풀을 이리 젖히고 저리 젖히면서 기 웃기웃하더니,

"옳다, 여기도 있는데."

하고 밤 하나를 주워서 손바닥에 올려놓고 창옥을 보이면 서,

"이것 봐 외톨밤이야. 동글동글 하니 아주 예쁘지."

하며 못내 사랑스러워한다. 그들은 서울에서 생장하여서 별로 시골 구경을 하여 본 일이 없는지라, 밤이라면 장사에 게서 사 먹는 줄만 알고 밤이 나무에 어떻게 열리고 어떻게 따는지는 자세히 모르다가, 톨에 있는 밤나무 밑에서 발갛 게 익어서 절로 떨어진 알밤을 자기 손으로 줍는 것이 얼마 나 새롭고 즐거운 일인지 모르는 것이어서, 천하의 맑은 가 을의 풍미는 온통 그들의 손에 모은 듯하였다.

"에그 예쁘기도 해라. 외톨 밤은 더 예뻐. 언니만큼이나 예 쁜데."

하고 창옥은 웃으면서 경순을 쳐다본다.

"누가 그런 소리 하라나, 놀려 먹기는……."

"아니야, 정말이야. 언니가 좀 예쁘오, 그러니까 오빠가 여 간 사랑하지 않지."

"또 그건 무슨 소리야. 사랑이 또 무슨 사랑이야."

"그럼 그 위에 얼마나 더 사랑하우. 오빠가 언니를 정말 사 랑하우. 여간이 아닌데."

하고 창옥은 웃지도 아니하고 진정한 표정으로 말한다.

"글쎄, 듣기 싫어요. 그런 소리는 그만두어요. 여간 아니긴 무엇이 여간이 아니야. 누구는 내외간에 밤낮 싸움만 하고 지내나. 다 그렇구 그렇지. 어디 특별히 사랑하는 증거를 내 놓아. 좀 들어 보게."

하고 서글픈 웃음을 웃는 경순은 창옥의 말이 한때의 농담 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어쩐지 창수가 자기를 특별히 사랑한 다는 말에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었다.

그들은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 둘, 줍는 밤이 주먹이 벌게 되었다. 창옥은 손수건에다 주운 밤을 싸 놓은 뒤에,

"여보, 언니!"

하고 경순을 보면서 말머리를 정중하게 꺼낸다.

"오빠가 언니를 특별히 사랑하는 증거를 댈테니 들어보시오. 우선 결혼하시 전에도 여간 사랑한 것이 아니오. 물론 외쪽 사랑이지마는. 그때 언니야 어디 오빠를 한 번인들 만 나보기나 하였소? 오빠가 어느 기회에 언니를 보고, 또 언 니의 소문을 듣고서는 그만 야단이었소. 그래 언니와 결혼 하게 해 달라고 어머니를 졸라대고 나까지 졸라대어서, 할 수없이 청혼을 해 보니 어디 잘 되오? 언니도 알다시피 언 니 어머니가 학생 사위는 재미 없다고 안 듣는 것을, 빌다 시피 하여서 억지로 되지 않았소? 그때에 오빠는 언니하고 결혼을 하지 못하면 죽는다고 야단을 하였소. 결혼이 안 되 었으면 오빠가 죽었을는지도 모르는 것이요. 그러니 결혼하 기 전만 하여도 얼마나 사랑하였소? 글쎄 이것 좀 보아요.

나중에 결혼하기로 허락이 났다니까, 오빠가 어머니 앞에서 어린애처럼 춤을 덩실덩실 추었어요. 그때 내가 보고서 어 떻게 웃었던지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우스워 못 견디겠어."

하고 창옥은 간간이 웃는다. 경순도 머리를 숙이고 웃다가,

"거짓말이지, 설마 춤이야 추었을라고."

하고 다시 창옥의 기색을 본다.

"거짓말이 뭐요? 춤이면 여간 춤인가. 바로 댄스를 했어요.

글쎄 그래서 어머니도 웃고 나도 웃는데 문 밖에서 아버지 들어오시는 소리가 나니까 그쳤지요. 그리 안 했으면 얼마 를 더 추었을는지도 모르지. 그래 아버지가 들어오시니까 오빠는 열적어서 얼굴이 벌거니 하여 나가고, 우리들은 웃 고 있으니까 아버지가 왜 그렇게 웃느냐고 물으시지요. 그 러나 어디 그 말을 할 수가 있어요? 그래 웃고 말았지요.

그러나 오빠가 얼마나 좋아야 춤을 다 추었겠느냐 말이요.

그러니 그것이 오빠가 결혼하기 전부터 언니를 얼마나 사랑 하였다는 증거가 아니오? 또는 결혼한 뒤에 이내 따로 난 것은 그게 무슨 일인지 아우? 그것도 언니를 사랑하는 까닭 이요. 말에는 집안이 어려우니까 따로 나가서 벌어먹고 살 아야 한다고 하지마는, 그것은 핑계고 기실은 언니가 시부 모 밑에서 시집살이를 하려면 고생이 된다고 그래서 따로 난 것이오. 오빠가 벌기는 무엇을 벌우? 두 집 살림하기에 더 어렵기만 하지. 그러니 그것도 언니를 사랑하는 증거고, 또 얼마 전인가 아버지가 오빠보고 동경 유학을 가라고 하 셨지요. 학비를 다는 대줄 수가 없으니 친구에게 구걸이라 도 해서 한 달에 삼십원씩은 대어 줄 터이니 가서 고학이라 도 하라고. 그러니까, 아버지 앞에서는 들을 만하더니 나중 에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언니 때문에 못 가겠다고 그러겠지.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오빠가 유학을 가면 언니가 혼자 있게 될 것인즉, 혼자서 갈 수는 없고, 가면 둘이 가야 할 터인데, 학비가 부족하여서 못 가겠다고 그러겠지. 그러니 그것은 빨간 거짓말이거든. 오빠가 떠나면 언니가 왜 혼자 있게 되오. 집에 들어와서 같이 살지. 또 같이 살기가 어려 우면 친정에 가서 혼자 계신 어머니를 모시고 있어도 좋고.

그런데 혼자 두고 갈 수 없다는 말은 핑계고, 언니하고 떨 어질 수가 없어서 못 가는 것이니, 얼마나 사랑해야 그러겠소?" 하고 경순의 얼굴을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쉬는 창옥은,

"그러니 언니 같은 아내를 둔 오빠도 행복이지마는, 그렇게 사랑하는 남편을 둔 언니도 행복이 아니오?"

하고 다시 말을 계속한다.

"그나 그뿐이요. 집에만 오면 언제든지 언니 칭찬이요. 어 머니보고도 칭찬, 나보고도 칭찬, 아버지보고만 못하지. 한 번은 하도 칭찬을 해쌓기에 어쩌나 보노라고 내가 언니의 흉을 좀 보았더니 펄펄 뛰겠지. 그래 나는 언니 발꿈치도 못따라 간다나, 그러구 야단이겠지. 그러니 언니를 얼마나 사랑하우. 나는 첨 보았어."

하고 부러워하는 듯이 경순을 본다. 경순은 창옥이 얼마간 부러워서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하여간 만족하였다. "정말 그럴까? 나는 배운 것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고 바보 같은데, 무얼 그렇게 사랑할라구. 공연히 그러는 게지."

경순은 겸손한 태도로 말하였다.

"언니는 학식이 없는 까닭으로 더 사랑을 받는 것이요. 오 빠는 일부러 구식 여자를 고르는 것이요. 여학생들이 오빠 에게 청혼한 사람들이 많았소. 오빠가 미남자가 아니오? 그 러니까 여학생들이 따르기도 하였으나, 무슨 고집인지 여학 생은 싫고 구식 처녀에게로 장가를 가겠다고 해서 언니와 결혼하게 된 것이요. 하기야 언니를 특별히 사랑하는 까닭 이겠지만. 그러니까 언니가 학식 없는 것은 조금도 걱정하 지 말아요. 그것이 오빠의 사랑을 받는 데는 더 좋은 것이 에요."

하고 말을 계속하려 할 즈음에,

"정신 없이 무슨 이야기들을 그렇게 하누."

하는 소리에 경순과 창옥은 조금 놀라면서 돌아보니, 창수 가 어떤 사람을 데리고 와서 옆에 섰다.

"아이 깜짝이야, 기척도 없이 그렇게 오시우."

하고 창옥이 눈을 흘기는 듯이 창수를 본다.

"기척도 없기는 왜? 저기서부터 얘기도 하고 기침도 하고 왔는데, 여자들은 만나면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하는지, 얘기 에 팔려서 사람 오는 줄도 몰랐지."

하고 창수는 말은 창옥에게 하면서 눈으로는 경순을 보고 웃는다. 경순은 창수가 오면서 행여 자기네 하는 말을 들었 는가 하여서 얼굴빛이 조금 붉어지는 듯하였으나 창수를 보 는 눈은 고요하고 마음은 고동되었다. 그러나 경순은 소리 없는 한 웃음으로 모든 것을 흐려 버렸다.

"이 근방 밤나무는 습율 대회에서 다 샀다니까 변두리로 나가야지."

하고 창수는 같이 온 사람과 앞서서 해죽해죽 간다. 경순 과 창옥은 찬찬히 뒤를 따라간다. 창수는 조금 가다가 같이 가던 사람에게서 밤나무를 두 주를 사고 그 사람은 돌려 보 내었다.

"자, 어떻게 할까? 조금 놀다가 아주 점심을 먹고 시작할까. 밤을 먼저 따고 점심을 나중에 먹을까? 어떻게 하면 좋 을까?"

하고 창수는 경순과 창옥을 번갈아 본다.

"글쎄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경순의 말에,

"지금 점심을 먹으려면 조금 이르고 다 따고 먹으면 너무 늦을 테니까, 그러지 말고 밤나무가 둘이나 먼저 하나를 따 고, 그리고 점심을 먹고 놀다가 또 한나무를 따고, 그러지."

하고 창옥이 판단을 내리니까, 창수와 경순은 그 말에 동 의 하였다.

조금 있다가 창수는 마을에서 얻어 가지고 온 대장대를 짚 고 일어서면서,

"자, 이제 밤을 딸 터인데 거저 주우면 재미 없고 내기를 하지."

하고 경순과 창옥을 돌아본다.

"무슨 내기요?"

하고 창옥이 나선다.

"많이 줍는 사람이 이기고, 적게 줍는 사람이 지기지."

"그런데, 이기면 어쩌고 지면 어쩐다는 조건이 있어야 내기 가 되지요."

"물론이지, 지는 사람은 이기는 사람에게 주운 밤을 얼마든 지 다 빼앗기기로."

"그럴까?"

하고 창옥은 혼자 판단을 짓기가 어렵다는 듯이 경순을 돌 아본다. 경순은 눈을 깜박거리며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아무렇게 하여도 이기기만 하면 고만이지. 그리고 내기를 한 가지 더 하지."

"무엇?"

하고 창옥이 이상한 눈으로 경순을 보면서 대답을 기다린다. 창수도 경순을 보고 기다리는 표정으로 귀를 기울인다.

"지는 사람 둘이 이기는 사람 하나에게 코가 땅에 닿도록 절하기."

하고 경순은 창수를 보고 웃는다.

"그럼 그럴까? 그러나 우리들이 지면 어쩌나. 나는 오빠에 게 절을 해도 관계 없지만, 언니가 절하기는 좀 창피할 텐데." 창옥은 창수와 경순을 조롱하는 듯이 말한다.

"그럼 그러지, 그것 좋다. 지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에게 절 하기로 하자."

하고 창수는 팔을 뽐내고 나선다.

"그러면 누구든지 내기 시행을 아니하면 안 되어요. 절을 하되 꼭 코가 땅에 닿도록 하기루요."

하는 경순의 말에,

"언니 무슨 수가 있우. 꼭 이길 것처럼 말을 하게."

하고 창옥은 경순의 힘있게 하는 말에 다소의 의심을 품는 듯하였다.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내기를 아니하면 모르되, 하면 단단히 해야 하는 것이거든. 그리고 사내들은 내기를 하고서도 자기가 지면 이 핑계 저 핑계 하고서 내기 시행을 않기가 일쑤니까 단단히 따져야지."

하고 경순은 창수가 보지 못하도록 창옥에게 눈을 끔쩍인다. "내기 시행을 않기는 왜? 사내가 어디 그런 사내가 있담.

내기를 하고서 내기 시행을 않는 사내는 비겁한 사내지. 더 구나 여자에게"

하고 창수는 우연한 기회에 한 말로 천하의 남자를 다 변 호하는 듯하였다. 그들은 밤줍기 내기기는 홀연히 남녀의 권리다툼과 신의 (信義) 문제가 되어서, 여러 가지 다짐으로 빈틈없이 맺어졌다.

"자, 그럼 내가 올라가서 딸 터이니 내가 따는 때는 밤을 하나라도 주워서는 안 되오. 내가 다 따고 내려온 뒤에 같 이 주워야지."

하고 창수는 장대를 가지고 밤나무로 오라간다.

"그야 물론이지요. 자, 우리 저만치 멀리 가자구. 나중에 또 억지 쓰는 소리 듣지 말고."

하고 경순은 창옥의 손을 잡고 걸어가면서 무엇을 그렇게 소곤거리는지 소리가 창수에게 들리지 아니할 만큼 웃는다.

창수도 나무에 올라가서 밤을 떨기 시작한다. 알밤도 떨어 지고 송이밤도 떨어지는데, 알밤 떨어지는 것이 견디기 어 려울 만큼 재미가 있어서, 곧 가서 떨어지는 대로 줍고 싶 었지만, 경순과 창옥은 서로 눈짓으로 경계하여서 하나도 줍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먼저 줍지 않는다는 약속을 지키 기 위한다느니보다 창수에게 핑계 댈 말 재료를 주지 아니 하려는 까닭이었다. 창수는 한 나무를 다 떨고 내려오더니,

"아까는 한 나무를 먼저 떨어서 줍고, 한 나무는 점심 먹고 서 줍는다고 하였지마는, 내기를 하는 바에는 두 번에 전주 러 하는 것이 재미 없은즉, 두 나무를 다 떨어놓고서 줍기 는 점심을 먹은 뒤에 한꺼번에 줍는 것이 어떠할까?"

하고 경순과 창옥의 동의를 구한다. 경순과 창옥도 그것을 응낙하였다. 창수는 다시 알밤 한 주먹을 주워다가 경순과 창옥에게 나누어 주면서,

"이것은 특별히 까먹으라고 주는 것이니, 그 사이에 까먹되 만일 하나라도 남겼다가 내기하는 다음에 보태면 아니 되오." 하고 당부를 하며 웃지도 않는다.

"누구든지 하나라도 먼저 주우면 안 된다고 하였는데, 웅큼 이나 먼저 주웠으니 법칙은 법칙이오마는, 특별히 용서하는 것이니 다시는 그리 마시오."

하고 창옥이 밤을 받으면서 말을 하고 경순을 보고 웃는다. "사내들은 그렇다니까, 이따가 내기할 때도 보아요. 무슨 핑계를 하든지 할 터이니."

하고 경순은 창옥을 보고 눈을 끔쩍이려다가, 다시 창수의 얼굴을 쳐다보고 고개를 숙인다.

"원 이런, 자기네들이 거저 앉았는 것이 심심할 듯해서 까 먹으라고 주워다 주니까, 고맙다는 소리는 아니하고 도리어 법칙이니 무엇이니 하니 법칙이 무슨 법칙이람."

창수는 혼잣말 비슷이 말을 한다.

"주워다 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마는, 누구든지 먼저는 하나 도 줍진 않기로 하였는데, 우리에게 의논도 아니하시고 혼 자 한 주먹을 주우셨으니 그것이 잘못된 일이 아니고 무었 이어요. 여자들이라고 업신여기지 마셔요. 그리고 이따가 정 말 내기할 때는 억지 쓰지 마세요."

하고 경순은 혼자 주운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보다 이따가 억지 쓰지 말라는 말에 힘을 들였다. 그리고 손가방에서 조 그마한 칼을 내어서 밤을 벗긴다.

"제참."

하고 할 말이 없다는 듯이 돌아서서 가려는 창수에게,

"조금 계세요."

하고경순은 밤을 얼른 벗기더니 새 손수건으로 손 닿았던 곳을 깨끗이 씻고 창수에게 주면서,

"밤이나 하나 잡수세요, 규칙을 어기신 벌로."

하는데 창옥은 손바닥을 치면서,

"언니 걸작이야, 벌로 드린다는 말이 걸작이야. 에그 고소 해라."

하고 창수를 쳐다보며 웃는다.

"벌이라도 상으로 알고 먹으면 그만이지."

하고 창수는 경순이 주는 밤을 받아서 한입에 넣고 어석어 석 깨물면서 밤나무를 향하여 간다.

창수가 밤을 따는 사이에 경순과 창옥은 점심 먹을 준비를 하였다. 풀밭에 정한 곳을 찾아서 신문지를 깔아 놓고 그 위에다 벤또와 실과를 고루 놓고 창수의 밤 따는 것을 바라 보았다. 그들은 창수의 밤 따는 것을 거들어 주고도 싶었으 나, 남은 것이 얼마 되지 아니하여서 그만두었다.

"에 덥다. 가을날이라도 일을 하니까 덥군."

하고 창수는 밤을 따고 돌아오면서 수건으로 땀을 씻는다.

"더우시지요?"

하면서 마주 나가는 경순은 창수에게 다른 수건을 주며 땀 묻은 수건을 받아 들고, 뒤에서 부채질 하면서 따라 온다.

창옥도 일어나서 맞는다.

"어! 된데. 밤따기에 기운이 다 빠져서 주울 때는 얼마 줍 지 못하겠는걸."

하고 창수는 자리에 펄썩 주저앉으면서 반 비스듬히 눕는다. "기운이 없어서 밤 주우시기에 어려우시면 내가 도와 드리 지요."

하는 경순의 말에,

"천만에, 도와 주다니. 도와 준다는 말은 좋은 의미로 모욕 하는 말인데, 대장부가 아무리 기운이 없기로 아녀자의 도 움을 받다니."

하고 창구는 벌떡 일어나면서 두 팔에 힘을 올리고, 힘있 는 눈으로 경순과 창옥을 본다.

"약한 여자에게 용맹을 말하는 것은 졸장부에요. 그리고 힘 으로는 이겨도 꾀로는 지는 수가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 다나요. 오빠두 너무 큰소리를 하시다가 내기에 지면 조금 부끄러울걸."

하고 창옥은 조롱하는 듯한 눈으로 창수를 보다가 다시 경 순을 보고 웃는다. 창수와 경순도 같이 웃었다.

점심을 마친 그들은 산보를 하면서 이야기를 했는데, 바람 이 건들건들 불면서 서편 하늘에 검은 구름이 오락가락한다. 그들은 밤을 줍기로 하였다.

"자, 지금부터 밤을 주울 터인데, 내가 호령을 할 터이니 호령이 끝나면 일제히 줍기로 합시다."

하는 창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경순과 창옥은 밤 주워 담을 그럿과 밤 깔 꼬챙이를 든 채로, 군사가 상관의 앞에 호령 을 기다리듯이 창수의 앞에 나란히 서서 입을 다물고 웃음 을 참는다. 창수의 똑바로 서서 하는,

"하나, 둘, 셋."

소리가 끝나자 세 사람은 각각 달려가서 밤줍기를 시작하 였다. 그들은 누구든지 알밤을 먼저 줍고 밤송이는 한편으 로 젖혀놓는다. 그들은 서로 흘금흘금 보며 웃기는 하여도 말이 없다. 경순과 창옥의 눈은 언제든지 창수의 손을 보고 창수는 경순과 창옥을 번갈아 본다. 경순과 창옥은 창수로 하여금 자기들을 자주 보게 하기 위하여, 무슨 소리도 내고 이상한 동작도 한다. 그것은 창수로 하여금 자기네 보기에 자주 눈을 팔아서 밤 줍는 능률을 줄이자는 것이었다. 아닌 게아니라, 그러한 병법을 알지 못하는 백면장군(白面將軍)인 창수로는 적장(敵將)의 이목을 어지럽게 하기 위하여, 의병 (疑兵)을 쓰는 낭자군(娘子軍)을 저당하기에는 미치지 못하 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스스로 자랑하던 「힘」으로써가 아니라 창옥의 이른바 「꾀」로써이었다. 그리하여 창수의 전투력은 전일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창수의 칼 쓰는 법 이 어지러울수록 경순과 창옥의 유인하는 계교는 더욱더욱 기이하였다.

그들은 알밤은 다 줍고 밤송이를 발르기 시작하였다. 창수 는 익은 놈이나 선놈이 나 모조리 발른다. 익은 놈은 쉽사 리 발라지지마는 자위가 돌지 아니한 놈은 용이하게 발라지 지 아니하여서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경순과 창옥 은 발로 썩썩 비벼서 툭툭 벼지는 놈만 바르고, 자위가 돌 지 아니한 놈은 한편으로 치워 놓고 풀로 덮어 놓았다. 밤 송이가 거의 다 되었을 때,

"오빠, 오빠."

하고 부르는 창옥이는,

"왜?"

하는 창수의 대답을 들은 뒤에,

"나는 손에 밤가시를 찔려서 발를 수가 없어, 나는 내기에 서 빠질 테야."

하고 응석 비슷하게 말한다.

"그게 무슨 소리냐? 질 듯하니까 빠진다는 말이지."

하고 창수는 냉담하게 대답한다.

"아니오, 정말 가시 찔린 손이 아파서 발를 수가 없는 걸 어떻게 해."

"안돼. 그렇다고 빠지고 저렇다고 빠지면 내기가 되나. 잘 발르기도 하고 못 발르기도 하니까 내기가 되는것이지. 다 똑같이 발르면 지고 이기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나. 딴소리 말고 부지런히 발르자."

하고 창수는 더욱 힘을 내어서 빨리 발른다.

"그런 소리 말아요. 지면 거저지지, 왜 그런 창피한 소리를해. 그렇잖아도 여자들을 업신여기는데."

하고 경순은 일어서서 허리를 추면서 돌아보지도 아니하고 말을 한다.

"참 그래, 되지도 않는 일을 공연히 말을 하여서 창피만 당 하였네."

하고 창옥은 경순을 보고 눈을 끔쩍인다. 그러는 동안에 밤줍는 것은 끝났다.

"자, 이젠 거의 다 주웠으니 하여간 남은 것은 나중에 주울 요량하고, 그만 다 가지고 와서 세어 보아요. 또 호령을 할 터이니 일제히 그쳐요."

하고 창수는 숨을 돌리고,

"하나, 둘, 셋."

한다. 경순과 창옥은 일제히 밤 꼬챙이를 던지고 섰다.

"자, 이리들 가지고 와요."

하고 창수는 여러 군데 주워 놓은 밤을 거둬 모은다.

경순과 창옥도 밤을 거둬 모아서 경순의 것만 가지고 왔다. "왜 창옥이는 안 가지고 오니?"

하는 창수의 말에,

"어서 두 분의 것이나 먼저 세어 보아요. 나는 나중에 가져 올 터이니"

하고 창옥이 대답한다.

"같이 갖다 세어 봐야지, 왜 나중에 가져오기는?"

"같이 가져 오면 세사람의 몫을 한꺼번에 세어 보나요. 아 무래도 하나씩 셀 테니 오빠 몫을 먼저 세고 그 다음에 언 니 몫을 세어요. 내 몫은 맨 나중에 갖다가 셀 테니."

"그럼 그러지."

하고 창수는 자기의 것을 센다. 하나 둘 세기 시작하여 반 이나 세었을 때에, 잘못 세었느니 잘 세었느니 하는 이의가 생겨서 다시 셀때에는 서른 개씩 무더기를 지었는데, 열 다 섯 무더기하고 세 개가 남았다.

"자, 일 삼은 삼, 삼 오 십오 하면, 사백 오십개에다, 세 개 를 가하면 사백 쉰 세 개. 자 이것을 똑똑히 적어요."

하고 수첩과 만년필을 꺼내어 창옥을 준다. 창옥은 수첩과 만년필을 받아 가지고,

"오빠, 사백 오십 삼 개."

하고 똑똑히 썼다. 경순은 옆에서 그것을 보다가,

"오빠라고 쓰면 안 되어요. 자기에게 오빠지 다른 사람에게 도 오빤가?"

하고 조금 샘을 내는 듯이 말한다.

"그럼 뭐라고 적을까?"

하는 창옥의 말에,

"성명을 쓰든지 김 선생이라고 쓰든지 하지."

하고 경순은 창수를 쳐다본다. 창수도 성명을 쓰는 것이 좋다고 하여서 창옥은 다시,

"김 창수, 사백 오십 삼 개."

라고 고쳐 썼다. 그 다음에 경순의 밤을 세어보니 서른 개 씩 스물 세 무더기가고 일곱 개가 남았다.

"나는 구구를 모르니까 주먹구구로 쳐보지. 서른씩 스물이 면 육백 개, 또 세 무더기에 아흔개, 그러면 육백 아흔 개에 다 일곱 개를 더하면 도합이 육백 아흔 일곱 개."

하고 경순은 다시 창수를 보고,

"그렇지요. 육백 아흔 일곱 개지요, 틀림없지요?"

하고 다진다. 창수가 대답하기 전에 창옥이 먼저,

"틀림없지. 그럼 다시 세어 보아도 알 터인데."

하더니 다시 창수를 보고,

"그대로 쓰리까?"

하고 묻는다.

"쓰나마나 웬 게 그렇게 많을까?"

하는 창수의 힘 없는 말에,

"웬 게 그렇게 많다니, 많이 주웠으니까 많지."

하고 창옥은,

"조 경순, 육백 구십 칠 개."

라고 쓰고,

"그러면 오빠가 지셨으니 내기 시행을 하셔야지."

하고 창수를 본다.

"또 네것을 가져오너라, 세어 보게."

"내것은 세어 볼 것도 없어요. 원체 적게 주웠으니까."

"적으나 많으나 세어 보아야지, 어서 가져와요."

"나는 손이 아파서 주울 수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또 졌다고 항복하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어요."

"그래도 가져는 와야지. 어서 가져와."

하고 창옥을 본다. 창옥은 자기의 주운 것을 갖다가 놓으 면서,

"이것 보세요, 얼마 되는가. 세어 볼 것도 없다니까."

한다. 창수는 생각하던 것보다 너무나 턱없이 적은 창옥의 밤을 보고서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안돼, 이것은 협잡이다. 경순이 것까지 무효다."

하고 기운을 낸다.

"웬 말씀이세요? 협잡이 무슨 협잡이예요. 지셨으니까 생떼 거지를 쓰세요 그래."

경순은 웃음을 참고 말한다.

"협잡이지, 그럼 뭐요? 많아도 분수가 있고 , 적어도 분수 가 있지. 경순이 몫은 너무 많고 창옥이 몫은 너무 적은 것 이 탈이 붙은 거지, 뭐람."

"탈이 무슨 탈이 붙어요?"

"탈이 무슨 탈이야, 창옥의 밤을 경순이게게 보태었지.

"보태기는 누가 보태요? 내가 이길 생각 않고 남보고 이기 라고 내것을 남에게 보태 줘요. 당치 않은 말씀 마시고 내 기 시행이나 하세요.

하고 창옥이 들고 일어난다.

"그런 소리 말아요. 누가 장원을 하든지 둘 중에 하나는 질 터이요. 만일 내가 장원을 하면 둘이 다 질 터이니까. 약은 꾀로 둘이 공론하고서 나만 이길 양으로 보태 준 것이지, 딴은 되긴 되었어 그러나 꾀라는 것은 남이 모르도록 써야 하는 것이지 그렇게 야틈야틈한 꾀를 써서는 못 쓰는 것이야." 하고 창수는 무슨 어려운 일을 알아낸 듯이 뽐낸다.

그러나 경순과 창옥은 용이하게 창수의 말을 들을 리는 없 는 것이었다.

"지면 거저지지, 왜 그런 소리를 하세요?"

"그렇지, 지시면 무슨 핑계를 하든지 내기 시행을 안 하실 줄 알았지. 사내들은 그렇게 신용이 없다니까."

"사람이 지든지 이기든지 정정당당하게 하는 것이지. 지고 서도 내기 시행을 아니하려고 당치 않은 핑계를…… 어쩌면 그래."

"지고서도 내기 시행을 아니하려고 이리저리 핑계를 대는 것이 도리어 비겁한 일이에요. 그것은 내기로만 지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지는 것이어서 어느 편이 손해가 될는 지 모르지."

"내기 시행이야 하나마나, 지고 이기는 것은 판단이 났으니 까 이겼으면 그만이지. 내기 시행을 않는 것은 잘못하는 것 이 그 사람에게 있겠지."

이렇게 서로 말을 하다가 창옥이 일어서더니,

"오빠야 하든지 말든지 내가 내기 시행을 해야지. 나까지 오빠를 따라서 나쁜 사람이 될 순 없으니까."

하고 자기의 주운 밤을 경순의 앞으로 밀어놓고 다시 일어 나더니, 절을 하면서 손으로 풀을 헤치고 코를 땅에 댄 뒤 에,

"이만하면 코가 땅에 닿았겠지요?"

하는 말에,

"에그, 저 코에 흙 묻겠네, 그만 일어나요."

하고 경순은 허리를 굽혀서 맞절을 하였다.

"그래 오빠는 절을 아니할 테요?"

하는 창옥의 말에,

"내가 어디 졌어야지. 지지 아니한 것을 절을 해?"

하고 창수는 서글픈 웃음을 웃는다.

"지지 않다니, 적게 주운 사람이 이기기로 했나요?"

"많이 주운 사람이 이기기로 하였지마는, 둘의 것을 보태었 으니까 무효란 말이다."

"그러지 말고 내기 시행을 하기 싫거든 정정당당하게 하기 싫다고 그러세요. 공연히 구차스럽게 당치 아니한 핑계를 꾸며 대지 마시고, 그러면 사람까지 밑지는 것이어요."

그리하면서도 경순과 창옥은 벌갈아 가며 창수를 조롱도 하고 절 하라고 권하기도 하여서 창수는 정히 곤란한 지경 에 빠져 있었다. 그러자 그들의 뒤로부터,

"김군인가."

하는 소리가 났다.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려서 소리나는 곳을 보았다.

"아, 성숙인가."

하고 창수는 그 사람의 앞으로 나아가서 악수를 하면서,

"그런데 어쩐 일인가? 언제 내려왔나?"

"나도 아까 차에 내려왔네. 차에서 내릴 때에 자네를 언뜻 보았으나 미처 인사를 못했고, 돌아다니다가 보니까 자네가 여기 있기에 왔네. 방해되는 일이나 없겠나"

"방해, 무슨 방해? 그런데 혼자 왔나?"

"혼자 왔지."

"그러면 나하고 놀다가 같이 올라가세."

"그럴 수가 있나. 보아하니 자네는 같이 오신 분이 계신 데……"

"관계 없네. 하나는 나의 아내고, 하나는 나의 누이동생일세. 우리는 점심 먹고 밤도 다 줍고 남은 일은 가는 일밖에 없네. 나하고 같이 놀다가 같이 가세."

"그럼 그럴까."하고 그들은 자리를 조금 띄어 앉아서이야기 를 시작한다. 그 사람을 본 경순은 가슴이 선뜻하면서 울렁 거리기 시작하였다.

경순은 성숙과 서로 낯을 대하여 말을 해 본 일은 없어도, 그의 얼굴을 먼 빛으로 알기는 하였던 것이다. 경순은 성숙 을 보자마자 경성역에서 자기의 손에 편지를 쥐어 준 것이 반드시 그 사람의 짓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경순은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였다.

? 망할 녀석, 편지가 무슨 편지야. 청혼을 하다가 안 되었 으면 그만이요, 나는 지금 다른 데로 시집을 가서 사는 터 인데, 편지질이 무슨 편지질이며, 또는 편지를 할 일이 있으 면 적당히 할 일이지, 여러 사람이 모인 중에서 가만히 쥐 어 주는 것은 무슨 나쁜 행동일까? 만일 다른 사람이 그것 을 보았다면 나를 얼마나 단정치 못한 사람으로 알까? 여기 까지 따라온 것도 나 때문에 따라온 건지도 모르지. 참 비 겁한 사내다. 내가 저런 비겁한 사내에게 시집을 갔다면 얼 마나 불행이었을까? 그 전에도 정식으로 청혼을 하다가 우 리 어머니가 듣지 아니하시니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에 게 편지를 들려 보내는 것을 하나도 보지 아니하고 불살라 버리고 말았는데, 지금 또 편지를 하고 따라다니면 어쩌자 는 일인가? 나에게 원한을 품고서 나의 일에 무슨 흉계로든 지 방해나 하지 아니할까. 그자가 나의 남편과 친한 모양인 데, 나에게 편지를 가만히 쥐어 주기까지 한 것은 더구나 고약한 사람이 아닌가. 집에 돌아가서 차라리 나의 남편에 게 그자의 행위를 말하여서 그자와 교분을 끊도록 하여 볼까. 그러나 그것도 여자로서 정당한 일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닐까. 도는 세상에서 공교한 일도 없는 것이 아닌즉, 그 편지가 혹은 다른 사람의 소위인지 도무지 모르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저 사람이 여기 온 것도 나에게 대해서 는 아무 관계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 편지의 사연을 보 지 아니하고서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모르면 모르 되 저자의 소위인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생각하는 경순은 가슴이 설레여서 적 지 아니한 불쾌를 느끼면서 침착히 생각하다가,

"언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우."

하는 창옥의 말에 놀라서 머리를 드는 경순의 얼굴은 화끈 거리고 가슴이 섬뜩하였다.

"무엇을 생각하느라고 그렇게 정신 없이 앉았우. 꿈을 꾸었우?" 하고 창옥은 젖혀 묻는다.

"꿈이 무슨 꿈이야, 잠도 안 자고 꿈을 꾸나."

"그럼 무얼 했수?"

"저, 참선(參禪)."

하고 경순은 웃는다.

"참선? 참선이 또 뭐유, 응 참선! 절에 가서 재 올리는 것 을 구경할 때에 듣는 참선 말이지?"

"그럼."

"옳아, 참선을 하면 부처님이 된다는데, 인제 부처님이 하 나 생기셨군."

하고 창옥은 깔깔 웃는다.

"시끄러워요. 저기 들리는데 가만가만히 말해요."

"들으면 어때요. 언니가 참선을 하면 오빠두 같이 하실걸."

하고 창옥은 다시,

"나도 참선 좀 해볼까."

하고 다리를 접개로 앉더니, 허리를 펴고 고개를 바르게 한 뒤에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성낸 사람처럼 뿌루퉁하고 앉는다. 경순과 창옥은 서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소리 없이 웃는다.

창수가 성숙과 이야기하다가 깔고 앉은 신문지와 밤을 가 지러 가는 동안에, 성숙은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아니할 정도에서 끊임없이 경순을 보았다. 경순은 어쩌다가 성숙과 한 번 눈이 마주쳤다. 경순은 얼굴이 붉어지면서 자기가 다 시 성숙을 보지 아니할 뿐 아니라, 성숙이 자기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돌아앉았다. 그러나 창수와 창옥에게는 그러 한 눈치를 보이지 아니하려고 애를 쓰는 경순은 실로 적은 곤란이 아니었다. 창수가 신문지와 밤을 가지고 간 뒤에, 경 순은 창옥의 손을 잡고 다른 방면으로 걸어갔다.

"자, 오래간만에 만났으니 밤이나 까먹어 가며 이야기나 하세. 이것 깔고 앉게."

하는 창수는 성숙에게 신문지를 주면서 밤그릇을 그의 앞 에 놓는다.

"그러지, 그렇지만 시간이 얼마 안 남았을걸."

하고 회중시계를 내어 보는 성숙은,

"아직 두 시간 가까이 남았으니까……"

하고 호주머니에서 주머니칼을 내어서 밤을 깐다.

"자네 아직 졸업 못했지?"

하고 창수가 깎은 밤을 입술에 대고 말한다.

"졸업이라니, 작년에사 입학했는데."

"어느 학교인가?"

"일본대학(日本大學) 법과(法科)라네."

"자네 학비는 문제 없지?"

"학비는 넉넉지는 못하나 그대로 문제 없지마는, 어쩐지 법 률에 취미가 없어서 공부가 잘 되지 않네. 그래 이번에 나 온 것도 별로 긴한 일도 없이 나와서 이리 있네."

"그럼 취미 맞는 것을 배우지 왜 법률을 배우기로 하였나?" "허, 내가 하고 싶어 한 것인가. 우리 아버지가 법률을 배 워야 나중에 변호사깨나 해 먹게 된다고 자꾸 우겨대시니 할 수가 있나. 내 맘대로 하면 문학이나 음악 같은 예술 방 면으로 나가고 싶은데, 그런 말씀을 하면 열 길이나 뛰시니 하는 수가 있나. 조선은 아직 구도덕을 벗어나지 못하여서 아무것도 안 되네. 예술이라는 것은 인생의 꽃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것은 모르고 밤낮 먹고 사는 것만 대단한 줄 아니 되겠나."

하고 성숙은 고상한 인생관으로 한 세상을 비웃는 듯이 코 웃음을 치며 말한다.

"그야 그렇지. 공부라는 것이 당자의 소망대로 취미대로 배 우는 것이 원칙이지, 부모라도 간섭할 일이 아니거든. 그렇 지만 나는 취미야 맞고 안 맞고 아무거라도 배우기나 하였 으면 좋겠는데 학비가 있어야지."

하고 창수는 취미에 맞지 않는 공부라도 하는 것이 부러운 듯이 힘없이 말을 한다.

"학비를 구처할 도리가 그렇게 없나. 나는 자세히는 몰라도 변통할 도리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도리가 무슨 도리. 변통할 도리가 있을 수가 있나. 자네 생각에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하고 창수는 성숙의 입에서 무슨 좋은 계교가 나올까 하고 얼굴을 쳐다보면서 대답을 기다린다.

"내 들으니까 자네 처가집이 견딜 만하다는데그려. 거기서 학비 변통을 할 수가 있을 줄로 생각을 하는데. 나뿐 아니 라 다른 사람들도 그런 말을 더러 하네, 될 수 없을까?"

하고 성숙은 도리어 의견을 묻는 듯이 창수의 얼굴을 바라 본다.

"처가집에 재산이라야 실로 얼마 되겠나. 우리 장모라는 이 가 혼자 살면서 어렵게 하여서 돈 만원 재산이나 모은 모양 이나, 사내 자식이 체면상 어찌 거기에다 침을 바르겠나. 또 우리 장모라는 이가 여간 지독이 아닐세. 소녀 과부로 바느 질품을 팔아서 그만큼 모을 때 여간하겠나. 자기 한 몸뚱이 먹고 입는 것도 벌벌 떠는데, 학비 하라고 돈 주겠나."

하고 창수는 선웃음을 친다.

"그게 무슨 소린가. 체면상 쓸 수가 없다는 것이 무슨 소린가. 우리네가 공부를 하는 것은 우리 개인만을 위해서 하는 것인가? 적어도 조선을 위하고 사회를 위해서 하는 것인데.

안할 말로 할 수만 있으면 도적질이라도 하여서 공부를 하 는 것이 우리의 의무일세. 처가집 돈쯤이야 문제가 되나?

또 혼자 사는 여자가 그 돈은 다 두었다 무엇을 하나? 죽으 면 널 속에 넣어 갈 텐가. 그가 죽으면 아무래도 자네 차지 아닌가. 그러면 죽은 뒤에 쓰나 죽기 전에 쓰나 쓰기는 마 찬가지지. 그리고 다만 문제는 자네 장모가 돈을 주느냐 안 주느냐 하는 것인데, 그것도 문제 될 것이 없지. 여자라는 것은 암만 영악하다 해도 어리석은 남자만 못하지. 다 하는 수는 있는데 자네 그만한 수단이 없단 말인가?"

성숙은 말을 중지하고 창수의 눈치를 본다.

"그래, 도리를 말해 보게. 어이 했으면 되겠나?"

하고 창수는 몸을 앞으로 굽히며 성숙을 쳐다본다.

"낸들 무슨 별 도리가 있겠나만, 사내 자식이 그만 수단도 없어 가지고서야 이 험한 세상을 살아나갈 수가 있겠나. 여 자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말 한 마디만 곰살궂게 하면 쓸개라도 빼어 주려고 하는 것일세. 자기의 비위만 맞추어 주면 그만이네. 그런데 자네 돈 사오십 원쯤은 변통할 수 있지."

"그거야 할 수 있지."

"그렇겠지. 그렇거든 돈 한 오십 원 가량만 변통해 두고, 그것으로 무엇이든지 자네 장모가 좋아하는 것으로 사다 주게. 음식이든지 옷감이든지, 하다못해 과자나 과실 같은 것 이라도. 그런데 그런 것도 한꺼번에 사다 주면 재미 없네.

여러 번에 전줄러서 말이야. 며칠 만에 한 번씩 그리고 만 나는 대로 자기를 추어 주게. 무엇이든지 장하다고, 조선에 서 제일이라고. 또 그녀가 소녀 과부로 수절을 하여 가면서 돈을 그만큼이나 모았다니까 추어 줄 만한 재료도 있을 것 이 아닌가. 없는 재료를 만들어서라도 추어 줄 수가 있는데, 있는 재료를 추어 주기야 젓자리도 비지 아니하고 좀 쉬운 일인가. 그리 하되 자네가 직접 돈 말을 하여서는 안 되네.

아무말 말고 무엇을 하다 주어 가며 추어 주기만 하다가, 자네 장모의 마음이 어지간히 대가 들거든 말하게. 자네 부 인에게 말은 하되 못난이처럼 직접 학비를 얻어 달라고 바 둥바둥 졸라서는 안 되네. 응 그 다 아니 있나, 왜 기둥을 치면 들보 울리는 격으로 말이야. 그리 하면 다 되네. 하하하. 안 그런가?"

하고 성숙은 미혹한 중생에게 안심입명(安心立命)의 도리나 설법한 듯이 자긍하는 빛으로 창수를 보다가, 흘긋 눈을 돌 려서 경순이 있는 곳을 본다.

"이 사람아, 사내 자식이 누가 그짓을 하고 있단 말인가, 공부를 하지 못했으면 못하였지. 그렇고 정 공부를 하고 싶 으면 신문 배달이라도 하여서 고학을 할지라도."

하고 창수는 성숙의 말을 그럴 듯이 생각하면서도 체면을 지키기 위하여 본의 아닌 말을 하였다.

"고학 고학 하지마는, 말하기는 쉽지마는 실행은 어려운 것 일세. 동경에서도 고학을 한다고 시작한 사람은 적지 않지 마는 결과를 지은 사람은 별로 없네. 그러지 말고 내 말대 로 하여서 처가집 돈을 좀 쓰게, 어떻단 말인가."

"글쎄, 학비야 되든지 안 되든지 좌우간 동경을 가기는 가 볼 작정일세, 여차직하면 고학을 하더라도."

"그래 보게, 내 말대로 않더라도 자네 부인에게 말을 하면 안 될 리가 만무하지. 내년 봄에는 반드시 들어오게. 그래 같이 있으면서 공부 좀 해 보세. 나는 조금 더 있다가 들어 가려고 했는데 내 여동생이 편치 않다고 편지가 와서 곧 가 야겠네."

"자네 여동생은 가 있나?"

"응, 내 여동생도 가 있지. 지금 음악학교를 다니는데 그 애 때문에 걱정이야."

하고 성숙은 먼 하늘을 바라본다.

"왜 무슨 일이 있나? 매우 편치 않은가보군그려."

"아닐세, 그 애가 본래 건강체인데 임시로 조금 아픈 것이 야 무슨 걱정이 되겠나. 남녀간에 얼굴이 너무 예뻐도 걱정 일세. 여자는 더욱 그러하지. 내 누이동생 아이는 말하자면 특별한 인물이라고 할 수가 있지. 여자가 인물이 조금 반질 하면 경박하든지 박덕하기가 쉽지마는 이 애는 그렇지 않네. 침착하고 덕성스럽고 인정미가 있고 또 재주가 비상하지. 그러니까 보는 사람마다 칭찬이지마는, 문제거리가 되어 있네 그려. 나이 십팔구 세 된 처녀가 그만큼 되어 있으니 어찌 문제거리가 안 되겠나. 그래서 정식으로 청혼하는 사 람은 많고, 편지질을 하느니 여러 가지 방법으로 유혹을 하 느니 별별 일이 다 많은 것이 아닌가. 그래도 그 애는 태산 부동이지. 눈도 안 깜짝이네. 저 할 공부나 하고 꼼짝 않고 지내지. 그러나 나로서는 걱정이 되어서 얼른 마땅한 데로 여의어 버리려고 하나 어디 쉬운가, 그래 걱정이란 말일세."

하고 조금 말을 멈추더니 창수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할 즈 음에 다시 말을 계속한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내가 자네게 유의(留意)한 일이 있었 더니……"

하고 성숙은 창수를 본다.

"무엇을 유의하였단 말인가?"

하고 창수는 조금 호기심을 가지고 묻는다.

"지금은 깨어진 시루가 되어서 쓸데가 없이 되었네마는, 나 는 본래 자네를 나의 매부로 삼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 더니, 그러나 그 애가 아직 나이도 조금 어리고 자네도 그 전부터 조혼의 폐해를 말하고, 또는 학생 시대에 결혼하는 것은 재미 없다는 것을 말하기에, 자네도 대학까지나 마치 고 결혼할 줄로 생각하였더니, 그래서 말은 않고 있었으나 생각만은 가지고 있었다네. 지금은 다 허사가 되었네만 아 니찮아. 그리 된다면 자네 학비까지도 미상불 유념을 하려 고 하였더니, 그러나 그게 지금 다 소용 있는 말인가. 그런 줄이나 알아두란 말일세. 세상 일은 다 그러한 것이어든."

하고 성숙은 애석한 듯이 힘없는 웃음으로 끝을 막는다.

"감사한 말일세. 그런데 학비를 유념하겠다는 말은 무슨 말 인가?"

하고 창수는 대개 그 말뜻을 알면서도 짐짓 한번 젖혀 물 었다.

"응. 그것은 그렇게 됐다면 말일세, 자네가 나의 매부가 되 게 됐다면 자네 학비까지도 내가 어떻게든 담당하여서 같이 공부를 하도록 하려고 하였다는 말일세. 자네로서는 동경까 지 가서 공부하기에는 학비가 곤란할 것을 아는 까닭에, 그 렇게까지 생각한 것이요, 한편으로는 나의 누이동생 생각을 하여서 그런 생각이 난 것이라고도 하겟지. 그나저나 다 쓸 데 있는 말인가. 물론나의 누이동생이 자네 같은 남편을 얻 을 만한 인연이 없어서 그리 된 것이지마는, 하여간 나로선 섭섭하게 생각하는 일일세."

하고 성숙은 못내 섭섭히 여기는 기색을 보인다.

"그거야 될 말인가. 내가 자네의 매부 될 만한 보력이 없는 까닭이겠지. 그러나 그처럼 생각하였다는 것은 나로서는 잊 을 수 없는 감격일세. 그러나 그 일은 그렇게 되었을지라도, 그만한 정의만은 두고 지내는 것이 좋지 않겠나."

성숙의 말을 들은 창수는 적지 아니한 충동을 받았다. 성 숙의 누이동생이 그러한 미인이라는 것과, 또는 자기의 학 비까지 대어 주기로 하였다는 것은 한갓 감사할 뿐 아니라, 자기에게 있어서 실제로 행복이 되었으리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자기가 갑작스럽게 조 비비듯 졸라대어서 경순과 결 혼한 것이 무슨 운명의 작희인 듯도 하였다. 그리하여 평일 에 경순에 대하여 만족하게 생각하던 것이 우물 안에서 하 늘 보기로 너무도 문견이 좁았던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자 기가 먼저 경순에게 청혼하였던 것까지는 그렇다 할지라도, 그 집에서 듣지 아니할 때에 그만 두든지 아주 그만 두기까 지는 않더라도 바싹 조르지만 말고 이때까지 천연만 하였더 라도 좋았을 것이 아닌가? 하여서 적지 아니한 불안을 느꼈 으나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는 것은, 성숙의 누이동생을 자 기가 보지 못 하였은즉, 과연 재덕이 겸비한 미인으로서 경 순보다 나으냐 못하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것이 한 줄기 의 의심으로서 창수로 하여금 마음을 몹시 아프게까지는 하 지 못한 것이었다. 만일 성숙의 누이동생이 성숙의 말과 같 이 출중한 인물로서 경순보다 나은 것을 자기의 눈과 마음 으로 발견하게 되는 때에는, 마음의 깊은 곳으로부터 고치 기 어려운 상처를 받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창수는 성숙의 누이동생이 그다지 훌륭한 인물이 아니었으면, 다소 미인이라 할지라도 다른 흠절이라도 있었 으면, 차라리 자기 마음이 위로되리라고 생각하였으나, 한편 으로 궁금하여서 하루바삐 보고 싶은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구시월, 도지를 신고 다니는 검은 구름은 동풍에 몰려서 굵은 빗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당장에 무슨 살풍경을 일으 킬 듯하다. 경순과 창옥은 아까 남겨 두었던 밤송이도 발르 고 산보도 하다가, 졸연히 변하여지는 날씨에 놀라서 급히 돌아와 모든 것을 수습하였다.

"오빠, 가세요. 비가 오시는데."

하고 창옥은 경순과 함께 정거장 쪽으로 향한다. 성숙은 조금 뒤에서 창수와 같이 뒤를 따라갔다. 습율 대회의 많은 사람들도 모두 모였다.

그들은 경성역에서 내렸다. 창수가 어디 가서 아주 저녁을 사먹고 가자고 하는 것을 경순은 성숙과 같이 가는 것을 꺼 려서 배가 아프다고 핑계하고 가지 아니하니까, 창옥도 경 순을 따라서 집에 오게 되었으므로 창수는 성숙만 데리고 어디로인지 가버렸다.

경순은 가회동(嘉會洞)에 오다가 창옥과 갈리고 자기 혼자 저녁을 지어 먹을 생각이 없어서 그대로 자기로 하였다. 경 순은 옷을 갈아 입으려고 벗다가 허리춤에서 떨어지는 편지 를 보고 새삼스럽게 놀랐다. 경순은 떨어진 편지를 얼른 주 워서 주먹에 쥐고 옷을 되는 대로 갈아 입은 뒤에, 가슴이 터질 듯이 북받치는 불쾌한 마음을 진정하려고도 아니하면 서도,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어서 처음부터 보려다가, 돌 연히 무슨 생각이 나는지 편지를 펴면서 위에서부터 돌돌 말아서 접어놓고 맨 끝을 먼저 보았다. 끝으로 성명을 쓰는 자리에는 불행한 최 성숙 올림 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것을 본 경순은 뱀을 잡았던 손을 뿌리치듯이 인정 없이 편지를 뿌리쳐 내버렸다가, 다시 고 양이가 쥐를 움키듯이 앙상스럽게 움키어서 박박 찢은 뒤에 두손으로 싹싹 비벼서 되는 대로 태질을 쳤다가, 다시 생각 하고 부엌으로 가지고 나가서 아궁이에 넣고 불을 살라서 다 타는 것을 본 뒤에 재까지 해적여서 없애 버리고 들어왔다. 경순은 자리만을 깔아 놓고 옷도 벗지 아니한 채로 드러누 웠다. 경순은 종일 삐대어서 피곤도 하지마는 조금도 고단 한 생각은 없었다. 경순은 밤 주우러 갔던 것을 여간 후회 하지 아니하였다. 거기를 아니 갔다면, 그러면 편지를 받았 을 리도 없고, 또는 성숙을 보았을 리도 없을 것을, 공연히 가서 그러한 일을 당한 것이 끝없이 불쾌하였다.

경순은 성숙이 한 편지인 것을 안 뒤에는 분김에 사연도 보지 아니하고 찢어서 불살라 버렸으나, 다시 생각하니 그 사연에 대하여 궁금하였다. 그 사연이 물론 자기로서 취할 점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아니하였으나, 무슨 특별한 화 단(禍端)이나 나지 아니할가 하고 생각하였다.

? 그 편지 사연은 무엇일까, 한 번 보기나 할 걸 그랬다.

그 사람이 나에게 몰래 편지를 쥐어 준 것은 괘씸하지마는, 그 사람도 그렇게까지 할 때에는 범연한 편지는 아닐 것이다. 반드시 무슨 특별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나 로 하여서 견디다 못하여 자기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나를 모함을 한다든지, 방자를 한다든지, 심하면 죽이기까지라도 할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아니하면 자살이라도 할 것이 아닌가. 그 사람이 나 때문에 자살을 한다는 유서를 써 놓고 죽 어서, 그것이 세상에 발표된다면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할 것인가. 그렇지 않더라도 옛날 늙은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사내가 여자를 사모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으면, 그 원혼이 상사뱀이 되어서 몸에 붙어서 따라다닌다던데, 그리 된다면 부끄럽고 무서워서 살 수가 있을까. 남녀간의 관계 로서 별별 일이 다 많다는데 그렇다고 그 사람의 요구를 들 어 줄 수는 없지마는, 그래도 편지 사연이나 한 번 보았으 면 좋을 것을 그랬다.' 하고 경순은 다른 생각을 계속하려 할 때에, 문 밖에서 인 기척이 나면서 기침 소리가 들린다.

경순이 다른 때 같으면 기침 소리는 말고서 발자취 소리만 들어도 창수인 줄을 알겠지마는, 성숙에게 대한 일을 너무 도 침착히 생각하던 중이라 누구의 소리인 줄도 모르고 다 만 놀라기만 하여서 가슴이 울렁거렸다.

"벌써 자나?"

하고 마루에 올라서는 소리를 듣고서야 창수인 줄을 알게 된 경순은, 더 한층 오싹하고 놀랐다. 경순이 일어서서 문을 열려고 할 때에 창수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선다.

"인제 오세요?"

하고 거의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경순은 자기의 기색을 감추려 하면서 창수의 눈치를 본다.

"피곤할 터엔데 일찍 자지. 왜 이때까지 옷도 안 벗고 그대 로 있어요. 날 기다리노라고 그랬어요?"

하고 옷을 벗는 창수는 별로 다른 기색이 없었다.

"별로 곤하지 않아요. 저녁은 잘 잡수셨어요?"

하고 경순은 창수의 모자와 두루마기를 받아 걸면서 적이 안심하였다.

"나는 잘 먹었소마는 저녁을 어찌하였소? 아마 저녁을 아 니한 것 같소."

하고 창수는 방안을 둘러본다.

"먹고 싶지 않아서 그만 두었어요."

하고 경순은 깔아 놓은 이부자리를 다시 정돈하면서,

"고단하실 텐데 어서 누우세요."

하고 자기는 조금 웃목으로 물러앉는다.

"저녁을 굶어서 되나, 청요리나 조금 가져오랄까? 무엇이 좋을까. 설렁탕이든지 아무거라도 갖다가 자셔야지. 나는 잘 먹었는데."

하고 창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 한다.

"아니어요, 아무것도 안 먹어요. 먹고 싶으면 무어든지 내 손으로 해 먹지요. 그만 두세요."

하고 경순은 일어나서 창수의 소매를 잡아서 만류하였다.

"정말이요. 시장치 않겠소?"

"정말이지 왜 거짓말을 해요. 스스런 손님인가요. 체모 차 리게."

하는 경순의 입술에는 아직도 어색한 듯한 웃음이 흐른다.

"그렇지만……"

하고 깔아놓은 자리에 쓰러지는 듯이 드러눕는 창수는 한 손을 이마에 얹고,

"술이 조금 취하는데."

하고 혼잣말처럼 하다가 다시,

"내 얼굴이 붉지요?"

하고 경순을 본다.

"조금 붉어요. 술 많이 잡수셨어요?"

하고 경순은 조금 다가앉으면서 창수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다지 많이 먹지는 아니했지만……"

하고 창수는 조금 그느스름한 눈을 힘있게 뜨고 경순의 얼 굴을 유심히 바라본다. 깊이 찡그렸다가 얕게 펴지는 눈썹, 열리는 입술, 저주의 슬픔에 푸르러졌다가 애교의 꽃에 붉 어지는 귀밑, 그것이 도리의 미의 중화(中和)를 얻어서 분수 밖에 아름다운 듯하였다.

그것을 바라보는 창수는 아무리 성숙의 누이동생의 얼굴이 얼마나 예쁘다고 가정하더라도 도저히 경순의 그것을 따를 수가 없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창수의 마음은 개인 하늘의 달빛같이 명랑하지는 못하였다. 알지도 못하는 동경에 있는 그 여자의 그림자가 길고도 하도 길어서 창수의 마음에 한구석을 가리고 있는 것은 창수 스스로도 깨닫기가 어렵거늘 하물며 창수가 아닌 경순이야 그것을 알 수가 있으리요. 경순이가 창수의 얼굴 을 볼때에 그다지 눈동자도 굴리지 아니하고 대어 본 것은 아니나, 그러나 될 수 있는 대로는 창수의 얼굴보다 얼굴에 나타나는 마음의 빛을 보려고 하였다. 그것은 창수의 마음 가운데 있는 그 여자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경순으로서 는 꿈에도 모르는 까닭이었다. 다만 성숙이가 창수와 저녁 을 먹는 동안에 무슨 자기에 대한 말을 하여서 창수의 마음 에 무슨 변동이나 생기지 아니하였나 하는 의심을 가진 까 닭이었다. 경순은 창수의 기색이 별로 다른 것이 없는 줄로 보았으나, 어쩐지 어젯밤의 그것과는 같지 아니한 줄로 생 각되었다. 그것은 말이 없는 가운데라도 창수의 얼굴에 그 만한 기색이 나타나는 것보다도, 경순의 마음 자체가 티끌 이 없는 거울이라든지 바람이 없는 봄물처럼 맑고 고요하지 를 못한 까닭인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여간 사람 의 심령이라는 것이 이상하기는 이상한 것이었다.

경순은 성숙의 일이 궁금하여서 창수에게 물어 보려고 하 였으나 묻지 못하고 주저하기만 하였다. 그것은 만일 성숙 이 창수에게 대하여 무어라고든지 자기의 말을 하였으면, 자기로서 성숙의 말을 묻는 것이 도리어 창수의 의심을 살 까 두려워하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창수가 먼저 그러한 말을 하지 아니하고, 사색도 별다른 일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성숙이 자기의 말을 하 지 아니한 것이라고 추측되어서, 말을 물어 보려고 하였으 나 그 말이 목구멍에서 도로 들어가고 말았다.

창수는 눈을 감고서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였다. 경순은 그 기회를 타서 성숙의 말을 물어 보려고 입을 달막거리다가, 창수가 눈을 뜨는 바람에 말은 하지 못하고 혀끝으로 아래 위 입술에 침만 바르고 말았다.

"아! 모처럼 아는 사람을 만나서 술 좀 먹었더니 취하는데." 하고 창수는 기지개를 켜면서 경순을 보고 웃는다.

"그게 누구여요?"

하고 경순은 창수의 말을 기회삼아서 물었다. 그러고서는 더욱 창수의 기색을 살펴보면서 가슴이 약간 울렁거렸다.

"그게 동막(東幕)서 사는 최 성숙이라고, 나하고 친한 친구 인데, 동경 가서 유학하는 중에 잠깐 다니려 왔다가 마침 안양에서 만났는데, 그대로 헤어질 수가 없어서 저녁을 같 이 먹었지요."

하는 창수의 대답은 순탄하여서 조금도 다른 기색이 없었다. "그게 좋은 사람인가요?"

하고 경순은 비로소 근본 문제에 들어가서 자기 마음의 가 려운 곳을 긁어 보려고 하였으나, 말을 하여 놓고 보니 돌 연히 다른 남자의 좋고 그른 것을 묻는 것이 여자로서 예의 를 잃은 듯하여, 얼굴이 조금 붉어지는 것을 깨달으면서 창 수를 본다.

"그럼, 좋은 사람이기에 나의 친구가 되는 것이지, 나쁜 사 람이면 나의 친구가 되나요?"

하고 창수는 눈을 경순의 얼굴에서 옮겨서 천장을 쳐다보 면서,

"하지만, 그 사람이 꾀가 많고 정직한 편이 좀 적은 듯하지. 그렇지만 사람은 관계치 않을걸."

하였다.

경순은 성숙이 그 전에 자기에게 청혼을 하다가 실패한 일 과 정거장에서 가만히 편지를 쥐어 주던 일을 말할까 하고 몇번이나 망설였으나, 마침내 용기가 나지를 아니하여서 뜻 을 이루지 못하였다. 시계는 열한시가 지났다. 경순은 고단 한 것을 느꼈다. 조금 깔깔하여지는 눈을 깜짝이면서 방 안 을 돌아보면서 옷을 벗고 누우려고 하였다.

창수는 홀연히 누운 자세를 고치고 다시 팔을 이마에 얹으 면서, 한숨을 휴우! 하고 내리쉬더니,

"체! 사람이 공부를 한다고 중학을 겨우 마치고 말게 되 니……"

하고 눈을 감고 조금 있다가 경순의 편으로 돌아누우면서,

"여보."

하고 불렀다.

"예?"

하는 경순은 인제야 성숙에게 대한 말을 하려나 하는 충동 을 받아서, 오려던 잠이 달아나고 두 눈이 반반하여졌다.

"이것, 사람이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하게 되니 살아서 무 엇을 한단 말이요,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그게 무슨 말씀이어요. 공부는 형편대로 하는 것이지 공부 를 못하면 못 사나요. 그러면 나 같은 사람은 진작 죽었게요." 하고 경순은 눈을 둥글게 뜨고 창수를 본다.

"그는 그렇지 않지요. 경순씨는 본래 공부를 아니하였고 또 여자니까 그러하지마는, 나는 사내 자식으로 명색이 공부를 한답시고 하다가 겨우 중학을 마치고서는 학비가 없어서 대 학을 마치지 못하게 되니 살아서 무엇을 하겠소. 지금 세상 은 공부를 아니 하고서는 살 수가 없는 형편인데."

"그러니까 돈이라는 것도 차차 만들면 되겠지요."

하는 경순의 말을 무슨 도리가 있는 듯한 의미로 알아들은 창수는,

"만들긴, 돈을 어떻게 만든단 말이요? 지금은 제 돈 없으면 꼼짝 없이 죽을 세상인데. 경순씨는 무슨 돈 만들 도리가 있겠소?"

하여서 경순의 뜻을 알아보려고 하였으나,

"여자가 어떻게 돈을 만들어요? 남자가 돈을 만들어야지.

차차 어떻게든 학비를 주선해 보시란 말씀이어요."

하는 경순의 대답에는 아무 흥미도 없이 들렸다.

"돈을 어떻게든지 만들어야 할 터인데, 여기서는 하는 수 없고 만주(滿洲) 같은 데로 나가서 하다못해 아편 장사를 하 든지 노동이라도 하여서 돈을 좀 벌어 가지고 공부를 해야 겠소."

"만주는 위태하다는데, 만주는 귀신 모르게 죽는 수가 많다 던데, 만주는 가지 마세요. 세상 없어도 만주 갈 생각은 마 세요."

하고 경순은 눈썹을 찡그리고 민망한 듯이 말한다.

"사람이 죽으면 죽고 살면 살고 그렇지, 일사(一死)면 도무 사(徒無死)로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돈이 없이 공부도 못 하고 구차스럽게 사나, 돈을 벌려다가 죽으나 마찬가지라.

하여간 만주로 가기로 작정을 하였으니까, 갔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창수는 경순이 만주는 위태하다고 가지 못하게 하는 약점 을 타서 은연히 시위 운동을 하였다.

"그래 만주로 가시기로 작정을 하셨어요?"

하고 경순은 놀라는 눈으로 창수를 본다.

"그럼 가기로 작정을 하였으니까 말을 하지, 말만 하고 말 터이면 말을 하여서 무엇을 하는가요."

"오늘로 급작히 그러시는 것을 보니까 아마 최씨를 만나서 그런 말씀을 들으신 게로군요."

하고 경순은 창수가 갑자기 만주로 간다는 것이 성숙의 권 고인 줄로 짐작하였다.

"아니오, 그 사람은 나 만주 가는 문제에 대해서 얼토당토 않소. 그 사람이 아무쪼록 동경으로 유학을 가자고는 말하 더군. 나는 만주 갈 생각을 가진 지는 오래나 그럭저럭 이 때까지 못 갔는데, 이번에 최씨가 유학을 가자고 하는데 자 극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그 사람이 조금도 만주 갈 말을 한 것은 아니고, 이때까지 만주를 생각만 하고 못 간 것도 말하자면 경순이 때문이지. 사실 경순이를 떨어지기도 싫고 또는 경순이를 혼자 두고 가기가 미안도 하고 해서 이때까 지 못 갔는데, 원체 딸리는 학비를 변통할 수가 없고, 공부 를 아니할 수는 없는 터인즉, 부득불 만주로 가기를 작정한 것이지. 낸들 그렇게 위태한 만주로 가기가 좋아서 간다는 것은 아니오. 더구나 경순이를 혼자 두고 가기는 죽기보다 싫지마는 어쩌는 수가 있어야지. 하여간 돈 없는 놈은 살 수 없는 세상이야."

하고 창수는 안간힘을 쓴다.

경순이 창수의 말을 듣는데는 사리가 그럼직도 하나, 모두 가 전에는 들어 보지 못하던 말이었다. 만주 같은 데도 간 다는 말은 꿈에도 듣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혹시 다른 사 람들이 돈을 벌러 만주 간다는 말이 나면 그것이 다 허황된 일이라고 비판까지 하던 터이요, 공부를 더 하겠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하던 것인데, 그 날 저녁에 갑자기 그런 문제를 꺼내는 바에 몹시 조급하게 말하는 것이 이상하였으나, 창 수의 말과 같이 진작부터 그러한 생각이 있었으나, 자기를 사랑하기 위하여, 바꾸어 말하면 자기를 떠나기가 어려워서 말도 내지 않고 있다가, 사세가 만부득이한 지경에 이르니 까 부득이하여서 말을 하는 것인가도 싶었다. 또는 창옥의 말을 생각하건대, 자기 시아버지가 한 달에 삼십 원씩은 줄 터이니 동경으로 유학을 가라고 하는 것도 다른 핑계를 하 고 아니 갔으나, 기실은 자기를 떨치고 갈 수가 없어서 못 갔다는 말을 종합하여 본다면, 그 사이에 그러한 말을 내지 아니한 것은 반드시 자기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 러나 매월에 삼십 원씩을 준다면 그것을 가지고 고학이라도 함직하고, 또는 고학까지는 아니할지라도 부족되는 것은 달 리라도 변통함직한 일인데, 그것을 다 불구하고 위험하기가 짝이 없는 만주까지 간다는 것은 다시 알 수 없는 일인 듯 도 하였다. 그러나 동경에 가서 공부를 하려면 학비는 얼마 나 들며, 모든 형편은 어떠한지를 순전히 모르는 경순으로 는, 그 일의 가부를 확실히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들으니까, 아버님이 한 달에 삼십 원씩은 주신다고 하셨다 는데, 그것 가지고는 안 돼요?"

하고 경순은 유학하려면 학비가 얼마나 드는 것을 대강이 라도 알고 싶었다.

"어데서 들었수?"

"창옥이가 그러던데요."

하고 경순은 눈을 분명히 뜬다.

"동경 가서 유학을 하려면 삼십 원 가지고는 턱이 닿지를 아니하오. 돈을 넉넉히 쓰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보 통으로도 백 원 이상은 써야 하오. 거지처럼 지낸대도 오륙 십 원은 가져야 지내는데 삼십 원 가지고 문제가 되나. 또 그거나마 아버지에게 있어서 준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지 변통을 하여서 주신다는 것인즉, 끝끝내 대어 주시게 될 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요, 끝까지 대어 주신다 할지라도 공부 좀 하자고 삼사 년 동안을 부모에게 고생을 시키는 것 이, 자식으로서 할 수가 없는 일일 뿐 아니라, 그렇거든 그 것 가지고 공부나 하게 된다면 모르지만, 그렇지도 못할 바 에야 공연히 부모에게 걱정만 시키고 나도 공부를 합네 하 고 갔다가 중도에 말게 된다면 차라리 아니 간 것만도 못하 게 된것인즉, 그 노릇을 누가 하겠소. 그러니까 아니 간 것 이지."

하고 창수는 일어나 앉으며 궐련에 불을 붙인다.

"그렇지만 없는 사람이 돈을 쌓아 놓고 공부를 할 수가 있 어요. 그리저리 변통해 가며 쓰는 것이지. 그러면 아버님이 삼십 원씩 주신다면 반은 되는 셈이고 반은 부족되는군요?"

하는 경순의 말소리는 명랑하였다.

"그렇게 치면 그렇지."

"그러면 삼십 원쯤이야 변통을 못하세요?"

"어떻게 변통을 하오. 한 푼 없는 놈이 한 달에 삼십 원씩 을 어떻게 변통을 하느냐 말이요."

"그렇지만……"

하고 경순은 고개를 숙이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렇지만, 만주는 가지 마세요."

하고 고개를 들어 창수를 보고 상긋 웃는다.

"무슨 도리를 만들고서 가지 말라고 해야지, 덮어놓고 가지 말라고 하면 되오. 그래 만주를 아니 가고도 될 만한 도리 가 있겠오?"

창수는 경순의 기색에 무슨 기대를 가지면서 말을 하고 웃 는다.

"도리가 무슨 도리에요, 여자가……."

"그러면 도리도 없이 왜 가지 말라고 하우?"

"위태하니까 가시지 말라는 말이지, 그리고 또……."

하고 경순은 눈을 들어서 창수를 보려다가 다시 눈을 아래 로 뜬다.

"그리고 또라니, 또 어떻단 말이요?"

"또 멀리 가셔서 오래 계시면 안 되었으니까 그렇지요."

하고 경순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인다.

"그러면 유학하러 가 삼사 년 있게 되면 어떻게 할 테요?"

"그럿은 공부하러 가는 것이니까 어쩌는 수가 없지마 는……"

"그럼 공부하러 가는 것은 어쩌는 수가 없지마는, 다른 데 를 가면 안 된다는 말이요?"

"그러면요, 공부를 하러 가시는 것은 어쩌는 수가 없지마 는, 공연히 다른 데는 왜 가세요? 더구나 만주같이 멀고 위 험한 데를. 그리고 부득이 어디든지 가선 오래 계시게 된다 면 나도 같이 가야지, 혼자 떨어져서 어떻게 살아요. 만주로 정 가신다면 나도 따라가서 살 테에요."

하고 발버둥을 치려는 것처럼 몸을 흔들면서 말하는 경순 의 태도는 너무도 순진하였다.

"만주로 가서 돈을 벌려면 같이 갈 수는 없는 형편이거든."

하는 창수의 말은 힘이 없었지마는,

"그것은 안 되어요. 나는 싫어요. 암만 해도 만주는 못 가 세요."

하는 경순의 말은 열이 있었다.

"그런데 만주로 아니 가고도 되려면 될 수가 있는데……"

하고 창수는 경순을 보면서 말을 멈춘다.

"그러면 그렇게 하시지 왜 만주로 가신다고 그러세요?"

하고 경순은 적이 다행히 여기는 빛을 띤다.

"그런데 그것은 나 혼자는 하는 수가 없고, 경순이가 들면 될 수가 있는데 말하기가 어려워서."

"내가 들면 될 일이에요?"

경순은 뜻밖의 일을 듣는 것처럼 덩들하여 묻는다.

"그렇지, 경순이가 들면 될 수 있지."

"내가 들어서 될 일이면 열 번이라도 하지요. 그러면 왜 진 작 말씀을 아니하셨어요. 무슨 일이에요, 말씀하세요."

하고 경순은 의심하면서도 자신 있게 말한다.

"학비라는 것은 삯주어 들어가는 것 같지마는, 실로는 그런 것이 아니라 저금하는 셈이거든. 왜 그러냐 하면, 공부를 할 때에는 돈을 쓰게 되지마는, 공부를 하고 나면 돈을 벌게 되니까 말이요. 대학을 마치고 취직을 하게 되면 학비만 뺄 리가 있나요. 학비 들인 것은 물론 얼마 안 가서 빠질 것이 요, 그것으로 생활도 하고 돈도 모을 수가 있는 것이거든.

그러니까 학비라는 것은 누구에게든지 임시로 변통하여 볼 수만 있으면, 그것은 졸업한 뒤에는 곧 갚게 될 것인즉 몇 해 동안 취해 쓰는 셈이요, 아주 소비하는 것이 아니거든.

그렇지 아니하오?"

하고 경순을 본다.

"그렇지요. 졸업한 뒤에 무엇을 하든지 갚게 되겠지요."

하고 경순은 창수의 말을 따라서 대답하였다.

"그러니까, 피차에 그런 사리를 아는 터이면 서로 변통해 쓰기가 쉬울 이이 아니냔 말이요. 그것이 윗돌 빼서 아랫돌 괴기로, 상담(常談)에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거든. 그렇 지 않소?"

"그렇지요, 피차에 좋은 일이지요."

"그러니까 경순이 가 들면 될 수가 있단 말이요."

"글쎄, 말씀을 하세요."

"말을 하면 꼭 듣겠소?"

"그야 들을 만하면 듣고말고요."

"들을 만한 일이기에 말이지, 들을 수 없는 일이야 말을 할 리가 있소?"

"글세, 그러지 마시고 말씀을 하세요."

하는 경순은 자뭇 초조하여 한다.

"말하기가 어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말을 하였다가는 듣 지 아니하면 말을 아니한 것만 같니 못할 뿐 아니라, 도리 어 정의 까지 상하게 될는지 모르니까 그리하는 것이요."

하고 창수는 경순이 말을 아니 들을 수가 없도록 뒤를 다 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어요. 내외간이라는 것은 한몸과 같아서 평생의 고락을 같이하는 것인데, 서로 곤란한 때를 당하면 못할 말이 어디 있어요. 죽을 말이라도 들을 터이니 어서 하세요."

하는 경순은 초조가 지나쳐서 흥분이 되었다.

"그러면 말을 하지. 다른 말이 아니라, 장모님께 말씀을 해 서 학비를 변통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요. 생각이 어떻소?"

하고 창수는 조금 긴장된 눈으로 경순을 본다. 밤은 고요 한데 어디서인지 닭의 울음 소리가 난다.

경순은 한참 동안 말문이 막혔다. 경순이 처음부터 창수의 사정을 들을 때에, 학비가 엇어서 공부를 못하는 일이라든 지, 학비를 구하기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만주에 간다는 말을 들을 때에 그 사정이 너무도 딱하였고, 또는 창수가 진작부터 만주로 가고 싶은 생각이 있었으나 자기를 떠나기 가 어려워서 이때까지 못 갔다는 말을 들을 때에는 너무도 감사하였고, 또는 그만큼 괴로웠다. 그리하여 어찌하면 그렇 게 절박하게 된 자기 남편의 난관을 면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슴을 졸이다가, 천만 뜻밖에 자기가 들면 될 수 가 있다는 말을 듣고, 한편으로는 의심스럽기도 하고 한편 으로는 다행하게도 생각하였다. 하여간 자기로서 그 일을 해결할 수가 있다면 무슨 어려운 일이라도 피하지 아니하려 고 하였다. 가령 자기의 몸을 임시로 남에게 방매하여서 남 의 집의 더부살이가 되고 종이 된다 할지라도, 학비만을 만 들 수가 있다면 사양치 아니하려고 하였다. 또는 들은 말에 의하면 병인으로서 수혈(輸血)하는 수가 있다 한즉, 어느 부 자 사람의 수혈이 있다면 자기의 피를 팔아서라도 또는 어 떠한 고초를 겪는 일일지라도 하려고 하였다. 물론 경순이 가 그러한 일을 조목조목이 붙여서 하려고 한 것은 아닐지 라도, 대개 그만한 정도의 어려운 일일지라도 창수의 학비 를 변통할 수가 있어서, 창수로 하여금 만주에를 가지 않고 기쁘게 동경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면, 물론 조금도 사양하 지 않고서 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자기 친정 어머니에게 학비를 변통하여 달라는 소 리를 들을 때에는, 다른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이 자기의 가슴을 치는 것처럼 뜨끔하고 아찔하면서 이마에 땀에 솟는다. 그러면 아까 자기가 생각하던 바 그만한 어려운 일이라 도 하겠다는 데에 견주어 본다면, 자기의 친정 어머니에게 그러한 말을 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다는 것보다 지극히 쉬 운 일이어서, 도무지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인데, 경순이 그다 지 놀라는 것은 무슨 일인가? 그것은 경순으로서는 다른 일 에 대하여 자기의 땀과 피를 희생하기는 오히려 쉽지마는, 웃고 말하는 사이에 자기 어머니 앞에서 그러한 사정을 이 야기하기는 어려우며, 또는 다른 어려운 일은 하다가 아니 되더라도, 학비를 변통하지 못하는 이외에 다른 별 일이 없 지마는, 자기 어머니에게 변통하다가 아니 되면 한때의 학 비만 틀어지고 말 뿐이 아니라, 만일 그 일로 말미암아서 창수와의 사이에 감정이 생간다면, 자기의 백년 생애에 적 지 아니한 틈이 벌어지게 되는 까닭이었다.

경순이 자기 어머니의 성격과 규모와 사정을 생각할 때에, 도저히 될 수가 없는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자기 어머니가 소년 과부로서 가시덤불 같은 세상의 모든 험살궂은 일을 물리치고, 수절을 하여 가며 외딸을 길러낸 성격이라든지, 바느질품을 팔아 가며 먹을 것을 먹지 아니하고 입을 것을 입지 아니하고 푼푼이 모아서 볏백이나 받에 되고 돈 천 원 이나 저금하게 된 규모라든지, 사위감을 고를 때에 학생 출 신은 방탕하기도 쉽고 변심하기도 쉽다는 이유로 아무쪼록 학교 출신이 아닌 구식 사람을 좋아하던 세상에 대한 완고 한 관찰이라든지, 여러 사람의 권유를 못이겨서 창수와의 결혼을 승낙하였으나 자기가 시집 올 때에 여러 가지로 주 의를 주는 중에, 생활에 대해서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친정 에는 아무 말도 말고 있다가, 자기가 죽은 뒤에 다 차지하 라는 부탁이라든지, 기타의 모든 점으로 보아서 도저히 될 만한 가망이 없는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경순은 마음이 죄 면서 말이 막혔다.

"왜 대답을 아니하시오?"

하는 창수의 젖히는 말은 그다지 명랑하지 못했다.

"글쎄요, 말씀은 해 보지만 어머니가 웬 돈이 그렇게 있겠 어요?"

하는 경순의 말도 혀가 부드럽게 돌아가지 못하였다.

"말도 해보지 아니하고 미리 방탈부터 하시오그려. 탐탁히 말을 한 대도 잘 될지 모르는데, 경순씨 생각부터 그러할 지경이면 애초에 말을 않는 것이 좋을 것이요. 죽을 일이라 도 듣겠다고 하더니 그만한 일을 방탈부터 하니 어디 말과 일과 같소? 그나저나 그 말은 그만두고 잠이나 잡시다."

하고 창수는 경순을 등지고 돌아눕는다.

"아니에요, 방탈이 아니라, 어머니의 일은 내가 잘 아는 바 에 그만한 돈이 있을까 싶지 아니하니깐 걱정하는 말이지, 방탈이 아니에요. 내일이라도 가서 말씀할 터이니 염려 마 세요."

하고 경순은 손으로 돌아누운 창수의 소매를 끌어서 바로 눕게 하려다가, 그 손으로 방바닥을 짚고 창수의 얼굴을 넘 어다 보면서,

"이리 돌아 누우세요. 방탈이 무슨 방탈이에요. 남의 속도 모르시고 공연히 불안스럽게 그러시네."

하였다 경순은 창수의 몸을 돌리려고 하느니보다 먼저 마 음을 돌리려고 하였다.

"불안이 무슨 불안?"

하면서 돌아눕는 창수는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쓰더니,

"잡시다, 그만 오래잖아 날이 새겠소. 나는 졸려서 좀 자야 겟소. 졸리지 않소?"

하였다. 창수의 기색과 말소리가 조금 평탄스러운 것을 본 경순은 적이 안심하면서,

"그럼 잘까요."

하고 창수의 이부자리를 매만져서 덮어 주고 자기도 그 옆 에 드러누웠다. 창수는 약간의 술 냄새를 피우면서 코를 골 기 시작한다. 경순은 눈이 반반하면서 가슴은 뒤숭숭하였다.

전등불에 눈이 부시어서 팔로 눈을 가리었으나, 가리면 가 릴수록 보이는 것이 더욱 많았다. 그 자리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곧 전등이라든지, 옆에 누운 창수의 몸뚱이라든 지, 책상 우에 놓인 경대라든지, 벽에 걸린 시계라든지 그러 한 것은 보이지 아니하였지마는, 그 자리에서 눈으로 볼 수 없는 것, 곧 지나간 일, 아직 오지 아니한 일, 창수의 마음, 성숙이 쥐어 주던 편지 사연, 그러한 것들이 역력히 보였다.

그리하여 경순의 팔은 볼 수 있는 것을 보는 눈을 가린 수 는 있었지마는,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마음의 눈을 가릴 수 는 없었다. 그 중에도 제일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은, 내일 이라도 창수의 학비에 대하여 말을 아니할 수도 없는 일이 요, 말을 한다면 어떻게 하며, 말을 하여서 그 일이 되면 좋 지마는 되지 아니하면 그 결과가 어찌 될 것인가. 자기 어 머니가 처음에는 듣지 않더라도 자기가 진심으로 간곡히 말 을 하면 자기를 사랑하는 생각으로 듣기는 하겠지마는, 그 대신으로 마음이 얼마나 아플 것인가. 우선은 학비를 대어 준다 할지라도 졸업한 뒤에 창수가 과연 취직을 하여서 그 돈을 도로 갚아 줄 수가 있을 것인가? 모은 것이 갈피를 잡 을 수가 없어서 생각할수록 한 가닥도 풀리지는 아니하고 점점 엉클어졌다. 이것은 경순이 세상에 난 후에 처음으로 맛보는 쓴맛이었다. 기나긴 가을밤도 경순의 근심보다는 짧 았다. 하늘은 새어서 훤하기 시작하였으나 꿈도 없는 경순 의 마음은 아직도 어두움에 잠기었다.

경순의 친정집은 계동이었다. 계동과 취운정이 한 동리와 다름이 없으며, 경순이 친정에르 가는 일은 별로 드물고, 경 순 어머니가 경순을 보고 싶다든지, 혹 이를 말이 있으면 경순을 찾는데, 그것도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달에 한 번이 요, 주착없이 내왕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 계세요?"

하고 들어서는 경순의 소리에,

"경순이냐?"

하고 방문을 열고 급히 나오는 경순 어머니는 조금 놀라는 눈으로 경순을 보며,

"웬 일이냐? 어찌 이렇게 일찍 오니? 아침은 해 먹었니?"

하고 경순이 태도를 살핀다.

"아침은 다 해 먹었어요. 오고 싶어서 왔어요."

하고 웃음을 머금는 경순은 어머니의 뒤를 따라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네 얼굴이 왜 못 됐니?"

하고 유심히 보는 어머니의 말에,

"못 되긴 왜 못 돼요?"

하고 경순은 손으로 자기의 얼굴을 만지면서 속으로, ? 하룻밤 잠 못 잤다고 얼굴이 그렇게 못 되었을까.' 하였다.

"얼굴이 꺼칠하니 못 됐다. 어디가 편찮으냐?"

"아니어요, 어저께 밤 주우러 갔다 왔더니 볕에 그을어서 그럴까."

하고 경순은 다시,

"아 참, 이것 좀 잡숴 보세요."

하고 보에다 싸가지고 온 밤뭉치를 내놓는다.

"그게 무어냐?"

"그게 어제 따 온 밤이에요."

"그런데 밤을 따러 가다니, 어디로 밤을 따러 갔단 말이냐?" "안양이라나요."

"안양이 어디냐?"

"시골이에요. 시골이라도 가까운 시골인데, 예서 한 육칠십 리 된다나 봐요. 그런데 기차로 가니까 잠깐 가고 잠깐 오 던데요."

"누구하고 갔지, 혼자 가진 않았을게구."

"혼가가 뭐에요. 혼자 어떻게 가요. 저희 둘하고 시뉘아이 하고 셋이 갔다 왔어요."

"별세상이다. 시골까지 밤을 주우러 가다니……"

하고 경순 어머니는 이상한 일을 다 보는구나 하는 듯이 서글픈 웃음을 웃는다. 경순은 밤 주우러 갔던 일에 대하여 이야기될 만한 일은 대강 말하였다. 그러나 성숙의 일에 대 해서는 말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마침내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경순은 창수의 학비에 대한 말을 하려고 하였으나, 어떻게 말을 내어야 옳을는지 몰라서 주저하였다. 경순 어머니도 경순이 무슨 말을 할 듯하면서도 조금 어려운 빛이 있는 듯 한 눈치를 채었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잠잠하였다.

"어머니, 저 만주로 간다고 야단이에요."

하고 경순은 밑도 끝도 없이 말을 내었다.

"만주로 가다니, 누가?"

하고 경순 어머니는 무슨 말인지 몰라서 의심스럽게 묻는다. "집에서 그런답니다."

"사위가?"

"예."

"만주로 간다고?"

"예."

"만주는 왜?"

"돈 벌러 간다나요."

"돈 벌러? 만주 가서 어떻게 돈 벌어?"

"모르지요, 어떻게 벌려는지. 아무 짓이라도 하여서 번다니까." "만주로 돈 벌러 갔다가 고생만 죽도록 하고 빈털터리로 온 사람이 많다더라. 그리고 까딱하면 귀신 모르게 죽는다 더라. 죽이나 밥이나 되는 대로 먹고 살지, 그런 데를 가서 무얼 하니, 누구를 또 가슴 아프게 하려고."

하고 경순 어머니는 눈살을 찌푸린다.

"그러기에 말이에요. 저도 그런 말을 하였는데 어디 듣나요. 공부를 더 해야겠는데 학비가 없다구요. 아무리 하여도 아니 되니까 어쩌는 수 없이 만주로 가서 무슨 노릇이라도 하여서 돈을 벌어야겠다구요. 그런데 아편 장사를 하든지, 하다못해 노동이라도 한다나요. 그래 부랴부랴 간다고 그런 답니다."

하고 경순은 어머니를 본다.

"공부는 무슨 공부를 한다고?"

"누가 아나요. 일본 가서 대학교를 마친다나요."

"학교를 안 다닌 사람도 제 복 있으면 잘 산단다. 공부를 그만큼 했으면 무던하지 또 해서 뭘하니. 돈이나 있으면 모 르지만 돈도 없는데."

"대학교를 마쳐야 취직을 하여서 벌어먹게 된다구요. 졸업 을 하면 그 이튿날부터라도 돈을 벌게 된다나요."

"이애, 그런 소리 듣기 싫다. 대학 공부를 하고도 아무것도 못하고 펄펄 노는 사람이 부지기수란다.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다 벌어먹게 되면 그 돈을 다 누가 준다더냐. 하기 야 일본이나 서양을 가서 대학교를 마치고 오면 한몫 놓아 주나 보더라만, 그것도 돈이 있어야 할 말이지. 그렇고 그런 데 가서 공부를 하고 오면 양옥을 짓고 연애를 한단다. 연 애가 무엔지 그것만 하면 장가든 것도 쓸데없고 본처도 쓸 데없단다. 그래서 그런 데 가서 공부하고 온 사람의 아내는 낙방(落榜)거지가 된 사람이 많다더라."

하고 경순 어머니는 자기가 들은 대로 누구누구의 예를 들 어서 해외에 가서 공부하고 온 사람으로 이혼한 사람과 첩 얻은 사람을 섬기면서, 마치 그런 데 가서 공부한 사람은 다 허영에 뜨는 부랑자가 되는 것처럼 말을 한다.

"그게야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사람마다 다 그럴라구요."

하고 경순은 하기 어려운 말을 하는 것처럼 조심성 있는 빛을 띤다.

"그런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거지반 다 그런가 보 더라. 이런 데서는 관계찮던 사람도 그런 데 가서 공부를 하고 나오면 마음이 변해진다더라. 네 남편도 지금은 얌전 하다고 하지마는, 그런 데 가서 공부를 하고 오면 마음이 변하여서 너를 고생시키게 될는지 누가 아니?"

하고 경순 어머니는 일시 지나가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 라, 진심으로 하는 태도를 보인다. 경순은,

"에구 어머니두, 설마 그럴라구."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럴는지도 모르게 생각되었다. 그러 나 창수가 졸업을 하고 온 뒤에 자기를 배척하게 될는지 안 될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일 뿐 아니라, 그것은 장래의 일이 요, 우선 자기 어머니에게 학비를 변통하여 주지 아니하면 당장에 창수와의 정의 가 성기게 될 것을 짐작하여서, 다른 할 만한 일을 생각할 여유도 없고, 또는 자기 어머니의 말 이 너무 과도하여 반드시 그러리라고 다 믿어지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경순이 처음부터 자기 어머니에게 창수의 학비 에 대한 말을 차마 하기가 어려운 것을 깨달아서, 말이 거 기까지 이른 것도 적지 아니한 미안을 품었었는데, 자기 어 머니의 관찰이 잘 되고 못 된 것은 딴 문제로 하고라도, 그 렇게까지 미치는 바에는 그 이상 더 말할 용기가 나지를 아 니하였다. 그리하여 경순은 정히 난처한 지경에 빠졌다.

사람의 마음은 아무리 안으로 숨기려고 하여도 반드시 밖 으로 나타나고야 마는 것이었다. 그보다도 숨기려고 할수록 더욱 나타나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그리하여 말하려고 하면 서도 말하지 못하고 있는 애처로움 마음이 경순의 얼굴빛을 거쳐서 경순 어머니의 눈으로 들어갈 뿐만 아니라, 핏줄이 같은 모녀간에는 한 사람의 정신이 움직일 때에 다른 한 사 람의 심령이 고요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경순 어머니는 경순의 태도가 눈에 거리끼고 마음에 켕겼다.

"그래 만주 간단 말만 하고 다른 말은 없디?"

하면서 웃는 경순 어머니의 얼굴은 흐렸다가 개이는 일기 처럼, 불쾌한 빛이 거치는 흔적을 따라서 평화스러운 빛이 퍼진다.

"다른 말도 있어요."

하고 경순은 해 저물고 길 끊어진 막다른 곳에서 한 줄기 의 길을 찾은 것처럼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디디었다.

"그래, 무슨 말을 하디?"

하는 경순 어머니의 태도는 너그럽고 사랑하는 어머니가, 귀여운 어린 딸을 달래듯이 조금도 다른 기색이 없었다. 그 러나,

"저……"

하고 다시 말문이 막히는 경순은 모든 표정이 다시 무거워 졌다.

"그래 무슨 말이냐? 어서 해라, 무슨 하기 어려운 말이냐?

그리 주저하게."

하는 경순 어머니는 마음을 가벼운 듯하면서도 다소 의심 스런 눈으로 경순을 본다. 그래도 조금 주저하다가 새로운 용기를 내는 듯이,

"돈 말을 어머니에게 해보라고 그래요."

하고 경순은 기쁘지 아니한 웃음이 흐르는 입술보다도 약 간 붉어지는 얼굴을 왼쪽으로 틀면서 조금 숙인다. 그것은 자기 어머니에게 돈에 대한 말을 하기 어려운 것뿐이 아니 라, 사랑하는 자기의 남편을 위하여 아끼고자 하는 잔부끄 럼과, 아무리 흉허물이 없는 어머니에게일지라도 자기 남편 의 구차스러운 말을 하기에는 조금 창피스러운 생각이 없을 수가 없는 까닭이었다.

"돈 말을? 나에게 어떻게 하라고?"

하고 경순 어머니의 기색은 조금 달라진다.

"공부할 동안 학비를 좀 당해 주시면 졸업한 뒤에는 곧 갚 아 드린다구요. 그런데 그도 꼭 어머니에게만 변통해 달라 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만주로 간다고……. 간대야 돈을 벌 른지 못 벌른지도 모를 뿐 아니라, 첫째로 위태하다니 즉 가지 말라고 하니까, 그러면 어머니에게라도 말씀을 해서 변통이 되면 아니 가겠다는 말이에요. 그리고 거저 쓰는 것 이 아니라 졸업한 두에는 도로 갚아 준다니깐. 그러나 나중 에 갚아주게 될는지 안 될는지야 누가 알아요. 하자면 돈 벌러 간다고 만주로 가면 사람의 일을 어떻게 될는지 알아요. 하니까 저도 어머니 성미를 알면서도 말씀을 하는 게지요. 공연히 딴 일이 생겼어요, 에구 참."

하는 경순은 걱정스러운 빛이 온 얼굴을 덮었다.

"그래 예서 돈이 안 되면 꼭 만주로 간다고 하더냐?"

"꼭 간다고 하고말고요. 여기서 안 되면 간다는 것이 아니 라 당초부터 간다는 것이에요. 공부도 못하고 살면 무엇을 하느냐고, 만주로 갔다가 죽어도 좋다고 하던데요. 에구 무 서워라, 말만 들어도 끔찍스러운데."

하는 경순은 몸을 움츠리면서 무서워하는 자세를 짓는다.

"그래 만주로 가면 혼자 간다든, 너하고 같이 간다든?"

"아니에요, 혼자 간대요. 제가 말을 해 봤어요. 그런 데를 가면 나는 혼자 살 수가 없으니 같이 가겠다고 그러니까, 그런 데는 같이 갈 수가 없는 형편이라고, 혼자 간다고 그 래요."

근심스럽게 말하는 경순의 얼굴을 바라보는 경순 어머니 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러니, 그런 데를 가면 어찌 될는지는 모르고 또는 돈을 번다 할지라도 몇 해가 걸릴는지 모르는데, 그러면 우선 네 고생이 적으냐. 하기야 내게 와서 같이 있더라도 먹고 입는 것이 없어서 걱정이 아니라……"

하고 다시 말을 멈추고 조금 있다가,

"어지간히 쓰면 백 원 이상을 쓰고 아무리 작게 써도 오륙 십 원은 가져야 된대요."

경순은 어머니의 말에 적이 광명을 얻은 듯하였으나, 돈의 액수를 말하기에는 너무도 많다는 생각으로 다시 걱정스러 운 빛을 띠었다.

"오륙십 원! 한 달에 오륙십 원?"

하고 놀라면서 눈을 크게 뜨는 경순 어머니는,

"나는 평생을 살아도 한 달에 오륙십 원을 벌어도 못 보고 써도 못 보았다. 너 시집 보낼 때 쓴 것은 말할 것 없고, 한 달에 오륙십 원이면 일년에 얼마냐? 한달에 오십 원만 치더 라도 열 달에 오백 원하고 두 달에 백원, 일 년에 육백원 돈이로고나, 그래 공부는 몇 해나 해야 된다디?"

"삼사 년, 아마 한 사 년 있어야 된다나 봐요."

"사 년! 그래 한 달에 오십 원씩 사 년이면 얼마냐?"

하고 구구를 쳐서 도합이 얼마인지를 알아보려고 하는 경 순 어머니는 마침내 따지지 못하고,

"에구, 그것 조선은행이나 가진 사람이나 할는지, 여간 사 람이 그 뒤를 대겠니. 논마지기 있는 것을 다 팔아도 될까 싶지 않다."

하고 걱정할 여지도 없다는 듯이 서글픈 웃음을 웃는다.

"어머니, 많기는 많아도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그것이 한 꺼번에 내는 것이 아니라 다달이 내는 것이니까, 일 년에 육백 원이면 우리 추수의 반만 팔아도 되기는 돼요. 작년에 도 우리 양식 갖다 먹고서도 추수한 것이 일천 삼백 원이 넘었으니까, 반만 해도 육백 원이 되지 않아요?"

하는 경순은 눈을 깜짝이면서 어머니를 본다.

"그러냐?"

하고 천장을 쳐다보다가 다시 경순을 보는 경순 어머니는,

"그렇지만 너는 판 돈 생각만 하는구나. 그걸 가지고 구실 물고, 가옥세니 무어니 모두 물고 나면 얼마 남니? 그렇고 요새는 곡가가 조금 올라서 그만이나 하지, 곡가가 털썩하 는 날이면 말 아니다. 비싼 세금을 물고 나면 양식할 것도 변변치 않은데, 육백 원 돈을 어디서 빼내겠니. 너는 살림을 해보지 아니하여서 그런 것은 다 모른다."

하면서 작년의 세금 문 것과 가용 쓴 것을 대강 쳐보더니, 추수 판 돈이 얼마 남지 아니한 것을 말한다.

"글쎄, 나도 어머니보고 억지로 학비를 대어 주라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다는 말이지. 그러나 딱한 일이 아니우? 만주 같은 데로 가버리면 어찌 될는지도 모르고, 내야 혼자 있어 도 관계 없지만."

하고 경순은 시름 없이 말을 하고 한숨을 지우려다가 들이 쉬지는 않는다. 경순 어머니는 고개를 숙이고 무엇을 한참 생각하는 듯하더니 가볍게 한숨을 지으면서,

"그도 그렇다. 만주 같은 데를 가면 어찌 될는지도 모를뿐 아니라, 몇 해를 두고 아니 오면 그 사이에 네가 혼자 있을 걱정하는 것도 볼 수 없는 일이요, 그뿐 아니라 우선이라도 나에게 돈 말을 하였다가 아니 되면 나를 얼마나 섭섭히 생 각하겠니. 나를 섭섭히 생각하면 너까지도 그 엉얼을 입을 지도 모르는 것이다. 나는 팔자가 사나와서 소년 과부로 이 때까지 고생을 하고 살았지마는, 만일 네가 내외간에 어떻 다 하면 내가 그 꼴을 어찌 보겠니. 그러니까 논마지기가 다 없어지더라도 학비를 대어주자. 나야 다 늙어서 오래잖 아 죽을 터인데 굶으나 먹으나 상관 있나. 너희들 내외나 잘 사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아야지. 내가 아무렇기로 돈을 아껴서 너를 걱정되도록 하겠니. 내가 돈을 모아서 무엇을 하니. 너 때문에 아둥바둥 돈푼이나 모은 것이지, 그렇지 아 니하면 내가 무슨 청승으로 바느질품을 팔아 가며 반찬 하 나 못 하 먹고 남과 같이 옷 한 가지 변변히 못 해 입고 돈 을 모은단 말이냐. 내게 있는 논마지기나 돈냥 있는 것은 다 네것이다. 내가 그것을 관 속에 넣어 가겠니. 나는 아무 쪼록 돈푼이나 더 모았다가 내가 죽을 때에 오스름히 너를 주어서 먹고 살도록 하렸더니, 그리 되지 않는 것이 조금 섭섭하지마는, 그역 어쩌겠니. 인력으로 못하는 일이다. 지 금 와서는 네 남편 주는 것이 너 주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것 이 아니냐. 조금도 이를 안 주겠니. 그래 언제 단다디? 오늘 이라도 돈을 가지고 가려거든 가거라. 은행에 맡긴 돈이 천 원이나 있다. 너도 같이 가서 맡기지 않았니? 왜 조금도 맘 상하지 마라. 내가 누구를 바라고 산다고 네 맘을 상해 주 겠니."

하고 경순을 보는 그는 마치 어린애를 달래듯이 한다. 어 머니의 말을 잠착하여 듣고 있던 경순은 홀연히 눈자위가 붉어지면서 눈물이 핑 돈다. 속으로 느끼는니 말을 하지 못 하고 한참 있다가,

"어머니! 나는 무얼로 생겨서 어머니에게 애물 노릇만 하우. 어머니는 이리 잘난 것을 이때까지 길러내느라 고생하 시고, 시집이라고 간 것이 또 어머니의 걱정을 시키게 되니, 까마귀도 부모의 은혜를 갚는다는데, 저는 커서도 어머니의 뜻을 한 번도 편안히 해 드리지 못하고, 까마귀만도 못한 인간이 살아서 무얼 하우. 아마 내가 전생에 어머니에게 무 슨 죄를 지었던 게지. 어머니, 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사람 이라고 살고 싶지도 않아. 어머니가 그렇게 어렵게 모은 돈 을 쓰시려면 가슴이 여북 쓰르겠오. 그것도 다 내 죄지 무 에요. 나는……."

하고 말을 마치지 않는다. 경순은 방바닥에 떨어진 눈물을 닦으려고 아니하고 수건으로 눈을 가린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런 소리를 왜 하니. 내가 누구 때문 에 살아 있는 줄 아니? 너 때문에 살아 있다. 나는 늬 아버 지가 돌아가신 뒤에 몇 번이나 늬 아버지 뒤를 따라가려고 망설이다가 너 때문에 차마 못하였다. 세상 일이 모두가 괴 롭지마는 너 하나에 재미를 붙여 가지고 살았다. 그러니까 이야기마다는 네가 아홉 살인가 되는 여름이다. 하도 괴로 운 중에 잡것들은 좋은 자리가 있으니 시집을 가거라, 어찌 거라 하는 별의별 소리를 다 하는데, 하도 분하고 원통하여 서 죽기로 작정하고 한강 철교로 나갔더니라. 그때 자정이 나 되어서 인적이 고요하기에 난간을 붙들고 막 떨어지려고 하는데, 별안간 네 울음 소리가 나더구나, 그래 깜짝 놀라서 네가 행여 내 뒤를 쫓아왔나 하고 사방을 돌아보아야 아무 것도 없기에, 다시 덜어지려고 하니까 또 네 울음 소리가 금방 곁에서 나는 것처럼 들리더구나. 그래 또 돌아다보아 도 아무도 없구나. 하기야 네가 집에서 울었다 한들 그 소 리가 거기까지 들리겠느냐마는, 아마 마음에 씌워서 그리 들린 것이지. 그래 죽을 생각은 없어지고 네 생각이 나서 가슴이 울렁거리고 사지가 떨리더라. 그래 불현듯이 집으로 오려니 전차가 끊어졌지요. 그래 하는 수 없이 두 주먹을 부르쥐고 달음질을 쳤다. 그래 아무리 빨리 오느라고 와도 자꾸 걸음이 뒤로 물러나는 것 같고 속히 와지더냐 어디.

그래 오다가 발이 아파서 올 수가 없기에 고무신을 벗어 들 고 버선발로 왔다. 그러니까 혹시 누가 보면 할 일없이 미 친년 같지. 그러거나 말거나 허둥지둥 집에 와서 보니 온몸 이 물에 빠진 것처럼 땀이 나서 흠뻑 젖었구나. 그래 숨도 돌릴 새 없이 방문을 살그머니 열고 들여다보니, 네가 그대 로 누워서 홑이불을 발로 차내버리고 쌕쌕 자고 있더구나.

그래 나는 그대로 네 옆에 주저 앉아서 눈이 붓도록 우렀다. 그러노라니 동이 훤히 트더라. 그러고 나서는 며칠을 앓 았는지 모른다. 너는 그런 것을 다 모르지마는 나는 그렇게 세상을 지내었다."

하고 경순 어머니는 수건으로 눈물을 씻으면서 목이 메는 덧이 조금 진정하더니, 다시 말을 계속한다.

"그러니 그때만 해도 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한강의 물귀신 이 되었을 것이 아니냐. 너 때문에 모진 목숨을 구차히 살 아 가지고 있지, 너 아니었으면 나는 벌써 공동 묘지에 가 서 흙이 되었던지, 화장장에 가서 재가 되었던지, 물에 가서 고기밥이 되었을지 모른다. 모든 일이 귀찮고 괴로워서 당 장에 죽고 싶다가도, 눈앞에서 곰실거리는 너를 보면 사랑 스럽고 불쌍하여서 모든 마음이 봄눈 슬듯 하는구나. 그래 서 이때까지 산 것이다. 그리고 돈냥을 모은 것도 그게 다 네 복이다. 내가 무슨 복에 돈냥이 내게 태였겠니. 내가 손 톱만큼이라도 복이 있으면 늬 아버지 같은 이를 이별하고 소년 과부가 되었겠니. 내게 있는 재물이 다 네 것에 태인 덧이다. 네 복으로 생긴 재물 네 맘대로 쓰는 것이지, 나는 아무 관계도 없다. 그리고 네가 저만큼이나 장성해서 시집 까지 갔으니, 나야 지금 죽은들 무슨 한이 있겠니. 조금도 다른 생각 말고 네 맘대로 해라.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여 지지만, 그래도 그런 소견은 있단다."

하는 경순 어머니의 태도는 적이 화평한 듯하면서도 비장 하였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말이 없이 머리를 어머니의 무 릎에 대고 흑흑 느끼는 소리가 났다.

경순을 친정에 보내고 혼자 앉아서 생각하는 창수는 마음 이 편안치 못하였다. 혼자 사는 장모에게 학비를 청구하는 것이 원래 쾌쾌한 일이 못 되는 중에, 그나마 자기가 직접 으로 말하지 못하고 다소의 술책을 써서, 아내로 하여금 청 구하게 한 것이 더욱 사내답지 못한 일이요, 그나마 되며는 다행이지마는 되지 못하는 때에는 얼마나 창피한 일인다.

그러나 자기 장모의 성격으로 보아서는 될 것 같지 않지마 는, 경순이 진정으로 성의 만 쓰면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 것은 자기의 장모가 아무리 돈에 대하여 인색하다 할지라 도, 돈보다 무남 독녀 외딸 경순을 더욱 사랑하는 것을 아 닌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학비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 기 장모의 인색한 탓이 아니라, 경순의 성의가 부족한 까닭 이어서, 학비의 되고 안 되는것은 경순이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니하는 데에 있다고 단정하였다. 그리하여 창수 는 학비의 되고 안 되는 일에 대하여 궁금한 것보다, 아내 의 사랑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마음이 더욱 궁금하였다. 잠 깐 다녀오겠다고 하던 경순이 조금 늦은 것을 보고서, 일이 잘 되었으면 곧 올터인데 되지 아니하니까 늦게 오는 것이 라고도 생각할 수가 있지마는, 당초에 될 가망이 없으면 속 히 올 터인데 되도록 만드느라고 아니 오는 것이라고도 생 각할 수가 있어서, 여러 가지 생각이 정히 갈피를 잡을 수 가 없었다.

그러자 마침 들어오는 경순을 보는 창수는 반갑기도 하였 으나 한편으로는 염려도 되었다. 그리하여 경순의 말을 듣 기 전에 먼저 경순의 얼굴빛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눈물의 흔적을 겨우 감춘 경순의 얼굴에는 그다지 즐거운 빛은 없 었다.

? 아마 틀린 게로군.' 하는 혼자 생각으로 경순의 입만 쳐다보는 창수는,

"기다리셨지요?"

하는 경순의 말에,

"기다리기는 무엇을 기다려, 모처럼 갔으니까 으레 늦을 줄 알았지."

하고 경순의 뒷말을 기다린다. 옷을 갈아 입고 천연히 앉 는 경순은,

"동경은 가시면 언제쯤 가세요?"

하고 묻는다.

"대관절 학비가 되어야 가든지 오든지 하지요."

"학비가 되면 말씀이에요."

"학비가 되면 곧이라도 가야지요. 입학이야 봄에 하게 되겠 지만, 미리 가서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 될 테니까요. 그런 데 대관절 학비는 어찌 되었소?"

하고 창수는 조금 갑갑한 듯이 묻는다.

"학비는 됐어요."

하는 경순의 말은 소리 없는 웃음과 섞여 나온다.

"되었어?"

하고 창수는 의외인 듯이 다시 묻는다.

"예. 되었어요."

"아마 경순씨가 힘을 매우 쓴 거로군."

하고 창수는 웃는 눈으로 경순을 본다.

"아니어요, 말씀을 하니까 대번에 응낙하시던데요."

하는 경순의 수월한 말에,

"그 어른이 그렇게 활수시든가?"

하고 혼잣말처럼 하는 창수는 의심스러운 빛을 띤다.

"어머니는 여자라도 그렇지 않으세요. 안 쓸 데는 한 푼이 라도 안 쓰시지만, 쓸 데는 얼마든지 아끼지 않고 쓰시는 성미세요."

하고 경순은 어머니를 위하여 변호하였다.

창수가 처음에는 아무쪼록 경순의 마음을 움직여서 학비를 도둑하려 하였고, 경순이 학비를 말하기 위하여 친정에 간 사이에도 이리저리 스스로 추측하면서 공연히 마음이 불안 하였으나, 급기야에 아무 지장이 없이 학비가 되었다는 때 에는 자연히 마음이 부끄러운 듯하면서 경순의 모녀에게 미 안하였다. 그리하여 학비가 되더라도 그렇게 순순히 되지 말고 다소의 승강이를 하다가 어렵게 되는 것이 오히려 자 기에게 미안한 마음이 덜할 듯이 생각되었다.

"그러나 너무 미안한 일이요. 경순이 낯을 보아서 승낙하셨 겠지마는, 그래도 규모 있는 부인네 마음에 끼이지 아니 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 나중에 갚아 드리기는 하겠지만."

창수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한다.?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내 낯을 보아서 승낙하셨다고? 그 어른이 아들도 없고 하니까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줄 아시우. 당신의 공부하는 일이니까 두말 없이 승낙하셨지, 오히려 내가 쓴다면 아니 주실 게요. 그리고 나중에 갚는다 던라고 하니까 껄껄 웃으시면서 갚는 것이 다 뭐냐고 그러 시던데요. 그렇게 생각 마세요. 우리 어머니는 늙어서도 당 신밖에는 믿을 데가 없으시지 아니하우. 이 다음이라도 친 어머니처럼 여기셔야 됩니다."

하는 경순은 그 기회를 타서 자기 어머니의 괴로운 정경을 은연중 부탁하였다.

"낸들 그런 생각을 못하겠소마는, 우선은 걱정을 시키니까 미안한 일이오."

하는 창수의 말은 순전히 양심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그런 생각 마시고 공부나 잘 하세요. 그리고 공부하시고 돌아오시거든 우리가 얼머니를 모시고 지낼 도리를 하세요.

그래 당신이 버는 것을 가지고 내 손으로 소금밥이라도 하 여서 어머니 돌아가시는 날까지 봉양을 좀 해보게요. 나는 이때까지 어머니의 사랑만 받고 걱정만 시켰지, 조금도 내 손으로 봉양을 못해 보아서 그것도 원이 되어요."

하는 경순은 창수의 유학 가는 데 대하여 진심으로 많은 기대를 가진다.

창수는 이듬해 봄의 입학기에 간대도 늦을 것이 없지마는 어쩐지 부득부득 속히 떠나기로 하였다. 경순은 창수를 따 라가고도 싶었다. 결혼한 지가 얼마 되지 아니하여서 새로 운 정이 흡족하지 못한 것도 한 가지 원인이지마는, 객지에 가 있으면 의복이나 음식이 다 맞지 못하여서 창수에게 고 통이 될 듯싶으므로, 잘하나 못하나 자기의 손으로 정성껏 하여서 창수의 공부하는 뒷바라지를 하여 주고 싶었으나, 그러노라면 비용도 더 들게 되어서 어머니의 걱정을 더 시 킬 것 같기도 하고, 또는 듣기만 하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외국의 사정을 아 수도 없어서, 따라가고 싶은 외로운 생각 은 오직 괴로운 듯한 작은 가슴으로 고요히 품어 주고 말았다. 창수가 떠나게 되는 때에는 집안의 형편이라든지 경순의 생각과 자기의 소견을 종합하여서 경순은 친정에 가서 있게 하였다. 창수가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던 때는 동짓달 어느 날의 첫눈 오던 아침이었다. 경성역의 플랫포옴에서 싸이렌 소리의 남은 메아리가 다하기 전에, 우렁찬 소리를 내면서 천천히 움직이는 경부선 열차를 보내는 경순은 손으로 수건 을 흔들 줄도 몰랐으므로, 작은 새의 그것과 같은 보드라운 마음은 스스로 흔들렸다.

기차를 전송하는 사람들은 가지각색이었다. 모자를 벗어들 고 만세를 부르는 사람, 수건을 흔드는 사람, 돌아서서 우는 사람, 웃고 떠드는 사람, 시름없이 서서 가는 기차를 바라보 는 사람…… 실로 형형색색이었다. 그러한 광경을 처음같이 보는 경순은 심사가 어리둥절하여서, 창수를 보내는 회포보 다도 그러한 것을 구경하는 감상이 더욱 정신을 끌었다. 사 람의 세상이란 이러한 것인가? 정거장이라는 것은 참 이상 한 곳이다 싶어서, 활동 사진이나 신소설에서 보는 것보다 도 영화해설(映?解設)이나 야담(野談) 같은 데서 듣던 것보 다도 더욱 이상하였다. 같은 기차를 타고 같은 방면으로 가 는 사람들이건마는, 그들의 사정이 그다지도 다 각각 다를 까, 혹은 보내는 사람들의 정경이 달라서 그러할까, 창수가 유학의 길을 떠나는 것은 영광스럽고 기쁜 일이건마는, 보 내는 자기로서는 견디기 어려울 만한 회포가 있는 것으로 추측하여 보면, 가는 사람보다 보내는 사람의 사정이 다 각 각 다른 듯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기쁜 길로 떠나는 창수일 지라도, 자기를 떨치고 가는 회포가 자기가 창수를 보내는 회포 이상으로 더욱 괴로운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 게 생각할 때에는 자기가 창수를 그리는 것보다 창수로 하 여금 자기를 그립게 하는 것이 더욱 괴로웠다. 하여간 사람 의 이별이라는 것이 통틀어 이러한 것인가 생각할 때에, 인 간 만사가 족히 믿을 것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경순은 무슨 인생관을 깨달은 듯이 울고도 싶었으나, 또한 족히 울 것도 없는 듯하였다.

"언니는 울지도 아니하우?"

하고 뒤에 따라오던 창옥이가 바싹 다가서면서 말을 한다.

"울기는 왜 울어."

경순이는 창옥을 돌아보면서 심상한 듯이 대답한다.

"울기는 왜 울다니? 오빠 떠나시는데 말이요."

"오빠 떠나시는 데 왜 우느냔 말이여? 울 일이 무에 있어서." 모르는 체하고 말하는 경순은 눈을 속이로 끔적였다.

"울 일이 무에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언니는 야멸차 기도 하시오, 오빠는 가시면서 자꾸 우실 터인데."

하고 창옥은 눈을 치뜨고 경순을 본다.

"오빠가 또 왜 우실까? 유학을 가시노라고 좋아서 가시는데." "그런 공 없는 소리 말아요. 오빠는 그렇잖아요. 오빠는 언 니 생각을 하고 눈이 붓도록 우실 텐데, 저것 좀 보아요. 남 들 우는 것 좀."

하고 손가락으로 경순의 옆구리를 꾹꾹 찌르면서 플랫포옴 의 기둥을 붙들고 서서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우는 젊은 여 자를 가리키더니 다시,

"저렇게 좀 울어요. 그러면 내가 오빠에게 편지할 때에 언 니가 정거장에서 오빠를 못 잊어서 울더라고 할 터이니, 그 러면 나중이라도 오빠에게 사랑을 더 받지 아니하우."

하고 조롱 비슷이 말을 하고 웃는다.

"듣기 싫어요. 누가 그런 소리 하래나."

하는 경순은 창옥의 눈을 피하여 가면서 용산 쪽을 바라보 았으니 기차는 보이지 아니하였다. 경순은 소리 없이 한 숨 을 내쉬면서,

"기차는 벌써 멀리 갔구나."

하고 다시 창연한 빛을 지었다.

「…….우리의 떠난 지가 벌써 사흘이 되었습니다. 시간으 로는 사흘에 지나지 않지마는, 몸은 그야말로 산 설고 물 선 만리 타향에 있게 되었습니다. 경 성역에서 떠나서 여기까지 이르기 육로로 수로로 여러 천리 를 오는 동안에, 보지 못하던 산천 풍물을 구경하기에 심사 가 새로울 듯도 한 일이요. 차에서 배에서 적지 아니하게 피곤도 하였건마는, 어쩐지 그렇다고 하여서 마음이 상쾌하 고 기쁘다든지, 또는 혼곤하게 잠을 자 본 적은 한 번도 없 습니다. 그러면 새로 보는 모든 풍경이 나의 마음을 새롭게 하지 못하고, 머나먼 길의 피곤한 것이 나로 하여금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나는 새로운 것을 볼 때마다 잠착하여 생각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새로 운 생각이 아니라 경순이를 생각한 것이요. 피곤을 이기지 못하여 눈을 감고 누운 때가 있다면 그것은 잠이 아니라 꿈 이었습니다. 몸은 차에 아니면 배에 있었고, 배에 아니면 차 에 있지마는, 꿈은 언제든지 집에 있었습니다. 같이 있는 것 은 여러 나라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었지마는, 꿈은 언 제든지 경순이의 곁에 있었습니다.

경순이! 경순이는 애인으로, 아내로 지금은 나의 은인이 되 었습니다. 그러면 나는 한갓 사랑만으로 경순이를 갚은 것 은 부족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우선은 공부를 힘써 하는 것 으로, 나중에는 진정한 사랑과 성의로 경순이를 갚는 것이 인정이라고 하느니 보다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경순이, 모든 것을 용서하고 참아 주세요.

나는 동경이 초행이라 모든 것이 서툴러서 불편할까 염려 하였더니, 동경역에 내려서부터 최 성숙씨의 친절한 알선으 로 조금도 불편한 것이 없사옵고, 여관도 잘 정하였사오니 다행이외다. 편지는 종종 하겠사오며 대강 그치나이다.」

경순은 며칠 후에 창수의 이러한 편지를 받았다. 경순은 남편에게서라도 이러한 편지를 받아보기는 처음이었다. 더 구나 처음같이 작별한 뒤의 일이라, 그러한 편지가 더욱 신 기하여서 적지 아니한 충동을 받았다. 경수는 그 편지를 보 고 또 보고 몇 번이나 보았다. 그리하여 청수가 자기를 그 처럼 사랑하고 감사한다는 데 대해서는 순진하고 단순한 경 순으로는 그것을 끝없이 기뻐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 리하여 그 편지를 몇 번이나 입술에 대기도 하고 가슴에 껴 안기도 하였으나, 다만 그 편지가 온 데에 성숙의 말이 있 는 것은 한편으로 몹시 섬찍하고 꺼림칙하였다. 더구나 성 숙이 창수에게 친절히 하고 편의를 도와 주어서, 창수가 성 숙을 감사하게 여긴다는 데에는 무슨 시기도 아니건만 공연 히 가슴이 울렁거릴 만큼 괴로왔다. 경순은 창수에게 답장 을 하려고 여러 번 붓을 들었으나 마침내 쓰지는 못하였다.

대관절 허두는 무어라고 할 것이며, 사연은 어떠한 순서로 어떻게 써야 좋을는지 알 수가 없었다. 창수를 작별한 후부 터 만일 편지를 하게 된다면, 생각에 있는 말을 다 쓸 뿐 아니라 평일에 말로 하지 못하던 일까지 쓰려고 하였고, 또 는 사연도 어찌어찌하리라는 것까지 대강 마음으로 초(草)를 잡았던 것이어서, 편지를 쓰려고 할 때에 우선 전일에 생각 하던 바를 다시 마음으로 외어 보았다. 그러나 급기야에 붓 으로 쓰려고 하는 때에는 마음으로 생각하던 바와는 딴판으 로 되지를 아니하였다. 생각을 가다듬고도 못 써서 찢고 찢 고 하였다. 아무리 편지 같은 것을 별로 써보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그저 안부만 묻는다든지 무슨 일에 대한 사연만 쓴다면 그다지 못 쓸 것도 아니지마는, 자기가 창수를 사랑 하는 정경이든지 또는 창수를 그리는 회포를 쓰려고 하는 때에는, 생각이 간절할수록 붓은 멈춰졌다.

「떠나신 후에 소식 묻자와 궁금하옵던 차에, 글월을 받자 오니 감사하오며, 육지로 바다로 머나먼 길에 안녕히 득달 하셨다 하오니 감축하오며, 다시 묻잡는 말은 하도 먼 길이 라 차에서나 배에서나 멀미나 없으셨으며, 득달하신 후로 여독(旅毒)이나 없으신지요?

이곳은 어머니 모시고 무사하오며 시댁도 안녕하시온 중, 창옥씨가 떠나실 때 정거장에 나갔다가 감기가 들어서 조금 앓는 중이오나, 대단치 않사오니 걱정하지 마옵소서. 편지 사연 중에 은인이라고 하신 말씀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 사오나, 아마 학비에 대한 말슴인 듯하외다. 그러한 그 일로 하여서 저를 은인이라고 하신 것은 실로 부끄러운 말씀이외다. 그 돈으로 말씀하면, 저의 돈도 아니거니와, 가령 저의 돈이라 할지라도 남편으로서 아내의 돈을 쓰는 것이 무슨 은혜스러울 것이 있습니까? 지금의 사람들은 내외간이라도 돈에 이르러서는 한 푼을 다툰다고 하고, 또는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하지마는, 무식하고 미련한 저로서는 그러한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사람에게 있어서 자기 의 몸이나 생명보다 더 중한 것은 없을 겁니다. 돈이 아무 리 중하다 할지라도 몸이나 목숨보다 더 귀중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듣자오니 부부라는 것은 오륜 삼강에 드는 것으로, 여자로서 남의 아내가 되는 때에는 자기의 몸 과 목숨까지라도 다 남편에게 바치는 것이온데, 그러면 가 장 귀중한 몸과 목숨을 바친 아내로서 돈만을 따로 가지고 있어서 한 푼 두푼을 다툰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우 리 나라의 예법에는 어그러지는 듯합니다. 하물며 저의 돈 도 아니고 어머니의 돈인 바에야, 저에게 대하여 은인이라 는 말씀이 가당이나 하오리까. 그러한 생각을 조금도 마시 고 아무쪼록 공부나 잘 하시고, 영광스런 몸으로 돌아오셔 서 의지할 데 없는 저의 어머니까지라도 돌보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경순은 몇 번이나 고치고 전줄러서 이렇게 써놓고 여러 번 읽어 보았다. 마음에 흡족하지는 못하였으나 그 이상 더 잘 쓸수가 없어서, 그대로 보내려고 봉투에 넣고 생각하니 그 만하면 할 말을 대강 되었으나 사랑에 대한 말을 한 마디도 없었다. 평일에 창수를 사모하던 것이라든가, 작별할 때에 너무 섭섭하였고, 그 후부터 낮과 밤으로 그리워서 견디기 어려울 만큼 괴로운 정상을 편지로나마 한 번 하여 보겠다 고 벼르고 벼르던 나머지인데, 급기야는 편지를 하게 되는 때에 그러한 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리 구 식 예의를 숭상하는 경순으로도 마음의 어느 구석이 심히 결연하였다.

「당신이 떠나신 뒤에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잃어버리다 못하여 나의 마음까지도 잃어버린 것 같습 니다. 왜 그런지요? 어머니를 잃어버린 어린애처럼 외롭기 도하고 희뜩희뜩하여서 어떤 때에는 울 듯도 하여요. 왜 그 런지 모르겠어요. 짧은 해를 길게 보내는 수도 있지마는 긴 밤을 짧게 새는 때도 많습니다. 마음이 이상도 하여서 걷잡 을 수가 없습니다. 공부하시는 동안이라도 휴가 때에는 다 녀가실 수도 있겠지요. 휴가 때에는 기다리고 있겠어요. 그 리고 너무 곤란하게 지내지 마시고, 학비가 부족하거든 종 종 기별하여 주세요. 힘 자라는 대로는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일본에는 고추장과 배추김치가 없다기에 운송부로 조금 보내오니 받으시고, 다음이라도 기별 하시면 또 보내 드리겠습니다. 편지 쓰는 격식을 몰라서 귀둥대둥 썼사오니 눌러 보시기를 바라나이다.」

경순은 다시 딴 종이에 이렇게 써서 이중 봉투에 동봉하고 우표를 반듯이 붙여서 가회동의 우체통에 넣으려다가, 그것 이 미심스러워서 안국동 우편소에까지 가서 등기로 부쳤다.

창수가 집에서 떠날 때에는 미리 가서 입학할 준비를 한다 고 하였지마는, 급기야에 동경에 가서는 아무것도 준비하는 것이 없었다. 무슨 예비 학교를 다닌다든지 강습소를 다닌 다든지, 하다못해 도서관 생활이라도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저 흥뚱흥뚱 놀고 있었으므로 다만 성숙을 따라서 서로 찾 아가고 찾아오는 것이 날마다 하는 일과였다. 어느 일요일 에 창수는 성숙으로부터 상오 열한시에 어느 손님과 같이 갈 터이니 기다려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창수는 누구를 데 리고 오려나 하고 궁금히 생각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열 한시가 지나서 거의 오정이 되었을 때에 성숙이 왔는데, 같 이 온 손님이라는 사람은 양장한 젊은 여자였다. 창수는 대 번에 성숙의 여동생인가 하고 추측하였으나, 언뜻 보건대도 얼굴이라든지 모습이 성숙과는 비슷하지도 아니하므로, 혹 은 다른 여자인가 하고 생각하였다.

"시간이 조금 늦어서 미안해."

하고 들어 서는 성숙은 예의 악수를 하고 팔이 아플 만큼 흔들어 대더니 주인의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이 자기 손으로 방석을 들어 대더니 같이 온 여자에게 앉기를 권한다. 그 여자는 서서 머뭇머뭇하다가 창수와 성숙이 앉은 뒤에,

"누구신지 앉으시지요."

하는 차수의 말을 듣고서야 머리를 조아 답례하고 조심스 럽게 무릎꿇어 앉는다.

"너 인사 여쭤라, 이 어른이 김 선생님이다."

하고 그 여자를 보던 성숙은 다시 창수를 보면서,

"자네 인사하게, 이게 내 여동생일세."

한다.

"아! 그런가?"

하고 창수는 먼저,

"처음 뵙습니다"

하고 그 여자에게 절을 하더니,

"저는 김 창수올시다."

하고 다시 절을 한다. 그 여자는 창수가 절하는 대로 답례 를 하더니,

"저는 정 한경(鄭漢卿)입니다."

하는 소리를 분명치 않게 하면서 절을 하기 시작하는 그 여자는 무슨 소리인지 혼잣말처럼 사부랑거리면서 절을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른다.

창수는 한경이 동경에 있은 지 오래 되어서 일본식의 인사 에 습관이 되어서 그렇게 여러 번 절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 하였으나, 창수가 놀란 것은 한경의 성이 정가라고 하는 것 이었다. 성숙의 성은 분명이 최가인데 한경이 성숙의 동생 일 것 같으면 으레 같은 최가일 것인데, 정가라고 하는 것 은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경의 말 소리가 분명치 못하여서 잘못 들었나 하고도 생각하여 보았 으나, 「정」과「최」의 음이 워낙 달라서 근사하지도 않으 니만큼 그다지 틀리게 들을 리도 없는 듯하였다. 그것이 첫 번에 들어올 때에 창수가 본 첫인상이, 그들의 얼굴이 비슷 하지도 아니하여서 남매간이 아닌 것을 추측하였더니만큼, 성숙이 자기의 동생이라고 인사 소개를 할 때에도 다소 의 심을 가졌던 것인데, 정 한경이라는 말을 듣고서는 더욱 의 심이 나서 너무 실례되지 않을 정도로 그들의 얼굴을 번갈 아 보았으나, 조금도 같은 구석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성숙 은 몸집이 조금 뚱뚱하고 얼굴이 넓적스름하고 거무튀튀한 데다, 성격은 조금 수선스러우면서도 어느 구석인지 교활스 러워 보이는데, 한경은 키가 호리호리하고 날씬한데다가, 얼 굴은 갸름하고 눈은 가늘며 전체가 미인답게 되어고, 성격 은 영리한 편이면서 간교한 듯이 뵈어서 모든 것이 동기간 이라고 할 만한 것은 조금도 없었다. 그리하여 창수는 자기 의 눈과 귀를 스스로 의심할 만큼 마음이 이상하여졌다.

"오빠에게서 김 선생님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진작이 라도 찾아뵈올 터인데 별로 공부를 잘하지도 못하면서도 겨 를이 없어서, 인제 와서 뵈옵게 되오니 죄송합니다."

하는 한경은 절을 세 번이나 한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조선에서부터 성숙씨에게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가서 찾아뵈올 터인데 앉아서 뵈옵게 되오니 미안합니다."

하고 창수는 될 수 있는 대로 한경의 얼굴과 거동을 살펴 보았다. 창수가 한경에게 또 한 가지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 은, 한경의 얼굴빛이 아무 까닭도 없이 삽시간에 변하는 것 이었다. 처음에는 얼굴의 두 볼에 도화색이 질리면서 이목 이 깨끗하고 기운이 명랑하여 보이더니, 불과 몇십 분이 못 되어서 홀연히 얼굴이 창백하여지면서 이목과 기운이 약하 고 흐리터부하여지는 것 같았다. 그러자 성숙이 일어나려는 자세를 취하려다가 다시 앉으면서 창수를 보고,

"자, 이제부터 이 애를 많이 사랑해 주게. 그리고 만나는 대로 모든 것을 잘 지도해 주게."

하더니 다시 한경을 보면서,

"너 이담부터는 이 선생님을 자주 찾아뵈어라. 그리고 지도 를 많이 받아라."

하고 창수를 향하여,

"자, 그만 가겠네. 오늘 만나서 같이 교외나 산보를 가려고 하였더니 그리 되지 못하겠네. 얘가(한경을 가리키면서) 공 부를 너무 하더니 신경 쇠약이 들렸는지 이따금 기분이 좋 지 못한 모양일세. 아까 시간이 조금 늦게 된 것도 그 까닭 일세. 오려고 할 때에 별안간 기분이 좋지 못하다고 하여서 조금 진정해 가지고 오노라고 늦은 것일세. 아마, 지금도 또 기분이 좋지 못한 모양일세."

하고 다시 한경을 보면서,

"그럼, 오늘은 이만 가자. 이 다음날 자주 뵈옵고 좋은 말 씀 많이 들을 양으로."

하고 먼저 일어선다.

"그럼, 그만 실례하겠습니다. 한 번 뵈었으니까, 이담부터 는 자주 와서 뵈옵겠습니다. 많이 사랑해 주시고 지도해 주 시기 바랍니다."

하는 한경은 입술보다 눈이 먼저 웃으면서 창수에게 인사 를 하고, 몸을 이기지 못하는 것처럼 일어선다.

"아! 그러십니까. 이거 너무 총총하여서 미안합니다. 일간 찾아가서 뵙겠습니다."

하고 창수는 황황히 일어서서 문앞에까지 나가서 전송하였다. 그다지 춥지도 아니한 때였건만 털외투에 흰 여우 목도 리를 어깨에 걸치고, 굽 높은 구두의 가벼운 걸음으로 맵시 있게 걸어가는 한경의 뒷 태도를 넋잃은 사람처럼 바라보던 창수는, 그들의 보이지 아니할 때에야 무엇을 잃어버린 것 처럼 서운히 돌아서서,

"하여간 미인은 미인이다. 얼굴도 얼굴이거니와 스타일이 더 좋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자기의 방으로 들어왔다. 창수는 무슨 일에 피곤한 사람처럼 방의 한가운데에 벌떡 드러누워서 천 장을 쳐다보다가 다시 한경의 일을 생각하였다. 첫째로 성 숙과 동기간이라면서 얼굴이 엄청나게 다른 것과, 성이 정 가라고 하였는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다 할지라도 확실히 최 가라고 한 것은 아닌 것, 그것이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였다.

세상에는 동기간에 얼굴과 성격이 아주 다른 일은 혹 있을 수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 성숙이 거짓말을 한 것이냐 하 면,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할 리도 만무하고, 더구나 자기의 동기에 대하여 까닭 없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일이라도 성숙에게 물어 보면 알 것이라고 미루어 두고, 한경의 얼굴빛이 변하는 데 대해서는 신경 쇠 약이 발작적으로 되는 것이라고 추측하여서, 별로 의심을 가지지 아니하였다.

창수는 한경의 얼굴과 태도를 허공에 나타내어 보려 하였다. 그러나 한경의 얼굴은 나타날 듯하면서도 용이하게 나 타나지 아니하였다. 뚜렷이 나타나는 듯하다가는 다시 희미 하여지고, 희미하여지다가는 번개같이 나타나기도 하여서, 분명히 보려고 할수록 더욱 아리송하였다. 마치 바람에 흔 들리는 물결을 지음쳐서 물 속에 있는 구슬을 보는 것처럼, 분명히 있기는 있으면서도 그 정체가 비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아름답다는 인상만은 흩어지지를 아니한다. 다시 말하면 어느 정도의 미인이라는 것은 감정하기 어렵다. 그 러나 미인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되었다.

"촵촵촵촵 창수는 일어나서 가방에서 사진첩을 꺼내어서 경순의 사진을 보았다. 자기와 같이 박은 결혼 사진을 보다 가 거울 속으로 보이는 얼굴이 도리어 분명치 아니하여, 결 혼한 뒤에 경순이 평복으로 혼자 박은 사진을 보았다. 그것 은 그해 여름에 인천으로 해수욕을 갔을 때에 바닷가에서 소나무를 의지하고 박은 사진인데, 순진한 얼굴과 소탈한 의복으로 사색을 움직이지 아니하고 천연스럽게 박은 사진 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육체로는 미인이요, 정신으로는 정숙 한 여자였다. 창수는 한참 보다가 눈을 감고서 한경의 얼굴 을 상상하면서 경순의 사진과 비교를 하여 보았다. 물론 자 세히 나타나지 않는 한경의 얼굴인지라 확실히 비교를 할 수는 없으나, 대강의 윤곽만으로 보건데 서로 장단이 있는 듯하여서, 그처럼 우열을 판단하기가 어려운 듯하였다. 순진 하고 동탁한 중에 애교가 있는 것으로는 경순이 나은 듯하 였으나, 산뜻하고도 아련하면서 전신에 흐르는 태도로 사람 을 끄는 매력을 가진 것으로는 한경이 훨씬 이상인 듯하였다. 그리고 그 외의 학문, 언론, 교제 등으로는 워낙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하여간 자기 같이 특수한 생각으로 일부러 구 식 여자를 고른다면 모르되, 그렇지 아니하고 시대적 여성 을 말한다면 구슬과 돌의 차이인 듯하였다.

창수는 다시 성숙이 안양에서 만나서 하던 말을 생각하여 보았다. 만일 성숙의 말과 같이 자기가 한경과 결혼을 하게 되었으면 어찌 되었을까? 그러면 자기는 당당한 시대적 미 인으로 학식이 구비하여서, 누구에게도 빠지지 아니할 만한 한경의 남편으로 내외가 같이 동경은 물론이요, 혹은 런던 이나 파리에까지라도 유학을 하면서 사랑을 속삭일 것이 아 닌가. 그러면 자기가 세상에 「김 창수」라고 알려지는 것 보다 한경의 남편이라고 알려지는 것이 더욱 행복스럽지 아 니할까. 그렇게 생각할 때에 창수는 가볍게 환멸을 느꼈으 나, 한편으로는 자기는 어지간한 남자로 천하의 미인을 아 내로 삼을 만한 자격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것은 공론(空論)이 아니라 사실인 듯하였다. 현재에 경순 같은 아 내를 두었고 또한 자기가 구하지 아니하고도 한경같은 미인 의 남편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을 생각할 때에, 스스로 자부 심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자기가 종종 다른 사람으 로부터 미남자라는 말을 듣던 기억을 되풀이하면서, 책상 위에 놓인 거울을 들어서 자기의 얼굴을 비춰 보았다. 얼굴 을 돌려 가면서 고루 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스스로 웃었다. 다시 얼굴의 힘줄을 실룩거려도 보고, 입술 을 움직여서 이빨을 드러내도 보고, 머리를 쓰다듬어도 보 고, 한손으로 양쪽 볼을 문질러도 보았다. 한편으로 쓸어 붙 인 하이칼라 머리를 앞에서 뒤로 쓸어 붙이는 것이 좋은가, 한가운데로 가리마를 타서 양쪽으로 갈라 붙이는 것이 좋을 까도 생각하여 보았다.

"전화 받으세요."

하는 여관 보이의 소리에 창수는 조금 놀라는 듯이 거울을 놓았다.

? 누가 전화를 할까?' 하고 생각하면서 전화실로 나가는 창수는, 자기에게 전화 할만한 사람이 별로 없고, 하며는 성숙이나 할 터인데, 성숙 은 다녀간 지가 얼마 되지 아니하여 전화할 필요가 없을 듯 하여서 적이 궁금하였다. 수화기를 귀에 대면서도 우선 누 구인줄을 알고 싶었는데,

"김 선생님이세요?"

하는 소리가 여자의 목소리인 것을 들을 때는 더욱 이상하 였다. 급기야에 듣고 보니 그것은 한경의 전화로, 아까 찾아 갔을 때에 몸이 편치 못하여서 속히 돌아오노라고 실례하였 다는 말과, 이후로는 언제든지 찾아갈 터인데 구애되는 일 이 없겠느냔 말과, 밤이라도 관계가 없겠느냔 말이었다.

그리고 배울 것이 많이 있으니까 자주 찾아가야 되겠다는 의미의 말이었다. 창수는 물론 어느 때든지 찾아와도 좋다 는 것과 자기는 언제든지 별로 출입을 아니하고 혼자 조용 히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

전화를 받고 들어오는 창수는 조금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이후부터 자주 오겠다는말은 아까 다녀갈 때에도 한 말이 요, 또는 그러한 말쯤으로는 일부러 전화까지 할 것은 없는 일이요, 밤에 가도 관계가 없느냐는 말 같은 것은 여자로서 겨우 초면에 인사한 남자에게 대하여 하기는 삼갈 바인데, 그렇게 전화를 하는 것은 조금 이상한 듯하였으나, 하여간 자기가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여자로서 그만큼 자기에게 호 의를 가지는 것은 적지 아니하게 반가왔다. 창수는 다시 중 학생 시대에 여학생들로부터 열애 편지를 받은 것, 중매장 이가 드나들면서 자기의 인물 칭찬하던 일을 회상하였다.

창수는 이튿날 저녁에 성숙을 찾아갔다.

"어제 실례했네."

하는 말로부터 인사를 끝내자마자,

"그런데 자네는 남매간에 얼굴이라든지 모든 것이 비슷하 지도 아니하니 웬 일이야? 아마 자네 대부인(大夫人)이 젊어 서 무슨 딴 일이 있은 모양이지?"

하고 창수는 우선 자기가 의심하고 있는 한경의 정체를 알 기 위하여, 어색스러운 진정의 말을 될 수 있는 대로 피하 고 농담 비슷하게 물었다.

"에이 미친 사람아, 그게 무슨 소리인가?"

하는 성숙은 별로 다른 의미를 느끼지 아니하고 심상한 농 담으로만 알았다.

"아닐세, 자네 대부인이 온전하고서야 동기간에 그렇게 다 를 수가 있나. 자넨들 그렇게 변호할 무슨 증거야 있겠나?"

하고 창수는 더욱 젖혀서 성숙의 입에서 무슨 다른 말이 나올까를 기다린다.

"그런 말을 실없는 말이요. 한경이가 나의 친동생이 아닐세." 하고 성숙은 창수를 보고 웃는다.

"친동생이 아니라니, 그럼 무슨 동생이란 말인가?"

하고 창수는 자기의 의심하던 것이 맞은 것은 허락하면서 그 정체를 알고 싶었다.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시고 우리 아 버지가 후취를 얻으셨는데, 한경이는 우리 계모가 데리고 들어온 아일세. 그래, 그 애 성은 정가일세. 그러나 그 애가 세 살 적에 들어와서 우리 집에서 길러 내었는데, 인정이 들 뿐 아니라 아이가 영리하고 얌전하여서, 우리 아버지도 친딸같이 사랑하고 나도 친동생보다 오히려 더 사랑하네.

그래 그 애 성도 최가로 고치고 우리 집으로 입적을 시킬까 했더니, 우리 아버지가 너무 고지식한 어른이라 그럴 필요 가 없다고 말았는데, 저도 나중에 그런 줄을 알고서 우리 집으로 입적을 하겠다고 하지마는, 아버지가 듣지 아니하여 서 그만 두었지. 그런데 그 애의 출가시키는 것은 물론이지 마는, 어디까지라도 뒤를 보아 주려고 하네."

하고 성숙은 다시 얼굴빛을 고친다.

"아! 그런가? 어쩐지 모든 점으로 보아 동기간 같지를 아니 하데. 그러나 어려서부터 길러 내었으면 인정에 있어서는 친동생이나 다름이 없겠지."

하고 창수는 적지 아니하게 의심하던 일에 해혹하여서 시 원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런데 회사를 좀 하여야겠는데 자네 같이 가세."

하고 성숙을 본다.

"회사? 가려면 같이 가지마는 회사 아니하면 어떤가?"

하고 성숙은 자기 동생에 대한 일이니만큼 겸사의 말을 하 더니,

"그런데 가만히 있게. 전화를 하여 보고 가야지, 그 애가 학교를 다니는 외에는 개인 교수를 받으러 다니니까 여관에 붙어 있는 때가 적어서 그저 갔다가는 못 만나기가 쉬우니까." 하고 전화실로 가서 전화를 하고 오더니,

"조금 기다려야 하겠네. 여관으로 전화를 하니까 없다고 하 여서, 개인교수 받으러 다니는 데로 전화를 하니까 곧 여관 으로 돌아가서 전화를 하겠다고 하였네. 조금 기다리세."

하더니 다시,

"그런데, 자네 한경이를 보니까 어떤가?"

하고 딴 말을 꺼낸다.

"어떻기는 무엇이 어떻더냔 말인가."

하고 창수는 웃으면서 성숙을 본다.

"첫인상이 어떻더냐 말일세."

"첫인상은 무슨 첫인상? 인상이고 무엇이고 받을 사이가 있었나? 잠깐 보고 흩어졌는데……그리고 우리는 남을 처음 으로 대할 때에 경건하게 대할 뿐이요, 별로 유심히 보지를 아니하는 성미일세. 더구나 여성에게 대해서는 더욱 그렇지." 하여서 창수는 경경(輕輕)히 말하기를 피하였다.

"아! 이사람아, 인상이라는 것은 별 것인가. 누구든지 처음 으로 대하면 자연히 인상이 나타나는 것은 별 것인가. 누구 든지 처음으로 대하면 자연히 인상이 나타나는 것이지. 일 부러 인상을 받을래서 받는 것이 아니거든. 인상이라는 것 은 첫눈에 뜨이는 감상일세그려. 첫 번으로 사람을 대하면 눈에 보이는 대로 예쁘다든지, 밉다든지, 순탄해 보인다든 지, 까다로와 보인다든지, 재주 있어 보인다든지, 미련하여 보인다든지, 그런 것이 다 인상이지 별것인가. 그래 사람을 대할 때에 그러한 인상이 없단 말인가?"

하고 성숙은 조금 불쾌한 듯한 어조로 웃으면서 말을 한다. "이 사람아! 인상에 대한 철학을 그다지 천자 가르치듯 아 니한대도 그것쯤야 모르겠나마는, 별로 인상 줄 만한 무엇 이 없어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감각이 무디어서 그 렇다는 말일세. 그런데 기탄없이 말하자면 상당한 미인일세.

그렇고 퍽 영리하고 재주 있어 보이던데."

하고 창수는 처음 보는 처녀를 그의 오빠에게 대하여 미인 이니 영리하니 하는 말이 실례인 듯도 하고, 자기로서 미안 도 하여서 좀처럼 말하지 아니하려다가, 피차에 허물이 없 는 터에 그만한 말쯤이야 관계 없을 뿐 아니라, 성숙으로서 는 그러한 말을 들어 보려는 눈치인 듯하여서 비로소 말을 하였으나, 그래도 조금 혐의쩍은 듯하였다.

"어지간히 보았네. 그런데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나?"

"글쎄, 자세히 보지 않아서 그런지 그 밖에는 모르겠네."

"그렇지, 자네뿐 아니라 흔히들 그렇게 보네. 그렇지만 그 애에게는 숨은 덕이 있네. 인정미가 있고 얼굴이 미인이다 뿐이겠나. 그렇지만 알고 보면 마음씨가 얼굴보다 더 예쁘지. 그 애에게는 얼굴 보다도 재주보다도 그것이 더 장처(長 處)거든. 그러니까 그 애의 배필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말일세." 하면서 성숙은 탄식하듯이 말을 한다.

"성인이 나면 기린이 나고, 장사(狀士)가 나면 용마가 난다구. 그래도 하늘이 자네 누이동생일 낼 적에야 자네 매부감 도 내었겠지. 배필이 없을 수야 설마 있겠나."

하고 창수는 반은 조롱삼아서 말을 한다.

"아니 그렇게 한 말이 아니라, 적당한 사람을 구하기가 어 렵단 말일세. 하기야 조선의 일천만이나 되는 남자 중에 한 경의 배필 될 만한 자격이 없대서야 말이 되나. 또 내 동생 이 비교적 그렇다는 말이지, 무슨 출중한 인물이야 되겠나.

그런데 전일에도 그런 말을 한 번 한 일이 있지마는, 만일 자네가 지금까지 장가를 아니 갔다고 가정하면 말일세. 자 네가 아직 장가를 아니 간 터에 내가 한경이를 소개한다면 내 매부가 될 수 있겟나? 자네가 그 애를 대면하여 보았으 니 말일세."

하고 성숙은 창수를 본다.

"그게 인제 쓸데 있는 말인가?"

하는 창수는 성숙의 말이 쓸데없는 말인 줄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다지 듣기 싫지는 아니하였다.

"쓸데없기는 물론 쓸데없는 말이지마는, 나로서는 하도 애 석하게 생각하시 대문에, 기왕 대면하여 보았은즉 내가 소 개르 하였더라도 헛 노릇이나 아니 되었을까 하여서 묻는 말일세. 생각나는 대로 말이야 못할 것 무었있나?"

"하기야 그렇지. 말이야 못할 것 있겠나마는 나는 자네가 소개를 하였더라도 성사가 아니 되었으리라고 생각하는 바 이네."

"어찌 그런가?"

하고 성숙은 의심나는 눈으로 창수를 본다.

"그것은 내가 마음에 없어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자네 누이동생이 듣지를 아니하였을 거네."

"어쩐 말인가?"

하는 성숙은 창수의 말뜻을 대강 알아 들었다.

"나 같은 사람은 자네 누이동생에게는 한눈에도 차지 아니 할 것이네."

"자네가 못났다는 말인가. 내 동생의 눈이 높다는 말인가?"

"눈이 높고 낮은 것이야 지내 보지 않고서 어찌 잘 알겠나 마는, 여자가 그만큼 되면 우리 같은 사람은 명함도 못 들 이네."

"응, 어째서 그렇다는 말인다. 은휘하지 말고 본 대로 말을 해보게."

하고 성숙은 무슨 이상한 말이나 들을까 하고 창수의 앞으 로 다가와 앉는다.

"아니,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인물이 뛰어나고 학식이 그만한 여자로서 동경 같은 번화한 도회에서 문견이 늘었으니 여간 남자가 눈에 들겠나. 하니 까 하는 말일세."

성숙은 창수가 다른 이상한 점을 보고서 하는 말이 아니 라, 다만 한경의 모든 것을 지나치게 높이 보고서 하는 말 인 줄을 알고서는 만족한 듯이 껄껄 웃고서,

"그것은 자네가 잘못 보았네. 언뜻 보면 그렇게 볼 듯도 하지. 그렇지만 그와는 정반대일세. 그애 얼굴이 뛰어날 게야 무엇이 있겠나마는 하여간 보통 인물은 아니고, 제 학식이 그리 대단하겠냐마는 그래도 여자로서 그만큼 배우고 하였 으니까, 혹은 허영심이 있다든지 정도에 지나치게 눈이 높 아서 돈이나 지위 있는 사람을 고른다든지 할 듯도 하지마 는, 이 애는 절대로 그렇지 아니해. 그저 인물이 병신이나 아니고 믿을 만한 사내면 족하다고 생각하네. 그리고 자유 연애라는 것을 반대는 않지마는, 그것을 그다지 좋게 생각 하지 않는 모양일세. 그렇기에 자기의 결혼 문제는 전부 나 에게 맡긴다고 그러지. 그리고 어제 자네에게 다녀올 때에 슬그머니 자네에 대한 인상을 물어 보지 아니했는가. 그랬 더니 아주 인상이 퍽 좋은 줄로 말을 하데. 자네가 그렇게 본 것은 아주 잘못 본 것일세."

하고 다시 껄껄 웃는다.

"아! 그런가. 내게 대한 인상 말이야 딴판이지마는, 여자가 그만큼 되고 허영심이 없다면 그것은 보통이 아니고 세상에 드문 일일세. 여자가 그렇게 된다면 그야말로 이상적인걸."

하고 창수는 부러워하는 듯이 말보다도 기색으로 칭찬한다. "그러기에 나도 그 점을 더울 취하는 것일세. 사람이라는 것은 양의 바탕에 호랑이 껍질이 되면 못 쓰는 것일세. 그 런데 이 애는 비단보에다 양과자를 싼 것처럼 안팎이 구비 하지. 그런데 겉보다 속이 오히려 낫지. 인제 자네가 차차 지내 보면 알 것인데."

하고 입에 침이 없이 칭찬하고 앉았는 성숙은, 마치 다녀 간 이력이 난 늙은 중매장이처럼 말하는 태도가 정도를 지 나쳐서, 친구를 대하여 자기의 여동생을 말하는 남자의 수 작으론 점잖지 못한 편이었으나, 창수는 그러한 것을 분별 할 사이도 없이 성숙의 말과 말을 모두 통으로 삼켜 버렸다. 그들의 말이 끝나지 아니하였는데, 한경에게서 자기 여관 으로 오라는 전화가 왔다. 한경의 여관은 성숙의 여관이나 창수의 여관이나 다 같은 신전구(神田區)에 있어서 거리가 얼마 멀지 아니하였다. 창수와 성숙이 한경의 여관에까지 오기에는 십 분밖에 아니 되었다. 한경의 여관은 보통 학생 들의 하숙하는 집이 아니고 상당한 고등 여관으로 회관부터 화려하였다.

현관까지 나와서 맞아 주는 한경의 인사와 인도하는 방식 은 흐르는 듯한 일본식의 그것으로 아주 능란하였다. 한경 이 거처하는 방은 한편에 조금 떨어져 있는 조용하고 정쇄 한 팔조(八?) 방이었다. 방에 들어서자 눈에 뜨이는 모든 것 은 심상치 아니하였다. 우선 들어가는 문편의 한쪽으로 중 형(中型)의 피아노가 있고, 그 옆에 이층의 책장이 있는데 책장에 가득히 채워진 책은 전부가 양장으로, 책의 대소와 빛깔을 따라서 분류하여 정제하게 세웠는데, 밖에서 보기만 으로도 상당히 아름다웠다. 그 책들은 대부분이 음악과 예 술에 관한 책으로 값으로도 상당한 것이요, 영문 서적도 섞 이었으며, 그 옆에는 양복장이 있고 고급의 라디오와 유성 기가 있고, 화장구로도 상당한 고급품들을 놓았고, 두어 분 의 화초도 그럴 듯이 놓여 있어서 어느 점으로 보든지 학생 생활로서 호화한 생활이었다.

"김 선생님이 이런 누지(陋地)에 왕림하시니 감사하다고 하 느니보다 도리어 죄송합니다."

하는 한경의 인사는 스스러운 것을 떠나서 친숙한 태도로 허물 없는 편에 가까웠다.

"어제는 실례를 많이 하였습니다. 오늘 회사를 온다고 온 것이 공부하시는 시간을 방해하게 되어서 미안합니다."

하고 창수는 방 안 치장을 돌아보다가 갑자기 몸을 바꾸면 서 말하였다.

"천만에, 공부라는 것은 칠판 밑에서만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선생님 같으신 분을 모시고 놀면 일언일동이 다 배울 것인데요, 공부에 방해라는 것이 될 말씀이어요?"

하는 한고비를 넘어가는 이론을 졸지에 대답하기는 창수로 서는 조금 벅찼다.

"저 같은 사람에게는 비유가 안 되지요마는, 혹은 상당한 인물을 접촉하면 언어 행동에서 다소 배울 것이 있을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들으니까, 음악과 예술을 공부하신다는데 그런 것이야 사람을 접촉하는 것만으로써 배울 수가 있습니까?" 하는 말로 겨우 앞을 가렸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술일수록 선생에게서 기계적으로만 배 우면 안 되는 것입니다. 큰 예술은 자연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만일 선생이 가르치는 대로만 배우고 만다면, 누구라도 제자가 선생보다 나을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처음에는 선 생에게서 규칙적으로 배운다 할지라도, 예술의 묘경에 이르 러서는 스스로 얻어야 되는 것인데, 스스로 얻는다는 것은 곧 자연에서 배워서 마음으로 얻는 것이겠지요. 사람이라는 것은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기묘한 예술품입니다. 대예술 가는 한 풀이나 한 나무에서도, 새소리나 꽃 그림자에서도 무한한 예술의 진경을 볼 수가 있는데, 하물며 구비하지 아 니한 것이 없으면서도 지정지묘(至精至妙)하게 된 사람에게 서이겠습니까. 저는 만일 예술가가 되는 날이 있다면 구구 하게 남의 발자취만을 따라가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하고 얼굴빛을 고치며 자부하는 듯하는 기색을 띠는 한경 의 말에, 창수는 자세히 이해하기도 어려운 구절이 있어서 대답이 곤란하였다. 창수는 조금 주저하다가,

"참 그렇습니다. 말씀부터 대예술가의 소질이 있는 말씀입 니다. 뉴유튼이 능금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인력(引力)을 발견 하고, 와트가 차관에 물 끓은 것을 보고 증기 기관을 발명 한 것이나 마찬가지겠지요.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조용히 연구를 하여야 될 터인데, 이렇게 손이 찾아와서 수선을 떨 며는 안 되겠지요."

하여서 한경의 말을 어수룩하게 좇아 주는 듯하면서 마침 내 자기의 처음 주장을 세웠다.

"선생님, 처음으로 한 번 오셔서 저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니까, 이 다음 좀처럼 오시지 아니할 뿐 아니라, 만일 제 가 자주 뵈오려 간다면 공부에 방해되신다고 대단히 불편해 하시겠네."

하고 한경은 창수를 흘금 보고서 다시 성숙을 본다.

"나는 쓸데없이 체면 차리는 말을 하는 것 재미 없어. 서로 찾을 만한 사람이면 얼마든지 찾을 것이지, 공부에 방해 되 느니,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였느니, 그러한 야틈야틈한 말 따위는 그만 두었으면 좋을 거다. 우리는 사람이 털털해서 그런지, 마음에 맞는 사람이면 하루에 몇 번이라도 찾아가 고 또 몇 번 오더라도 반갑고 그러하더라. 그거야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면 일 년에 한 번도 찾아가기가 싫은 것 이고, 이따금 찾아와도 눈살이 찌푸려지지마는, 마음에 맞기 만 하면 자주 오기는 고사하고 밤낮 같이 있어도 좋지."

하고 성숙은 다시 한경을 보면서,

"그런 이론은 그만 두고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대접할 것 이나 내 놓아라. 손님 덕에 나도 좀 얻어먹게."

한다.

"글쎄요. 김 선생님, 무엇이든지 대접을 해야 할텐데, 대접 할 것이 있어야지."

하고 한경이 오른손으로 무릎을 짚고 일어서려고 할 즈음 에, 문 밖에서 한경을 찾는 여관 하녀의 소리가 난다. 대답 을 열기 있게 하고 나가는 한경은 조금 있다가 술상을 가지 고 들어오다가,

"무엇 대접할 것이 있어야지. 청요리를 몇 접시 시켜 왔는 데 김 선생님이 청요리를 좋아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오빠가 좋아하시기에 좀 시켜 왔는데."

하고 술상을 내려 놓더니,

"김 선생님, 청요리 잡수실 줄 아세요?"

하고 창수를 보고 웃는다.

"예, 먹는 격식은 모릅니다마는 먹기는 남의 두 몫을 먹습 니다."

하고 창수는 술상을 들여다보면서 침을 삼키는 시늉을 한다. "이것, 미리 준비를 하였구나, 차린 것을 보니까."

하고 성숙은 술상을 둘러 보더니 한경을 향하여 웃는다.

"준비가 무슨 준비에요. 갑자기 시켰더니 아무것도 없군요.

준비를 하였으면 설마 이렇게만 하였을라구요."

하고 한경은 미리 준비하지 아니하였다는 기색을 보이기 위하여, 시침을 떼는 듯이 하면서 성숙을 흘겨 보는 듯이 웃는다.

창수는 혼자 빙긋이 웃었다. 청요리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만들어 두었다가 청구만 하면 곧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청 구를 받은 뒤에 임시임시로 만드는 것이어서, 그 사이에 가 져올 수 없는 일이요. 더구나 해삼탕이나 도미찜 같은 것은 특별히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어서, 미리 청구한 것이 아니 고서는 그렇게 쉽사리 가져올 수가 없는 것이어서, 미리 준 비하였던 형적이 완연한 일인데, 한경이 시침을 부려 가면 서 준비한 것이 아니라고 무슨 잘못된 일을 발명하듯이 발 명하는 것은, 그다지 큰 거짓말이 아니라 할지라도, 처음 보 는 사람에게는 정직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줌직하였다. 그러 나 창수는 생각 할 때에, 여자로서 그만한 거짓말쯤이야 하 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뿐 아니라, 도리어 너무 빡빡하 지 아니하고 얼락녹을락 하는 교제적 곡선미라고 생각하여 서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그런데 안주만 있고 술이 없으니 웬 일이냐? 술은 따로 가져오려고 그러니?"

하는 성숙의 말에 잊었던 것을 깨우친 듯이,

"아이 참."

하고 한경은 양복장 뒤에서 위스키 두 병을 꺼내 놓으면 서,

"이것을 잡수세요. 제가 신경 쇠약으로 고생한다는 말을 듣 고서, 어느 분이 위스키와 포도주를 두 병씩 보냈겠지요. 그 런데 내가 술을 먹을 줄 알아야지요. 그래 이때까지 두었더 니 오늘 유용히 쓰이는군요."

하고 마개를 빼어서 조그마한 유리 컵에 두 잔을 따른다.

한경을 심상치 보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뜯어 보려는 창 수는, 그 술에 대하여 심상히 생각하지 아니하였다. 한경은 열팔구 세의 처녀로서 술을 먹을 줄 모르는 것은 사실이겠 으나, 그에게 술을 보내는 사람이라면 그의 술을 먹고 술을 안 먹는 것을 모르고 보낼 리도 없는 일이요, 술이라는 것 이 신경 쇠약에 이로운 것도 아닌데, 남의 병(病)에 약이나 거기에 마땅한 다른 음식을 보낸다는 것은 모르되, 이롭지 도 아니한 술을 보냈다는 것이 의문이요, 한경의 말에 어느 분이 보냈다는 것을 들으면, 한경의 같은 동무가 보낸 것도 아닌 듯하였다. 만일 같은 여자 동무가 보낸 것이라면 반드 시 어느 동무라고 할 터인데, 어느 분이라고 하는 것을 보 면, 여자라면 노성한 여자요 그렇지 아니하면 남자를 가리 키는 말인데, 모르면 모르되 노성한 여자는 어리다고 할 말 한 여학생에게 먹을 줄 모르는 술을 보낼 것 같지 아니하 고, 반드시 어느 남자가 보낸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창수는 자기도 모르게 공연히 불쾌하였다.

"우리끼리만 먹어서 안 되겠어요, 같이 잡수셔야지."

하는 창수의 말에,

"천만에, 어디 제가 술을 먹나요."

하고 한경은 다시,

"그럼 저는 술 먹는 대신으로 약이나 먹겠습니다. 그런데 이 약은 포도주에다가 먹는 약이래요. 그래서 포도주를 조 금 먹게 될 터이니까 이것도 손님 대접으로 술을 먹는 셈이 되겠지요."

하고 양복장 근처로 가더니 돌아앉아서 무엇을 꺼낸다.

창수는 성숙이 먼저 술잔을 들고 앉아서 술을 먹으라고 권 하는 것도,

"가만 있어, 같이 먹어야지."

하고 한경이 포도주를 가지고 술자리로 오려니 하고 기다 리고 있었으나, 한경은 돌아앉은 채로 무슨 약을 먹는지 포 도주를 얼마나 마시는지, 먹고 남은 약봉지와 술병을 다시 간직한 뒤에 돌아앉으면서,

"저는 약 먹는 시간이 있어서 먼저 먹었습니다. 용서하세요." 하더니, 다시,

"어서들 드시지요."

하고 술을 권한다. 같은 값이면 포도주를 다만 한 잔이나 반잔을 먹더라도 술자리로 가지고 와서 같이 먹으려니 하고 기다리고 있던 창수는 거의 어이가 없었고, 또는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또 이상한 일은 전일에 없던 한경이 자기를 찾 아왔을 때에도 그러한 광경을 보았거니와, 도화색이 되고 화기가 있던 한경의 얼굴이 서로 수작하는 사이에 차차 화 기가 없어지고 얼굴빛이 노르끄무레한 것을 보았는데, 약을 먹는다고 무엇을 먹고 난 뒤에는 금시에 얼굴빛이 회복되고 기분이 명랑하여지는 듯한 것을 발견할 때에, 신경 쇠약의 작용도 이상하지마는 약의 효력도 신기하다고 생각되었다.

창수는 술을 한 잔 마시고 나서 젓가락으로 안주를 집으려 고 하면서,

"그런데……."

하더니 안주를 입에 넣고 씹으면서,

"신경 쇠약이라는 병이 병도 이상한 병이지만, 잡수시는 약 이 무슨 약인지 약도 신효하군요. 약효가 아주 금시 발복이 로군요."

하고 한경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렇답니다."

하고 허두를 내는 한경은 다시 술을 한 잔씩 따르더니,

"신경 쇠약이라도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데 저의 신 경 쇠약은 독일서 온 병인지, 블란서서 온 병인지, 이상하여 서 꾀병 같기도 하고, 무슨 사증(邪症)들린 것처럼 아무렇지 도 아니하다가, 금방에 정신이 흐리터분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안색이 변해지고 그렇답시다."

하더니 창수를 보고 손을 젖혀서 술잔을 가리키면서,

"어서 드세요, 약주를 잡숴 가며 말씀을 들으세요."

하고 성숙은 먼저 한 잔을 들이켜더니,

"나는 다 아는 일이니까 별로 들을 재미가 없지마는, 처음 듣는 사람은 들을 만하니, 이 애 병은 공부를 너무 많이 하 다가 난 병이니까 그런지, 병도 문명식으로 앓는 모양이야."

하더니 다시 한경을 보면서,

"그런데 의사의 말에 약도 약이려니와 약보다도 얼마 동안 공부를 쉬고 여행을 하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전지 요양(轉 地療養)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더라."

하면서 혼자 눈을 끔찍하는 듯하더니 입을 실룩한다. 그리 고 술을 한 잔 손수 따라 들면서,

"나는 술이나 먹어야겠네. 자네도 술이나 먹어 가면서 듣는 것이 훨씬 좋을걸."

하고 술을 마신다.

"나도 먹지. 그러나 술도 술이거니와 얘기 듣는 것이 더 재 미있네."

하고 술을 마시는 창수는 한경을 보면서,

"그래 얘기를 하세요."

한다.

한경은 눈을 깜박깜박하면서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런데 저의 병이 그렇게 이상야릇한 듯하지마는, 실로는 하잘것없는 병이에요. 이 병은 앓으라면 앓고 말라면 마는 병이에요. 약도 그렇지요. 약이 신효한 것이 아니라 먹기를 신효하게 먹거든요. 이런 말씀을 들으시면 웃으시겠지마는 들어 보세요."

하고 웃더니 다시 술을 따른다.

"아! 참 말씀하시기 전에 화제만 들어도 흥미 백 퍼센트인 데요, 어서 말씀하세요. 앓으려면 앓고 말라면 마는 병이라 면 병이 이상하거니와, 그보다도 병을 앓으시는 분이 더 용 하시고, 약도 효력이 나게 먹으려면 먹고, 아니 나게 먹으려 면 아니 나게 먹는 약이라면, 약도 이상하거니와 약을 잡수 시는 사람이 더욱 기이하군요. 어디 말씀하세요."

하고 창수는 무슨 요술쟁이의 말을 들으려는 것처럼 정신 을 모으고 눈을 대어서 한경을 향한다.

웃는 입을 손으로 가리고 흐르는 눈으로 창수의 눈을 슬쩍 보는 한경은,

"말씀할까요."

하고 계속 하여 말을 하려 할 즈음에,

"최 성숙 선생님 계세요?"

하는 하녀의 소리가 문 밖에서 나더니,

"예, 여기 있어요. 왜 그래요?"

하는 성숙의 대답을 듣고서는 다시,

"전화 왔어요."

한다.

"전화?"

하고 성숙은 창수를 향하여,

"잠깐 실례하겠네."

하고 밖으로 나간다. 두 사람은 잠잠하였다. 전화를 하고 돌아오는 성숙은 문 밖에서부터,

"아! 이거 안 되었는데."

하고 들어오더니,

"나는 좀 가봐야 되겠는데 자네는 앉아 놀게."

하고 창수를 본다.

"왜 무슨 급한 일이 있나?"

하는 창수의 말에,

"이 사람 자네 때문에 오늘 실신이 적잖게 되었네. 오늘이 조선 유학생 친목회 간사회인데, 어저께 통지를 받고 시간 에 간다는 것이 자네 때문에 여기를 오느라고 잊어버렸네그려. 어지간한 일 같으면 무어라고 핑계를 하든지 사피를 하 고 아니 가겠지만, 이것은 내가 아니 가면 회가 아니 될 터 이니까 아니 갈 수가 있나. 조금 미안하지마는 용서하게."

하고 벗어 놓았던 외투를 입는다.

"그럼 나도 같이 가지."

하고 일어나려는 창수를,

"아닐세, 앉아 놀게."

하고 성숙은 외투를 입다가 만 채로 창수를 붙들어서 앉히 고, 외투 소매 하나를 마저 꿰더니,

"그럴 것이 있나 앉아 놀게, 무슨 허물 있나. 그리고 나도 가보아서 어지간하면 말이나 몇 마디 이르고 도로 오겠네.

같이 가다니 될 말인가. 그리고 우선 한경이 병 이야기 좀 들어보게 재미있는 말이 많이 있을 테니."

하자,

"김 선생님은 왜 가신다고 그러세요? 오빠는 말씀을 들으 니까 아니 가실 수가 없지만, 김 선생님은 가시지 마세요.

약주도 잡수시다 마시고 변변찮은 이야기지만 말씀도 듣다 마시고…… 김 선생님은 더 놀다 가세요."

하고 한경은 다시 성숙을 향하여,

"오빠도 곧 다녀오세요. 김 선생님 혼자 심심하신데…… 그 리고 간사회에 무슨 그리 대단한 일이 있어요. 유학생회라 고 껄렁한걸."

한다.

"껄렁이 왜 껄렁이야? 지금 잘만 되어 나간다. 너는 유학생 회원 아니냐, 남의 말하듯 하게."

하는 성숙의 대답에,

"나도 회원이니까 말이지, 잘은 무엇이 잘 되어. 모이면 쓸 데없는 이론만 캐어쌓고 실제로 무슨 일이 되어 나가야지.

나는 인제 회에도 참례 아니할 터이니, 꼴보기 싫어서. 회할 때 가보면 회하는 데는 정신이 없고서 여학생들 얼굴만 쳐 다보느라고, 망할 녀석들…… 하여간 곧 다녀오세요."

하는 한경은 성숙에게 흘기는 듯하는 눈을 돌리는 길에 창 수를 보고 웃는다.

성숙이 간 뒤에 두 사람은 새삼스럽게 스스러운 듯도 하 고, 체면을 차리는 듯도 하여서 앉음앉음도 다정히 하고 얼 굴빛도 고쳤다. 한경은 한편 무릎을 세우고 무릎 위에 깍지 낀 두 손의 손가락으로 턱을 만지면서, 가늘게 뜬 눈으로 방의 한 구석을 뚫어지라는 듯이 바라본다. 마치 잘 보이지 않는 작은 벌레가 기어가는 것을 잡으려고 보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무슨 생각에 골몰하여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무심히 무엇을 바라보는 듯도 하였다.

"에구, 내가 무엇을 생각하였을까?"

하고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조금 놀라는 듯이 고개를 돌 려 창수를 보면서 웃더니,

"이야기 좀 하세요."

하고 술을 따라서 창수의 앞에 놓는다. 한경의 시선이 자 기의 눈과 마주치지 않는 틈을 타서, 한경의 모든 것을 온 전히 보면서 그의 아름다운 것을 마음껏 칭찬하고 있던 창 수는, 한경의 명랑한 그러나 애교 있는 말에 다소 신경을 빼앗기는 듯하면서,

"이야기는 하시던 이야기를 마저 하셔야지요. 저는 이야기 를 할 줄도 모르거니와, 할 말이 있더라도 재미있는 얘기를 들은 뒤에 나중에 하겠습니다."

하고 술을 들어 마시는 동안에 눈으로는 한경을 본다.

"그럼 하던 말씀을 마저 할까요."

하고 작은 웃음이 떨어질 듯하는 입술을 움직이면서 목소 리를 가다듬는 즈음에,

"그런데 말씀의 허두만 들어도 그 이야기가 재미있고도 이 치가 심원(深遠)할 듯한데요. 말씀을 학리적으로 어렵게 하 시지 마시고 아무쪼록 우리 같은 사람도 알아들을 만큼 통 속적으로 쉽게 해 주세요. 말씀하시기 전에 희망합니다."

하고 웃는 창수는 될 수 있는 대로 자기의 움직이고 있는 신경줄의 한 끝을 한경과 머리카락이라도 걸어 보려고 하였다. "에구 선생님두."

하고 간간이 웃는 한경은 웃음을 다그치지 아니한 채로,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제가 언제 문자나 술어를 써가며 학술적으로 한 말이 무어 있어요? 저는 문자나 술어를 써가 며, 말할 줄도 모르지마는, 평생에 말할 때에 되잖게 문자나 술어 푼어치를 써가며 말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런 술어를 써가며 말을 한들 선생님 못 알아 들으실 말이 어디 있어요. 저는 입을 봉하고 말을 아니할 테에요."

하고 애교가 사라지지 아니한 그대로의 눈으로 흘기는 듯 이 창수를 보다가,

"선생님두 사람을 놀리시기는."

하고 성을 내는 듯이 눈을 아래로 감는 듯하다가 다시 눈 을 들어서 창수의 기색을 살펴본다. 그러나 한경은 웃으면 서 애교 있는 눈으로 창수를 볼 때보다 성내는 듯한 눈으로 창수를 흘겨 보는 때에는, 가만한 정의 실마리를 뭉텅이째 던져주는 듯하였다.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할 것이 아닙니다. 우선 말씀하려는 화제부터가 어렵지 않습니까. 앓으려면 앓고 말려면 마는 병이라든지, 효력이 나게 먹으려면 먹고, 안 나게 먹으려면 먹는 약이라든지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거든요. 아마 고차방정식(高次方程式) 풀기보다 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 니까 그러한 화제를 해석하려면 학리적 논리가 아니고서야 되겠습니까? 하니까 토대 지식이 부족한 저로는 그만한 부 탁을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니어요. 하니깐 말씀한 것이 지 다른 뜻이 아닙니다. 놀리다니 천만에.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하여간 이야기나 하십시오."

하고 창수는 웃으면서 미안한 듯한 표정을 보인다.

"에구, 선생님이 정말 어려운 학술적 술어를 쓰시네요. 고 차방정식이니 무어니 하시고. 그런데 고차방정식이라는 말 씀이 무슨 말씀이에요. 우선 그 뜻부터 말씀해 주세요."

하고 한경은 당장에 오금을 박는 듯이 눈을 창수의 얼굴에 서 옮기지 아니하고 말을 한다.

"글쎄요. 그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씀만 하다가는 정작 들을 말씀은 못 듣기 쉽겠습니다. 말씀하시 지요."

하는 창수는 그 사이의 오고 가는 말이 너무 농담적으로 되었다는 듯이 얼굴빛을 조금 고친다.

"말씀한대야 별로 신기한 말씀은 아닙니다. 그런데 본 문제 를 말씀하기 전에 저의 성격을 먼저 말씀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의 성격은 평탄하지를 못하고 이상하여요. 너무 야멸 차서 그런 모양이지요. 무슨 일이든지 하려면 아주 몸을 붙 여서 하고, 아니하려면 당초에 손을 대지 않는 성미에요. 남 처럼 하다 말고 그러지를 못하는 성미에요. 그래 저는 약 같은 데도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간 병이 나도 약을 잘 먹지 않는 성미인데, 어쩌다가 약을 먹게 되면 그 약이야 좋든지 나쁘든지 신념(信念)을 가지고 먹지요. 의사 가 토끼똥을 갖다 주고 이것이 약이니 먹으라고 한 대도, 먹으러 들면 꼭 이 약을 먹으면 낫느니라 하고 먹습니다.

그래 그런지는 모르되, 남들은 효력을 못 본 약이라도 나는 먹으면 효력을 보게 되거든요. 만사가 다 그러하지마는 약 도 신념이 없이 먹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에요. 의사들도 그런 말을 한다는데요, 약을 먹으려면 첫째 조건이 신념이 라고. 같은 약이라도 믿고 먹는 것과 밎디 않고 먹는 것이 판연히 다르답니다. 그러기에 요사이에 심령 치료(心靈治療) 니 최면술이니 하는 것이 있지 않아요? 그런 것이 다 심리 작용을 응용하는 것이어서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시술(施術) 이 되지 않는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것을 이용하려고 억 지로 신념을 내는 것이 아니라 천품이 그렇게 되었다는 말 씀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지 하려면 아주 전신 돌입을 한답니다. 그런 것이 신사에 해롭지요, 선생님?"

하고 한경은 말을 중지하고 창수를 본다.

"아닙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그래야 쓰는 것이지, 미지근하 니 할락말락해서야 되겠어요."

창수는 한경의 말을 찬성한다.

"그럼 선생님도 그런 성미를 좋아하시는 게로구면."

하는 한경의 말에,

"그런 성미를 나쁘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어요. 저는 실행 치는 못하더라도 다 찬성할 일이지요."

하고 창수는 힘있게 말한다.

"그럴까요?"

하고 조금 진정하는 한경은 다시 하던 말을 계속한다.

"그렇기에 저는 그 성격을 가지고 만일 연애를 하게 된다 면 큰일나겠어요."

여기까지 말을 한 한경은 갑자기 얼굴빛이 조금 붉어지는 듯하며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옷자락을 다듬거리면서,

"에구, 내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이 말이 나왔어. 망측스러 워라, 꿈꾸는 것처럼 말이 나왔네."

하고 혼잣말처럼 하는 한경은 다시 말머리를 돌려서

"그런데 약이라는 것이 말이에요, 신념이 있이 먹어야 된다 는 말씀이에요."

하고 다른 말을 하려 하는 즈음에,

"아닙니다. 하시던 말씀을 끝을 내야지요. 연애를 하게 되 면 어떻다는 말씀이에요. 큰일이 난다니 무슨 큰일이 난다 는 말씀이에요?"

하고 창수는 인제야 재미있는 말을 들을 수가 있다는 듯이 젖혔다.

"아니에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연애라고 하였나? 연, 저 옳아, 연예(演藝)라는 말을 하려다가 말이 빗나가서 연애 라고 되었어요. 연예나, 연애나 비슷하잖아요. 제가 만일 그 러한 성격을 가지고 연예를 하였더면 말이어요. 다시 말하 면 배우가 되었으면 거기에 골몰하여서 아무것도 못하게 되 리라는 말씀이어요. 에구, 참 이상해라. 말이 왜 헛나갈까?"

하는 한경은 깜짝거리는 눈으로 창수를 보면서 자기 스스 로도 어이가 없는 듯이 앙그러지지 아니한 웃음을 웃는다.

"여자들의 임시로 꾸며 대는 재주라는 것은 자고로 유명하 거든. 그러렸다, 연예나 연애나 어음(語音)이 비슷하니까. 그 리고 연예라고 한 대도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거든. 그럼 그 말씀은 그렇게 잘못되었다고 치고서요, 만일 연애를 하 신다면 그 성격을 가지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것은 가정 으로 하는 말씀입니다. 요새 군비 확장(軍備擴張)에는 가상 적(假想敵)이 있다듯이, 만일 한경씨가 가상 애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고 창수는 한경을 보다가 다시 자기 앞에 있는 술잔을 본다.

"에구, 참 술쳐 드리기도 잊어버리고 잔소리만 하고 앉았네." 하고한경은 술을 한 잔 부은 뒤에 술병이 많이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서 병을 들어 창문 쪽으로 대고, 술이 얼마나 남 았나를 보더니, 다른 한 병을 끌어서 가까이 놓고 한손으로 병마개를 누르면서,

"선생님두 참, 왜 꾸며 댄다고 하세요? 제가 거짓말장인줄 아세요. 저는 그 말을 그만둘 테에요. 저는 가상 애인도 없 어요. 그러니까 연애에 대한 말은 할 줄 몰라요."

하고 흘기는 듯한 눈으로 창수의 입까지만 보고 도로 내리 떠서 창수의 눈을 보지 않는다. 창수는 술을 마시고 안주를 집어든 채로,

"그러면 꾸며 대었다는 말씀은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나 가 상 애인도 없다는 말씀은 수사학(修辭學)을 모르는 저로는 이해하기가 곤란합니다. 가상이라는 것은 없는 것을 가정한 다는 말씁이 아닙니까? 그러면 누구라도 가상 애인이 없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물론 지금 조선의 남자로서 한경씨의 애인이 될 만한 자격이 없을 것은 사실이겠지요. 그러면 한 경씨에게 진정한 애인이 없을 것은 말씀하지 않는대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만 말이에요. 진정한 애 인은 없지마는, 가령 애인 될 만한 자격이 있다고 가정하면, 그러한 성격으로 어떻게 연애를 하겠느냔 말씀인즉, 그 말 씀이야 못하실 것이 무엇이어요. 아무리 들을 줄을 모르는 저라도 그런 말씀은 분간하여 들을 줄을 모르는 저라도 그 런 말씀은 분간하여 들을 수가 있겠는데."

하고 들었던 안주를 입에 넣는다.

귀를 기울이고 눈을 깜박거리면서 정신을 차려서 듣는 듯 이 앉았던 한경은 몸을 조금 흔들면서,

"인제 저는 이 말이고 저 말이고 아무 말도 안할 테에요, 선생님하고 말을 하다가는 나중에 바보가 되고 말 터이니.

사람이 왜 공연히 병신 구실을 하여요? 저는 인제 벙어리가 될 테에요."

하고 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두 손으로 힘있게 누르는 시늉 을 한다.

"단 둘이 앉아서 하나가 말을 아니 하면 하나는 저절로 벙 어리가 되겠어. 그러면 나도 피동적으로 말하는 벙어리가 되느니보다 차라리 자동적으로 말 않는 벙어리가 돼야지."

하고 창수는 안주 씹는 것을 멈추고 입을 오므리고 성낸 사람처럼 가만히 앉는 다. 찰나의 광경, 시끄러운 침묵이요 고요한 살풍경이었다. 입과 입은 움직이지 아니하였지마는 마음과 마음은 고요하지 못하였다.

웃음을 참다 다 못 참는 한경의 입은 「픽」하고 터지면 서, 고개를 숙인 채로 얼마를 웃더니,

"에구 선생님두, 선생님 고리 대금을 하셨으면 부자가 되시 겠네요. 사람을 그렇게 졸라대시는 것을 보니까."

하고 창수를 본다. 창수는 여전히 입을 오므린 채로 가만 히 앉았다. 한경은 말이 없이 술을 따라서 창수의 앞에 놓 고서,

"선생님, 이야기 대신 노래나 하나 하겠습니다."

하고 일어서서 피아노 앞으로 가더니,

"사랑이 물 같으면 백두산도 잠기려니, 사랑이 불 같으면 한강수도 말리려니, 사랑의 앞에는 죽음도 없어요. 사랑의 뒤에는 목숨도 없어요. 사랑에 병든 어린 몸이 오니 묻지 말아 주세요. 인간 만사 허다한 중에 사랑만은 묻지 말아 주세요."

하는 노래를 피아노와 반주하는데 소리는 가느나 힘이 있 고, 곡조는 짧으나 억양이 많았다. 창수는 한경의 돌연히 하 는 태도라든지 노래의 사연에 대하여 생각건대, 홀연히 꿈 속에 헤엄치면서 황홀한 지경을 헤매는 것처럼 자기 스스로 를 잊어버릴 만큼 희미하였다. 창수는 물론 음악에 대해서 는 조금도 상식이 없었다. 그리하여 한경의 노래가 잘 되었 는지, 피아노가 못 되었는지 그것은 알 수가 없을 뿐 아니 라, 알고자 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말하기도 수줍어하고 사피하려고 하던 것을 어찌하여 돌연히 노래를 부르는 바 에, 그 사연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너무도 당돌하고 뜻 밖이어서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창수는 자기 의 힘으로 한경이 모든 것을 판단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의심하기조차 어려웠다. 혹은 한경이 천사같이 보이다가 홀 연히 마귀같이도 생각되고, 혹은 요술쟁이같이 생각되다가 홀연히 예술의 여왕같이 보였다.

저녁해는 둘려 있는 붉은 놀이 서쪽 창을 지음쳐서 한경의 방을 비춰 주는 것이 흡사히 예술의 무대를 장식한 네온사 인의 그것처럼 한 빛이 아니었다. 그 가운데 비쳐지는 한경 의 얼굴은 진홍색으로, 분홍색으로, 자금색으로, 감청색으로, 다시 진홍색으로 변하였다. 이렇게 변하는 빛은 각각 그 빛 이 아름다움이 있어서 헤아릴 수가 없었다. 마치 옛 이야기 에서 들을 수 있는 옥황상제의 시녀가 꽃밭에서 물을 잘못 주다가 득죄하여서 인간에 귀양 오는 길에, 잠시 동경에 들 러서 음악가로 분장한 듯이 생각했다. 창수는 여성을 대하 는 경우에 이만큼 황홀을 느껴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리하 여 세상에 남자로 태어나서는 천하를 희생하더라도 저러한 여자를 사랑해 보지 못한다면, 세상의 재산이니 명예니 지 위니 하는 등의 모든 행복이라는 것이 다 그림자 같고 메아 리 같고 티끌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꾀꼬리의 그것과 같은 노랫소리는 그쳤으나 앵두 같은 그 의 입술은 아직 움직이고, 다 하지 아니한 피아노의 남은 메아리가 그치기 전에, 높고 낮은 것을 따라서 움직이던 삘 기 같은 그의 손가락은 멈췄다. 교의에서 고요히 일어나서 창수에게 읍하고,

"실례하였습니다, 용서하세요."

하는 한경은 창수의 눈에서 아까의 한경과는 아주 딴판으 로 다른 듯하였다. 얼굴은 어찌 그렇게 예쁘며, 태도는 어찌 그렇게 아름다울 뿐 아니라 꺾고자 하여도 감히 꺾을 수 없 는 꽃인 듯하였다.

"아! 참 짧은 노래에서 긴 말을 들었습니다."

하고 창수는 탄식하듯이 말하였다.

한경의 여관에서 돌아오는 창수는 전신이 허정거리고 걸음 은 제자리에 놓이지 않는 듯아였다. 거리를 비추는 전등들 은 한경의 눈곱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빛인 듯도 하고, 라 디오에서 보내는 연예 방송은 한경의 재채기 소리 같기도 하였다. 창수는 여관에 돌아오자마자,

"편지 왔어요."

하고 여관 하녀가 들이는 경순의 편지를 받았다. 창수는 동경에 온 뒤에 본집의 편지를 받기는 처음이요, 게다가 사 랑하는 아내의 편지이니만큼 얼마나 반갑고 기쁠는지 모를 것인데, 어쩐지 그다지 반가운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창수 는 그 편지의 봉투 글씨가 경순의 손으로 쓴 것이 아니오 창옥이 대신 써 준 것을 볼 때에,

"아무리 여자라도 편지 피봉 하나를 쓸 줄 몰라서야."

하는 생각으로 우선 불쾌하였다.

"이 속에 있는 사연이 무슨 그리 재미있는 말이 있을꼬."

하고 계속하여 생각할 때에 별로 속히 떼어 보고 싶은 흥 미가 없었다. 창수는 손에 들었던 편지를 손가락으로 퉁겨 서 방바닥에 던지고, 두 무릎을 세운 채 팔짱을 끼고 앉아 서 천장을 쳐다보다가, 다시 마지못하는 듯이 편지를 떼어 보았다. 창수는 편지를 읽을 때에 자기 집 안부라든지 다른 사연이 있을까를 보려고 하느니보다, 먼저 사연 만든 것의 잘 되고 못 된 것을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연은 창수가 짐작하던 바와 같이 구식스럽고 평범하였다. 편지라는 것은 꽃을 그리려다가 잎새의 시늉도 내지 못한 것처럼 의미는 있는 듯하나 도무지 말이 오밀조밀하고 앙그러지지를 못하 여서 사랑의 편지로는 아무 재미가 없었다. 그러나 고추장 과 배추김치를 보낸다는 말에는 반가왔다. 창수는 술을 좋 아하는 사람으로 식성이 맵고 얼근한 것을 좋아하는 터인 데, 동경에 와서는 값싼 학생 하숙에서 심심한 토장국과 건 건찝찔한 무김치 쪽에 비위가 상하여서, 고춧가루를 따로 사 놓고 간장이나 다른 반찬에 쳐서 먹는 중으로, 집에서 매콤하고 검들하게 먹던 생각이 끼니마다 나는 터이라, 고 추장과 배추김치를 보낸다는 편지만 보고도 침이 삼켜지며 반가왔다. 창수는 다시금, 경순은 학문을 배우지 못한 여자 로 편지 사연을 재미있게 쓸 수가 없는 형편이요, 일자 무 식의 구식 여자로는 편지를 그만큼 쓰기도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이 돌이켜지면서, 편지를 그만큼이라도 쓴 경순에게 동 정하였다.

? 그러나 한경이 같은 여자가 이런 편지를 썼다면 어떻게 썼을까? 아마 우선 편지 사연이 이보다 몇 배나 길 것이다.

가령 길지는 아니하고 이보다 짧더라도, 아까 한경이 짤막 한 것처럼, 짧은 사연에서도 얼마나 재미있는 말을 썼을까.

글자 글자가 구슬 같은 것으로 구절구절이 보는 사람의 마 음을 기쁘게 하겠지. 기쁘다 못하여 감격한 눈물을 흘리게 되겠지. 사랑이라는 것은 키스를 한다든지 껴안는다든지 하 는 육체적 관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상이 맞고 서로 이해가 깊고 말 한 마디를 한다든지, 이런 때에 편지 한 장 을 한 대도 그럴 듯하게 하여야 하는 것이어서, 정신상으로 기쁨을 주고 받고 하는 것이 고상한 사랑이요, 그렇지 못하 고 사랑이 육체에만 그치는 것은 저급(低級)한 사랑일 것이다.' 하고 생각하던 창수는 홀연히 생각을 돌이킨 듯이, ? 그러나 모든 사람이 저마다 그런 행복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행복을 받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 이상, 누구든지 그런 행복을 믿으려고 힘을 써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이렇게 결론을 지었다.

(未完)

<朝鮮中央日報 一九三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