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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피는 능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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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출한 자작나무(白樺) 밑에서 아귀아귀 종이 먹는 하아얀 산양(山羊)⎯일 년 동안이나 나와 벗한 너는 나의 이 무위의 일년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가. 종이를⎯이야기를 좋아하는 양. 한 권의 책도 많다 하지 않고 두 권의 책도 사양하지 않는구나. 이 이야기에 배부르면 풀 위에 누워 가지가지의 꿈을 되풀이하는 애잔한 자태-너에게 이야기를 먹이고 꿈을 주기에 나의 무위의 일년이 마저마저 지내려 한다.

옛성 모롱이 저편에 아리숭하게 내다보이는 한 줄기의 바다-마을의 시절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진하던 바다의 빛이 엷어지기 시작하더니 마을의 가을은 어느덧 깊어졌다. 관모봉은 어느결엔지 눈을 하얗게 썼고 헐벗은 마을은 앙크런 해골을 드러내 놓았다.

헌칠한 벌판에 능금꽃이 피고 나무가 우거지고 벼이삭이 무거울 때에는 그래도 마을은 기름지게 빛나더니 이제 풍성한 윤택을 잃은 마을은 하는 수 없이 가난한 참혹한 꼴을 그대로 드러내 놓았다. 마을의 꼴이 참혹하기 때문에 나는 눈을 돌려 도리어 마을의 자연을 사랑하려고 하였다. 마을의 현실에서 눈을 덮고 풍성한 자연 속에서 노래를 찾으려 하고, 책상 위에 쌓인 활자의 산속에서 진리를 캐려고 애썼다.

이때부터 서재와 양과 능금밭 사이의 한가한 ‘돈키호테’ 적 방황이 시작되었다. 거칠은 안개 속에서 구태여 시를 찾으려 하고 연지빛 능금빛 봉오리 앞에 서서 피지 못하는 내 자신의 하염없는 꼴을 한탄하는 동안에 값없는 우울한 시간이 흘렀다. 마을의 산문은 그러나 이 무위의 방황을 암독하게 매질하지 않았던가.

보리의 시절을 앞둔 앞집에서는 별안간의 소동이었다.

“-이왕 못살 바에야 솥 아니라 집까지 빼 가시오. 이 나그네들. 세X만 세X이구- 그래 이 백성들은 어쩌잔 말요-.”

‘마매’는 펄펄 뛰면서 고함을 쳤다.

그러나 이 고함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듯이 소에게 끌린 한 대의 ‘술기’가 유유히 뜰 앞을 굴러 나왔다. 장부를 든 면x 서기가 두 사람 그 뒤를 따랐다. ‘술기’ 위에는 x금 체납으로 처분한 가마밥솥 등이 삐죽이 솟아 나와 보고 섰는 이웃 사람들의 간담을 써늘하게 찔렀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이 야살스러운 풍경을 말살하여 버리려고 애쓰면서 나는 마을을 벗어져 석방으로 뛰어나갔다. 들에서 능금밭으로-능금밭에서 자작나무 밑으로, 생활을 떠난 초목의 풍경은 가련한 ‘햄릿’을 용납하기에 진실로 관대함을 깨달은 까닭이다.

그러나 현실은 또한 추근추근하게 척지고 뒤를 좆았다. 집에 돌아왔을 때에 나는 책상 위 활자의 진리 속에서 한 장의 편지를 발견하였다. 봉투 속에는 한 장의 편지와 함께 흙덩이도 아니요, x덩이도 아닌 괴상한 한 개의 덩어리가 들어 있었다. 의아한 생각으로 편지를 읽어 가는 동안에 나는 촌에 있는 동무의 설명에 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동무여, 놀라지 마시오. 이것은 한 조각의 떡이외다. 마을 사람들이 아침 저녁으로 먹고 살아가는 떡이외다. 이른봄에 벌써 양식이 떨어져 버린 마을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소나무 껍질을 벗겨다가 약간 남은 수수쌀을 섞어서 떡을 빚기 시작하였소이다. 껍질을 벗기운 솔밭은 볼 동안에 흰 솔밭으로 변하였소이다. 현명한 동무여. 보시오. 이것은 결코 사람이 먹을 것이 못됩니다. 마을 사람들은 인간으로서 다다를 최하층의 세상에 떨어져서 이제는 벌써 인간 이하의 지옥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외다. 백 마디의 나의 감상보다도 이 한 조각의 떡을 참을 현명한 동무에게 보태는 터이외다…….”

-실로 인간 이하이다.

다시 우울하여진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집을 뛰어나가 저물어 버린 마을 밖으로 향하였다.

먼 산에는 난데없는 불산山火이 나서 어두워 가는 밤 속에 새빨간 색채가 선명하게 피어올랐다. 그것은 마치 세상을 불사르려는 아귀의 혓바닥같이 널름널름 어둠을 먹어 들어갔다. 찬란한 광채의 반사를 받은 듯이 어 둠에 젖은 능금꽃은 밤 속에 우렷이 빛났다.-

여름이 오고 가을을 맞이함을 따라 자연은 기름지게 빛나나 마을의 생활은 한층 한층 더 여위어 갈 뿐이다. 능금밭에는 아름다운 꽃이 지고 열매가 맺혔다. 새빨간 별을 뿌려놓은 듯이 아름다운 능금이 송이송이 벌판을 수놓았다.

그러나 이 동안에 피지 못하는 나는 여전히 초라한 ‘햄릿’을 계속하여 왔을 따름이다. -시간과 방황 속에 곧은 낚시를 드리워 왔을 뿐이다.

시월이 짙어 동짓달을 바라보니 성 모롱이 저편의 바다 빛이 엷어지고 헌칠한 벌판을 배경으로 앙클한 마을이 속이 없는 똑바른 자태를 그대로 드러내 놓았다. 앙클한 해골이 이제는 가리울 것 없이 마음을 아프게 에웠다.

그 거칠은 벌판에서 나는 하루아침 놀라운 것을 발견하였다. -헐벗은 능금밭 마른 가지에 돌연히 꽃이 핀 것이다. 희고 조촐한 두어 떨기의 꽃이 마치 기적같이 마른 나뭇가지에 열려 있지 않는가. 대체 이런 법도 있는가. -너무도 놀란 나는 잠시 말없이 물끄러미 꽃을 바라보았다. 건너편 관모봉의 흰눈과 시월에 피는 능금꽃-이것을 비겨 볼 때 이 시절을 무시한 능금꽃의 아름다운 기개에 다시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슬퍼 말라. 시월에도 능금꽃은 피는 것이다!”

별안간 솟아오르는 힘을 전신에 느끼는 나는 감동에 취하여 쉽사리 그곳을 떠나기가 어려웠다. -11월 26일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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