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군에게
제 1 신
[편집]자네를 본 지 벌써 이 주일이나 되었네그려. 그래 그 동안에 몸도 성하고 글 같은 것도 많이 쓰는가? 나는 그 동안에 전에 있던 감방에서 북쪽 맨 끝방으로 옮아왔네.
옮아온 방이라고는 전보다 별로 나을 것은 없으나 그러나 귀퉁이방이라 그러한지 전날 같으면 여름철 긴긴 날에도 햇빛 한 점 구경 못 했더니, 이곳으로 온 뒤는 지는 해가 뒷산 봉우리에 걸칠 때쯤 되면 한 십 분 동안이나 창 귀퉁이 옆으로 큰 대접 넓이만한 햇살이 방바닥에 간신히 들여비치네그려. 십 분 동안의 햇빛이, 대접 넓이만한 햇빛이. 여보게 이 사람, 광명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도리어 상상키도 어려운 일일세.
내가 하루 한 번씩 운동장에 나가기 전에는 조용히 방 안에 앉아 햇빛을 몸에 받아 보기는 처음일세그려. 마음에 어떻게나 신기하겠나. 신기하다는 말보다 감격하다는 말이 옳을 듯싶네. 이것 보게그려. 한방에 같이 앉았던 죄수 하나는 쫓아가 그 햇빛을 손가락으로 만져 보네그려…….
이 사람은 나와 마찬가지로 여러 달 동안 어두운 데서만 지내던 사람인 줄은 이것으로 미루어 알았네.
요새도 우리집 식구를 더러 만나 보는가? 우리 어머니는 자네가 오기 전에 면회하러 왔더라고 자네 보고도 말하였지마는, 일주일에 한 번씩은 으레 오는 내 아내라는 사람은 내가 이 방으로 옮아오던 날 마침 왔데그려. 이 사람의 말을 들으면 늘 집안이 다 무고하다고 말하니까 과연 그런지 안 그런지 모르나, 아마 내게는 바른말을 하지 않는 것 같네. 집안 식구가 잘 지내거나 잘 못 지내거나 내가 알아도 소용이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지마는, 그래도 가끔가끔 걱정되는 마음이 문득 나네그려.
자네 역시 단 혼자도 굶으며 먹으며 하는 사람이 우리집 식구 까닭에 여북 마음부터 켕기겠나. 도무지 다 소용없는 일이네. ……요전에도 우리 어머니라든지 마누라라는 사람보고 제발 굶든지 먹든지 시골구석으로 내려들 가서 내 생각 말고 내 눈에만 보여 주지 말라고 그다지 당부하여도 듣지를 않네그려.
지금 이 모양 같아서는 십 년 이상은 되지 않을 줄로 아네마는 많으면 육칠 년, 적으면 사오 년은 징역에 처하게 되겠지. 그래 그들이 드문드문 보는 내 얼굴만 쳐다보며 서울 있으면 무엇 한단 말인가? 제발 좀, 빌어먹더라도 시골 내려가 그들의 꼴이 내 앞에 보이지 아니하였으면 좋겠네. 그리고 일전에 운동시간에 내가 방에서 창구멍으로 가만히 내다보니까 우연히 같이 갇힌 C군이 얼른 지나가는 것을 보았네. 물론 자네는 가끔 면회를 하겠지마는, 그 사람의 그림자가 눈에 번뜩 뜨일 때 가슴이 선뜩하며 눈알이 나올 듯싶데. 그때 나는, 내 신경이 몹시 쇠약하여짐을 깨달았네. 나는 나 있는 데서 대여섯 방 건너 있는 줄은 알지마는 이렇게 보기는 서너 달 전에 이 모양으로 한번 보았고 또 지난달에 R군을 이 모양으로 보았을 뿐일세. 그래 그 C군도 무척 파리하였데그려. 그 밖에 R군, H군, M군, 또 그 밖에 여러 동지들은 다 어디 가 있는지 모르겠네.
물론 한감옥에 다 있겠지마는…… 무어…… 그만두네.
제 2 신
[편집]자네가 한 편지 답장은 받아 보았네. 차입하여 준 책 ○○○도 받아서 읽어 보았네. 그러나 이러한 책 같은 것으로는 별로 무슨 흥미도 느낄 수 없으므로 차라리 묵상 같은 것으로나 또는 그저 우두커니 하고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네. 이 묵상이란 것도, 처음에는 마음이 뒤숭숭하여 잘 되지 않데. 그 까닭을 대개 들어 말하면 배고픈 것이 제일 많이 괴롭게 구는 것, 이 배고픈 것을 잊어버리고 나면 그 다음에는 집에 대한 걱정, 이 밖에도 괘씸한 것은 정신상으로 오는 답답증, 이런 것으로 인하여 견딜 수 없더니 그것도 오래되니까 지금은 매우 가라앉게 되었네. 오래되니까 창자가 굳어서 배고픈 걱정 같은 것은 지금 아주 없어지다시피 되었네. 그리하여 묵상 같은 것도 인제는 제법 좀 하게 되네. 그러나 가끔가다가 폭발되는 증세는 참으로 견딜 수가 없을 만큼 괴로워.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남의 집에 계시다가 몸이 불편하셔서 집에 와 계시다고? 생각건대, 필연코 나 많은 노인이 남의 집 드난살이를 하다가 고생과 근심이 과한 끝에 병환이 나서 와서 누워 계신 모양일세그려.
여보게 이 사람! 우리가 평시에 부모 처자가 아무리 참혹한 정상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그것만을 들여다볼 수가 있었겠나마는, 생각하여 보게, 그러한 애처로운 꼴을 눈앞에 보아 가며 억지로 살아나가는 사람들의 마음씨를…….
우리 어머니가 내 마음에 말할 수 없이 불쌍해. 그 마음에 내 어린 누이도…… 하기는 이런 누이가 측은한 생각이 더 몹시 나네. 어린것이 주림에 시달리고 학생은 되었어도 학교도 못 다니고…….
여보게, 내가 이때껏 내 누이동생을 면회한 일은 한 번도 없네마는 이 편지 보는 대로 내 누이를 곧 좀 들여보내 주게. 이런 짓을 하는 것이 어린것에게 대하여 너무도 잔혹한 일인 줄 아네마는, 나는 그 지긋지긋한 꼴을 좀 참아 가며 보고 싶네…….
요전에 내 아내란 사람의 말을 들으니까 면회하러 오던 날 그 이튿날부터 무슨 고무공장에 들어가 직공 노릇을 하겠다고, 월급은 한 십여 원 가량 되겠다고, 그래서 이 다음부터는 면회도 전과 같이 자주 하러 올 수 없다고, 그리고 또, 어떤 영화회사에서 활동사진 배우가 되어 달라는데 그 짓을 하고 보면 수입이 상당히 있다고 하나 자기는 그런 것을 아니 한다고 거절하였노라고 말하데. 그 위인이 인물조차 고운 것은 없지마는 아직 나이가 젊으니까 그러한 유혹이 더러 들어오는 듯싶네.
그리고 그 사람이 요전에 그 흉악한 중증을 치르고 난 뒤에 아직까지 건강이 덜 회복된 모양인데 그러한 공장에를 다닌다니 어찌 될 셈인지를 모르겠네. 이러한 걱정과 잔말을 하지 말자지마는, 저절로 자꾸 나오게 되네.
내가 무슨 인정에만 어린 사람이 아닌 줄은 자네도 알겠지. 전에도 자네가 말하기를,
"자네같이 괄괄한 사람이 아내에게 대하여는 너무 약하게 구느니……."
세상에서 말하기를 범 같은 사나이도 계집에게는 빠진다고, 자네가 이런 뜻으로 말한 것은 괴이찮으나 그러나 내게 대해서는 그런 것이 아닐세, 소위 우리 부부란 사람들의 내막을 알고 보면…… 내가 이때껏, 우리 부부의 내력 이야기를 자네에게 하지 않은 까닭으로, 자네가 나의 하는 일을 미흡하게 생각하기도 쉬운 일일세. 내가 어느 때에 세상 밖으로 나갈는지 모르니까, 내처 말하는 김에 우리 부부의 내력 이야기와 내 일신이 몇 해 동안 지내어 온 일을 자네에게만 하여 둘까 하네.
내가 ××군 읍내에 있는 교회당에 가서 교회의 권사라는 직책과 그 교회 부속 소학교의 가르치는 일을 보고 있을 때일세. 그때에 기미 운동 뒤끝이라 아무리 미미한 사립학교라도 남녀 학생들이 물밀듯 하여 남교원도 더 늘리고 여교원도 많이 와야 하겠다고 해서 서울로 부탁하여 내려온 여교사란 사람과 그 밖에 또 H란 사람과 그 밖에 또 한 사람의 남교원이 새로 오게 되었네. 너무도 쓸쓸하던 학교가 별안간에 남녀 교원이 느니까 새로운 공기가 긴장하여지며 전일에는 그닥지 않던 목사―---즉 학교 교장까지도 행여나 남녀 교원 사이에 풍기가 문란하여질까 봐 그리하는지 때때로 교원들에게 주의를 시키며 내게 대해서도 까닭 없이 전보다 매우 위엄기 있는 태도를 보이데.
그러나, 나는 그 송마리아라는 여교사에 대하여는 무슨 애정은 고사하고 나 혼자 속으로,
'저러한 여자하고도 연애를 할 사람이 있을까?'
하고 생각까지 하였었네.
그러자 그는 여러 사람이 떠들썩하는 곳에서도 말없이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양이라든지, 아무 때나 보아도 무슨 시름 없는 태도와, 웃을 때에도 마지못하여 웃는, 어떤 고적한 빛이 떠도는 것이라든지, 또는 그의 얼굴이나 눈 속에서 남의 종이나 맏며느리에게서 흔히 보는 학대와 공포에 시달린 자취가 있어 보이데. 이 여러 가지를 미루어 그의 성격과 행동이 어떤 불행한 환경에서 자라난 것을 알 수 있데그려(그가 고아로, 고아원에서 자라나, 교회 덕분에 공부까지 하였다 함은 그 뒤에 들어서 알았지마는). 그래 나도 '가엾은 사람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뿐일세. 그뿐 아니라 내가 아무리 마음으로부터도 그에게 본체만체하고 지나갔다 하더라도 그 가엾게 된 사람이 때로는 말없이 무엇에든지 침묵을 지켜 가는 태도라든가, 그 하염없는 그의 침묵―---그것을 몇 달 동안을 두고 보니까 내 마음속에 무슨 넓지 않은 인상이 박히는 것 같데.
그때 나하고 같은 교원이던 H란 청년이 있는데 그는 문학의 취미를 많이 가졌다는 사람으로 영문학 같은 것을 탐독하며 말솜씨나 행동이 퍽 센티멘틀하여 보이며 때때로 마리아에 대하여 동정이나 매우 하는 듯하는 태도를 보이데그려. 인정에 주린 마리아도 이 센티멘틀한 H에게 끌리었는지는 몰라도 가끔 단둘이 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데그려. 음흉하고 눈치빠른 목사는 그 눈치를 알고 유심히 그 두 사람의 뒤를 살피는 모양이데.
한번은 하학 후에 교장 되는 목사가 나하고 H와 마리아 세 사람을 불러 세워 놓고 서슬이 시퍼런 태도로 하는 말이,
"이 학교는 다른 학교와도 달라서 신성한 교회의 학교인데, 이러한 데서 남녀 교원간에 추한 일이 생겨서는 그야말로 중대한 일이오. 그런데 저 H와 마리아의 행동은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소. 이 학교에서 물러가는 것은 물론이요, 출교까지도 시켜야 되겠소. 또는 수석 교원의 자격을 가진 당신(나를 가리켜)도 책임이 없을 수 있을까?"
이때에 마리아는 그의 버릇인 쪼그린 태도로 한구석에 앉아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가지고 벌벌 떨고 있을 뿐이요, H는 붉어진 얼굴에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하며,
"목사님, 저하고 마리아 씨하고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습니다. 제가 간밤에 마리아 씨한테 놀러 간 일은 있지마는 하나님께 맹세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이 말을 이어 마리아도 발발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열어,
"하나님께 맹세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
하고는 교의에 기절하는 듯이 쓰러져 울데그려. 나는 이 두 사람의 행동만 보아도 애매한 것인 줄을 짐작하고,
"목사님! 저 두 사람의 태도만 보아도 그 일이 애매한 것 같습니다."
말하니까 목사는 마치 닭을 노리는 살쾡이의 눈 모양으로 마리아를 노려보며,
"애매라니? 안 되오. 출교라도 해야 되겠소."
지금부터 칠팔 삭 전에 목사가 상처를 하였었고 또 두 달 전에 마리아가 온 뒤부터 그에게 마음을 두고 내려오다가 얼마 전에 슬며시 통혼을 하여 보았는데, 어찌하여 그리하였던지 마리아가 거절하였다는 소문을 일전에야 누구에게 들은 생각이 펄쩍 나며, 그때도 반은 죽었던 마리아가 몸을 일으키며 약간 독살스런 눈찌로 목사를 쳐다보며,
"그것은 목사님이 사람을 애매하게 잡는 것이에요."
하니까, 목사는 험상스러운 태도로 펄쩍 뛰며,
"조런! 잡다니?"
하고 소리를 지르데.
이때 내 생각에는 목사가 분명히 질투를 해서 그리하는 것인 줄 알고 분한 생각이 슬며시 나며,
"여봅시오 목사님, 지금 저 사람들이 애매한 줄도 짐작하겠고, 또는 남녀간에 정당하게 서로 사랑한다 하면 그것이 무엇이 옳지 못한 일인가요?"
"정당하다니? 남녀간의 사랑이란 것은 십계명에 하나 들어가는 것이니까, 첫째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는 것이란 말이오."
"간음 외에 정당한 사랑이란 것은 하나님 뜻을 어기는 것이 결코 아닌 줄로 압니다. 만일에 사랑이나 간음이 같은 의미로 성경에 기록하여 있다면 그것은 성경을 뜯어고칠 필요가 있지요."
이 말에 목사는 어이가 없는 듯이 노리고 보다가,
"저런 무리는 바리새교인 이상의 무리다. 별수없이 모두 출교해야 하겠다."
"안 되오, 출교라니? 목사부터 우리 이상의 죄악을 진 사람이오."
"무엇 어째? 출교 좀 당해 보아라!"
이때 사환아이가 들어오며, 그 골 군수 영감이 찾아왔다는 말에, 목사는 황황급급히 이러한 손님을 맞으러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때 그 길로 나는 교회의 권사고 학교 교원이고 그만 다 사직을 해버리고, 배교를 하고 바로 그 이웃동네에 있는 지금 같이 갇힌 C군의 집에 가서 지내게 되었네.
그 뒤에 전도사라든지 여러 직원들의 권고로 그 두 사람의 출교 일절은 그만 그럭저럭 파묻어 두게 된 모양이고, H군은 얼마 있다가 다른 곳으로 갈려 간 뒤 훨씬 있다가, 한번은 밤에 마리아가 나를 찾아와서 이런 말 저런 말도 없이 앉아 있기만 하다가 돌아가데그려. 그리고 난 이틀 만에 마리아에게서 내게로 편지가 있었는데, 그 편지 사연에 나를 무슨 사랑한다는 의미의 말이 씌어 있데.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도 그 여자에게 끌릴 만한 무엇을 그다지 느끼지 못한 터이어서 '대단치 않은 여자에게……' 하는 생각이 나며, 도리어 불쾌한 감정이 일어나데.
그 뒤에 편지가 오고 또 오고 하나 나는 이내 답장을 아니 하였네. 그러다가 나중에 마지막 단념을 하려는 셈인지, 자기 사랑을 받아 주지 않으면 자기는 죽기까지라도 하겠다고 하였데. 여기에 이르러서는 나도 또한 어느 정도까지 마음이 움직인 것은 사실이나, 위로하는 말로 답장하려다가 어째 오죽지 않은 생각이 나서 그만두고 말았지.
일주일 지난 뒤 일요일날 저녁에 편지가 또 왔는데 뜯어 보니까 놀랄 말이 씌어 있지 않던가. 마지막 유언서 모양으로 쓰고 맨 끝으로는,
'나는 이 길로 죽음의 나라로 갑니다.'
고 하였데.
이 구절을 본 순간에 '무슨 깊은 인연도 없이, 편지 몇 번 하다 말고 죽는다는 것은 다 무엇이야. 소견이 짧고 속이 옹색한 여자로구나'하는 생각이 번쩍 나다가도 '참으로 죽어' 하고 혼잣소리로 말하며, 그래 나는 정신이 펄쩍 나서 밖으로 뛰어나가 교회당 근처로 가려니까 교회당 댓돌 앞에 여러 사람이 모여 서서 수군수군하고들 있데그려. 나는 그 여러 사람들을 피하여 딴 길로 가려니까 예전에 같이 있던 학교 교원 하나가 내 옆으로 달려들며,
"여보 ○○○씨 오래간만이오. 그런데 저 송마리아가 독약을 먹고 자살을 하려다가 발견되어서 지금 병원에 들어가 있는데, 나 혼자만 짐작하는 놀음이지마는 아마 ×××씨(내 말) 까닭인 줄 압니다."
그래 나는 가슴이 덜렁하여지며,
"대관절 생명은 어찌 되었나요?"
"죽지는 아니했는데, 어떠할는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러기는 벌써 아침 일인데……."
나는 두말 아니 하고 병원으로 달려갔네. 남녀 교인들이 모여 있는 것도 헤아리지 않고 다짜고짜로 마리아가 누운 옆에 과히 멀지 않은 곳에서 바라보고 섰었네. 혼수상태에 들어 있는 마리아의 모로 진 얼굴빛은 핼쑥하게 고른 종잇빛 같데. 마침 의사가 지나가기에,
"저 환자가 죽지는 아니하겠습니까?"
"에, 좀더 기다려 보아야 알겠지요."
나는 몇 걸음 더 뒤로 물러나와 서서 우두커니 바라보고 섰을 때,
'나 때문에 저런 가엾은 생명이 죽어 없어지다니!'
하는 생각이 문득 나며 곧 달려가 환자의 손목이라도 쥐고 싶은 생각이 나나 억지로 억제하고 얼마 동안을 서서 있자니까 환자의 입술이 발작적으로 바들바들하더니 고개를 약간 흔들흔들하다가, 답답한 듯이 긴 한숨을 내어쉬며 고개를 저쪽으로 돌리데.
그 한숨을 따라, 여러 사람들도 마음을 인자 놓겠다는 듯이 모두 일시에 한숨을 쉬데. 그러나 나도 그 환자의 한숨 뜻이 무슨 의식이 있어서 그럴 리는 만무하련마는, 까닭 없이 무엇이 내 가슴을 몹시 울리며 뭉클하여지데.
조금 있다가 의사가 나와서 환자를 간단히 진찰하고는 확실히 염려없다는 말이 나오자, 모여 있던 사람들은 하나씩 둘씩 헤어져 가데. 나도 환자의 정신이 회복되기까지는 멋없이 있을 까닭이 없어서 나와 버렸네. 내 가슴속에는 무슨 묵직한 덩어리를 집어넣은 것같이 쉴새없이 울멍울멍하여짐을 깨달았네.
그날 밤에 나는 또다시 찾아가서 마리아의 정신이 쾌히 돌아왔음을 보고 그 주위에 여러 사람이 둘러 있음도 관계치 않고 달려가 마리아의 손목을 잡았네. 마리아는 평시에도 무슨 의심의 안개가 낀 듯하던 눈이 좀더 검은빛을 띠고 나의 마음을 뚫을 듯이 들여다보는 눈찌는, 무슨 저주의 빛이라 할지, 애원의 빛이라 할지, 또는 무엇을 의문하는 빛이라 할지 여러 가지 복잡한 표정이 나의 눈으로 향하여 오데. 나는 '당신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겠노라'는 깊은 의식에서 저절로 우러나는 듯한 마음으로 그의 눈을 바라보았네. 그리하여 두 사람, 두 눈의 시선은 한참 동안이나 짧은 공간에 무지개나 설 듯이 마주쳐 머물러 있었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마리아 씨, 미안합니다. 내 마음을 믿어 주시오."
하니까, 그는 돌리었던 고개를 돌쳐, 과연 그러냐는 듯이 의문의 눈빛으로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눈을 다시 감고 다시 고개를 저쪽으로 돌리는 옆볼에는 긴 눈물 자국이 줄― 흘러 불빛에 빛나데그려. 나는 다시 그의 손을 힘있게 한번 쥐었다 놓았네.
그 뒤에 그는 병원에서 나오자, 출교까지 당하여, 내게로 영영히 오게 되고 말았네.
그리하여 나는 이 찐덥지 못한 새 사랑을 얻어 가지고 조선도 있기가 싫기에 그만 동경으로 건너가 버렸네.
🙝 🙟
동경생활은 별 생활이 없었네. 다만 나의 생활의 큰 전환을 준 것 뿐일세. 그것은 말하자면, 사상생활의 전환이겠지. 그때는 한참 일본 천지에 사회사상이 물끓듯 일어난 판에, 나 역시 지식상으로 또는 생활의 경험으로부터 새로운 사상이 나의 피를 끓게 하던 때일세. 나는 또한 같은 동지를 모두어 열렬한 선전운동에 착수하였네.
여보게 이 사람, 사람이 새로운 생활의 진리의 길을 나가는 것처럼 감격과 정열에 넘칠 때는 또다시 없을 것일세.
동지와 동지 사이에 믿고 사랑하는 마음이라든지 모임에 발을 들여놓을 때 감격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라든지, 인간 사회에서는 이보다 더 큰 위대한 무엇은 없는 것같이 생각되네. 어떠한 무서운 사회악의 더러움이라도 이 뜨거운 불길 앞에는 다 타고 녹을 듯싶데.
말하자면, 이것이 동경시대의 풋정열이라고 할는지, 그러던 것이 이 기분 운동에서 실제 운동으로 들어갈 때에는 그같이 믿어 오던 어떤 몇몇 동지들에게 환멸이 닥쳐오데. 그 사람에게서 결점들이 드러나고 그들의 의지의 약함과 불순한 야심이 들여다보일 때에 나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네. 그런 가운데에도 언제까지든지 성실하고 꾸준하게 나아가는 지금 같이 들어온 C군 같은 사람들은 예외로 하고, 그 밖에는 믿지 못할 놈들도 더러 있더란 말일세. 내가 좀 경솔한 탓인지는 모르나 그때부터 나는 모든 인간이라는 것을 다 의심하고 미워하게 되었네. 내 사상이 니힐리스틱하고 테러리스틱한 경향을 띠게 된 것도 그때부터일세. 닥치는 대로 죽이고, 없애고 싶은 생각이 나데. 그뿐 아니라 나 자신도 미운 생각이 나데. 나도 남과 같이 약한 데가 있고 불순한 곳이 있음을 이제야 발견하고…… 이 우주의 모든 것을 다 눈흘겨 보게 되었네. 여기가 몹시 위험한 곳이네. 까딱하면 비뚤어지기가 쉬운 데니까. 그러고만 보면, 영영 걷잡을 수 없이 타락의 길로 들어가기가 쉽데. 그러나 나는 속이지 않고 자신에 대해서도 순실히 싸워 나가며 자신을 붙들어 나가려 들었네.
이러한 가운데, 소위 내 아내라는 사람은 귀가 있어서 들으니까 새 사상을 아는 체하나, 실상인즉 아무것도 모르는 숙맥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데. 그러하니, 나라는 사람을 이해할 것이 있겠나. 그리하여 그 사람조차 미운 생각이 펄쩍 더 나데.
하루 품팔이하여 하루 먹고 사는 우리 부부의 처지라, 어떻게나 화증이 나는지, 해가 져서 품삯을 받아 가지고 나오는 길에 그만 술집으로 들어가서 같은 노동자끼리 술 먹고 놀다가 밤이 들어서 집에를 돌아와 보면, 아내라는 사람이 저녁도 못 끓여 먹은 주제에, 방 안 구석에 쪼그리고 누워 자는 것을 볼 때에는, 그만 불쌍한 생각이 왈칵 나서 쫓아가서 안고 볼을 대며 입을 맞추며 하였네. 이 따위의 대단치 않은 연극이 며칠 건너 한 번씩은 으레 있었네. 그리하다가 나는 직접 행동에 나서려고, 지하의 혁명단체에 참가하여 무슨 일을 하려다가 동경 감옥에 들어가서 일년을 치르게 되었네.
내가 감옥에 들어간 뒤에 얼마 있다가 내 아내 되는 사람은 홀로 동경서 살 수가 없으므로 조선으로 나왔네. 조선으로 나온 뒤에는 그는 적어도 한 달에 수삼 차씩 내게 편지를 하는데, 그 편지는 대개 자기의 섧은 사정, 내 걱정, 또는 내가 간절히 보고 싶다는 말 같은 것인데, 새삼스러이 사람이 그리운 나의 고적한 마음은 오고 오는 편지와 가고 가는 때를 따라, 그에게 대한 질기는 마음과 보고 싶은 생각이 갈수록 더하여 감에, 마치 새로운 연정에나 걸린 것 같데. 그리하여 하루바삐 나아가서 그를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네.
사람이란 것이 경우에 따라 정이 이같이 변하는 것인지?
🙝 🙟
동경 감옥에서 나오자, 부랴부랴 고향으로 나와 외갓집에 계신 우리 어머니를 뵈이러 가지 아니하였겠나. 아내 되는 사람은 마음 붙일 곳이 없다고 서울로 시골로 왔다갔다하며 요전에 몇 달 동안 와서 있다가 다시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그리하데그려. 그런데 놀라운 말이 들리지 않겠나. 우리 어머니 말을 빌려 하자면,
"그애가 태중인데 거진 팔구 삭이나 되었는데 배는 불러 가지고 어디로 그리 다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 말을 들을 때 아무리 하여도 그 말이 곧이들리지 아니하여,
"태중이라니요? 아니지요. 다른 병이겠지요."
"아니야, 분명 태중이다. 그러지 않아도 처음에 내가 의심이 나서 물어 보니까, 저도 첫아이라 남이 부끄러워 그리하는지 속이더구나. 그러나 여편네가 여편네 일을 모르겠니, 동경서 나온 달을 따져 보아도 별로 틀림도 없고 그래 나는 우리 같은 처지에 걱정은 되지마는 한옆으로는 반가운 생각도 나더구나."
이 말을 들은 나는 의심이 아니 날 수 없데그려. 별안간에 상연이 됨을 깨달으매 금방 두통이 일어나데. 질투와 불안의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폭발되데그려. 우리 어머니는, 동경서 나온 달 수를 따지지마는, 내 요량에는 부부가 동거한 지가 벌써 일 년 사 개월이나 되는 까닭일세. 그리고 또 최근 수삭을 두고 편지 한 장이 없는 것만 보아도, 꼭 의심이 나게 되었네. 그래 나는 거듭 묻기를,
"그래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지요?"
"글쎄, 요전에 ××로 간다고 그랬는데, 과히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면서 아모 소식이 없는 것을 보아도 거기에 없기에 그러겠지."
나는 어머니의 만류도 듣지 않고 곧 길을 떠나서 T역에를 가서, 그의 있는 곳을 탐지하였으나 월 전에 어디로 가고 그 뒤에는 알 수 없다는 말밖에는 더 알 길이 없데그려.
그래 나는 거기서 서울로 향하여 오며 차 속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네.
평일에 보아도 어느 정도까지는 꽁하게 생긴 위인인데 아무리 유혹이 있다 하더라도…… 그러나 계집이란 것은 약한 것이니까, 더구나 그리 똑똑하지도 못한 위인이…….
'그러면 지금 어디 가서 있을까? ……어찌하여 그런 유혹에 빠졌다가, 지금 당하여 뉘우치는 생각이 나고 또는 나를 대할 낯이 없어서, 그보다도 앞으로 닥칠 큰 공포를 이기기 어려워서 혹시…….'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갑자기 딴 의심이 펄쩍 나며 무서운 생각이 났네.
'그가 과연 남모르게 어디 가서 자살을 하였을까? ……아! 과연?'
여기까지 생각이 나며 그의 최후의 뒷그림자를 마음 가운데 그려보며 무엇보다 불쌍한 생각이 더럭 나데그려.
'좌우간 서울로 가서 알아보아야 알 일이지.'
하고는 서울로 왔네그려. 서울 가서 이리저리 찾아다니며 알아보아도 알 길이 전혀 없데그려. 인제는 조선 천지에서는 달리 더 알아볼 길이 없는 것같이 생각되데. 이리하여 갈수록 내 마음은 그의 죽은 혼을 조상하는 듯한 슬픔이 그를 생각할 때마다 일어나데그려.
이 모양으로 한 십여 일이나 지내었네그려. 어떤 날 나는 내가 쓰는 방 안에 홀로 들어앉아 문득, 그 불쌍한 생각을 하고 마음이 매우 좋지 못해서 있을 즈음에 누가 와서 찾는다고 하기에 방문으로 고개를 쑥 내밀어 보자니까, 이것 보게나―---아내 되는 사람이 문 밖에 서 있데그려.
그를 본 순간의 나는 곧 그를 잡아먹을 듯이 미운 생각이 나며, 그를 바라다본 나의 눈도 이러한 살기가 응당 띠어 있었겠지. 나는 그만 본체만체하고, 몸을 홱 돌이켜 방으로 들어가 앉아 있자니까, 그는 갈팡질팡 쫓아 들어와 쓰러지더니 내 무릎을 붙들고 울기를 시작하데그려. 나는 연방 내 몸에 와서 닿는 손을 뿌리치며 냉정한 태도로,
"에― 에― 왜 내 몸에다 손을 대어?"
하고 뿌리쳐도 들고 느껴 울며 또 손이 와서 닿기에 그만 발길로 냅다 차서 내밀었네그려.
방 한구석에 가서 모들뜨기로 고라진 그는 죽을지 살지를 모르고 컥컥 하고 울며 울음에는 긴 목소리로,
"내가 발…… 발써부터 죽으려고 하였지마는…… 다…… 다마안 한 번…… 한 번이라도 만나 보고서……."
"만나 볼 건 무엇 있담."
"내가…… 내 손으로 죽…… 죽는 것보다 임자…… 손에 죽는 것이 원이 돼서."
"내가 죽여? 더러운 피를 내 손에다 묻혀? 엑……."
소리를 지르고는 밖으로 뛰쳐나왔네. 길바닥도 캄캄한 것 같데. 그 길로 파고다공원에 와서 널빤지쪽에 걸터앉아 땅만 굽어보고 그대로 언제까지든지 있었네.
그가 죽는 것을 또다시 마음에 그려 보며 생각하여도 '무엇? 죽어야 마땅하지' 하고 막 자르는 마음이 먹어지다가도 죽을 모양을 그려 보고는, 또 기치는 생각이 솔곳이 일어나고, 이러다가는 또 미운 감정으로 뒤바뀌어지고, 그러다가는 또 측은한 생각으로 변하여지고, 이 반복되는 감정이 쉴새없이 번뜩이데그려. 그러다가 나중에는 '그래도 죽으면은 안 되겠다……' 하고 벌떡 일어날 제, 벌써 어두움을 깨닫겠데. 그 길로 있던 처소로 향하여 달려오니까, 아니나 다를까! 집에 돌아와서 보니 그는 간 곳이 없고 방바닥 한가운데에는 겉봉을 연필로 쓴 편지 한 장이 있기에 얼른 뜯어 보니 그 안에도 또한 연필로 희미하게 씌어 있는데,
- 나는 당신께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죽었다는 말을 들으신 뒤에, 그때에야 나를 용서하시겠다는 마음이나 가지시게 된다면 나는
죽은 뒤에라도 아무 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보기 싫은 몸이 두 번 뵈이지 아니할 터이오!
하였네.
나는 아까 이 골목 밖에서 들어올 제 저쪽 골목 전등불 밑으로 흘끔 지나가던 여학생이 혹시 그이나 아닌가 생각하고 밖으로 나오매 주인 아이 보고 물어 보아도 나간 지 얼마 아니 된다고 하기에 곧 그 골목길을 쫓아 줄달음을 쳐서 한참 달려가자니까, 이것은 참 요행이다! 저 골목으로, 마치 실성한 사람이나 술취한 사람 모양으로 발도 잘 떼놓지 못하며, 비적비적 자꾸 가는 사람이 과연 그 사람이데그려. 아마 정신이 극도로 혼란을 겪고 또는 임신 만삭이 되어 몸이 무거워 그러는 모양이데. 나는 쫓아가 탁 붙들고,
"여보! 갑시다, 나 있는 데로. 내가 다 당신의 죄를 용서할 터이니……."
하면서 덮어놓고 처소로 끌고 왔네그려.
그래 그는 여전히 울며불며 자기는 아무리 한대도 살기를 바랄 수는 없다고 하며 어느 때까지 그칠 줄을 모르고 들이 울데그려.
나는 어디까지든지 쾌히 용서하겠노라고 타이르며, 나 역시 심사가 공연히 센티멘틀하게 되어 얼마 동안을 마주 붙들고 울어 대었네. 그리하여 일이 진정이 되었지마는.
그리고 보니, 사람이 견딜 수가 있던가? 참으로 말이지 이러고 난 뒤 얼마 동안은 내 평생에 정신상 고통이라고는 가장 극도로 받은 때일세.
부른 배를 하여 가지고 내 옆에 자빠진 그를 바라다볼 때에는 미운 마음이 들고 일어나며 당장에 칼로 찔러 죽이고 싶은 생각이 왈칵 나서 그만 발길로 냅다 차던지고는 한참씩 밖으로 뛰어나갔다가도 불쌍한 생각이 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어 쫓아 들어가 그를 껴안는다, 볼을 비빈다 하며 예전에 동경서 하던 연극 이상의 연극을 하루에도 몇 차례씩 하게 되네. 그때 나의 감정을 비유해 말하면 마치 높고 날카로운 봉우리에 선 것 같아서 이쪽은 응달이요, 저쪽은 양달이라면 가 한번 삐득하는 데 따라서 몇천 길의 차를 내는 셈이라고 할는지, 나중에 나는 그 날카로운 신경을 죽여 버리려고 들었네. 아니 감정의 깊이가 어디까지인가 그 끝가는 데까지 가보리라는 생각이 나서 그 무서운 갈등의 감정이 복받칠 때면 일부러 더 궁둥이를 붙이고 박고 앉아서 이 무서운 인생의 사실, 밉고 더러운 아내를 응시하면서 견디어 나갔네.
이 위에 더 변화되어 나간 나의 감정이란 것은 여기서 더 말하지 않네. 그것은 자네 상상에 맡기고 말겠네. 그 뒤에 내 아내 되는 사람은 다행히 사내애를 낳고 무사하게 되고 또는 뒤붙어 나의 감정은 전날에 반격하던 것이 다 어디로 사라져 가고 말았네. 그때 내가 꿈속에 무슨 난질난질한 첨탑이나 디디고 섰던 듯한 기억만 남을 따름일세. 그러고 나자 나는 이번 일을 저지르고 이리로 들어온 일은 자네도 알 일일세. 좌우간 우리 부부의 지난 경과가 이러하네. 말이 너무 지리하였네. 그만두네.
🙝 🙟
같이 있던 죄수는 일전에 딴 방으로 옮아갔네. 내 방에 비치었던 햇빛도 점점더 줄어들어 가네그려. 얼마 있다가는 그것도 또한 없어지고 말겠지.
제 3 신
[편집]일전에 자네하고 우리 어머니하고 같이 면회하러 왔었데그려. 그래 자네는 시간이 넘어서 면회도 못 하고 그대로 갔었지. 나를 마지막 보고 가는 때라 그러한지 그때 우리 어머니의 하는 모양이라니! 나는 그 길로 감방 안에 들어와 앉아 온종일 심사가 좋지 못하였네. 좌우간 그가 내 눈에 다시 보이지 않고 멀리 떠나간 일만 시원한 일일세.
내 아내 되는 사람은 삼 주일이나 되어도 면회도 아니 오고 편지조차 아니 하네그려. 바쁠 터이니까 오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편지까지 아니 하는 일은 알 수가 없네. 그 동안 내게 대한 마음이 변하였는지도 모르지, 변하였다면 대수로울 것이야 무엇 있겠나마는…….
이보게, 남의 마음이란 것을, 더구나 여자의 마음이란 것을, 더 한 걸음 나아가 세상에서 말하는 진리라는 것을 어디까지 믿고 어디까지 믿지 아니하여야 옳을는지 모르겠네. 의지―---물론 이 의지야 누구에게나 절대로 필요하지. 그러나 약한 남자나 여자는 도저히 이것을 갖지 못하였다는 말일세. 그 의지라는 것으로 말하면 순실 가운데서 나오고 자라는 것이니까, 다시 말하면 순실이 의지를 낳고 의지가 또한 굳센 신념을 낳는 것으로 아네. 그것은 무엇보다 들매어 놓고 말하는, 인간이란 것을 믿는 것이 아니고 나라는 것을 믿는 것이란 말이지. 다시 말하면 순실한 자아가 굳센 의지를 가지고 모든 것과 싸우고 나가는 동안에 위대한 신념이 붙잡아지는 것이란 말일세.
이것을 내 경험으로부터 간단히 말하면, 자기의 양심을 붙들어 나가기에도 엎치락잦히락하고 힘없고 약한 걸음으로 걸어오던 내란 사람이 오랫동안 싸워 나온 끝에 자기의 뼈가 튼튼하게 되어 가는 것일세. 이번에 그 일로 인하여 경찰서에 붙들려 들어가 그 무서운 악형과 고문을 당하면서 죽을지언정 자기를 속이고는 싶지 않았네.
여보게 생각하여 보게. 고양이가 쥐 굴리듯 하는 그 마당, 생각만 하여도 소름이 끼치는 그 광경을―---사랑이란 것은 진리를 말하려거든, 신념을 말하려거든 죽음의 구덩이를 피투성이하고 뚫고 나와서야만 말할 것이지, 결코 양지쪽에 자빠져 콧노래를 부르는 격으로 책상머리에서 얻은 공상이나 지식대로 생에 대한 진리와 신념을 찾을 것으로는 아닐 줄로 아네.
어쨌든 지금 나의 마음은 매우 튼튼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네. 지금 모양 같아서는 앞으로 어떠한 정신이나 육체상 고통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나는 조금도 두려움이 없을 줄 아네. 편지가 더 쓰기 싫어 그만두네. 일기가 아침 저녁으로 제법 선선하여 감을 보니까 인차 가을철이 드는가붸.
제 4 신
[편집]요전에 판결 언도가 끝난 뒤 나오는 길에 자네가 다른 사람들과 같이 법정 문 앞, 길 옆에 서 있는 것을 보았네. 그도 벌써 한 달이나 되었네그려. 그 동안에 자네가 한 편지도 보았네마는 어째 그러한지 붓 잡기가 이즈음에서는 통히 싫데그려. 참 오래간만일세. 나는 또한 이 편지도 쓰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며칠 동안을 두고 할까말까 하다가 마지막 말이나 한마디 더 하여 둘까 하고 이 글을 쓰게 되네.
그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내 아내 되는 사람이 필경에는 가고 말았네그려. 나는 이 기별을 듣고 나서 예전과 같지는 않지마는 며칠 동안 두고 분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네. 다만 그가 가서 잘 살기만 바랄 따름일세. 이 말이 참뜻으로 한 말인 줄만 알아 두게. 그가 내게 간단히 쓴 편지를 말하면 이와 같네.
- 나는 H에게로 다시 갑니다. 당신의 일은 죽어서도 잊을 수 없고, 당신의 은혜는 죽음으로도 갚을 수가 없지마는, 나는 또한 H도 저버릴 수 없으므로 하는 수 없이 그리로 가게 되니 나를 한 죽은 년으로 아시고 잊어 주세요.
라고 하였네.
그는 H에게로 갔네그려. H를 자네가 알는지 모르겠네. 그 여자가 잠시 동안 첫사랑을 하던 남자이고 요전 편지에 말한 바와 같이 내가 동경 감옥에 있을 때에 한 달 동안인가 얼마 동안인가를 같이 동거하였다는 사람일세. 아마 첫사랑의 미련이란 대단한가붸. H에게로 가는 것이 내게 있는 것보다 그 여자에게 대해서는 더 나을는지 모르겠지. 말하자면 그 역시 시원스러이 갔네.
다 갔네그려…… 나는 지금 지나간 날의 모든 일을 눈앞에 다시 한번 펼쳐 놓고 우두커니 들여다보고 있네. 마음속이 휭하게 빈 것 같아, 아무것도 거리끼는 것이라고 없네. 다만 딩딩한 신생의 힘을 잡고 있을 뿐일세. 그것은 어디까지든지 진실, 자기를 속이지 않고 진실하게 살아나가자는 것 외에는 더 위대한 것이 없을 줄 알고 또는 그것을 어디까지든지 실행해 나갈 자신이 있는 까닭일세. 내가 만일에 오 년 동안이란 것을 마치고 세상 밖에를 나갈 것 같으면 전보다 더 굳센 힘으로 나갈 듯싶네. 짧은 시일에 내가 이만큼 더 자라 나간 것을 자네도 기뻐할 줄 아네. 마지막으로 간 그 여자가 잘 되기 원하며 붓을 놓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