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절대왕제의 쇠퇴와 프랑스 혁명
절대왕제의 쇠퇴와 프랑스 혁명〔槪說〕
[편집]프랑스는 18세기에 들어와서 혁명 전야까지 에스파냐의 계승전쟁을 비롯한 여섯 차례의 큰 전쟁에 관련했다. 이들 전쟁은 결코 이익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루이 14세의 만년에 국가 재정은 위기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그 후 위기는 더욱 심각해지고 만성화되어 갔다. 또한 루이 14세에 의한 위그노의 국외 추방은 그 후의 프랑스 산업 발전을 현저하게 저해하는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부르주아적 발전은 영국에 비해서 지지부진한 것이었으나, 18세기 후반에는 중농주의자의 주장으로 대표되는 것 같은 곡물 거래의 자유, 인클로저의 자유를 요구하는 세력이 대두되고 있었다. 공업 부문에 있어서도 면직물 공업이 18세기 초부터 대두되기 시작해서 재래의 모직물·린네르 공업과 경합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 길드적 규제는 여전히 강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매뉴팩처가 각지에 출현하고 있었다. 1774년 재무총감(財務總監)의 자리에 앉은 중농주의자인 튀르고는 부르주아적 발전을 저지하던 영주적(領主的)·국가적 통제를 제거할 것을 꾀했다.
1776년에는 ‘여섯 가지 칙령(勅令)’이 공포되었는데, 이것은 농민을 농노적(農奴的) 부담에서 해방시키고, 공업에 있어서의 길드제를 폐지하며, 농업·노동에 대한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이것은 부르주아적 이해와 대립하는 봉건적 귀족과 기생적(寄生的) 특권 상인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일이 불가피한 과제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부르주아적 발전에 대응하여 노동자의 자본에 대한 투쟁이 조직적으로 실시되기에 이르렀다. 견직물 공업의 중심지였던 리옹에서는 직포공(織布工)의 스트라이크가 18세기 후반에 속발(續發)되기에 이르고 있다. 한편 귀족 계급은 승려(僧侶)와 함께 봉건적 특권을 누리고 있었는데, 18세기에는 여러 그룹으로 갈라져 있었다. 군무에 복무하는 대검귀족(帶劍貴族)과 법복귀족(法服貴族)으로 대별되고 있었으나 약간의 귀족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상류귀족은 궁정(宮廷)에 기식(寄食)하여 영지 경영에 관심을 갖지 않고 나태한 생활을 보냈으며, 대부분의 사람은 막대한 부채를 짊어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18세기 후반에는 절대왕제와 절대왕제의 지지자였던 귀족의 대부분도 재정적 곤경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농민의 착취를 강화시키는 것으로써 더욱더 농촌을 황폐시켰다. 프랑스의 부르주아적 발전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대변혁이 불가피했었다. 계몽 사상가는 이와 같은 모순에 찬 사회 제도에 통렬한 비난을 가하여 합리적인 사회제도의 출현을 선동했다.
루이 15세
[편집]Louis ⅩⅤ (1710
1774, 재위 1715
1774)루이 14세의 증손인 5세의 유아(幼兒)가 즉위, 루이 15세가 되었다. 초기에는 오를레앙공(公)이 섭정(攝政)을 담당하였으나, 1726년부터는 친정(親政)하여 플뢰리를 재상으로 등용, 평화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폴란드 계승전쟁(繼承戰爭),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에 휩쓸렸으며 이어서 7년전쟁(七年戰爭)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7년전쟁에서는 해상과 인도(印度) 및 미국 식민지에서 패배하여 많은 영토를 상실하였으며, 많은 비용의 지출은 재정난을 초래하였다. 로렌의 병합(倂合)과 코르시카의 구입은 그의 치세(治世)때이다.
정치상에서는 퐁파두르 부인과 뒤바리 부인 등의 충동으로 인하여 실패가 많았고, 계몽사상(啓蒙思想)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부르봉 왕조의 절대주의(絶對主義) 해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시기이다.
앙시앵레짐
[편집]Ancienrgime
혁명 전의 프랑스에서의 특권계급은 농민에 대해서 여러 가지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의 농민은 농노 신분에서 해방되어 자영농민화되고 있었으나, 영주권(領住權)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서 현물 지대 외에 여러 가지 의무 부담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관습적으로 경작권을 인정받고 있는 데 불과하고, 토지의 상속·양도에 있어서는 많은 허가료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영주는 농민에게 반강제로 수차(水車), 빵구이 가마 등을 사용하게 하여 사용료를 징수했다. 기타 도로세·교량세·운반 부역 등이 과해졌다. 농민은 다시 교회에 대해서 10분의 1세를 지불하고, 11세기에는 다시 새로운 국세가 부과되는 상태에 있었다.
루이 16세
[편집]Louis ⅩⅥ (1754
1793, 재위 1774
1794)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의 손자.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앙투와네트와 결혼. 성격은 우유부단하고, 국왕으로서의 적성이 결여되어, 이후 닥쳐온 비운의 최대 원인이 되었다. 튀르고를 등용하여 구제도의 모순 해결, 재정위기를 타개하도록 하였으나, 궁정 및 특권 신분의 저항으로 실패하였다. 이어 네케르를 기용하였으나, 아메리카 독립혁명에 개입하여 국비를 낭비함으로써 재정은 더욱 곤란해졌다. 이후 칼론, 브리엔을 기용하였으나, 재정은 악화될 뿐 개혁은 특권신분의 반항으로 실현할 수가 없었고, 1788년 삼부회(三部會) 소집을 결정, 재차 네케르를 기용하였다. 1789년 6월 삼부회가 국민의회로 성장하여 입헌왕정에의 움직임이 높아지자, 군대에 의해 의회를 탄압코자 책동하였다가, 이것이 도리어 바스티유 공격을 초래하였고, 시민의 봉기에 굴복하였다. 이후 소위 1789년 체제에 입각한 입헌 왕정에의 움직임에 대하여 자신의 무정견과 왕비 마리앙투와네트를 중심으로 하는 궁정의 압력으로 신체제에 저항하면서도 일보일보 양보하였으며, 한편 미라보, 라파예트, 바르나브 등과 손을 잡고 권력의 회복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791년 6월 20일 일가와 함께 국외로 도망하려고 하였으나 실패, 입헌 왕정을 기조로 한 1791년의 헌법의 승인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국민공회는 왕을 퇴위시키고 공화국을 선포했고, 루이 16세는 국민공회(國民公會)의 투표결과 반역자로서 1793년 1월 단두대(斷頭臺)의 이슬로 사라졌다.
튀르고
[편집]Anne Robert Jacques Turgot (1727
1781)
백과전서(百科全書)에도 기고한 진보적 중농주의자로 진작부터 상공업에 대한 국가의 과도한 간섭에 비판적이었다. 1774년 재무총감이 되자, 농민에 대한 무상 부역 강제, 길드제도의 폐지를 실시하여 산업에 대한 자유를 보장했다. 그 개혁에 반대하는 귀족들은 1775년 식량 폭동의 책임을 그에게 지워서, 1776년 퇴직을 불가피하게 했다.
네케르
[편집]Jacques Necker (1732
1804)
스위스 태생의 신교도로서 재무총감에 등용되기까지 제네바 은행의 총재를 지냈다. 1777년 튀르고의 후계자가 되었는데, 그가 제출한 개혁안은 튀르고의 그것과 유사한 것이어서, 1781년 귀족의 반대로 파면되었다. 1788년 다시 기용되어, 귀족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3부회의 개최를 인정했으나, 1789년 7월, 루이 16세는 갑자기 그를 재무총감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국민회의
[편집]國民會議
1787년 5월 3부회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첫날부터 표결 방법을 둘러싸고, 제1·제2신분(身分)과 제3신분 사이에 대립이 생겼다. 제1신분인 승려(僧侶) 대표는 3백 명, 제2신분 귀족 대표는 270명, 제3신분인 시민 대표는 6백 명에 달했는데, 제1·제2 신분은 각 신분마다 1표, 제3 신분은 각인 1표의 표결권을 주장하여 타협을 하지 못했다. 제3 신분은 3월 17일,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국민의 대표자라고 주장하고, 국민의회란 명칭 아래 제1·제2 신분과 분리되어 회의를 개최하였다.
테니스코트 선서
[편집]-宣誓
1789년 6월 20일 국민의회는 회의장을 구기장(테니스코트)의 건물로 옮기고, 자기들의 요구가 승인되어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는 이 의회를 해산하지 않는다고 선서했다. 3월 24일 이 국민의회에는 제3신분에 가까운 많은 승려와 자유주의적 귀족 47명도 합류했고, 7월 9일에는 헌법제정(국민)의회라 칭하여, 인민의 최고입법 기관으로서 프랑스 헌법 제정에 착수했다.
미라보
[편집]Comte de Mirabeau (1749
1791)
미라보는 귀족 출신이었으나, 3부회에는 제3신분의 대표로서 선출되어 나왔다. 그는 천성적인 정치가로서 우람한 용모와 위압적인 사자후(獅子吼)에 의해서 국민의회를 좌우하였다. 그는 인민의 여러 권리를 확대시킴과 동시에, 헌법에 의해서 왕권을 제한하는 입헌군주제의 실현을 기도하고 있었다. 그는 혁명 당초에 있어서 격발(激發)하려 하는 혁명세력과, 무력에 의한 탄압의 기회를 노리던 왕당(王黨)파와의 중개를 시도하면서 활약했는데, 1791년 병으로 사망했다.
라파예트
[편집]Marie Joseph La Fayette (1754
1834)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가·혁명가·군인. 옛 귀족의 문벌로서 16세에 군인이 되었다. 미국독립혁명이 일어나자 1777년 독립군에 참가하여 각지에서 활약하였으며, 워싱턴의 신임을 얻고 프랑스와 미국에서 영웅으로 칭송되었다.
1782년 귀국 후 루이 16세로부터 부대장으로 임명되었고, 1787년에는 명사회(名士會)의 대표로 정계에 진출한 후 프랑스와 미국의 친선에 노력하였다. 1789년 귀족대표로 삼부회(三部會) 소집의 주창자가 되었다. 이후 정치적 야심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1791년 국왕 도주 미수사건 뒤 대중에 대해 탄압적 태도를 취하여 대중의 인기를 잃고 헌법제정과 함께 잠시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1792년 자코뱅당의 진압을 꾀하다가 실패하여 오스트리아군(軍)에 5년간 투항하다 정부의 교섭으로 출옥한 후 나폴레옹제정에 반대했다. 왕정복고와 함께 정계에 복귀하고, 1821년 에스파냐·포르투갈의 혁명에 대해 동정을 표하는 등의 반정부적인 태도를 취했다. 1830년 7월혁명에 자유파 시민의 지도자로서 활약하였고, 루이 필리프의 휘하에서 국민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입헌왕정의 수립에 노력하였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편집]-監獄襲擊
왕당파가 헌법제정의회의 무력 탄압을 기도하여, 지방으로부터 군대를 결집하고 있다는 것이 전해지자 파리의 민중은 격앙하여, 1789년 7월 12일경부터 군대와의 사이에 충돌을 반복했다. 14일 아침부터 민중은 바스티유(Bastille) 감옥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이 감옥은 민중의 거주지역 생탕투안 입구에 전제주의의 상징으로 우뚝 서 있었다. 민중은 도개교(跳開橋)를 내려놓고 감옥 속으로 쇄도하여 점령했다. 이 습격의 성공은 바야흐로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인권선언
[편집]人權宣言 D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
1789년 8월 26일 헌법제정의회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소위 인권선언을 채택했다. 이 기초를 맡은 라파예트는 미국의 독립선언에 깃들인 사상을 계승하고 있었다. 따라서 양자는 기본적 인권의 옹호라는 점에서 길을 같이하고 있었다. 8월 26일 가결되어 1791년 헌법의 전문(前文)으로서 그 첫머리에 실리게 되었다. 이 선언은 7월 14일(바스티유 점령)이나 8월 4일 밤(봉건제의 폐지)의 혁명사업의 성과를 확인하고, 새로 수립될 질서의 이념과 방향을 명시한 것으로서, 1789년 혁명의 상징이며 구제도(舊制度)에 대한 사망진단서라 불리게 되었다. 전문(前文)과 17개조로 되어 있는데, 제1조에는 ‘인간은 나면서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라는 유명한 구절을 내걸어 인간의 자연권(自然權)으로서의 자유·재산·안전을 추구할 것과 압제에 대해 대항할 것을 내세우고, 인민 주권, 언론·사상·출판·신앙의 자유, 법 앞에서의 평등, 3권분립, 소유권의 불가침 등을 주장하였다. 그 배후에 일관된 근본사상은 근세의 자연법 사상인데, 거기에는 계몽사상을 통해 자라난 인간해방이란 이념이 깔려 있다. 이것은 18세기 부르주아지의 소산으로서의 특질이나 한계(限界)를 가지고 있기는 하나, 새로운 시민사회의 원리를 확립하고, 또한 정치적 데모크라시의 여러 원칙을 선언한 것으로서, 당시의 유럽제국의 군주제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그 후에도 인류의 공유재산으로서의 인간해방을 고취해 왔다는 점 등으로 세계사적 의의를 갖는다.
입법의회
[편집]立法議會
1791년 10월 제한(制限)선거에 의해서 선출되어 입법의회가 소집되었는데, 이 의회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대부르주아지와 자유주의 귀족, 대토지 소유자를 중심으로 한 입헌 군주주의자의 그룹인 푀이 양당이었다. 공화파(共和派)에는 자코뱅당과 지롱드당이 있었다. 의회의 중요문제는 대외전쟁이었는데, 지롱드 당의 압력으로 1792년 4월 대외전쟁에 돌입하였으나, 지롱드 당은 패전에 따르는 국내 위기를 해결하지 못하여 민중의 불만이 1792년 8월 10일 사건으로 폭발하였다. 왕권의 정지에 의하여 입법의회는 사실상의 기능을 잃고, 신의회(국민공회)의 소집을 의결하고 9월 20일 해산하였다.
한편 반혁명파가 지방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또한 여러 나라의 혁명 간섭이 시작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혁명과 조국을 방위하기 위해서는 반혁명의 중심인 왕정(王政)의 폐지를 주장하고 보다 민주적인 헌법의 제정을 요구하여 민주적 선거에 의한 국민공회(國民公會)의 개최를 주장했다. 자코뱅당의 지도 아래서 봉기(蜂起)한 민중은 트륄리 궁전을 점령하고 왕정을 타도했다.
자코뱅당
[편집]-黨 Jacobins
성 야곱 교회를 집회소로 하고 있던 헌법동우회(憲法同友會)는 자코뱅 클럽(Club des Jacobins)이라고 불렸는데, 좌파(左派)는 코르들리에 클럽(Club des Cordelier)과 제휴, 공화제를 주장했다. 소위 자코뱅 클럽에 속한 회원은 모두 자코뱅당이라 불리었고, 그 성격은 클럽의 지도권을 잡은 당파 여하에 따라 삼두파(三頭派), 지롱드당, 몽타냐르로 변했는데, 이것은 의회에 있어서의 지도적 당파의 추이(推移)에도 대체적으로 대응했다. 자코뱅 클럽에서 지도권을 잡은 당파는 다소간 시간적으로 어긋나기는 하지만 대체로 그 무렵 정권을 잡아, 클럽의 세력이 강대함을 보여 주었다. 로베스피에르, 당통, 마라 등은 이 파에 속했고, 민중 세력을 배경으로 전제의 근원을 단절하여, 진정한 민주제를 수립할 것을 기도했다. 그들은 입법의회의 좌파를 형성했고, 몽타냐르(山岳黨)라 불리고 있었다.
지롱드당
[편집]-黨 Girondins
프랑스 혁명기의 입법의회 및 국민공회에 있어서의 당파. 주로 상공업 부르주아지를 대표한다. 브리소, 콩르세, 베르니오, 가데, 장소네 등에 의해서 지도되었다. 이중 후자의 3인이 지롱드 현(縣) 출신의원으로 지롱드 당(黨)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하였다. 입법의회에서는 좌익적 입장을 취하여 국왕 루이 16세의 반혁명적 실태를 폭로하였고, 무역상의 이해 관계를 문제로 삼아 대외전쟁을 추진하였다. 1792년 각원(閣員)을 자파에서 선정할 것을 국왕에게 강요하여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전(宣戰)을 성취시켰다. 그러나 전쟁 지도에 실패했고 전쟁수행에 대해 태만하였던 국왕 기타 반혁명파와는 결정적으로 대결하지 못했으며, 8월 10일의 민중 봉기에도 반대했다. 이후 봉기한 코뮌과 이와 결합한 몽타냐르와 싸워 초기의 국민공회(國民公會)에서는 우세하였으나, 1793년 5월 31일∼6월 2일의 민중봉기로 정권에서 추방되고, 간부는 체포되어 사형을 받거나 탈주중에 자살하였다. 잔당은 뒤에 로베스피에르 몰락 때 일역을 담당했고, 테르미도르 파(派)에 합류하였다.
국민공회
[편집]國民公會
1792년 8월 보통선거법에 의해서 선출된 국민공회는 전 국왕 루이 16세의 처분에 대해서 격렬한 의론을 전개한 끝에 근소한 차로 그의 사형을 결정했다. 이것을 계기로 영국,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제국의 혁명 간섭전쟁이 격화되었다. 이 방위 전쟁에 전력을 바친 프랑스는 차차 경제적 상황이 악화되어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대상인의 매점(買占)이나 투기에 의해서 한층 궁박(窮迫)해진 민중은 과격한 행동으로 대부르주아에 대한 공격을 강화했다. 지롱드당은 이 민중의 요구를 억누르고 자코뱅당이 제안한 전비(戰費) 조달을 위한 부유 계급에 대한 과세에도 반대했다. 민중은 봉기하고 반동화된 지롱드 당원을 국민공회로부터 추방하여 자코뱅당의 주도권 확립에 협력했다.
당통
[편집]Georges Jacques Danton (1759∼1794)
프랑스의 혁명가이자 정치가. 법학을 전공하여 1785년 파리에서 고등법원 서기를 거쳐 1787년 왕실고문회 소속의 변호사가 되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코르들리에 클럽을 결성하고, 자코뱅당에도 입회하여 민주파 지도자로서 보수적인 파리시 당국과 대립하였다. 1791년 국왕의 폐위를 요구하였으나, 샹드마르스의 학살사건으로 진압되어 영국으로 망명하였다가 귀국후 1791년 12월 파리코뮌의 검찰관 차석 보좌관이 되었고, 1792년에는 왕정폐지 운동에 가담하고 공화혁명을 준비하였다.
동년 9월에 혁명의 코뮌과 의회 사이의 조정 역할을 인정받아 법무장관에 취임하였다. 파리에서 국민공회(國民公會)의원으로 뽑혔으나 9월 2일 사건을 묵인하여 지롱드당과 결렬하였다. 국민공회에서는 산악당(山岳黨)에 속하였으며, 자코뱅당(黨)의 우익을 형성하여 좌파인 에베르파(派)와 대립하였다. 혁명적 독재와 공포정치를 완화할 것을 요구하고 경제통제도 반대함으로써, 결국은 로베스피에르파(派)에 의해 처형당했다. 대단한 웅변가로 부르주아적인 공화파연합을 목표로 한 그의 정치사상은 포용력이 있으나, 사생활이 문란하고 낭비벽이 심하여 정치생명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데물랭
[편집]Camille Desmoulins (1760∼1794)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가. 문필가. 기즈 출생으로 파리의 루이르그랑 학원에서 수학하면서 로베스피에르와 알게 되었다. 1785년 파리고등법원 변호사가 되었고, 1788년 『프랑스 국민의 철학』으로 혁명에의 접근을 예고, 1789년 7월 바스티유 감옥 공격 직전에 혁명선동의 연설로 시민행동의 방향을 결정하였다. 바스티유 감옥 함락후에 『자유 프랑스』를 출판하여 공화정을 주장하면서 당통과 행동을 같이 하였다. 자코뱅당에서 공화주의운동의 일환으로 왕정폐지를 내세웠고 민중봉기에도 관여했다. 국민공회 의원으로 산악당(山岳黨)에 속하여 저널리스트로서 지롱드당을 공격하였다. 당통과 함께 공포정치를 반대하고 관용을 주장하여 로베스피에르의 공격을 받아 단두대에서 당통과 함께 처형당했다.
로베스피에르
[편집]Maximilien Robespierre (1758
1794)
자코뱅당의 독재가 실현된 다음, 공안위원회(公安委員會)의 개편이 실시되었다. 우파(右派)적 경향이 강해진 당통은 물러나고, 로베스피에르 등이 이에 대치되어, 공안위원회를 장악했다. 그는 왕당파의 음모, 여러 외국의 혁명 간섭군이 침입하는 곤란한 상황하에서 국토를 방위하며 반동 세력을 누르고, 혁명의 성과를 지키기 위해서는 독재제를 강화하여 이러한 반혁명 세력과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의했다. 그는 공안위원회의 강화를 도모하고, 지방에 혁명위원회를 설치하여 반혁명분자를 적발하고 혁명재판소를 설치하여 직결 처벌에 의한 공포정치를 실행했다.
제1회 대불동맹
[편집]第一回對佛同盟
루이 16세의 사형이 결정되자 유럽의 봉건적 군주는 이와 같은 과격한 혁명 풍조가 자국(自國)에 파급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영국까지도 국왕 사형의 보고에 공포를 느껴 당시의 보수 정치가 피트는 유럽 제국에 대해서 프랑스 혁명 정부 탄압의 대동맹 결성을 제창했다. 1793년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네덜란드, 에스파냐 등의 나라들이 이 반동적인 동맹에 가입했다.
자코뱅 헌법(93년 헌법)
[편집]-憲法(九十三年憲法)
자코뱅당은 봉건적 여러 제도의 완전 폐기와 진정한 민주적인 제도의 확립을 목표로, 농민의 봉건적 의무 부담을 일체 무상으로 폐지하고 영주에게 빼앗겼던 공유지(共有地)를 농민에게 반환했다. ‘93년 헌법’은 주권재민(主權在民)을 명확히 하고 인민의 의사에 반하는 정부에 대한 저항권을 신성화했다. 헌법은 공화제를 확립하고 보통선거권과 직접선거제에 의한 1원제의 입법기관을 설치, 사회의 목적을 공동의 행복 추구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헌법은 곤란한 내외정세 때문에 보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끝내 시행할 수가 없었다.
혁명력
[편집]革命曆
로베스피에르는 내외의 난국에 직면하여 혁명의 성과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민의 혁명적 도덕 앙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체의 비합리적인 것, 전통적인 관습을 파괴하고 새로운 합리적 질서의 형성을 기도했다.
그는 그리스도교적 색채가 짙은 종래의 달력을 폐지하고, 1개월을 10일마다 자른 30일로 하고 달의 명칭도 새로 붙였다. 이 밖에 미터법을 쓰기로 했고, 이성(理性) 숭배의 새 종교를 형성했으며, 인민의 의식 개혁을 기도하여 ‘덕(德)의 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했다.
테르미도르의 반동
[편집]-反動
로베스피에르의 권력 기반은 소(小)부르주아지였다. 그는 부르주아지에 의한 인민의 착취에 반대하여 독립된 소생산자를 형성시키려 했다. 따라서 파리의 과격한 민중(안라제)이 ‘93년 헌법’을 불완전한 것이라고 반대하자 그들을 탄압하여 하층 민중의 지지를 상실했다. 또한 자영 농민이 된 지난날의 빈농들도 차차 보수화되어 갔다. 공안위원회에 의한 공포정치는 한층 격화되어 인심을 잃게 됐다. 1794년 7월 로베스피에르 일파는 국민공회에서 탄핵(彈劾)을 받아 드디어 실각하고 사형에 처해졌다.
기요틴(단두대)
[편집]Guillotine
프랑스 혁명 당시 사용한 사형기구. 독일에서는 ‘길로틴’이라 하며 단두대(斷頭臺)라고 번역한다. 이탈리아 및 남프랑스에서 사용되어 왔던 것을 의사이자 입헌의회 의원이었던 프랑스의 J.I. 기요탱이 제안하여 기요틴이라 한다. 칼날이 비스듬히 되어 있는 도끼를 양쪽 기둥 사이에 달고 그 아래에 사형받을 사람을 눕혀 사형집행인이 밧줄을 당기면 도끼가 떨어져 목을 베게 하는 장치이다. 프랑스 혁명이 계속되던 공포정치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으로 처형되었고, 루이 16세와 지롱드 당원들은 물론 왕비 마리앙투아네트 및 반(反) 로베스피에르와 기요틴으로 공포정치를 단행했던 로베스피에르 자신도 이것에 의해 처단되었다. 기요틴은 공포정치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으며, 1981년 사형제도를 법으로 금지하면서 폐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