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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인류 문화의 시작/도시국가와 춘추전국시대/전국시대의 제자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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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의 제자백가 〔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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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는 사회·경제·정치상의 일대 변혁기였다. 그것은 씨족제적인 사회의 해체기(解體期)이며, 주의 봉건제도 그리고 그에 따르는 질서붕괴 시기이며, 또 경제적 군사적 실력주의의 대두기였다. 구체적으로는 주 왕조의 권위의 실추(失墜)에 따르는 제후의 독립과 대립 항쟁의 시대였다. 이와 같은 배경하에 중국의 사상계는 최초로 활발해졌다. 먼저 선구자는 춘추말의 공자(孔子)이며, 그에 의해 계통적인 사상이 처음으로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공자의 사상은 오래 전 은·주 시대의 민족 신앙에서 그 근원을 찾아볼 수 있다. 은대에 있어서는 자연 인간에 있어서 모든 현상은 천명에 의해 정해져 있다고 믿어졌으며, 군주는 이 천명을 주술에 의해 예지(豫知)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주나라 초기의 주공(周公)은, 인간은 나면서부터 하늘에서 정해준 운명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후천적인 수양 등에 의해 어느 정도 바뀔 수가 있다고 생각하여 독자적인 예(禮)의 문화에 대한 기초를 만든 것이다. 공자는 이러한 예(禮)의 문화의 전통을 섭취해서 유교(儒敎)의 기초를 이룩했다.전국시대에 들어가면 항쟁을 이겨내고 강자로 생존해 나가는 것을 지상 명령으로 삼고 있는 제후국가의 권력의 요청에 응하기 위하여, 또 여러 가지로 면모를 바꾸고 있는 다양한 현실에 대처하기 위하여, 유(儒)·묵(墨)·도(道)·음양(陰陽)·명(名)·종횡(縱橫)·법(法)·잡(雜)·농(農) 등 9유파(流派)로 나뉘어지는 많은 사상가(諸子百家)가 나타나서, 바야흐로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중국 사상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 이 시대의 초기를 대표하는 것이 묵가(墨家)의 시조 묵자(墨子)이다. 그는 철저한 혁신론·실리주의를 제창하여 유교의 예, 그리고 그 번잡함을 비판하고 겸애(兼愛)·상현(尙賢)·절용(節用) 등을 가르쳤다.중기를 대표하는 것이 유가(儒家)의 맹자(孟子)와 도가(道家)의 장자(莊子)이다. 이즈음의 학문 예술의 중심은 제나라의 서울 임치(臨淄)의 직하(稷下)였다. 맹자는 직하에서 논리적인 변론술을 습득하고 묵가에 반론, 유교를 재생시켜 패도를 배제하고 왕도를 가르쳤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본성을 추구하여 성선설(性善說)을 전개했다. 장자는 사색의 대상을 자연계에서 구해, 위대한 자연을 지배하고 율(律)할 수 있는 길은 인간의 인식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직관에 의하지 않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전국 후기, 즉 후진국(後進國) 진(秦)이 부국강병의 실을 얻어 동방 진격에 본격적인 자세가 가다듬어질 무렵 학문·사상에서도 객관성·실효성이 문제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경향을 대표하는 것이 유가의 순자(筍子)와 법가의 한비자(韓非子)이다. 순자는 맹자의 성선설에 반대하여 성악설(性惡說)을 제창하고, 인간의 악한 본성을 바르게 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예(禮)를 정할 필요가 있다고 했는데, 이 때의 예는 법에 가깝다. 한비자는 순자의 예를 법률로 바꾸어 놓았다. 그는 법에 있어서의 개념과 결과의 일치를 구하고, 군주의 법에 의한 국가의 통제·유지 방법을 논하고, 장차 성립될 중앙집권적 통일국가의 본연의 자세에 이론적 근거를 주었다. 이리하여 진(秦)·한(漢)제국의 성립기에 법가의 사상은 중용됐으나 전한 무제 때 유교가 관학이 됨에 이르러, 유가가 사상계의 주류를 이루게 되고 이 영향은 청조말까지 계속되었다.

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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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家

공자를 창시자로 하는 학파. 전국시대에는 제자백가의 하나로 등장했지만, 전한의 무제 때 유교가 국가 정통의 학문이 된 이래 중국의 학문·사상계를 대표하게 되어 현대의 중국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정치·국민생활에 영향을 주었다. 공자 이후, 주의 봉건제도하의 인륜(人倫)에 유래하는, 부자 관계·군신 관계를 중히 여기고 더 나아가서 그것을 율하는 근본으로 효제(孝悌)의 도(道)를 세웠다.따라서 애초에는 가족이나 종족을 배경으로 하는 봉건적 귀족의 특권을 옹호하는 것이었지만 이윽고 진·한제국이 성립되고 군주 권력이 확립되면서, 그에 따라 변질되어 갔다. 이 학파를 크게 2분하면 증자(曾子)·자사(子思)의 계통에 속하는 내성파(內省派)와 자하(子夏)·자유(子遊)의 계통에 이어지는 숭례파(崇禮派)의 2파이다.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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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子 (전 552

전 479?)

노(魯)나라의 사람으로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 유가의 창시자. 『논어(論語)』는 그의 언행이나 가르침을 전한 것이고, 그 사상의 근본은 인(仁)에 있었다. 인은 사람과 사람과의 사이에 생기는 자연의 정·사랑에 바탕을 두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부자간의 사랑(孝), 형제간의 사랑(悌)을 제일로 들었다. 이것으로 가족 도덕의 근본을 가르치고, 그것을 또한 가정에서 나라로, 나라에서 천하로 파급시켜 실천해 갈 것을 권했다.또 정치적으로는 노국의 실권을 쥐고 있는 3가의 전제(專制)를 타파하고 군주권을 확립하여 주공의 예가 재현하기를 원했다. 아버지는 무공(武功)에 의해 사(士)로부터 대부(大夫)의 신분으로 승진한 대장부였다고 전해지는데, 공자가 출생한 후 얼마 뒤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소년 시대에는 곤란이 많았다. 15세에 서(序)를 배우고, 30세에 하급 관리가 되어 50세가 넘을 때에는 대사구(大司寇)의 벼슬에 올랐지만, 정치적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아 기원전 497년 외국으로 망명, 여러 나라로 유세(遊說)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14년 되던 해에 귀국하여 취푸(曲阜)의 학원에서 제자 육성과 고전 정리를 하다가 74세로 세상을 하직했다.

묵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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墨家

묵자를 창시자로 하고 전국 초기에 활약한 학파. 묵자는 먼저 겸애(兼愛)를 가르쳤다. 겸애란 사람들이 격의없이 서로 사랑하고 상리(相利)하는 것으로 하늘의 뜻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이 상리란 공리(功利)적 입장에서 더욱 강본(强本:勤勉)·절용(節用:儉約) 등을 주장했다. 기타 상현(尙賢:反貴族的, 人材登用論)·비공(非攻:非戰論) 등 유명한 설이 있다. 또 중국에 있어서의 체험을 근본으로 하여 사물의 본질을 추론하는 논리적 사고의 창시자로서 최근에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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墨子 (전 480∼전 390)

노(魯)나라의 철학자.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사상가. 이름은 적(翟). 제학파의 하나인 묵가(墨家)의 시조라고도 하나 불분명하다. 그는 노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처음에는 유가(儒家)를 배웠으나, 유가가 예를 중시하여 점차로 번문욕례(繁文縟禮)가 되고, 장의(葬儀) 등에도 과도하게 비용을 들이게 되어 일반 대중의 생활로부터 유리된 것을 비판했다. 그리하여 절검(節儉)을 주장하고, 또한 예(禮)의 사회적 기반인 신분제(身分制)를 부정하여, 만인의 평등과 약자 구제를 역설했다. 그런 까닭에 묵자는 공평 무사하고 차별이 없는 사랑이 필요하다고 했다. 유가의 인간애인 인(仁)이 가까운 일족에 대한 사랑을 출발점으로 삼아 향당(鄕黨), 국가, 세계로 점차 확대해 나갈 것을 주장하는 것임에 반하여, 묵자의 학파는 사랑에 있어서 차별을 인정하는 유가의 인에 반대하고, 공평한 박애(博愛)를 주장했던 것이다. 그의 사상은, 난세(亂世)의 원인은 사랑이 결여(缺如)된 데서 유인되며 사람들이 평등하게 서로 사랑하고 타인에게 이롭게 하면 하늘(天)의 의지(意志)에 일치하여 천하의 쟁란(爭亂)이 없어진다고 하였다. 이것이 겸애설(兼愛說)이다. 그 실행방법으로서 근검(勤儉)하여 생활의 간소화를 주장하고 예악(禮樂)의 무용을 진술하여, 정치설로서는 비전론(非戰論)을 역설하였다. 애(愛)의 사상은 유가(儒家)의 인(仁), 기독교의 박애(博愛)와 유사한 것이다. 하늘이 상벌을 내린다는 점은 더욱 명확하다. 또 귀신의 존재를 인증하는 종교적 색채는 민간 신앙을 계승한 것으로 생각되며 계단적 질서를 존중시하여 전통과 예악을 숭상하는 유가와 상대하였으나 그 애의 관념은 그대로 철학적 발전을 수행 못하였다. 전국말(戰國末)의 사상계로서는 공구(孔丘), 묵적(墨翟)과 병칭될 정도의 세력을 가졌으나 묵가는 진(秦) 이후에 쇠퇴해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현행의 서적으로서 『묵자』는 묵가의 변천의 각 시기에 있어서의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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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家

노자·장자로 대표되는 학파. 전국 중기에 유가와 함께 유력하였다. 사상의 특색은 참된 길이 인위(人爲)를 초월한 곳에 있다는 주장이며, 그것은 직관에 의해 체득되는 것으로, 사람은 그 참된 길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가르쳤다. 또 인위를 배제하고 무위자연(無爲自然)이 될 것을 권하고, 배제해야 할 인위 중에서 주된 것은 유가의 도(道)인 인(仁)이나 예(禮)라고 말했다. 중국사상의 양대흐름인 유가와 도가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현실적이며 긍정적인 유가가 군주의 통치권을 합리화하여 역대 왕조의 통치이념으로써 사회의 기본사상으로 자리잡은 것에 비해 도가사상은 현실부정적이고 도피적인 성향이 강해 하층민을 중심으로 뿌리를 내려 후에 도교로 발전, 주로 민간신앙과 철학적 사고의 원천이 되었다. 이러한 차이로 유가가 지배자의 사상을 대변한다면 도가는 지배층에 대항하는 피지배자의 사상으로 대변되었다. 한(漢) 이후 독립성을 잃어버렸지만, 그 사상은 후세 중국인의 불교의 수용, 도교(道敎) 교리의 형성을 돕고 문예(文藝)의 심화를 촉진시켰다.

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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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子 도가의 창시자. 성은 이(李)씨이며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이다. 송나라 사람이라고 전해지는데, 실제 생존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많다. 『노자』 2편이 그의 저서라고 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참된 도(道)는 인위를 초월한 무위자연(無爲自然)에 있고, 그것이 만물의 근원, 만물이 마땅히 따라야 할 법칙이라고 하면서, 사람도 사물도 도에서 나와 다시 도로 복귀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단, 성인(聖人)·왕자는 이 절대적인 도를 체득하고 이것을 다스리는 자라고 하는 점은 왕권의 절대성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는 중국에 있어서 우주의 일체에 대하여 생각한 최초의 사람으로, 후세에 도교(道敎)의 시조로 불려졌다. 그의 사상은 노장사상(老莊思想)으로 발전, 유교와 아울러 중국사상사의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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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 (전 365∼전 290)

전국시대(戰國時代) 송(宋)나라의 사상가. 이름은 주(周). 자는 자휴(子休).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을 배워 노자(老子)의 사상을 계승, 아울러 노장(老莊)으로 불리는 도가의 대가이다. 노자가 정치적·사회적 문제를 대상으로 삼은 데 대하여 그는 개인의 안심입명(安心立命)을 문제삼고 절대 보편은 무(無)라고 하는 만물 일원론으로 좌망·심재·조식(坐忘心齋調息)의 제설을 주장했다. 인생관은 사생을 초월한 절대무한의 경지로서 이는 진한(秦漢) 시대의 신선(神仙) 사상으로 발전, 정치론에서 인위적 예교(禮敎)를 타파하였다.

『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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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語

공자가 사망한 후 50년쯤 지나 제자들에 의해 기록된 공자의 말·대화 혹은 구두로 이어받은 말들이 편집 기술된 것으로서, 소위 고문(古文) 논어는 21편이 있다. 고문 논어는 전한 무제 때 공자의 옛집 벽 속에서 발굴됐다고 전해진다. 논어의 해석은 다종다양하지만 현재 실존하는 것 중에서는 위나라 하안(何晏)의 『논어집해(論語集解)』 10권(전 248 간행)과 남송의 주희(朱喜)의 『논어집주(論語集註)』 10권(전 277 간행)이 대표적 저서이다.

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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孟子 (전 372?

전 289?)

이름은 가(訶), 추(鄒)나라 사람. 유가. 전국 중기에 활약하였다. 『맹자』는 그의 말이나 대화를 집록(集錄)한 것. 그의 사상은 다양하지만 대두하는 패도에 대항하여 봉건제도에 기초를 둔 예(禮)·도덕에 의한 정치를 가르친 왕도(王道)이다. 군주도 인정(仁政)을 행하고 덕을 쌓지 않으면 하늘은 다른 유덕자에게 명(命)을 내린다고 하는 역성혁명설(易姓革命說), 사람의 성(性)은 본래 선하고 스스로 인(仁)·의(義)·예(禮)·지(智) 등 덕으로 발전하는 성을 갖추고 있다는 성선설(性善說), 고대의 공동 경작제에 따른 것 같은 정전설(井田說) 등이 유명하다.

맹자의 성선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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孟子-性善說

공자의 인(仁)을 중심으로 한 인간의 정신적인 덕을 중시하는 파는 공자의 제자 증자(曾子)를 거쳐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에게 계승되고, 다시 맹자(孟子)는 인간이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本性)은 모두 선(善)이요, 따라서 인간에게는 누구나 다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시비(是非)의 능력이 갖춰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정신적인 능력을 수양에 의해 충실히 발전시키면 덕을 완성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수양의 방법은 욕심을 없애고 모든 일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이 방법은 도가(道家)의 일파인 송견(宋?) 등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송견 등이 오히려 이 수양방법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있었던 데 반하여, 맹자는 그 결과로서의 덕을 완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던 점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맹자는 정치적으로는 특히 군주가 덕을 완성하여 그 덕으로써 정치를 행하고 백성을 이끌어 나갈 것을 희구했다. 이것은 맹자보다도 나중에 나온, 법을 으뜸으로 삼는 순자(荀子)와는 크게 다른 점이다. 그러나 군주라는 것은 덕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군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고 생각한 점은 유심론적(唯心論的)이기는 하지만 혁명(革命)을 시인한 것으로서 주목할 만하다.

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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荀子 (전 315?∼전 230?)

이름은 황(況), 자는 경(卿) 또는 손경(孫卿), 조나라 사람. 유가. 전국말의 4군시대에 활약. 공자(孔子)와 자궁(子弓)을 스승으로 유가(儒家)의 실천 도덕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들 보다 한층 더 합리적이며 체계적인 그의 사상은 공자·맹자를 능가했다. 공자·맹자·순자가 차지하는 사상사(思想史)적 위치는 유럽의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와 비교된다. 그의 사상은 언설(言說)·대화(對話)로 표현하였으며, 후대의 제자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 아닌 자신이 직접 저작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순자(荀子)』는 그 중에서 제자백가의 여러 학설을 비판하면서 그 성과를 취하여 중국 고대 사상을 종합하여 체계화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또 사람의 성은 원래 악하기 때문에 성인에 의해 정해진 예에 따라서 교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성악설에 의해 예를 법에 접근시켜 국가 통치의 원리로 했다. 법가의 이사(李斯)·한비자(韓非子)는 그 문하생이다.

순자의 성악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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荀子-性惡說

예(禮), 즉 사회제도의 연구에 힘쓴 사람은 공자의 만년의 제자였던 복자하(卜子夏)요, 그의 제자는 위나라에서 개혁정치를 펴고 또한 법률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이회(李?)이다. 이회는 예를 사회적인 규범이라고 파악하여 그것을 법(法)이라는 형식으로 전개했지만, 이 파의 가장 유명한 학자는 전국시대 말기에 나온 순자(荀子)였다.순자는 인간의 본성은 악(惡)이며, 항상 욕망에 의해서 쟁란(爭亂)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보고, 그렇기 때문에 쟁란을 수습하기 위해서 왕자(王者)는 예를 정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순자는 인간성을 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인보다도 오히려 규범으로서의 예를 중시하고, 이 예야말로 인간의 사회나 정신뿐만 아니라 자연계에도 통하는 법(法:法則)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예를 통하여 인간은 자연계를 향하여 적극적으로 작용을 가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또한 예와 법이 동일시됨으로써 법의 사회질서의 이념(理念)으로서의 의의가 높아져 법가(法家)의 사상적인 기반이 이루어졌다. 춘추시대의 자산(子産)이나 전국시대의 이회(李?)나 상앙(商?)도 역시 그들에게 있어서 법은 어디까지나 현실의 정치적인 기술이라고 여겨져 있었으나, 처음으로 그것을 이념의 장(場)으로 드높였다고 할 수 있으며, 사상의 한 유파로서의 법가가 성립하는 근거가 되었다.

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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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家

상앙(商?)·신불해(申不害)·한비자에 의해 대표되는 학파. 그 사상은 춘추시대의 패도에 부응해서 일어나, 전제 지배체제를 지향하는 군주에게 채용되어 진·한의 중앙집권적 고대 제국의 형성에 이론적 기초를 주어 대성한 이후는 유가(儒家)의 정통화에 따라 독자적인 발전이 방해를 받았다. 천하를 다스리는 원리는 인·의·예와 같은 덕치주의보다는 엄격한 법치주의가 근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설은 법(군주가 정하는 규범)과 술(術:법을 행하는 수단)로써 이루어져 있으며, 명(名:명령)과 형(形:실적)의 일치·불일치에 의한 시비의 판단을 술의 중요 요소로 하고 법의 엄중한 이행에 의한 부국강병의 달성과 전제적 군주 권력의 확립을 꾀한 것이다.

한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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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非子 (?

전 233)

한(韓)의 공자(公子). 법가. 전국말에 상앙(商?)의 법, 신불해(申不害)의 술(術), 신도(愼到)의 세(勢) 등 여러 가지 사상을 종합 체계화하여 법가 사상을 대성했다. 『한비자(韓非子)』는 그의 저작이다. 법제를 명확히 해서 신하를 통제하고 강력한 군주권 아래 능력 있는 관리를 써서 부국강병을 꾀할 것을 가르쳤다.

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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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家

제자백가의 하나. “백마는 말이 아니다”를 제창한 공손룡(公孫龍) 등에 의해 대표되지만 결과적으로는 괴변에 빠졌다. 이 명가라는 것은 명(名:槪念)과 실(實:實態)의 관계를 추구하는 사상가로 결국은 명과 실을 일치시키기 위해서 논리를 위한 논리의 전개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요컨대 명을 언(言), 실을 행(行)이라 하여 정치의 장(場)에서 그 일치를 요구함으로써 군주가 관리를 통어하는 방편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공손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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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孫龍

기원전 3세기 중국 조(趙)의 문인(文人). 자는 자병(子秉). 그의 계몽적 궤변(詭辯)으로써 유명한 백마비마론(白馬非馬論), 견백이동론(堅白異同論) 등에 보이는 논리는 사물의 외관과 본체를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한 것으로, 단순한 궤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도(政治道)의 경고로서 쓰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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兵家 제자백가의 하나. 『손자(孫子)』에서 “싸우지 않고 타국의 병사를 압도하는 것이 최선이다”라고 가르친 손자에 의해 대표된다. 『손자』에는 적정(敵情)과 자기 나라의 정세의 파악, 지리적 조건이나 계절에 따라서 고려해야 할 점, 지휘관의 적격성, 전략과 군비, 부대의 편성법 등이 씌어져 있다.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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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子

기원전 6∼5세기경 전국시대의 제(齊)나라 병법가. 이름은 무(武). 자(子)는 존칭. 절도와 규율로 오(吳)의 군대를 양성하였으며 병서(兵書)인 『손자(孫子)』를 지어 유명하다. 그의 병서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인의(仁義)를 전쟁의 기본이념으로 하였는데, 거기에는 전쟁의 전술만이 아니고, 제후(諸侯)의 내치(內治)·외교(外交), 국가 경영의 비결, 승패(勝敗)의 비기(秘機), 인사(人事)의 성패(成敗) 등에 대해서도 비범한 견해를 나타내고, 그의 뛰어난 전략은 후세의 무장(武將) 사이에 널리 이용되었다. 우리나라에도 일찍이 소개되어 애독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한때 역과초시(譯科初試)의 교재로 쓰였다. "남을 알고 자신을 알면 백번 싸워 백번 이긴다”는 명구도 담겨 있으며 『손자병법』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인용 번역되고 있다. 그런데 이 병서의 저자에 관하여는 손무의 자손으로 전국시대 진(晋)에 벼슬한 손빈(孫?)이 지었다는 설, 삼국시대 위무제(魏武帝)인 조조(曹操)가 편찬했다는 설 등도 있다.

음양오행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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陰陽五行說

전국시대의 추연(鄒衍)에 의해 대표되는 학파. 음양설(陰陽說)과 오행설(五行說)은 본디 별개의 사상이나,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에 양자를 보통 병칭하여 음양오행설이라 한다. 이 사상은 전국시대에 이르러 일정한 신상의 형태를 이루어 역(易) 등에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오행설은 우주간의 모든 생성변화(生成變化)를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5요소의 관계에 의하여 설명하는 것으로, 상승설(相勝說)과 상생설(相生說)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