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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통일신라와 발해/호족의 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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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족의 대두〔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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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중엽의 문성왕(文聖王) 이후 귀족들은 지방세력들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왕위쟁탈을 위요한 정쟁(政爭)을 식히고 점차 타협하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골품제에 의하여 중앙의 정치 무대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막힌 이들 지방 세력은 중요한 활동 무대를 해상무역(海上貿易)에서 찾게 되었다. 이리하여 공적인 조공(朝貢)의 형식으로 행해지던 대외무역은 점차 민간무역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은 당뿐만 아니라 일본과도 활발히 교역했다. 그러나 당과의 무역이 가장 성하여서, 신라인의 왕래가 빈번한 산둥반도(山東半島)나 장쑤성(江蘇省) 같은 곳에는 신라방(新羅坊)이 생기고, 이를 관할하기 위한 신라소(新羅所)라는 행정 기관이 설치되었다. 또 거기에는 신라원(新羅院)이라는 사원이 세워졌는데, 장보고가 문등현 적산촌(文登縣赤山村)에 세운 법화원(法花院)은 가장 유명한 것이었다.지방 세력가들의 민간 무역이 성행하는 반면 해적(海賊)의 출몰이 잦았다. 이러한 해적의 출몰은 성행하는 해상무역에 큰 타격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 해상의 군진(軍鎭)이 설치되었다.신라는 본래 변경의 수비를 위하여 육지에 설치하던 군진(軍鎭)을 해적들의 활동이 심한 해안의 요지에 설치하여 이를 방비하였다. 청해진(淸海鎭:莞島)·당성진(唐城鎭:南陽)·혈구진(穴口鎭:江華) 등이 그것이며, 그 중 흥덕왕 3년(828) 장보고(張保皐)에 의하여 설치된 청해진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다.장보고는 해적 출몰의 방비는 물론 국제 무역을 하여 황해의 왕자가 되었고, 다시 중앙의 정치에도 간여하였다.장보고의 경우와 유사하게 지방에서 일정한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대를 이어가며 행사하는 세력가들이 이 시기에는 수없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보통 성을 쌓고 스스로 성주(城主)라고 자처하였다.9세기 이후에 나타난 신라 사회의 이러한 커다란 변화는 상업 발달에 따른 대상인(大商人)의 대두와 대토지 소유의 확대로 점차 구체화되었다. 중앙 집권 체제의 약화에 따라 지방의 토호와 귀족들은 점탈 또는 매매의 방법으로 농장을 확대하여 대지주로 성장하였다. 또 신라 지방 행정의 말단인 촌락의 인민을 통제하던 촌주(村主)도 역시 토지와 인민을 다스리며 세력을 확장해 갔다. 약화된 국가 권력은 이들 지방 세력을 규제할 수 없었다. 한편 국가의 비호 밑에 발달한 사원도 면세(免稅) 특권을 가지고 토지를 겸병(兼倂), 농장을 확대해 갔다.

호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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豪族

지방에서 재산이 많은 세력자 및 그 일족. 토호(土豪)라고도 한다. 특징으로서는 무엇보다도 토착적 성격에 있으며, 광대한 사유지를 소유하고, 중앙의 귀족으로부터 때로는 멸시를 받기도 하였으나, 그 지방에서는 일반 주민들로부터 혈통상 존중되기도 하던 지방귀족이기도 하였다. 한국에서는 국토가 확대되었음에도 국도(國都)가 남쪽 끝에 편재하여 국가의 권력이 전국 깊숙이 미치지 못한 통일신라 후기에 호족 세력이 곳곳에 대두하여 정부 권력을 크게 잠식하였고, 고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의 통일과정에서 이들 호족세력을 회유하는 등 교묘히 다루었다.태조의 정비(正妃) 6명과 기타 부인 23명 등 29명은 모두 태조가 지방의 호족, 공신(功臣)·귀화귀족(歸化貴族) 등과 유대를 맺기 위한 혼인 정책에 따라 취한 그들의 딸들로 이 가운데 경주의 평준, 합주의 이원, 춘주의 왕유, 서경의 김행파, 신주의 강기주 등 유력한 호족들이 그들의 딸을 태조에게 바쳐 세력보전을 꾀하였는데, 특히 서경의 김행파는 두 딸을 혜종(2대)과 정종(3대)에게 바쳐 중복된 외척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태조는 또한 지방호족을 회유하여 그들에게 중앙관직의 위계(位階)와 똑같은 명칭의 향직위(鄕職位)를 주고, 중앙정부를 축소한 듯한 조직을 갖게 하여 지방자치를 맡게 하는 한편, ‘기인(其人)’이라 하여 호족의 자제를 인질로 선상(選上)케 하여 그 세력을 견제하였다. 고려시대의 호족 세력은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성종 이 후부터 상대적으로 약화되어갔다.

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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村主

대략 삼국시대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동안 지방 사회의 통치에 있어서, 그 지배 체제의 말단에 예속되어 촌락을 지배 통솔하던 토착 수장급(首長級)의 호칭이다. 그 연원은 고대 국가의 발전 과정에서 부족사회의 크고 작은 촌락 집단을 이끌던 족장세력이 정복세력에 의해 정치상의 중간 역할을 담당, 흡수 편성되면서 시작된다. 신라의 경우, 역시 고대국가의 출발기라 할 수 있는 눌지왕(訥祗王)대의 자료에 의하면, 그 옛 이름이라 할 수 있는 촌간(村干)이라는 명칭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 제도적인 확립은 대략 신라의 집권적 체제가 일단 정비되는 법흥왕(法興王)대 이후라고 생각되며, 현재 그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는 진흥왕(振興王)대의 금석문(金石文)에서 찾을 수 있다.촌주는 시대의 진전에 따라 몇몇의 자연 촌락을 지배 통솔하는, 즉 지역촌의 촌주 형태를 띠었다.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전대(前代)의 족장적(族長的) 성격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이므로, 물론 지배 계층에 속할 것이지만, 중앙 귀족에 예속되는 것으로서 대략 중간 계층적인 위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대체로 삼국시대까지는 특히 중앙의 지배계층과 보다 엄격히 구분되었으리라고 생각되는데, 그들에게 적용되는 관계(官階)는 소위 ‘외위(外位)’라고 하여 중앙과는 별도로 책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문무왕(文武王)대 이후 중앙의 위계(位階)로 일원화하였으며, 골품체제로서 신분상의 한계는 잔존하고 있었지만 경향(京鄕)의 구별은 완화된 듯하다. 골품제도에서의 위치는 진촌주(眞村主)가 5두품(五頭品), 차촌주(次村主)가 4두품(四頭品)에 해당되고 있다.임무는 대략 지방 사회의 행정은 물론 역역동원(力役動員), 군사 통솔 등 지방사의 전반에 걸치는 것으로 후대의 향리(鄕吏)에 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후대 기인제(其人制)에 선행하는 상수리제(上守吏制)에 의해, 일정 기간 상경하여 중앙 하급 관부의 직역(職域)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경제적 기반은 초기에는 잘 알 수 없으나, 신라의 집권적 체제가 가장 절정에 달했던 8세기 경에는 대략 19결(結) 정도의 토지를 촌주위전(村主位田)이라는 명목으로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지방 사회에서의 현실적인 여건은 그 이상의 토호적(土豪的) 기반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적 지방 사회의 토착 지배세력이라는 성격은, 신라의 중앙통제력이 해이해지면서 점차 독자적인 지역세력으로 발전하였다.대촌주 중에는 성주(城主)·장군(將軍)을 칭하는 자가 나오고, 군소촌주들은 그 관부(官府)에서 시랑(侍郞)·대감(大監) 등의 직책을 맡는 하나의 독립 세력, 즉 나말여초(羅襪餘草)의 소위 호족세력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러한 호족 연합이 고려 왕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그들은 신생 고려 왕조의 주체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다시 고려 왕조의 집권적 체제가 일단 정비되는 성종 때에 이르러서는 아직 중앙으로 진출하지 못했던 촌주의 후예(後裔)들이 향리로 재편성되었다. 그리고 명칭 또한 촌장(村長)·촌주(村主) 등으로 개명되었다.

신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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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坊

당에 있던 신라인의 거주지(居住地).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면서부터 점차 해상활동을 활발히 벌여 당·일본과 무역할 뿐만 아니라 해상 무역 활동이 편리한 곳에 이민하여 집단적으로 거주하였다. 당의 해안 지방에 있는 집단 거주지를 신라방이라고 하는데, 그 중 신라인을 다스리기 위한 총관까지 배치한 산둥성 등주(登州)의 것이 유명하였다.또 문등현(文登縣) 적산촌(赤山村)에는 적산원(赤山院)이란 신라인의 사찰이 세워져 신라와 일본에서 승려가 왔으며, 후에 장보고(張保皐)가 해상권을 장악하자 해상무역이 신라인의 독점이 되면서 더욱 번영했다.

신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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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所

신라인이 당에 설치한 자치적 행정 기관. 신라방에 거주하는 신라인을 다스리기 위해 설치했다.

신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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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院

신라인이 당에 세운 사찰. 신라인은 당의 산둥성으로부터 장쑤성에 걸쳐 많이 살았는데, 이들 집단적 거류지인 신라방 안에 절을 세워 신라원이라 했다.

청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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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海鎭

흥덕왕 3년(828) 장보고(張保皐:弓福)의 청에 의하여 지금의 완도(莞島)에 설치하였던 진(鎭). 당나라 서주(徐州)에 들어가 군중소장(軍中小將)을 지내던 장보고는 중국인들이 종종 신라의 변방 사람들을 잡아다가 노비(奴婢)로 삼는 데 격분, 귀국하여 이를 막기 위해 청해진을 설치할 것을 왕에게 청하였다. 왕은 이를 수락, 장보고를 청해진대사(淸海鎭大師)로 임명하였다. 이에 장보고는 군사 1만 명으로써 이곳을 중심으로 서남 해안의 해상권을 잡고, 당시 성행하던 해적의 출몰을 소탕하는 한편 중국·일본간에 끼여들어 해상 무역의 패권을 잡았다. 이로부터 청해진은 중계무역항으로 해로(海路)의 요충이 되었다.

장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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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保皐 (?

846)

신라 말기의 무장(武將). 별명은 궁복(弓福)·궁파(弓巴). 일찍이 당 서주(徐州)에 건너가 무령군 소장(武寧軍小將)을 지내고 돌아와 흥덕왕에게서 1만 병사를 얻어 청해(淸海, 莞島)에 진을 설치하고 청해진대사가 되었다. 그 뒤 해적을 일소하고 해상권을 장악하여 당·일본 사이의 무역을 관장하여 큰 세력을 이루었다. 신무왕 1년(839) 민애왕(閔哀王)을 죽이고 우징(祐徵)을 왕으로 추대하여 감의군사(感義軍使)가 되었다. 신무왕이 죽은 후 진해장군(鎭海將軍)이 되어 문성왕 2년(840) 일본에 무역 사절을 파견하고 당에도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를 보내는 등 삼각무역을 실시했다. 동왕 7년(845) 딸을 왕의 차비(次妃)로 삼으려 했으나 실패하여 불만을 품고 있던 중, 이듬해 조정에서 보낸 자객(刺客) 염장(閻長)의 거짓 항복에 속아서 그에게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