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통일신라와 발해/골품제도의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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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품제도의 모순〔槪說〕[편집]

신라 문화가 절정기에 도달한 경덕왕 때는 사회적으로 새로운 변화가 싹트던 때였다. 진골 귀족들의 전제주의(專制主義) 타도를 위한 운동이 나타나자 경덕왕은 정치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렇다할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혜공왕(惠恭王) 때에 이르러 대공(大恭)의 난을 필두로 하여 정치적 혼란이 번져 일어났다. 전국의 96각간(角干)이 서로 싸웠다고 하는 대공의 난이 3년 동안 계속된 후 혜공왕 10년(774)에는 드디어 귀족파인 김양상(金良相)이 정권을 탈취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귀족의 반란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성덕왕 1년(780)에는 김지정(金志貞)의 난이 일어나 김양상(金良相)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선덕왕(宣德王)이다. 선덕왕의 뒤에는 원성왕(元聖王)이 즉위하였는데, 이후 왕위는 원성왕의 계통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그리고 이 이후를 보통 하대(下代)라고 부른다. 이러한 변동은 왕권의 전제주의적 경향에 대한 귀족들의 반항으로 초래된 것이었다. 그 결과 하대의 신라는 귀족 연립적인 방향을 걷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 대한 반동이 일어났다. 헌덕왕 14년(882) 김헌창의 난이 그러한 것이었다.그러나 전제적인 왕권을 타도하는 데 힘을 같이한 귀족들 상호간에도 난투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하대 약 150년 간에 20명의 왕이 교체되어 왕권은 약화되고 중앙집권적 율령 체제는 붕괴되어 갔다. 이제 왕위는 혈통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실력과 무장력의 우열로 결정되었다. 흥덕왕(興德王)이 죽은 후 희강왕(僖康王)에 이어 민애왕(閔哀王)이 즉위하자 균정(均貞)의 아들 김우징(金祐徵)은 청해진대사 장보고를 움직여 민애왕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르니 곧 신무왕(神武王)이다. 육두품은 신라의 골품제 사회에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할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학문적인 식견에 의한 정치적 참여의 길을 걷는 경향을 보였다. 그들의 식견의 원천은 대개 유교적인 교양이었다고 생각되지만 그것은 당에로의 유학에 의하여 충족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사비(私費)로 당에 유학하는 사람들이 늘었으니 최치원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하겠다. 최치원과 함께 최승우(崔承佑)·최신지(崔愼之)는 당시 삼최(三崔)로 불리는 유명한 학자들이며, 육두품인 최씨 일문(一門)이 지니는 사회적 지위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김지정의 난[편집]

金志貞-亂

선덕왕 1년(780) 신라의 왕족 김지정(?-780)이 일으킨 반란. 신라 후기에 연달아 일어난 왕위쟁탈을 위한 골육상쟁의 하나. 어려서 왕위에 오른 혜공왕은 사치와 방탕이 심하여 나라의 기강이 문란해졌다. 이에 이찬(李飡)이던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궁궐을 포위하고 왕과 왕비를 죽였으나, 반란은 상대등 김양상(金良相), 이찬, 김경신(金敬信) 등의 반격으로 평정되고, 왕위는 김양상이 계승하였다.

김헌창의 난[편집]

金憲昌-亂

김헌창이 자기의 부친 주원(周元)이 왕이 되지 못한 것에 원한을 갖고 일으킨 반란. 신라 말기는 정치적인 혼란기를 겪으며 왕위 쟁탈을 중심으로 음모·반역·골육상잔(骨肉相殘)의 난이 그치지 아니하였다. 김헌창의 난도 이러한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김헌창은 나라 이름을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며, 무진주(武珍州:光州)·완산주(完山州:全州)·청주(菁州:晋州)·사벌주(沙伐州:尙州)의 4도독을 위협하니 국원(國原:忠州)·서원(西原:淸州)·금관(金官:金海) 등의 관리들과 모든 군·현의 수령들이 이에 항복하였는데, 청주 도독 향영(向榮)은 도망하여 퇴화군(堆火郡:密陽)으로 갔으며, 한산(漢山:廣州)·우두(牛頭)·삽량(?良)·패강(浿江)·북원(北原:原州) 등에서는 난이 일어난 것을 알고 수비하였다. 완산(完山:全州) 장사(長史) 최웅(崔雄)은 아찬(阿?) 정련(正連)의 아들 영충(令忠)의 도움으로 서울로 도망하여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였다. 왕은 장군 8명으로 서울을 지키게 하고 장웅(長雄)·위공(衛恭)·제릉(悌凌)으로 헌창을 치게 했다. 장웅은 도동현(道東峴)에서 헌창의 군사를 격파하고, 위공과 제릉은 장웅과 합세하여 삼년산성(三年山城:報恩)을 공격한 다음 속리산(俗離山)에서 헌창의 군을 격멸하였다. 균정(均貞)은 성산(星山)에서 승리하고 제군(諸軍)이 웅진에 모여 김헌창의 군대를 격멸시키니 김헌창은 웅진성으로 들어갔다. 이에 다시 이를 공격하여 함락시키니 김헌창은 자살했다. 그 후 헌창의 아들 범문(梵文)은 고달산적(高達山賊) 수신(壽神) 등과 난을 일으켰으나 이것도 실패하였다.

흥덕왕[편집]

興德王 (?

836)

신라 제42대 왕 헌덕왕의 동생(재위 826

836). 헌덕왕 11년(819) 상대등이 되었다가 826년에 즉위했다. 즉위 초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신라왕에 책봉되었다. 동왕 3년(828) 대아찬 김우징(金祐徵)을 시중에 임명하여 정사를 맡기고 장보고(張保皐)를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로 삼아 해적의 출몰을 막았다.

신무왕[편집]

神武王 (?

839)

신라 제45대 왕. 성명은 김우징(金祐徵). 원성왕의 증손이며 희강왕의 종제(從弟). 흥덕왕 3년(828) 대아찬으로 시중이 되었다가 동왕 6년(831) 면직됐으나 동왕 9년(834) 다시 시중이 되었다. 흥덕왕이 죽고 김제륭(金悌隆:僖康王)이 왕위에 오르려 하자 아버지 균정(均貞)을 추대하여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신무왕 1년(839) 4월 장보고를 움직여 대군을 이끌고 서울로 쳐들어가 민애왕(閔哀王)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최치원[편집]

崔致遠 (857

?)

신라말의 학자. 경주 최씨(崔氏)의 시조.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 경문왕 9년(869) 당에 유학하여 동왕 14년(874) 과거에 급제하고, 선주표수현위(宣州漂水縣尉)를 거쳐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朗侍御史內供奉)에 올랐다. 헌강왕 5년(879)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표장(表狀)·서계(書啓)·격문을 지었는데, 특히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알려져 있다. 동왕 11년(885) 귀국하여 시독(侍讀)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守兵部侍朗)·지서서감(知瑞書監)이 되었으나 국정의 문란을 통탄하여 외직을 청원, 대산(大山)·천령(天嶺)·부성(富城) 등의 태수를 지냈다. 진성여왕 8년(894) 시무(時務) 10여 조(條)를 상소하여 시행케 하고 아찬이 되었다. 그 후 난세(亂世)를 비관하여 각지를 유랑하다가 해인사에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 저서에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중산복궤집(中山覆?集)』 『석순응전(釋順應傳)』 등이 있다.

귀족의 발흥[편집]

貴族-勃興

대내외적으로 안정된 체제를 유지하던 신라는 8세기 후반에 들어 정치적 혼란이 일어났다. 혜공왕(惠恭王)대에 일어난 수차례의 귀족들의 반란으로 왕이 피살된 이후 신라말까지, 유력한 진골

귀족들에 의한 반란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약 150년 사이에 20명의 왕이 즉위 하였으며, 중 상당수가 피살되었다는 사실은 이 시기 혼란한 정치상의 한단면을 말해준다. 왕위계승에서 태종무열왕의 후손들은 배제되었고, 방계에서 등장한 이들의 왕위를 이어가게 되었다. 780년 이후 시기를 『삼국사기』에선 하대(下代)라 하였다.이렇듯 8세기 후반 이후 귀족세력이 발호하게 된 원인으로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신라 중세의 강력한 왕권을 정점으로 하는 집권체제가 지닌 자체의 한계를 일차적으로 지적할 수 있다. 골품제에 의해 권력은 소수의 진골귀족이 독점하였으며, 그에 따라 녹음·농장·목장·노비 등 막대한 부가 진골귀족들에게 집중되어갔다.그리고 과거제와 같이 보편성을 지닌 인재등용제도가 없는 상황에서 관직에 나아가려는 이들은 자연 추천을 받기 위해 귀족과 사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 특히 긴 평화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사회분화가 진전되고 지역간의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생존과 입신을 위해 많은 수의 지방민들이 귀족의 문화를 찾게 되었다. 다수의 문객(門客)들은 귀족의 정치적 기반의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귀족의 세력이 점차 비대해지자, 이를 억제하려는 왕권과 귀족간에 충돌이 발생하였고, 나아가 진골귀족 상호간에도 분쟁이 발생하였다. 그것이 혜공왕대에 일어난 일련의 내란이었다.신라 하대에 일어난 빈번한 왕위계승 분쟁에서, 어느 한 파가 결정적인 승리를 얻지는 못하였다. 정권은 사병을 거느린 유력한 진골귀족들간의 타협에 의해 성립된 일종의 연립정권적인 성격을 지녔다. 왕권은 약화되었고, 귀족회의의 의장격인 상대등(上大等)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 빈번한 분쟁으로 인해 집권 귀족세력의 구체적인 인적 구성에서는 변화가 있을지라도, 진골귀족층의 세력 자체는 오히려 커져갔다. 귀족은 잦은 논공행상(論功行賞)과 고리대(高利貸) 등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고, 각지에 대농장을 소유하였다. 일부 중앙정계에서 밀려난 귀족들은 지방에 정착하여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귀족의 문객은 자신의 장래를 보장해줄 귀족과의 사적인 주종관계를 왕과의 군신관계에 우선하게 되었다. 귀족은 그 문객의 일차적인 충성이 대상이었다.대신 귀족은 문객에게 장래를 보장해주어야 계속 그들의 충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는 또다른 정변을 촉발하였다.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기존 체제의 모순을 지양하기 위한 개혁방안이 거듭 제기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진골귀족층의 기득권을 근본적으로 위협할 수도 있는 것이므로, 집권세력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9세기 전반에는 오히려 골품제를 강화하여 신분에 따라 사회 생활 전반을 엄격히 통제함으로써 질서를 재확립해보려는 시도가 행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고식적인 현상유지책에 불과하였다. 6두품 이하의 신분층과 새롭게 등장하는 지방 호족(豪族)들은 점차 신라라는 국가의 틀 바깥에서 그들의 내일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