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통일신라와 발해/9~10세기경의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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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세기경의 한국〔槪說〕[편집]

9세기에서 10세기에 이르는 2세기는 골품제(骨品制)를 기반으로 하는 신라 고대 국가가 붕괴되고, 그 속에서 호족 출신인 왕건(王建)이 나타나 고려를 세웠으며, 그 고려가 점차 봉건적인 귀족 국가로 확립되는 시기였다. 동시에 중국에서도 당(唐)이 망하고 5대(五代)라는 혼란기가 송(宋)에 의해 수습·통일되면서 한(漢) 문화가 복구되어 가는 시기이며, 한편으로는 북방 민족의 재등장이 촉진되고 있어 그 세력이 커다란 압력으로 남방에 미치던 때였다. 다시 말하면 성당 문화(盛唐文化)가 밀려들어 통일 신라의 문화가 극성기에 달했던 8세기를 끝으로, 신라는 당의 쇠퇴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폐쇄적인 지배 체제의 모순이 격화되어 드디어 붕괴되었으며, 후삼국(後三國)이라는 과도기를 거쳐 10세기에 이르러 고려 왕조로 재정비되어 갔던 것이다. 특히 이 시기는 중국의 간섭이 없는 독자적인 ‘좌절과 흥기(興起)’의 반복으로써 고대 국가가 붕괴되는 역사의 일대 전환점이 되는 때였으며, 외부 도전과 압력에서가 아니라 내부적인 승화 과정이 촉진되었던 시기였다.7세기에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무열왕(武烈王)의 전체적인 왕권과 성당 문화의 흡수로써 8세기에 고대 국가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부족적 전통이 강했던 신라는 8세기 중엽 경덕왕(景德王) 때에 일련의 관제 개혁을 시도함으로써 귀족 세력을 억제하려 했으나 이에 실패하였고, 8세기말 혜공왕(惠恭王) 때에는 원래대로 환원됨으로써 전제 왕권의 한계성이 나타났다.9세기의 소위 하대(下代) 귀족 연립 사회의 모순은 곧 고대 국가의 붕괴 원인이 된 것으로서 골품(骨品)제도의 붕괴에서 그 최초의 양상이 나타났다. 이것은 내물왕(奈勿王)계(系)와 무열왕(武烈王)계 간의 단순한 왕권 쟁탈전이 아니라 골품이 분화되어 친족, 나아가서는 가(家)의 분립(分立)에 따른 분열 항쟁에서 비롯된 것이며, 같은 왕족에서도 도태·갈등이 촉진되어 혈통 위주가 아닌 실력 본위로 되었음을 뜻한다.이러한 골품제에 대해 예민한 반발을 한 계열은 물론 6두품(六頭品)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무열왕계인 무염(武染)이나 김유신(金庾信)계인 김암(金巖) 등 강등된 계열과 최치원(崔致遠)·최신지(崔愼之) 등 중앙의 6두품 계열 등이 대표적이어서 이들이 골품제의 모순과 한계를 자각하여 정신적·학문적 반(反)사회성을 띠는 경우가 있었고, 또 일부는 실력으로 지방 세력과 결탁하여 중앙에 도전함으로써 이들 창조적인 소수 세력이 지도력을 상실한 사회에 파탄과 균열을 강요하고 있었다. 둘째, 지방 세력의 대두이다. 중앙 귀족의 분열 항쟁과 골품제의 해이는 자연히 중앙 통제력의 약화로 나타났기 때문에 지방 세력의 등장은 필연적이었다. 그 중에서 서해안을 통해 당과의 교역에서 경제적인 배경을 지니게 된 해상 세력과 각처에서 성주(城主)·장군·왕을 칭하고 자립한 호족(豪族)들이 대표적이었다.이들은 각기 커다란 경제력·토지·사병(私兵)을 거느린 지방 세력으로 각지의 인민과 토지를 지배하고 조세와 부역을 징발하여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앙에 도전하여 무질서와 혼탁의 시대상을 연출했다. 이들은 이중적인 착취 속에서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농민을 이끌고 반란과 항쟁을 지도하였으니, 장보고(張保皐)·궁예(弓裔)·견훤(甄萱)·왕건(王建) 등이 이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으며, 농민들은 초적(草賊)·군도(群盜)로서 이들에게 이끌렸다. 따라서 변방을 지키던 군진(軍鎭) 세력 역시 관병(官兵)으로서가 아니라 사병(私兵)으로서 해상 세력으로 변질되어 갔으며, 이들이 지방 세력의 군사적인 배경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셋째, 사상의 변화였다. 신라 왕실의 종교는 불교, 특히 교종(敎宗:5敎)이었다. 그러나 9세기 이후 골품제의 붕괴와 사회 혼란의 가중은 복잡한 교리를 외면하게 되었고, 학구적이고 여유 있는 생활관이 아니라 불가사의한 힘으로써 요행과 현세의 정신적 위안을 바라게 되었다. 따라서 풍수도참사상(風水圖讖思想)이나 미륵불사상(彌勒佛思想)이 도입되었으며, 또한 이때를 대표하는 선종(禪宗:9山)이 유행되었다.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하여 좌선에 의해 미래상을 현세적으로 심화하려는 것이며, 이러한 교파의 대두는 정치적·사회적 혼탁기와 일치되는 바 크다. 특히 선종의 유입과 동시에 종래의 유학과 풍수도참사상 및 도교 등이 종합화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이때의 정신계를 잘 나타내고 있다. 나아가서 일련의 사상적인 복합화가 다름아닌 6두품 계열과 호족에 의해서 추진되었다는 사실이 고대 국가의 정신적 탈피 현상이라 하겠다.후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인 궁예와 견훤은 각기 왕족 출신, 신라 무장 출신이었으나, 전자는 사회를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파괴와 부정의 괴수에 불과하였으며, 후자는 신라 관리로서의 권능과 지위를 유지하려 했던 신라 사회의 계승자를 자칭하였으므로 골품사회를 넘어서려는 당대에서는 광범한 사회적 호응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따라서 호족 출신인 왕건은 우선 시대성을 파악하여 호족과 당대 선가(禪家)·숙위(宿衛) 학생들의 이념을 고대적 신라 사회의 성격을 바탕으로, 그들과 공존하여 탈피하면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고대적 잔재의 완전 극복이 불가능했던 제한성 때문에 고려 사회에서는 골품제 대신 가문과 혈통이 강조되었다. 따라서 고려 귀족 사회의 성립 과정은 첫째, 광범한 호족의 결속과 유대 속에서 이루어졌다. 때문에 각처의 호족과 그 후 왕실 내의 근친혼의 성행, 그리고 그들을 중앙 귀족으로 흡수하는 데는 커다란 노력이 요구되었다.둘째, 나말(羅末)의 선종과 풍수도참사상뿐 아니라 유교가 치국지본(治國之本)으로 채택되었고, 새로운 귀족 사회의 정치이념의 발달에 따라 과거제의 실시로 중앙귀족적 관료체제로의 전기(轉機) 속에서 이룩된 것이다. 나아가서 10세기말 성종(成宗) 때의 중앙 및 지방제도의 정비는 관료의 지위를 결정하는 고려 귀족국가 형성의 마지막 기틀을 이룩한 것이다.셋째, 전시과(田柴科)의 지급이다. 이것은 귀족 관료제 형성의 경제적 기반이 되는 것으로서, 태조(太祖) 때의 역분전(役分田)이 호족들의 회유와 결속을 위한 조치였다면, 경종(景宗) 때의 전시과는 관료제와 조화를 이루는 제도적 발전이었으며, 목종(穆宗)·문종(文宗) 때의 전시과에 의해서 비로소 완성을 보아 고려 귀족사회는 그 모습이 뚜렷하게 부각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