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통일신라와 발해/발해의 건국과 문화
발해의 건국과 문화〔槪說〕
[편집]중국 둥베이(東北) 지방 동부·연해주·한반도 북부에 있던 나라(698
926년). 발해에 관한 기록은 『구당서(舊唐書)』 발해 말갈전과 『신당서(新唐書)』 발해전에 전하는데, 모두 발해를 말갈의 나라라고 기록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발해를 신라와 이웃한 나라로 여겼을 뿐 한국사에 포함시키 않았다. 조선 후기에 실학자 유득공(柳得恭)이 발해사를 우리 역사라고 주장한 이래 그것을 한국사에 포함시키는 것을 당연시하였다.최근에는 통일신라와 발해가 병존한 시기를 남북국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669년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2만 8천여 가호를 중국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이때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大祚榮:뒤의 고왕)도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乞乞仲象)과 함께 요서지방의 영주(營州:조양)로 옮겼다. 당시 영주는 당이 북동방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운영한 전략도시였다.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이 약회되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696년 5월 마침내 거란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홰(趙?)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틈을 타서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말갈인과 함께 영주를 빠져나와 만주 동부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대조영은 추격해 오는 당군을 천문령(天門嶺) 싸움에서 크게 무찌른 뒤에 만주 동부지방에 남아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규합하여, 698년 길림성 돈화현(敦化縣) 부근의 동모산(東牟山:육정산) 기슭에 진국(震國:振國)을 세웠다.당은 발해의 건국이 기정사실이 되고, 게다가 요서지역에 대한 돌궐(突厥)·거란·해(奚) 등의 압력으로 요하유역과 만주일대에 대한 지배가 사실상 어려워지자, 705년 사신을 보내 발해의 건국을 인정하였다. 더구나 713년에는 대조영에게 발해군공(渤海郡公)이라는 관직을 수여하였는데, 이로부터 나라 이름을 발해로 바꾸었다. 발해의 시조인 대조영의 출신에 대해서는 본래 고구려의 별종(別種)이었다는『구당서』의 기록과,속말갈인(粟末靺鞨人)이었다는 『신당서』의 기록이 병존한다. 종래 이 때문에 이를 둘러싼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한편, 우리나라 기록인 『신라고기(新羅古記)』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 대조영을 고구려 장수라고 표기하였다. 대조영의 출생과 성장과 정에 관한 더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대조영이 죽은 뒤 대무예(大武藝)가 2대 무왕(武王)에 즉위하였다. 그는 연호를 인안(仁安)이라 정하고, 영토확장에 힘을 기울여 북동방면의 여러 종족을 정복하였다. 발해의 세력이 강해지자, 흑수말갈(黑水靺鞨)이 발해와의 화친관계를 깨고 당나라에 보호를 요청하였다. 이에 반발한 무왕은 동생 대문예(大門藝)에게 군대를 이끌고 흑수말갈을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대문예는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당에 망명하였다. 이때문에 당과 발해는 대문예의 송환 문제를 둘러싼 외교분쟁을 수차례 일으켰다. 이러한 와중에 732년 가을 거란이 사신을 보내와 함께 당나라를 칠 것을 제안하자, 그해 9월 발해는 장군 장문휴(張文休)를 보내어 등주(登州:산동성 봉래)를 급습하였다. 당은 유주(幽州:북경)에 대문예을 보내어 발해를 공격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737년 무왕이 죽고 대흠무(大欽茂)가 3대 문왕(文王)에 즉위하여 대흥(大興)·보력(寶曆)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1
2대 왕을 거치면서 국가기반이 확립되자, 문왕은 내부의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는 먼저 중국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3성(정당성·중대성·선조성) 6부(충·인·의·예·지·신부) 제도를 실시하는 한편, 지방에도 경부(京府)·주(州)·현(縣)으로 구성된 3단계의 통치체계를 갖추었다. 또 문왕은 750년대 전반경에 수도를 동모산에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로 옮겼다. 그의 말년에 수도를 일시적으로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흑룡강성 휘춘현 팔련성)로 천도한 적도 있으나, 성왕(成王)대에 다시 이곳으로 옮겨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상경은 당나라 수도인 장안성(長安城)의 축소판이라 할 정도로 그것을 모방하여 정비한 도시였다. 대외적으로는 동북방면의 말갈부락을 복속시키고 그곳에 부(府)를 설치하였다.이러한 대내외적인 정비를 통하여 국력이 향상되자, 762년 당은 문왕에게 한 등급 높은 관직인 발해국공(渤海國公)을 수여하였다. 793년 문왕이 죽은 이후 성왕(成王)·강왕(康王)·정왕(定王)·희왕(喜王)·간왕(簡王)이 차례로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별다른 치적은 없다. 간왕에 이어 그의 종부(從夫)이며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大野渤)의 4대손 대인수(大仁秀)가 선왕(宣王)에 즉위하였다. 선왕은 흑수말갈을 비롯한 대부분의 말갈세력을 복속시키고, 또 요동지방에 대한 당의 지배가 약해진 틈을 타서 요하유역까지 진출하여 그곳에 목저주(木底州)·현토주(玄兎州)를 설치하였다. 이후 요동 진출을 본격화하여 10세기 초에 거란이 이곳으로 진출하기까지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계속 유지하였다. 선왕의 대외정복을 바탕으로 발해는 최대의 판도를 형성하였으며, 이에 맞추어 5경(京) 16부(府) 62주(州)의 지방제도가 완비되었다. 이 결과로 발해는 당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얻었다.선왕이 재위 10년 만인 830년에 죽은 뒤
약 100년 간에 걸친 발해 역사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발해가 쇠퇴할 무렵인 916년에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거란족을 통일하고 황제가 되었다. 그는 중원지방으로 진출하려고 노력하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배후세력인 발해를 먼저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침내 925년 12월 말에 야율아보기는 군대를 이끌고 발해를 공격하여 보름 만인 그 이듬해 1월 15일에 멸망시켰다. 이때 발해는 귀족간의 권력투쟁이 극심하였기 때문에 거란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없었다. 이로써 15대 왕 230년 동안 지속된 발해의 역사는 끝이 났다. 거란은 발해고지(渤海故地)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거란 황제의 맏아들로 하여금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발해가 멸망한 뒤에도 발해 유민은 곳곳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며, 그것은 약 200년 동안 계속되었다. 한편, 발해 유민 가운데 수만 명은 고려로 투항하여 한국사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지배층의 주류를 이루었고, 대부분의 피지배층은 말갈족으로 구성된 나라였다. 현재 전하는 발해 귀족의 성씨 가운데 왕성(王姓)인 대씨(大氏) 다음으로 고구려계인 고씨(高氏)가 많았던 것에서 고구려 유민이 지배층의 주류임을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속일본기(續日本記)』에 전하는 『발해국서(渤海國書:일본에 보낸 발해의 외교문서)』에서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공식적으로 주장하였고, 일본도 이를 인정하였다. 또 문왕은 스스로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칭하였을 뿐만 아니라 과거 고구려 왕실이 주장한 ‘천손(天孫)’을 일컫기도 하였다.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발해는 고구려 옛 지역에서 그 유민이 중심이 되어 세운 국가임이 분명하다. 발해가 멸망한 뒤에 발해의 유민은 발해인과 여진인(女眞人)으로 각각 분리되었는데, 이 사실은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상호융합을 이루지 못하였음을 반영한다.
대조영
[편집]大祚榮 (?
719)
발해의 시조. 왕호는 고왕(高王, 재위 699
719년). 걸걸중상(乞乞仲像)의 아들. 대조영은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의 고구려 유민 분산 정책에 따라 요하
서쪽에 이주했다. 그러나 당의 지나친 억압 정책에 반항하여 당군을 크게 격파,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하여 국가 건설의 기반을 굳게 했다. 699년 동모산(東牟山-吉林省敦化 부근)에 나라를 세워 진(震)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정한 후 왕이 되었다. 당의 북진정책을 위협하던 돌궐(突厥)과 손을 잡고 대당 견제세력을 구축했다. 705년 당과 화친하고, 713년 당으로부터 발해군왕(渤海郡王)에 봉해져 국호를 발해라 고쳤다. 그는 고구려의 옛 땅을 거의 회복하여 해동성국을 이룩했다.
무왕
[편집]武王 (?
737)
발해 제2대 왕(재위 719
737년). 성명은 대무예(大武藝). 고왕의 아들로 연호를 인안(仁安)이라 하고 일본과 수교하여 문물을 교환했다. 726년 아우 문예(文藝)를 시켜 흑수말갈(黑水靺鞨)을 공격, 732년 당나라 등주(登州:山東省)를 공략했다.
문왕
[편집]文王 (?
793)
발해 제3대 왕(재위 737
793년). 성명은 대흠무(大欽茂). 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연호를 대흥(大興)이라 하고 서울을 용천부(龍泉府=東京府)로 옮겼다. 당 문화를 수입, 제도를 완비하고 사적(史籍)을 정리했으며, 주자감을 세워 학문·교육을 장려하는 등 국가 중흥에 힘썼다.
선왕
[편집]宣王 (?
830)
발해 제10대 왕(재위 818
830년). 성명은 대인수(大仁秀).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정했다. 고구려, 부여 등의 옛 땅까지 영토로 하여 해동의 대국으로 군림하고 당의 제도를 모범으로 행정 구역을 설정했다. 당과 밀접한 외교를 하여 문화를 발달시켰다. 이에 발해는 해동성국이라 불리었다.
『발해고』
[편집]渤海考
1784년(정조 8) 유득공(柳得恭)이 한국·중국·일본의 사서(史書) 24종을 참고하여 발해의 역사를 기록한 책. 활자본 1책. 내용은 군고(君考)·신고(臣考)·지리고(地理考)·직관고(職官考)·의장고(儀章考)·물산고(物産考)·국어고(國語考)·국서고(國書考)·속국고(屬國考) 등 9고(考)로 나누어 정사(正史)의 체계로 엮었다. 이 가운데 군고와 지리고 및 속국고 등은 내용에서 문제점이 있으나, 발해사(渤海史)를 독립적으로 다루었다는 점과, 특히 자주적인 입장에서 발해사를 체계화시키고 발해를 우리 국사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발해가 우리 영토라는 사료적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발해국지장편』
[편집]渤海國志長編
1935년 김육불(金毓?:1887
1962)이 저술한 발해의 역사서. 김육불은 만주 랴오둥「療東」 사람이다. 전지(前志) 2권, 정지(正志) 15권, 후지(後志) 3권의 3부문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전지는 총략 상·하(總略上下)로서, 한국을 비롯하여 중국·일본 등 여러 나라의 문헌에서 발해에 관한 기록을 수집 망라하여 기본 자료로 삼은 것이다. 후지는 문징(文徵)·총고(叢考)·여록(餘錄)으로서 문징은 발해 관계의 시(詩)·문(文)을 모은 것이고, 총고·여록은 저자 자신의 연구·논고(論考)에 해당한다. 전지와 후지를 앞뒤로 끼고 있는 정지는 전통적인 기전체(紀傳體)에 따라 기(紀) 2권(세기·후기), 표(表) 4권(연표·세계표·대사표·속부표), 전(傳) 5권(종신열전·제신열전·사서열전·속부열전·유예열전), 고(考) 4권(지리고·직관고·족속고·식화고)으로 되어 있으며 이 책의 핵심을 이룬다. 발해를 건국한 사람을 논하면서 대조영(大祚榮)이 고구려 출신임을 분명히 하고, 발해 문화를 고구려 문화의 계승으로 설명하였다. 한국에서는 『삼국사기』 이 후로 발해에 대하여 무관심하였는데, 실학자(實學者)가 그 부당성을 지적, 발해사에 깊은 관심을 표시하였다. 유득공(柳得恭)은 『발해고』에서 통일신라를 남국(南國), 발해를 북국(北國)으로 하는 남북국설(南北國說)을 제창하고 삼국사(三國史) 다음에 남북국사를 엮을 것을 역설하였으며, 한치윤(韓致奫)은 『해동역사』에서 발해를 고구려·백제·신라·고려와 같은 비중으로 다루었다. 이 책은 중국 본위로 엮어졌기 때문에 발해를 보는 관점과 이론에 모순이 없는 것은 아니나 발해사 연구에 크게 기여하였다.
발해의 정치 체제
[편집]渤海-政治體制
발해는 당의 관제를 모범으로 했으나 고구려의 전통을 살려서 정치 체제를 편성하였다. 중앙에는 3성(三省:正堂·宣詔·中臺)·6부(六部:忠·仁·義·禮·智·信)의 행정 조직이 짜여졌다.3성·6부 밑에는 5감(五監)·9시(九侍) 등의 기구를 두었으며, 전국을 5경(京)·15부(府)·62주(州)로 편성하였다. 5경은 국도(國都)인 상경(上京)과 중경(中京, 吉林省樺甸縣城)·동경(東京)·남경(南京, 咸南北靑)·북경(北京)을 가리킨다. 상경은 당의 장안성(長安城)과 그 규모를 같이하여 외성(外城, 羅城)·내성(內城, 皇城)을 두고 시가지를 바둑판같이 구획하였다.
발해의 학문
[편집]渤海-學文
발해는 주자감을 설치하여 귀족 자제들에게 유교 경전을 교육하였다. 휴학생 중에는 당의 빈공과에 급제하는 사람이 나오기도 하였고, 이거정 등은 당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유교 지식인으로 활동하였다. 근래에 발견된 정혜공주 묘지와 정효공주 묘지가 세련된 4·6 변려체로 쓰여 있는 점으로 보아, 발해에서는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몇 편의 한시가 현재 전하는데, 양태사나 왕효렴의 작품이 유명하다.
발해의 문화
[편집]渤海-文化
발해는 고도의 당 문화를 수용하고, 고구려 문화의 전통을 계승함으로써 독특한 발해 문화를 창조하였다. 국도 상경(上京)의 궁전 터에서 온돌 장치, 기와의 연화문(蓮花文), 횡혈식 석곽분(橫穴式石槨墳)이 발견되어 고구려 문화의 영향이 엿보인다. 발해는 불교가 성하였고, 그에 따라 불교 예술이 발달하여 불상·석등 등 우수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발해 문화는 독자성을 띠고 고도로 발달하였지만, 거란에게 망한 뒤 고구려 유민이 고려로 망명하고, 이 지방에 있던 말갈인은 그 문화를 계승할 능력이 없어 후대에 계승되지 못했다.발해인이 남긴 가장 큰 유적은 수도였던 상경의 도시 유지(遺址)이다. 지상건물은 없어졌지만, 궁전과 절 등 주요 건물의 유지와 성곽을 통해 당시의 면모를 파악해 볼 수 있다. 상경은 정연한 도시계획에 따라 건설되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전체 둘레는 16㎞로, 당시 동아시아에서 당나라의 장안성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성내에는 왕성(王城)이 있고, 그 정문에서 남으로 뻗은 큰 도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관청들이 늘어서 있었으며, 그 바깥에 민가들이 있었다. 주요 건물의 유지에선 온돌이 확인된다. 온돌이 고구려의 전통을 이은 것임은 물론이다. 중경과 동경의 옛터에서도 도시 유적이 확인된다. 발해 지배층의 무덤은 돌로 무덤 칸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은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이다. 이런 무덤에서 벽면에 회칠을 하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린 벽화가 발견되고 있다. 이 역시 무덤 양식과 함께 고구려의 전통을 이은 것이다. 18세기 종반 이후에는 벽돌을 사용하여 만든 무덤이 나타나는데, 이 중에도 벽화가 그려진 것이 있다. 그 중 유명한 것이 정효공주(貞孝公主) 무덤의 벽화이다. 이런 무덤 양식은 당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인물화가 중심인 벽화의 기법도 그러하다. 이 밖의 발해 예술품으로 석등과 사자상 등의 석조물과, 대부분 소형인 불상이 전해진다. 그리고 삼채색(三彩色)의 도자기와 연꽃무늬의 기와 등이 있다.
발해의 미술
[편집]渤海-美術
발해시대의 지상 건물은 남아 있지 않으나, 유적의 발굴로 그 웅장함을 알 수 있다. 상경은 당의 장안성처럼 먼저 외성을 두르고, 국왕이 있는 궁성 남문에서 외성 남문까지 직선으로 뻗은 주작대로라는 큰 길을 내었으며, 그 좌우에 여러 갈래의 길을 내었다. 그리고 내성 안에는 여러 개의 궁전이 있었다. 또, 상경 등에서 발견되는 절터의 금당은 내부에 불단이 높게 마련되었고, 좌우에 회랑으로 연결된 두 건물을 두었다. 웅대한 금당을 중심으로 작은 건물이 대칭으로 연결된 구조는 사찰 전체를 웅장하게 할 뿐 아니라, 조화가 잘 이루어지게 하였다. 발해의 조각도 그 솜씨가 뛰어났는데, 불상은 전불이나 철불, 금동불이 있으며, 얼굴이나 광배, 의상 등에 이르기까지 그 조각 수법이 웅장하면서도 균형이 잘 잡혀 있다. 또 정혜공주 무덤에서 나온 두 개의 돌사자 조각은 매우 생동감 있고 힘찬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발해에서는 금·은으로 정교하고 아름다운 그릇이나 사리함을 제작하기도 하였다.궁궐 터나 절터에서 발견된 기와, 벽돌 등의 무늬는 소박하고 직선적이다. 특히 기와는 일반적으로 그 형태와 크기가 아주 다양하며, 질이 좋고 단단하여 실용적이었다. 또, 연화무늬의 기와는 강건한 기풍을 지닌 고구려 와당에서 영향을 받았다.한편, 상경에는 발해의 석조 미술을 대표하는 석등이 남아 있는데, 팔각의 기단 위에 중간이 볼록한 간석이 있고, 간석의 아래와 위에는 탐스러운 연꽃이 조각되어 있어서 힘찬 느낌을 준다. 또 발해의 자기는 무게가 가볍고 광택이 있는데, 당에 수출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발해의 미술은 패기가 넘치던 고구려 미술이 계승되어 어느 정도 부드러워지면서도 웅장하고 건실한 기풍을 나타내고 있다.
발해고분
[편집]渤海古墳
발해시대의 고분. 길림성 돈화현 육정산(六頂山), 화룡현 북대지(北大地), 흑룡강성 영안현 삼령둔(三靈屯), 대목단둔(大牧丹屯), 풍수위자(風水威子) 및 대주둔(大朱屯), 임구현의 두도하자(頭道河子), 북참서산(北站西山), 사하자(沙河子) 등지에 발해고분이 밀집되어 있다. 그리고 연해주와 함경남북도에서도 고분군이 발견된다. 이 가운데 돈화현 육정산 고분군은 발해 초기의 왕실 무덤들이 있는 곳이고, 상경(上京) 근처에 위치한 영안현 삼령둔, 대목단둔, 풍수위자 및 대주둔의 고분군은 그 이후 시기의 발해 왕실 무덤들이다. 발해고분은 축조의 재료와 규모로 볼 때 돌방무덤「石室墓」·돌덧널무덤「石槨墓」·돌널무덤「石棺墓」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이 밖에도 널무덤「土壙墓」·벽돌무덤「塼築墓」 등도 있다. 돌방무덤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돈화현 육정산 고분에서 발견된 정혜공주(貞惠公主) 무덤과 삼령둔 고분에서 발견된 삼령 고분을 들 수 있다. 특히 1949년에 발견된 정혜공주 무덤은 천장이 말각천정(抹角天井)의 구조인데, 이것은 고구려 후기의 큰 봉토돌방무덤「封土石室墓」의 구조와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정혜공주묘비가 발견됨으로써 육정산 고분군이 발해 초기의 왕실 무덤들이었음이 확인되었다. 돌덧널무덤으로는 육정산 고분군의 12호·103호·104호·203호 고분과 대주둔의 작은 고분들, 두도하자 2호분 등이다. 이들 고분들은 모두 무덤안길「甬道」이 없고 관 1개를 겨우 들여놓을 수 있는 정도의 크기이다. 한편 화룡현 용두산(龍頭山) 고분군에서 발견된 정효공주(貞孝公主) 무덤은 벽돌무덤으로서 축조 재료나 그 안에 그려진 벽화 양식으로 보아 당(唐)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발견된 벽화는 회화사 연구뿐만 아니라 당시의 생활상을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대체로 돌방무덤과 벽돌무덤은 왕족 등을 비롯한 비교적 높은 신분층이 사용한 무덤 양식이고, 돌덧널무덤은 그보다 하위의 신분층이나 관리들이 쓰던 것들이다. 일반인들은 주로 돌널무덤이나 널무덤을 썼다. 매장 방식으로는 단인장(單人葬), 부부합장(夫婦合葬),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묻는 다인장(多人葬), 화장(火葬), 이차장(二次葬) 등이 있다. 발해고분에서 발견된 유물 중에는 도기류가 주류를 이루며, 하남둔(河南屯) 성터 안에서 발견된 하남둔 고분군에서는 순금으로 만든 각종 장식품들이 쏟아져 나온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