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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통일신라와 발해/고대문화의 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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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문화의 융성〔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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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신라의 문화는 사회의 안정과 번영을 토대로 하여 삼국의 높은 문화 유산을 집대성한 데 특징이 있다. 그러나 통일 신라의 문화가 그처럼 난숙할 수 있었던 것은 당 문화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통일 신라시대의 지배적인 사상이 된 불교는 지배층의 적극적 장려로 더욱 융성,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경주 부근에는 사천왕사(四天王寺)·불국사(佛國寺)·봉덕사(奉德寺) 등 대사찰이 세워졌으며, 지방에는 부석사(浮石寺)·통도사(通度寺)·화엄사(華嚴寺)·범어사(梵魚寺)·법주사(法住寺) 등의 대사찰이 세워졌다.불교의 융성에 따라 학덕이 높은 승려가 많이 나왔다. 자장(慈藏)·의상(義湘)·원측(圓測)·혜초(慧超)가 대표적으로 이들은 당 또는 인도에 가서 역경(譯經)과 저술에 종사했으며, 혜초는 인도에 가서 불적(佛跡)을 순례한 후 왕오천축국전을 지어 당시 인도와 서역 여러 나라의 상태를 알려주었다.고승의 배출과 함께 불교의 여러 종파가 수입되었으니, 열반종(涅槃宗)·계율종(戒律宗) 외에 새로이 화엄종(華嚴宗)과 법성종(法性宗)·법상종(法相宗)이 개창되어 이른바 5교(五敎)가 성립되었다. 이들 다섯 종파는 모두 불교의 경전을 중요시하는 교종(敎宗)에 속하는 것으로서, 귀족들 사이에 신봉되었다.원효(元曉)는 여러 종파의 대립·상쟁(相爭)을 높은 차원에서 조화·통일하려 하였으며, 불교의 대중화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전도에 의하여 대중의 지지를 받는 정토교(淨土敎) 신앙을 대중 속에 널리 유행시켰다. 한편 신라 후기 불교계에는 또 하나의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선종(禪宗)의 유행이 그것이다.통일 신라 왕조의 지배층은 불교의 장려와 동시에 유교 사상을 권장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신라의 지배층이 중앙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신문왕 2년(682)에는 국학이 설립되었으며, 원성왕 4년(788)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 제도가 실시되었다. 이러한 유교 진흥책은 종래의 골품제를 지양하고 학벌(學閥) 본위의 관료 체제를 확립하려는 것이었으나 골품제의 강인한 존속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웠다.유학의 보급에 따라 도당유학생(渡唐留學生:宿衛學生)이 증가되고, 강수(强水)·설총(薛聰)·김대문(金大問) 같은 유명한 학자가 배출되어 많은 저술을 남겼다.자연과학, 분야 특히 농업과 천문학 분야에서도 큰 진전을 보여 7세기에는 첨성대(瞻星臺)가 축조되고, 8세기 이후 당의 과학 기술이 수입되어 천문 관측 기구가 제작되었으며, 수학·의학이 발달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신화와 전설이 기록되었고, 통일 전에 발생한 향가(鄕歌)는 더욱 발달하여 풍부한 서정적 내용을 담은 작품들이 많이 나왔다.삼국 시기의 초기 향가는 아마도 가야의 「구지가(龜旨歌)」와 같은 성격의 노래가 그 시초형태였던 것 같고, 따라서 민요적인 소박성을 지녔으며, 주술적 기원을 담은 주가(呪歌)의 요소를 지녔다고 여겨진다. 통일기의 향가에도 그런 전통이 이어지는 면이 보이나, 주술적 기원을 불교신앙을 빌려서 행하는 측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런 점에서 향가는 신라인의 우아하고 숭고한 이상과 기원을 담은 아름다운 종교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소개하는 「제망매가(祭亡妹歌)」는 그러한 한 예이다. 여기서 작가인 승려 월명사(月明師)는 젊은 나이에 죽어간 누이와의 사별(死別)을 서러워하면서, 내세에 아미타불의 서방 극락정토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여, 인생의 덧없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지극한 심신을 표현하였다.또한 이 시기 향가 중에는 종교성을 벗어나 짙은 서정성(抒情性)을 담아 노래하거나, 「처용가(處容歌)」처럼 남녀의 성 문제를 해학적으로 읊은 것도 등장하여, 그 내용과 문학성이 더욱 풍부해졌다.향가의 형식은 원래 4구체(四句體)였던 것 같다. 통일기에도 4구체 향가는 여전히 남아 있었으나, 이 시기 다수의 향가는 10구체(十句體)의 정형시로서 완성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8구체(八句體)의 향가도 지어졌다. 이러한 향가는 9세기 말 진성여왕대에 편찬된 『삼대목(三代目)』에서 집대성되었다. 하지만 이 책은 전해지지 않고, 『삼국유사』에 향가의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이 시기 한시로서는 최치원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최치원은 유(儒)·불(佛)·선(仙)·삼교(三敎)에 깊은 소양을 지닌 빼어난 문장가로서, 한시뿐 아니라 변려체(騈儷體)로 된 다수의 글을 남겨 신라 한문학의 최고봉을 이루었다. 불교의 융성에 힘입어 발달한 미술은 통일 신라의 문화 중 가장 큰 특색을 지니고 그 빛을 후세에 길이 남기게 되었다. 뛰어난 제작 기술과 고상한 미적 감각으로 경탄을 자아내는 신라 미술품 중 가장 정채(精彩)를 발휘하는 것은 석굴암(石窟庵)이다. 조각 미술의 전당을 이룬 석

굴암은 김대성(金大城)의 발원(發願)에 의해 8세기 후반에 축조된 것으로, 신라 예술의 극치를 나타내었다.이 시기 미술의 대표적인 것은 8세기 중엽에 세워진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窟庵)이라 할 수 있다. 불국사는 귀족 김대성(金大成)의 원찰(願刹)로 처음 지어졌는데, 그 목조건물들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불타버렸다. 현존하는 건물은 17세기 중엽과 근래에 각각 복원된 것이다. 정문인 자하문(紫霞門)으로 올라가는 구름다리 층계와 석축은 신라 당대의 것으로, 주변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고 있다. 중문 안을 들어서면 석가탑(釋迦塔)과 다보탑(多寶塔)이 대웅전 앞의 좌우에 서 있다. 이 중 석가탑은 통일기 신라 탑의 일반형인 3층석탑의 대표적인 것이다. 통일기 초에 등장한 3층석탑인 감은사탑이나 고선사탑에선 웅장하고 강건한 품격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이 석가탑 단계에 오면 극도로 세련된 미적 감각과 절제된 균형미가 무르익어 조화의 극치를 보여준다. 3층석탑은 이 단계를 지나면서 세련미가 과도해져 유약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이 역시 신라 귀족사회의 전반적인 기풍의 변화와 유관한 것이다. 다보탑은 신라 석탑의 특수형에 속하는 것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이다. 화려한 모습과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으면서 전체적으로 안정된 균형미를 과시하고 있다. 이 밖에 1966년 석가탑을 수리하던 중 탑에 봉안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발견되었다. 석가탑이 세워진 751년에 간행된 이 불경은 현존하는 것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이다. 당시 불경 등의 서적이 보급됨에 따라 제지술과 인쇄술이 발달하였음을 보여주는구체적인 사례이다.불국사에서도 보이듯이, 탑은 쌍탑식(雙塔式)이 일반적이었다. 탑은 이 시기의 사원 구조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부처를 모신 금당(金堂)의 좌우에 배치되어 그것을 장식하는 부속물의 성격을 지녔다. 이는 통일기에 들어서 불교 교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그 신앙 형태에서도 삼국 시기의 사리신앙(舍利信仰)과 같은 신비적인 요소가 약화되어간 점이 반영된것이다. 이처럼 사원 구조에서는 부처를 모신 금당과 부처의 가르침을 설법하는 강당이 중심을 이루었다. 선종이 대두한 이후에는 새롭게 승려의 수련처인 승방(僧房)의 비중이 커졌다.석불사(石佛寺) 즉 석굴암은 석굴사원의 양식을 취하였는데, 인도와 중국의 그것이 자연암벽에 동굴을 파서 조영한 것인데 비해 신라의 것은 인공으로 석굴을 만들어서 불상을 모신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석굴은 방형(方型)의 전실과 원형의 후실로 구성되어 있다. 전실의 벽에는 금강역사(金剛力士)와 사천왕(四天王) 등이 부조되어 있어, 후실을 지키는 의미를 지닌다. 후실에는 본존불(本尊佛)이 중앙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둘레의 벽면에 부조된 보살과 나한의 상들이 이를 옹위하고 있다. 마치 돌을 갓 지난 어린아이의 그것과 같은 해맑고 유족한 본존불의 얼굴과 그 장중한 풍체는 보는 이로 하여금 따뜻함과 경건함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신라 불교 미술의 정화이다. 이 석굴암과 불국사는 최근 유네스코(UNESCO)에서 보존해야 할 인류문화재의 하나로 지정되었다. 통일기 불교미술품으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특색있는 양식을 지닌 범종으로, 일명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리는 봉덕사종은 대표적인 것이다. 신라 종은 빼어난 소리와 아름다운 문양으로 중국이나 일본의 종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미를 간직하고 있다.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난 사람들의 이름이 전해지나 그들의 작품은 대개 남아 있지 않다. 글씨로는 김인문·김생(金生)·요극일(姚克一) 등이 유명했고, 화가로는 김충의(金忠義)가 유명하였다. 한편 음악도 발달하여 거문고·가야금·비파·피리 등의 악기가 있었고, 옥보고(玉寶高)와 그의 제자 귀금(貴金)은 악곡을 잘 지었다고 한다.

도교의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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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敎-導入

영류왕 7년(624) 고구려에서 당에 사신을 보내어 도교를 청하자 당에서는 도사(道士)로 하여금 천존상(天尊像)과 도법을 가지고 와서 『노자(老子)』를 강(講)하게 한 것이 도교 전래의 최초 기록이다. 그 후 보장왕 2년(643) 연개소문의 청으로 당에서 숙손(叔孫) 등과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을 보내왔으며, 동왕 9년(650)에는 중 보덕(普德)이 국가에서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경시함을 개탄한 일이 있었으니, 고구려가 일시적으로 도교를 매우 숭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당과 문물 교류가 성하여 도교가 상당히 유행하였을 것이나 자세한 기록은 없고, 다만 도교적인 색채를 띤 ‘선도성모(仙桃聖母)’라는 국모신(國母神) 등이 있었다. 그러다가 신라 말엽에 최치원 등이 선도(仙徒)로서 드러났음은 아마 특별한 일일 것이다.

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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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敎

중국의 종교. 신선사상(神仙思想)이 근본이 되어 음양(陰陽)·오행(五行)·복서(卜筮)·무축(巫祝)·참위(讖緯) 등을 더하고, 거기에 도가철학(道家哲學:老莊學)을 도입, 다시 불교의 영향을 받아 성립했다. 그 골자는 불로장생(不老長生)에 있으며 의학·약학·화학·연금술(鍊金術)을 동반하고, 그 위에 신비적인 방술(方術)을 닦음으로써 스스로 진인(眞人:神人·仙人)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민중의 도교는 현세의 이익을 전적으로 하여 농민 폭동과도 관련을 맺어 송나라 이후 『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 『보권(寶卷)』 『공과격(功過格)』 등의 책이 나타났다. 후한 말년에 장도릉(張道陵)의 오두미교(五斗米敎)가 도교의 원류(原流)이며, 그의 자손은 용호산(龍虎山):江西省 소재)에서 정일교(正一敎)를 개교(開敎)하였으나 진(晋)나라 갈홍(葛洪)은 『포박자(抱朴子)』를 지어 일파(一派)를 만들고, 양(梁)나라 도홍경(陶弘景)은 모산파(茅山派:上淸派)를 형성했다.그러나 북위(北魏)의 구겸지(寇謙之)에 이르러 도교로 확립되어 국가적 종교로 불교와 대립했다. 당(唐)·송(宋)시대에는 조정의 지지를 얻어 성행했으나 도사(道士)의 퇴폐(頹廢)를 초래했으므로 금나라 때는 혁신운동이 일어나 전진(全眞)·태일(太一)·진대도(眞大道)의 3파가 일어났다. 도교는 원시천존(元始天尊)을 최고로 하는 다신교(多神敎)로, 불전(佛典)에서 배워 만든 도장(道藏)은 동현(洞玄)·동진(洞眞)·동신(洞神)의 3부(三部)로 나뉘어져 있다. 624년(고구려 영류왕 7) 고구려에서 사신(使臣)을 당나라에 보내어 도교를 청하매 당나라에서는 도사(道士)로 하여금 천존상(天尊像)과 도법(道法)을 가지고 와서 『노자(老子)』를 강(講)하게 한 것이 우리나라 도교 전래의 첫기록이다. 이듬해에는 불(佛)·노(老)의 교법(敎法)을 배워왔으며, 643년(보장왕 2)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청으로 당나라에서 도사 숙손(淑孫) 등 8인과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을 보내왔고, 650년(보장왕 9)에는 반룡사(盤龍寺)의 중 보덕(普德)이 국가에서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경시(輕視)함을 개탄하고 백제로 옮겨간 일이 있었으니, 고구려가 일시 도교를 매우 숭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당나라와 문물교류가 성하여 도교가 상당히 유행했을 것이나 자세한 기록이 없으며, 다만 국모신(國母神)인 서술성모(西術聖母)를 일명 선도성모(仙桃聖母)라 하여 후세에 여선적(女仙的)으로 숭배한 일이 있고 국가의 제사에 오악신(五岳神)을 받들어 어느 정도 도교적 색채를 띠게 되었으며, 말엽에 당나라에 오래 머물던 김가기(金可紀)·최치원(崔致遠) 등이 선도(仙徒)로서 드러났음은 아마 특례일 것이다.고려에 들어와서는 송나라의 숭선(崇仙)의 풍이 조금씩 전래하다가 예종 때에 송나라 휘종(徽宗)이 도사를 보내어 법을 전하니 개성(開城)의 북쪽에 복원관(福源觀)을 세워 삼청상(三淸像)을 모시고 도관(道觀)·도사(道士)를 두었다. 그러나 도교는 국가와 임금의 기축(祈祝)에 그치고 일반 민중의 종교적 발전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고, 겨우 성신(星辰)에 대한 신앙, 부적(符籍)의 사용, 경신(庚申)을 지킨 것 등이 민속화했을 뿐이다. 도교에서 행하는 제사 기도는 재초(再礁)라고 하는데 고려에서는 정사색(淨事色)이란 마을이 있어서 여기에서 행해졌다. 조선에서는 고려의 뒤를 이어 도교의 재초를 행하되 이미 도관(道觀)의 이름을 쓰지 않고 경복궁의 북쪽에 소격서(昭格署)를 두어 거기에 태일전(太一殿)·삼청전(三淸殿) 등을 세우고 천존(天尊)·성군(星君)·신장(神將) 등 수백위(數百位)를 모셔 놓고 때때로 치재(致齋)하였다. 지금의 삼청동(三淸洞)·성제정(星祭井)·소격동(昭格洞) 등이 다 그 유적이다. 그러나 국가적 시설을 떠나서 단학(丹學)과 선풍(仙風) 및 도교에서 나온 습속은 전대(前代)에 비하여 민간에 많이 행해지고 임진왜란 이후에 명군(明軍)에게서 배운 관우(關羽)의 숭배 등이 유행하였다.

사천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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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天王寺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에 있던 절. 679년(문무왕 19)에 창건. 당나라 고종이 신라를 공격하려 하므로 당시 당나라에 가 있던 의상(義湘)은 당에 갇혀 있는 김인문(金仁問)·김양도(金良圖) 등으로부터 사전에 이 내막을 듣고 670년(문무왕 10)에 귀국하여 사태의 긴급함을 문무왕에게 알리고 명랑법사(明朗法師)로 하여금 679년에 사천왕사를 짓고 문두루(文豆婁)의 비법(秘法)을 써서 당병의 침략을 실패로 돌아가게 하였다. 현재 절은 없어지고, 남북이 105m, 동서가 73m의 터만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쌍탑가람제(雙塔伽藍制)에 의하여 된 최초의 절이다. 금당(金堂)을 중심으로 남북은 긴 낭무(廊?)로 둘러 있고 남쪽 낭무의 중앙에는 중문지(中文址), 북쪽 낭무의 중앙에는 강당지(講堂址)가 있다. 금당의 북쪽에는 좌경루(左經樓)·의경루가 동시에 있으며 남쪽에는 두 탑지가 있다. 절터에는 현재 초석(礎石)·사천주(四天柱)의 초석 등이 있으며, 여기에서 우수한 부조(浮彫)의 당초문(唐草文)이 있는 와당(瓦當)·부전(敷塼)·녹유(綠油)의 화릉형전(花陵形塼)·사천왕의 부조전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안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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雁鴨池

경북 경주시 황룡사 서남쪽 372m 지점에 있는 못. 문무왕 때 만든 것으로 옛날에는 무산(巫山) 12봉의 경치가 비쳐 보였다고 한다. 돌을 쌓아 만들었으며 형태는 일정치 않다. 왕궁에 딸린 연못으로 서쪽에 별궁인 임해전이 있으며 동쪽과 북쪽은 굴곡이 심한 곡면을 이루고 있고, 연못 안에는 3개의 성이 있다. 1975년 이후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 연못 바닥에서 신라 왕족과 귀족들이 사용했던 일상생활 유물과 불교미술품들을 발견함으로써 통일신라시대의 문화를 상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포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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鮑石亭

경북 경주시 배동 남산의 서록계류에 연한 소림 속에 있다. 신라시대에 곡수유상(曲水流觴)의 연회를 행하던 곳이다. 포어형으로 좁은 석구를 두르고, 한쪽에서 계류를 끌어들여 다른 쪽으로 흘러나가게 되어 있다. 928년(경애왕 5) 10월에 경애왕이 비빈(妃嬪)·종척(宗戚)과 함께 연회를 열고 놀다가 후백제의 내습으로 살해당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불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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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國寺

경상북도 경주 동쪽 토함산 밑에 있는 절. 『삼국유사』에 김대성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불사(石佛寺:石窟庵)를,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지었다고 나와 있다. 『사기(寺記)』에 의하면 이 절은 법흥왕 때 창건, 751년(경덕왕 10) 김대성이 면모를 일신하게 중창하였으며 현재 남아 있는 석조의 유물은 모두 이때에 만든 것이다. 그 후 여러번 수축되었으나 임진왜란의 병화에 목조건물 전체가 타버리고, 점차로 재건되기는 하였으나, 신라시대의 찬란하던 옛 모습은 찾아볼 길 없게 되었다.현존하는 건물의 배치를 보면 대웅전은 중앙에 위치하여 남향하였고, 그 앞에 석등(石燈)이 있으며, 다시 그 앞의 동서에 각각 석탑 1기가 서 있다. 동쪽 다보탑(多寶塔:국보 20호)의 기묘하고 정밀한 형태는 유례가 드물고, 서쪽 석가탑(釋迦塔:국보 21호)은 예로부터 애달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즉 이 탑의 축조를 맡은 당(唐)나라 석공(石工)의 아내 아사녀(阿斯女)가 남편을 찾아와서 탑이 완성되어 영지(影池)에 그 그림자가 비치기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애화(哀話)를 지니고 있어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부른다. 남쪽 정면 자하문(紫霞門)으로부터 서쪽으로는 보랑(步廊)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 끝에는 범영루(泛影樓)가 기묘한 석축의 기주위에 서 있다. 또 자하문 아래에는 청운교·백운교(靑雲橋·白雲橋:국보 23호)라는 두 개의 돌다리가 걸쳐 있다. 대웅전 뒤에는 무설전(無說殿)이 한일합방 전까지도 서 있었으나, 지금은 완전히 허물어지고 빈터만 남아 있다. 대웅전의 서쪽 한층 낮은 곳에 있는 위축전(爲祝殿:極樂殿)에는 신라 불상의 전형이라 볼 수 있는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蔗那佛坐像:국보 26호, 대웅전으로부터 옮겨 왔음)·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如來坐像:국보 27호)를 안치하고 있으며, 전면 좌우에 승방(僧房)이 서 있다. 극락전 정면 앞에는 안양문(安養門)을 거쳐 연화교·칠보교(蓮華橋·七寶橋:국보 22호)에 이르게 된다. 이 아래는 옛날 연못이 있던 자리로, 서쪽 절 입구에는 돌로 된 당간지주(幢竿支柱) 두 개가 남아 있을 뿐이다.전성시대의 불국사의 옛 모습을 더듬어 보면 자하문에서 범영루에 이른 보랑은 북쪽으로 꺾여 무설전 옆까지 서행랑(西行廊) 자리가 남아 있고, 동쪽에도 역시 이와 맞서는 자리에 행랑지(行廊祉)가 남아 있다. 이 행랑은 다시 중간에 지랑(支廊)으로 되었으며 옛날에는 극락전 서쪽에도 장랑(長廊)이 있어서 여러 당우(堂宇)의 사이는 신을 신지 않고 내왕할 수 있었음이 분명하다. 무설전 뒤쪽에는 동서에 각각 관음전(觀音殿)·비로전(毘盧殿)의 자리가 남아 있으며, 다시 관음전 앞 동쪽에는 나한전(羅漢殿), 비로전의 서쪽에는 십왕전이 서 있었다. 비로전 앞에 석등 모양으로 된 사리탑(舍利塔:보물 61호)은 한때 일본사람에게 팔려갔다가 1934년 반환되어 제자리에 다시 세운 것이고, 이와 맞선 관음전 앞에도 석등이 남아 있다. 경역 전체가 사적 및 명승 제1호로 지정되었다. 1970

1972년 정부 보조비를 포함한 총공사비 3억여 원을 들여 복워시켰다. 불국사는 신라 불교문화의 우수함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관광지로서 외국인의 발길이 끊일 날이 없다.

부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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浮石寺

문무왕 16년(676) 의상이 왕명을 받고 경북 영주군 부석면(浮石面)에 창건한 절. 석단(石壇)·당간지주(幢竿支柱)·석등·3층 석탑은 신라 시대의 것이고, 무량수전(無量壽殿)과 조사당(祖師堂)은 고려 때의 건축이다. 이 절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통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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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度寺

경상남도 양산군 하북면 영취산에 있는 절. 신라의 자장율사(慈裝律師)가 당나라에서 부처의 가사(袈裟)와 사리(舍利)를 가지고 귀국하여 646년(선덕여왕 15)에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에 대웅전(大雄殿)·적멸궁(寂滅宮)·법당(法堂) 등의 건물이 있었으며 절 이름은 영취산의 기운(氣運)이 서역국 오인도(西域國五印度)의 땅과 통(通)한다고 하여 통도사라 불렀다고 한다. 자장은 이 절에서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쌓고 보름마다 불법을 설(說)하여 계율종(戒律宗)의 근본 도량(道場)이 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3년(선조 36)에 송운대사(松雲大師)가 재건하고 다시 1641년(인조 19) 우운(友雲)이 중건하였다. 가람 배치는 동서로 향하고 있는데 해탈문(解脫門)과 천왕문(天王門)을 지나 오른편에 극락전(極樂殿)·약사전(藥師殿)·성화각(星華閣)·용화전(龍華殿)·관음전(觀音殿)·장경각(藏經閣), 왼편에 범종각(梵鐘閣)·만세루(晩歲樓)·원통방(圓通房)·감로당(甘露堂)·명부전(冥府殿)·응진전(應眞殿)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다시 중앙의 불이문(不二門)을 지나면 본당인 대웅전에 이른다. 이는 남면으로 배치된 정면 3칸, 측면 5칸의 단층 건물이며 지붕의 종마루가 ‘井’형을 이룬 독특한 양식의 건물이다. 내부에는 불상이 없고 다만 거대하고 화려한 불단(佛壇)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계단(戒壇)에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다는 신앙 때문이다. 특히 이 절에 보관된 은사입향로(銀絲入香爐)는 고려시대의 우수한 예술 작품이며 이 밖에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와 신라시대의 유품인 3층석탑·사립탑·석상(石床)·석등(石燈) 등은 진귀한 것이다. 통도사에는 65동(棟)의 건물과 13개의 말사(末寺)를 가지고 있어 해인사·송광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사찰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화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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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嚴寺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에 있는 절. 544년(신라 진흥왕 5)에 연기(烟起)가 창건, 절 이름은 화엄경(華嚴經)의 화엄 두 글자를 따붙인 것이라고 한다. 643년(선덕여왕 12)에 자장(慈藏)이 증축, 석존사리탑(釋尊舍利塔)·7층탑·석등롱(石燈籠) 등을 건조하였다. 875년(헌강왕 1) 도선(道詵)이 다시 증축했는데, 1593년(선조 26)에 불타버리고 1630년 벽암선사(碧巖禪師)가 7년을 걸려 재건하였다. 대웅전은 1636년(인조 14)에, 각황전(覺皇殿)은 1643년(인조 21)에 보제루(普濟樓)·명부전(冥府殿)·원통전(圓通殿)·영산전(靈山殿)·응향각(凝香閣)·적묵당(寂默堂)·금강문(金剛門)·천왕문(天王門) 등이 차례로 복구되었다. 절 앞쪽에 1칸 1호의 일주문(一柱門)이 있어 ‘지리산 화엄사(智異山華嚴寺)’의 큰 편액(篇額)이, 다음에 금강력사(金剛力士)·문수(文殊)·보현(普賢)의 상(像)을 안치한 금강문(金剛門)이, 조금 서쪽에는 사천왕(四天王)의 상을 안치한 천왕문(天王門)이 있다. 그리고 이 절에는 원래 4벽(壁)을 청석(靑石)으로 두른 전각(殿閣)이 있었고 이 청석에는 화엄경(華嚴經)을 조작했었다고 하며, 1597년(선조 30)에 불타버렸다고 한다. 지금도 간혹 그 조각을 볼 수 있는데 당나라 초기의 서풍(書風)을 띠고 있다고 한다. 『봉성지(鳳城志)』에는 신라 문무왕 때 의상국사(義湘國師)가 왕명을 받아 석판에 화엄경 80권을 새겨 절에 보관하고 있다고 하였다.특히 중요한 것은 지금도 전하는 부속 건물들로서 이들은 모두 신라시대에 속하는데 거의가 국보로 지정되었다. ① 각황전 전 석등(覺皇殿前石燈):각황전 앞에 있는 높이 6.4m, 직경 2.8m의 큰 석등. 기석(基石)은 8각, 간석(竿石)은 병(甁) 모양으로 중간에 띠를 둘렀고, 각 면에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현존하는 석등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신라시대 불교 전성기의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으로 국보로 지정되었다. ② 삼층사사석탑(三層四獅石塔):국보 ⇒사사석탑(四獅石塔) ③ 동오층석탑(東五層石塔):높이 6.4m, 대석(臺石) 1변의 길이 2.8m. 대웅전 단(壇) 아래 광장(廣場)에 동·서 두 탑이 서로 마주 섰는데, 이것은 석탑에 비하면 기교가 없고 균형이 고험(高險)하다. ④ 서오층석탑(西五層石塔):높이 6m. 2층 기단(基壇) 위에 세워져 있는데 하단(下壇) 4면에 각 3구(軀)의 십이지상(十二支像)을, 상단(上壇) 각 면에는 사천왕(四天王)·인왕(仁王:八金剛) 등의 상을 2구씩 각각 새겼다. 탑신(塔身)은 비교적 좁고, 처마 끝이 나와 있는 것 등 웅건한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⑤ 각황전(覺皇殿):성층(成層)으로 높이 쌓은 석단(石壇) 위에 서향(西向)하여 서 있는 불전. 원래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고, 현재의 건물은 1643년(인조 12)에 재건한 것이다. 정면 7칸·측면 5칸 충층(中層)의 웅대한 건축물로써 그 내부에는 청판(廳板)을 깔아 중앙의 5칸 3면에 기둥을 세웠으며. 국보로 지정되었다. ⑥ 대웅전(大雄殿):건평 35평, 높이 35자의 목조건물. 원래의 건물은 1597년(선조 30:정유재란 때)에 불타버리고 현재의 건물은 1636년(인조 14)에 벽암선사(碧巖禪師)가 중건한 것이다. 총 15칸· 5칸· 3칸의 단층으로 된 매우 드문 구조 양식의 건축물이다. 또 내부의 불화(佛畵) 및 돌층계 등도 특수하다. ⑦ 원통전 앞 탑(圓通殿-塔):높이 10.3자, 폭 6.3자, 재료는 화강암, 평방 4각형으로 아래에는 사천왕(四天王)을 조각하였으며 가운데에는 4마리의 사자가 감로수(甘露水)를 받들고 있는 형상으로 되었다.이들은 모두 통일신라 때의 조각이다. 이 절이 이름 높은 것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義湘大師)가 ‘화엄경’을 선양하여 화엄 10대 사찰의 하나가 된 때문이다. 그 후 1701년(숙종 27)에 화엄사를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가람(大伽藍)으로 하였다.

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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慈藏

신라 때의 중. 성은 김, 이름은 선종(禪宗), 진골(眞骨) 출신. 일찍 부모를 여의자 원녕사(元寧寺)를 지어 고골관(古骨觀)을 닦았다.

선덕여왕 5년(636) 왕명으로 제자 승실(僧實) 등 10여 명과 당의 오대산(五臺山)에 가서 문수보살을 참알하고 가사와 사리를 받았다. 화엄종의 두순(杜順)과 계율종(戒律宗)의 도선(道宣)에게 배운 뒤 동왕 12년(643) 장경(藏經) 1부와 불구(佛具)를 가지고 귀국, 분황사(芬皇寺) 주지로 있으면서 궁중과 황룡사에서 대승론(大乘論)·보살계본(菩薩戒本) 등을 강론했다.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승니(僧尼)의 규범과 승통(僧統) 일체를 주관했다. 황룡사 9층탑의 창건을 건의하여 동왕 14년(645) 이를 완성, 이어서 통도사를 창건하는 등 전국 각처에 10여 개의 사탑을 건조했다. 그는 또한 중국식 관복을 입고 당의 연호를 사용할 것을 건의했다.

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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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湘

신라 중기의 고승. 화엄종(華嚴宗)의 시조. 속성은 김(金 혹은 朴씨라고 함). 20세에 출가하여 650년(진덕왕 4)에 원효(元曉)와 함께 당나라에 가던 도중에 난을 당해 이루지 못하고, 그 후 661년(문무왕 1)에 당나라 사신의 배편을 빌려 타고 건너가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서 지엄(至嚴:중국 화엄종의 시조)의 문하에 현수(賢首:法藏)와 같이 화엄의 깊은 이치를 깨달았다. 현수는 지엄의 뒤를 이어 중국 화엄종의 제3조가 되고 의상은 670년(문무왕 10)에 귀국하여 관음굴(觀音窟:洛山寺)에서 백일을 기도하고 676년에 왕의 뜻을 받아 태백산에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을 강술하여 화엄종(海東華嚴宗)의 시조가 되었다. 692년(효소왕 1)에 현수는 승전(勝詮)이 귀국할 때 그의 저술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와 그 비판을 구하는 서신을 의상에게 보냈는데, 그 친필 서신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의상은 문하에게 이것을 나누어 강술하면서 전교(傳敎)에 전심하다 78세로 죽었다. 고려 숙종은 해동화엄시조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라 시호하였다. 의상의 문인으로 뛰어난 10대덕과 전교(傳敎)의 10대찰이 있었다. 의상의 귀국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즉 당나라는 삼국통일을 원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라가 여제(麗濟) 양국을 공취한 것에 노하여 신라 승상 김흠순(金欽純)을 잡아 가두었다. 당 고종(高宗)이 신라에 대거 출병코자 한 기미를 흠순 등에게 들은 의상은 급히 귀국하여 왕께 고하고 명랑(明朗)에게 밀단법(密壇法)을 베풀어 화를 면했다고 한다. 또한 범어사의 전설에 의하면 흥덕왕 때에 왜병이 내침한다는 소식을 듣고 금정산(金井山)에 빌어서 미연에 방지하였다고 하나 근거 있는 것은 아니다.

원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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圓測 (613

696)

신라의 중. 신라의 왕손으로 3세에 출가, 진평왕 49년 당에 건너가 법상(法常)·승변(僧辯)에게서 유식론(唯識論)을 배웠으며, 중국어·범어(梵語)에 능통했다. 당의 원법사(元法寺)에 기거하여 『비담론(毘曇論)』 『성실론(成實論)』 『구사론(俱舍論)』 등을 읽었다. 또한 고금의 장소(章疏)를 읽고 불서(佛書) 번역에 참여했다. 정통으로 자처하던 자은파와 경전의 해석을 두고 대립, 자은파보다 정확한 것으로 통하며,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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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表

신라 중기의 고승(高僧). 성은 정(井). 아버지는 진내말(眞乃末), 어머니는 길보랑(吉寶娘). 완산주(完山州) 만경현(萬頃縣) 출신. 『고승전(高僧傳)』의 기록에는 진표가 어려서 활을 잘 쏘았는데 어느날 논둑에서 개구리를 잡아 버들가지에 꿰어 물에 담가두고 산에 가서 사냥을 한 후 개구리 일은 잊고 지내다가, 이듬해 봄에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듣고 생각이 나서 그곳에 가 보니 지난해에 담가 둔 그대로 버들가지에 꿰어진 채 울고 있는 개구리를 보았다 한다. 이에 뉘우치고 불도에 뜻을 두어 12세에 금산사로 들어가 숭제법사(崇濟法寺) 밑에서 중이 되었다.숭제법사는 일찍이 당나라에 들어가 선도(善道)에게 배우고 오대산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의 현신(現身)을 맞아 오계(五戒)를 받고 돌아왔으므로 진표가 도통(道通)의 요령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선계산(仙溪山) 불사의암(不思議菴)에 들어가 7야 7일을 고행으로 마음을 닦은 끝에 740년(효성왕 4) 3월 15일 지장보살(地藏菩薩)의 현신을 맞아 정계(淨戒)를 받았다. 다시 영산사에서 도를 닦고 마침내 소원이던 미륵보살의 현신을 맞아 752년(경덕왕 11) 2월에 『점찰경(占察經)』 2권과 간자(簡字:점치는 대쪽) 189개를 받았다. 그 뒤 경덕왕의 부름을 받아 궁중에 보살계(菩薩戒)를 베풀고 조 7만 7천섬, 견(絹) 500단(端), 황금 50냥을 시주받아, 이것을 여러 절에 나누어 주어 불교를 융성케 했다. 제자에 영심(永深)·보종(普宗)·신방(信芳)·체진(體珍)·진해(珍海)·진선(眞善)·석충(釋忠) 등이 있는데 모두 산문(山門)의 조(祖)가 되었다.

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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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超 (704

787)

신라 경덕왕 때의 승려. 일명은 혜초(惠超). 일찍이 당나라에 건너가 719년(성덕왕 18) 남인도(南印度)의 밀교승(密敎僧)·금강지(金剛智)에게 불도를 배웠다. 바닷길로 인도에 이르러 사대령탑(四大靈塔) 등의 모든 성적(聖蹟)을 순례하고 오천축국(五天竺國)의 각지를 두루 다닌 뒤에 길을 돌려 다시 가섭미대(迦葉彌大)·소발률(所勃律)·건태라(建?羅) ·오장(烏長)·구위(拘衛)·남파(覽波)·범인(犯引)·토화라(吐火羅) 등지 페르시아 대식(大食)·불림(佛臨) 등 지방을 다녔다. 다시 동쪽으로 안국(安國)·조국(曹國)·사국(史國)·석라국(石那國)·미국(米國)·당국(唐國)·발하나국(跋河那國)·골돌국(骨?國)·호밀국(胡密國)·소륵국(疏勒國) 등을 거쳐 727년(성덕왕 26) 당나라 장안(長安)에 돌아왔다. 여기서 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3권을 지었으나 전하지 않았는데 1906

1909년 사이에 프랑스의 학자 펠리오(Pelliot)가 중국 간쑤 성 지방을 탐사하다가 돈황 명사산 천불동(鳴沙山千佛洞)의 석실(石室)에서 앞 뒤가 떨어진 책 2권을 발견함으로써 세계적으로 사학(史學)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었다. 혜초는 54년 동안 오대산에 있었으며 금강지 대공삼장(大空三藏)의 역장(譯場)에서 많은 불경을 번역하였다.

『왕오천축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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往五天竺國傳

인도 5국(五國) 부근의 여러 나라를 순례하고 그 행적을 적은 여행기. 신라 성덕왕 26년(727)에 중 혜초(慧超)가 10년 동안의 여행을 마치고 당(唐)에 돌아와서 지었다. 그 동안 전해지지 않았으나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Pelliot) 교수가 중국 간쑤성(甘肅省)의 둔황석굴(燉惶石窟)에서 2권을 발견하여 현재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당시 중국과 인도와의 여로(旅路)를 아는 데 중요한 자료이며, 사료적 가치가 크다.

화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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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嚴宗

불교 종파의 하나. 『화엄경(華嚴經)』을 바탕으로 하여 세운 종지(宗旨)이다. 신라 시대에 의상이 당에 건너가 지엄(智儼)의 문하에서 이를 배워 문무왕 10년(670)에 귀국, 해동 화엄종의 비조(鼻祖)가 되었는데, 그를 원효(元曉)·윤필(潤筆)과 함께 화엄상사(華嚴三師)라 한다. 처음에는 원융종(圓融宗)이라 하였으나 뒤에 화엄종이라 개칭하였고, 신라말에 4개의 종파(涅槃·戒律·法性·法相)와 아울러 5교(五敎)라 일컫게 되고, 다시 구산선문(九山禪門)과 아울러 5교 9산이라 했다. 고려 숙종 2년(1097) 의천이 천태종을 열면서 9산은 조계종(曹溪宗)으로 통합하여 5교양종(五敎兩宗)이 되었다.

법성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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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性宗

일체 만유(萬有)는 같은 법성을 가졌고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불교의 한 종파. 원효가 처음 분황사(芬皇寺)에서 시작하였다. 이것을 연구하는 학파를 삼론학파(三論學派)라 하며 고구려에서 성행, 일본에 전파되었다. 별명 분황종(芬皇宗).

법상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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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相宗

만유는 오로지 유식(唯識)의 변화·중도(中道)에 의하여 원만하고 진실해진다는 불교의 한 종파. 일명 유식종(唯識宗)·보위승교종(普爲乘敎宗) 등이며 중국 13종의 하나. 신라 때 5교 중의 하나로 진표율사(眞表律師)에 의해 소개되어 원측이 크게 일으켰다.

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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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曉 (617

686)

신라의 고승(高僧). 아명(兒名)은 서당(誓幢), 원효는 시호, 호는 화정(和淨), 성은 설(薛). 내마(奈麻) 담날(談捺)의 아들. 설 총의 아버지. 상주(湘州:慶北慶山郡 慈仁面) 출생. 그 어머니가 꿈에 유성(流星)이 품속으로 드는 것을 보고 원효을 임신하였으며 만삭(滿朔)이 된 몸으로 압량군(押梁郡)의 남불지촌(南佛地村) 율곡(栗谷) 마을을 지나다가 사라수(娑羅樹) 아래 이르러 갑자기 낳았는데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이르기를 그때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다 한다.28세 때 승려가 되어 황룡사(黃龍寺)에 들어갈 때 집을 희사하여 초개사(初開寺)를 세우게 했으며 사라수 옆에도 절을 세워 사라사라 하였다. 영취산(靈鷲山)의 낭지(郎智), 흥륜사(興輪寺)의 연기(緣起)와 고구려 반룡산(盤龍山)의 보덕(普德) 등을 찾아다니며 불도를 닦으니 뛰어난 자질(資質)과 총명이 드러났다. 34세 때 동학(同學) 의상(義湘)과 함께 불법을 닦으러 당 나라에 가던 길에 랴오둥(遼東)에 이르러 어느 무덤들 사이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잠결에 목이 말라 물을 한 그릇 마셨던 바 다음날 아침에 깨어보니 해골 속의 더러운 물이었음을 알고 급히 토하다가 깨닫기를 "마음이 나야 모든 사물과 법이 나는 것이요, 마음이 죽으면 곧 해골이나 다름이 없도다(心生則種種法生 心滅卽??不二). 부처님 말씀에 삼계(三戒)가 오직 마음뿐이라 한 것을 어찌 잊었더냐” 하고 바로 본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그 뒤 분황사(芬皇寺)에 있으면서 독자적으로 통불교(通佛敎:元曉宗·芬皇宗·海東宗이라고도 함)를 제창하며 민중 속에 불교를 보급하기에 노력했다. 하루는 마음이 들떠 거리에 나가 노래하기를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주겠는냐,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로다” 하니 사람들이 듣고 그 뜻을 몰랐으나, 태종이 듣고 “대사가 귀부인을 얻어 슬기로운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하고 요석궁(瑤石宮)의 홀로된 공주를 짝되게 하니 과연 공주가 아이를 배어 설총(薛聰;新羅十賢의 弟一人)을 낳았다. 스스로 실계(失戒)한 원효는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자칭하면서 속세의 복장을 하고 마을에 나다니다가 우연히 한 광대가 괴상한 박을 가지고 춤과 만담을 벌이는 것을 보고, 그와 같은 물건을 만들어 『화엄경』의 ‘일체무애인(一切無▩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에서 ‘무애’를 따라가 박의 이름을 짓고 「무애가(無▩歌)」라는 노래를 지어 춤추고 노래하며 여러 마을을 돌아다녔다. 이에 세상 사람들 중 염불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으니 원효의 교화가 그렇게 컸다. 그는 실로 불교 사상의 종합과 실천에 노력한 정토교(淨土敎)의 선구이며 또한 으뜸가는 저술가이기도 하였다. 수많은 저서를 남기고 70세되던 해 3월 30일 혈사(穴寺)에서 사망했다. 뒤에 고려 숙종이 대성화정국사(大聖和靜國師)라는 시호를 주었다.

정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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淨土敎

신라 통일기 이후 주로 민중의 지지를 받은 불교의 한 종파. 교리의 깊은 연구를 주로 하는 5교와는 달리 정토교는 아미타불에 귀의한다는 뜻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외우는 염불만으로 죽은 후 서방정토(西方淨土), 즉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무식하고 압박받는 하층 사회에서 환영받은 정토교는 현세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를 고해(苦海)라 여기고, 내세(來世)인 극락에 왕생(往生)하는 것을 소원한다. 이리하여 많은 민중이 현세를 등지고 입산하였으며, 육신의 산 몸으로 하늘을 날아 서방정토로 왕생한다는 설화가 많이 전하게 되었다. 이 정토교의 유행은 신라의 사회적 모순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원효에 의해 주창되었다.

신라의 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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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國學

신라시대에 비롯된 교육기관. 유교 진흥책의 하나로 신문왕 2년(682) 6월에 세워졌다. 경덕왕 6년(747) 국학에 제업박사(諸業博士)와 조교(助敎)를 두었으며, 그 후 태학감(太學監)으로 개칭하였다가 혜공왕 12년(776) 다시 국학으로 고쳤다. 여기서는 3과(三科)로 나누어 경의(經義, 經書) 즉 『주역(周易)』 『상서(尙書)』 『모시(毛詩)』 『예기(禮記)』 『춘추(春秋)』 『좌씨전(左氏傳)』 『문선(文選)』 『논어(論語)』 『효경(孝經)』 등을 가르쳤다. 학생은 15

30세의 대사(大舍) 이하 무위(無位)까지였다.

독서삼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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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書三品科

신라 때 관리 채용을 위한 일종의 국가시험 제도.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라고도 한다. 원성왕 4년(788) 종래의 골품제를 기초로 한 벌족(閥族) 본위의 인재 등용을 지양하여 학벌 본위의 관리 채용을 지향하기 위해 독서삼품과 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 제도에 의하면 응시자는 그 독서의 성적에 따라 상·중·하 3등급으로 나누어 채용하게 마련이었다. 즉 ① 『춘추좌전』 『예기』 또는 『문선』을 읽어서 능히 그 뜻을 통하고 『논어』 『효경』에 밝은 자를 상품(上品), ② 『곡례(曲禮』 『논어』 『효경』을 읽은 자를 중품(中品), ③ 『곡례』 『효경』을 읽은 자를 하품(下品)으로 구별하였다. 그러나 만일 『5경(五經)』 『3사(三史)』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에 통한 자가 있으면 우선적으로 기용하였다.

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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强首

신라 통일기의 유학자. 중원경(中原京) 사량(沙梁) 사람. 『효경』 『곡례』 『이아(爾雅)』 『문선』 등을 익혀 배웠다. 무열왕 때 당과 신라 사이에 왕래하는 국서(國書)를 맡아 크게 공헌하였으므로 문무왕 때 사찬의 벼슬을 받았다. 국학(國學)이 세워져 여러 박사를 둘 때 강수는 설총과 함께 9경(經)으로써 제자들을 가르쳤다.

설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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薛聰

신라 통일기의 석학(碩學). 원효의 아들 신라 3문장(三文章:强首·薛聰·崔致遠) 중 한 사람이며 벼슬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유달리 총명하여 널리 경사(經史)에 통했으며 이두(吏讀)를 집대성하였다. 경덕왕 5년(746)에는 박사로서 강수와 함께 9경을 처음으로 구결(口訣)로 강론하여 후학을 지도하고 이두를 집대성 내지 정리했다. 그의 작품으로는 『화왕계』라고도 불리는 『계화왕(戒花王)』 1편이 전한다. 이것은 한문으로 된 단편으로 꽃을 의인화(擬人化)하여 이야기를 전개한 것으로 당시 왕의 어질지 못함을 풍자한 글이다.

김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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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大問

신라의 귀족·문장가·학자. 일찍이 당에 유학, 성덕왕 3년(704)에 한산주(漢山州)의 도독이 되었다. 문장이 뛰어나서 여러 가지 저서가 『삼국사기』 편찬의 사료로 사용되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그의 저서에는 『고승전(高僧傳)』 『계림잡전(鷄林雜傳)』 『화랑세기(花郞世記)』 『악본(樂本)』 『한산기(漢山記)』 등이 있다.

『계림잡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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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鷄林雜傳

신라의 학자 김대문(金大問)이 지은 책, 성덕왕 때에 지은 것으로, 신라·백제·고구려의 설화(說話)를 모은 책이다. 역시 그가 지은 『고승전』 『화랑세기』라는 책과 함께 고려의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을 때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첨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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瞻星臺

경북 경주시 인왕리 소재. 신라시대(7세기)에 건립. 높이 약 9m의 천문관측대(天文觀測臺)로 재료는 화강석, 원통형(圓筒形)으로 축조하였다. 신라 선덕여왕 때 건립된 것으로, 이 종류 중에서는 동양 최고(最古)의 유물이다.

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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鄕歌

신라 때에 행하던 민간 노래. 4구체·8구체·10구체의 형식이 있는데, 향가란 명칭은 삼국시대에 있어서 '우리나라 노래'란 뜻으로 『삼국유사』 영재 우적조(永才遇賊條)에는 '釋永才性滑稽不累於物善鄕歌'란 말이 있고, 『균여전(均如傳)』에는 '十一首之鄕歌 詞淸句麗……'라 하였고, 또 『삼국사기』 진성왕 2년 춘 2월조(二年春二月條)에는 '王素與角于魏弘通至是常入內用事 伋命與大矩和尙 條集鄕歌 謂三代目……'이라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중국을 당(唐)이라 한 데 대해 우리나라를 향(鄕)이라 일컬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로써 생각할 때 중국의 사장(詞章)에 대해 우리나라의 노래를 향가라 하였을 것이다. 향가는 모두 한자를 빌어서 우리말을 표기한 것으로 이두(吏讀)와는 달리 각수의 가사 전체를 한자로 기록하였으므로 순수하고도 고유한 우리말인 것이 주목할 점이다. 삼국시대에는 그 수효도 많았을 것으로 짐작되나 현존의 것은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에 11수, 도합 25수뿐이다.일찍이 이 노래의 부분적인 어학적 주석은 일본인들에 의하여 시도되다가 25수 전반에 걸친 주해는 오쿠라(小倉)에 의하여 처음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후 양주동에 의하여 더 나은 해독을 보게 되었다. 해방 후에는 다시 지헌형(池憲英)·이탁(李鐸)·김준영(金俊榮)·이숭녕(李崇寧)·김동욱(金東旭) 등에 의하여 계속 연구·발표되고 있으나 아직도 완전에 가까운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균여전』 수록 11수의 향가는 고려 초기의 균여대사 작으로 10구체의 불교 예찬이다. 「예경제불가(禮敬諸佛歌)」 「칭찬여래가(稱讚如來歌)」 「광수공양가(廣修供養歌)」 「참회업장가(懺悔業障歌)」 「수희공덕가(隨喜功德 歌)」 「청전법륜가(請轉法輪歌)」 「청불왕생가(請佛王生歌)」 「상수불학가(常隨佛學歌)」 「항순중생가)恒順衆生歌)」 「보현회향가(普賢廻向歌)」 「총결무진가(總結无盡歌)」 등이다.



『삼국유사』 수록 향가 일람표



작 품 명



작   자



연   대



형  식



내용·성격·기타



서동요

(署童謠)



백  제

무  왕



진평왕

(眞平王)



4구체



마로써 아이들을 꾀어 이 노래를 부르게 하여 선화(善花)공주를 얻음. 서동은 무왕의 아명.



혜성가

(彗星歌)



융천사

(融天師)



진평왕

(眞平王)



10구체



혜성이 심대성(心大星)을 범하였으므로 이 노래로써 물리침.



풍  요

(風  謠)



미  상



선덕여왕

(善德女王)



4구체



양지(良志)가 영묘사(靈廟寺)의 장육존상(丈六尊像)을 만들 때 부역온 성내 남녀가 불렀다는 민요. 일명 양지사석가(良志使錫歌)



원왕생가

(願往生歌)



광  덕

廣  德

(廣德妻)



효소왕

(孝昭王)



10구체



광덕이 죽자 그의 친구 엄장(嚴莊)이 그 처에게 동침을 요구하자 이를 거절함.



모죽지랑가

(慕竹旨郞歌)



득  오

(得烏)



효소왕

(孝昭王)



8구체



득오랑이 김유신과 함께 삼국통일에 공헌한 그의 스승 죽지랑을 찬양한 화랑가. 일명 득오곡모랑가(得烏谷慕郞歌)



헌화가

(獻花歌)



노  옹

(老  翁)



성덕왕

(孝星王)

(聖德王)



4구체



노옹이 수로부인(水路夫人)의 소원인 절벽의 철쭉꽃을 꺾어 바침.



원  가

(怨  歌)



신   충

(信  忠)



효성왕

(孝成王)



8구체



효성왕이 등극전 신충과 잣나무를 두고 후일을 언약, 등극 후 그 일을 잊으매 이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이니 그 나무가 마름. 연군가.



도솔가

(도率歌)



월명사

(月明師)



경덕왕

(景德王)



4구체



해 2개가 나란히 나타나매 왕이 월명사로 하여금 산화공덕(散花功德)을 지어 재앙을 물리치 게 함.

석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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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窟庵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소재. 옛날에는 석불사(石佛寺)라 하였고, 불국사(佛國寺)를 재흥(再興)한 김대성(金大城)이 전세의 부모를 위하여 창건, 신림(神琳)·표훈(表訓)의 두 성사(聖師)를 각각 청하여 거주하게 하였다 한다. 석불(石佛)을 장차 조각하고자 큰 돌을 다듬어 감개(龕蓋)를 만들 때 갑자기 돌이 세 조각으로 갈라져서 분통이 터져 잠깐 잠이 들었는데, 그날 밤 천신(天神)이 내려와 만들어놓고 갔다는 전설이 있다. 굴내(窟內)는 둥근 평면이며, 천장은 궁륭상(穹隆狀) 석굴을 짓고 위에 흙을 덮은 것으로 동쪽을 향하였고, 좌우의 경(經) 약 6.7m, 전후 약6.6m, 입구의 넓이 3.35m, 그 앞에 장방형의 전실(前室)이 있다. 석불사 본존인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은 흰 화강석에 조각한 것으로, 높이 약 3.4m, 석굴 중앙의 연화좌(蓮花座) 위에 부좌(趺坐)하였고, 수법이 정교하며 장중웅려(莊重雄麗)한 기상이 넘치는 매우 보기 드문 걸작이다. 본존 뒷벽에 반육각(半六刻)한 십일면관음보살상(十一面觀音菩薩像)의 원만한 자태는 신라예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석굴 벽면에 십나한(十羅漢)·범천(梵天)·제석천(帝釋天)을 반육각하였고, 벽의 윗부분에는 10개의 불감(佛龕)을 만들어 그 속에 1체의 유마거사상(維摩居士像)과 7체의 보살상을 안치하였다.그 중 두 개만은 지금 비어 있는데 대한제국 때 일본 사람에 의하여 반출되었다고 전한다. 천장은 궁륭상(穹隆狀)으로 되었고 중심에는 연판(蓮瓣)을 새긴 둥근 돌로 눌러놓았는데, 그 교묘한 구조와 우아한 조각은 놀랄 만하다. 입구 비도(扉道)의 좌우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각 2개씩 반육각하였으며, 그 앞 전실 양쪽벽의 인왕(仁王) 및 팔부신장(八部神將)은 내부의 것에 비해 그 수법이 정교하지 못한 듯하다. 석굴암은 그 구조가 기묘할 뿐 아니라 본존 및 벽면 조상의 비범한 기술로 보아 신라시대 예술을 대표할 만한 것이며, 중국에서도 산을 파내어 만든 석굴은 있으나 석굴암과 같은 것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김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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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大城 (701

774)

신라 경덕왕 때 국상(國相)·건축가·조각가. 김문량(金文亮)의 아들. 벼슬이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이르렀다. 경덕왕 10년(751) 부모의 장수와 국가의 안녕을 위하여 불국사·석불사·장수사(長壽寺) 등을 창건, 천재적인 기술과 솜씨를 발휘하였으며, 석굴암의 설계를 완성하였다. 석굴암은 불국사의 사탑·전당과 아울러 걸작품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모죽지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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慕竹旨郞歌

신라 향가의 하나. 제32대 효소왕 때 화랑 죽지랑의 낭도였던 득오곡(得烏谷)이, 죽지랑을 사모하여 지은 8구체 향가이다. 죽지랑은 김유신(金庾信)의 부원수로서 삼국 통일에 공이 컸다. 득오곡은 그의 낭도로서 풍류와 도술로 이름이 높았다. 노래는 이두문으로 되어 있으며, 『삼국유사』에 실려서 전한다.

불국사의 다보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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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國寺-多寶塔

경상북도 경주시 불국사 경내 소재. 535년(법흥왕 22)에 창건. 751년(경덕왕 10)에 수축, 1925년에 재수리. 이 탑은 다보여래상주증명(多寶如來常住證明)의 탑으로 현재 상륜부(相輪部)에 보주(寶珠)가 없을 뿐 그 외는 완전한 것으로 높이 10.4m이다. 순백(純白)의 화강암(花崗巖)으로 방형(方形)의 기단(基壇)과 사방에 계단과 난간(難竿)을 만들었다. 초층(初層)의 중앙과 4우(隅)에 방형 석주를 세워 옥개석(屋蓋石)을 받치고 있다. 그 위는 팔각 삼층인데, 제1층은 4각으로 난간을 두르고, 제2층은 죽절형(竹節形) 기둥 8개에 싸인 탑신부 둘레에 8각의 난간을 두르고, 제3층은 귀두 모양의 옥개석을 받치고 있으며, 상륜부에도 각 층마다 변화를 주고 있다. 이 탑 기단의 4우에는 석사자(石獅子)가 있었으나 그 중 세 개는 분실되고 한 개만 극락전(極樂殿) 추녀 밑에 있다. 이 탑은 경쾌하면서도 장려하고 번잡한 듯하면서도 전체의 통일이 잡혀 있으며, 돌을 자유 자재로 두룬 기법은 놀랄 만한 것으로, 이러한 형식의 탑은 중국과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일본에 목조(木造)의 다보탑이 있으나 그 기법은 이보다 훨씬 못하다.

불국사의 석가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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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國寺-釋迦塔

경북 경주시 불국사 소재. 불국사 삼층석탑(三層石塔) 또는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통일 시대(8세기) 작품으로 추측된다. 높이 8.2m. 불국사 대웅전 앞 뜰에 다보탑과 상대하여 위치하고 있다. 2층 기단의 웅대함과 탑의 아름다움이 잘 조화되어 당대의 대표적 작품으로 손꼽힌다.

성덕대왕 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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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德大王神鍾

경주 박물관 소장으로 속칭 봉덕사종(奉德寺鍾) 또는 에밀레종이라고 부른다. 혜공왕 7년(771)에 제작. 직경 2.27m, 높이 3.33m. 경덕왕 1년(742) 선왕(先王) 성덕왕을 위해 종을 주조(鑄造)하기 시작하여 혜공왕 때 완성하였다. 봉덕사에 달았다가 수해로 절이 없어진 후 영묘사(靈妙寺)에 옮기고 다시 봉황대(鳳凰臺) 아래에 종각을 짓고 보존하다가 1915년 8월 종각과 함께 경주 박물관으로 옮겼다. 한국에서 가장 큰 종으로 독특한 미술적 가치를 지닌 신라 극성기의 걸작품이다.

무열왕릉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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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烈王陵碑

경북 경주시 서악리(西岳里) 소재. 신라 통일시대(7세기)에 건립. 귀부(龜趺)의 길이 약 3.33m, 폭 2.54m, 이수(?首)의 높이 약 1.1m. 비신(碑身)은 현재 없고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는데 화강석으로 되었으며, 귀부는 장방형의 기석(基石) 위에 얹혀져 있다. 이수는 6룡(龍)이 서로 능을 향해 구부리고 있는 모습으로 윤곽을 이루는데, 웅장한 구 자세는 당시 석조 예술의 뛰어난 솜씨를 잘 보여준다. 이수 중/앙에는 김인문(金仁問)의 글씨로 전하는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이 전서(篆書)로 양각되어 있다.

십이지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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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二支神像

십이지를 상징하는 수면인신상(獸面人身像). 십이지생초(十二支生肖)라고도 한다. 12지(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라는 개념은 중국 은대(殷代)에서 비롯되었다. 이를 방위나 시간에

대응시킨 것은 한대(漢代)의 일로 추측된다. 다시 이것을 쥐·소·범·토끼·용·뱀·말·양·원숭이·닭·개·돼지의 12동물과 대응시킨 것은 훨씬 뒤의 일이며, 묘지의 둘레에 12지 생초를 조각한 것은 당대(唐代)부터인 것 같다. 한국에서는 신라 통일시대에 능묘의 호석(護石)에 12지신상을 조각하게 되었는데, 경주의 괘릉(掛陵)이나 김유신 묘(金庾信墓)가 최초의 것으로 생각된다.성덕왕릉에 특이한 형식이 나타나고 대개는 괘릉과 마찬가지로 호석면에 양각하였다.

기마인물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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騎馬人物陶像

삼국시대 신라의 토우(土偶). 앞가슴에 주구(注口)를 달고, 궁둥이 위에 술잔 모양의 물 넣는 구멍을 달았다. 속을 비게 만든 말의 안장 위에 하나는 3각형 모자를 쓴 정장(正裝)한 사람, 또 하나는 꼭지 달린 모자를 쓴 하인 같은 사람이 앉아 있다. 단단하며 크기는 전자는 높이 21.4cm, 길이 29.4cm, 후자는 높이 21.3cm, 길이 26.8cm 이다. 국립박물관에 소장죄어 있으며 국보 91호이다.

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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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生 (711

791)

신라의 명필. 자는 지서(知瑞). 일생을 서예(書藝)에 바쳤으며, 예·행·초서(隸行草書)에 능하여 해동(海東)의 서성(書聖)이라 칭해졌다.

요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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姚克一

신라의 서예가. 벼슬은 시중겸 시서학사(侍中兼侍書學士)에 이르렀다. 구양순(歐陽詢)의 필법을 터득하여 필력이 힘있고 김생 다음가는 명필이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삼랑사(三郞寺)의 고비(古碑)를 썼다 한다.

옥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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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寶高

신라의 음악가. 사찬 공영(恭永)의 아들. 지리산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 50년 동안 금법(琴法)을 닦고, 거문고의 새로운 가락 30곡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