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통일신라와 발해/통일신라의 사회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둘러보기로 이동 검색으로 이동

통일신라의 사회〔槪說〕[편집]

삼국 통일 후 관료 체제가 확충되는 데 따라서 토지 제도상으로도 획기적인 변혁이 일어났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일부 귀족·관료들에게 식읍(食邑)·사전(賜田)의 형식으로 토지·인민 또는 노비가 분배되었다. 한편 관리에게 특수한 경우에 세조(歲租)가 지급되는 수도 있었으나 일반적으로는 대소(大小) 족장이었을 관리들은 토지와 인민을 녹읍(祿邑) 형식으로 사여(賜與)받아, 그들 원래의 생활 기반을 그대로 지배할 수 있게끔 보장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왕권의 강화와 관료 정치화의 추세에서 이와 같은 토지 사여 형식은 재편성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문왕 때(689년) 내외 관료의 녹읍을 폐지하고 그 대신 일종의 녹봉제(祿俸制)로서 관료전(官僚田:職田)을 급여하였다. 성덕왕(聖德王) 때에는 정전제(丁田制)가 실시되었다. 또한 최근에 와서 발견된 신라의 민정문서(民政文書)를 통하여 수취 체제 확립을 위한 신라 왕조의 노력을 엿보게 해준다. 신라의 수도는 정치 중심지로서 인구가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국내 교역은 물론 중국·일본과의 공사무역(公私貿易)이 성행하여 수도는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통일 이전인 5세기말에 조정에서는 상인으로 하여금 좌상점포(坐商店鋪:市廛)를 개설케 하였으나 효소왕(孝昭王) 때에 이르러서는 수도의 동·서·남·북에 시전(市廛)을 갖추게 되고 시전(市典)이라는 관청을 두어 이를 감독케 하였다.지방에는 행상(行商)에 의한 향시(鄕市)가 일찍부터 벌어져서 물물교환이 행해졌다. 한편 해상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관무역은 물론 사무역(私貿易)이 더욱 성행하였다. 신라와 당 사이에 교역된 물화(物貨)는 각종 금은세공품(金銀細工品)·직물을 위시하여 신라의 인삼, 당의 차(茶)와 서적 등이었다. 왕실·귀족과 관서의 수요 물품은 향·소·부곡민의 노역으로 운영된 관영수공업(官營手工業)에 의해서 생산되었고, 마포(麻布)나 견직물은 농민으로부터 징수하였다.

농민생활[편집]

평민의 대다수는 농민이었고, 소수는 상업과 수공업에 종사하였다. 농민은 촌락 단위로, 연령에 따라 6등급으로 구분되었다. 정(丁)과 정녀(丁女)인 20세에서 59세 사이의 남녀를 중심으로, 그 이하의 사람들을 조자(助子)·조여자(助女子), 추자(追子)·추여자(追女子), 소자(小子)·소여자(小女子)로, 그리고 60세 이상은 제공(除公)·제모(除母), 노공(老公)·노모(老母)로 분류되었다. 이런 분류에 따라, 노동력 징발시 각 촌에 부과될 인원이 정해졌다. 촌락 내에 있는 농민의 토지는 논과 밭으로 구분되어 각각 결부법(結負法)에 의해 면적이 조사되었으며, 이에 따라 조세부과량이 정해졌다. 결부법은 절대면적을 기준으로 해서 조세부과량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수확량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었다. 결부법에서의 계산 단위는 결(結)·부(負)·속(束)·파(把, 握)이다. 파는 한 움큼의, 속은 한 묶음의, 부는 한 짐의 곡식 줄기를 각각 의미하며, 100부가 1결이었다. 나아가 각 단위는 곧 그만큼의 수확을 내는 토지면적을 가리킨다. 아직 비료를 사용하지 않았던 시대이므로 농토에 따라 비옥도의 차이가 컸고, 사과 계곡이 많은 자연지형이었으므로 절대면적을 기준으로 한 농토의 측량이 여의치 않았던 조건에서, 비교적 손쉽게 면적을 산출할 수 있고 조세 부과에 나름의 합리성을 지닌 방법으로 고안된 것이 결부법이었다. 통일기에 들어서 이 같은 결부법에 의거한 양전사업(量田事業)이 널리 이루어졌다. 이후 결부법은 농업기술의 발달과 농업생산력의 증대에 따라 면적 산정 방법이 수차에 걸쳐 보완되면서 19세기 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당시 농토는 전반적으로 상경화(常耕化)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농토, 특히 그 중 밭의 경우는 2

3년에 한 번 경작되었다. 농민들은 조세를 내고 부역을 지는 외에 그 지역에서 나는 특산물을 현물세로 내야 했다.토지는 국유제가 표방되었고, 722년에 백성에게 토지인 정전(丁田)을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때 황무지와 같은 일부 토지를 농민에게 분여하였을 수는 있겠지만, 전국적인 토지분급이 행해졌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서원(西原, 지금의 청주) 소경 부근의 네 개의 촌락에 관한 기록을 담은 장적문서(帳籍文書)에서는 ‘연수유전답(烟受有田沓)’이라 하여, 농민이 가지고 있는 땅을 모두 국가에서 분급한 것처럼 표현하고 있으나, 이는 전국의 모든 땅은 왕의 것이라는 왕토사상(王土思想)에 따른 표현일 뿐이다. 왕토사상은 국가에서 조세 수취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한 명목이었고, 실제로는 토지의 사적 소유가 널리 행해졌다. 단 농민의 토지소유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

노비[편집]

당시 일반 농촌에는 노비가 많지 않았다. 위의 장적문서를 보면, 전체 인구 462명 중 노비가 25명뿐이었다. 그리고 노비 중 정과 정녀가 19명이었고, 3년 간 태어난 노비의 수는 매우 적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노비가 자신의 호(戶)를 이루며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들은 외거노비(外擧奴婢)가 아닌 솔거노비(率居奴婢)였을 것이며, 당시 일반 농촌에서 노비의 노동력은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렀을 것이다.

노비의 주된 소유층은 진골귀족들이었고, 왕실이 최대의 노비소유자였다. 숫자가 과장된 감이 없지 않지만, 『신당서(新唐書)』에서는 신라의 재상가(宰相家), 즉 진골귀족들이 노비를 3천명이나 소유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당시 귀족들은 각지에 농장과 목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신이 소유한 노비를 부려 그곳에서 경작과 가축 사육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경우 노비의 예속 형태는 외거노비였다. 지역적으로 노비가 제일 많이 있었던 곳은 역시 수도였다. 서른다섯 개의 금입택(金入宅)과 같은 귀족들의 대저택들이 있었고, 그런 집에는 다수의 노비들이 있었다. 수도에 사는 귀족의 노비들은 가내노동과 귀족의 사치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일들에 종사하였고, 일부는 수공업품 생산에도 종사한 것으로 보인다. 왕실과 사찰이 소유한 노비의 경우도 예속 형태가 비슷하였을 것이다.

수공업과 상업[편집]

신라의 국가체제 정비와 함께 종래의 재지(在地) 수장층(首長層)이 소유하고 있던 수공업 생산수단과 기술 인력이 국가와 왕실 및 일부 귀족에 귀속되었다. 지방 장인(匠人)들의 경우 생산품을 특산물 현물세(調)의 형태로 공납하였고, 중앙에선 이들을 통제하였다. 이러한 면은 통일기에 들어서 더욱 강화되었다. 통일기 신라의 수공업은 장인들의 소속처에 따라, 내성(內省) 산하의 궁실수공업, 주요 관서에 귀속되었던 관영수공업, 귀족들의 사영 수공업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각 장인들의 처지는 국가의 통제하에서 신분화되었다. 장인들 중 하급 관등을 받아 골품을 지닌 이들이 있었고, 기술 노역만 제공한 평민도 있었다. 노비로서 생산에 참여한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궁실수공업의 주된 노역자였다. 궁실 및 관영 수공업은 국가와 왕실에 소요되는 물품을 할당받아 생산하였다. 귀족의 사영수공업도 주로 골품제의 의례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생산하는 등 귀족집안 자체의 수요에 부응하는 형태였다. 이와같이 수공업은 시장을 상대로 한 상품생산의 형태로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이외에 일반 농민의 가내수공업은 농업과 함께 결합되어 농민층 자신의 수요를 충당하는 형태였다.그런데 통일 이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상업이 발달해갔다. 긴 평화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농업생산이 늘고 계층분화가 진전되었으며, 지역간의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인구의 이동이 있게 되고 수도의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그런 가운데 상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상품에 대한 수요가 커졌으며, 일부 상품의 질도 고급화하였다. 통일기 초기 당나라와의 조공무역에서 신라가 보낸 물품은 주로 자연산 특산품이었는데, 이후 점차 고급 비단과 금속공예품 등이 많아졌다. 일본과의 교역에서는 금속제품과 모직물 등을 수출하고, 풀솜과 견직물을 수입하였다. 당시 고급 물품은 주로 수도의 궁실 및 귀족에 소속된 공장(工匠)들이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신라 조정도 상업을 장려하여, 수도에 시장이 두 곳 더 개설되었다. 당시 상업에 주요 교환매체였던 견포(絹布)의 길이를 정하는 등의 조치는, 상업 발달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한편 불교계에서도 승려의 상행위는 금지하였지만 일반 신도들의 상업활동은 인정하였다. 그리고 유가론(瑜伽論)의 ‘공교명사상(工巧明思想)’이 유포되었는데, 이는 배우고 익힌 기술로 적은 노력을 들여 많은 재보(財寶)를 만들어 모아, 이것을 여러 중생에게 베풀어 이익을 줄 것을 강조한 사항이었다. 이는 승려들이 장인으로 활동하는 것을 정당화해줄 수 있는 논거로 받아들여졌고, 나아가 장인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제고하는 데 기여하였다. 실제 당시 유명한 승장(僧匠)이 적지 않았고, 불교사원에서도 수공업이 행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특히 8세기 후반 이후 집권체제에 동요가 생기고 국가의 통제가 약화됨에 따라, 상업활동이 한층 활발해졌다. 해외무역은 조공무역 외에 점차 민간인들이 행하는 사무역이 성행하게 되었다. 새로운 부원(富源)을 찾아, 그리고 좀더 자유로운 인간관계하에서 더 나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바다로 나가 활동하였다. 또한 많은 수의 신라인들이 당나라에 건너가 해안지대 각지에 신라방(新羅坊)이란 집단적인 거류지를 형성하였다. 신라 상인들에 의한, 신라와 당과 일본을 연결하는 중계무역도 성행하였다. 남부 중국의 무역항을 거쳐 수입된 동남아시아와 서남아시아산 사치품들이 수도의 귀족층들 사이에서 애용되었고, 신라 상인들이 아랍 상인들과 직·간접으로 접촉하기도 하였다. 신라에 대한 지식이 아랍 지역에 알려진 것도 이 시기였다.이렇듯 무역이 성행함에 따라, 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세력이 서부와 남부 해안지역에서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신라 하대에 기존의 국가질서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기도 하였다.

관료전[편집]

官僚田

신라 통일기에 관료들에게 지급한 토지로 직전(職田)이라고도 한다. 신라에서는 처음 관료들에게 녹읍(祿邑)을 지급하다가, 신문왕 7년(687) 종전의 제도를 고쳐 녹읍 대신 관료전을 지급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동왕 9년(689), 녹읍제를 혁파하고 관료전과 병행하여 녹봉을 지출한 것 같다. 그러나 이 관료전 제도는 관료 체제의 확립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귀족들과 관료화된 족장 세력의 반발로 약 70년 동안 시행되다가 폐기되고 녹읍제가 환원·실시되었다.

신라의 정전제[편집]

新羅-丁田制

722년(신라 성덕왕 21)에 시작된 신라의 토지제도. 정전(丁田)은 매정(每丁)에게 나누어 주는 전토(田土)를 의미한다. 신라의 촌락문서(村落文書)에 의하면 남자는 연령별로 구분하여 정(丁)·조자(助子)·추자(追子) 등으로 나뉘어져 있고, 여자는 정녀(丁女)·조여자(助女子)·추여자(追女子) 등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정전의 정(丁)은 바로 이 촌락문서에 나타나 있는 정(丁)에 해당하는 것이다.정전제는 국가가 매정에게 일정한 면적의 토지를 반급(班給)해 준 일종의 반전수수(班田收受)의 제도였다. 그러나 정에 반급된 전토의 면적, 정에 해당하는 연령의 기준, 그리고 정에 정남 아닌 정녀가 포함되는 것인지 어떤지의 여부와, 이 이외에 또 정이 아닌 남녀에 대하여 각기 어떤 감액된 급전(急田)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등의 문제에 관한 사료는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정전제(丁田制)와 중국의 북위(北魏) 이후 당대(唐代)의 균전제(均田制)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즉 중국의 균전제는 당제에 의하면 정남(丁男:21세 이상 59세까지) 및 18세 이상의 중남(中男:16세 이상 20세까지)에 대하여 전(田) 1경(頃:100묘)을 지급하였는데, 그 중에서 20묘는 영업전(營業田)으로서 자손에게 상속이 허용되었고, 나머지 80묘는 구분전(口分田)으로서 본인이 사망하면 국가에 환납(還納)하도록 하였다. 정남·중남(18세 이상)으로 취급되지 않는 독질(篤疾)·폐지(廢疾) 등에 대해서는 각각 일정한 액을 감해서 급여하였는데, 어느 경우에나 그 중 20묘는 영업전으로 하고, 그 나머지를 구분전으로 하는 것은 동일하였다.신라에 있어서도 구분전이 사급(賜給)된 예가 있어 구분전의 존재를 통하여 신라에서도 당(唐)과 비슷한 균전제가 시행되었으리라는 견해가 있으나, 우리나라 전제상에 나타나는 구분전은 고려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농민 일반에 대해서 지급하는 보편적인 토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몰한 군인의 처나 노령퇴역(老齡退役)의 군인에 대해서 특전적으로 지급하는 특수한 전토의 종목이었다. 신라의 정전제가 과연 어느 정도로 중국의 균전제를 따랐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정전제의 실시에 있어 신라의, 중국 제도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하나의 큰 전제가 되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그러나 실제 신라의 경우에는 국가가 농민에게 토지를 반급해 주었다는 것은 신규의 토지 지급이 아니라 대개의 경우 농민들이 본래 보유하고 있던 토지에 대하여 어떤 법제적인 인정을 가하거나, 또는 황무지를 농민들에게 주어 강제로 경작하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설이 유력하다.

신라의 민정문서[편집]

新羅-民政文書

신라 서원경(西原京:淸州) 지방 4개 촌의 장적(帳籍). 일명 신라장적(新羅帳籍)·정창원문서(正倉院文書). 1933년 일본 동대사(東大寺) 정창원(正倉院:倉庫)에 소장된 13매(枚)의 경질(經帙) 중 파손된 『화엄경론(華嚴經論)』의 책갑을 수리할 때 내부의 포심(布心)에 덧붙인 휴지 중에서 이 문서가 나왔다. 이 고문서(古文書)는 해서(楷書)로 씌어졌으며, 모두 62행(行)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① 당현사해점촌(當縣沙害漸村) ② 당현살하지촌(當縣薩下知村) ③ 촌명 미상(未詳) ④ 서원경 촌명 미상 4촌에 대한 촌의 둘레·연호수(煙戶數)·인구·전답(田畓)·마전 (麻田)·백자(栢子:잣)·추자 (秋子:胡桃)·뽕나무 등의 나무 그루 수와 소·말의 수효까지 기록되어 있어 촌락의 생태를 잘 알 수 있다. 이 민정문서는 3년 간의 증감에 따른 변동이 기록된 점으로 보아 3년 만에 한 번씩 작성된 듯하다. 문서의 작성 연대를 일본의 노무라(野村忠夫)는 성덕왕 14년(755)으로 상정하였으나 학자에 따라 각각 달리 연대를 설정하고 있다. 신라의 율령 정치는 물론 신라 사회의 구조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귀중한 자료이다.

조용조[편집]

租庸調

세제(稅制)의 하나. 본래 중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균전법(均田法)과 표리(表裏)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균전법에 맨 처음 실시된 북위시대(北魏時代)에는 아직 조용조의 제도가 확립되지 못하였으며, 제도로서 정비되기는 수(隨)·당(唐) 때에 이르러서였다. 「당육전(唐六典)」에 ‘부역(賦役) 제도에 넷이 있으니, 첫째를 조(組), 둘째는 조(調), 셋째를 역(役), 넷째를 잡요(雜循)라고 한다’라는 조문이 있는데, 여기서 조(組)라는 것은 토지를 대상으로 하는 곡물의 부과(賦課)를, 조(調)는 호(戶)를 대상으로 하는 토산물의 부과를, 역(役)은 중앙에 대한 노동력의 부과를 각각 청하였으며, 실제 역에 종사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대신 물납(物納)하는 것을 용(庸)이라 하였다. 이에 대해서 잡요라는 것은 지방에서 필요에 따라 부과하던 노동력의 봉사였다. 그러므로 이 세제의 근본은 토지에 대해서 조(租), 사람에 대해서 용(庸), 호(戶)에 대해서 조(調)를 부과하여 징수하는 것이었다. 조용조는 율령제도(律令制度)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중국에서 율령제도를 수입함과 동시에 조용조의 제도를 체택하게 되었지만, 그 이전에도 삼국이 각각 고대국가를 건설 확장하면서 이미

이와 비슷한 형태의 세제를 부과하였으리라 추측된다.그러나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중앙집권을 강화하면서 수·당시대의 균전법을 모방하여 실시한 것으로 보아서 이 균전법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조용조의 제도도 구체적으로 확립되었으리라 짐작된다. 그 증거로서 최근 일본 정창원(正倉院)에서 발견된 신라민정문서(新羅民政文書)에 의하면 당시에 벌써 치밀한 농촌행정이 행하여졌음을 미루어 고도(高度)의 율령정치가 시행되고 있었으리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의 조용조 전반에 대한 자세한 규정은 지금 알 길이 없다. 그 뒤 고려는 물론, 조선시대의 세제도 이 조용조라는 전통적인 공납(貢納) 형태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그 명칭과 내용에 어느 정도 복잡한 변천이 있었다.조(租)는 일명 세(稅)·조세(租稅)·공(貢) 등으로, 역(役) 또는 용(庸)은 요(?)·요역(?役)·부(賦)·공부(貢賦)·포(布) 등으로, 조(調)는 공(貢)·공부(貢賦) 등으로 각각 별칭되며 서로 혼용되는 경우도 많았으나 그 원칙만은 대대로 계승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이 조용조 가운데서 조(租)는 과세(課稅)의 대상이 일정한 전결(田結)이므로 부과율이 뚜렷하지만, 용(庸)·조(調)는 그렇지 못하여 관리들의 협잡이 따르게 됨으로써 조(租)보다도 그 부담이 실지로 더 무거웠으나, 중기 이후에는 대동법(大同法)이 실시되면서 조(調)의 대부분도 전결(田結)을 대상으로 삼고, 또 균역법(均役法)의 제정 뒤에는 용(庸)의 일부도 전결을 대상으로 하게 되자, 후기에는 조(租)가 제일 무거워지고, 그 다음이 용(庸), 제일 가벼운 것이 조(調)라는 순위로 되는 등 시대에 따라 그 부담의 경중이 바뀌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