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세 유럽과 아시아/중국과 일본의 변천/15 16세기의 동남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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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6세기의 동남아시아〔槪說〕[편집]

포르투갈·에스파냐의 아시아 진출은 이 시기에서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한편 그들을 맞는 동남아시아의 배경은, 반도 쪽 최대의 안정 정권은 타이의 아유타야 왕조였으며, 캄보디아는 이 왕조에 침식당하여 마침내 앙코르를 버리고 프놈펜에 중심을 옮겨 완전히 힘을 잃었다.

말라카 해협에는 14세기 말에 말라카 왕국이 형성되어 동남아시아에서는 최초의 이슬람교국이 되었으나 얼마 못 가서 포르투갈에 멸망하였다.

15,16세기의 도서(島嶼) 지역은 통일이 결여된 시기여서 자바 북1부의 데마크나 수마트라 서북 연안의 아츄 등 항구가 번영하기 시작하였다.

아유타야 왕조[편집]

-王朝 Ayutthaya (1350

1767)

타이의 수코타이 왕조는 라마 캄행 대왕 사후 급속히 쇠퇴하였고 무튼의 토후(土侯)가 라마 티보디 1세를 칭하고 현 방콕 북쪽 아유타야를 도읍으로 하여 아유타야 왕조를 창건했다. 야유타야 왕조는 15세기의 카나트왕(재위 1448∼1488)의 치세시대에 정치적·경제적인 안정을 구가하고 그동안에 행정제도를 정비하여 다음 발전을 위한 기초를 닦아 갔다.

15세기에는 메남강(江) 중·하류 지역을 지배한 것 외에 캄보디아를 침략하여 영토를 넓혔고, 마침내 전제군주를 중심으로 관제(官制)를 정비하여 중앙집권 국가가 되었다.

왕실은 외국 무역을 독점하고 빈번하게 명(明)나라나 류큐(琉球)에 상선을 보냈다. 아유타야에는 중국 선반이나 포르투갈, 일본의 상선이 내항하여 번창했고 중국인이 이주하여 화교 사회가 형성되었다.

라마 티보디 1세[편집]

-世 Rama Thibodi Ⅰ (1312∼1369, 재위 1349∼1369)

타이의 아유타야 왕조의 창건자. 1347년경 수코타이 왕조의 속주(屬州) 우통을 영유하고 있다가 그 땅을 버리고 남쪽 메남강(江) 중의 한 섬에 아유타야 왕조의 새 도읍을 건설했다. 그는 1349년에 즉위하여 라마 티보디라 칭하였다. 왕은 수코타이 왕조의 쇠퇴를 틈타 그 영토를 잠식하고, 또 1352년에는 캄보디아의 쇠퇴를 틈타서 그 국도를 함락시켰다. 또한 탁월한 입법자로서 타이국(國) 최초의 법률 편찬자이기도 하다.

여 왕조(레 왕조) 베트남[편집]

黎王朝- (1428

1789)

여 왕조는 그 전기(前期)의 성종(聖宗) 치세(15세기 후반)가 최성기로서 중국의 당·송 시대를 모델로 하여 정비된 행정 지배가 실시되었다. 1418년 농민출신의 레러이(黎利)는 동지를 규합하여 명조지배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켜 명군을 완전히 국외로 축출하고 베트남 독립을 회복했다. 그리고 1428년 하노이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대월(大越)로 정하고 여 왕조(黎王朝)를 창시했다. 여 왕조는 군제, 지방제도, 재정제도를 잘 정비하고 명조(明朝)에도 사신을 보내어 책봉(冊封)을 받음으로써 내정·외교가 함께 안정되어 15세기 말에는 그 권세의 절정기를 맞게 되었다. 여 왕조 지배시대는 베트남의 예술이나 문학이 장려되어 개화한 시기이기도 했다. 물론 이들 분야에서 중국의 영향이 강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각각의 작품은 자유로움과 민족적 독자성이 두드러진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호적이 작성되고 농지가 균분(均分)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참파를 공격하여 수도를 함락했다. 참파는 이후 소수 민족(참인)으로서 명맥을 유지할 뿐이었다. 16세기가 되자 정권은 권신(權臣) 막등용(莫登庸)에게 빼앗겼고, 그 후 여 왕조는 명목만 남게 되었으며, 하노이의 정씨(鄭氏), 완씨(阮氏)의 두 세력이 베트남을 지배했다.

미얀마의 3국 정립[편집]

-三國鼎立

원의 정복활동은 아시아 각지의 내부에 큰 파문을 불러 일으켜서, 그 결과 몇몇 나라의 권력의 이동을 가져오는 역할을 하였다. 미얀마는 세 차례에 걸쳐 몽골의 공격을 받은 결과, 1287년 파간의 약탈로 인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입어 나라는 셋으로 나뉘었다. 즉 아바를 중심으로 하는 위쪽 미얀마 일대는 마침내 타이계의 샨인(人) 손에 떨어지고, 몬인(人)이 살고 있던 아래쪽 미얀마의 페구를 중심으로 하는 이라와디강 유역은 유명한 입법가였던 와레루왕의 지도 아래 독립국이 되었다.

또한 아래쪽 미얀마 북부의 퉁구를 중심으로 한 지방에는 버마인의 왕국이 탄생했다. 그 후 약 2세기 동안에 걸쳐 이들 3국의 정립상태가 계속되었다.

퉁구 왕조[편집]

-王朝 Toungu (1531

1752)

파간 왕조가 멸망한 다음 미얀마에는 샨인(人)의 아바, 버마인(人)의 퉁구, 몬인의 페구 등 3왕조가 병립했는데 퉁구 왕조가 강력해져서 미얀마를 재통일했다. 16세기 후반 바인나웅왕 때 현재의 미얀마 이외에 북부 타이까지 진출했으나, 후대 왕들의 동쪽의 타이를 겨냥한 확대정책이 미얀마, 타이 양국의 국력을 피폐시킨 결과를 낳게 되었다. 수도는 해안 지역의 고도(古都) 페구에 두었으며,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의 상인이 내왕하였다. 후에 수도는 아바로 옮겨졌고 해안 지역 몬인의 반란으로 멸망했다.

아바 왕조[편집]

-王朝 Ava (1365∼1555)

북부 미얀마의 아바를 서울로 삼고 일어난 샨족의 왕조. 버마인이 세운 파간 왕조에 대신하여, 샨족의 타도민뱌가 1365년 창건해서 남부 미얀마의 퉁구, 페구와 더불어 3국이 정립했다. 그후 버마인의 퉁구가 몬족의 페구를 병합하고, 다시 1555년 아바도 멸망시켰다. 샨족은 자기들의 왕조가 망하고 버마인의 왕조하에서도 버마인의 왕을 ‘아바의 금전(金殿) 주인’이라고 불렀다.

페구 왕조[편집]

-王朝 Pegu

미얀마의 이라와디강 하류의 삼각지대에 있었던 왕국 이름 또는 그 수도. 예부터 인도 사람이 많이 이주해 와서 불교문화와 힌두교 문화 전파의 요지로 이름이 높다. 옛날 이 지방에는 몬 민족이 다수 거주하여 역사상 그들의 활동의 중심지로 6세기경 건국했다고 하는데, 1044년 파간 왕조에게 정복되었고, 1287년 와레루왕 밑에서 독립했다. 16∼17세기 동안에는 퉁구 왕조의 수도로 번영했으나, 18세기에 알라웅파야 왕조에 정복되고, 미얀마 전쟁의 재화를 입었다. 1852년에는 영국령(領)의 한 주(州)가 되었으며, 도시 주변에는 아직도 사원(寺院)·불탑(佛塔) 등의 중요한 유적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