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인류 문화의 시작/제2기 문명/동지중해 민족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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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중해 민족의 활약〔槪說〕[편집]

시리아·팔레스티나 지방은 고도로 발전된 두 문명이 교차된 지역이며 또한 에게 문명, 소아시아의 문명도 이 지방에 영향을 주었다. 이 지방은 남북으로 평행하게 뻗어 나간 두 개의 산맥, 즉 레바논 산맥과 안티레바논 산맥에 의해 시리아 사막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는데, 사람들은 주로 동지중해 연안에 거주했다.역사 시대에 접어들자 시리아·팔레스티나 연안의 여러 도시는 교통의 중심을 이루어 재빨리 초기 왕조와 교역을 시작하였다. 레바논 삼목(杉木)은 건축 재료로서 가장 우수했기 때문에 메소포타미아의 아카드 왕조·우르 제3왕조·바빌론 제1왕조의 약탈 대상이 되기도 했다. 기원전 2000년대 초기의 오리엔트에 있어서의 민족 이동의 여파는 이 지방에도 현저한 영향을 주었다. 후르리·미탄니 왕국의 건설, 힉소스의 침입, 히타이트의 북시리아 지배, 그리고 이집트 신왕국의 시리아 진출,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통하여 이 지역은 항상 큰 나라의 침략 대상이 되었다. 알라라크는 히타이트에 정복되었다.우가리트는 기원전 1370

기원전 1360년경에 있었던 대지진에 의해 멸망됐다. 이렇게 해서 아마르나 시대를 맞이한 이 지역은 이집트나 히타이트의 보호 아래 비블로스 등의 무역항(貿易港)으로 번영했다.그러나 기원전 1200년경 해상민족의 습격에 의해서 히타이트는 멸망하고, 이집트는 지중해에 대한 제해권(制海權)을 빼앗기고 말았다. 때문에 페니키아라고 불렸던 시리아 연안의 서(西)셈계의 여러 도시는 공전의 번영을 이룩했다. 시돈, 티루스 등은 키프로스섬·크레타섬·아프리카 연안·에스파냐에까지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한편 기원전 2000년말부터 셈계의 아람인이 북시리아에 소국가를 세워 마침내는 시리아 전역을 아람화시켜 버렸다. 다시 셈계의 유목민의 종교적 집단이었던 이스라엘인이 가나안 지역에 침입하여 새로 습격해 온 필리스티네인과 싸워 다윗의 왕국이 형성되었다. 이와 같이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에서는 고도의 문명이 교차되었을 뿐 아니라 인종적으로도 서로 혼교가 심했다.

페니키아[편집]

Phoenicia

시리아 연안 지방 일대를 그리스 사람들은 페니키아라고 불렀다. 페니키아에는 셈계의 도시 국가가 건설되었다. 주요도시는 비블로스, 알라라크, 우가리트, 시돈, 티루스 등으로 정치적으로 통일된 적은 없이 도시동맹의 형태를 취하였으며, 일찍부터 해상무역을 하였다. 지리적으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가 만나는 지역에 위치해 두 지역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크레타 문명의 영향도 받았다. 기원전 3000년대에는 이집트와의 통상이 활발했지만, 기원전 2000년대에 민족이동의 영향으로 혼란기를 맞이하여 중반에는 소도시들이 많이 건설되었다. 이 시기에 오늘날의 알파벳의 원형이 된 페니키아문자가 형성되었다. 이집트의 지배하에 있었던 시기도 있었으나, 정치적 불안으로 지배력을 잃었다. 오리엔트 제국의 교역의 발달로 이집트를 대신한 페니키아의 여러 도시는 우가리트·비블로스 등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였다. 기원전 13세기에 에게해의 민족이동으로 모든 도시가 파괴되었으나, 티루스를 중심으로 부흥하여 각지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지중해교역을 독차지하였다. 특히 아프리카 북안(北岸)의 우티카·카르타고와 에스파냐의 가데스 등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동방문명을 서방에 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9세기경부터 아시리아가 강대해지면서 모든 도시는 점차 세력을 잃고, 기원전 6세기 중엽에는 신바빌로니아의 침입으로 티루스가 파괴되었다. 그후 페르시아의 속주(屬州)가 되어 페르시아전쟁에도 참가하였다. 마침내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정복되었다가 로마에 정복되어 속주가 되었다.

페니키아(가나안)인[편집]

-人

서(西)셈계의 언어를 쓰는 민족으로서 인종적으로는 혼혈되어 있다. 페니키아 여러 도시는 왕정(王政)으로서 왕은 왕가에 속하는 사람 중에 선출하였고 그 권력은 신관(神官)과 부유한 상인층의 제약을 받았다. 종교는 생산의 풍요를 기원하는 농경종교로 판테온 신전의 최고신 엘(El)과 예배의 대상인 바알(Ball) 등을 섬겼다. 페니키아인은 뛰어난 항해술로 홍해와 대서양에도 진출하여 남아라비아와 통상관계를 가졌으며, 기원전 7세기경에는 아프리카 일주 항해에도 성공하였다. 더불어 건축과 공예술도 발달하여 헤브라이인과 아랍인의 수도에 왕궁과 신전을 건설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해상교역의 발달로 원료를 수입하여 가공하는 공예품 제작이 발달되었고, 염색·목공·금속·유리·상아 등의 장식에도 뛰어났다. 특히, 상아와 나무의 세공품(細工品)은 페니키아의 특산물로 유명했다. 건축물과 조상(彫像) 등은 약탈과 파괴로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페니키아인의 우수한 항해무역의 영향으로 오리엔트와 지중해 연안 각지의 미술교류가 활발해졌다.

티루스[편집]

Tyrus

기원전 12세기부터 기원전 9세기까지 페니키아의 맹주(盟主)가 되어 해상무역의 이익을 독점했다. 기원전 950년경 아히람(Ahiram)왕은 솔로몬왕과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800년경 북아프리카에 식민시 카르타고(Cartha- go)를 구축했다.

카르타고[편집]

Carthago

티루스의 선원들이 무역과 정박 항구를 위해 북아프리카의 튀니스 근처에 건설한 고대 도시로 정치제도·언어·습관 등의 특징이 페니키아와 유사하다. 카르타고는 귀족 과두 정치의 지배를 받았는데, 귀족 중에는 대토지 소유자로서 농업발전에 노력하는 자와 해상상업에 종사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중 후자가 실권을 잡았다.처음에는 로마와는 우호적이어서 기원전 508년 및 348년에 동맹을 맺었으며, 280년 피로스 전쟁 때도 로마를 원조하였다. 그런데 로마의 세력이 확대되자, 카르타고와의 사이에 포에니전쟁이 일어나 기원전 146년에 한때 괴멸하였다. 처음에 로마는 카르타고의 회복을 불허하였으나, 잔존한 카르타고인은 융단·염료·보석·도기(陶器)·램프·철직(綴織)·재목·모피 등을 수출하여 농업기술을 발전시켰다. 카르타고의 비옥한 땅은 로마의 매력을 끌게 되어, 그라쿠스는 그곳에 식민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식민하여 속주(屬州) 아프리카의 중심지가 되었다. 로마 총독은 아프리카의 곡물 교역을 지배하였으므로 황제에게는 위협이 되었으며, 종종 반란도 일어났다. 문화의 중심지도 되었으며, 서유럽 크리스트교의 발전에도 공헌하였고, 이단(異端) 도나투스 파(派)에 대한 반대파의 아성이 되기도 하였다. 반달 왕국의 수도로서 1세기 이상 계속되었으나,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장군 벨리사리우스의 공격을 받아 콜로니아 유스티니아나 카르타고가 되었다가, 698년 이슬람교도의 침입을 받아 도시는 파괴되고,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페니키아 문자[편집]

-文字

기원전 18

기원전 16세기경의 시나이(Sinai)문자나 우가리트의 설형문자(楔形文字)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알파벳의 한가지로, 한자 한음을 나타내는 표음문자.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12세기경의 에히메렉 비문(碑文). 기원전 11세기에 이르러 페니키아의 식민·무역 활동으로 지중해 연안 지방에 전파되어 기원전 8세기 무렵에는 그리스 문자를 통해 라틴문자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이 문자는 모음을 갖고 있지 않지만 그리스인은 이에 모음을 덧붙여서 그리스 알파벳을 만들었다.

아람인[편집]

-人 Arameans

기원전 2000년 후반에 시리아에 침입한 셈계의 유목민족. 처음에는 유목생활을 하였으나, 민족대이동의 영향으로 시리아 북부지역에서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이동, 정착하여 이곳을 기점으로 상업민족으로서 사방으로 진출하였다. 이집트·히타이트·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지점에 있어 고대 오리엔트 무역을 좌우하는 상업도시국가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통일을 이루지는 못하여 아시리아에 멸망당했다. 멸망 후에도 아시리아·페르시아 제국간의 무역계에 진출하였기 때문에 아람어는 아시리아 시대에 이미 국제상업어로 통용되었고, 문자는 서아시아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아람어[편집]

-語

서(西)셈어의 한가지로 도자기 조각이나 특히 양피지에 알파벳으로 표기되어 있다. 오리엔트 전역에 걸쳐 상업 용어로서 사용되었으며, 페르시아 제국 치하에서 제4의 공용어로 되었다. 또한 그리스도도 이 언어를 썼다.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의 침입 이후 그리스어의 공용어화 정책에 따라 동서로 분리되었다. 동아람어로는 시리아어와 메소포타미아 방언이 속하.고, 서아람어는 구약성서에 쓰인 아람어나 사마리어 등이 포함된다. 특히 시리아어는 1세기 이후의 자료를 많이 내포한 언어이며, 풍부한 그리스도교 문헌을 낳아 고대 그리스 문헌을 전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아람 왕국[편집]

-王國

기원전 11세기 말부터 조바 뒤에 다마스쿠스(Damascus)를 수도로 하고 남시리아를 지배한 아람인(人)의 나라이다. 벤하다드 1세 시대(전 9세기)에 최성기를 맞이했다. 남은 이스라엘 왕국, 북은 아시리아와 접하고 있어 철이나 원료를 교역하는 대상로(隊商路)를 확보했다. 그 외에 북시리아에서는 히타이트 문화를 계승하여 아람인의 소국가(산무아르, 카르케미슈, 구사나)가 번영하다가, 기원전 8세기 말경에는 아시리아에 병합되었다.

프리지아 왕국[편집]

-王國 Phrygia

히타이트 신왕국이 멸망한 후 아나톨리아 고원에 건국한 인도 유럽계의 나라. 수도는 고르디언(Gordion)이다.전설에 의하면 고르디어스와 미다스라는 이름의 왕이 교대로 지배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원전 8세기의 기마민족(騎馬民族) 킴메리아인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출애굽의 사실[편집]

出埃及-史實

출애굽은 기원전 15세기에서 기원전 13세기 사이에 일어나, 기원전 13세기 후반에 소규모의 도시 국가로 조직된 셈 족이 사는 가나안에 침입한 사건으로 추측된다. 헤브라이인은 다른 농민을 비교적 쉽게 정복했으나, 방비를 갖춘 가나안의 각 도시에서는 강한 저항을 받았다. 그 도시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포위된 상태에서도 오래 존속했다.새로 온 헤브라이인은 가나안의 농경민과 접촉하여 급속히 유목민에서 정착 농경민으로 변해 갔다. 그러나 유목민 특유의 부족 제도는 그대로 남았으며, 이 부족들은 정복한 영토를 분할해서 지배하기 위한 기준을 만들었다.가나안 주민과의 투쟁과 공동 방어의 필요에서 이스라엘의 여러 부족들은 일시적으로 연합하여, 보다 큰 위험에 처하는 경우를 위해 임시의 지도자 제도를 택했다. 이 지도자가 이른바 사사(士師)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이스라엘인[편집]

-人 Israel

기원전 2000년 중엽부터 가나안에 침입하여 정착한 서셈계 유목인의 일파로, 엘신(神)을 중심으로 결성된 종교적 부족 동맹을 가리킨다. 그 후 가나안 남부에는 신(神) 여호와를 신앙하는 종교적 부족 동맹이 결성되어 여호와는 오랜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유일신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모세의 탈출[편집]

-脫出

『출애굽기』에 의하면 이집트의 왕자로 자라난 모세(Mse)는 자기가 이스라엘인임을 깨닫고 파라오(바로)의 압정(壓政) 아래에서 강제 노동에 종사하고 있던 이스라엘인을 지도하고 이집트에서 신이 약속한 가나안 지방으로 탈출하는 도중 시나이산에 이르러 여호와로부터 ‘모세의 10계(戒)’를 전수받았다는 것이다. 이 얘기가 사실이라면 모세의 탈출 시기는 기원전 13세기가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인은 일시로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농경·목축에 종사한 것이 아니라 서서히 가나안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여호와[편집]

Jhweh

유대교의 유일 절대신(絶對神). 남부 부족 연합의 신이었던 여호와는 다윗·솔로몬 왕국 시대에는 전 이스라엘의 주신(主神)으로 되어 바빌로니아의 유수(幽囚) 이후 오랜 정치적 곤란을 거쳐 유대교 교리가 확립됨에 따라 유일신으로서 다른 신의 존재를 거부하고, 교리나 계율에 위반되는 의례를 제거시켰다. 유일신의 사상은 그리스도교에 계승되었다.

다윗·솔로몬의 왕국[편집]

-王國

기원전 13세기에 가나안 남부에 침입하여, 철제 무기로 이스라엘인을 공격한 필리스티네인(Philistines)에 대항하기 위하여 예언자 사무엘의 성별(聖別)을 받아 기원전 11세기 말에 이스라엘 왕이 된 것은 사울(Saul)이었다. 그러나 그는 필리스티네인과 싸우다가 전사했다.사울 이후 남부의 유대족 출신 다윗(David, 전 1000

전 971, 다비드라고도 함)은 유대의 왕이 되어 여호와 앞에서 서약하고, 북부의 이스라엘 왕이 되어 남북 가나안을 처음으로 통일시켰다. 그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고 숙적인 필리스티네인을 격파하고 용병대(傭兵隊)를 채용하여 왕국을 강화했다.다윗의 아들 솔로몬(Solomon, 전 971

전 922)은 왕위 계승 쟁탈전에서 승리하여 왕이 되었다. 그는 티루스 왕 아히람과 동맹을 맺고 예루살렘에 ‘신의 상자’를 안치한 웅대한 신전과 왕궁을 세웠다. 홍해 연안에 항구를 만들어 해외무역을 하고 동(銅)을 제련하기도 했다.그 결과,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영화’라고 불리는 최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대토목공사라든가 군비의 확장으로 백성은 압박을 받았다.

예루살렘[편집]

Jerusalem

다윗 왕국의 수도로서, 솔로몬 시대에는 신전이 세워지고, 유대왕국 시대에도 수도였다.바빌로니아 유수(幽囚)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온 유대인은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1세의 지지 아래 ‘제2신전’을 건설하고 신앙의 성지로 삼았다. 프톨레마이우스 왕조시대에 유대교는 탄압을 받았으나, 매커비 전쟁에 의해 기원전 142년에 성지는 탈환되어, 허슈먼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스라엘 왕국[편집]

-王國(전 922

전 721)

솔로몬이 죽은 후에 북부 이스라엘 여러 부족을 거느리고 있었던 예로보암(Jeroboam)이 솔로몬의 아들 레호보암(Rehoboam)에 맞서 독립한 나라다.수도는 시켐(Sichem). 옴리(Omri) 왕조시대에 수도는 사마리아(Samaria)로 옮겼고, 예후 왕조시대에 아시리아 왕 사르곤 2세에 의해 정복되어, 상류계급은 식민화(植民化)되었다.

유대 왕국[편집]

-王國 (전 922

전 586)

이스라엘 왕국이 분리된 후 솔로몬의 후계자는 남부 유대(Judah)를 지배하였다. 수도는 예루살렘. 한때 아시리아에 복종. 여호수와(Joshua) 왕 시대에 신명기법(申命記法)이 발표되었다. 이어서 이집트 왕 네코에 패배하여 조공했는데, 신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2세에 의하여 멸망당했다.

바빌론 유수[편집]

-幽囚

이스라엘 민족의 유대인들이 신바빌로니아 왕국에 정복당했을 때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강제 이주되어 간 사건.기원전 601년 신바빌로니아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유대왕국에 침입하여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그후 기원전 597년에 유대왕은 결국 항복하고 귀족·성직자·중산계급 국민들과 함께 바빌론으로 연행되어 갔다.그 뒤 유대는 반독립국의 위치에 머물러 왕위는 제데키아가 계승했으나 반바빌로니아파에 가담했기 때문에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해 다시 예루살렘은 약탈당하고 모든 고대도시가 파괴되고 주민도 포로가 되었다. 도망가던 제데키아왕 또한 붙잡혀 바빌론으로 연행되었다. 당시 포로는 왕국 사회의 중심세력인 귀족·군인·공인(工人)이었다. 그후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왕 키루스 2세가 반포한 민족해방령으로 이들의 귀환은 허용되었다. 이들 포로들은 바빌론에서 종교적 자유는 허용되었지만, 예루살렘 신전에서와 같은 제의(祭儀)는 할 수 없었다.비록 국가 재건은 이루지 못했지만 예루살렘에 재건한 신전을 중심으로 유대교단이 성립하여 그후 그들을 유대인이라 부르게 되었다. 바빌론 유수는 이스라엘인들에게는 민족적 수치며 고난이었지만, 이 기간 동안의 정신적 고통은 오히려 민족의 일치를 강화했고, 신앙의 순화(純化), 부흥의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의 문화에 접하여 구약성서의 근간이 된 헤브라이의 여러 문서를 집성하였다.

예언자[편집]

豫言者

유대와 이스라엘 두 왕국의 대립. 빈부 차의 증대(채무 노예의 증가), 이교의 신(神)들에 대한 신앙에 대해 이사야(Isaiah), 예레미아(Jeremiah)와 같은 예언자가 몹시 비난하고, 여호와 신앙 밑에 이스라엘 민족은 굳게 뭉쳐야 함을 설득했다(전 8세기).그러나 그 설득도 보람없이 두 왕국은 아시리아와 신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유대교[편집]

Judea敎

유목시대의 사막의 백성, 이스라엘 여러 부족의 부족적 신앙, 모세의 신(神)과의 서약, 다윗·솔로몬 왕국에 있어서의 주신(主神) 여호와의 신앙, 바빌로니아 유수 이후의 유일신으로서의 여호와의 숭배, 이교도의 여러 신의 배제, 이와 같은 오랜 역사를 통하여 유대교가 형성되었다.페르시아를 제외한 다른 오리엔트의 전지역에서 다신교(多神敎)가 행해지고 있는 시대에 이스라엘에서는 일신교(一神敎)가 성립되었다. 유대교는 여호와와 이스라엘인과의 계약에 따라 천지와 인류의 창조자인 유일신 여호와를 모시는 종교로, 다른 모든 종교를 부 정하고 성서에 기록된 율법·의식·계율을 엄중히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종교이다. 율법에 위배되면 마침내 신의 노함을 사게 된다고 생각해 왔다.유대교의 중요한 교의(敎義)의 내용으로서 유일신, 유일신전주의, 선민사상(이스라엘인만이 은총을 입는다), 율법 준수주의, 제사 존중주의를 들 수 있다. 또한 우상 숭배의 금지, 주 1회의 휴일(토요일), 전 이스라엘인의 할례(割禮)를 규정하고 있다.

메시아(구세주)[편집]

Messiah(救世主)

유대 왕국이 멸망한 이후 바빌로니아인·페르시아인·그리스인·로마인의 지배에 고난을 당했던 유대인은 현세에 있어서의 신의 가호를 의심하여 종말관을 신봉했다.즉 인간이 지배하는 현세에 종말이 찾아오고, 이 때에 신에 의해 심판이 이루어져 신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계가 된다. 여호와를 신앙하고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만이 신의 나라의 백성이 되고, 신의 나라의 왕이 메시아라고 생각했다.

구약성서[편집]

舊約聖書

헤브라이어로 쓰여진 유대교의 성전(聖典). 여호와와 이스라엘인의 계약을 기록해 놓았다. 모세의 5서(율법)를 중심으로 제서(諸書)·예언서로 이루어진다. 신을 나타내는 데 여호와라고 표시하는 여호와 자료, 에로힘이라고 표시하는 에로힘 자료, 제사 자료, 역사 서술, 문학 작품 등이 편찬되었다.구약성서 중에는 천지창조, 노아의 방주(方舟), 바벨탑 등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구약성서는 그리스도교의 성전으로 인정을 받았다.